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간섭 조약 (스페인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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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불간섭 조약은 1936년 스페인 내전 발발 후 프랑스가 제안하고 영국이 호응하여, 이탈리아, 독일, 소련 등 주요 국가들이 참여한 국제적 협약이다. 이 조약은 내전의 확대를 막고 대리전을 방지하려는 목적으로, 스페인 내전에 대한 군사적 지원 및 개입을 제한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그러나 독일과 이탈리아는 '의용군' 파견을 통해 국민파를, 소련은 공화파를 지원하며 조약을 위반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며 조약은 실효성을 거두지 못했다. 결국 국민파의 승리로 내전이 종결되었고, 불간섭 정책은 국제 연맹의 무력함을 드러내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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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간섭 조약 (스페인 내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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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이름 | 불간섭 협정 |
원어 이름 | Non-Intervention Agreement (영어) |
유형 | 조약 |
목적 | 스페인 내전에 대한 간섭 억제 |
연혁 | |
발의 | 레옹 블룸 (프랑스 총리) |
제안일 | 1936년 8월 |
최초 참여국 |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
공식 불간섭 정책 선언 | 1936년 8월 |
불간섭 위원회 설립 | 1936년 9월 |
위원회 본부 | 런던 |
주요 내용 | |
핵심 | 스페인에 대한 무기 및 인력 지원 금지 |
한계 | 감시 및 제재 부족 추축국의 위반 행위 지속 |
영향 | |
결과 | 스페인 공화국의 군사적 약화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국민전선 지원 강화 |
논란 | 협정의 효과성에 대한 의문 일부 국가의 이중적인 태도 |
관련 인물 | |
주요 인물 | 레옹 블룸 네빌 체임벌린 |
관련 사건 | |
주요 사건 | 스페인 내전 |
참고 자료 | |
관련 서적 | 휴 토머스, "The Spanish Civil War" (https://archive.org/details/spanishcivilwar00thom_0) 헬렌 그레이엄, "The Spanish Republic at War 1936-1939" (https://archive.org/details/isbn_9780521459327) |
관련 자료 | https://web.archive.org/web/20150630104607/http://es.slideshare.net/WALTERWILLIAMMONTALV/la-soledad-de-la-republica-angel-vinas |
2. 불간섭 조약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독일과 이탈리아는 국민파를, 소련은 공화파를 지원하면서, 내전은 국제적인 대리 전쟁으로 번질 위험이 있었다. 이에 프랑스와 영국은 유화 정책의 일환으로 불간섭 조약을 제안하여, 전쟁이 유럽 전체로 확산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5][6]
1936년 8월, 프랑스는 주요 국가들에 불간섭 조약을 제안했고, 영국, 벨기에, 네덜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소련 등이 이를 수용했다. 미국은 공식적으로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불간섭 정책을 따르기로 했다.[118] 그러나 이 조약은 각국의 국내 정치 상황과 맞물려 여러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프랑스 내 좌파 세력과 영국 노동당은 공화파 지원을 주장하며 조약에 반대했다.[117]
불간섭 조약은 스페인 내전의 확전을 막기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이었지만, 주요 국가들의 비밀스러운 지원과 이중적인 태도로 인해 실효성을 거두지 못했다. 특히, 독일, 이탈리아, 소련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암암리에 내전에 개입하면서 조약의 의미를 퇴색시켰다.
2. 1. 제안 배경
스페인 내전 발발 초기, 독일과 이탈리아는 국민파를, 소련은 1936년 11월부터 공화파를 지원하면서 내전은 대리 전쟁으로 번질 위험이 커졌다. 이에 국제 사회는 내전 확산을 막기 위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인식했다.[114]1936년 8월 3일, 주이탈리아 프랑스 대사 샤를 드 샹브렝은 이탈리아에 불간섭 조약을 제안했다. 갈레아초 치아노는 검토를 약속하며 소극적으로 반응했지만, 영국은 즉시 지지했다.[115]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에게도 제안이 전달되었는데, 독일은 "조약은 불필요하나, 소련이 참여한다면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115]
1936년 8월 7일, 프랑스는 일방적으로 불간섭 조약을 선포했다.[116] 영국, 벨기에, 네덜란드, 체코슬로바키아는 조약을 수용하고 자국을 통한 군수물자 수송을 금지했다. 그러나 이 조약은 대중적 지지는 얻었지만, 일부 정당의 지지는 얻지 못했다. 프랑스 내 좌익들은 공화파 지원을 주장했고, 영국 노동당은 1937년에 불간섭 조약을 거부했다.[117]
1936년 8월 5일, 미국은 공식 발표 없이 불간섭 정책을 따르겠다고 밝혔다.[118] 글렌 L. 마틴 컴퍼니의 공화파 폭격기 판매 허가 요청에 연방 정부는 부정적으로 반응했다. 고립주의를 표방하던 미국이 불간섭 조약에 참여하자, 국제적 고립을 우려한 소련도 8월 23일 조약에 동의했다.[119]
2. 2. 주요 국가들의 반응
독일과 이탈리아는 스페인 내전 발발 초기부터 국민파를 지원했고, 소련은 1936년 11월부터 공화파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스페인 내전이 대리 전쟁으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와 확전을 막기 위한 조치의 필요성이 국제 사회에서 제기되었다.[114]1936년 8월 3일, 주이탈리아 프랑스 대사 샤를 드 샹브렝은 이탈리아에 불간섭 조약을 제안했다. 갈레아초 치아노는 검토를 약속했지만, 영국은 즉시 이 제안을 지지했다.[7] 같은 날, 독일 외무장관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에게도 이 제안이 전달되었는데, 독일은 조약이 불필요하다는 입장이었지만, 소련이 참여한다면 전쟁 확산 방지에 대해 논의할 수 있다고 밝혔다.[115]
1936년 8월 7일, 프랑스는 일방적으로 불간섭 조약을 선포했다.[116] 영국, 벨기에, 네덜란드, 체코슬로바키아는 이 조약을 지지하며 자국을 통한 군수 물자 수송을 금지했다. 그러나 이 조약은 대중적인 지지를 얻었지만, 일부 정당들의 지지를 얻는 데는 실패했다. 프랑스 내 좌익들은 공화파 지원을 주장했고, 영국의 노동당은 1937년에 불간섭 조약을 거부했다.[117]
1936년 8월 5일, 미국 또한 불간섭 조약을 따르겠다고 밝혔지만, 공식적인 발표는 아니었다.[118] 글렌 L. 마틴 컴퍼니가 공화파에 폭격기 8대 판매 허가를 요청했으나, 미국 연방 정부는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고립주의를 표방하던 미국이 불간섭 조약에 참여하자, 국제적 고립을 원치 않던 소련도 1936년 8월 23일에 조약에 동의했다.[119]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독일, 이탈리아, 소련은 비밀리에 스페인 내전에 개입했다.
2. 3. 조약의 한계
독일과 이탈리아는 스페인 내전 발발 초기부터 국민파를 지원했고, 소련은 1936년 11월부터 본격적으로 공화파를 지원하며 내전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에 국제 사회에서는 스페인 내전이 대리 전쟁으로 번질 가능성과 확전을 막기 위한 조치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114]프랑스와 영국 정부는 유화 정책의 일환으로 공동 외교 계획인 불간섭 협정을 제안했다. 이는 대리전이 유럽 전체의 갈등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는 것을 목표로 했다.[5][6]
1936년 8월 3일, 주이탈리아 프랑스 대사 샤를 드 샹브렝은 이탈리아에 불간섭 조약을 제시했고, 갈레아초 치아노는 검토를 약속했지만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영국은 즉시 이 계획을 원칙적으로 수용했다.[115][7] 독일 외무부 장관에게도 이 계획이 전달되었는데, 독일은 조약이 불필요하다는 입장이었지만, 소련이 참여한다면 전쟁 확산 방지에 대한 논의는 가능하다는 반응을 보였다.[115][7]
1936년 8월 7일, 프랑스는 일방적으로 불간섭을 선언했다.[116][9] 영국, 벨기에, 네덜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소련은 이미 이 선언을 수용하여 군수품 거래를 중단했다.[10] 포르투갈은 결정을 보류했다.[12]
이 조약은 대중적인 지지를 얻었지만, 일부 정당들의 지지는 얻지 못했다. 프랑스 내 좌익들은 공화파 지원을 주장했고, 영국 노동당은 1937년에 불간섭 조약을 거부했다.[117] 노동조합 회의(TUC)는 분열되었지만, 지도자 월터 시트린과 어니스트 베빈은 불간섭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18][19][20]
1936년 8월 5일, 미국은 공식 발표 없이 불간섭 정책을 따를 것임을 밝혔다.[118][22] 글렌 L. 마틴 컴퍼니가 공화파에 폭격기 판매 허가를 요청했으나, 연방 정부는 부정적인 답변을 했다.[119][22] 미국은 고립주의를 표방하며 불간섭 조약에 참여했고, 멕시코는 공화파를 공개적으로 지원한 첫 국가가 되었다.[22]
소련은 국제적으로 소외되는 것을 우려하여 1936년 8월 23일 불간섭 조약에 동의했다.[119][25] 스탈린은 전쟁 물자 수출 금지 포고령을 발표하여 소련을 서방 국가들과 일치시켰다.[24] 그러나 소련 언론과 반대 단체는 불간섭에 반대했다.[25]
불간섭 협정을 유지하기 위해 불간섭 위원회가 창설되었지만, 소련과 독일의 이중적인 행위는 이미 명백했다.[28]
많은 역사가들은 영국의 불간섭 정책이 기득권층의 반공주의 때문이라고 주장하지만, 스콧 램지는 영국이 "선량한 중립"을 보이며 양쪽에 베팅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영국은 미래의 유럽 전쟁에서 스페인의 승리 세력에게 '선량한 중립'을 얻는 것을 목표로 했다.[30]
3. 불간섭 위원회
불간섭 위원회는 스페인 내전의 확전을 막기 위해 불간섭 조약과 같은 목적으로 설립되었다.[120] 1936년 9월 9일 런던에서 첫 회의가 열렸으며, 유럽 국가들만 대표로 참석했다. 스위스는 중립 정책 때문에 참석하지 않았다.[32][33] 위원회는 스페인 내전에 인력과 물자가 전달되는 것을 막는 것을 표면적인 목적으로 삼았다.[5]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이탈리아와 독일이 국민당에게 무기를 계속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위원회에 대한 기대가 거의 없었다.[37] 실제로 불간섭 조약이 이탈리아와 독일의 국민당 지원을 막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위원회에서 공화국에 대한 소련의 지원이 위협받기도 했다.[39]
1936년 9월 14일에 열린 두 번째 회의에서는 불간섭의 일상적인 운영을 처리하기 위한 소위원회가 설치되었으나,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42] 국제 연맹은 앤서니 이든의 노력으로 포르투갈이 위원회에 가입하도록 설득했지만,[43] 알바레스 델 바요는 불간섭 협정이 국민당을 공화국 정부와 동등하게 취급한다며 반대했다.[44]
1936년 11월 12일, 스페인 국경과 항구에 감시단을 파견하는 계획이 비준되었으나, 이탈리아와 독일은 항공 수송 포함을 요구하며 지연 전술을 사용했다.[48] 12월 4일, 프랑스와 영국은 중재를 요청했지만, 이탈리아와 독일은 독일 군인 문제에 대한 논의를 거부했다.[52][51][53]
1937년 1월, 미국 의회는 스페인으로의 무기 수출을 금지했고,[58][59] 소련, 포르투갈, 독일, 이탈리아는 자원병 금지 요청에 응했다.[61] 5월에는 발레아레스 제도에서 스페인 공화군 공군 항공기에 의한 순찰선 공격이 발생했고, 독일 순양함 ''도이칠란트'' 공격은 독일의 보복으로 이어졌다.[72]
순찰 논의는 복잡하게 진행되었고, 결국 해상 순찰은 감시관으로 대체되었다.[84][85] 1937년, 모든 강대국은 불간섭을 포기할 준비가 되었고, 1938년 3월 프랑스는 무기 수송을 위해 국경을 다시 열었다.[99] 1938년 6월, 외국인 의용군 파악 및 철수를 위한 위원회 파견에 합의했다.[101]
1939년 2월 27일, 영국과 프랑스는 국민당 정부를 인정했고, 클레멘트 애틀리는 이를 '2년 반 동안의 위선적인 불간섭'이라고 비판했다.[107][108]
3. 1. 위원회 구성 및 활동
위원회는 1936년 9월 9일 런던에서 첫 회의를 가졌는데, 스위스는 중립 정책으로 인해 정부 간의 행동조차 금지되어 참석하지 않았다.[32][33][121] 위원장은 영국의 재무부 재무 차관인 윌리엄 모리슨이 맡았다. 회의는 주로 절차에 관한 것이었다.[34] 샤를 코뱅이 프랑스를, 디노 그란디가 이탈리아를, 이반 마이스키가 소련을 대표했다. 독일은 리벤트로프가 대표로 참석했고, 오토 크리스티안 아르치발트 폰 비스마르크가 부대표로 참석했지만, 그란디에게 회의를 맡겼다.[35] 그러나 독일은 그와 함께 일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소련의 요구로 포르투갈도 참석하지 않았다.[36] 영국과 프랑스는 이탈리아와 독일로부터 국민당에 대한 무기 수송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위원회에 대한 기대는 거의 없었다.[37] 영국은 이탈리아에 두 번 항의했는데, 한 번은 이탈리아 항공기가 마요르카에 착륙한 것에 대한 항의였고, 다른 한 번은 지중해에서의 중대한 변화에 대한 사전 예방적 항의였다.[38] 영국의 총리 스탠리 볼드윈과 블룸은 모두 스페인으로의 전 세계적인 수출을 중단시키려 노력했으며, 그것이 유럽의 최선의 이익이라고 믿었다. 위원회에서 공화국에 대한 소련의 지원이 위협받았다. 이는 불간섭 조약이 이탈리아와 독일의 국민당 지원을 막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시작되었다.[39][122] 리벤트로프는 회고록에서 "이것은 개입 위원회라고 불러야 더 적절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위원회 구성원들의 모든 활동은 자국이 스페인에 개입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거나 숨기는 것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40]두 번째 회의는 1936년 9월 14일에 열렸다.[41][123] 이 회의에서는 벨기에, 영국, 체코슬로바키아,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소련, 스웨덴 대표들이 참여하는 소위원회를 설치하여 비간섭의 일상적인 운영을 처리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가 지배적이었으며, 이는 우려스러운 일이었다. 소련의 비군사적 지원은 부활했지만, 군사적 지원은 재개되지 않았다.[42] 한편, 국제 연맹의 1936년 회의가 시작되었는데, 스페인 문제뿐만 아니라 아비시니아 위기의 검토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43] 국제 연맹은 매우 약해졌지만, 여전히 세계 평화를 옹호했다. 그 자리에서 앤서니 이든은 몬테이로를 설득하여 포르투갈이 비간섭 위원회에 가입하도록 했다.[43] 알바레스 델 바요는 비간섭 협정에 반대하며, 이는 반란군인 국민당을 공화국 정부와 동등한 위치에 놓는 것이며, 공식 정부인 공화국은 무기를 구매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44] 9월 28일, 포르투갈이 처음으로 위원회에 대표로 참석했고, 플리머스 백작이 모리슨을 대신하여 영국 대표가 되었다.[45][46] 그는 보수당의 일원으로서, 종종 이탈리아와 독일에게 유리하게 회의를 연기했으며, 위원회는 반소련 편향이라는 비난을 받았다.[46] 제네바에서 막심 리트비노프는 전쟁을 피할 것이라는 제안에 근거하여 다시 한 번 소련의 지원을 확인했다. 그러나 소련 정부는 이 아이디어에 여전히 적대적이었고, 비간섭이 불법이라는 알바레스의 견해를 지지했다.[47]
1936년 11월 12일, 협정 위반을 막기 위해 스페인 국경과 항구에 감시단을 파견하는 계획이 비준되어 위원회의 기능에 상당한 변화가 이루어졌다. 이탈리아와 독일이 항공 수송 포함을 요구했는데, 이는 효과적으로 그렇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지연 전술이었을 수도 있다.[48] 이제 스페인으로 운송되는 러시아 군사 원조가 감지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프랑코 군대를 교전국으로 인정할지, 아니면 그렇게 하지 않을지에 대해 갈라졌는데, 영국은 그렇게 하기를 원했고 프랑스는 하지 않기를 원했다.[49] 11월 18일, 이탈리아와 독일 정부가 국민당을 스페인의 진정한 정부로 인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그 문제는 해결되었다.[49] 영국 선박이 어디에서든 스페인으로 무기를 수출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이 서명되었다.[50] 델보스는 중재를 요청했고, 동시에 공화국은 국제 연맹 이사회에 지원을 요청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도 접근했으며, '미국이 다시는 유럽에 군대나 군함, 또는 대량의 탄약과 돈을 보내는 일이 없을 것이다'라는 말로 미국의 개입을 배제했다.[51] 12월 4일, 프랑스와 영국은 이탈리아, 독일, 러시아, 포르투갈에 중재를 요청했다.[52] 휴전이 선포되고, 위원회가 스페인으로 파견되며, 국민투표 후, 전쟁에 관여하지 않은 사람들(예: 살바도르 데 마다리아가)이 참여하는 정부가 수립될 것이다.[51] 최소 5,000명에 달하는 상당수의 독일 군인이 스페인에 있었음이 분명해졌지만, 이탈리아와 독일은 그 문제에 대한 별도의 논의를 반대했다.[53]
조지 오웰은 "스페인 전쟁을 되돌아보며"에서 "스페인 전쟁의 결과는 런던, 파리, 로마, 베를린에서 결정되었으며, 어쨌든 스페인에서는 결정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54]
1936년 12월 10일, 알바레스는 공화국의 입장을 국제 연맹에 제시했고, 국제 연맹이 국민당을 인정하는 이탈리아와 독일의 결정에 대해 비난할 것을 요구했다.[55] 그는 스페인 전쟁이 확산될 위험을 지적하고 비간섭 위원회가 비효율적이라고 주장했다.[56] 그 비난은 영국 대표인 솔즈베리 경과 프랑스 대표인 에두아르 비에노에 의해 부인되었으며, 이들은 국제 연맹이 중재 계획을 지지할 것을 호소했다.[56] 국제 연맹은 개입을 비난하고, 이사회 회원들에게 비간섭을 지지할 것을 촉구했으며, 중재를 칭찬했다.[56] 그런 다음 스페인에 대한 논의를 종결하고, 위원회에 맡겼다.[57] 그러나 중재 계획은 곧 폐기되었다.[56] 영국과 프랑스는 위원회 외부의 외국인 자원병을 막기 위한 계획을 계속 고려하고 제시했다.[56]
1937년 1월 6일, 겨울 휴식 이후의 첫 번째 기회에, 미국 의회 양원은 모두 스페인으로의 무기 수출을 금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58][59] 이 법안에 반대하는 미국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및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외국 개입이 스페인에서 전쟁 상태를 구성하기 때문에, 1935년 중립법에 따라 독일과 이탈리아로의 무기 수출도 중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코델 헐은 반대 증거에도 불구하고, 독일과 이탈리아의 작전 범위를 계속 의심했다.[60] 소련은 12월 27일에, 포르투갈은 1월 5일에, 독일과 이탈리아는 1월 7일에 자원병 금지 요청에 응했다.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선언문을 작성했다.[61] 1월 10일, 자원병을 범죄로 만들라는 추가 요청이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독일에 전달되었다. 스페인에서 독일의 개입 규모, 제한 사항 및 결과에 대한 불안감이 계속되었다.[61] 1월 20일, 이탈리아는 자원병에 대한 모라토리엄을 실시했고, 1월 25일 독일과 이탈리아는 자원병을 막기 위한 제한을 지지하기로 합의했다.[62] 국민당에 대한 보급품이 이제 충분하다고 믿었다. 그 회의에서 독일과 이탈리아는 모두 스페인에 있는 자국 병사들이 진정한 자원병인 것처럼 말했다.[63] ''1937년 스페인 내전 (비간섭) 법''은 2월 24일 아일랜드에서 서명되었으며, 전쟁 물자 수출업자와 교전국의 군대 복무에 대한 처벌을 규정하고, 스페인 여행을 제한했다.[64] 소련의 군사 원조는 지중해를 통해 스페인에 계속 도달했다.[65] 그러나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는 계속해서 유럽 전쟁이 자국의 최선의 이익이 아니라고 믿었다. 그러나 비간섭은 양측 모두에게 패배의 가능성을 남겼으며, 특히 독일, 이탈리아, 소련이 이를 피하고 싶어했다.[66]

감시관들이 스페인 항구와 국경에 배치되었고, 리벤트로프와 그란디는 이미 상당한 양의 물품이 수송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계획에 동의하라는 지시를 받았다.[68] 포르투갈은 감시관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리스본 주재 영국 대사관에 파견된 인원은 허용했다. 이 계획의 비용은 898000GBP로 책정되었으며,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소련이 각각 16%를 지불하고 나머지 22개 국가가 나머지 20%를 부담하기로 했다.[68] 4개국에 각각 순찰 구역이 할당되었고, 이 계획을 관리하기 위한 국제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이 계획이 수립되기까지 4월까지 시간이 걸렸다. 공화파에게는 이것이 더욱 모욕적으로 느껴졌는데, 왜냐하면 이제 국민주의자들에게 무기를 대량으로 이전하는 것을 바로 그 무기를 공급하는 국가들이 감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67] 60,000명의 이탈리아인이 스페인에 있다는 비난[69]과 그란디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탈리아 의용병이 한 명도 떠나지 않기를 바란다고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69] 독일 대표단은 통제 계획이 효과적이기를 바랐던 것으로 보인다.[70] 이탈리아는 이탈리아가 불간섭을 어기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71]
1937년 5월, 위원회는 발레아레스 제도에서 스페인 공화군 공군 항공기에 의한 순찰선에 대한 두 차례의 공격을 주목했는데, 첫 번째는 이탈리아 순양함 Barlettait에 대한 공격이었고, 두 번째는 독일 순양함 ''도이칠란트''에 대한 공격이었다.[72] 후자의 공격은 알메리아 시에 대한 독일의 보복으로 이어졌다. 위원회는 스페인으로부터 의용병 철수를 거듭 촉구하고, 개방 도시 폭격을 규탄했으며, 인도주의적 활동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73] 독일과 이탈리아는 추가 공격이 없다는 보장이 없으면 위원회와 순찰에서 탈퇴하겠다고 말했다.[72][74] 6월 초, 독일과 이탈리아가 위원회와 순찰에 복귀했다.[75] 하지만 스페인에서의 이탈리아의 소극적인 행동은 사라졌다. 반대로, 독일에서는 독일의 작전을 언급하는 것이 여전히 범죄로 여겨졌다.[75] 6월 15일과 18일, 독일 순양함 Leipzigde에 대한 공격이 발생했는데, 독일은 이를 공화파의 소행으로 간주했지만, 부인했다. 이에 독일과 이탈리아는 다시 순찰에서 탈퇴했지만, 위원회에서는 탈퇴하지 않았다.[79][76] 이로 인해 포르투갈 정부는 스페인-포르투갈 국경에 있던 영국 감시관을 철수시켰다.[77]
순찰에 대한 논의는 계속 복잡하게 진행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과 이탈리아가 담당하는 구역의 순찰을 대체하겠다고 제안했지만, 후자 두 국가는 순찰이 너무 편파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78] 독일과 이탈리아는 육상 통제를 유지하고 국민주의자들에게 교전권을 부여하여 수색권을 공화파와 국민주의자가 모두 사용하여 해상 순찰을 대체할 수 있도록 요구했다.[79][78] 프랑스는 국경 통제를 포기하거나[80] 어쩌면 불간섭에서 탈퇴하는 것을 고려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순찰을 계속하기를 원하는 영국에 의존했다.[79] 이에 영국과 프랑스는 불간섭을 위해 계속 노력했다. 비록 효과적이라고 판단했지만, 4월부터 7월 말까지 약 42척의 선박이 검사를 피해 간 것으로 추정되었다. 항공 노선은 통제되지 않았다.[81] 국민주의자의 독일에 대한 채무는 에 달했다.[82] 7월 9일, 네덜란드 대사는 영국이 타협안을 작성할 것을 제안했다.[83] 로드 플리머스는 '불간섭 통제를 위한 타협안'을 제안했다. 해상 순찰은 항구와 선박에 있는 감시관으로 대체되고, 육상 통제 조치가 재개될 것이다.[84][85] 의용병 철수에 상당한 진전이 있을 때까지 교전권은 부여되지 않을 것이다.[85] 프랑스는 분노했고 영국이 독일과 이탈리아 쪽으로 기울고 있다고 생각했다.[84] 그란디는 의용병 문제보다 교전권 문제를 먼저 논의할 것을 요구했고, 마이스키는 의용병 문제를 먼저 논의할 것을 주장했다.[86][87]
3. 2. 통제 계획
스페인 항구와 국경에는 지속적인 개입을 막기 위해 '옵저버'들이 파견되었다. 포르투갈은 옵저버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주포르투갈 영국 대사관의 주장에 동의했다. 통제 계획의 비용은 898000GBP로 추산되었는데,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소련이 각각 16%를 지불하고, 나머지 22개국이 나머지 20%를 지불하게 되었다.[126] 그러나 통제 계획은 4월까지 수립되지 못했으며, 이는 공화파에게 지원 세력들의 '경찰'들이 스페인에 들어온다는 것으로 보여 공화파의 모욕감을 가중시켰다.감시관들이 스페인 항구와 국경에 배치되었고, 리벤트로프와 그란디는 이미 상당한 양의 물품이 수송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계획에 동의하라는 지시를 받았다.[68] 포르투갈은 감시관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리스본 주재 영국 대사관에 파견된 인원은 허용했다. 이 계획의 비용은 898000GBP로 책정되었으며,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소련이 각각 16%를 지불하고 나머지 22개 국가가 나머지 20%를 부담하기로 했다.[68] 4개국에 각각 순찰 구역이 할당되었고, 이 계획을 관리하기 위한 국제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이 계획이 수립되기까지 4월까지 시간이 걸렸다. 공화파에게는 이것이 더욱 모욕적으로 느껴졌는데, 왜냐하면 이제 국민당에게 무기를 대량으로 이전하는 것을 바로 그 무기를 공급하는 국가들이 감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67]
3. 3. 위원회의 한계
1936년 9월 9일 런던에서 처음 개최된 불간섭 위원회는 스페인 내전의 교전 당사자들에게 인력과 물자가 전달되는 것을 막는 것이 표면적인 목적이었다. 이는 불간섭 조약과 같은 맥락이었다.[5]위원회는 유럽 국가들만 대표로 참석했고, 중립 정책으로 인해 정부 간의 행동조차 금지되었던 스위스는 참석하지 않았다.[32][33] 위원장은 영국의 재무부 재무 차관인 윌리엄 모리슨이 맡았다.[34] 샤를 코뱅이 프랑스를, 디노 그란디가 이탈리아를, 이반 마이스키가 소련을 대표했다. 독일은 리벤트로프가 대표로, 오토 크리스티안 아르치발트 폰 비스마르크가 부대표로 참석했지만, 그란디에게 회의를 맡겼다.[35] 소련의 요구로 포르투갈도 참석하지 않았다.[36]
영국과 프랑스는 이탈리아와 독일로부터 국민당에 대한 무기 수송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위원회에 대한 기대는 거의 없었다.[37] 위원회에서 공화국에 대한 소련의 지원이 위협받았는데, 이는 불간섭 협정이 이탈리아와 독일의 국민당 지원을 막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시작되었다.[39]
1936년 9월 14일에 열린 두 번째 회의에서는 벨기에, 영국, 체코슬로바키아,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소련, 스웨덴 대표들이 참여하는 소위원회를 설치하여 불간섭의 일상적인 운영을 처리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가 지배적이었다.[42]
국제 연맹은 스페인 문제와 아비시니아 위기 검토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지만, 여전히 세계 평화를 옹호했다.[43] 앤서니 이든은 포르투갈이 위원회에 가입하도록 설득했다.[43] 알바레스 델 바요는 불간섭 협정이 반란군인 국민당을 공화국 정부와 동등한 위치에 놓는 것이며, 공식 정부인 공화국은 무기를 구매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며 반대했다.[44] 9월 28일, 플리머스 백작이 모리슨을 대신하여 영국 대표가 되었고,[45][46] 그는 보수당의 일원으로서, 종종 이탈리아와 독일에게 유리하게 회의를 연기했으며, 위원회는 반소련 편향이라는 비난을 받았다.[46]
1936년 11월 12일, 협정 위반을 막기 위해 스페인 국경과 항구에 감시단을 파견하는 계획이 비준되었다. 이탈리아와 독일이 항공 수송 포함을 요구하면서 지연 전술이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48] 11월 18일, 이탈리아와 독일 정부가 국민당을 스페인의 진정한 정부로 인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49] 12월 4일, 프랑스와 영국은 이탈리아, 독일, 러시아, 포르투갈에 중재를 요청했고, 휴전, 위원회 파견, 국민투표 후 전쟁에 관여하지 않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정부 수립을 제안했다.[52][51] 그러나 이탈리아와 독일은 독일 군인 문제에 대한 별도의 논의를 반대했다.[53]
1936년 12월 10일, 알바레스는 국제 연맹에 공화국의 입장을 제시하고, 국민당을 인정하는 이탈리아와 독일의 결정을 비난할 것을 요구했다.[55] 그는 스페인 전쟁이 확산될 위험을 지적하고 비간섭 위원회가 비효율적이라고 주장했다.[56] 국제 연맹은 개입을 비난하고 중재를 칭찬했지만, 중재 계획은 곧 폐기되었다.[56]
1937년 1월, 미국 의회는 스페인으로의 무기 수출을 금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58][59] 소련, 포르투갈, 독일, 이탈리아는 자원병 금지 요청에 응했고,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선언문을 작성했다.[61] 1937년 5월, 위원회는 발레아레스 제도에서 스페인 공화군 공군 항공기에 의한 순찰선 공격을 주목했고, 독일 순양함 ''도이칠란트''에 대한 공격은 알메리아 시에 대한 독일의 보복으로 이어졌다.[72] 독일과 이탈리아는 추가 공격이 없다는 보장이 없으면 위원회와 순찰에서 탈퇴하겠다고 했지만, 6월 초 복귀했다.[72][74][75]
순찰에 대한 논의는 복잡하게 진행되었고,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과 이탈리아 담당 구역 순찰을 대체하겠다고 제안했지만, 후자는 순찰이 너무 편파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78] 결국 해상 순찰은 항구와 선박에 있는 감시관으로 대체되고, 육상 통제 조치가 재개되었다.[84][85]
1937년, 모든 열강들은 불간섭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뉘온 회담은 지중해 연안 국가들을 위해 마련되었고, 프랑스 해군과 영국의 로열 해군 함대가 몰타 서쪽 해역을 순찰하고 의심스러운 잠수함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93][94] 1938년 3월, 프랑스는 약화된 공화국으로의 무기 수송을 위해 국경을 다시 열었다.[99]
1938년 6월, 마이스키는 두 위원회를 스페인에 파견하여 외국인 의용군을 파악하고 철수시키는 데 동의했다.[101] 뮌헨 협정 이후, 네빌 체임벌린은 이를 성공으로 판단하고 영국은 스페인에서 유사한 중재를 주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104]
영국과 프랑스는 1939년 2월 27일에 민족주의 정부를 인정했다.[107] 클레멘트 애틀리는 이 합의가 '터무니없는 배신... 2년 반 동안의 위선적인 불간섭 척'이라고 비판했다.[108]
4. 불간섭 정책의 결과와 영향
불간섭 조약은 각국의 공식적인 지원을 금지했지만, 비공식적인 지원은 계속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공화파를 지지하면서도 소극적이었던 반면, 독일과 이탈리아는 '의용군'이라는 명목으로 국민파를 대규모로 지원했다.[127]
스페인 내전 발발 초기부터 이탈리아와 독일은 국민파를, 소비에트 연방은 4개월 후 공화파를 지원했다. 프랑스와 영국은 대리전이 유럽 전체의 갈등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불간섭 협정을 제안했다.[5][6] 1936년 8월,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소련 등 주요 국가들이 원칙적으로 불간섭에 동의했다.[7][8][9]
영국에서는 노동당이 불간섭을 지지했지만,[15] 프랑스 좌파는 공화파 직접 지원을 원했다.[38][16] 미국은 불간섭 정책을 따르겠다고 밝혔고,[22] 영국은 스페인에 대한 전쟁 물자 수출을 금지했다.[22] 소련은 불간섭 협정에 동의했지만,[25] 언론과 반대 단체는 이에 반대했다.[25] 불간섭 위원회가 창설되었지만, 소련과 독일의 이중적인 행위는 명백했다.[28]
많은 역사가들은 영국의 불간섭 정책이 반공주의의 산물이라고 주장하지만,[30] 스콧 램지는 영국이 "선량한 중립"을 보였다고 주장한다.[30] 1937년, 모든 열강들은 불간섭을 포기할 준비가 되었고,[88] 1938년 프랑스는 공화국으로의 무기 수송을 위해 국경을 다시 열었다.[99] 1939년 영국과 프랑스는 국민파 정부를 인정했으며,[107] 클레멘트 애틀리는 이를 '2년 반 동안의 위선적인 불간섭 척'이라고 비판했다.[108]
조지 오웰은 "스페인 전쟁의 결과는 런던, 파리, 로마, 베를린에서 결정되었으며, 어쨌든 스페인에서는 결정되지 않았다"고 평했다.[54] 앤서니 이든은 불간섭에 대해 "물이 새는 댐이라도, 댐이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말했다.[92]
4. 1. 국민파의 승리와 국제 정세 변화
이 조약에도 불구하고 독일과 이탈리아는 '의용군'이라는 명목으로 국민파에 대한 대규모 지원을 계속하였다. 독일군은 콘도르 군단을 투입하여 게르니카 폭격 사건과 같은 작전을 수행하였고, 이탈리아군 역시 5만 명 이상의 병력을 파견하였다. 그 결과, 프랑코와 국민파는 내전 초반의 불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127]1937년, 주요 열강들은 불간섭 정책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탈리아의 갈레아초 치아노는 자국 군대가 준비되어 있음에도 활용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표했고, 소련은 교전 권리에 대한 논의에 소극적이었다.[88] 프랑스의 이브 델보스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교황의 중재를 고려하며 전쟁 계획을 준비했고, 영국의 신임 총리 네빌 체임벌린은 베니토 무솔리니와의 우호 관계를 중시했다.[89] 앤서니 이든은 프랑코의 승리와 독일, 이탈리아 개입 축소를 희망했고, 체임벌린은 스페인 문제를 잊고 싶은 문제로 여겼다.[89] 1937년 7월 말, 위원회는 교착 상태에 빠졌고,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국의 승리는 불가능해 보였다.[90]
뉘온 회담은 1937년 9월, 이탈리아와 독일의 해적 행위 등에 대한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영국 주도로 지중해 연안 국가들을 위해 열렸다.[93] 회담에서는 프랑스 해군과 로열 해군 함대가 몰타 서쪽 해역을 순찰하고 의심스러운 잠수함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94] 중립 선박을 공격하는 군함은 공격 대상이 되었다.[95] 후안 네그린은 국제 연맹에 스페인 문제 검토와 불간섭 종식을 요구했지만, 이든은 불간섭이 유럽 전쟁을 막았다고 주장했다. 국제 연맹은 '불간섭의 실패'를 언급한 보고서를 발표했다.[95]
1938년, 양측의 외국인 의용군 철수를 위한 위원회가 파견되었고, 그 비용은 위원회 회원국들이 부담했다.[101] 민족주의자들은 영국 체임벌린 정부의 몰락을 막기 위해 이 계획을 수용하는 척했지만, 실제로는 교전 권리를 요구하며 사실상 계획을 거부했다.[102][103] 뮌헨 협정 이후, 체임벌린은 영국이 스페인에서도 중재를 주최할 것이라 기대했다.[104] 네그린은 국제 여단 철수를 제안했지만, 이는 국제 연맹에 대한 경멸을 보여주는 것이었다.[105]
영국과 프랑스는 1939년 2월 27일 국민파 정부를 인정했다.[107] 클레멘트 애틀리는 이를 '터무니없는 배신... 2년 반 동안의 위선적인 불간섭 척'이라고 비판했다.[108]
4. 2. 국제 연맹의 무력화
국제 연맹은 아비시니아 위기를 겪으면서 이미 약화된 상태였지만, 여전히 세계 평화를 옹호했다.[43] 앤서니 이든은 포르투갈을 설득하여 비간섭 위원회에 가입하도록 했다.[43] 알바레스 델 바요는 비간섭 협정이 반란군인 국민당을 공화국 정부와 동등한 위치에 놓는 것이라며 반대했고, 공화국은 무기를 구매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44] 제네바에서 막심 리트비노프는 전쟁을 피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소련의 지원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러나 소련 정부는 이 아이디어에 적대적이었고, 비간섭이 불법이라는 알바레스의 견해를 지지했다.[47]1936년 12월 10일, 알바레스는 공화국의 입장을 국제 연맹에 제시했고, 국제 연맹이 국민당을 인정하는 이탈리아와 독일의 결정에 대해 비난할 것을 요구했다.[55] 그는 스페인 전쟁이 확산될 위험을 지적하고 비간섭 위원회가 비효율적이라고 주장했다.[56] 그러나 국제 연맹은 개입을 비난하고, 이사회 회원들에게 비간섭을 지지할 것을 촉구했으며, 중재를 칭찬했다.[56] 그리고 스페인에 대한 논의를 종결하고, 위원회에 맡겼다.[57]
1937년 9월, 후안 네그린은 국제 연맹 정치 위원회에 스페인 문제를 검토하고 불간섭을 종식할 것을 요구했다. 이든은 불간섭이 유럽 전쟁을 막았다고 주장했다. 국제 연맹은 '불간섭의 실패'를 언급하며 스페인 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95] 국제 여단의 철수를 제안한 네그린은 국제 연맹의 마지막 회의에서 위원회에 대한 경멸을 보여주었다.[105]
4. 3. 각국의 입장 변화
스페인 내전 발발 초기부터 이탈리아와 독일은 국민파를 지원했고, 소련은 4개월 후 공화파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와 영국 정부는 공동 외교 계획으로 불간섭과 불간섭 협정을 제안했다.[5] 이는 대리전이 유럽 전체의 갈등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한 유화 정책의 일환이었다.[6]1936년 8월 3일, 프랑스는 불간섭 계획을 제시했고, 영국은 즉시 원칙적으로 수용했다.[7] 독일은 소련이 참여할 경우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7] 프랑스와 소련도 비슷한 접근 방식을 취했다.[7] 8월 6일, 이탈리아와 소련은 원칙적으로 지원을 확인했다.[8] 8월 7일, 프랑스는 일방적으로 불간섭을 선언했고, 영국, 벨기에, 네덜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소련이 이미 수용했다.[9] 포르투갈은 결정을 보류했다.[10] 8월 9일, 독일은 영국에 거짓으로 전쟁 물자를 보내지 않겠다고 알렸다.[12][13]
영국에서는 사회주의 노동당이 불간섭을 강력하게 지지했지만,[15] 프랑스 좌파는 공화파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을 원했다.[38][16] 노동당은 1937년 10월에 불간섭을 거부했다.[17] 노동조합 회의 (TUC)는 분열되었지만, 지도자들은 불간섭을 지지했다.[18]
1936년 8월 5일, 미국은 불간섭 정책을 따르겠다고 밝혔지만 공식 발표는 하지 않았다.[22] 8월 15일, 영국은 스페인에 대한 전쟁 물자 수출을 금지했다.[22] 이탈리아는 8월 21일에 불간섭 협정에 서명했다.[9]
소련은 1936년 8월 23일 불간섭 협정에 동의하고,[25] 스페인에 대한 전쟁 물자 수출 금지 포고령을 발표했다.[24] 그러나 소련 언론과 반대 단체는 불간섭에 반대했다.[25]
불간섭 협정을 유지하기 위해 불간섭 위원회가 창설되었지만, 소련과 독일의 이중적인 행위는 이미 분명해졌다.[28]
많은 역사가들은 영국의 불간섭 정책이 기득권층의 반공주의 산물이라고 주장하지만, 스콧 램지는 영국이 "선량한 중립"을 보였다고 주장한다.[30]
1937년, 모든 열강들은 불간섭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88] 1938년 3월 17일, 프랑스는 약화된 공화국으로의 무기 수송을 위해 국경을 다시 열었다.[99] 영국과 프랑스는 1939년 2월 27일에 민족주의 정부를 인정했다.[107] 클레멘트 애틀리는 이 합의를 '터무니없는 배신... 2년 반 동안의 위선적인 불간섭 척'이라고 비판했다.[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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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nsuring Benevolent Neutrality: The British Government's Appeasement of General Franco during the Spanish Civil War, 1936-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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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Ideological Foundations of British Non-Intervention in the Spanish Civil War: Foreign Office Perceptions of Political Polarisation in Spain, 1931-1936."
[32]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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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volved were Albania, Austria, Belgium, Bulgaria, Czechoslovakia, Denmark, Estonia, Finland, France, Germany, Greece, Hungary, Ireland, Italy, Latvia, Lithuania, Luxembourg, Norway, Poland, Romania, Turkey, the United Kingdom, the Soviet Union and Yugoslav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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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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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dication Cri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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