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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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철순은 대한민국 야구 선수로, 부산 출신이다.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마이너 리그에서 활동하다가, 1982년 KBO 리그가 출범하면서 OB 베어스에 입단했다. 데뷔 첫해 22연승을 포함하여 24승을 기록하며 다승왕, 평균자책점 1위, MVP를 석권했다. 잦은 부상으로 선수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불사조'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1996년 은퇴할 때까지 활약했다. 2002년에는 그의 등번호 21번이 두산 베어스에서 영구 결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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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훤은 OB 베어스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하여 내야수로 활동하다 은퇴 후 여러 프로 야구팀에서 코치로 활동한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이자 야구 코치이다. - 1982년 스포츠 - 김영덕 (야구인)
재일교포 출신 야구인 김영덕은 일본 프로 야구 선수 생활 후 한국으로 건너와 KBO 리그 여러 팀의 감독을 맡아 한국시리즈 우승과 통합 우승 등의 업적을 남겼으나, 승리 지향적인 팀 운영과 투수 혹사 논란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박철순 | |
---|---|
선수 정보 | |
이름 | 박철순 |
영문 표기 | Park Cheol-soon |
한자 표기 | 朴哲淳 |
출생일 | 1956년 3월 12일 |
출생지 | 부산광역시 |
신장 | 182cm |
체중 | 72kg |
포지션 | 투수 |
투구 | 우투 |
타석 | 우타 |
아마추어 경력 | |
고등학교 | 배명고등학교 |
대학교 | 연세대학교 |
마이너 리그 경력 | |
팀 | 밀워키 브루어스 산하 |
연도 | 1979년 ~ 1981년 |
KBO 리그 경력 | |
소속 팀 | OB 베어스 |
입단 | 1982년 |
은퇴 | 1996년 |
계약금 (1982년) | 2,000만원 |
연봉 (1982년) | 2,400만원 |
첫 출장 | 1982년 3월 28일, 동대문야구장 MBC 청룡전 선발 |
마지막 경기 | 1996년 9월 4일, 대전 한화 이글스전 선발 |
영구 결번 | 두산 베어스 No.21 |
KBO 리그 주요 성적 | |
수상 | KBO 리그 MVP (1982년) |
타이틀 | KBO 투수 트리플 크라운 (1982년) |
우승 | 한국시리즈 2회 우승 (1982년, 1995년) |
KBO 리그 통산 기록 | |
승-패 | 76승 53패 |
평균 자책점 | 2.95 |
탈삼진 | 648개 |
마이너 리그 통산 기록 | |
승-패 | 11승 12패 |
평균 자책점 | 4.30 |
탈삼진 | 143개 |
지도자 경력 | |
팀 | OB 베어스 |
직책 | 플레잉 코치 (1987년 ~ 1988년), 투수 코치 (1997년 ~ 1998년) |
참고 자료 |
2. 프로 이전
부산시 출생으로, 동광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다. 경남중을 거쳐 부산고에 입학했다. 이후 대성고 야구부에 편입 전학을 갔으나, 폭행 사건으로 야구부가 해체된 뒤 배명고로 다시 전학을 갔다. 박철순은 이때부터 투수로 활약하였지만, 주목할 만한 성적을 기록하지는 못했다.
1975년 1월 연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기 전에 체육 특기생으로 합격해, 연세대 야구부 소속이 되었다.[7][8][9] 연세대학교 재학 중 공군에 입대하여 군 복무를 마쳤다.[10] 1978년 네덜란드에서 열린 하를럼 야구 대회에 대표팀으로 선발되었다.[11] 박철순은 오스트레일리아와의 경기에서 선발로, 쿠바와의 경기에서 구원으로 등판하여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12][13] 1979년 한미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쳐 밀워키 브루어스와 계약을 맺게 되었다.
2. 1. 유년 시절 및 아마추어 경력
부산시 출생으로, 동광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다. 경남중을 거쳐 부산고에 입학했다. 이후 대성고 야구부에 편입 전학을 갔으나, 폭행 사건으로 야구부가 해체된 뒤 배명고로 다시 전학을 갔다. 박철순은 이때부터 투수로 활약하였지만, 주목할 만한 성적을 기록하지는 못했다.1975년 1월 연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기 전에 체육 특기생으로 합격해, 연세대 야구부 소속이 되었다.[7][8][9] 연세대학교 재학 중 공군에 입대하여 군 복무를 마쳤다.[10] 1978년 네덜란드에서 열린 하를럼 야구 대회에 대표팀으로 선발되었다.[11] 박철순은 오스트레일리아와의 경기에서 선발로, 쿠바와의 경기에서 구원으로 등판하여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12][13] 1979년 한미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쳐 밀워키 브루어스와 계약을 맺게 되었다.
2. 2. 최동원 구타 사건
연세대 재학 당시 얼차려라는 명목으로 후배인 최동원을 구타하여 병원신세를 지게 한 적이 있다.[22] 그 사건으로 인해 최동원은 연세대에서 다른 학교로 옮기겠다고 학교와 갈등을 빚다 결국 '''선후배간의 위계질서'''라는 명목으로 인해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던 최동원 측에서 몇 달 후에 학교 측에 사죄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증언이 엇갈리는 편인데, 최동원이 나중에 학교로부터 오히려 사과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한다.이당시 구타는 드러난 것만 3차례 이상 있었는데 언론에 보도된 것만 여기 언급된 동국대전 직후, 3월 12일 중앙대와의 연습경기, 그 전해 연고전에서 구타가 있었으며 최동원의 말에 따르면 각각 10대씩 맞았다고 한다.[22] 그러나 박철순은 다른 선수들은 4대씩 때리던 걸 최동원만 봐줘서 2대만 때렸다고 말을 했다. 그러나 전치 17일이 나오고 허리에서 피가 나왔으며 배트가 부러졌다는 동기의 증언등을 볼 때 2대만 때린 것은 신빙성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
2011년 박동희 기자가 최동원과 김성한을 인터뷰한 기사를 보면, 당시 박철순의 구타로 인해 최동원은 배트가 부러질 정도로 맞았고 허리에 피멍이 들 정도였다고 한다. 그로 인해 전치 2주 판단을 받아 고향에 내려가 쉬고 있었는데 학교 측의 음해로 인해 무단이탈이라는 기사가 나갔다.
박철순은 그저 4학년 선배 지시에 따른 것 뿐 주도적인 입장이 아니었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선배 지시설은 사실이 아닐 확률이 높다. 박철순은 복학생이었고 오히려 4학년들 보다 나이도 많았고 학번도 빨랐다. '''당시 4학년들은 57년생 76학번이고 박철순은 54년생 75학번이었다.''' 당시 박철순에 지시를 할 수 있는 선배가 없었고 '''박철순이 구타를 주도했을 확률이 높다.''' 또 '''박철순은 후배가 건방져서 때렸을 뿐이라고 했고 지시설을 직접 부인'''했다. 박철순의 미국 진출도 연세대에서 뛸 수 없는 상황에 사실상 쫓겨난 것이다.
이때만 하더라도 선배가 후배에게 기합을 주고 빠따를 치는 것은 용인하던 악습이 팽배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의 기준으로도 도를 넘은 행위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언론에도 나오고 퇴학 이야기까지 나온것.
최동원과 박철순은 중학교 선후배 관계인데 이때부터 트러블이 있었다는 말도 있으며[23] 해당 사건 탓인지 1990년까지 롯데 통산 최다 선발승(51선발승) 보유자인 최동원의 주요 팀이었던 롯데 팬들은 본인(박철순)을 싫어한다.
3. 프로 생활
3. 1. 미국 프로 야구 경력
박철순은 1979년 제2회 한미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 참가를 계기로 밀워키 브루어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었다.[1] 1980년 미국에 건너온 박철순은 A 클래스 스톡턴 포츠와 AA 클래스 엘파소 디아블로스에서 투구했다.[1] 마이너 리그에서 2년 동안 박철순은 11승 12패, 평균자책점 4.30을 기록했다.[1] 연세대학교 재학 중 한국 대표로 하렘 베이스볼 위크 등에 출전했다.[1] 졸업 후 밀워키 브루어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었지만 3년 동안 메이저 리그 승격은 한 번도 하지 못했다.[1]3. 2. KBO 리그 경력
KBO 리그 출범과 함께 귀국한 박철순은 서울 드래프트(당시 OB 베어스가 3년 간 대전에 머무는 조건으로 MBC 2명, OB 1명 순으로 선수 지명) 1순위(전체 3순위)로 OB 베어스와 계약금 2,000만원, 연봉 2,400만원으로 당시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입단했다(당시 프로야구 선수들의 평균 연봉 액수가 1,200여 만원 내외였음).[14] 박철순의 데뷔전은 KBO 리그 개막전 다음 날인 3월 28일 동대문야구장에서 이루어졌다. 상대는 개막 경기에서 황규봉과 이선희를 두들겨 11-7로 삼성을 이긴 MBC 청룡이었다. OB는 1회부터 MBC의 감독 겸 선수로 출전한 백인천이 좌익선상으로 빠지는 적시 2루타를 쳐 2루 주자 김용윤에게 득점을 허용했으나 박철순은 1회 말 1점을 내준 뒤 5회 말엔 1안타와 내야 실책으로 1점을 헌납했을 뿐 더 이상 MBC의 득점을 허용치 않았고, OB 베어스는 2회 초 신경식이 우전 안타와 5회 초엔 3점을 뽑아 전세를 단박에 4-1로 뒤집었다. 6회 초 이홍범의 솔로 홈런에 이어 9회 초엔 신경식과 양세종이 대미를 장식하는 백투백 홈런을 날려 9-2로 첫 승을 올렸다. 4월 10일 해태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구원승을 달성하고 9월 18일 롯데 자이언츠전 완투승까지 22연승을 달성했다. 이 기록은 한·미·일 합쳐서 단일 시즌 최다 연승 기록이다. 박철순의 맹활약에 OB 베어스는 전기 리그 우승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하고 1982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4승 1무 1패로 꺾어 KBO 리그 원년 우승을 달성했다.이 해에 그는 당시 생소하던 "체인지업(당시 우리나라엔 지칭 언어조차도 없던 마구라 불리었다 함)" 포크볼과 팜볼을 던지며 24승 4패, 평균 자책 1.84라는 빼어난 기량으로 다승, 승률, 평균 자책 부문에서 모두 1위를 차지했다. 정규 리그 MVP는 보너스였다.[14] 그리고 이 시즌 역대 최다 연승 (22연승)을 기록했다.
한편, 그 해 24승 중 16승이 선발승이었는데[15] 그 이후 선동열(86년 17선발승), 손민한(2005년 17선발승)(선동열과 타이), 류현진 (2006년 18선발승), 양현종 (2017년 20 선발승), 리오스 (2007년 22선발승)[16]에 의해 역대 정규시즌 최다 선발승 MVP 기록이 갱신되기도 했다.
1982년 한국 프로 야구 창설과 함께 창단된 OB 베어스(현: 두산 베어스)에 입단하여, 첫해에는 22연승을 포함하여 24승을 거두며 다승왕, 최우수 방어율, 최고 승률 투수 3관왕을 달성했고, 시즌 MVP에도 선정되었다.
그러나 다음 해부터 허리 통증, 아킬레스건 통증 등 부상이 잇따르면서 한때 "재기 불능"이라고까지 불렸지만, 불굴의 정신으로 마운드에 올라 그 모습에서 "불사조"라는 애칭이 붙었다[4]。
미국에서 수술을 받았지만, 1988년에는 설상가상으로 CF 촬영 도중 아킬레스건까지 파열되는 불운을 겪었다. 하지만 부상을 딛고 일어나 다시 좋은 활약을 보여주어서 “불사조”라는 별명이 붙었다. 플레잉코치로도 활동하기도 하였다.
1983년 대부분의 기간과 1984년 전부를 결장했고, 1985년 리그에 복귀한 그는 "불사조"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그 이후로 한 시즌에서 116⅔이닝 이상을 던지지 못했다. 구원 투수로 전향했지만 여전히 부상에 시달렸다.
부상과 재기를 반복하다가 OB 베어스의 1995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하고 1996년 9월 4일 대전 한화전에서 선발로 등판하여 최고령 승리 투수가 되었다. 그리고 이 경기가 마지막이 되었으며, 시즌을 마친 후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1997년에 열린 은퇴식 당시에 마운드 키스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박철순의 등번호 21번은 2002년 두산 베어스에 의해 영구 결번되었다.[2]
3. 2. 1. OB 베어스/두산 베어스 (1982-1996)
KBO 리그가 출범하자 귀국한 박철순은 서울 드래프트(당시 OB 베어스가 3년 간 대전에 머무는 조건으로 MBC 2명, OB 1명 순으로 선수 지명) 1순위(전체 3순위)로 OB 베어스와 계약금 2,000만원, 연봉 2,400만원으로 당시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입단했다(당시 프로야구 선수들의 평균 연봉 액수가 1,200여 만원 내외였음).[14] 박철순의 데뷔전은 KBO 리그 개막전 다음 날인 3월 28일 동대문야구장에서 이루어졌다. 상대는 개막 경기에서 황규봉과 이선희를 두들겨 11-7로 삼성을 이긴 MBC 청룡이었다. OB는 1회부터 MBC의 감독 겸 선수로 출전한 백인천이 좌익선상으로 빠지는 적시 2루타를 쳐 2루 주자 김용윤에게 득점을 허용했으나 박철순은 1회 말 1점을 내준 뒤 5회 말엔 1안타와 내야 실책으로 1점을 헌납했을 뿐 더 이상 MBC의 득점을 허용치 않았고, OB 베어스는 2회 초 신경식이 우전 안타와 5회 초엔 3점을 뽑아 전세를 단박에 4-1로 뒤집었다. 6회 초 이홍범의 솔로 홈런에 이어 9회 초엔 신경식과 양세종이 대미를 장식하는 백투백 홈런을 날려 9-2로 첫 승을 올렸다. 박철순은 4월 10일 해태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구원승을 달성하고 9월 18일 롯데 자이언츠전 완투승까지 22연승을 달성했다. 이 기록은 한·미·일 합쳐서 단일 시즌 최다 연승 기록이다. 박철순의 맹활약에 OB 베어스는 전기 리그 우승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하고 1982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4승 1무 1패로 꺾어 KBO 리그 원년 우승을 달성했다.이 해에 그는 당시 생소하던 "체인지업(당시 우리나라엔 지칭 언어조차도 없던 마구라 불리었다 함)" 포크볼과 팜볼을 던지며 24승 4패, 평균 자책 1.84라는 빼어난 기량으로 다승, 승률, 평균 자책 부문에서 모두 1위를 차지했다. 정규 리그 MVP는 보너스였다.[14] 그리고 이 시즌 역대 최다 연승 (22연승)을 기록했다.
한편, 그 해 24승 중 16승이 선발승이었는데[15] 그 이후 선동열(86년 17선발승), 손민한(2005년 17선발승)(선동열과 타이), 류현진 (2006년 18선발승), 양현종 (2017년 20 선발승), 리오스 (2007년 22선발승)[16]에 의해 역대 정규시즌 최다 선발승 MVP 기록이 갱신되기도 했다.
1982년 한국 프로 야구 창설과 함께 창단된 OB 베어스(현: 두산 베어스)에 입단하여, 첫해에는 22연승을 포함하여 24승을 거두며 다승왕, 최우수 방어율, 최고 승률 투수 3관왕을 달성했고, 시즌 MVP에도 선정되었다.
그러나 다음 해부터 허리 통증, 아킬레스건 통증 등 부상이 잇따르면서 한때 "재기 불능"이라고까지 불렸지만, 불굴의 정신으로 마운드에 올라 그 모습에서 "불사조"라는 애칭이 붙었다[4]。
미국에서 수술을 받았지만, 1988년에는 설상가상으로 CF 촬영 도중 아킬레스건까지 파열되는 불운을 겪었다. 하지만 부상을 딛고 일어나 다시 좋은 활약을 보여주어서 “불사조”라는 별명이 붙었다. 플레잉코치로도 활동하기도 하였다.
1983년 대부분의 기간과 1984년 전부를 결장했고, 1985년 리그에 복귀한 그는 "불사조"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그 이후로 한 시즌에서 116⅔이닝 이상을 던지지 못했다. 구원 투수로 전향했지만 여전히 부상에 시달렸다.
부상과 재기를 반복하다가 OB 베어스의 1995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하고 1996년 9월 4일 대전 한화전에서 선발로 등판하여 최고령 승리 투수가 되었다. 그리고 이 경기가 마지막이 되었으며, 시즌을 마친 후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1997년에 열린 은퇴식 당시에 마운드 키스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박철순의 등번호 21번은 2002년 두산 베어스에 의해 영구 결번되었다.[2]
4. 은퇴 이후
1996년 시즌을 마치고 최고령 투수로 은퇴한 후, OB의 투수코치를 맡았으나 OB 베어스 선수단 집단 이탈 사건의 주동자로 낙인찍혔다.[17] 1997년 7월 13일 술을 마시고 승용차를 운전한 혐의 때문에 다음 날 강남경찰서로부터 도로교통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입건되어 100일간의 운전면허정지 처분[18]을 받아 물의를 일으켰다. 1998년 7월 15일 2군 훈련 도중 후배 선수를 구타한 고참선수들을 구단이 문책한 데[19] 반발하는 등 구단과의 마찰로 그 해 시즌 중 사임하고 야구계를 완전히 떠났다.[20] 사임한 후 잠시 경인방송에서 메이저 리그 해설을 맡기도 했다.[21]
현재는 경기도 의왕시에서 스포츠 용품 회사인 알룩 스포츠의 회장겸 의왕시 사회인야구협회 고문을 맡고있다. 2년 동안 OB에서 투수 코치를 맡았지만, 퇴단 후에는 야구계를 떠나 실업가로 활동했다.
2002년, 두산 베어스는 박철순의 등번호 "21"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5. 주요 기록
# | 기록 | 소속 | 날짜 | 구장 | 상대팀 | 경기 결과 | 주석 및 기타 |
최다 연승 | 22연승 | OB | 1982. 9. 18 | 대전 | 롯데 | 당시 나이 : 26세 6개월 6일 | |
최고령 승리 투수 | 39세 1개월 17일 | OB | 1995. 4. 18 | 잠실 | LG | 9 - 2 | 선발 7이닝 5안타 1실점 |
40세 5개월 23일 | OB | 1996. 9. 4 | 대전 | 한화 | 5 - 1 | 선발 5이닝 5안타 무실점 | |
최고령 완봉승 | 36세 5개월 | OB | 1992. 8. 12 | 잠실 | 해태 | 0 - 5 | [24] |
38세 5개월 | OB | 1994. 8. 12 | 잠실 | 태평양 | 2005년 송진우가 39세 6개월 22일로 경신 | ||
최고령 세이브 | 40세 4개월 18일 | OB | 1996. 7. 30 | 잠실 | LG | 4 - 6 | 9회초 1사 1,3루 등판, 두 타자 범타 처리 2007년 송진우가 41세 3개월 15일로 경신 |
- 다승왕 (1982년)
- 최우수 방어율 (1982년)
- MVP (1982년)
6. 통산 기록
6. 1. 마이너 리그
1980년 미국에 건너온 박철순은 A 클래스 스톡턴 포츠와 AA 클래스 엘파소 디아블로스에서 투구했다. 마이너 리그에서 2년 동안 박철순은 11승 12패, 평균자책점 4.30을 기록했다.[1]1980년 스톡턴 포츠 (싱글 A+)에서 3승 2패 평균자책 2.31, WHIP 1.00을 기록했다. 1981년에는 스톡턴 포츠 (싱글 A+)에서 5승 7패 평균자책 4.22, WHIP 1.28, 엘패소 디아블로스 (더블 A)에서 3승 3패 평균자책 5.77, WHIP 1.72를 기록했으며, 1981년 텍사스 리그 최다승 부문 3위에 올랐다.
마이너 리그의 성적은 [http://www.thebaseballcube.com/players/P/Chel-Sun-Park.shtml 더 베이스볼 큐브] 에 기록되어 있다.
6. 2. KBO 리그
박철순은 1982년 한국프로야구 원년에 OB 베어스에 입단하여 리그 최고의 투수로 자리매김했다. 1982년 시즌에 24승 4패, 평균자책점 1.84, 108 탈삼진을 기록하며 KBO 리그 MVP와 투수 트리플 크라운을 동시에 석권했다.[2] 특히 22연승은 당시 KBO 리그 최다 연승 기록이었다.[2]연 도 | 소 속 | 나 이 | 승 리 | 패 전 | 승 률 | 평 자 책 | 출 장 | 선 발 | 완 투 | 완 봉 | 세 이 브 | 홀 드 | 이 닝 | 피 안 타 | 피 홈 런 | 볼 넷 | 고 4 | 탈 삼 진 | 몸 맞 | 보 크 | 폭 투 | 실 점 | 자 책 | 타 자 수 | W H I P |
---|---|---|---|---|---|---|---|---|---|---|---|---|---|---|---|---|---|---|---|---|---|---|---|---|---|
1982 | OB | 26 | 24 | 4 | .857 | 1.84 | 36 | 19 | 15 | 2 | 7 | 0 | 224.2 | 151 | 7 | 67 | 1 | 108 | 6 | 0 | 4 | 60 | 46 | 871 | 0.97 |
1983 | 27 | 0 | 1 | .000 | 3.48 | 4 | 4 | 0 | 0 | 0 | 0 | 10.1 | 10 | 0 | 4 | 0 | 4 | 0 | 0 | 0 | 4 | 4 | 43 | 1.36 | |
1985 | 29 | 1 | 4 | .200 | 2.68 | 9 | 5 | 2 | 0 | 0 | 0 | 50.1 | 36 | 2 | 14 | 0 | 34 | 2 | 0 | 1 | 19 | 15 | 193 | 0.99 | |
1986 | 30 | 5 | 3 | .625 | 3.54 | 13 | 7 | 1 | 1 | 0 | 0 | 53.1 | 46 | 3 | 22 | 0 | 29 | 0 | 0 | 4 | 23 | 21 | 220 | 1.28 | |
1987 | 31 | 2 | 0 | 1.000 | 2.25 | 5 | 3 | 1 | 0 | 1 | 0 | 24.0 | 17 | 0 | 9 | 0 | 11 | 0 | 0 | 0 | 7 | 6 | 97 | 1.08 | |
1989 | 33 | 1 | 1 | .500 | 4.96 | 12 | 1 | 0 | 0 | 0 | 0 | 16.1 | 17 | 1 | 9 | 0 | 14 | 0 | 0 | 0 | 11 | 9 | 74 | 1.59 | |
1990 | 34 | 4 | 9 | .308 | 4.78 | 18 | 16 | 2 | 1 | 0 | 0 | 96.0 | 104 | 6 | 41 | 1 | 58 | 0 | 0 | 2 | 53 | 51 | 420 | 1.51 | |
1991 | 35 | 7 | 5 | .583 | 3.51 | 18 | 18 | 2 | 0 | 0 | 0 | 102.2 | 97 | 5 | 47 | 1 | 55 | 6 | 0 | 5 | 48 | 40 | 444 | 1.40 | |
1992 | 36 | 7 | 6 | .538 | 2.80 | 30 | 6 | 1 | 1 | 9 | 0 | 99.2 | 92 | 5 | 34 | 3 | 68 | 1 | 0 | 6 | 35 | 31 | 411 | 1.26 | |
1993 | 37 | 7 | 5 | .583 | 2.08 | 25 | 13 | 0 | 0 | 2 | 0 | 116.2 | 99 | 3 | 39 | 2 | 90 | 0 | 0 | 4 | 30 | 27 | 469 | 1.18 | |
1994 | 38 | 7 | 7 | .500 | 2.61 | 20 | 15 | 5 | 2 | 0 | 0 | 93.0 | 73 | 3 | 29 | 0 | 66 | 3 | 0 | 1 | 31 | 27 | 369 | 1.10 | |
1995 | 39 | 9 | 2 | .818 | 4.47 | 20 | 15 | 0 | 0 | 0 | 0 | 94.2 | 98 | 8 | 42 | 0 | 67 | 8 | 0 | 3 | 54 | 47 | 425 | 1.48 | |
1996 | 40 | 2 | 6 | .250 | 2.62 | 21 | 11 | 0 | 0 | 1 | 0 | 68.2 | 68 | 0 | 34 | 2 | 44 | 4 | 0 | 1 | 26 | 20 | 302 | 1.49 | |
KBO 통산 : 13년 | 76 | 53 | .589 | 2.95 | 231 | 133 | 29 | 7 | 20 | 0 | 1050.1 | 908 | 43 | 391 | 10 | 648 | 30 | 0 | 31 | 401 | 344 | 4338 | 1.24 |
- 시즌 기록 중 '''굵은 글씨'''는 해당 시즌 최고 기록
잦은 부상으로 1983년 대부분의 경기와 1984년 시즌 전체를 결장했지만,[2] 1985년 복귀하여 '불사조'라는 별명을 얻었다.[2] 이후 구원 투수로 전향하여 선수 생활을 이어갔으며, 1994년 8월에는 태평양 돌핀스를 상대로 완봉승을 거두며 KBO 리그 최고령 완봉승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 기록은 송진우에 의해 경신되었다.)[2]
1996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박철순은 두산 베어스의 투수 코치를 맡아 1998년까지 활동했다.[2] 그의 등번호 21번은 2002년 두산 베어스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2]
7. 기타
7. 1. 방송 출연
KBS 《이것이 인생이다》에서 〈불사조의 노래-박철순의 야구인생과 사랑〉 편에 출연하였다. (1997년 11월 20일 방송)7. 2. CF
- 1983년 LF 남성캐주얼 광고에 출연했다.
- 1988년 이랜드그룹 빅맨 광고에 출연했다.
- 1994년 오리온 초코파이 광고에 출연했다.
- 1996년 농심 큰사발 광고에 허정민과 함께 출연했다.
- 1999년 롯데네슬레코리아 테이스터스초이스 광고에 출연했다.
- 2012년 기아 광고에 출연했다.
CF 촬영 중 점프를 너무 많이 해서 아킬레스 건이 끊어지기도 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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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야구 파견 대표팀 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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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렘 야구 - 한국, 호주에 2:0으로 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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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렘 야구 - 김봉연·박해종 홈런… 한국, 강호 쿠바 연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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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지금 - 프로 야구 원년 선수 142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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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승 달성한 니퍼트, 박철순과 이상훈 기록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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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기록…니퍼트, 리오스 넘어 MVP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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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태 감독, 95년 OB 김인식 감독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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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초흡연 재키林(임) 비디오 자키 구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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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이야기》… 박철순 17년 인연 OB와 결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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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OB맨, 박철순 코치 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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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순, TV해설 마이크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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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잘알]'집단 체벌에서 학교 폭력까지' 스포츠 폭력 어두운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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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뉴스
해태 OB에 발목 잡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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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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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건 타임라인
( 최근 20개의 뉴스만 표기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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