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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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생은 335년에 태어나 357년에 사망한 전진의 황제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한쪽 눈이 없었고 잔혹한 성격을 보였으며, 355년 황제에 즉위한 후 폭정을 일삼아 많은 사람들을 처형했다. 부생은 자신의 신체적 결함에 대한 콤플렉스로 인해 특정 단어 사용을 금지하고, 과도한 음주와 기행을 일삼았다. 결국 그는 사촌 부견의 반란으로 폐위되어 살해되었으며, 그의 통치는 권력 남용의 비극적인 결과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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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생 | |
---|---|
기본 정보 | |
이름 | 부생 |
전체 이름 | 부생 (苻生) |
출생명 | 포생 (蒲生) |
아버지 | 부건 |
출생일 | 335년 |
사망일 | 357년 |
사후 칭호 | 여왕 (厲王, "폭력적인") |
왕조 | 전진 |
통치 정보 | |
칭호 | 전진 황제 |
재위 기간 | 355년 7월 10일 – 357년 |
이전 통치자 | 부건 |
다음 통치자 | 부견 |
연호 | 수광 (壽光) |
연호 기간 | 355년–357년 |
개인 정보 | |
성 | 부 (푸, Fu) |
휘 | 부생 |
자 | 장생 |
생년 | 335년? |
사망년 | 357년 |
아버지 | 부건 (제3자) |
어머니 | 명덕황후 |
황후 | 양황후 |
기타 정보 | |
시대 이름 | 수광 (Shòuguāng) |
시대 날짜 | 355–357 |
사후 이름 | 여왕 (Prince Li) |
2. 생애
355년 아버지 부건(苻健)이 죽자 뒤를 이어 황제에 즉위한 부생은 잔혹한 폭정을 일삼았다.[1][3] 사람을 함부로 죽이고 공신들을 마음대로 처형했으며,[3] 부건의 유언에 따라 여러 고위 관리들이 보좌하도록 임명되었지만, 모두 폭력적인 통치 아래서 비교적 빨리 죽음을 맞이했다.
이름 | 사망 연도 | 사망 원인 |
---|---|---|
어준(魚遵) | 357년 | 큰 물고기가 창포를 먹는 꿈을 꾼 후 아들들과 손자들과 함께 처형 |
뇌약아(雷弱兒) | 355년 | 측근인 조소(趙韶)와 동영(董榮)의 거짓 고발로 아들들과 손자들과 함께 처형 |
양황후의 삼촌 모귀(毛貴) | 355년 | 점성가들이 큰 장례식이 있을 것이고 고위 관리들이 죽을 것이라고 예언한 후, 양황후, 량안, 량릉과 함께 처형 |
왕타(王墮) | 356년 | 동영의 심기를 건드린 후 처형. 동영은 부견에게 점성술적 징조에 따라 고위 관리를 처형해야 한다고 조언 |
량릉(梁楞) | 355년 | 양황후, 모귀, 량안과 함께 처형 |
량안(梁安) | 355년 | 양황후, 모귀, 량릉과 함께 처형 |
단순(段純) | 355년 | 연도 중에 연호를 바꾸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제안에 불쾌감을 느껴 처형 |
신뢰(辛牢) | 356년 | 연회 중간에 활을 쏴 죽임. 연회 주최자로서 모든 사람을 취하게 하지 못한 것에 불만 |
355년, 전량(前凉)이 전진에 속국이 되었으며,[3] 356년에는 전량 군주 장조가 살해되고 뒤를 이은 장현량이 아직 어리다는 소식을 듣고 정동장군 부류 등을 고장에 파견하여 항복을 설득했다. 장현량을 보좌하는 량주목 장관은 크게 두려워하여 장현량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칭번하도록 상소했고, 장현량으로부터의 사자가 도착하자 부생은 장현량 등이 칭했던 관작을 그대로 수여했다.
357년에는 강족 요양(姚襄)의 침공을 막아 요양을 전사시켰고 항복해 온 요장(姚萇)을 받아들였다.[3]
부생은 한쪽 눈이 먼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없다", "부족하다" 등의 단어 사용을 금지했고, 어긴 자는 가차 없이 처형했다.[4] 이는 그의 의심과 편집증적 성격을 반영한다.
부생은 지나친 음주로 비합리적인 결정을 자주 내렸다. 연회 중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이유로 신하를 활로 쏴 죽였고,[5] 술에 취해 정사를 돌보지 않고 측근에게 임의로 결정을 내리게 했다. 잦은 처형과 잔혹한 형벌은 공포 정치를 확산시켰다. 사람을 산 채로 가죽을 벗기거나 끓는 물에 던지는 등 잔혹 행위를 일삼았고,[4] 이는 백성과 관리들에게 공포감을 조성했다.
357년 부견(苻堅)의 반정으로 살해되었고 시호를 여왕으로 하였다.[3]
2. 1. 초기 생애와 즉위 과정
335년 부건(苻健)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한 쪽 눈이 없었고, 성정이 포악하여 조부 부홍(苻洪)에게 미움을 받았다.[1]354년에 형 부장(苻萇)이 전쟁에서 얻은 상처로 사망하자 전진의 태자 자리가 비게 되었다. 부건은 당시 유행하던 도참인 '오양삼안(五羊三眼 : 양 세 마리에 눈 다섯 개)'을 따라 애꾸눈인 부생을 태자로 삼았다.[1]
355년에 부건이 죽자 뒤를 이어 황제에 즉위하였다.[1]
부생은 어릴 때부터 무법한 행위를 반복하여 조부인 부홍에게서 심하게 미움을 받았다.[4]
태어날 때부터 외눈이었는데, 그가 어렸을 때 부홍이 시자에게 "외눈은 한쪽 눈에서만 눈물을 흘린다고 들었는데, 정말인가?"라고 농담으로 묻자 시자는 이에 동의했다. 부생은 이에 분노하여 칼을 사용하여 스스로를 찔러 피를 흘리며 "이것도 설마 눈물이라고 하는 건가"라고 말했다. 부홍은 이에 크게 놀라 부생을 채찍질했다. 부생은 "태어나서 칼에 찔리는 것을 두려워한 적은 없지만, 채찍질은 참을 수 없군요"라고 말했고, 부홍은 "네가 행동을 고치지 않으면, 나는 너를 노예로 만들겠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부생은 "설마 (노예에서 황제로 성장한) 석륵에는 미치지 못하겠지요"라고 반박하자 부홍은 놀라 맨발로 부생의 입을 막고 부건(후의 부건)에게 "이 아이는 매우 잔혹하니, 당장 없애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집안을 해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로 인해 부건은 부생을 죽이려 했지만, 숙부인 부웅이 "아이는 성장하면 자연히 고쳐지는 법입니다. 어찌 이런 짓을 할 필요가 있습니까!"라고 간언하여 부건은 생각을 멈췄다고 한다.[4]
성장하면서 천균을 드는 힘을 갖게 되었고, 용맹하고 위무했다. 맨손으로 맹수와 격투하고, 달리는 말은 뛰어서 따라잡았으며, 검술과 기사의 솜씨는 당대에서 견줄 자가 없었다. 그러나 그 성격은 흉폭하고 살육을 좋아했으며, 또한 술을 많이 마셨다.[4]
350년 1월, 포홍이 대도독, 대장군, 대선우, 삼진왕을 자칭하고 자신의 성을 부(苻)로 고치자, 부생도 또한 부생으로 이름을 고쳤다.[4]
351년 1월, 부건이 천왕·대선우의 자리에 즉위하자, 부생은 회남공에 봉해졌다 (전진의 성립). 352년 1월, 부건이 황제 자리에 즉위하자, 회남왕으로 진봉되었다.[4]
354년 3월, 동진의 정서대장군 환온이 전진을 습격하여 상락과 청니를 함락시켰다. 부생은 황태자 부창, 승상 부웅, 위대장군 부정, 북평공 부석 등과 함께 맞이하도록 명을 받아 5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요류와 수사퇴에 주둔했다. 4월, 남전에서 환온과 교전하게 되자, 부생은 스스로 진두에 서서 적진으로 돌격하여 10여 차례 드나들며 적의 깃발을 빼앗고, 장군 응탄, 유홍을 비롯한 10여 명의 무장을 베어 1000명을 살상했다. 그러나 환온 또한 병사를 이끌고 격전을 벌였기에, 최종적으로 전진군은 대패를 겪었다. 환온은 각지에서 전전하면서 전진하여 마침내 장안 동쪽에 있는 파상까지 도달했다. 삼보의 군현은 모두 환온에게 항복했다. 부생 등은 장안성 남쪽으로 물러나 수비를 굳게 하고 환온의 침공을 막았다. 6월, 환온은 군량 부족으로 철수를 시작하자, 부생 등은 환온을 추격하여 동관에서 여러 차례 격파하고 수만 명을 베었다.[4]
7월, 환온 격퇴의 공적으로 인해, 부생은 중군대장군에 임명되었다.[4]
10월, 황태자 부창은 환온과의 전투에서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사망했다. 355년 4월, 새로 태자를 세우게 되자, 어머니 강황후는 진왕 부류 (부생의 동생)를 황태자로 세우기를 원했지만, 부건은 참문에 "세 양 다섯 눈"의 구절이 있었다고 하여, 부생을 황태자로 세웠다 (세 마리 양에 눈이 다섯이라는 것은, 눈이 하나 없어졌다는 뜻이다. 또한, 부생은 셋째 아들이었다).[4]
6월, 부건이 병상에 눕게 되자, 부정은 병사를 이끌고 동궁으로 들어가 부생을 죽이고 자립하려 했다. 이때, 부생은 서궁에서 간병을 하고 있었기에, 부정은 이미 부건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동익문을 공격했다. 그러나 부건이 모습을 드러내자, 부정의 병사들은 도주했다. 부건은 부정을 체포하여 처형했다.[4]
부건은 병이 깊어지자, 중신의 태사, 녹상서사 어준, 승상 뇌약아, 태부 모귀, 사공 왕타, 상서령 양릉, 부사 양안, 태보 단순, 우사마 신로 등을 불러 부생을 보좌하도록 유조했다. 또한, 부생이 흉악하여 가업을 보존하지 못할까 우려하여, 부생에게 "육이 (호)의 추장이나 대신 중에서 만약 너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다면, 조금씩 제거하도록 하라"고 유언했다. 며칠 후 부건은 사망했다. 부생은 부건을 경명황제로 시호하고, 묘호를 고조로 했다.[4]
2. 2. 폭정과 잔혹한 통치
부생은 355년 황제 즉위 후, 폭력적이고 잔혹한 통치를 시작했다. 그는 한쪽 눈이 먼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없다", "부족하다" 등의 단어 사용을 금지했고, 어긴 자는 가차 없이 처형했다.[4] 이는 그의 의심과 편집증적 성격을 반영한다.부생은 지나친 음주로 비합리적인 결정을 자주 내렸다. 연회 중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이유로 신하를 활로 쏴 죽였고,[5] 술에 취해 정사를 돌보지 않고 측근에게 임의로 결정을 내리게 했다.
잦은 처형과 잔혹한 형벌은 공포 정치를 확산시켰다. 사람을 산 채로 가죽을 벗기거나 끓는 물에 던지는 등 잔혹 행위를 일삼았고,[4] 이는 백성과 관리들에게 공포감을 조성했다.
부생의 폭정은 사회적, 정치적 혼란을 야기했다. 많은 이들이 그의 잔혹함을 피해 도망쳤고, 관리들은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했다. 이는 결국 357년 부견의 반정으로 이어져 부생은 살해되고, 폭정은 막을 내렸다.
2. 3. 주요 사건 및 업적
355년 부건이 죽은 후 황제에 즉위한 부생은 잔혹한 폭정을 실시했다.[3] 사람을 예사로 죽이고 공신들을 마음대로 처형했으며,[3] 부견의 유언에 따라 여러 고위 관리들이 보좌하도록 임명되었지만, 모두 폭력적인 통치 아래서 비교적 빨리 죽음을 맞이했다.이름 | 사망 년도 | 사망 원인 |
---|---|---|
어준(魚遵) | 357년 | 부생이 큰 물고기가 창포를 먹는 꿈을 꾼 후 아들들과 손자들과 함께 처형 |
뇌약아(雷弱兒) | 355년 | 부생의 측근인 조소(趙韶)와 동영(董榮)의 거짓 고발로 아들들과 손자들과 함께 처형 |
양황후의 삼촌 모귀(毛貴) | 355년 | 점성가들이 큰 장례식이 있을 것이고 고위 관리들이 죽을 것이라고 예언한 후, 양황후, 량안, 량릉과 함께 처형 |
왕타(王墮) | 356년 | 동영의 심기를 건드린 후 처형. 동영은 부견에게 점성술적 징조에 따라 고위 관리를 처형해야 한다고 조언 |
량릉(梁楞) | 355년 | 양황후, 모귀, 량안과 함께 처형 |
량안(梁安) | 355년 | 양황후, 모귀, 량릉과 함께 처형 |
단순(段純) | 355년 | 부생이 연도 중에 연호를 바꾸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제안에 불쾌감을 느껴 처형 |
신뢰(辛牢) | 356년 | 연회 중간에 활을 쏴 죽임. 연회 주최자로서 모든 사람을 취하게 하지 못한 것에 불만 |
355년, 전량(前凉)이 전진에 속국이 되었으며,[3] 356년에는 전량 군주 장조가 살해되고 뒤를 이은 장현량이 아직 어리다는 소식을 듣고 정동장군 부류 등을 고장에 파견하여 항복을 설득했다. 장현량을 보좌하는 량주목 장관은 크게 두려워하여 장현량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칭번하도록 상소했고, 장현량으로부터의 사자가 도착하자 부생은 장현량 등이 칭했던 관작을 그대로 수여했다.
357년에는 강족 요양(姚襄)의 침공을 막아 요양을 전사시켰고 항복해 온 요장(姚萇)을 받아들였다.[3] 같은 해 부견(苻堅)의 반정으로 살해당했고 시호를 여왕으로 하였다.[3]
2. 4. 폐위와 죽음
357년 부견의 반정으로 부생은 살해되었고, 시호는 여왕(厲王)으로 정해졌다. 부생은 즉위 직후부터 폭력적이고 잔혹한 본성을 드러냈다. 부견의 유언에 따라 여러 고위 관리들이 부생을 보좌하도록 임명되었지만, 종조부인 무도왕 부안(苻安)을 제외하고는 모두 부생의 폭정 아래에서 비교적 빨리 죽음을 맞이했다.부생에게 죽임을 당한 이들은 다음과 같다.
- 어준(魚遵): 357년 부생이 큰 물고기(중국어로 "위"(魚))가 창포(중국어로 "푸"(蒲))를 먹는 꿈을 꾼 후 아들, 손자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 뇌약아(雷弱兒): 355년 부생의 측근인 조소(趙韶)와 동영(董榮)의 거짓 고발로 아들, 손자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 모귀(毛貴, 양황후의 삼촌): 355년 점성가들이 큰 장례와 고위 관리들의 죽음을 예언한 후, 양황후, 량안, 량릉과 함께 처형되었다.
- 왕타(王墮): 356년 동영의 심기를 건드린 후 처형되었다. 동영은 부견에게 점성술적 징조에 따라 고위 관리를 처형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 량릉(梁楞): 355년 양황후, 모귀, 량안과 함께 처형되었다.
- 량안(梁安): 355년 양황후, 모귀, 량릉과 함께 처형되었다.
- 단순(段純): 355년 부견이 황제가 된 바로 그 날, 부생이 연도 중에 연호를 바꾸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제안에 불쾌감을 느껴 처형되었다.
- 신뢰(辛牢): 356년 부생이 연회 중간에 활을 쏴 죽였다. 부생은 그가 연회 주최자로서 모든 사람을 취하게 하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었다.
357년 후반, 부생은 사촌인 부견 동해왕과 부법(苻法) 청하왕을 의심하여 그들을 죽이려 했다. 시녀들이 이 소식을 부견에게 누설했고, 부견은 즉시 사병을 이끌고 궁궐을 공격했다. 부생의 잔혹함에 불만을 품고 있던 황궁 경비병들은 부견에게 투항했다. 부견은 술에 취해 정신을 잃은 부생을 사로잡아 폐위시키고 월왕으로 강등시킨 후 말에 끌려 죽였다. 이후 부견이 왕위를 차지했다.
태사령 강권(康権)은 357년 6월, 부생에게 "어젯밤, 세 개의 달이 나란히 뜨고, 혜성이 태미에 들어가 동정성에 연결되었습니다. 또한, 지난달 초부터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오지 않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아랫사람이 모반하는 징조이니, 폐하께서 덕을 닦아 이를 없애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부생은 분노하여 요언을 했다는 이유로 강권을 쳐 죽였다.
어느 날 밤, 부생은 시녀에게 "부법 형제들도 믿을 수 없다. 내일이라도 제거해야겠다."라고 말했다. 이 시녀는 청하왕 부법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부법은 특진 양평로, 광록대부 강왕 등과 장사 수백 명을 이끌고 운룡문으로 들이닥쳤다. 부법의 동생 부견은 상서 여파루와 함께 휘하 병사 수백 명을 이끌고 군고를 울리며 진군했다. 숙위 장사들은 모두 무기를 버리고 부견을 따랐다. 부생은 술에 취해 잠들어 있었는데, 부견이 군사를 이끌고 나타나자 놀라 측근에게 "이들은 누구인가?"라고 물었다. 측근이 "적입니다!"라고 대답하자, 부생은 "어찌 알현하지 않느냐!"라고 소리쳤고, 부견의 군사들은 모두 웃었다. 부생은 "어찌 즉시 알현하지 않느냐. 따르지 않는 자는 베어버리겠다!"라고 고함을 질렀다. 부생은 부견의 군사들에게 별실로 연행되어 월왕으로 강등된 뒤 살해당했다. 부생은 죽기 직전까지 술을 마셔 전후 사정을 분간하지 못했다고 한다. 향년 23세, 재위 3년이었다.
3. 연호
壽光|수광중국어 (355년 ~ 357년)
4.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부견 (경명 황제) | |
어머니 | 강황후 | |
배우자 | 양황후 | 355년 추대 및 처형 |
아들 | 부구 | 월국 세자 |
5. 인물 평가
부생에 대한 평가는 사서에 따라 극명하게 엇갈린다. 대부분의 사서에서는 부생을 폭군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낙양가람기》에서는 그를 옹호하는 기록을 남겼다.
부생은 즉위 초부터 폭력적인 성향을 드러냈다. 그는 자신의 장애를 조롱하거나 경멸할까 봐 두려워 "없다", "부족하다"와 같은 단어 사용을 금지했고, 이를 어기면 처형했다. 또한, 과도한 음주와 잔혹한 처벌을 일삼았으며, 신하들의 간언을 무시하고 측근들의 말만 믿었다. 부견의 유언에 따라 부생을 보좌하도록 임명된 고위 관리들 역시 대부분 부생의 폭정 아래서 죽음을 맞이했다.[3]
357년, 부생은 사촌 부견을 의심하여 죽이려 했으나, 시녀의 밀고로 이 사실을 알게 된 부견은 군사를 이끌고 궁궐을 공격했다. 부생의 잔혹함에 불만을 품고 있던 황궁 경비병들은 부견에게 투항했고, 결국 부생은 사로잡혀 폐위된 후 죽임을 당했다.
5. 1. 긍정적 평가
《낙양가람기》에는 "부생은 용맹을 좋아하고 술을 즐겼지만, 어질고 함부로 사람을 죽이는 일은 없었다. 그의 통치를 보면 흉폭하다고 할 수 없는데, 사서에는 천하의 악을 모두 그에게 돌리고 있다"라는 정반대의 인물 평가가 실려 있다.[1]5. 2. 부정적 평가
부생은 즉위 직후부터 폭력적이고 잔혹한 본성을 드러냈다. 부견의 유언에 따라 여러 고위 관리들이 부생을 보좌하도록 임명되었지만, 대부분 부생의 폭정으로 인해 죽임을 당했다.[3]다음은 부생에게 희생된 주요 인물들이다.
이름 | 직위 | 사망 시기 및 원인 |
---|---|---|
어준 | 태사 | 357년, 부생이 큰 물고기가 창포를 먹는 꿈을 꾼 후 아들, 손자들과 처형[4] |
뇌약아 | 승상 | 355년, 조소와 동영의 모함으로 아들, 손자들과 처형[5] |
모귀 | 태부, 부생의 부인 양황후의 삼촌 | 355년, 양황후, 량안, 량릉과 함께 처형 |
왕타 | 사공 | 356년, 동영의 심기를 건드려 처형 |
량릉 | 양복야 | 355년, 양황후, 모귀, 량안과 함께 처형 |
량안 | 양거기 | 355년, 양황후, 모귀, 량릉과 함께 처형 |
단순 | 355년, 부생이 연호를 바꾸는 것에 반대하여 처형 | |
신뢰 | 상서령 | 356년, 연회에서 술을 마시지 않아 부생에게 활 맞아 사망 |
강평 | 광록대부, 강태후의 오빠 | 356년, 부생의 행동을 바로잡으려다 머리가 부서져 처형 |
두욱 | 낙주 자사 | 356년, 동진과 내통했다는 모함으로 처형 |
정굉 | 금자광록대부 | 356년, 농사에 방해가 된다며 위교 수축에 간언하다 처형 |
정연 | 태의령 | 356년, 부생이 대추를 많이 먹은 것을 알아맞히지 못한다고 참수[5] |
우이 | 금자광록대부 | 357년, 부생에게 중군장군으로 임명된 후 자살 |
부생은 한쪽 눈이 먼 것에 대한 콤플렉스로 인해 "없다", "부족하다" 등의 단어 사용을 금지했고, 이를 어기면 심지어 측근이라도 처형했다. 그는 과도한 음주와 잔혹한 처벌을 일삼았으며, 동물들을 잔혹하게 다루는 것을 즐겼고, 때로는 사람에게도 같은 짓을 했다. 356년에는 숙부 강평을 잔혹하게 처형하여 강태후가 슬픔과 두려움에 죽게 했다.[4]
부생은 신하들의 간언을 무시하고, 간사한 자들의 말만 믿었으며, 상벌에 기준이 없었다. 총애하는 처첩이라도 작은 실수로 살해하고 시체를 위수에 버렸으며, 관리들에게 궁궐 앞에서 알몸으로 성관계를 맺도록 명령하기도 했다. 사형수의 얼굴 가죽을 벗겨 노래하고 춤추게 하고, 군신들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며 즐거워했다.
부생의 폭정으로 종실, 구신, 친척, 충량한 선비 대부분이 살해되었고, 왕공들은 관직을 사임하고 귀향을 청했다.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었지만, 공개적으로 비난할 수 없어 길에서 만나면 눈으로 불만을 표현했다. 부생 치세 말년에는 살해된 사람이 천 명을 훨씬 넘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들과는 상반되게 낙양가람기에는 부생이 용맹을 좋아하고 술을 즐겼지만, 어질고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않았으며, 그의 통치가 흉폭하다고 할 수 없다는 평가가 실려 있다.
5. 3. 현대적 관점의 재평가
낙양가람기에는 "부생은 용맹을 좋아하고 술을 즐겼지만, 어질고 함부로 사람을 죽이는 일은 없었다. 그의 통치를 보면 흉폭하다고 할 수 없는데, 사서에는 천하의 악을 모두 그에게 돌리고 있다"라는 정반대의 인물 평가가 실려 있다.[1]6. 기타
- 장군 강회는 환온과의 전투에서 전사했지만, 아들 강연이 아직 봉해지기 전에 부건이 사망했다. 강회의 아내 번씨는 길거리에서 직접 부생에게 상서를 올려 강회의 충렬을 논하며 아들을 봉해줄 것을 청했다. 부생은 무례한 행동에 분노하여 번씨를 그 자리에서 사살했다.[1]
- 부생은 아방궁으로 가는 도중, 어떤 남매를 만나 비례(성행위)를 하도록 강요했다. 그들이 거절하자 부생은 분노하여 살해했다.[2]
- 어느 날, 군신들과 함양의 고성에서 주연을 열었는데, 이에 늦게 온 자는 모두 참살했다고 한다.[3]
- 부생은 좌우 측근에게 "짐이 천하를 다스리는 것에 대해, 너는 밖에서 어떻게 듣고 있는가?"라고 묻자, 한 측근은 "성명하신 폐하께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덕분에, 상벌은 명확해졌고, 천하는 태평을 노래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부생은 격노하여 "너는 나에게 아첨하는가!"라고 말하며, 참살했다. 다른 날, 같은 질문에 다른 측근은 "폐하의 형벌에는 약간 지나친 점이 있습니다"라고 간언하자, 부생은 또 격노하여 "네가 나를 비방하는가!"라고 말하며, 똑같이 참살했다.[4]
참조
[1]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Medieval China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2017-04-06
[2]
서적
Biographical Dictionary of Chinese Women: Antiquity Through Sui, 1600 B.C.E. - 618 C.E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5-03-26
[3]
서적
晋書에서는袁朗과記される
[4]
서적
晋書에서는、元正(1月1日)の盛旦に日蝕があり、正陽(四月)の神朔に大風が起こりました。また、水旱は幾度もあり、獣災も相次いでおります。これらはみな、陛下が政事に勉めなかった事により、和気が乖離してしまったからです。願わくば、陛下は元元(万民)を養う事に努め、百姓を平章し、細微の事も嫌わず、山嶽の過ちを含み、宗社を敬い、公卿を愛礼し、秋霜の威を去り、三春の沢を垂らしていただきますよう。そうすれば、姦回は収まり、妖気は自ずと消え失せ、乾霊(天神)は皇家を祐し、永らく無窮の美を保てる事でしょう。と記載される。
[5]
서적
晋書には全く違う話が載せられている。ある時、太医令程延に安胎薬を作らせた。その際、人参の良し悪しが薬にどれだけ影響を与えるか尋ねた。程延は「少しばかり出来が悪いといえども、実用には問題ないかと」と答えた。この時、苻生は程延の目に嫌悪感を覚え、その目を抉り出し、その後殺害した。
[6]
서적
『資治通鑑』では姚益生と記載され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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