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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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민영찬은 여흥 민씨 세도가의 후손으로, 민겸호의 아들이자 민영환의 동생이다. 그는 1889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890년 과거 알성시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했다. 이후 한성은행 부은행장을 거쳐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특파대사, 1902년 주 프랑스 공사 등을 역임하며 외교 활동을 펼쳤다. 을사늑약 체결 후 고종의 무효 서신을 해외에 전달했으나, 친일파에게 토지를 강탈당한 후 일제에 협력하여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그는 친일 행적으로 인해 친일파 708인 명단,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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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정로는 서울 서대문구 아현삼거리에서 서대문역을 잇는 도로로, 민영환의 시호에서 유래되었으며 일제강점기 다케조에마치로 불렸다가 1946년 현재 이름으로 변경, 1984년 도로 구간 단축, 2010년 2개 이상 자치구 도로 고시, 2014년 버스전용차로 개통 등의 변화를 거쳤다. - 민영환 - 민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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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렬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의 무관이자 관료로, 흥선대원군에 의해 발탁되어 무관으로 출사, 동학 농민 운동 토벌과 도적 소탕에 공을 세웠으며, 대한제국 육군 참장과 자헌대부를 지냈고, 일제강점기에는 작위를 거절한 인물이다. - 여주시 출신 - 이범관 (1943년)
이범관은 대한민국의 법조인 출신 정치인으로, 검사로서 주요 요직을 거쳐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제18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이천오층석탑 환수 문제 관련 발언으로 논란을 빚었다. - 여주시 출신 - 임화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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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영찬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 |
| 한글 이름 | 민영찬 |
| 한자 이름 | 閔泳瓚 |
| 로마자 표기 | Min Yeongchan |
| 한글 자 | 국보 |
| 한자 자 | 國寶 |
| 로마자 표기 자 | Gukbo |
| 공직 정보 | |
| 직책 | 조선국 홍문관 주서 |
| 임기 | 1891년 12월 15일 ~ 1894년 5월 23일 |
| 군주 | 조선 고종 이형 |
| 경력 | 프랑스 주재 대한제국 공사 벨기에 주재 대한제국 공사 |
| 직책2 |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
| 임기2 | 1911년 10월 1일 ~ 1918년 10월 1일 |
| 군주2 | 무쓰히토 일본 군주 요시히토 일본 군주 |
| 총독2 |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 주재 일본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 조선 주재 일본 총독 |
| 개인 정보 | |
| 출생일 | 1873년 12월 3일 |
| 본관 | 여흥(驪興) |
| 부모 | 민겸호(부), 서씨 부인(모) |
| 출생지 | 조선 경기도 여주 |
| 사망일 | 1948년 11월 16일 |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 군 복무 | 대한제국 육군 참장 전역 |
| 종교 | 유교(성리학) |
| 자녀 | 아들 민홍식(閔弘植) |
| 배우자 | 사별 초배 금천 강씨 부인(衿川 姜氏 夫人) 재혼 계배 후메이리(胡美梨) |
| 정당 정보 | |
| 정당 | 무소속 |
2. 생애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당시 프랑스 공사였던 민영찬은 고종의 을사조약 무효 서신을 해외에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8] 그러나 귀국 후에는 친일파 송병준에게 민영환 명의의 토지를 강탈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8] 이후 일제에 협력하여 중추원 참의를 지냈으며, 1922년 7월에는 아들 민홍식이 화류계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자 아들을 고소하기도 했다.[9]
태평양 전쟁 종전 후, 민영찬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를 받았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1949년 반민특위 조사에서 민영찬은 "민영환 사후 편모만 남아 있어 망명이 어려웠고, 회유에 따라 중추원에 참가했으나 회의에서 발언이나 건의를 한 적은 없고, 가산을 탕진해 중국으로 도피하느라 오래 활동하지 못했다"고 해명했다. 반민특위는 이러한 상황을 참작하여 불기소 의견을 냈다.
2. 1. 가계와 초기 활동
여흥 민씨 세도가의 실세였다가 임오군란 때 피살된 민겸호의 차남으로, 민영환이 그의 형이다. 고종의 생모이자 흥선대원군의 처 여흥부대부인 민씨는 그의 고모이다. 둘째 큰아버지인 민승호가 명성황후의 아버지인 민치록에게 입적되었기에 민영환과 민영찬 형제를 명성황후의 조카로 오인하기도 하지만, 입적이란 친부모 형제와의 법적 관계가 절연되는 것이기에 민승호가 명성황후의 양오빠가 되었어도 명성황후와 이들 형제의 관계는 여전히 13촌 먼 친척에 불과하다.한 살 차이로 같은 또래인 순종 이척 등과 어릴 때 함께 공부한 그는, 1889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890년 과거 알성시에 합격해 홍문관에서 관직을 시작해 요직에 근무했다. 1897년에는 한성은행 총무부 차장을 거쳐 같은 해 한성은행 부은행장에 초고속 진급 임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1898년 "역관 김홍륙의 독다 커피 관련 음모 조작 사건 최고 배후 수괴"로써 훗날 대한제국 법관양성소 출신 한성재판소 판사 함태영(훗날 대한민국 심계원장·대한민국 부통령 역임)에게 "대한제국 민본주의 황실과 고종·순종 부자를 사실상 핍박하고자 상궁들에게 독다 커피를 뿌리고 증거 불태우고자 그들 상궁들도 참살하는 등 공공연히 고종·순종 부자를 협박 모해하고 김홍륙 역관으로 하여금 음해로써 독다 암살 음모 사건 날조한 역모 수괴"라는 일갈 및 통박(비판)을 받았다.[8]
1900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특파대사로 파견되었고 1902년 주프랑스 공사에 임명되었다. 1903년 스위스에서 열린 적십자회의에도 참가하는 등 외교 분야에서 주로 활동했다. 1904년 육군 참장에 오르고, 1905년 훈1등에 서훈되었다.
독립협회에서 민영찬은 선호하는 정치인이었다. 그가 학부 차관으로 임명되었을 때, 서재필은 그를 해외 경험이 풍부한 유능한 관리로 평가했다.[3]
민영찬은 1873년 12월 3일 여흥 민씨 가문 출신으로, 민겸호와 서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민영환의 동생이었다.[2] 민씨 가문은 왕실과의 인연으로 크게 번성하고 권력을 얻었다. 이 때문에 민영찬은 미래의 순종과 함께 공부하며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부인으로는 한국인 강씨(姜氏)와 중국인 호씨(胡氏)가 있었다.[10] 영국인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가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민영찬의 딸을 그린 것으로 알려진 그림 〈민씨가의 규수〉(1938)가 남아 있다.[11]
2. 2. 대한제국 시기 외교 활동
1900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특파대사로 파견되었고, 1902년 주프랑스 공사에 임명되었다.[8] 1903년 스위스에서 열린 적십자회의에도 참가하는 등 외교 분야에서 주로 활동했다. 1904년 육군 참장에 오르고, 1905년 훈1등에 서훈되었다.[8]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프랑스에서 공사로 일하고 있던 그는 고종의 을사조약이 무효라는 서신을 해외에 전달하는 일을 맡았다.[8]
2. 3. 친일 행적과 말년
임오군란 때 피살된 민겸호의 차남이자 민영환의 동생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프랑스 공사로 있던 그는 고종의 을사조약 무효 서신을 해외에 전달했다. 그러나 귀국 후 친일파 송병준에게 민영환 명의의 토지를 강탈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8] 이후 일제에 협력하여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1922년 7월경, 아들 민홍식이 화류계에 출입하고 토지를 함부로 매각하는 등 가산을 탕진하자 아들을 고소하기도 하였다.[9]태평양 전쟁 종전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서 조사를 받았으며,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1949년 반민특위 조사 당시, 민영찬은 "민영환 사후 편모만 남아 있어 망명이 어려웠고, 회유에 따라 중추원에 참가했으나 회의에서 발언이나 건의를 한 적은 없고, 가산을 탕진해 중국으로 도피하느라 오래 활동하지 못했다"고 답변했다. 이에 반민특위는 부득이한 상황으로 판단하여 불기소 의견서를 냈다.
민영찬은 식민지 시대에 일본을 위해 활동한 혐의로 일제강점기 친일파로 분류된다.[2]
3. 가족 관계
| 관계 | 이름 | 비고 |
|---|---|---|
| 고조부 | 민백분(閔百奮) | |
| 증조부 | 민기현(閔耆顯) | |
| 할아버지 | 민치록(閔致祿) | |
| 큰아버지 | 민승호(閔升鎬) | |
| 아버지 | 민겸호(閔謙鎬) | 1838년 - 1882년 6월 10일 |
| 어머니 | 달성 서씨(達城 徐氏) | 1837년 - 1885년, 정경부인 |
| 고모 | 여흥 민씨 순목부대부인 | 1818년 2월 3일 - 1898년 1월 8일 |
| 외삼촌 |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 1820년 1월 24일 - 1898년 2월 22일 |
| 사촌 | 이재면(興親王 李載冕) | 1845년 8월 22일 - 1912년 9월 9일 |
| 사촌 | 대한제국 고종 | 1852년 9월 8일 - 1919년 1월 21일 |
| 형 | 민영환(閔泳煥) | 1861년 8월 7일 - 1905년 11월 30일, 민태호(閔泰鎬)에게 입적 |
| 여동생 | 민씨 부인 | 1876년 - ? |
| 초배 부인 | 금천 강씨(衿川 姜氏)[5] | 한국 출생 |
| 아들 | 민준식 | 1893년 - 1933년 |
| 며느리 | 윤씨 부인 | 1892년 - 1947년 |
| 양손자 | 민병익 | 1917년 - ?, 민홍식의 아들 |
| 아들 | 민홍식(閔弘植) | 1895년 - 1956년 |
| 며느리 | 창원 황씨(昌原 黃氏) | 1894년 12월 5일 - 1914년 5월 22일, 민홍식의 첫 번째 부인 |
| 며느리 | 이씨 부인 | 1897년 - ? |
| 손자 | 민병익(閔丙益) | 1917년 - ? |
| 손녀 | 민씨 부인 | 1920년 - ? |
| 딸 | 민씨 부인[6][7] | 1901년 - ? |
| 사위 | 서정식 | 1901년 - ? |
| 손녀 | 서씨 부인 | |
| 계배 부인 | 후메이리(胡美梨) | 중국 출생 |
4. 평가
민영찬은 일제강점기 친일파로 분류된다는 비판을 받는다.[2]
4. 1. 비판
민영찬은 식민지 시대에 일본을 위해 활동한 혐의로 일제강점기 친일파로 분류된다.[2]참조
[1]
웹사이트
민영찬
https://terms.naver.[...]
2019-05-24
[2]
웹사이트
민영찬(閔泳瓚)
http://encykorea.aks[...]
2023-01-23
[3]
뉴스
새로 학부 협판 민영찬씨 이왕에 미국 가셔 공부도,새로 한 학부 협판 민영찬씨는 이왕에 미국 가서 공부도
https://nl.go.kr/new[...]
1896-12-26
[4]
웹사이트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
2022-04-23
[5]
문서
In the jokbo records, it states that Lady Yi (이씨; 1872-1951) is the wife instead of Lady Kang.
[6]
문서
A painting known as Min Yeong-chan's daughter, whose name is unknown, was done by [[Elizabeth Keith]], a Scottish artist. It survived the turbulent eras of Korea in which the family now preserves it and is known as ''〈The Min Family's Sister〉'' ''(1938)'' (〈민씨가의 규수〉 (1938))
[7]
웹사이트
신부 행렬 쫓다가 물에 빠진 화가 '기덕'
https://www.ohmynews[...]
2023-07-19
[8]
뉴스
"부평땅은 송병준이 1925년에 판 땅" - 전우용 박사, "민영환 소유 땅 송병준이 '강탈' 의혹" 자료공개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8-06-05
[9]
뉴스
乃夫가乃子를告訴
http://dna.naver.com[...]
동아일보
1922-07-27
[10]
뉴스
괴이한 온돌의 폭발
http://dna.naver.com[...]
동아일보
1921-04-20
[11]
뉴스
푸른 눈에 비친 옛 한국, 엘리자베스 키스 전시회 ② - 신부 행렬 쫓다가 물에 빠진 화가 '기덕'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8-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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