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크 코윤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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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크 코윤루는 14세기 중반 동부 아나톨리아의 디야르바크르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한 튀르크멘 부족 연합이다. 티무르 왕조에 복속하여 세력을 키운 카라 유루크 오스만은 트레비존드 제국과의 혼인을 통해 세력을 강화했다. 흑양 왕조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한 아크 코윤루는 우준 하산 시기에 최전성기를 맞이하여 이란 서부까지 영토를 확장했으나, 오스만 제국과의 전투에서 패배하며 위상이 흔들렸다. 이후 왕위 계승 다툼과 내분으로 쇠퇴하여 1501년 사파비 왕조에 의해 멸망했다. 아크 코윤루는 페르시아 문화를 수용하고, 페르시아어를 공용어로 사용했으며, 몽골의 법과 제도를 계승한 특징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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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크 코윤루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현지 이름 (아제르바이잔어) | Ağqoyunlular, آغقویونلولار (아그 코윤루얼) |
| 현지 이름 (페르시아어) | آق قویونلو (아그 코윤루) |
| 영어 표기 | Aq Qoyunlu (아크 코윤루) |
| 기타 표기 | 아크 코윤루 연맹, 아크 코윤루 술탄국, 아크 코윤루 제국, 백양 연맹 등의 표기도 가끔씩 쓰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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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 유형 | |
| 정부 형태 | 부족 연맹체, 군주제(술탄국) |
| 입법부 | Kengač (입법) Boy ḵānları (군사) |
| 수도 | |
| 초기 수도 (정착 이전) | 바이부르트 (여름 목초지) 팔루, 에르가니 (겨울 목초지) |
| 수도 | 디야르바키르 (1403년 4월 ~ 1468년) 타브리즈 (1468년 ~ 1478년 1월 6일) |
| 언어 | |
| 공용어 | 페르시아어 (궁정어, 문학어) 아제르바이잔어 (왕조어, 문학어) |
| 종교 | |
| 종교 | 수니파 이슬람교 |
| 통화 | |
| 통화 | 악체 아슈라피 디나르 탄카 하산베기 (1 하산베기 = 2 악체) |
| 역사 | |
| 존속 기간 | 1378년 ~ 1503년 |
| 건국 이전 | 카라 코윤루 |
| 멸망 이후 | 사파비 제국 오스만 제국 |
| 주요 사건 | 1340년: 트라브존 제국에 대한 투르 알리 베그의 첫 번째 습격 1378년: 건국 1452년 가을: 우준 하산의 쿠데타 1457년: 재통일 1497년 12월: 아흐마드 베그의 죽음, 아크 코윤루 분열 1503년 여름: 이란에서 아크 코윤루 통치 붕괴 1508년: 메소포타미아에서 아크 코윤루 통치 종료 |
| 정치 | |
| 지도자 직함 | 샤한샤 (1378년 ~ 1514년) |
| 주요 지도자 | 카라 율루크 오스만 베그 (1378년 ~ 1435년) 술탄 무라드 (1497년 ~ 1503년) |
2. 역사
14세기 중반, 바얀두르 부족은 디야르바크르를 중심으로 동부 아나톨리아에서 세력을 키워 부족 연합을 형성했다.[1] 실질적인 왕조의 시조인 카라 유루크 오스만은 티무르에게 복종하여 디야르바크르 지역의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그는 트레비존드 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3세의 딸과 결혼하여 관계를 구축했다.
1405년 티무르가 사망하자, 흑양 왕조가 세력을 확대했고, 1435년 카라 유루크 오스만은 흑양 왕조와의 전투에서 전사했다.[1]
1453년 즉위한 우준 하산은 흑양 왕조의 자한 샤에게 복속되어 있었지만, 트레비존드 제국 황녀와 결혼하여 동맹을 맺고 세력을 키웠다.[33] 1467년 우준 하산은 자한 샤를 기습하여 살해하고, 1469년에는 티무르 왕조의 아부 사이드를 격파하여 이란 서부의 패권을 확립했다. 이로써 동부 아나톨리아에서 이라크, 아제르바이잔, 이란 서부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33][34]
1473년 우준 하산은 바슈켄트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에게 패배했다. 이 패배로 아크 코윤루의 위신은 크게 실추되었고,[32] 1478년 우준 하산 사후 왕위 다툼으로 왕조는 혼란에 빠졌다.
1490년 야쿠브가 사망한 후, 아크 코윤루는 더 이상 통일되지 못하고 각지에서 왕족들이 자립하여 서로 다투었다.[1] 1501년 이스마일 1세가 타브리즈를 점령하고, 1508년까지 아크 코윤루 왕족들을 모두 쫓아내면서 왕조는 멸망했다.[1]
아크 코윤루를 대신하여 사파비 왕조가 아제르바이잔과 이란의 통치를 확립했다. 사파비 왕조의 주력 군대는 한때 아크 코윤루를 지탱했던 유목민들이었고, 이스마일 1세는 우준 하산의 혈통을 이어받았다.[1]
2. 1. 어원
'''아크 코윤루'''라는 이름은 문자 그대로 "흰 양을 가진 사람들"을 의미하며, 14세기 후반의 사료에서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처음에 학자들은 이 이름이 전통적인 토템 동물을 의미한다고 추정했지만, 라시드 앗 딘 하마다니에 따르면 튀르크인들은 토템 동물의 고기를 먹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며, 유목민들의 식단에서 양고기가 가지는 중요성을 고려해 볼 때 이러한 가설은 틀린 것으로 결론이 났다.[20] 또 다른 가설은 그 이름이 그들 무리의 주된 색깔을 가리킨다는 것이다.[1]일본어 명칭으로 널리 사용되는 백양조(白羊朝)는 튀르키예어로 이 부족 연합이 '''아크 코윤루'''(Akkoyunlu), 즉 "『하얀 양』에 속하는 자"라고 불린 것에서 유래한 직역 명칭이다.
2. 2. 기원과 초기 역사
바얀두르족은 튀르크멘 부족들 중 가장 지배적인 부족으로, 원래 중앙아시아에서 키메크-킵차크 연맹을 구성했던 7개의 부족 중 하나였다. 연맹이 붕괴되자 오구즈 튀르크에 합류했다. 이들이 언제 소아시아 일대로 유입되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11~12세기 경 셀주크 제국이 팽창할 무렵 다른 튀르크멘 부족들과 함께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비잔티움 제국의 연대기에 따르면, 바얀두르족은 적어도 1340년대부터 폰토스 산맥 남부의 바이부르트 지역에서 처음으로 목격되었다.[21] 이 연대기에서, 그들의 수령인 투르 알리 베그는 일 칸국의 가잔 칸 아래에서 아미르 지위를 획득한 "아미다 (디야르바크르)의 튀르크인 영주"로 언급되었다. 그의 지휘하에 그들은 트라페준타를 포위했지만 도시를 점령하는 데는 실패했다.[22] 왕조의 창시자인 카라 율루크 웃만 베그를 포함한 그들의 지도자들은[23] 비잔틴 공주들과 결혼했다.[24]
바얀두르족은 투르 알리 베그의 지도 아래 그리스계 트레비존드 제국을 약탈, 그 수도인 트라브존을 포위하면서 위세를 떨쳤다. 이에 트레비존드 황제 알렉시오스 3세는 이들과의 관계 개선과 함께 자신의 입지 강화를 위해서, 그의 누이 마리아와 투르 알리 베그의 아들 파크르 앗 딘과의 결혼을 추진했다.
14세기 중반 일 칸국 시대가 끝날 무렵, 이 지역의 튀르크멘 부족들은 여름에는 티그리스 강 상류 아르메니아의 목초지에서 생활하다가, 겨울에는 남쪽의 튀르키예 북동부(디야르바크르, 시바스)로 이동하였다. 14세기 말부터 아크 코윤루는 또 다른 오구즈족 연맹인 카라 코윤루와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아크 코윤루의 주요 부족은 바얀두르 부족이었다.[20]
1378년, 당시 바얀두르족의 수령 카라 율룩 오스만의 주도로 여러 튀르크멘 부족들이 결집하여 백양 왕조(아크 코윤루 연맹)을 건국했다. 그는 자신에게 대항하는 주변 세력들을 격파하는 동시에 인근의 대도시인 에르진잔 공격에 나섰으나, 술레이만 첼레비 휘하의 오스만 제국 군대가 진군하자 철수하였다.
우준 하산은 자신이 "오구즈 칸과 그의 손자 바얀두르 칸의 명예로운 후손"이라고 주장하곤 했다. 147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서신에서, 당시 아마시아의 총독이었던 셰흐자데 바예지드에게, 우준 하산은 바얀두르와 바야트 (부족) 부족 출신, 그리고 "오구즈 일"에 속하며 이전에 망기실라크, 호라즘, 투르케스탄에 거주했던 다른 부족들이 그의 궁정에서 봉사했다고 썼다. 그는 또한 바얀두르 부족의 탐가 (인장)를 그의 국가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이유로 바얀두르 탐가는 아크 코윤루 동전, 공식 문서, 비문 및 깃발에서 발견된다.[9]
아크 코윤루 술탄은 오구즈 투르크의 전설적인 조상인 오구즈 칸의 손자인 바얀디르 칸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25]
G. L. 루이스 교수에 따르면:[26]
''키타브-이 디야르바크리야''에 따르면, 우준 하산의 조상들은 예언자 아담까지 68대에 걸쳐 이름이 열거되고 그들에 대한 정보가 제공된다. 그 중에는 우준 하산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인 투르 알리 베이가 있는데, 그는 다른 자료에도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이전 시대에 나열된 페흘리반 베이, 에즈디 베이, 이드리스 베이가 실제로 존재했는지 말하기는 어렵다. 우준 하산의 조상으로 열거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구즈 전설과 오구즈 통치자와 관련된 이름이다.[27]
2. 3. 소규모 연맹
14세기 후반, 칭기즈 칸의 후손이자 튀르크-몽골계 정복군주인 티무르가 패자로 부상했다. 백양 왕조는 티무르의 동부 아나톨리아 원정에 협력했으며, 앙카라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을 상대로 분전하였다. 티무르는 1402년, 카라 율룩 오스만에게 디야르바크르를 주었고, 백양 왕조는 이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립했다. 1405년 티무르 사후, 카라 율룩 오스만은 남동부 아나톨리아를 장악하고 1407년 맘루크 술탄국의 침공을 격퇴했다.그러나 흑양 왕조(카라 코윤루)의 팽창으로 백양 왕조는 경쟁하게 되었다. 흑양 조의 군주 카라 유수프는 티무르 제국의 아제르바이잔 방면 군대를 격파하고, 미란 샤를 사르드루드 전투에서 패사시키며 서부 이란과 이라크 북동부를 확보했다. 1409년과 1410년, 아르투크 왕조와 잘라이르 왕조를 침공하여 아나톨리아 동부와 메소포타미아를 합병했다.
카라 율룩 오스만은 카라 유수프에게 1412년과 1417년에 패배했고, 1418년 마르딘 침공은 실패했다. 1421년 마르딘 재침공은 카라 유수프의 아들 카라 이스칸다르에게 패배했다. 1429년 맘루크 술탄국이 우르파를 약탈하고 오스만의 아들 하빌 베그를 처형했다. 1430년, 맘루크 술탄 사이프 앗 딘 바르스베이가 디야르바크르로 진군했다. 1435년, 오스만은 티무르 제국의 지원을 받아 에르주룸 부근에서 카라 이스칸다르를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사망했다.
14세기 중반, 바얀두르 부족은 디야르바크르 중심의 부족 연합을 형성했다. 카라 유루크 오스만은 티무르에게 복종하여 디야르바크르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트레비존드 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3세는 여동생과 딸을 각각 파흐르딘 쿠르트르그와 카라 유루크 오스만에게 시집보냈다.[1]
1405년 티무르 사후, 흑양 왕조가 세력을 확대했고, 1435년 카라 유루크 오스만은 흑양 왕조와의 전투에서 전사했다.[1]
2. 4. 우준 하산
아크 코윤루 투르크멘족은 1402년 티무르가 현재 터키의 디야르바크르 전체를 양도하면서 처음으로 영토를 획득했다. 오랫동안 아크 코윤루는 라이벌인 카라 코윤루("검은 양 투르크멘족") 때문에 영토를 확장할 수 없었다. 그러나 1467년, 우준 하산이 카라 코윤루의 지도자 자한 샤를 격파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28]자한 샤 사후, 그의 아들 하산 알리는 티무르 왕조의 아부 사'이드 미르자의 도움을 받아 아제르바이잔으로 진군했으나, 아라스 강에서 우준 하산에게 포위되어 격퇴되었다.[28] 이후 우준 하산은 바그다드와 페르시아만 주변 지역을 점령하고, 동쪽으로는 호라산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동진은 아크 코윤루에게 큰 위협이 되었고, 카라만 왕조 등과 동맹을 맺게 했다.
1464년, 우준 하산은 베네치아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으나, 지원은 오지 않았다. 1473년 오틀루크벨리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에 패배했지만,[28] 아크 코윤루는 멸망하지 않았다.
1470년, 우준 하산은 아부 바크르 티흐라니에게 아크 코윤루 연맹의 역사를 편찬하게 했다.[29] ''키타브-이 디야르바크리야''는 우준 하산을 '사히브-키란'으로 칭했는데, 이는 티무르 왕조가 아닌 통치자에게 이 칭호를 부여한 최초의 사례였다.[29]
우준 하산은 시아파 종교 기관을 장려하고, 반율법주의 종파를 추구하도록 명령했다. 그는 딸 알람샤 할리메 베굼을 사파비 종파의 수장 하이다르와 결혼시켰다.[29]
2. 4. 1. 통치
1405년 티무르가 사망하면서 티무르 왕조에 대항하여 세력을 잃어가던 흑양 왕조가 다시 세력을 확대했고, 1435년에는 카라 유루크 오스만이 흑양 왕조와의 전투에서 전사했다.이후 흑양 왕조와 티무르 왕조가 아제르바이잔 및 이란 서부의 지배권을 두고 격렬하게 다투는 틈을 타 아크 코윤루는 다시 세력을 확대하여, 1453년에 즉위한 우준 하산 치세 아래에서 최전성기를 맞이했다. 우준 하산은 초기에는 흑양 왕조의 자한 샤에게 복속되어 있었으나, 흑해 연안의 트레비존드 제국 황녀와 결혼하여 동맹을 맺고 세력을 키웠다.[33] 1467년 우준 하산은 무간 평원에서 자한 샤를 기습하여 살해하고, 이후 몇 년에 걸쳐 흑양 왕조의 옛 영토를 병합했다. 1469년에는 티무르 왕조의 아부 사이드를 격파하여 이란 서부에서의 패권을 확립하고, 동부 아나톨리아에서 이라크, 아제르바이잔, 이란 서부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33][34]
그러나 같은 시기 아나톨리아 서부와 중부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고 아나톨리아 병합을 목표로 동진하던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의 세력이 강성해지고 있었다. 1473년 우준 하산은 오스만 제국의 대군과 맞서 싸웠으나, 오스만 제국이 자랑하는 화기로 무장한 상비군 앞에서 패배했다. 전쟁 후 즉시 강화가 맺어져 유프라테스강을 국경으로 확정하여 영토 손실은 없었지만, 이 패배로 아크 코윤루의 위신은 크게 실추되었다.[34] 우준 하산은 왕족들의 반란에 시달렸고, 1478년 우준 하산이 사망하자 왕위를 둘러싼 다툼이 일어나 왕조는 혼란에 빠졌다.
우준 하산 사후 왕위 다툼에서 승리한 야쿠브가 1490년에 사망하자, 아크 코윤루에는 더 이상 통일된 권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영토 각지에서 왕족들이 자립하여 서로 다투면서, 아크 코윤루는 급속히 쇠퇴해 갔다.
1501년 아르다빌을 거점으로 삼은 신비주의 교단 사파비 교단의 교주 이스마일이 교단원인 유목민들을 규합하여 아크 코윤루 일족으로부터 타브리즈를 빼앗았다. 아크 코윤루의 왕족들은 1508년까지 이스마일에 의해 축출되었고, 아크 코윤루는 멸망했다.
아크 코윤루를 대신하여 새롭게 아제르바이잔과 이란의 통치권을 확립한 이스마일의 사파비 왕조 역시, 그 주력 군대는 과거 아크 코윤루를 지탱했던 유목민들이었다. 이스마일 본인도 아크 코윤루의 제4대 군주 우준 하산의 혈통을 이어받고 있었다. 키질바시라 불린 이들의 힘으로 사파비 왕조는 이란 전역을 지배하는 왕조로 성장했다.
2. 4. 2. 카라 코윤루 정복
1458년의 협상 이후 티무르 제국의 아부 사이드 미르자는 자한 샤와 자주 서신을 교환했는데, 자한 샤가 우준 하산에게 패하고 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1468년, 아부 사이드는 하산 알리가 보낸 구원 요청을 수락했다. 이후 하산 알리가 사망하자, 아부 사이드는 자한 샤의 넷째 아들 미르자 유수프를 흑양 왕조의 군주로 내세우면서 메르브에서 출정하였다.이에 우준 하산은 건국자인 카라 율룩 오스만 때부터 백양 왕조가 티무르 제국의 봉신임을 강조하면서, 이제까지의 충성심을 유지하겠다며 아부 사이드에게 평화를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아부 사이드는 우준 하산의 요청이 진심이 아닐 것이라 판단하였으며, 그의 증조부 티무르의 영광을 다시 한번 재현하여 중앙아시아에서 동부 아나톨리아에 걸친 티무르 제국의 전성기를 부활시키려는 야망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거절했다. 또한 그는 우준 하산의 지속적인 우호 관계 유지 서신을 무시하고 티무르의 후손인 자신에게 직접 와서 복속하라는 무리한 요구만을 반복하였다.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우준 하산은 자한 샤 때와 마찬가지로 정면 대결을 철저히 피하는 한편, 협상 요구를 통해 시간을 끌면서 적들을 동부 아나톨리아의 험준한 산지로 유인하였다. 아부 사이드의 대군은 아제르바이잔 일대의 혹독한 겨울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약 1931km에 달하는 호라산 보급로마저 백양 조에게 위협을 받으면서 상황이 점점 악화되었다. 시르반으로부터 오는 식량 수송 선박과 빠르게 지원군이 올 수 있는 모든 경로들이 차단되었다. 식량, 방한복 및 동물들의 고갈, 여기에 더해진 간헐적인 기습 공격은 아부 사이드 진영의 사기를 현저하게 감소시켰다.
물자가 부족한 채로 아르다빌을 거쳐 무간 평원에 진입한 아부 사이드의 군대는 적과 만나기도 전에 지쳐버렸다. 우준 하산은 아들들에게 정예 기병대를 주며 그들을 추격하게 하였고, 카라바흐에서 따라잡힌 아부 사이드는 대패하고 포로로 잡혔다.(카라바흐 전투)
3일 후, 하산은 아부 사이드를 자신의 동맹이자 티무르 제국의 왕족인 야드가르 무함마드에게 넘겨주었다. 아부 사이드가 자신의 증조할머니 가우하르 샤드를 처형한 것에 대해 증오심을 품고 있었던 야드가르는 1469년 2월 8일 경 그를 참수하거나, 또는 독살했다.

그 뒤 하산은 동쪽 국경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야드가르에게 군대를 주어 티무르 제국의 수도 헤라트로 진격하게 했다. 하지만 그해 9월, 헤라트의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는 야드가르 무함마드를 체나란 전투에서 격파했다. 그러자 하산은 자신의 두 아들과 또 다른 정예병을 파견함과 동시에 후세인의 동맹인 카라 코윤루의 미르자 유수프를 사로잡아 처형했다. 백양 조 - 야드가르 연합군은 이듬해 7월, 헤라트에서 후세인을 축출하며 목표를 달성하였다. 그러나 후세인은 8월 말에 도시를 수복하였고, 야드가르를 사로잡아 처형하는 한편 혼란을 틈타 호라산으로 치고 들어오는 아부 사이드의 아들들에게 패배를 안겨주었다.
후세인은 페르시아 동부의 루트 사막을 경계로 아크 코윤루와 휴전을 맺었다. 우준 하산이 서쪽의 오스만 제국을 주시하고 있었기에 이 휴전은 준수될 수 있었다.
2. 4. 3. 티무르 제국 격퇴
1463년, 베네치아 공화국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오스만-베네치아 전쟁)에서 동맹을 맺기 위해 아크 코윤루의 우준 하산에게 사절단을 파견했다. 우준 하산은 흑양 왕조와의 대립 때문에 제안을 거절했지만, 답례 사절을 보내 동맹의 여지를 남겼다. 1471년 베네치아가 다시 사절을 보내자 우준 하산은 동맹을 수락했다. 또한 로도스 기사단, 키프로스 왕국 등과도 동맹을 맺어 오스만 제국을 견제했다.우준 하산은 카라만 공국 내전에 개입하며 오스만 제국과 갈등을 빚었다. 1464년 카라만 공국에서 왕위 계승 분쟁이 발생하자, 우준 하산은 이샤크를, 오스만 제국은 피르 아흐메트를 지지했다. 오스만의 지원을 받은 피르 아흐메트가 승리했지만, 영토 문제로 오스만 제국과 갈등이 생겼다. 1466년 메흐메트 2세는 카라만 공국의 주요 도시를 점령했고, 1471년 피르 아흐메트와 그의 동생 카심은 아크 코윤루로 피신했다. 그들은 우준 하산을 설득해 군대를 얻어 일시적으로 카라만 왕조를 복원했다.
1471년 말, 우준 하산은 오스만 제국이 그리스 문제에 집중하는 틈을 타 아나톨리아를 공격, 에르진잔에서 오스만군을 격파하고 토카트를 함락시켰으며, 아크셰히르까지 진군했다. 1472년에는 조지아 왕국을 침공하여 수도 트빌리시를 점령하고 바그라트 6세에게 공물을 받았다.
메흐메트 2세는 동부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아크 코윤루와 맞서기로 결정했다. 1473년 8월 1일, 양군은 말라티야 인근 유프라테스 강에서 대치했다. 오스만군은 화기로 무장한 반면, 아크 코윤루 군대는 전통적인 튀르크멘 경기병이 주력이었다. 우준 하산은 병력을 나누어 오스만군을 유인한 후 포위 섬멸했지만, 메흐메트 2세는 본대를 재정비했다.
10일 후, 양군은 에르진잔 인근의 오틀루크벨리에서 다시 격돌했다. (\[\[오틀루크벨리 전투]]) 메흐메트 2세는 예니체리를 중앙에, 기병대를 양측에 배치했고, 우준 하산은 병력을 4개 본대와 1개 별동대로 나누었다. 전투는 오스만 기병대가 아크 코윤루 좌익을 공격하며 시작되었다. 우준 하산은 오스만군 중앙이 약화되었다고 판단, 총공격을 감행했으나, 아크 코윤루 경기병대는 오스만 포병대와 예니체리의 화력에 전멸당했다. 우준 하산은 패주했고, 오스만군은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우준 하산은 메흐메트 2세의 강화 제안을 수용했고, 아크 코윤루는 동부 아나톨리아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다. 오스만 제국은 소아시아에서의 패권을 확립했으며, 아크 코윤루의 지원을 받지 못한 카라만 공국은 1487년 멸망했다.
2. 4. 4. 대오스만 전쟁: 오틀루크벨리 전투
1473년 우준 하산은 바슈켄트 전투에서 메흐메트 2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 군대와 맞서 싸웠으나, 오스만 제국의 화기로 무장한 강력한 상비군에 패배했다. 전쟁 후 강화가 맺어져 유프라테스강이 국경으로 정해졌고, 영토 손실은 적었지만 이 패배로 백양 왕조의 위신은 크게 몰락했다.[32] 이후 우준 하산은 왕족들의 반란에 시달렸다.2. 4. 5. 이후
술탄 할릴이 1478년에 사망한 후, 우준 하산의 손자인 바이스운구르(야쿠브의 아들)와 루스탐(막수드의 아들) 사이에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이 와중에 그들의 사촌인 아흐마드 베그가 등장했는데, 그는 1475년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한 우준 하산의 장남 우구르루 무하마드의 아들이었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는 우구르루 무하마드를 환대하고 자신의 딸과 결혼시켰으며, 이 둘 사이에서 아흐마드 베그가 태어났다.[32]바이스운구르는 1491년에 폐위되어 타브리즈에서 추방되었고, 1493년에 사망하기 전까지 여러 차례 복위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루스탐(1478–1490)은 종교 기관과 유명한 수피 교단을 회유하고자 1492년에 셰이크 하이다르 사파비의 아들들이 아르다빌로 돌아가는 것을 허용했다. 그러나 2년 후, 아이바 술탄은 그들의 부상이 다시 위협적이라고 판단하여 재체포를 명령했지만, 그들의 막내 아들인 이스마일은 당시 7살이었고 라히잔에서 지지자들에게 숨겨졌다.[1][33]
하산 룸루의 ''아산 알-타바리크''에 따르면, 1496~97년에 하산 알리 타르카니는 오스만 제국으로 가서 술탄 바예지드 2세에게 아제르바이잔과 페르시아 이라크가 방어력이 없다고 말하며, 그 왕국의 상속자인 아흐마드 베그를 오스만 군대와 함께 보내야 한다고 제안했다. 바예지드는 이 제안에 동의했고, 1497년 5월 아흐마드 베그는 아락세스 근처에서 루스탐과 싸워 그를 물리쳤다.[32]
아흐마드의 죽음 이후, 아크 코윤루는 더욱 분열되었다. 국가는 서부의 알반드 미르자, 우준 하산의 조카 카심, 디야르바키르의 월경지에 있는 카심, 파르스와 이라크-아잠에 있는 알반드의 형제 모하마드(1500년 여름에 사망하고 모라드 미르자로 대체됨) 등 세 명의 술탄에 의해 통치되었다. 1501년 가을, 이란에서 아크 코윤루 국가의 붕괴는 2년 전에 라히잔을 떠나 많은 투르크멘 전사들을 모은 이스마일 사파비에게 패배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스마일은 1503년 여름에 이라크-아자미, 파르스와 케르만, 1507–1508년에 디야르바키르, 1508년 가을에 메소포타미아를 정복했다. 오스만 군대의 도움으로 왕위를 되찾기를 희망했던 마지막 아크 코윤루 술탄 모라드는 이스마일의 키질바시 전사들에게 로하다의 마지막 요새에서 패배하여 살해당했으며, 아크 코윤루 왕조의 정치적 통치는 끝났다.[28][1]
2. 5. 야쿱 베그
우준 하산이 1478년 초에 사망하고 그의 아들 할릴 미르자가 뒤를 이었지만, 같은 해 7월 호이 전투에서 그의 남동생 야쿠브 휘하의 연합군에게 패배했다.[30]1478년부터 1490년까지 통치한 야쿠브는 한동안 왕조를 유지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 초기 4년 동안 왕위를 찬탈하려는 일곱 명의 도전자가 있었고, 그들을 진압해야 했다. 그의 아버지와 달리 야쿠브 베그는 대중적인 종교 의식에 관심이 없었고, 특히 투르크족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을 소외시켰다. 대다수의 투르크족은 셰이크 하이다르가 이끄는 극단적인 시아파 이데올로기를 가진 무장 조직이 된 사파위야 교단에 가담했다. 야쿠브는 처음에는 셰이크 하이다르와 그의 추종자들을 체르케스인과의 성전에 보냈지만, 곧 셰이크 하이다르와 그의 교단의 군사력을 두려워하여 동맹을 파기하기로 결정했다. 조지아로 진군하는 동안 셰이크 하이다르는 아버지 셰이크 주나이드 (1460년 암살)에 대한 복수로 야쿠브의 봉신 중 하나인 쉬르반샤를 공격했고, 야쿠브는 쉬르반샤에게 군대를 보내 하이다르를 격파하고 죽였으며 그의 세 아들을 포획했다. 이 사건은 아제르바이잔과 아나톨리아 투르크멘족 사이에서 사파비 왕조 지지 감정을 더욱 강화시켰다.[1][31]
야쿠브가 사망한 후 다시 내전이 발발했고, 아크 코윤루는 내부에서 붕괴되었으며, 이웃 국가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게 되었다.

2. 6. 끝없는 내전
1490년 우준 하산의 아들 야쿠브가 사망한 후, 백양 왕조는 더 이상 통일되지 못했다. 각지의 왕족들이 독립하여 서로 다투면서, 백양 왕조는 빠르게 자멸했다.[1]1501년, 아르다빌을 근거지로 둔 신비주의 교단인 사파비 교단의 교주 이스마일이 교단원 유목민들을 모아 타브리즈를 점령했다. 이스마일 1세는 우준 하산의 혈통을 이어받았다.[1] 1508년까지 백양 왕조의 왕족들은 이스마일 1세에게 모두 쫓겨나 멸망했다.[1]
백양 왕조를 대신하여 사파비 왕조가 아제르바이잔과 이란의 통치를 확립했다. 사파비 왕조의 주력 군대는 한때 백양 왕조를 지탱했던 유목민들이었다. 키질바시라 불린 이들의 힘으로 사파비 왕조는 이란 전역을 지배하는 왕조로 성장했다.[1]
2. 7. 쇠퇴와 멸망
1473년, 우준 하산은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트 2세와 바슈켄트 전투(오틀룩벨리 전투)에서 맞붙었다. 우준 하산이 이끄는 유목민 기병은 선전했지만, 화기로 무장한 오스만 제국의 상비군에 패배했다. 이 패배로 백양 왕조의 위신은 크게 떨어졌다.[43] 전쟁 후 유프라테스강을 국경으로 하는 강화가 맺어졌지만, 우준 하산은 왕족의 반란에 시달렸다. 1478년 우준 하산이 사망한 후 왕위 다툼이 벌어져 왕조는 혼란에 빠졌다.1490년 우준 하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야쿠브가 사망하면서, 백양 왕조는 더 이상 통일을 유지할 수 없었다. 각지의 왕족들이 자립하여 서로 다투면서 왕조는 급속히 쇠퇴하였다.
1501년, 아르다빌을 근거지로 하는 신비주의 교단 사파비 교단의 교주 이스마일 1세가 유목민들을 규합하여 백양 왕조로부터 타브리즈를 빼앗았다. 1508년까지 백양 왕조의 왕족들은 모두 이스마일 1세에게 쫓겨나 멸망했다.
백양 왕조를 대신하여 아제르바이잔과 이란의 통치권을 확립한 사파비 왕조는, 한때 백양 왕조를 지탱했던 유목민들을 주력 군대로 삼았다. 이스마일 1세는 백양 왕조의 4대 군주 우준 하산의 혈통을 이어받았으며, 키질바쉬라 불린 유목민들의 힘으로 이란 전역을 지배하는 왕조로 성장했다.
3. 정부
백양 왕조는 오구즈 튀르크의 베군두르 또는 바얀두르 씨족 출신으로,[34] 오구즈의 반신화적인 시조인 ''오구즈 카간''의 후손으로 여겨졌다.[35] 바얀두르는 군주보다는 정치가처럼 행동했으며, 트란스카우카시아(현재의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조지아)의 상인 및 봉건 계급의 지지를 얻었다.[35] 아크 코윤루는 카라 코윤루와 함께 칭기즈 혈통을 사용하여 정당성을 확립한 마지막 이란 정권이었다. 야쿱 베그 치하에서 칭기즈의 ''야사''(유라시아 대초원 지대의 중세 튀르크-몽골족의 전통적인 유목 법)가 해체되었다.
우준 하산이 이란 본토 대부분을 정복하면서 권력의 중심이 동쪽으로 이동했고, 아크 코윤루는 행정과 문화에 이란 관습을 채택했다. 이란 지역에서 우준 하산은 여러 세대에 걸쳐 다양한 왕조에서 섬겼던 가문 출신의 서기관들과 함께 이전의 관료 구조를 유지했다.[1] 아크 코윤루의 4대 최고 문관직은 모두 이란인들이 차지했으며, 우준 하산 치하에서 그들은 대평의회(''디반'')를 이끄는 재상, 고위 재정 회계사인 ''mostawfi al-mamalek'', 국새를 부착하는 ''mohrdar'', 왕실 법원을 감독하는 ''marakur'' ("마구간 관리인")이었다.[1]
오스만 술탄의 편지에서 아크 코윤루의 왕들에게 보내는 내용에는 ("이란 왕들의 왕"), ("이란 술탄들의 술탄"), (''샤한샤-에 이란 하디브-에 아잠'' "이란의 샤이자 페르시아의 통치자"), ''Jamshid shawkat va Fereydun rāyat va Dārā derāyat'' ("잠시드처럼 강력하고, 페레이둔의 깃발이며, 다리우스처럼 현명한") 등의 칭호가 사용되었다.[36] 우준 하산은 또한 ''파디샤-이 이란'' ("이란의 파디샤")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그의 방계 손자인 사파비 제국의 창시자 이스마일 1세가 재차 채택했다.[37]
4. 문화
아크 코윤루는 아흘리 시라지, 카말 알딘 바나이 하라비, 바바 피가니, 샤히디 쿠미와 같은 시인을 포함하는 페르시아 문학을 후원했다.[38] 야쿱 통치 시대에 아크 코윤루 궁정은 페르시아 시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16세기 아제르바이잔 시인 푸줄리 또한 아크 코윤루 통치하에 태어나 자랐으며, 샤 알반드 미르자를 위해 최초로 알려진 시를 썼다.[38]
누르 알딘 압드 알라흐만 자미는 페르시아어로 쓰여진 시 ''살라만 바 압살''을 야쿱에게 헌정했다. 야쿱은 자미에게 후한 선물을 주었다. 자미는 또한 야쿱의 부도덕한 행동을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찬가 ''실실라트 알자하브''를 썼다. 야쿱은 아흘리 시라지의 사랑에 대한 비유적인 마스나비 ''샴 바 파르바나''와 바나이의 5,000행 서사시 ''바흐람 바 비루즈''를 포함한 페르시아 시를 헌정받았다.
야쿱의 외조카인 압드 알라 하티피는 아크 코윤루 궁정에서 보낸 5년 동안 시를 썼다.
우준 하산과 그의 아들 할릴은 다른 저명한 수피들과 함께 코브라비와 네마트알라히 타리카트의 구성원을 후원했다. 파즐랄 b. 루즈베흐 콩지 에스파니의 ''타리흐에 람르예 아미니''에 따르면 야쿱의 통치를 다룬 궁정 의뢰 역사서에서 우준 하산은 수피 공동체 휴양을 위해 아크 코윤루 지역에 약 400개의 구조물을 건설했다.
1469년, 우준 하산은 티무르 왕조의 술탄 샤루크 2세 빈 아부 사이드의 머리를 카이로의 새로 등극한 알아슈라프 카이트베이 궁정에 대사관과 함께 보냈다. 이 선물과 함께 아크 코윤루-티무르 간의 약 5개월 전 갈등으로 이어진 사건들을 맘루크 술탄에게 설명하고, 특히 술탄 아부 사이드의 맘루크 및 아크 코윤루 영토에 대한 공격 계획을 강조하는, 페르시아어로 된 ''파트나마''가 함께 전달되었다. 이 계획은 카이트베이의 충실한 동료 우준 하산에 의해 좌절되었다. 카이트베이의 부정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우준 하산은 맘루크 술탄국에 페르시아어로 서신을 계속 보냈다.
5. 행정 구조
백양 왕조(아크 코윤루)의 정부는 대부분 튀르크멘인들로 구성되었지만, 페르시아인들도 관직을 차지할 수 있었다. 특히 페르시아 기성 귀족 가문의 자제들은 쉽게 정계에 진출할 수 있었다. 아크 코윤루의 지도자들은 오구즈 튀르크의 베군두르 또는 바얀두르 씨족 출신이었으며,[34] 오구즈의 반신화적인 시조인 ''오구즈 카간''의 후손으로 여겨졌다.[35]
우준 하산이 이란 본토 대부분을 정복하면서 권력의 중심이 동쪽으로 이동했고, 아크 코윤루는 행정과 문화에 이란 관습을 채택했다. 이란 지역에서 우준 하산은 여러 세대에 걸쳐 다양한 왕조에서 섬겼던 가문 출신의 서기관들과 함께 이전의 관료 구조를 유지했다.[1] 아크 코윤루의 4대 최고 문관직은 모두 이란인들이 차지했으며, 우준 하산 치하에서 그들은 다음과 같았다.[1]
| 직책 | 설명 |
|---|---|
| 재상 | 대평의회(디반)를 이끎 |
| 모스타우피 알마말레크(mostawfi al-mamalek) | 고위 재정 회계사 |
| 모흐르다르(mohrdar) | 국새를 부착 |
| 마라쿠르(marakur) | "마구간 관리인", 왕실 법원을 감독 |
오스만 제국 술탄이 아크 코윤루의 왕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ملك الملوك الأيرانية|이란 왕들의 왕ar, سلطان السلاطين الإيرانية|이란 술탄들의 술탄ar, شاهنشاه ایران خدیو عجم|샤한샤-에 이란 하디브-에 아잠fa "이란의 샤이자 페르시아의 통치자", ''Jamshid shawkat va Fereydun rāyat va Dārā derāyat'' "잠시드처럼 강력하고, 페레이둔의 깃발이며, 다리우스처럼 현명한" 등의 칭호가 사용되었다.[36] 우준 하산은 또한 ''파디샤-이 이란'' "이란의 파디샤"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37]
6. 군사 구조
아크 코윤루의 군사 조직은 유목 문화와 정주 문화의 군사적 전통을 융합한 형태였다. 군대는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었는데, 투르크멘족이 주축이었지만 페르시아 부족민도 포함되었다.[40][41] 아크 코윤루 군대의 민족적 배경은 아제르바이잔의 '사르바르', 페르시아와 이라크 사람들, 이란자민 아스케르, 쿠르디스탄의 딜라베르, 투르크멘 메흐타르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 매우 이질적이었다.
아크 코윤루의 군사 조직 구조는 다음과 같다.
| 직책 | 역할 | 직책 | 역할 | ||
|---|---|---|---|---|---|
| 근위대장 (코르추 바시) | 군 부대 지휘관 (아미르 알-우마라 – 아스케리 코슌) | 기수 (에미르 알렘) | 타바치 | ||
| 카디 나지르 | 아미르 비티크치 | 왕실 호위대 (보이 누케르) | 근위병 (코르추) | ||
| 공병대 | 수석 기병 (에미르 아후르) | 수비대 | 수렵 감독관 (아미르-이 시카르) | ||
| 포병 | 군사 감찰관 (아리즈-이 라슈카르) | 도로 경비병 | 병참 장교 (부카울-이 라슈카르) | ||
| 정규군 (제리) | 수색대 (발라르구치) | 유목 부대 (미르-이 엘) | 군사 감찰관 (아미리 잔다르) | ||
| 잔다르 부대 | 식량 공급 책임자 (리캅다르) | 지원군 책임자 (야사울 바시) | 야사울 부대 | ||
| 야영 책임자 (유르추 바시) | 유르추 부대 | 전령 (차부시) | 비밀 요원 / 스파이 (사히브 하바르) | ||
| 자수스 | 자그디울 | 내무 책임자 (에시크 아가시 바시) | | |
7. 계보도
wikitext
{| class="wikitable"
|+ 아크 코윤루 통치자 가계도
|-
! style="background:#FFFFFF;" |
| 투르 알리 베그 |
| 쿠틀루그 (1378~1389) |
|-
! style="background:#FFFFFF;" |
| 아흐마드 1세 (1389~1403) | 카라 율루크 우스만 (1403~1435) |
|-
! style="background:#FFFFFF;" |
| 쾨니치 아르슬란 (1453~1457) | 함자 베그 (1438~1444) | 알리 (1435~1438) |
|-
! style="background:#FFFFFF;" |
| 우준 하산 (1453~1478) | 자한기르 (1435~1438) |
|-
! style="background:#FFFFFF;" |
| 우글루 무함마드 | 술탄 칼릴 (1478) | 야쿱 베그 (1478~1490) | 막수드 | 유수프 | 카심 (1497~1501) |
|-
! style="background:#FFFFFF;" |
| 아흐메드 2세 (1497) | 바이순쿠르 (1490~1492) | 술탄 무라드 (1499~1508) | 루스탐 (1492~1497) | 무함마드 (1497~1499) | 알반드 (1497~1504) |
|-
! style="background:#FFFFFF;" |
| 자인 알 아비딘 (1504~150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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