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라티오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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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그라티오니는 조지아의 왕가로, 왕조 명칭은 "바그라트의 자손"을 의미한다. 이 왕조는 8세기 후반부터 1801년까지 조지아를 통치했으며, 그 기원은 조지아 학자와 아르메니아 학자 간에 논쟁의 대상이다. 11세기부터 다윗의 후손이라는 전설이 있었으나, 현대 학문에서는 부정되었다. 바그라티오니 가문은 러시아 제국에 병합된 후에도 귀족 가문으로 존속했으며, 현재는 여러 분파로 나뉘어 있다. 최근에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이 있었으나, 분파 간의 결혼을 통해 통합을 시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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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라티오니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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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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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름 | 바그라티오니 가문 |
국가 | 조지아 |
칭호 | 조지아 군주의 작위 |
창시자 | 알 수 없음 |
마지막 통치자 | 게오르기예 12세 및 솔로몬 2세 |
현재 수장 | 논쟁 중 |
설립 연도 | 알 수 없음 |
해산 | 1801년/1810년 |
폐위 | 1801년/1810년 |
민족 | 조지아인 |
분가 | 무흐라니 가문 그루진스키 가문 바그라티온-다비타슈빌리 가문 이메레틴스키 가문 |
2. 기원
바그라티오니 왕조의 명칭은 초기 조지아어 형태로 '바그라토니아니', '바그라투니아니'[3], '바그라토바니' 등으로 나타났으며, 이후 바그라티오니로 변화하였다. 이 명칭과 아르메니아어 '바그라투니', 현대 명칭 '바그라티드'는 바그라트의 자손" 또는 "바그라트가 세운 가문"을 의미하며, 바그라트는 이란어 계통의 고유 이름이다.[4]
바그라티드 왕조의 기원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있다.[5] 바그라티오니 왕조의 계보는 8세기 후반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1]
키릴 투마노프는 바그라티드의 첫 조지아 분파가 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당시 남부 조지아 오즈르케 공국을 통치했다고 주장했다.[14] 중세 연대기에 비브리티아니로 알려진 오즈르케 계통은 5세기까지 지속되었으나, 이후 조지아 왕실의 권위를 회복한 바그라티드의 직접적인 조상으로 간주되지는 않는다.[15] 파블레 잉고로크바는 바그라티오니가가 이베리아 왕국의 파르나바지드 왕조에서 분리되었다고 주장했다.[16][17]
2. 1. 다윗 왕가 기원설
11세기 조지아 연대기 작가 숨바트 다비티스-제[6]의 저작과 바흐쿠시 바그라티오니(1696–1757) 공작에 의해 반복된 전설에 따르면, 바그라티오니 왕조는 성경의 왕이자 예언자인 다윗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서기 530년경 이스라엘에서 왔다고 한다. 이 전설에 따르면 다윗 계보의 일곱 형제 중 세 명은 아르메니아에 정착했고, 나머지 네 명은 카르틀리(이베리아 왕국)에 도착하여 현지 통치 가문과 결혼하여 세습 재산을 얻었다. 네 형제 중 한 명인 구아람(532년 사망)은 아들 바그라트의 이름을 따서 ''바그라티오니'' 가문을 세웠다. 후계자인 구아람은 비잔틴 보호령 하의 이베리아 집정 공으로 임명되었으며, 575년에 비잔틴 궁정 칭호인 ''쿠로팔라테스''[7]를 받았다.[8] 따라서 이 버전에 따르면 1801년까지 통치한 바그라티오니 왕조가 시작되었다.[9]이 전설은 20세기 초까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10] 그러나 현대 학문은 바그라티드 왕조의 유대 기원 및 성경적 후손 주장을 부정한다. 키릴 투마노프의 연구에 따르면, 조지아 바그라티드는 아다르나세의 인물에서 아르메니아 바그라티드 왕조에서 분리되었다. 그의 아버지 바삭(732년부터 748년까지 아르메니아 집정 공이었던 아쇼트 3세 블라인드의 아들)은 775년 아랍 통치에 대한 실패한 봉기 이후 카르틀리로 건너갔다. 아다르나세의 아들인 아쇼트 1세는 813년에 이베리아 공국을 획득하여 조지아의 마지막 왕가를 세웠다. 조지아 바그라티드의 다윗 기원에 대한 전설은 아르메니아 작가 모세스 오브 호레네의 저작에 나타난 바와 같이, 아르메니아 왕조가 이전에 주장했던 것을 더욱 발전시킨 것이었다.[11] 조지아 분파가 왕권을 잡자, 그들의 성경적 기원에 대한 신화는 그들의 정당성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조지아를 천 년 동안 통치한 그들의 주요 이념적 기둥이 되었다.[13]
2. 2. 아르메니아 기원설
왕조 이름의 초기 조지아 형태는 '바그라토니아니', '바그라투니아니'[3], '바그라토바니'였으며, 이후 바그라티오니로 바뀌었다. 이 명칭과 아르메니아어 '바그라투니', 현대 명칭 '바그라티드'는 "바그라트의 자손" 또는 "바그라트가 세운 가문"을 뜻하며, 바그라트는 이란어 계통의 고유 이름이다.[4] 바그라티드 왕조의 기원은 조지아와 아르메니아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거리이다. 조지아 학자들은 바그라티오니가 조지아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아르메니아 학자들과 서구 학자들은 이들이 아르메니아 바그라투니의 분파라고 주장한다.[5]11세기 조지아 연대기 작가 숨바트 다비티스-제[6]의 기록과 바흐쿠시 바그라티오니(1696–1757) 공작의 주장에 따르면, 이 왕조는 성경의 왕이자 예언자인 다윗의 후손이며, 서기 530년경 이스라엘에서 왔다고 한다. 이 전설에 따르면 다윗 계보의 일곱 형제 중 셋은 아르메니아에, 나머지 넷은 카르틀리(이베리아 왕국)에 도착하여 현지 통치 가문과 결혼하여 세습 재산을 얻었다. 네 형제 중 하나인 구아람(532년 사망)은 아들 바그라트의 이름을 따서 '바그라티오니' 가문을 세웠다. 그의 후계자인 구아람은 비잔틴 보호령 아래 이베리아 집정관으로 임명되어 575년에 비잔틴 궁정 칭호인 '쿠로팔라테스'[7]를 받았다.[8] 이 주장에 따르면, 1801년까지 통치한 바그라티오니 왕조가 이렇게 시작되었다.[9]
이 전설은 20세기 초까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10] 그러나 바그라티드의 유대 기원과 성경적 후손이라는 주장은 현대 학문에서 부정되었다. 키릴 투마노프의 연구에 따르면, 조지아 바그라티드는 아다르나세로부터 아르메니아 바그라티드 왕조에서 분리되었는데, 그의 아버지 바삭(732년부터 748년까지 아르메니아 집정 공이었던 아쇼트 3세 블라인드의 아들)은 775년 아랍 통치에 대한 실패한 봉기 이후 카르틀리로 건너갔다. 아다르나세의 아들 아쇼트 1세는 813년에 이베리아 공국을 획득하여 조지아의 마지막 왕가를 세웠다. 조지아 바그라티드의 다윗 기원 전설은 아르메니아 작가 모세스 오브 호레네의 저작에 나타난 아르메니아 왕조의 이전 주장을 발전시킨 것이다.[11] 새로운 환경에 빠르게 동화된[12] 조지아 분파가 왕권을 잡자, 성경적 기원 신화는 그들의 정당성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고, 조지아를 천 년 동안 통치한 주요 이념적 기반이 되었다.[13]
2. 3. 기타 기원설
키릴 투마노프는 바그라티드의 첫 번째 조지아 분파가 서기 2세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당시 그들은 현재 남부 조지아인 오즈르케의 공국을 통치했다고 주장한다.[14] 중세 연대기에서 비브리티아니로 알려진 오즈르케 계통은 서기 5세기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조지아 왕실의 권위를 회복한 후대의 바그라티드의 직접적인 조상으로 간주될 수 없다.[15] 파블레 잉고로크바는 바그라티오니가 이베리아 왕국의 파르나바지드 왕조의 분파라고 주장했다.[16][17]3. 역사
조지아 군주 목록 참고.
6세기 말, 사산 제국에 의해 이베리아 왕국이 멸망한 후, 바그라티오니 가문은 지역 유력 가문으로 성장했다. 아랍의 공격으로 구아라미드 왕조와 초스라이드 왕조가 쇠퇴하면서 바그라티오니 가문이 부상할 수 있었다.[18] 아바스 왕조의 내전과 비잔틴 제국과의 갈등 또한 바그라티오니 가문의 성장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바그라티오니 가문은 비잔틴 제국의 보호 아래 클라르제티와 메스헤티 지역에서 초기 영토를 확보하고, 타오-클라르제티로 알려진 대규모 정치를 형성했다. 813년, 아쇼트 1세는 이베리아(카르틀리) 공국의 세습적 지위를 획득하고, 비잔틴 황제로부터 ''쿠로팔라테스''라는 명예 칭호를 받았다.
트빌리시가 아랍 세력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조지아 영토는 분열되었다. 아쇼트 1세의 후손들은 카르틀리, 타오, 클라르제티에 세 개의 분파를 설립하여 서로, 그리고 인접 통치자들과 경쟁했는데, 이 중 카르틀리 분파가 우세했다. 888년, 아다르나세 1세 쿠로팔라테스는 580년 이후 중단되었던 이베리아 왕실 권위를 회복했다.
다비드 4세 (건축왕) (재위 1089–1125)은 셀주크의 공격을 격퇴하고 1122년 트빌리시를 재정복하여 조지아의 통일을 사실상 완성했다.[1] 비잔틴 제국의 쇠퇴와 대 셀주크 제국의 해체와 함께 조지아는 기독교 동방의 주요 국가 중 하나가 되었고, 범 코카서스 제국[19]은 최대 영토에서 북 코카서스에서 북부 이란까지, 동쪽으로 소아시아까지 뻗어 나갔다.
데메트리오스 1세 (재위 1125–1156), 조지 3세 (재위 1156–1184), 특히 그의 딸인 타마르 여왕 (재위 1184–1213) 치세 동안 왕국은 계속 번영했다.[1] 조지 3세가 사망하면서 주요 남계가 단절되었고, 왕조는 타마르 여왕과 알란 왕자 다비드 소슬란과의 결혼을 통해 이어졌다.[20]
1225년 호라즘 제국과 1236년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조지아의 "황금기"는 막을 내렸다. 몽골 통치에 맞선 투쟁은 이원 통치를 초래했고, 바그라티오니 왕조의 방계가 서부 조지아(이메레티 왕국)를 장악하게 되었다.[1] 조지 5세 (1299–1302, 1314–1346) 치하에서 잠시 통일과 부흥이 있었지만, 1386년에서 1403년 사이 투르크-몽골 정복자 티무르의 8차례 침략은 조지아 왕국에 큰 타격을 입혔다. 약 1세기 후, 강력했던 왕국은 카라 코윤루와 아크 코윤루의 침략으로 붕괴되었다.
1490/91년경, 조지아 왕국은 세 개의 독립 왕국과 다섯 개의 반독립 공국으로 분열되었다.
독립 왕국 | 반독립 공국 |
---|---|
각각 바그라티오니 왕조의 경쟁 분파가 독립 왕국을 이끌었고, 반독립 공국은 각자의 봉건 씨족이 지배했다.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조지아의 여러 왕국은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의 간섭을 받으며 존속했다.[1] 이 시기에 많은 조지아 통치자들은 종주국으로부터 서임을 받기 위해 이슬람으로 개종하기도 했다.[1] 일부 바그라티오니 왕족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오스만 제국 또는 페르시아의 관직을 맡기도 했다. 특히 카르틀리의 경우, 1632년부터 로스톰 칸을 비롯한 이슬람교도 왕들이 40년 동안 이스파한의 다루가 직을 맡았다.
이메레티 가문은 끊임없는 내전에 휘말려 여러 차례 단절을 겪으며 계승이 이어졌고, 왕국은 오스만 제국의 침략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했다. 한편, 카르틀리와 카헤티는 페르시아 지배자들에게 복종했으며, 페르시아가 분열된 봉신 왕국을 멸망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두 동부 조지아 군주국은 1762년 에레클레 2세 왕 치하에서 재통일되었다. 에레클레 2세는 카헤티와 카르틀리 가문을 통합했고, 카르틀리는 1658년 이후 무크라넬리 분가에서 남성 후손으로 살아남았다.[1]
1783년, 에레클레 2세는 러시아 제국과 게오르기예프스크 조약을 체결하여 자신의 왕국을 러시아의 보호령으로 만들었다.[1] 그러나 1795년 페르시아의 아가 모하마드 칸 카자르가 트빌리시를 점령, 약탈하고 황폐화했을 때 러시아는 제때 도움을 주지 못했다.[21]
1798년 에레클레 2세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조지 12세는 러시아 황제 파벨 1세에게 보호를 다시 요청했다.[1] 파벨 1세는 카르틀리-카헤티 왕국을 러시아 제국에 통합하되, 원주민 왕조에게 일정 수준의 내부 자치권을 주는 방안을 제시했다.[1] 1799년 러시아 군대는 트빌리시로 진군했다.[22]
협상이 진행 중이던 1800년 12월 18일, 파벨 1세는 카르틀리-카헤티 왕국의 러시아 제국 병합을 일방적으로 선언했다.[1][24] 1801년 9월 12일, 알렉산드르 1세는 파벨 1세의 결정을 재확인하고 바그라티오니 왕조를 조지아 왕위에서 폐위시켰다.[1][24]
이메레티 왕국의 솔로몬 2세는 1804년 4월 25일 엘라즈나우리 조약을 통해 러시아의 보호를 받기로 했으나, 1810년 2월 20일 러시아 군대에 의해 폐위되었다.[26] 이후 솔로몬 2세는 권력을 되찾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1815년 오스만 제국의 트라브존에서 망명 중 사망했다.[26][27]
러시아 제국에서 바그라티오니 가문은 저명한 귀족 가문이 되었다. 가장 유명한 인물은 카르틀리 왕국의 왕 예세의 증손자로서 러시아 장군이자 1812년 조국 전쟁의 영웅이 된 표트르 바그라티온 공이었다.[1] 그의 형제인 로만 바그라티온 공 또한 러시아 장군이 되어 러시아-페르시아 전쟁 (1826-1828)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1827년 예레반에 최초로 입성했다. 로만 바그라티온은 예술, 문학, 연극 후원으로도 유명했다. 그의 트빌리시 자택 극장은 코카서스에서 가장 훌륭한 극장 중 하나로 여겨졌다. 그의 아들 표트르 로마노비치 바그라티온 공은 트베리주 지사가 되었고, 이후 발트 지방 총독이 되었다. 그는 또한 러시아에서 금 시안화법 개발로 알려진 야금학 엔지니어였다. 드미트리 페트로비치 바그라티온 공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브루실로프 공세에 참전한 러시아 장군이었으며, 이후 적군에 합류했다.
3. 1. 초기 왕조 (8세기 - 10세기)
6세기 말, 이베리아 왕국이 사산 제국에 멸망한 후, 바그라티오니 가문은 지역 유력 가문으로 성장했다. 아랍의 공격으로 기존의 구아라미드 왕조와 초스라이드 왕조가 쇠퇴하면서 바그라티오니 가문이 부상할 수 있었다.[18] 아바스 왕조가 내전과 비잔틴 제국과의 갈등에 몰두한 것도 바그라티오니 가문의 성장에 유리하게 작용했다.바그라티오니 가문은 비잔틴 제국의 보호 아래 클라르제티와 메스헤티 지역에서 초기 영토를 확보하고, 타오-클라르제티로 알려진 대규모 정치를 형성했다. 813년, 아쇼트 1세는 이베리아(카르틀리) 공국의 세습적 지위를 획득하고, 비잔틴 황제로부터 ''쿠로팔라테스''라는 명예 칭호를 받았다.
트빌리시가 아랍 세력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조지아 영토는 분열되어 있었다. 아쇼트 1세의 후손들은 카르틀리, 타오, 클라르제티에 세 개의 분파를 설립하여 서로, 그리고 인접 통치자들과 경쟁했다. 이 중 카르틀리 분파가 우세했다. 888년, 아다르나세 1세 쿠로팔라테스는 580년 이후 중단되었던 이베리아 왕실 권위를 회복했다.
3. 2. 황금기 (11세기 - 13세기)

다비드 4세 (건축왕) (재위 1089–1125)은 셀주크의 공격을 격퇴하고 1122년 트빌리시를 재정복하여 조지아의 통일을 사실상 완성했다.[1] 이 통일 왕국은 11세기 내내 비잔틴 제국과 셀주크 제국으로부터 위태롭게 독립을 유지하며 번성했다. 비잔틴 제국의 쇠퇴와 대 셀주크 제국의 해체와 함께 조지아는 기독교 동방의 주요 국가 중 하나가 되었고, 범 코카서스 제국[19]은 최대 영토에서 북 코카서스에서 북부 이란까지, 동쪽으로 소아시아까지 뻗어 나갔다.
왕위 계승 다툼이 반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데메트리오스 1세 (재위 1125–1156), 조지 3세 (재위 1156–1184), 특히 그의 딸인 타마르 여왕 (재위 1184–1213) 치세 동안 왕국은 계속 번영했다.[1] 조지 3세가 사망하면서 주요 남계가 단절되었고, 왕조는 타마르 여왕과 바그라티온 가문의 후손으로 알려진 알란 왕자 다비드 소슬란과의 결혼을 통해 이어졌다.[20]
3. 3. 몽골 제국 침입과 왕국의 분열 (13세기 - 15세기)
1225년 호라즘 제국과 1236년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조지아의 "황금기"는 막을 내렸다. 몽골 통치에 맞선 투쟁은 이원 통치를 초래했고, 바그라티오니 왕조의 방계가 서부 조지아(이메레티 왕국)를 장악하게 되었다.[1] 조지 5세 (1299–1302, 1314–1346) 치하에서 잠시 통일과 부흥이 있었지만, 1386년에서 1403년 사이 투르크-몽골 정복자 티무르의 8차례 침략은 조지아 왕국에 큰 타격을 입혔다. 약 1세기 후, 강력했던 왕국은 카라 코윤루와 아크 코윤루의 침략으로 붕괴되었다.1490/91년경, 조지아 왕국은 세 개의 독립 왕국과 다섯 개의 반독립 공국으로 분열되었다.
독립 왕국 | 반독립 공국 |
---|---|
각각 바그라티오니 왕조의 경쟁 분파가 독립 왕국을 이끌었고, 반독립 공국은 각자의 봉건 씨족이 지배했다.
3. 4.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의 간섭 (16세기 - 18세기)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조지아의 여러 왕국은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의 간섭을 받으며 존속했다.[1] 이 시기에 많은 조지아 통치자들은 종주국으로부터 서임을 받기 위해 이슬람으로 개종하기도 했다.[1] 일부 바그라티오니 왕족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오스만 제국 또는 페르시아의 관직을 맡기도 했다. 특히 카르틀리의 경우, 1632년부터 로스톰 칸을 비롯한 이슬람교도 왕들이 40년 동안 이스파한의 다루가 직을 맡았다.끊임없는 내전에 휘말린 이메레티 가문은 여러 차례 단절을 겪으며 계승이 이어졌고, 왕국은 오스만 제국의 침략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했다. 한편, 카르틀리와 카헤티는 페르시아 지배자들에게 복종했으며, 페르시아가 분열된 봉신 왕국을 멸망시키려 했으나 실패했다. 두 동부 조지아 군주국은 1762년 에레클레 2세 왕 치하에서 재통일되었다. 에레클레 2세는 카헤티와 카르틀리 가문을 통합했고, 카르틀리는 1658년 이후 무크라넬리 분가에서 남성 후손으로 살아남았다.[1]
3. 5. 러시아 제국에 의한 병합 (18세기 - 19세기)
1783년, 에레클레 2세는 러시아 제국과 게오르기예프스크 조약을 체결하여 자신의 왕국을 러시아의 보호령으로 만들었다.[1] 그러나 1795년 페르시아의 아가 모하마드 칸 카자르가 트빌리시를 점령, 약탈하고 황폐화했을 때 러시아는 제때 도움을 주지 못했다.[21]1798년 에레클레 2세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조지 12세는 러시아 황제 파벨 1세에게 보호를 다시 요청했다.[1] 파벨 1세는 카르틀리-카헤티 왕국을 러시아 제국에 통합하되, 원주민 왕조에게 일정 수준의 내부 자치권을 주는 방안을 제시했다.[1] 1799년 러시아 군대는 트빌리시로 진군했다.[22]
협상이 진행 중이던 1800년 12월 18일, 파벨 1세는 카르틀리-카헤티 왕국의 러시아 제국 병합을 일방적으로 선언했다.[1][24] 1801년 9월 12일, 알렉산드르 1세는 파벨 1세의 결정을 재확인하고 바그라티오니 왕조를 조지아 왕위에서 폐위시켰다.[1][24]
이메레티 왕국의 솔로몬 2세는 1804년 4월 25일 엘라즈나우리 조약을 통해 러시아의 보호를 받기로 했으나, 1810년 2월 20일 러시아 군대에 의해 폐위되었다.[26] 이후 솔로몬 2세는 권력을 되찾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1815년 오스만 제국의 트라브존에서 망명 중 사망했다.[26][27]
3. 6. 러시아 제국 내의 바그라티오니 가문
러시아 제국에서 바그라티오니 가문은 저명한 귀족 가문이 되었다. 가장 유명한 인물은 카르틀리 왕국의 왕 예세의 증손자로서 러시아 장군이자 1812년 조국 전쟁의 영웅이 된 표트르 바그라티온 공이었다.[1] 그의 형제인 로만 바그라티온 공 또한 러시아 장군이 되어 러시아-페르시아 전쟁 (1826-1828)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1827년 예레반에 최초로 입성했다. 로만 바그라티온은 예술, 문학, 연극 후원으로도 유명했다. 그의 트빌리시 자택 극장은 코카서스에서 가장 훌륭한 극장 중 하나로 여겨졌다. 그의 아들 표트르 로마노비치 바그라티온 공은 트베리주 지사가 되었고, 이후 발트 지방 총독이 되었다. 그는 또한 러시아에서 금 시안화법 개발로 알려진 야금학 엔지니어였다. 드미트리 페트로비치 바그라티온 공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브루실로프 공세에 참전한 러시아 장군이었으며, 이후 적군에 합류했다.
4. 현대의 바그라티오니 가문
바그라티오니 가문의 대다수는 1921년 붉은 군대의 트빌리시 점령 이후 조지아를 떠났다.[1]
4. 1. 무크라니 분파
무흐라니 가문은 바그라티오니 왕조의 가장 오래된 부계 분가로, 조지아의 콘스탄틴 2세 왕의 직계 후손이다.[1] 원래 카르틀리 왕가의 방계였으나, 20세기 초 바그라티오니 가문의 가계적으로 가장 선임 가문이 되었다. 이들은 1724년까지 카르틀리의 통치를 잃었지만,[1] 1800년 러시아에 카르틀리-카헤티와 함께 합병될 때까지 무흐라니 공국을 유지했다.[1]이 가문은 부르봉 왕가, 비텔스바흐 가문,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 로마노프 왕조와 관련이 있다.
1942년, 왕조의 가계적으로 선임 분파인 이라클리(에레클레) 바그라티오니-무흐라넬리 왕자는 스스로를 조지아 왕가의 수장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망명지에서 조지아 전통주의자 연합을 설립했다.[1]
1990년대부터 바그라티오니-무흐라넬리 후손의 선임 구성원들이 수 세대 망명 생활을 끝내고 스페인에서 조지아로 귀국하기 시작했다. 2005년에는 호르헤 바그라티오니-무흐라넬리 왕자가 트빌리시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사망했다.[34] 그의 장남인 이라클리(''에레클레'') 왕자(1972년생)는 그의 남동생인 다비트 왕자(1976년생)에게 왕위 계승권을 넘겨주었다. 이후 트빌리시로 이주하여 조지아 시민권을 되찾은 다비트 왕자는 가문 회의의 수장이자 무흐라넬리 왕가의 작위를 받았다.[35]
4. 2. 그루진스키 분파
바그라티오니-그루진스키 가문은 계통상으로는 무크라니 공작 가문보다 후손이지만, 카헤티 왕국을 통치했으며, 1762년에는 두 왕국을 카르틀리-카헤티 왕국으로 재통합했고, 1800년 러시아 병합 전까지 주권을 유지했다.[36]누그자르 페트로비치 바그라티온-그루진스키 공(1950년 출생)은 카르틀리-카헤티의 마지막 왕인 조지 12세의 가장 연장자인 알려진 부계 후손이며, 따라서 무크라넬리스 가문보다 계통적으로 후손이지만, 1800년까지 조지아 왕국의 왕위를 잃지 않고 조지아의 일부 지역을 비교적 최근까지 통치해온 왕조의 카헤티 가문의 수장이다.
누그자르는 연극 및 영화 감독이며, 그의 아버지인 페트레 바그라티온-그루진스키 공(1920–1984)은 시인이자 "트빌리시의 노래"의 저자였다.
누그자르는 아들이 없기 때문에, 바그라트의 동생인 일리아 공(1791–1854)의 증손자인 예브게니 페트로비치 그루진스키 공(1947-2018)이 러시아 연방에 거주했으며, 동일한 장자 상속 원칙에 따라 추정 상속인으로 여겨졌다.[1] 그러나 그는 후손 없이 사망했으며, 누그자르 자신 외에는 그루진스키 가문에 남은 남성 후손(기록 및 공식적으로)이 없다. 그는 장자 상속에 근거하여 자신의 지위를 주장하지만,[1] 누그자르는 그의 장녀인 안나를 자신의 상속인으로 지정하는 것을 옹호한다.[37]
4. 3. 이메레티 분파
이메레티 왕국은 1810년에 독립을 잃은 조지아의 마지막 왕국이었다. 이메레티 가문의 수장으로 추정되는 세 가지 계보가 존재한다.- 폐위된 이메레티의 다비드 2세의 직계 남성 계보는 1978년 콘스탄틴 이메레틴스키 공자가 사망하면서 단절되었다. 그는 형의 세 딸을 남겼다.
- 누그자르 페트로비치 바그라티온-그루진스키 공자는 이메레티 분가의 수장이 20세기 초에 이메레티의 바그라트 공의 장남의 후손인 방계 분가로 이전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분가는 1937년에 남성 계보가 단절되었고, 2009년에는 여성 계보가 단절되었다.[37][38]
- 바그라트 공의 사생아의 후손인 또 다른 분가가 있다. 이 계보는 남성 계보로 살아남았으며, 다비드 바그라티오니 공자(1948년 출생)가 이끌고 있다.[39][40]
현재 이메레티 왕가의 조지아 분가 수장이자 이메레티 왕들의 직계 남성 후손은 이라클리 다비티스 제 바그라티오니(조지아어: ირაკლი დავითის ძე ბაგრატიონი)이다. 그는 이메레티의 알렉산드레 5세(1703/4년 ~ 1752년 3월)의 직계 후손이다. 이라클리는 1982년 7월 10일 조지아 이메레티 테르졸라에서 다비드 바그라티오니와 이리나 코바키제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바그라티오니-이메레티 가문의 미래 계승자이자 수장이며, 조지아 정교회 총대주교,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비잔틴 귀족 연합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41]
4. 4. 분파 통합 시도
누그자르 왕자의 딸인 안나 공주는 2009년 2월 8일 트빌리시 삼바 성당에서 다비트 바그라티오니-무흐라넬리 왕자와 결혼했다.[42] 이 결혼으로 그루진스키 가문과 조지아 왕가의 무크라니 가문이 통합되었으며, 3,000명의 관람객, 관리, 외국 외교관과 조지아 언론의 광범위한 보도를 이끌어냈다.[43]이 결혼은 1991년 독립 이후 조지아를 뒤흔든 정치적 당파 싸움의 혼란 속에서 조지아 정교회 총대주교 일리아 2세가 2007년 10월 국가 통합의 길로서 군주제 복원을 공개적으로 요구했기 때문에 왕조적 중요성을 가졌다.[44] 이로 인해 일부 정치인과 정당이 조지아 입헌 군주제를 고려하게 되었지만, 옛 왕조의 왕자들과 지지자들 사이에 경쟁이 발생했다.[43]
일부 조지아 군주주의자들은 그루진스키 가문의 주장을 지지하지만, 대부분의 왕가[28][45][30][31][32][33]를 포함한 다른 이들은 귀환한 무흐라넬리 가문의 주장을 지지한다.[2] 두 가문 모두 1505년에 사망한 조지아의 콘스탄틴 2세까지 조지아의 중세 왕들의 후손이며, 21세기까지 끊이지 않고 적법한 남성 혈통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다비트는 미혼인 형 이라클리와는 별개로 바그라티오니 가문의 ''남자 상속자''이며, 신부의 아버지는 동부 조지아의 통일 왕국을 통치했던 마지막 바그라티오니의 가장 연장자인 후손이다. 누그자르 그루진스키의 상속녀와 무크라니 상속자의 결혼은 왕위에 대한 그들의 경쟁을 해결할 수 있다.[2]
다비트 왕자와 안나 공주는 2011년 9월 27일 아들 조르지 바그라티온 바그라티오니 왕자를 낳았는데, 그는 무크라넬리와 그루진스키의 주장을 잠재적으로 통합한다. 만약 그루진스키 가문이나 무크라넬리 가문에서 장자 상속에 의해 선순위인 다른 바그라티오니 왕자가 태어나지 않고 현재 생존해 있는 왕자들보다 오래 산다면, 조르지 왕자는 바그라티오니 가문의 ''남자 상속자''이자 카르틀리-카헤티의 조지 13세의 ''일반 상속자''가 될 것이다.[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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