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비우스 다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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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밀비우스 다리 전투는 312년 10월 콘스탄티누스 1세와 막센티우스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콘스탄티누스는 전투 전날 밤 환시를 보고 기독교 신의 보호 아래 싸웠다고 전해지며, 락탄티우스와 유세비우스의 기록에 따라 환시의 세부 내용에 차이가 있다. 전투 결과 콘스탄티누스가 승리하여 서로마 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얻었으며, 기독교가 로마 제국에서 공인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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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비우스 다리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개요 | |
전투 | 밀비우스 다리 전투 |
부분 | 4두 정치 시대의 내전 |
![]() | |
날짜 | 312년 10월 28일 |
장소 | 폰테 밀비오, 로마 |
결과 | 콘스탄티누스 승리 |
관련 전투 | |
교전 세력 | |
교전 1 | 콘스탄티누스 군대 |
교전 2 | 막센티우스 군대 |
지휘관 및 병력 | |
지휘관 1 | 콘스탄티누스 1세 |
지휘관 2 | 막센티우스 |
병력 1 | 불명 |
병력 2 | 프레토리아니 |
규모 1 | 20,000–25,000Cowen, p. 77 |
규모 2 | 25,000Cowen, p. 77 |
피해 규모 | |
피해 1 | 불명 |
피해 2 | 심각함 |
2. 역사적 배경
밀비우스 다리 전투의 근본 원인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만든 사두정치 체제의 내재적 경쟁 관계에 있었다.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퇴위한 후, 후계자들은 로마 제국의 지배권을 놓고 다투기 시작했다.
콘스탄티우스의 아들 콘스탄티누스는 306년 아버지 사후 에보라쿰(요크)에서 황제로 선포되었다. 같은 해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는 로마에서 황제를 선언했다. 콘스탄티누스는 갈레리우스에게 황제로 인정받았지만, 막센티우스는 찬탈자로 취급되었다.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는 파우스타와의 결혼으로 처남 매부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강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312년 봄,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를 몰아내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북부로 진격, 토리노와 베로나 전투에서 승리했다. 베로나 전투에서는 막센티우스의 최고위 장군 루리키우스 폼페이아누스가 전사했다.[8]
2. 1. 사두정치의 붕괴와 권력 투쟁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도입한 사두정치는 본질적으로 경쟁적인 관계를 내포하고 있었다. 305년 5월 1일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퇴위한 후, 그의 후계자들은 거의 즉시 로마 제국의 지배권을 놓고 다투기 시작했다. 비록 콘스탄티누스는 서방 황제 콘스탄티우스의 아들이었지만, 사두정치 체제는 세습을 보장하지 않았다. 306년 7월 25일 콘스탄티우스가 사망하자, 그의 군대는 에보라쿰(요크)에서 콘스탄티누스를 아우구스투스로 선포했다. 로마에서는 콘스탄티우스의 동료 황제였던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가 유력한 황제 후보였으며, 그는 306년 10월 28일에 황제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의 황제 즉위는 동방 속주의 통치자이자 제국 내 최고 황제인 갈레리우스에게 인정받았지만, 막센티우스는 찬탈자로 취급받았다. 갈레리우스는 콘스탄티누스를 카이사르라는 낮은 황제 직위로 인정했다. 갈레리우스는 307년 초에 공동 아우구스투스인 세베루스에게 막센티우스를 진압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세베루스가 이탈리아에 도착하자 그의 군대는 막센티우스에게 투항했다. 세베루스는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처형되었다. 갈레리우스 자신도 가을에 로마로 진격했지만, 도시를 점령하는 데 실패했다.[4] 콘스탄티누스는 이 기간 대부분 동안 막센티우스와 동방 황제들과의 충돌을 피했다.[5]그러나 312년까지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는 서로에게 강한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는데, 콘스탄티누스가 막센티우스의 누이인 파우스타와 결혼하여 처남 매부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했다. 312년 봄, 콘스탄티누스는 약 4만 명의 군대를 모아 막센티우스를 몰아내기로 결심했다.[7] 그는 북부 이탈리아를 쉽게 장악하여 토리노 근처와 베로나에서 두 번의 주요 전투에서 승리했다. 베로나 전투에서는 막센티우스의 최고위 장군인 프라이토리아니 지휘관 루리키우스 폼페이아누스가 사망했다.[8]
2. 2. 이탈리아 침공과 전투의 발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두정치는 본질적으로 경쟁 관계를 내포하고 있었는데, 이는 밀비우스 다리 전투의 근본 원인이 되었다. 305년 5월 1일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퇴위한 후, 그의 후계자들은 거의 즉시 로마 제국의 지배권을 놓고 다투기 시작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서방 황제인 콘스탄티우스의 아들이었지만, 사두정치 이념은 세습을 보장하지 않았다. 306년 7월 25일 콘스탄티우스가 사망하자, 그의 군대는 에보라쿰(요크)에서 콘스탄티누스를 아우구스투스로 선포했다. 로마에서는 콘스탄티우스의 제국 동료인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가 유력했는데, 그는 306년 10월 28일에 황제 칭호를 차지했다.[4] 콘스탄티누스의 주장은 동부 속주의 통치자이자 제국 내 최고 황제인 갈레리우스에게 인정받았지만, 막센티우스는 찬탈자로 취급받았다. 갈레리우스는 콘스탄티누스를 카이사르라는 더 낮은 황제 직위로 인정했다. 갈레리우스는 공동 아우구스투스인 세베루스에게 307년 초에 막센티우스를 진압하라고 명령했지만, 세베루스는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처형되었다. 갈레리우스 자신도 가을에 로마로 진격했지만, 도시를 점령하는 데 실패했다.[4] 콘스탄티누스는 이 기간 대부분 동안 막센티우스와 동방 황제들과의 충돌을 피했다.[5]312년,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는 서로에게 강한 적대감을 품고 있었는데, 막센티우스의 누이인 파우스타가 콘스탄티누스와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관계는 변함이 없었다. 312년 봄,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를 몰아내기로 결심하고 약 4만 명의 군대를 모아 이탈리아 북부로 진격했다.[7] 그는 토리노 근처와 베로나에서 두 번의 주요 전투에서 승리하여 북부 이탈리아를 쉽게 장악했으며, 베로나에서는 막센티우스의 최고위 장군인 프라이토리아니 지사 루리키우스 폼페이아누스가 사망했다.[8]
3. 콘스탄티누스의 환시
밀비우스 다리 전투를 앞둔 312년 10월 27일 저녁,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 신의 보호를 받으며 싸우라는 환시를 보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 환시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다.
락탄티우스와 유세비우스의 기록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콘스탄티누스가 전투 전날 저녁에 키로 표식을 보았다는 대중적인 개념으로 합쳐졌다. 두 저자 모두 그 표식이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널리 이해되지 않았다는 데 동의한다.[11] 최초의 제국적 등장은 317년의 콘스탄티누스 은화에서 나타나는데, 이는 콘스탄티누스가 그 당시 그 표식을 사용했지만, 그다지 두드러지게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12] 그는 리키니우스와의 갈등 동안 키로와 라바룸을 더 광범위하게 사용했다.
일부에서는 이 환상을 채운과 같은 태양과 관련된 현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13] 콘스탄티누스가 태양 신의 동반자로 묘사된 동전은 전투 다음 해인 313년까지 주조되었다. 다양한 황제들이 공식 화폐에 솔 인빅투스를 묘사했으며, 콘스탄티누스 역시 325/6년까지 자신의 공식 화폐에 솔의 이미지를 사용했다.[14][15]
하지만, 존 줄리어스 노르위치와 같은 일부 역사가들은 유세비우스의 환상 기록을 완전히 무시하며, 콘스탄티누스가 실제로는 환상을 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17]
3. 1. 락탄티우스의 기록

락탄티우스는 밀비우스 다리 전투 전날 밤 콘스탄티누스가 꿈에서 "병사들의 방패에 천상의 표식을 그리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말한다(《박해자들의 죽음》 44.5).[9] 그는 꿈의 명령에 따라 방패에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표식을 새겼다.[9] 락탄티우스는 그 표식을 "스타우로그램" 또는 P자 모양으로 윗부분이 둥근 라틴 십자가로 묘사한다.[9] 유세비우스가 묘사한 더 잘 알려진 키로 표식 대신 그 표식을 사용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9]
3세기부터 4세기에 걸쳐 활동한 기독교 저술가인 락탄티우스는 전투 전날 밤(10월 27일 밤)에 콘스탄티누스가 꿈에서 "콘스탄티누스 군의 머리 위에 큰 징표가 나타날 것이다"(de mort. pers. 44,5)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말했으며, 콘스탄티누스가 ☧(Χριστόγραμμα|키리스토그램el)을 방패에 붙였다고 한다. 그러나 에우세비우스가 그 이전에 콘스탄티누스에게 "☧"의 표식을 붙이도록 지도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며, 밀비우스 다리 전투 이전부터 그 문장을 달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3. 2. 유세비우스의 기록
일반적으로 27일 저녁, 군대가 전투를 준비하는 동안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 신의 보호 아래 싸우도록 이끄는 환상을 보았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환상에 대한 몇 가지 세부 사항은 그것을 보고하는 출처에 따라 다르다.
락탄티우스는 전투 전날 밤 콘스탄티누스가 꿈에서 "병사들의 방패에 천상의 표식을 그리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는 꿈의 명령에 따라 방패에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표식을 새겼다. 락탄티우스는 그 표식을 "스타우로그램" 또는 P자 모양으로 윗부분이 둥근 라틴 십자가로 묘사한다. 콘스탄티누스가 유세비우스가 묘사한 더 잘 알려진 키로 표식 대신 그 표식을 사용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9]

유세비우스에 따르면, 전투에 대한 두 가지 기록이 남아 있다. 첫 번째인 《교회사》에 실린 짧은 기록은 기독교 신이 콘스탄티누스를 도왔다는 믿음을 장려하지만, 어떤 환상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의 후기 저서인 《콘스탄티누스 황제 전기》에서 유세비우스는 환상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제공하며, 황제 본인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었다고 강조한다. 이 버전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는 군대와 함께 행군하던 중 하늘을 올려다보고 태양 위에 빛나는 십자가를 보았고, 그 십자가에는 그리스어 단어 "Ἐν Τούτῳ Νίκα", 즉 "En toutōi níka"(Ἐν Τούτῳ Νίκα|이것으로 승리하라el)가 새겨져 있었는데, 일반적으로 라틴어로는 "''in hoc signo vinces''"(in hoc signo vinces|이 표식으로 정복하라la)로 번역된다. 처음에는 그 환상의 의미를 확신하지 못했지만, 다음날 밤 꿈에서 그리스도가 그에게 적들을 대항하여 그 표식을 사용하라고 설명했다. 유세비우스는 그 후 라바룸, 즉 콘스탄티누스가 리키니우스와의 후기 전쟁에서 사용한 군기인 키로 표식을 묘사한다.[10]
두 명의 동시대 저자의 기록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콘스탄티누스가 전투 전날 저녁에 키로 표식을 보았다는 대중적인 개념으로 합쳐졌다. 두 저자 모두 그 표식이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널리 이해되지 않았다는 데 동의한다(비록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이미 카타콤에서 다른 특별한 상징과 함께 기독교 묘지를 표시 및/또는 장식하는 데 사용되고 있었지만).[11] 최초의 제국적 등장은 317년의 콘스탄티누스 은화에서 나타나는데, 이는 콘스탄티누스가 그 당시 그 표식을 사용했지만, 그다지 두드러지게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12] 그는 리키니우스와의 갈등 동안 키로와 라바룸을 더 광범위하게 사용했다.

일부[13]는 그 환상을 태양적 맥락(예: 채운 현상인 채운)에서 고려했는데, 이는 나중에 콘스탄티누스가 표현한 기독교적 믿음에 앞섰을 수 있다. 콘스탄티누스가 태양 신의 동반자로서 묘사된 동전은 전투 다음 해인 313년까지 주조되었다. 태양 신 솔 인빅투스는 종종 후광 또는 빛무리와 함께 묘사된다. 다양한 황제들이 공식적인 화폐에 솔 인빅투스를 묘사했는데, 그중 일부만이 "무적의"라는 의미를 가진 SOLI INVICTO COMITI와 같은 전설을 포함하여 다양한 전설을 사용했는데, 이는 정복되지 않은 태양을 황제의 동반자로 주장하는 것으로, 콘스탄티누스가 특히 자주 사용했다.[14] 콘스탄티누스의 공식 화폐는 325/6년까지 솔의 이미지를 계속해서 담고 있다. 콘스탄티누스의 솔리두스와 그의 통치 시대의 금메달은 황제의 흉상을 솔 인빅투스와 두상으로 나란히 묘사하고 있으며, 전설은 INVICTUS CONSTANTINUS이다.[15] 솔 인빅투스와 솔 인빅투스 미트라의 공식 숭배는 로마 군대의 군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다. 솔 인빅투스의 조상들은 깃발 운반자들이 가지고 다녔는데,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의 부조에서 세 군데에 나타난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은 콜로세움에서 주 접근로 방향에서 볼 때 솔이 지배적인 배경을 형성하도록 거대한 솔 동상과 정렬되도록 신중하게 배치되었다.[16]
하지만, 다른 역사가들은 유세비우스의 후기 환상에 대한 설명을 완전히 무시했다. 존 줄리어스 노르위치는 "전장에서 십자가를 본 환상은 ...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콘스탄티누스 황제 전기》가 나오기 전까지 동시대 역사에서 단 한 번의 언급도 없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고,[17] 유세비우스의 " '온 군대가 ... 기적을 목격했다'는 구체적인 진술"[17]은 있을 법하지 않다고 보았다. 반면에, 노르위치는 전투 직전에 콘스탄티누스가 "어떤 심오한 영적 경험"을 겪었음에 틀림없다는 것을 인정했으며,[17] 유세비우스의 이야기는 "의도적인 거짓말"[17]이라기보다는 "어쩌면 무의식적인 과장"[17]이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콘스탄티누스가 그의 회상에 "부드러운 윤색"[17]을 덧붙였고, 저자는 이를 비판 없이 기록하거나 미화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3. 3. 환시에 대한 해석
전투를 준비하던 312년 10월 27일 저녁,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 신의 보호 아래 싸우라는 환상을 보았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 환상에 대한 세부 사항은 출처에 따라 다르다.
락탄티우스는 전투 전날 밤 콘스탄티누스가 꿈에서 "병사들의 방패에 천상의 표식을 그리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는 꿈의 명령에 따라 방패에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표식을 새겼다. 락탄티우스는 그 표식을 "스타우로그램" 또는 P자 모양으로 윗부분이 둥근 라틴 십자가로 묘사한다. 콘스탄티누스가 유세비우스가 묘사한 더 잘 알려진 키로 표식 대신 그 표식을 사용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9]
유세비우스에 따르면, 전투에 대한 두 가지 기록이 남아 있다. 첫 번째인 《교회사》에 실린 짧은 기록은 기독교 신이 콘스탄티누스를 도왔다는 믿음을 장려하지만, 어떤 환상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의 후기 저서인 《콘스탄티누스 황제 전기》에서 유세비우스는 환상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제공하며, 황제 본인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었다고 강조한다. 이 버전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는 군대와 함께 행군하던 중 하늘을 올려다보고 태양 위에 빛나는 십자가를 보았고, 그 십자가에는 그리스어 단어 "Ἐν Τούτῳ Νίκα"(Ἐν Τούτῳ Νίκα|엔 투토 니카el)가 새겨져 있었는데, 일반적으로 라틴어로는 "''in hoc signo vinces''"(in hoc signo vinces|인 호크 시그노 빈케스la)로 번역된다. 처음에는 그 환상의 의미를 확신하지 못했지만, 다음날 밤 꿈에서 그리스도가 그에게 적들을 대항하여 그 표식을 사용하라고 설명했다. 유세비우스는 그 후 라바룸, 즉 콘스탄티누스가 리키니우스와의 후기 전쟁에서 사용한 군기인 키로 표식을 묘사한다.[10]
두 저자의 기록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콘스탄티누스가 전투 전날 저녁에 키로 표식을 보았다는 대중적인 개념으로 합쳐졌다. 두 저자 모두 그 표식이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널리 이해되지 않았다는 데 동의한다(비록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이미 카타콤에서 다른 특별한 상징과 함께 기독교 묘지를 표시 및/또는 장식하는 데 사용되고 있었지만).[11] 최초의 제국적 등장은 317년의 콘스탄티누스 은화에서 나타나는데, 이는 콘스탄티누스가 그 당시 그 표식을 사용했지만, 그다지 두드러지게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12] 그는 리키니우스와의 갈등 동안 키로와 라바룸을 더 광범위하게 사용했다.
일부는 그 환상을 태양과 관련된 현상(예: 채운)으로 보기도 하는데, 이는 나중에 콘스탄티누스가 표현한 기독교적 믿음에 앞섰을 수 있다.[13] 콘스탄티누스가 태양 신의 동반자로서 묘사된 동전은 전투 다음 해인 313년까지 주조되었다. 태양 신 솔 인빅투스는 종종 후광 또는 빛무리와 함께 묘사된다. 다양한 황제들이 공식적인 화폐에 솔 인빅투스를 묘사했는데, 그중 일부만이 "무적의"라는 의미를 가진 SOLI INVICTO COMITI와 같은 전설을 포함하여 다양한 전설을 사용했는데, 이는 정복되지 않은 태양을 황제의 동반자로 주장하는 것으로, 콘스탄티누스가 특히 자주 사용했다.[14] 콘스탄티누스의 공식 화폐는 325/6년까지 솔의 이미지를 계속해서 담고 있다. 콘스탄티누스의 솔리두스와 그의 통치 시대의 금메달은 황제의 흉상을 솔 인빅투스와 두상으로 나란히 묘사하고 있으며, 전설은 INVICTUS CONSTANTINUS이다.[15] 솔 인빅투스와 솔 인빅투스 미트라의 공식 숭배는 로마 군대의 군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다. 솔 인빅투스의 조상들은 깃발 운반자들이 가지고 다녔는데,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의 부조에서 세 군데에 나타난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은 콜로세움에서 주 접근로 방향에서 볼 때 솔이 지배적인 배경을 형성하도록 거대한 솔 동상과 정렬되도록 신중하게 배치되었다.[16]
다른 역사가들은 유세비우스의 후기 환상에 대한 설명을 완전히 무시했다. 존 줄리어스 노르위치는 "전장에서 십자가를 본 환상은 ...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라고 주장했고,[17] 유세비우스의 " '온 군대가 ... 기적을 목격했다'는 구체적인 진술"[17]은 있을 법하지 않다고 보았다. 반면에, 노르위치는 전투 직전에 콘스탄티누스가 "어떤 심오한 영적 경험"을 겪었음에 틀림없다는 것을 인정했으며,[17] 유세비우스의 이야기는 "의도적인 거짓말"[17]이라기보다는 "어쩌면 무의식적인 과장"[17]이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콘스탄티누스가 그의 회상에 "부드러운 윤색"[17]을 덧붙였고, 저자는 이를 비판 없이 기록하거나 미화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밀비우스 다리 전투 전에 콘스탄티누스에게 기독교의 신으로부터 승리의 계시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한 설에 따르면, 밀비우스 다리를 향하는 행군 중에 태양 앞에 역십자와 그리스 문자Χ|키el와 Ρ|로el 두 글자가 보였고,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어로 "Εν τούτω νίκα|엔 투토 니카el"(In hoc signo vinces|인 호크 시그노 빈케스la)라고 들었다고 믿어진다.
락탄티우스는 312년 10월 27일 밤, 콘스탄티누스가 꿈에서 "콘스탄티누스 군의 머리 위에 큰 징표가 나타날 것이다"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말했으며, 콘스탄티누스가 ☧|키리스토그램el(Χριστόγραμμα|키 로el)을 방패에 붙였다고 한다. 그러나 에우세비우스가 그 이전에 콘스탄티누스에게 "☧"의 표식을 붙이도록 지도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며, 밀비우스 다리 전투 이전부터 그 문장을 달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4. 전투의 경과
312년 10월 28일, 밀비우스 다리에서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의 군대가 격돌했다. 막센티우스는 테베레 강을 등지는 배수진을 쳤는데, 이는 후퇴 공간이 부족한 불리한 진형이었다. 반면 콘스탄티누스는 직접 기병대를 이끌고 선두에 섰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동성이 뛰어난 갈리아 기병을 활용하여 막센티우스의 기병대를 먼저 격파했다. 이어진 보병 부대(코호르스) 간의 전투에서는 초반에 막센티우스 군이 선전했으나, 점차 테베레 강 쪽으로 밀려났다. 막센티우스는 로마 시내로 후퇴하여 재정비하려 했지만, 유일한 퇴로는 밀비우스 다리뿐이었다. 콘스탄티누스 군의 추격으로 혼란에 빠진 막센티우스 군은 다리 위에서 무너졌고, 많은 병사들이 강에 빠지거나 포로가 되었다. 프라이토리아니 친위대는 끝까지 저항했지만 대부분 전사했다.
막센티우스는 다리에서 떨어져 익사했다는 설과, 강을 헤엄쳐 도망가다 갑옷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익사했다는 설이 있다.
4. 1. 막센티우스의 전략
콘스탄티누스는 312년 10월 말 플라미니아 가도를 따라 로마로 진군하여 프리마 포르타 근처 말보르게토에 주둔했다.막센티우스는 이전의 성공적인 방어 전략처럼 로마 내에서 포위전에 대비해 많은 식량을 비축해 두었다. 그러나 그는 예상을 깨고 콘스탄티누스와 야전에서 맞서 싸우기로 결정했다. 고대 자료들은 이 결정을 신의 개입이나 미신, 또는 전투 날짜(10월 28일)가 그의 즉위일과 같다는 점, 시빌린 문서의 예언 등을 이유로 설명한다.[18] 락탄티우스는 서커스 경기에서 민중들이 콘스탄티누스를 지지했다고도 전한다.[19]
막센티우스는 밀비우스 다리를 결전지로 선택했다. 이 다리는 테베레 강을 건너 플라미니아 가도가 로마로 이어지는 중요한 석조 다리였다. 막센티우스는 경쟁자를 로마 밖으로 몰아내려면 이 다리를 확보해야 했고, 로마 원로원은 로마를 점령한 쪽에 유리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막센티우스는 포위전에 대비해 다리 일부를 파괴했었기 때문에, 군대가 강을 건널 수 있도록 나무나 부교를 설치했다. 전투에 사용된 다리의 종류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차이가 있다. 조시무스는 쇠로 연결된 두 부분으로 구성된 다리라고 언급했지만, 다른 자료들은 부교였다고 전한다. 또한 이 다리가 콘스탄티누스 군대를 위한 함정으로 의도되었는지 여부도 불분명하다.[20]

결전의 날, 두 군대가 격돌했고 콘스탄티누스가 승리했다. 막센티우스는 군대를 테베레 강에 너무 가깝게 배치하여 후퇴 시 재정비할 공간이 부족했다.[21] 콘스탄티누스는 먼저 기병대를 투입하여 막센티우스의 기병대를 격파한 후, 보병대[22]를 진격시켰다. 막센티우스 군대는 잘 싸웠지만 테베레 강 쪽으로 밀려났고, 로마로 퇴각하려 했으나 탈출로는 다리 하나뿐이었다. 콘스탄티누스 군대는 퇴각하는 적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23] 결국 밀비우스 다리 옆 임시 다리가 붕괴되면서 테베레 강 북쪽에 갇힌 병사들은 포로가 되거나 살해되었다. 프라이토리아니 친위대는 강 북쪽에서 완강히 저항했지만, "용서를 바라지 않고, 전투를 위해 선택한 장소를 자기 몸으로 덮었다."[24]
막센티우스는 탈출을 시도하다 강에 빠져 익사하거나, 말에서 떨어져 강에 빠졌다고 전해진다.[25] 락탄티우스는 막센티우스의 죽음에 대해 "그의 뒤에 있는 다리가 무너졌다. 그것을 본 전투는 더욱 격렬해졌다. 주의 손이 우세했고, 막센티우스의 군대는 패주했다. 그는 부서진 다리로 도망쳤지만, 군중들이 그를 덮쳐 그는 테베레 강으로 머리부터 떨어졌다."라고 묘사했다.[26]
4. 2.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
콘스탄티누스는 312년 10월 말 플라미니아 가도를 따라 로마에 도착했다. 그는 프리마 포르타 근처의 말보르게토에 진영을 쳤다.[18] 막센티우스는 로마 안에 머물며 포위를 견딜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콘스탄티누스와 야전에서 싸우기로 결정했다. 고대 자료들은 이 결정을 신의 개입 또는 미신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전투의 날이 그의 즉위일 (10월 28일)과 같았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좋은 징조로 여겨졌다.[19] 막센티우스는 밀비우스 다리 앞에서 결전을 벌이기로 결정했는데, 이 다리는 테베레 강을 건너 플라미니아 가도가 로마로 이어지는 석조 다리이다.[20]다음 날, 두 군대는 격돌했고, 콘스탄티누스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막센티우스의 배치는 잘못되었을 수 있는데, 그의 군대가 테베레 강을 너무 가깝게 배치하여, 부대가 후퇴해야 할 경우 재정비할 공간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21] 숙련된 장군인 콘스탄티누스는 먼저 기병대를 막센티우스의 기병대에 투입하여 그들을 격파했다. 콘스탄티누스의 보병대[22]가 진격했고, 막센티우스의 군대 대부분이 잘 싸웠지만, 테베레 강 쪽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막센티우스는 로마 자체에서 다시 싸우기 위해 퇴각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탈출 경로는 다리 하나뿐이었다. 콘스탄티누스의 군대는 퇴각하는 군대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23] 마침내 밀비우스 다리 옆에 설치된 임시 다리 위에서 막센티우스 군대가 탈출하던 중 붕괴되었고, 테베레 강 북쪽에 갇힌 사람들은 포로로 잡히거나 살해되었다. 막센티우스의 프라이토리아니 친위대는 강 북쪽에서 완강하게 저항했다.[24]
막센티우스는 탈출하려다 강에 빠져 익사했다.[25] 락탄티우스는 막센티우스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의 뒤에 있는 다리가 무너졌다. 그것을 본 전투는 더욱 격렬해졌다. 주의 손이 우세했고, 막센티우스의 군대는 패주했다. 그는 부서진 다리로 도망쳤지만, 군중들이 그를 덮쳐 그는 테베레 강으로 머리부터 떨어졌다."[26]
막센티우스 군은 배수진과도 같은 진형을 구축한 반면, 콘스탄티누스 군은 콘스탄티누스 자신이 전선에 나서 막센티우스 군과 대치하는 진형을 갖췄다. 10월 28일, 양 군대가 충돌하여 콘스탄티누스도 직접 기마에 탑승하여 돌격했다. 막센티우스 군은 움직임이 느린 중장 기병이나 경장 누미디아 기병이 주력이었던 데 반해, 콘스탄티누스 군은 기동성이 뛰어난 갈리아 기병이 주력이었고, 지형적으로도 콘스탄티누스 군이 우위에 섰다. 보병 부대끼리의 대결에서는 막센티우스의 군대가 초반에는 선전했으나, 점차 테베르 강으로 밀려났다. 로마로 돌아가는 길은 밀비우스 다리를 건너는 것뿐이었고, 콘스탄티누스 군의 추격으로 많은 장병들이 테베르 강으로 추락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막센티우스의 프라이토리아니는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대부분 전사했다. 막센티우스 자신은 밀비우스 다리에서 떨어져 익사했다는 설과, 테베르 강을 헤엄쳐 도망가는 중에 갑옷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익사했다는 설이 전해진다.
5. 전투의 결과 및 영향
밀비우스 다리 전투 결과,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제국 서부의 절대적인 지배권을 얻었다.[27] 콘스탄티누스의 로마 입성 당시, 카피톨리누스 유피테르 신전에서 희생을 바치는 의례를 생략했는데, 이는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적 신념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그가 이미 기독교인이었다는 증거로 보기는 어렵다.[29]
막센티우스의 유아 두 명을 포함한 근친들은 몰살되었고, 막센티우스와 관련된 자들은 모두 숙청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일설에는 막센티우스의 아들로 여겨지는 안토니우스 도나투스라는 인물이 도망쳐 자손을 남겼으며, 그의 혈통은 적어도 20세기 말까지 존속했다고 한다.
폴 K. 데이비스는 "콘스탄티누스의 승리는 그에게 서로마 제국에 대한 완전한 지배권을 주었으며, 이는 기독교가 로마 제국과 궁극적으로 유럽의 지배적인 종교가 되는 길을 열었다."라고 기록했다.[31] 313년,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는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여 기독교를 로마 제국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용인했다.
5. 1. 콘스탄티누스의 로마 입성
콘스탄티누스는 312년 10월 29일에 로마에 입성했다.[27] 그는 도시에서 성대한 입성 의식(''아드벤투스'')을 치렀고, 시민들의 환호를 받았다.[28] 테베레 강에서 건져 올려진 막센티우스의 시신은 참수되었고, 그의 머리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거리를 행진했다.[27] 의식이 끝난 후 막센티우스의 머리는 그의 몰락을 증명하기 위해 카르타고로 보내졌고, 이후 아프리카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콘스탄티누스는 원로원의 쿠리아를 방문하여 그들의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특권을 회복하고 개혁된 정부에서 안전한 역할을 부여할 것을 약속했다. 막센티우스를 지지했던 사람들에 대한 복수는 없었다.[30] 막센티우스는 ''다마티오 메모리아에''로 비난받았고, 그의 모든 법률은 무효화되었으며 콘스탄티누스는 로물루스 신전과 막센티우스 바실리카를 포함하여 로마 내 막센티우스의 모든 상당한 건설 프로젝트를 자신의 것으로 하였다.[30] 프라이토리아 근위대와 황실 기병대(''에퀴테스 싱굴라레스'')가 해산되면서 군대에서 막센티우스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들이 무력화되었다.[30] 콘스탄티누스는 이전의 황실 근위대를 ''스콜라 팔라티나이''라고 불리는 여러 기병 부대로 교체한 것으로 여겨진다.
5. 2. 기독교의 공인과 확산
콘스탄티누스는 312년 10월 29일에 로마에 입성했다.[27] 그는 도시에서 성대한 입성 의식(''아드벤투스'')을 치렀고, 시민들의 환호를 받았다.[28] 테베레 강에서 건져 올려진 막센티우스의 시신은 참수되었고, 그의 머리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거리를 행진했다.[27] 의식이 끝난 후 막센티우스의 머리는 그의 몰락을 증명하기 위해 카르타고로 보내졌고, 아프리카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이 전투로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제국 서부의 절대적인 지배권을 얻었다.콘스탄티누스는 원로원 쿠리아를 방문하여 그들의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특권을 회복하고 개혁된 정부에서 안전한 역할을 부여할 것을 약속했다. 막센티우스를 지지했던 사람들에 대한 복수는 없었다.[30] 막센티우스는 ''다마티오 메모리아에''로 비난받았고, 그의 모든 법률은 무효화되었으며 콘스탄티누스는 로물루스 신전과 막센티우스 바실리카를 포함하여 로마 내 막센티우스의 모든 상당한 건설 프로젝트를 찬탈했다. 프라이토리아 근위대와 황실 기병대(''에퀴테스 싱굴라레스'')가 해산되면서 군대에서 막센티우스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들이 무력화되었다.[30] 콘스탄티누스는 이전의 황실 근위대를 ''스콜라 팔라티나이''라고 불리는 여러 기병 부대로 교체한 것으로 여겨진다.
폴 K. 데이비스는 "콘스탄티누스의 승리는 그에게 서로마 제국에 대한 완전한 지배권을 주었으며, 이는 기독교가 로마 제국과 궁극적으로 유럽의 지배적인 종교가 되는 길을 열었다."라고 기록했다.[31] 이듬해인 313년,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는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여 기독교를 로마 제국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고 용인되는 종교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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