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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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는 이탈리아의 영화 감독으로, 1912년 이탈리아 페라라에서 태어나 2007년 로마에서 사망했다. 그는 볼로냐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영화 평론가로 활동하다가, 1940년 로마로 이주하여 영화 제작을 시작했다. 안토니오니는 네오리얼리즘 이후의 이탈리아 영화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로, 남녀 간의 사랑, 사회에서의 인간의 고독과 불안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만들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정사》(1960), 《밤》(1961), 《붉은 사막》(1964), 《욕망》(1966) 등이 있으며, 칸 영화제, 베를린 영화제, 베네치아 영화제 등에서 여러 차례 수상했다. 그는 또한 테오 앙겔로풀로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등 여러 영화 감독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1994년 아카데미 명예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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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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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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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912년 9월 29일 |
출생지 | 페라라, 이탈리아 왕국 |
사망일 | 2007년 7월 30일 |
사망지 | 로마, 이탈리아 |
직업 | 영화 감독 각본가 영화 편집자 작가 |
활동 기간 | 1942년–2004년 |
배우자 | 레티치아 발보니 (1942년–1954년, 이혼) 엔리카 피코 (1986년) |
파트너 | 모니카 비티 (1960년–1970년) |
학력 | |
학력 | 볼로냐 대학교 Centro Sperimentale di Cinematografia (중퇴) |
수상 | |
아카데미상 | 명예상 1994년: 영상 작가 중에서도 거장의 지위에 도달하는 한 사람임을 기리며 |
칸 국제 영화제 | 그랑프리 1967년 『욕망』 심사위원상 1960년 『정사』 심사위원 특별상 1962년 『태양은 외로워』 35주년 기념상 1982년 『어느 여인의 정체성』 |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 황금사자상 1964년 『붉은 사막』 은사자상 1955년 『여인들』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 1964년 『붉은 사막』 1995년 『구름 저편에』 명예 황금사자상 1983년 |
베를린 국제 영화제 | 황금곰상 1961년 『밤』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 1961년 『밤』 |
전미 영화 비평가 협회상 | 감독상 1966년 『욕망』 |
유럽 영화상 | 평생 공로상 1993년 |
기타 수상 | 영국 영화 협회 서덜랜드 트로피 1960년 『정사』 캔자스 시티 영화 비평가 협회상 감독상 1967년 『욕망』 외국어 영화상 1967년 『붉은 사막』 |
심사위원장 | |
심사위원장 | 제41회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1984년) |
주요 작품 | |
주요 작품 | 『정사』 (1960년) 『태양은 외로워』 『욕망』 (1966년) |
2. 생애
1912년 9월 29일, 페라라에서 태어났다. 볼로냐 대학교를 졸업한 후, 지역 신문에 영화 평론을 기고했다. 1940년, 로마로 이주했다. 치네치타에서 영화 제작을 배우고, 후에 안토니오니의 작품에 참여할 몇몇 영화 기술자들을 만났다. 1942년,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그리스 귀환』의 각본을 집필했으며, 마르셀 카르네의 『악마가 밤에 온다』에서 조감독을 맡았다.[14]
2. 1. 초기 생애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는 에밀리아로마냐 주 페라라의 유복한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엘리자베타(옛 성씨: 론칼리)와 이스마엘 안토니오니였다. 어린 시절 안토니오니는 그림과 음악을 좋아했다. 그는 어린 바이올리니스트로, 아홉 살 때 첫 콘서트를 열었다. 십 대에 영화를 발견하면서 바이올린을 포기했지만, 그림은 평생의 열정으로 남았다. 그는 볼로냐 대학교에서 경제학 학위를 취득한 후, 1935년 페라라 신문 ''일 코리에레 파다노''에서 영화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기 시작했다.1940년 안토니오니는 로마로 이주하여 비토리오 무솔리니가 편집한 공식 이탈리아 파시즘 영화 잡지 ''치네마''에서 일했다. 그러나 안토니오니는 몇 달 후에 해고되었다. 그해 말, 그는 영화 기술을 배우기 위해 치네마토그래피 실험 센터에 입학했지만 3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그는 이후 군대에 징집되었고, 이탈리아 레지스탕스의 일원으로서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살아남았다.
2. 2. 영화 경력
2. 2. 1. 초기 영화 작업
1942년, 안토니오니는 로베르토 로셀리니와 공동으로 ''어느 비행사의 귀환''의 각본을 썼고, 엔리코 풀치뇨니의 ''두 포스카리''에서 조감독으로 일했다. 1943년, 그는 마르셀 카르네의 ''밤의 방문객들''을 돕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갔고, 포 계곡의 가난한 어부들의 이야기를 담은 단편 영화 ''포의 사람들''(1943)을 시작했다. 로마가 연합군에 의해 해방되었을 때, 영화 필름은 파시스트 "살로 공화국"으로 옮겨졌고 1947년까지 복구 및 편집될 수 없었다. 전체 분량의 필름은 결코 회수되지 못했다. 이 영화들은 네오리얼리즘 스타일의 노동자 계층의 삶을 다룬 세미 다큐멘터리 연구였다.그러나 안토니오니의 첫 장편 영화 ''사랑의 연대기''(''Cronaca di un amore'', 1950)는 중산층을 묘사함으로써 네오리얼리즘에서 벗어났다. 그는 일련의 다른 영화에서 계속해서 이를 시도했다: 각기 다른 국가(프랑스, 이탈리아, 영국)를 배경으로 한 3개의 이야기로 구성된 ''패배자들''(''I vinti'', 1952), 청소년 비행에 관한 이야기; 젊은 영화 스타와 그녀의 몰락을 그린 ''카멜리아 없는 여인''(''La signora senza camelie'', 1953); 그리고 토리노의 중산층 여성들에 관한 ''여성들''(''Le amiche'', 1955). ''절규''(''Il grido'', 1957)는 공장 노동자와 그의 딸을 묘사하며 노동자 계층의 이야기로의 회귀였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사회적 소외에 관한 것이다.
2. 2. 2. 국제적 인정
《친구들》(1955)에서 안토니오니는 급진적인 새로운 스타일을 실험했는데, 전통적인 내러티브 대신 겉보기에 무관한 사건들을 제시하고, 롱 테이크를 그의 스타일의 일부로 사용했다. 안토니오니는 그의 첫 번째 국제적인 성공을 거둔 《정사》(1960)에서 이 기법을 다시 사용했다. 1960년 칸 영화제에서 그는 환호와 야유가 섞인 반응을 받았지만, 심사위원상을 수상했고, 전 세계의 예술 영화관에서 인기를 얻었다. 잔 모로와 마르첼로 마스트로야니가 출연한 《밤》(1961)과 알랭 드롱과 모니카 비티가 출연한 《적의》(1962)가 《정사》에 이어 제작되었다. 이 세 편의 영화는 종종 삼부작으로 불린다. 《밤》은 제11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했다. 그의 첫 번째 컬러 영화인 《그 후 안토니오니는 프로듀서 카를로 폰티와 계약을 맺어 MGM에서 개봉할 영어 영화 3편에 대한 예술적 자유를 얻었다. 첫 번째 영화인 《현상》(1966)은 국제적으로 비평과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으며, 1967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스윙잉 런던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데이비드 헴밍스가 패션 사진가로 출연했으며, 아르헨티나-프랑스 작가 훌리오 코르타사르의 단편 소설을 느슨하게 기반으로 했다. 두 번째 영화인 《자브리스키 포인트》(1970)는 미국을 배경으로 반문화를 다루었다. 사운드트랙에는 핑크 플로이드, 그레이트풀 데드, 롤링 스톤스의 음악이 수록되었다. 그러나 《자브리스키 포인트》는 비평과 상업 모두에서 실패했고, "천재 감독이 만든 최악의 영화"로 불리기도 했다.[1] 세 번째 영화인 잭 니콜슨과 마리아 슈나이더가 출연한 《
1972년, 안토니오니는 중국으로 초청받아 문화 대혁명의 성과를 촬영했다.[5] 그 결과물인 다큐멘터리 《중국》은 중국 당국으로부터 "반중"적이고 "반공"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6] 이 영화는 2004년 11월 25일 베이징에서 처음 상영되었으며, 베이징 영화 학원에서 안토니오니의 작품을 기리는 영화제를 개최했다. 이 영화는 현재 중국 관객, 특히 문화 대혁명 시대를 겪은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5]
2. 2. 3. 후기 경력
wikitext1980년, 안토니오니는 장 콕토의 희곡 L'Aigle à deux têtes (두 개의 머리 달린 독수리)를 바탕으로 한 영화 ''Il mistero di Oberwald''(오베르발트의 미스터리)를 연출했다. 모니카 비티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전자 처리를 통한 색상 강화에 대한 실험적인 접근 방식을 탐구하는데, 이 과정은 처음에 비디오로 촬영한 후, 후반 작업 중에 35mm 필름으로 전송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1982년 이탈리아에서 촬영된 영화 ''Identificazione di una donna''(여자의 정체)는 그의 이탈리아 3부작에서 발견되는 주제들을 탐구한다. 1985년, 안토니오니는 실어증과 부분적인 마비를 남기는 뇌졸중을 겪었다. 말하거나 글을 쓸 수 없는 상태에서도 안토니오니는 영화 연출을 계속했으며, 빔 벤더스가 여러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백업 감독으로 고용된 ''구름 저편''(1995)이 그 예시이다. 벤더스는 "그 외 다른 사람이 없었다면, 그의 영화는 보험을 찾지 못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편집 과정에서 안토니오니는 벤더스가 촬영한 거의 모든 자료를 거부하고 몇몇 짧은 삽입 부분만 남겼다. 그들은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싸이클로''와 함께 국제 영화 비평가 연맹상을 공동 수상했다.
1994년, 그는 "영화의 마스터 시각 스타일리스트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아" 명예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잭 니콜슨이 그에게 수여한 이 트로피는 나중에 도둑에 의해 도난당해 교체되어야 했다. 앞서 안토니오니는 ''Blowup''(1967)으로 아카데미 감독상과 각본상 후보에 올랐다.
안토니오니의 마지막 영화는 90대에 연출한 옴니버스 영화 ''에로스''(2004)의 한 부분으로, ''Il filo pericoloso delle cose'' (사물의 위험한 실)라는 제목의 단편 영화였다. 이 단편 영화의 에피소드는 안토니오니가 그린 일련의 수수께끼 같은 그림, 협소한 길과 낡은 석조 다리를 통과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고급 스포츠카, 해변에서 수수께끼 같은 안무를 하는 비키니 차림의 여성, 카에타누 벨루주가 작곡하고 부른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라는 노래로 구성되어 있다. 이 영화는 국제적으로 호평을 받지 못했다. 미국에서 로저 이버트는 이 영화가 에로틱하지도, 에로티시즘에 관한 것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 영화의 미국 DVD 출시에는 2004년 안토니오니의 또 다른 단편 영화인 ''Lo sguardo di Michelangelo'' (미켈란젤로의 시선)이 포함되어 있다.
안토니오니는 2007년 7월 30일 로마에서 94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이는 유명한 스웨덴 감독 잉마르 베르히만이 사망한 날과 같다.[7] 안토니오니는 로마 시청에 안치되었고, 대형 스크린에서는 그의 영화 세트와 비하인드 스토리가 흑백 영상으로 상영되었다. 그는 2007년 8월 2일 고향 페라라에 묻혔다.
2. 3. 사생활
1942년 레티치아 발보니와 결혼했지만, 1954년에 이혼했다. 1986년에는 《어떤 여인의 증언》에 출연한 엔리카 안토니오니와 재혼하여 생애를 함께 했다.3. 작품 세계
페데리코 펠리니나 루키노 비스콘티 등과 함께, 네오리얼리즘 이후의 이탈리아 영화를 대표하는 영화 감독으로 알려져 있다. 남녀 간의 사랑의 무의미함,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불안과 고독 등을 그린 작품이 많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영국, 미국, 중국과 같은 국외를 무대로 한 작품도 제작했다.
테오 앙겔로풀로스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등 수많은 영화 감독에게 영향을 주었다. 장 뤽 고다르는 『JLG/자화상』(1995년)에서 "스스로 영화가 된다"라며, 장 비고와 함께 안토니오니의 이름을 언급했다.
브라질의 뮤지션 카에타노 벨로주의 앨범 『노이치스 도 노르치』(2000년)에는 안토니오니에게 헌정된 곡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가 수록되었으며[15], 이 곡은 안토니오니가 옴니버스 영화 『사랑의 신, 에로스』에 제공한 단편 영화 『에로스의 유혹 - 위험한 길』의 사운드트랙에서도 사용되었다[16]。
3. 1. 주제와 스타일
평론가 리처드 브로디는 안토니오니를 "영화의 전형적인 모더니스트"이자 "위대한 화가 중 한 명"으로 묘사하며, "그의 이미지는 차가운 매력으로 그를 매료시킨 추상화를 반영한다"고 말했다.[9] 그의 영화는 이미지와 디자인을 중시하고, 행동보다는 사색을 선호하는 특징을 보인다. 영국 영화 협회의 스티븐 달턴은 안토니오니의 시각적 특징으로 "극도로 롱 테이크, 인상적인 현대 건축, 회화적인 색상 사용, [그리고] 텅 빈 풍경 속에 표류하는 작은 인간 형상"을 언급하며, 초현실주의 화가 조르조 데 키리코의 "텅 빈 도시의 몽상"과의 유사성을 언급했다.[10]안토니오니는 후기 작품, 특히 첫 컬러 영화인 ''붉은 사막''에서 색상을 중요한 표현 요소로 활용했다. 그는 "공장조차 아름다울 수 있는 세상의 시"를 번역하고자 했으며, "공장과 굴뚝의 선과 곡선은 우리가 이미 너무 익숙하게 보고 있는 나무의 윤곽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다"고 말했다.[8]
안토니오니의 플롯은 실험적이고 모호하며, 종종 권태를 느끼거나 절망에 빠진 중산층 인물들을 등장시켰다.[10] 영화 역사학자 데이비드 보드웰은 그의 영화에서 "휴가, 파티, 예술적 추구는 캐릭터의 목적과 감정의 부재를 숨기려는 헛된 노력"이라고 지적했다. 성행위는 우연한 유혹으로 그려지며, 사업은 부의 추구로 축소된다. 뉴요커는 안토니오니가 "물질에서 추상으로, 사물에서 이미지로,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개인의 정체성과 자기 인식의 위기로 이동하는 새로운 부르주아 사회를 포착했다"고 평가했다.[11]
안토니오니의 세계관은 비종교적 마르크스주의자이자 실존주의 지식인으로 묘사된다. 그는 이성과 과학의 현대 시대에도 인류는 경직된 도덕성에 얽매여 있다고 비판했다. 평론가 롤랑 바르트는 안토니오니의 접근 방식은 "세상을 갈망하고 이미 그 일부가 되기를 원하는 유토피아주의자의 방식"이라고 주장했다.[12]
페데리코 펠리니나 루키노 비스콘티 등과 함께, 네오리얼리즘 이후의 이탈리아 영화를 대표하는 영화 감독으로, 남녀 간의 사랑의 무의미함,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불안과 고독 등을 주로 다루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영국, 미국, 중국과 같은 국외를 무대로 한 작품도 제작했다.
테오 앙겔로풀로스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등 수많은 영화 감독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장 뤽 고다르는 장 비고와 함께 안토니오니를 "스스로 영화가 된다"고 언급했다. 브라질의 뮤지션 카에타노 벨로주는 안토니오니에게 헌정된 곡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를 발표하기도 했다.[15][16]
3. 2. 영향
보드웰은 안토니오니가 예술 영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하며, "다른 어떤 감독보다도 영화 제작자들이 타원형의 열린 내러티브를 탐구하도록 장려했다"고 평가한다. ''가디언''은 그를 "본질적으로, 특별한 시퀀스의 감독"이라고 묘사하며, 그의 중요성이 형식적인 측면으로 전달된다고 설명한다.[13]구로사와 아키라는 안토니오니를 가장 흥미로운 영화 제작자 중 한 명으로 여겼으며, 스탠리 큐브릭은 ''밤''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 10편 중 하나로 꼽았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안토니오니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장뤼크 고다르는 그를 현대 영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영화 제작자로 평가했다. 빔 벤더스는 안토니오니를 거장으로 여겨 ''구름 저편에''를 함께 감독하기도 했다. 미클로시 얀초는 안토니오니를 자신의 스승으로 여긴다. 마틴 스코세지는 안토니오니의 영화들이 "우리가 누구인지, 서로에게, 우리 자신에게, 시간에 대해 무엇인지에 대한 미스터리, 아니 오히려 미스터리를 제기했다"고 말했다.[10]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와 브라이언 드 팔마도 안토니오니에게 경의를 표했다.[10]
잉마르 베르히만은 ''욕망''과 ''밤''을 걸작으로 여기면서도, 다른 영화들은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오손 웰스는 안토니오니의 롱 테이크 사용에 대해 "어떤 것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비판적인 견해를 드러냈다. 반면, 피터 웰러는 안토니오니를 "현대 시대의 연인들 사이의 공허함의 현실, 그 사이의 공간을 가로지르는 어려움에 대해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최초의 사람"이라고 평가하며 그의 영화와 영화에 대한 공헌을 숭배한다고 말했다.
페데리코 펠리니나 루키노 비스콘티 등과 함께, 네오리얼리즘 이후의 이탈리아 영화를 대표하는 영화 감독으로 알려져 있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영국, 미국, 중국과 같은 국외를 무대로 한 작품도 제작했다.
테오 앙겔로풀로스 등 수많은 영화 감독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장 뤽 고다르는 『JLG/자화상』(1995년)에서 장 비고와 함께 안토니오니를 언급하며 "스스로 영화가 된다"라고 표현했다.
브라질의 뮤지션 카에타노 벨로주의 앨범 『노이치스 도 노르치』(2000년)에는 안토니오니에게 헌정된 곡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가 수록되었으며,[15] 이 곡은 안토니오니가 옴니버스 영화 『사랑의 신, 에로스』에 제공한 단편 영화 『에로스의 유혹 - 위험한 길』의 사운드트랙에서도 사용되었다[16]。
4. 작품 목록
단편 "위험한 관계"
"Il Filo Pericoloso delle Cose"
"The Dangerous Thread of Things"
단편 "오디션"
"Il Provino"
"The Audition"
단편 "사랑에 빠졌을 때"
"Tentato Suicido"
"When Love Fail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