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바 다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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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바 다쓰이는 1850년 도사국에서 태어나 게이오기주쿠 대학에서 정치학과 역사학을 전공한 일본의 사상가이자 자유민권운동가이다. 그는 영국 유학 후 자유민권운동에 참여하여 자유당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1885년 폭발물 소지 혐의로 체포된 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1888년 사망했다. 바바는 일본 최초의 정치적 망명가로 평가받으며, 자유주의 사상을 설파하고 일본의 정치 상황을 비판하는 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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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 다쓰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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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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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바바 다쓰이 |
한자 표기 | 馬場 辰猪 |
출생일 | 1850년 7월 24일 |
출생지 | 고치, 일본 |
사망일 | 1888년 11월 1일 |
사망지 | 필라델피아, 미국 |
묘지 | 야나카 묘지 |
활동 | 사족 반란 자유민권운동 |
소속 | 국우회 자유당 |
번 | 도사 번 |
로마자 표기 | Baba Tatsui |
주요 업적 | |
알려진 업적 | 일본 개혁 운동 |
주요 저서 | 일본어 문법 첫걸음 (1873) |
2. 생애
바바 다쓰이는 도사국(지금의 고치현) 출신의 사무라이 가문에서 태어났다. 1864년 현지 학교에서 한학, 펜싱, 유럽식 군사 훈련을 받았다. 1865년 가족에 의해 에도에서 해양 공학을 공부하도록 선발되었고, 후쿠자와 유키치와 함께 공부하기 위해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1]
이후 자유민권운동에 참여하여 민주 헌법 제정을 요구했다. 국유회와 교손도주를 공동 설립하고, 자유당 부회장을 역임하며 『자유 신문』과 『조야 신문』 등에 기고했다. 메이지 기주쿠 야학을 설립하고 법률 사무소를 열기도 했다. 1885년 폭발물 소지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후, 1886년 미국으로 망명하여 1888년 필라델피아에서 사망했다.[9][10]
이노우에 치유에 따르면, 바바 다쓰이는 3~4시간 동안 웅변을 이어갈 정도로 연설에 매우 능숙했다. 그는 민중 앞에서 웅변법 연구를 공개하고, 서양 학설을 바탕으로 자유의 이치를 해설한 선구자였다. 다만, 한학 실력이 부족하여 저술로 남길 만한 것은 없다고 평가받는다.
2. 1. 초기 생애 (1850년 ~ 1870년)
도사국에서 태어난 바바 다쓰이는 게이오기주쿠 대학의 전신인 게이오 의숙에서 정치학과 역사학을 공부했다.[1] 1869년, 게이오 의숙으로 돌아와 교사로도 일했다. 1870년에는 도사번이 선발한 영국 유학생으로 뽑혔는데, 원래 선발된 사람이 유곽에서 문제를 일으켜 할복 자살하는 바람에 보결로 뽑힌 것이었다.[1] 그는 너무 어린 나이에 유학을 간 탓에 한문 실력이 부족했고, 오히려 영어가 더 편해서 영어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1870년 8월 8일, 바바 다쓰이는 도사 번의 유학생으로서 영국에 유학하여 해군과 법학을 배웠다.[1] 그의 스승 후쿠자와 유키치는 "귀국 후에는 우리 네이션의 데스티니를 담당해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라며 큰 기대를 걸었다. 바바 다쓰이는 메이지 초기 가장 축복받은 신지식인으로서, 일본의 미래를 위해 서구의 정신을 배우고 일본의 현황에 대한 서구의 이해를 구하려는 사명감에 차 있었다. 그는 출신 번의 벽을 허물기 위해 오노 아즈사와 “일본인 학생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2. 2. 영국 유학 (1870년 ~ 1878년)
바바 다쓰이는 게이오기주쿠 대학의 전신인 게이오 의숙에서 정치학과 역사학을 전공하고 19세에 도사번에서 선발한 영국 유학생으로 뽑혔다. 원래 선발된 유학생이 요시와라 유곽에서 문제를 일으켜 할복자살하는 바람에 보결로 선발되었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유학을 간 탓에 한문 소양이 부족하여 일본어보다 영어가 더 편했고, 그래서 영문으로 저술 활동을 시작했다.[2]1870년 영국으로 건너간 바바는 치펜햄 외곽에서 다른 도사 번 출신 학생 4명과 함께 지냈다. 이후 워민스터로 이주하여 현지 문법학교에서 지리, 기하학, 역사를 공부했다. 1871년 10월 런던으로 이주하여 웨스트 크로이던에 정착했다. 1872년 이와쿠라 사절단이 런던에 도착한 후 정부 지원을 받으며 조선 공학을 공부하다가 법학으로 전공을 바꿨다.[2]
1873년 2월부터 사회 과학 진흥 협회에 다니며 찰스 라이얼스, 셸던 아모스 등과 함께 영국의 노동 계급을 위한 법률 초안 작성을 논의했다. 논의된 주제는 수감자 입법 개혁, 여성 교육, 동물 학대, 노동 조합법, 공중 위생 등이었다.[2]
1874년에서 1875년 사이 잠시 일본에 귀국했다가 1875년에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1875년 정상 회담에서 하라 로쿠로를 지지하여 영국 시민들이 일본에서 누리던 치외법권 철회를 도왔다. 엘리자베스 애들레이드 매닝의 조언으로 전국 인도 협회에 가입하여 인도 아편 수입 문제에 반대했다. 로마법, 수사학, 저널리즘에 대한 지식을 쌓았고, 존 스튜어트 밀, 허버트 스펜서, 월터 배지엇, 알렉산더 베인, 헨리 메인의 자유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3]
1875년과 1876년 사이에 "일본의 영국인: 일본인이 그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 "일본과 영국 간의 조약"이라는 두 개의 팜플렛을 영어로 출판하여 윌리엄 글래드스톤과 벤자민 디즈레일리에게 보냈다. 1878년 1월, 동료 학생 마나베 카이사쿠를 다치게 했다.[4][5]
영국에 있는 동안 "쉬운 점진적 연습이 포함된 일본어 초급 문법"을 집필했고, 대의 정부의 필요성과 여론 함양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아즈사 오노와 함께 런던 일본 유학생 협회(1873-1886)를 설립하여 일본 사회의 여성 지위, 헤이안 문학, 배심원 제도 등에 대해 논의했다. "일본과 영국 간의 조약과 일본의 영국인"이라는 글에서 서구와의 불평등 조약 개정을 옹호했다.[6]
벤자민 디즈레일리, 벌워 리턴, 찰스 디킨스의 소설을 읽고, 헨리 어빙의 리처드 3세를 관람하는 등 여가 시간을 보냈다. 동방 문제에 감동받아 의회를 자주 방문하여 글래드스톤과 디즈레일리를 관찰했다. 찰스 보이시와 같은 설교자의 말을 듣고 윌리엄 킹던 클리포드, 카타오카 켄키치와 유신론, 일원론 등에 대한 지적 대화를 나누었다.[6]
2. 3. 자유민권운동과 탄압 (1878년 ~ 1885년)
바바 다쓰이는 영국 유학 후 자유민권운동의 투사가 되었다. 그는 과학적 원리와 허버트 스펜서의 자유주의적 이상, 즉 자유와 대의정부를 바탕으로 한 민주 헌법을 요구하는 운동을 펼쳤다. 이를 위해 국유회(国友会)와 교손도주(共存同志)를 공동 설립했다.[7] 1881년에는 새로 결성된 자유당의 부회장이 되어 이타가키 다이스케와 고토 쇼지로와 친분을 쌓았고, 나카에 초민과 함께 당대 최고의 이론가 중 한 명이 되었다.[7]바바는 『자유(自由) 신문(新聞)』과 『조야(朝野) 신문』, 교손(共存) 잡지(雑誌)에 글을 기고했다. 또한, 메이지 기주쿠(明治義塾) 야학을 설립하고 일본에서 법률 사무소를 열었다.
1882년, 해외 여행 금지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이타가키 다이스케에게 해임되었다.[8] 1885년에는 오이시 마사미와 함께 폭발물 소지 혐의로 체포되었는데, 이는 정부에 대한 그의 자유로운 발언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약 6개월 후 석방되었지만, 1886년 미국으로 망명했다.[9][10]
도사 출신으로 함께 영국 유학을 했던 오노 아즈사, 나카에 초민 등과 함께 『조야 신문』 등에서 민권 사상을 일본에 소개하고, 공존동중을 결성하여 교순사의 활동에 참가했다. 정부에 의해 공존동중이 억압되자, 스에히로 시게야스 등과 함께 “국우회”를 설립했다.
1879년부터 1880년경, 공존동중의 가네코 겐타로, 시다 사부로 등과 함께 『사의 헌법』 의견을 기초했다. 법률학에 의한 계몽 활동에 종사하여 국우회를 기반으로 자유민권운동의 이론적 지도자가 되었다.
1879년, 교순사 창설 위원으로 사칙 규칙 등에 참여했고, 1881년, 메이지 기주쿠(미쓰비시 상업학교) 창립에 참가했다. 유사 전제를 직접 비판하지 않고 민심을 개혁하여 자유 독립으로 하여 사회 공동의 공익을 경영하는 능력을 갖춘 “국민”의 창조를 목표로 했다. 그러나 그 온건한 활동도 1880년의 집회 조례 확대 해석에 의해 방해를 받아 정부와의 대결 전면에 내몰리고 자유당 결성에 참가했다.
1881년 자유당 결당 대회에서 고토 쇼지로에 이어 부의장으로 선출되어 의사 운영에 임하고 상의원이 되었다. 1882년 6월, 『자유 신문』을 창간하여 주필이 되어 “사회의 개량을 희망하고 국가의 대난을 물리친다”는 혁명의 필연성을 설파했다. 같은 해 9월 이타가키 다이스케의 외유를 비판했으나, 이타가키 다이스케로부터 자유 신문 사원(주필)·당 상의원을 해임당하고 탈당하여 연설회를 주최했다.
1883년, 경시 총감 가바야마 스케노리로부터 도쿄에서의 정치 연설 금지를 통고받았다(6개월간). 그 후 저술 활동에 들어갔으나, 가바야마 사건에 관해 “러시아 제국 무정부주의자의 도구라고 하는 다이너마이트”에 주목하여, 1885년 11월 21일 요코하마 산테의 모리슨 상회에서 “다이너마이트를 팔고 있습니까?”라고 물었기 때문에 밀정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폭발물 단속 처벌 조항 위반으로 기소되어 오이시 마사미와 함께 체포되었다. 이듬해 6월 2일, 공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후, 6월 12일, 오이시 마사미와 함께 일본을 떠나 미국에 망명했다.
2. 4. 미국 망명과 죽음 (1885년 ~ 1888년)
바바 다쓰이는 1885년 오이시 마사미와 함께 폭발물 소지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약 6개월 후 석방되었다.[9] 1886년 미국으로 망명하여 영어로 장문의 논문 "일본의 정치 상황: 내각의 전제정치와 무능함, 그리고 인민당의 목표"를 저술했다.[9][10]1885년 11월 21일, 요코하마 산테의 모리슨 상회에서 “다이너마이트를 팔고 있습니까?”라고 물어 밀정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폭발물 단속 처벌 조항 위반으로 오이시 마사미와 함께 기소되었으나, 이듬해 6월 2일 공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6월 12일, 오이시와 함께 일본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했다. (오이시는 그 후 귀국하여 헌정당 내각의 대신 등을 역임했다.) 미국에서 바바 다쓰이는 “일본의 감옥” 등 정력적으로 정부 비판 기사를 신문에 투고하고 강연을 했다. 주미 공사였던 무쓰 무네미쓰를 방문하여 귀국을 권유받기도 했다.
병과 가난을 이기지 못한 바바 다쓰이는 유작이 된 “일본의 정정”을 집필했고, 1888년 11월 폐결핵과 폐렴으로 필라델피아의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병원에서 사망했다.[9][10] 향년 38세였다. 이와사키 히사야와 하야시 타미오가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다. 바바 다쓰이의 무덤은 우드랜드 묘지에 있으며, 우에노의 간에이지 묘지에도 묘비가 있다.
3. 사상
바바 다쓰이는 모리 아리토모의 국어 영어화론에 대해, 언어가 달라지면 계급 간의 골이 깊어지고 하나의 나라를 이룰 수 없으며, 하층 계급 대다수가 국사(國事)에서 배제될 것이라고 비판했다.[15] 그는 영어가 논리적인 표현에 유리하지만, 일본어에도 고유한 장점이 있다고 주장했다.[15]
바바는 존 스튜어트 밀, 허버트 스펜서(그의 작품을 일본어로 번역), 월터 배지엇, 알렉산더 베인, 헨리 메인의 지적 자유주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4] 귀국 후에는, 과학적 원리와 스펜서의 자유주의적 서구 이상, 즉 자유와 대의정부를 바탕으로 한 민주헌법을 요구하는 운동의 활동가가 되었다.
3. 1. 자유주의와 민권 사상
바바 다쓰이는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던 인도를 예로 들며, 언어가 달라지면 계급 간의 골이 깊어지고 하나의 나라를 이루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하층 계급 대다수가 국사(國事)에서 배제될 것이라고 주장했다.[15] 그는 영어를 사용하면 논리적으로 말하기 유리하지만, 일본어는 간단한 숙어로 상황과 정서를 표현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15]바바는 1870년 영국으로 건너가 치펜햄 외곽에서 다른 도사 번(현 고치현) 출신 학생 네 명과 함께 지냈다. 이후 워민스터로 이주하여 문법학교에서 지리, 기하학, 역사를 공부했다. 1871년 10월 런던으로 이주하여 웨스트 크로이던에 정착했다. 1872년 가을, 이와쿠라 사절단이 런던에 도착하자 정부 지원금을 받고 "정규 과정"을 밟으며 잉글랜드에서 조선 공학을 공부하다 법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1873년 2월부터 사회 과학 진흥 협회에 다니며 찰스 라이얼스, 셸던 아모스 등 영국 친구들과 함께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노동 계급에게 이익이 되는 새로운 법률 초안 작성을 목표로 했다. 수감자 입법 개혁, 여성 교육, 동물 학대, 노동 조합법, 공중 위생 등이 논의 주제였다.[2]
바바는 1874년에서 1875년 사이 잠시 일본에 돌아왔다가 1875년에 다시 영국으로 갔다. 1875년 정상 회담에서 하라 로쿠로를 지지하여 영국 시민들이 일본에서 누리던 치외법권 철회를 도왔고, 엘리자베스 애들레이드 매닝의 조언에 따라 이가 요타로와 함께 전국 인도 협회에 가입하여 "인도 아편 수입" 문제에 반대했다. 이후 사회 개혁가 해리엇 마티노를 방문했다. 그는 로마법, "수사학 및 저널리즘"에 대한 배경 지식을 쌓았고, 존 스튜어트 밀, 허버트 스펜서(그의 작품을 일본어로 번역), 월터 배지엇, 알렉산더 베인, 헨리 메인의 자유주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 1875년과 1876년 사이 "일본의 영국인: 일본인이 그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 "일본과 영국 간의 조약"이라는 영어 팜플렛을 출판하여 윌리엄 글래드스톤과 벤자민 디즈레일리에게 보냈다. 1878년 1월, 동료 학생 마나베 카이사쿠에게 상처를 입혔다.[4][5]
바바는 영국에 있는 동안 "쉬운 점진적 연습이 포함된 일본어 초급 문법"(일본어: 語文典初歩, ''Nihon bunten shoho'')을 집필했고, 대의 정부의 필요성과 여론 함양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는 아즈사 오노와 함께 런던 일본 유학생 협회(1873-1886)를 설립하여 일본 사회의 "여성의 지위", 헤이안 문학, 배심원 제도 등에 대해 논의했다. "일본과 영국 간의 조약과 일본의 영국인"에서 서구와의 "불평등 조약" 개정을 옹호했다. 여가 시간에는 극장에 가서 헨리 어빙의 리처드 3세를 관람하고 벤자민 디즈레일리, 벌워 리턴, 찰스 디킨스의 소설을 읽었다. 동방 문제에 감동받은 그는 글래드스톤과 디즈레일리를 관찰하기 위해 의회를 자주 방문했다. 런던에서 활발한 사회 생활을 하며 찰스 보이시 설교를 듣고, 유신론 및 일원론과 같은 지적 대화를 윌리엄 킹던 클리포드, 카타오카 켄키치와 나누었다.[6]
일본으로 돌아온 바바 다쓰이는 과학적 원리와 스펜서의 자유주의적 서구 이상, 즉 자유와 대의정부를 바탕으로 한 민주헌법을 요구하는 운동의 활동가가 되었다. 국유회(国友会)와 교손도주(共存同志)를 공동 설립하여 사람들이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했다. 1881년 새로 결성된 자유당(일본어: 自由党, Jiyūtō)의 부회장이 되어 이타가키 다이스케, 고토 쇼지로와 친분을 쌓았다. 나카에 초민과 함께 당대 최고의 이론가 중 한 명이 되었다.[7] 1882년, 해외 여행 금지 반대를 이유로 이타가키에게 해임되었다.[8]
바바는 자유(自由) 신문(新聞)과 조야(朝野) 신문에 기고했다. 메이지 기주쿠(明治義塾) 야학을 설립하고 일본에서 법률 사무소를 열었다. 1885년 오이시 마사미와 함께 폭발물 소지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6개월 후 석방되었다. 1886년 미국으로 망명하여 1888년 영어로 장문의 논문 "일본의 정치 상황: 내각의 전제정치와 무능함, 그리고 인민당의 목표"를 저술했으며, 같은 해 필라델피아에서 사망했다.[9][10]
바바 다쓰이는 1850년 도사 번사 마바 래하치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번교 「문무관」에서 배우고, 1866년 게이오기주쿠에서 정치사, 경제학을 배웠다. 그 후, 나가사키 영어전습소에서 구이도 풀베키에게 영어를 배웠다. 1869년 게이오기주쿠로 돌아와 교사를 역임했다. 1870년 도사 번의 유학생으로 영국에 유학하여 해군과 법학을 배웠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귀국 후에는 우리 네이션의 데스티니를 담당해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라며 기대를 걸었다. 1874년 귀국했다. 이듬해, 이와쿠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다시 영국에 건너가 정부 유학생이 되었다. 1873년 『ELEMENTARY GRAMMAR OF THE JAPANESE LANGUAGE WITH EASY PROGRESSIVE EXERCISES』(일본어 문전) 서문에서 모리 아리토모의 국어 영어화론을 비판하여, 일본어 논쟁을 “국어 국자 문제”로 발전시켰다. 1875년 10월 런던에서 『The English in Japan : what a Japanese thought and thinks about them』(일본인이 생각하는 영국인)을 간행했다. 1876년 9월 런던에서 『The Treaty between Japan and England』(일영 조약론)을 간행하여 평등 조약 제정을 호소했다. 호시 도루와 함께 법학원에서 배웠으나, 사이가 좋지 않아 논쟁 끝에 몸싸움을 하고 교제가 없었다고 한다. 바리스터(법정 변호사) 자격 취득 과정을 포기하고 프랑스로 갔다. 영국 유학 중, 마나베 마사키요와 결투를 벌여 부상시켰다. 1878년에 귀국했다.
오노 아즈사, 나카에 초민 등과 함께 『조야 신문』 등에서 민권 사상을 일본에 소개하고, 공존동중을 결성하여 교준사의 활동에 참가했다. 정부에 의해 공존동중이 억압되자, 스에히로 시게야스 등과 함께 “국우회”를 설립했다. 1879년부터 1880년경, 공존동중의 가네코 겐타로, 시다 사부로 등과 함께 『사의 헌법』 의견을 기초했다. 국우회를 기반으로 자유민권운동의 이론적 지도자가 되었다. 1879년, 교준사 창설 위원으로 참여했고, 1881년, 메이지 기주쿠(미쓰비시 상업학교) 창립에 참가했다. 1881년 자유당 결당 대회에서 고토 쇼지로에 이어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882년 6월, 『자유 신문』을 창간하여 주필이 되었다. 같은 해 9월 이타가키 다이스케의 외유를 비판했으나, 이타가키로부터 자유 신문 사원(주필)·당 상의원을 해임당하고 탈당하여 연설회를 주최했다.
1883년, 도쿄에서의 정치 연설 금지를 통고받았다(6개월간). 가하야마 사건에 관해 “러시아 제국 무정부주의자의 도구라고 하는 다이너마이트”에 주목하여, 1885년 11월 21일 요코하마 산테의 모리슨 상회에서 “다이너마이트를 팔고 있습니까?”라고 물었기 때문에, 밀정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폭발물 단속 처벌 조항 위반으로 기소되어 오이시 마사미와 함께 체포되었다. 이듬해 6월 2일, 무죄 판결을 받은 후, 6월 12일, 오이시와 함께 일본을 떠나 미국에 망명했다. 미국에서는 “일본의 감옥” 등, 정부 비판의 신문 투고나 강연을 했다. 무쓰 무네미쓰를 방문하여 귀국을 권유받았다.
그러나 병고와 빈고에 견디지 못하고, 유작 “일본의 정정”을 쓰고, 1888년 11월, 폐결핵과 폐렴으로 필라델피아의 펜실베니아 대학 병원에서 사망했다. 향년 38세. 이와사키 히사야와 하야시 타미오가 마지막을 지켜봤다. 타츠이의 무덤은 우드랜드 묘지에 있다. 우에노의 간에이지 묘지에도 묘비가 있다.
이노우에 치유에에 따르면, 연설이 능숙한 것은 이 사람 이상으로 없고, 3시간이나 4시간이나 계속해서 늘어놓는 웅변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으며, 민중 앞에서 웅변법의 연구를 공개한 것은 마바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진정으로 서양의 학설로서 자유의 이치를 해설한 것도 처음이었으나, 아쉽게도 한학의 힘이 부족하여 저서에서 볼 만한 것은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3. 2. 일본어 근대화론
바바 다쓰이는 모리 아리토모의 국어 영어화론에 대해, 언어가 달라지면 계급 간의 골이 깊어지고 하나의 나라를 이룰 수 없으며, 하층 계급 대다수가 국사(國事)에서 배제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영어가 논리적인 표현에 유리하지만, 일본어에도 고유한 장점이 있다고 주장했다.[15] 바바는 1873년 출판된 『일본어 문전』 서문에서 모리 아리토모의 주장을 비판했고, 이는 오쓰키 후미히코, 마에지마 히토시 등의 한자론과 함께 일본어 논쟁의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3. 3. 불평등 조약 개정론
바바 다쓰이는 1875년 "일본과 영국 간의 조약"이라는 글에서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 개정을 옹호하기 시작했는데, 이 글은 ''미학 리뷰 및 미술 관찰자''의 편집자 론니거 여사의 검토와 지원을 받았다.[6] 1876년 9월 런던에서 『The Treaty between Japan and England』(일영 조약론)을 간행하여 불평등 조약이 영국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평등 조약의 제정을 호소했다.[3]4. 평가
바바 다쓰이는 도사 번 출신으로,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자유민권운동을 이끈 주요 인물 중 한 명이다. 영국 유학을 통해 서구의 자유 사상을 접하고, 이를 일본에 소개하며 민권 사상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제자로, 게이오기주쿠에서 공부하고 교사로도 활동했다. 영국 유학 시절에는 일본어와 영어에 대한 논쟁을 벌여 '국어 국자 문제'의 선구자로 평가받기도 한다. 또한, 영국에서 일본의 불평등 조약 개정을 주장하는 등 국제적인 활동도 펼쳤다.
귀국 후에는 오노 아즈사, 나카에 초민 등과 함께 『조야 신문』을 통해 민권 사상을 알리고, 공존동중, 국우회 등의 단체를 결성하여 자유민권운동을 전개했다. 자유당 결성에도 참여하여 부의장을 맡았으며, 『자유 신문』을 창간하여 주필로 활동하며 혁명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정부의 탄압과 이타가키 다이스케와의 갈등으로 인해 자유당을 탈당하고, 폭발물 단속 처벌 조항 위반으로 체포되었다가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정부 비판 활동을 이어갔으나, 폐결핵과 폐렴으로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바바 다쓰이는 연설에 매우 능숙했으며, 서구의 자유 사상을 일본에 처음으로 제대로 소개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한학 실력이 부족하여 저술에서는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5. 저서
23세에 영국 출판사에서 《기초 일본어 문법》이라는 책을 펴냈으며,[16] 이 책은 최초의 체계적인 일본어 문법사전으로 약간의 연습문까지 들어 있다. 1888년(메이지 21년)에는 증보판이 나왔고, 바바가 죽은 뒤인 1901년(메이지 34년)에는 제3판이 나왔다.[17] 말년에는 영문 소책자인 《일본의 정치 상황》(The Political Condition of Japan)을 썼는데, 표지에 "의지할 곳은 천하의 여론이고 배격해야 할 적은 폭력적인 가학적인 정부이다."라고 썼다.
발간 연도 | 저서 | 비고 |
---|---|---|
1873년 9월 | 《일본어 문전 초보》 (An Elementary Grammar of the Japanese Language) | 영국 런던에서 간행 |
《일본에 있어서의 영국인》 | ||
《일영 조약 개정론》 | ||
《웅변법》 |
6. 가계
바바 다쓰이(辰猪)는 도사번의 사무라이 가문인 마바씨(馬場氏)의 7대손이다. 그의 선조는 다케다 신겐의 무장 마바 노부하루(미노노카미)[11]이며, 다케다씨 멸망 후 낭인이 되었다. 그의 자손인 노부요시(헤이베에)가 도사국으로 건너갔다. 우지노부(겐에몬) 때 야마우치가에 봉직하여, 아들 우지오키가 200석의 녹봉을 받았다.
마바 고초는 그의 동생이다. 신문기자이자 교카 작가인 노자키 사분은 그의 사촌 형제이다.[12]
그의 삼촌인 마바 우지쓰라는 해군과 메이지 천황의 어용저에서 근무했다.
참조
[1]
간행물
Baba Tatsui: An Early Japanese Liberal
Far Eastern Affairs
1963
[2]
웹사이트
https://www.ndl.go.j[...]
2020-11-27
[3]
웹사이트
http://www.open.ac.u[...]
2020-11-27
[4]
간행물
Baba Tatsui: An Early Japanese Liberal
Far Eastern Affairs
1963
[5]
간행물
The Chishima Cas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5-05
[6]
간행물
Baba Tatsui and Victorian Britain: A case-study of an Early Meiji Intellectual
Kindai Nihon kenkyu
1994
[7]
간행물
Baba Tatsui and Victorian Britain: A case-study of an Early Meiji Intellectual
Kindai Nihon kenkyu
1994
[8]
웹사이트
https://www.ndl.go.j[...]
2020-11-27
[9]
서적
Baba Tatsui
Kodansha
1993
[10]
서적
Baba Tatsui
Kodansha International
1984
[11]
문서
『御侍中先祖書系図牒』に、「先祖、甲州武田家ニ仕馬場美濃守也。平兵衛信義者、武田家滅却之後、落浪御当国江罷越」とある文による。
[12]
서적
日本文壇史1
講談社文芸文庫
1994
[13]
간행물
「経済史」をあるく(第8回)馬場辰猪再訪
2011-11
[14]
학술지
日本協会の創立者アーサー・ディオシー
https://doi.org/10.5[...]
2016-03-03
[15]
문서
예를 들어, '야마'(山)는 mountain이지만, 일본어에서는 그 밖에도 금전상의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시도를 '야마오 아테루'(やまをあてる)라고 말한다. 이것을 영어로 표현하려면 장황해지지만 '야마오 아테루'라고 한 마디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일본어의 장점이라는 것이다.
[16]
서적
Elementary Grammar of the Japanese Language with Easy Progressive Exercises
Tribuner and Company
1873
[17]
문서
바바의 전기 『馬場辰猪』(東京堂, 1897)를 처음 쓴 안영오랑(安永梧郞)가 변역한 이와나미 판 《바바 다쓰이 전집》에 전부 수록되어 있다. 그 책은 한동안 절판되었다가 최근에 미스즈쇼보(みすず書房)에서 복각판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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