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타니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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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리타니쿠스는 41년 클라우디우스 황제와 발레리아 메살리나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일원이었다. 44년, 브리타니아 정복을 기념하여 '브리타니쿠스'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아버지 클라우디우스는 그를 후계자로 지명하려 했다. 그러나 클라우디우스의 계승권을 노린 네로가 54년 클라우디우스 사후 황제가 되면서 브리타니쿠스는 점차 정치적 입지를 잃게 되었고, 결국 55년 네로에 의해 암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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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타니쿠스 | |
---|---|
기본 정보 | |
전체 이름 |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브리타니쿠스; 초기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게르마니쿠스 |
출생 | 41년 2월 12일 |
출생지 | 로마, 이탈리아 |
사망 | 55년 2월 11일 (13세) |
사망지 | 로마, 이탈리아 |
매장지 | 아우구스투스 영묘 |
아버지 | 클라우디우스 |
어머니 | 발레리아 메살리나 |
왕조 |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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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름
브리타니쿠스의 출생 당시 이름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게르마니쿠스'''였다. 그의 첫 번째 성, 즉 아그노멘인 '''게르마니쿠스'''는 기원전 9년에 그의 아버지인 드루수스 (대)가 게르만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사후에 수여되었다.[1][2] 따라서 드루수스의 아들들(클라우디우스와 게르마니쿠스)은 이 이름을 물려받았고, 그들의 아들들에게도 이 이름을 물려주었다.
브리타니쿠스는 41년 2월 12일경 로마에서 클라우디우스 황제와 그의 세 번째 부인인 발레리아 메살리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일원이었으며, 특히 ''클라우디우스 가문(gens Claudia)'' 출신이었다.[3] 브리타니쿠스의 아버지는 즉위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으며, 후계자의 탄생으로 그의 지위는 크게 강화되었다. 황제는 이 출생을 기념하기 위해 앞면에 ''Spes Augusta''(황실의 희망)가 새겨진 세스테르티우스를 발행했다.[4]
41년 클라우디우스의 아들 '게르마니쿠스'가 태어났다. 44년 아버지 클라우디우스가 브리타니아를 속주로 만들고 로마에서 개선식을 거행하면서, 브리타니아 원정 전승을 기념하여 ''''브리타니쿠스''''라는 이름이 주어졌다.[11]
'''브리타니쿠스'''라는 이름은 서기 43년 그의 아버지 브리타니아 정복 이후 아버지에게 수여되었다. 클라우디우스는 이 이름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대신 아들에게 주었으며, 그의 전체 이름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브리타니쿠스'''가 되었다. 그는 이 새로운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이 이름은 ''게르마니쿠스''를 완전히 대체한 것으로 보인다.[1][2]
41년에 클라우디우스의 아들 '게르마니쿠스'로 태어났다. 3세 때인 44년에 아버지 클라우디우스는 브리타니아를 속주로 만들고 로마에서 개선식을 거행했다. 이 브리타니아 원정의 전승을 기념하여 ''''브리타니쿠스''''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3. 배경 및 가족
브리타니쿠스에게는 네 명의 형제가 있었다. 클라우디우스의 첫 번째 부인(플라우티아 우르굴라닐라)에게서 태어난 이복 형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가 있었지만, 그는 브리타니쿠스가 태어나기 전에 사망했다. 클라우디우스의 두 번째 부인(아엘리아 파에티나)에게서 태어난 이복 누이 안토니아,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누이 옥타비아, 그리고 49년에 입양되어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라는 이름을 얻은 양형제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훗날 네로 황제)가 있었다.[5][24][6]
43년, 클라우디우스는 브리타니아 정복에 대한 보상으로 원로원으로부터 "브리타니쿠스"라는 명예 칭호를 받았다. 황제는 이 이름을 스스로 사용하지 않았지만 아들이 물려받도록 했고, 이 이름으로 이 소년은 후세에 알려지게 되었다. 로마 역사가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트라킬루스는 1세기 말에 클라우디우스가 브리타니쿠스를 매우 아꼈으며, 공공 행사에서 그를 데리고 다녔고 "환호하는 무리와 함께 그에게 행운을 빌어주었다"고 기록했다.[6]
48년 10월에 어머니 메살리나는 클라우디우스가 로마를 비운 틈을 타 불륜 상대였던 가이우스 시리우스와 정식 결혼식을 올렸다. 이 결혼은 황제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되어 두 사람은 즉시 체포되었고, 어머니는 아버지에 의해 처형되었다.
혼자가 된 클라우디우스는 49년에 조카인 小아그리피나와 결혼했고, 브리타니쿠스는 새 어머니와 함께 小아그리피나의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3살 위 의붓 형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황제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브리타니쿠스는 황위 계승을 약속받았지만, 계모와 의붓 형의 존재는 그의 황위 계승을 위태롭게 했다.
50년 2월 25일, 아그리피나는 아들을 클라우디우스의 양자로 삼았다. 이때부터 小아그리피나의 아들은 '네로'라고 불리게 되었다. 법적 지위에서 네로는 브리타니쿠스와 동등하게 되었지만, 51년에 황제의 공식 상속자가 되는 등 점차 황위 계승자로서 브리타니쿠스를 능가하게 되었다.
4. 아버지와 메살리나의 결혼
48년 10월, 어머니 메살리나는 클라우디우스가 로마를 비운 틈을 타 불륜 상대였던 가이우스 실리우스와 정식 결혼식을 올렸다. 이는 황제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되어 체포되었고, 메살리나는 클라우디우스에 의해 처형되었다.[11]
4. 1. 교육
브리타니쿠스는 푸블리우스 수일리우스 루푸스의 측근이자 그의 어머니의 친구였던 소시비우스에게 교육을 받았다.[8] 그는 훗날 황제가 되는 티투스와 함께 교육을 받았다. 그들은 함께 자랐고 같은 스승에게서 비슷한 과목을 배웠다.[7]
47년에 소시비우스는 클라우디우스에게 권력과 재산이 황제의 왕위를 위협한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그의 스승은 어머니의 책략의 일환으로, 클라우디우스 황제에게 데키무스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가 칼리굴라 살해에 연루되었고 로마에서 그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소시비우스는 계속해서 아시아티쿠스가 게르마니아에서 로마 군단을 모아 왕위에 대항하려 한다고 말했다. 아시아티쿠스는 즉시 체포되어 사슬에 묶여 로마로 끌려갔다.[8] 술리우스는 로마 원로원에서 다른 기사 계급에 대한 혐의를 성공적으로 추구했다.[9] 카시우스 디오에 따르면, 아시아티쿠스는 그의 재산(루쿨루스 정원) 때문에 메살리나의 호의로 처형되었다.[10][11]
이후 원로원은 소시비우스가 브리타니쿠스에게 그의 가르침을, 클라우디우스에게 그의 조언(아시아티쿠스에 대한 사건 관련)의 혜택을 제공한 대가로 를 지급하기로 결의했다.[12]
4. 2. 메살리나의 몰락
48년 10월, 어머니 메살리나는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로마를 비운 틈을 타 불륜 상대였던 가이우스 실리우스(Gaius Silius, 기원후 49년 집정관 예정)와 정식 결혼식을 올렸다.[17] 메살리나는 로마의 젊은 귀족 중 가장 잘생긴 가이우스 실리우스를 "미친 듯이 사랑하게" 되었고, 실리우스는 자신의 아내가 아닌 메살리나를 선택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실리우스는 자신의 행동의 위험성을 인지하였으나, 현재를 즐기는 것을 택했다고 한다.[16] 메살리나는 수행원을 이끌고 그의 집으로 갔고, 그에게 부와 명예를 쏟아부었다.[16]
자신의 자식이 없던 실리우스는 브리타니쿠스를 입양하게 해준다면 메살리나와 결혼할 것을 제안했다.[17] 이 계획은 클라우디우스를 전복하고 브리타니쿠스의 섭정으로서 함께 통치하려는 것이었다. 그녀는 동의했고 클라우디우스가 로마를 떠나기를 기다린 후 희생 의식을 거행하고 중혼 결혼을 했다. 이 불법적인 결합은 클라우디우스에게 그의 측근인 해방 노예 가이우스 율리우스 칼리스투스(Gaius Julius Callistus)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나르키수스(Tiberius Claudius Narcissus)에 의해 알려졌다.
이 결혼은 황제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되어 두 사람은 즉시 체포되었고, 어머니는 아버지에 의해 처형되었다.[11] 메살리나는 자결할 칼을 받았지만, 친위대 호민관이 그녀의 목에 칼을 꽂아야 했다.[11] 실리우스와 그의 측근들의 이미지와 조각상은 파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18][19]
5. 아버지와 아그리피나의 결혼
48년 10월, 어머니 메살리나는 클라우디우스가 로마를 비운 틈을 타 불륜 상대였던 가이우스 시리우스와 정식 결혼식을 올렸다. 이 결혼은 황제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되어 두 사람은 즉시 체포되었고, 메살리나는 클라우디우스에 의해 처형되었다.[20]
49년, 혼자가 된 클라우디우스는 조카인 소 아그리피나와 결혼했고, 브리타니쿠스는 새 어머니와 함께 소 아그리피나의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3살 위 의붓 형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황제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브리타니쿠스는 황위 계승을 약속받았지만, 계모와 의붓 형의 존재는 그의 황위 계승을 위태롭게 했다.
클라우디우스는 조카와의 결혼이 아그리피나와 도미티우스가 게르마니쿠스의 마지막 생존 후손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가문을 아우구스투스의 가문에 더 가깝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49년에 삼촌과 조카 사이의 결혼은 근친상간으로 로마법에 저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클라우디우스는 재혼했다. 아그리피나는 메살리나보다 훨씬 쉽게 클라우디우스를 이끌었고, 게르마니쿠스의 딸이자 아우구스투스의 후손으로서 군인과 백성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가 높아졌다. 아그리피나의 권력 상승은 황제의 그녀에 대한 복종과 그녀의 훌륭한 혈통, 강력한 정치적 연계 때문이었다.[21][22]
5. 1. 네로의 부상

49년, 집정관 당선자 마미우스 폴리오(3월~6월) 임기 동안, 도미티우스(네로)는 그의 누이 옥타비아와 약혼하여 그의 지위와 동등해졌다. 타키투스는 이 조치가 브리타니쿠스가 그의 어머니를 모함한 자들에게 복수하는 것을 두려워한 자들의 지지를 받았다고 암시한다.[23][24]
팔라스의 주장으로 클라우디우스는 아우구스투스가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입양한 것처럼, 티베리우스가 게르마니쿠스를 입양한 것처럼 이미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미티우스를 아들로 입양하도록 설득당했다. 50년 2월, 클라우디우스는 도미티우스를 ''클라우디우스'' 가문으로 입양하고 네로라고 이름을 짓는 법을 통과시켰으며, 도미티우스는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가 되었다. 네로와 브리타니쿠스는 황제의 공동 상속자가 되었고, 아그리피나에게는 명예로운 고위 칭호인 ''아우구스타''가 주어졌다.[25][24]
51년, 네로는 아직 14세가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토가 비릴리스''(성인 남성의 옷)를 착용했다. 원로원은 또한 네로가 스무 살(56년)에 집정관직을 맡고, 집정관 당선자로서 로마의 경계를 넘어 ''임페리움 프로콘술라레''(프로콘술 권한)을 누리며 ''프린켑스 유벤투티스''(로마 청년의 수장)라는 칭호를 갖도록 결정했다. 네로의 진로는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발자취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도나티바가 로마 군인들에게 주어졌고, 백성들에게는 선물이 주어졌다. 그의 이복형제의 지위는 아그리피나의 지위와 함께 당대 주화에 반영되었다.[26][24]
반대로, 브리타니쿠스는 점차 고립되었다. 서커스 게임에서 네로는 개선복을 입고 나타났지만, 브리타니쿠스는 여전히 소년의 옷을 입고 있었다. 타키투스는 게임에서 그들의 의상이 백성들의 기대를 좌우했다고 말한다. 즉, 네로는 장군의 옷을, 브리타니쿠스는 소년의 복장을 입었다는 것이다. 브리타니쿠스는 55년 2월 12일까지 토가를 입을 예정이 아니었다. 그와 그의 지지자들은 네로에게 잠재적인 문제로 여겨졌다. 아그리피나는 브리타니쿠스의 가정교사를 그녀가 지명한 사람들로 교체했고, 클라우디우스에게 소시비우스를 포함한 그들의 처형을 명령하도록 설득했다.[26][27] 그의 가정교사뿐만 아니라 프라에토리아 근위대의 두 총독, 루키우스 게타와 루피우스 크리스피누스도 교체되었다. 타키투스의 보고에 따르면, 그들은 브리타니쿠스와 그의 어머니 편에 동정심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다. 클라우디우스와 아그리피나에게 충성하는 사람들 외에는 네로를 에워싸는 것은 위험했을 것이다.[28] 아그리피나는 그들을 훌륭한 군인이었지만 누구에게 충성을 빚지고 있는지 알고 있던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로 교체했다.[29][24]
네로의 경력은 꾸준히 발전하여, 51년과 52년에 연설을 했다. 51년의 연설은 그에게 주어진 영예에 대해 황제에게 감사를 표했고, 52년의 연설은 황제의 질병 회복을 기원하는 서약이었다.[24] 53년에 네로는 브리타니쿠스의 누이 옥타비아와 결혼했는데, 근친상간 혐의를 피하기 위해 먼저 다른 가문으로 법적으로 옮겨져야 했다.[30] 그때까지 네로가 명백한 지정자임이 분명해졌다.[31] 옥타비아와 결혼한 후, 네로는 정치적으로 더욱 활동적이 되었다. 그는 로마가 트로이에서 아이네이아스(율리우스 가문의 창시자)를 통해 유래했다는 주장을 펼치며 일리움 백성들을 모든 공적 부담에서 면제시켰고, 화재로 파괴된 볼로냐(현재 볼로냐, 이탈리아) 식민지를 위한 기금을 마련했으며, 로도스 백성들에게 자유를 회복시켰다.[32]
6. 클라우디우스의 죽음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클라우디우스가 로마가 "진정한 카이사르"를 갖기를 원했고, 브리타니쿠스는 클라우디우스의 충성스럽고 영향력 있는 해방 노예인 나르키소스의 지지를 받았다고 보고한다. 브리타니쿠스의 두상과 칭호를 앞면에 새긴 모에시아와 북아프리카의 주화에서 브리타니쿠스에 대한 지지의 징후가 나타난다.[34] 클라우디우스는 아내의 행동을 알아차리고 그녀의 권력이 끝날 준비를 시작했다. 그는 브리타니쿠스에게 토가를 수여하고 그를 후계자로 선언하기를 원했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는 브리타니쿠스에게 성인 남자의 토가를 주겠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결국 로마인들이 진정한 카이사르를 갖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37][35][36]
클라우디우스가 자신의 통치를 단기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취한 조치는 브리타니쿠스가 성인이 되면서 쉽게 되돌릴 수 없었다. 54년 말, 브리타니쿠스는 로마 전통에 따라 성인이 되기까지 6개월도 채 남지 않았고 조숙하게 성장했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는 아그리피나와 이혼하고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네로를 해임하는 것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클라우디우스는 그의 마지막 원로원 연설에서 그의 친아들과 양아들을 동등하게 원로원에 추천했다. 수에토니우스는 클라우디우스가 아들에게 빨리 자라라고 권고했는데, 이는 그가 토가 비릴리스를 입으면 모든 것이 바로잡힐 것이라는 의미였다.[37]
54년 10월 13일, 클라우디우스는 자연적인 원인이나 독살로 사망했다. 독살로 인한 죽음에 대한 기록에서, 클라우디우스가 브리타니쿠스를 왕위에 앉힐 의도를 알고 있었던 아그리피나는 유명한 독살범 로쿠스타를 시켜 황제에게 먹일 버섯에 독을 주입했다.[35][36][34]
클라우디우스의 해방 노예인 나르키소스처럼 네로보다 브리타니쿠스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있었다.[38] 불행하게도 그의 대의를 위해, 황제가 독살되었을 때 나르키소스는 캄파니아에 부재중이었고, 브리타니쿠스와 그의 누이 옥타비아와 안토니아는 아그리피나에 의해 방 안에 갇혀 있었다.[35] 결과적으로, 아무도 네로의 계승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브리타니쿠스의 주장이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네로 역시 클라우디우스의 아들이었고, 아그리피나가 그를 아우구스투스와 연결시켰다는 반응이 있었다.[39] 많은 사람들이 브리타니쿠스가 더 이상 계승 서열에 있지 않다고 확신했다는 사실은 아그리피나의 그에 대한 선전의 직접적인 결과였다.[30] 네로는 황제의 장례식에서 조사를 낭독하고 단독으로 권력을 잡았다. 브리타니쿠스와 네로에게 공동 통치를 허용하거나 브리타니쿠스에게 단독 통치를 허용하는 클라우디우스의 새로운 유언은 새로운 황제의 부하들에 의해 원로원에서 억압되었다.[40]
7. 몰락과 죽음
아그리피나는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죽자마자 자신에게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마르쿠스 유니우스 실라누스는 아시아 총독이었는데, 아우구스투스의 증손자라는 이유만으로 독살당했다.[41] 타키투스에 따르면, 브리타니쿠스의 옹호자였던 클라우디우스의 해방 노예 나르키수스는 가혹한 투옥 끝에 자살했다.[41][42]
55년 네로의 집정관 취임 전, 그는 브리타니쿠스를 편애했다는 이유로 기사 계급의 율리우스 덴수스를 박해하는 것을 금지했다.[43] 집정관 재임 기간 동안 네로는 어머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립하려 했다. 그는 노예 소녀와 관계를 시작했고, 아그리피나의 총애를 받던 팔라스를 재무 비서관직에서 해임했다. 이에 아그리피나는 아들 네로를 통제하기 위해 브리타니쿠스를 옹호하겠다고 위협했다.[44] 타키투스는 아그리피나가 네로에게 브리타니쿠스가 성인이 되었고, 아버지의 진정한 상속자라고 말했다고 기록했다.[45]
타키투스는 네로가 브리타니쿠스의 이미지를 훼손하려는 여러 시도를 기록했다. 사투르누스 축제(사투르날리아) 동안, 네로는 브리타니쿠스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여 그를 당황하게 하려 했다. 그러나 브리타니쿠스는 굴욕을 피하고, 자신이 버려진 이야기를 노래하여 참석자들의 동정을 얻었다. 젊은 황제는 즉시 의붓 형제의 암살을 계획하기 시작했다.[44]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네로는 로쿠스타를 시켜 브리타니쿠스를 독살했다. 첫 번째 복용은 실패했고, 네로는 로쿠스타를 자신의 방으로 불러 즉시 더 빨리 작용하는 독을 혼합하게 했다. 많은 실험 후, 동물을 즉사시키는 혼합물이 나왔고, 네로는 그 혼합물을 즉시 식당으로 가져오게 했다.[46]
브리타니쿠스는 그의 누이 옥타비아, 아그리피나 및 몇몇 저명인사들이 참석한 저녁 식사에서 독살당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브리타니쿠스는 뜨거운 음료를 받았는데, 음식 감별사가 먼저 시음했고, 그가 차갑게 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독이 찬물에 섞였다. 그 물질은 즉시 효과가 있었고, 그는 "목소리와 숨결을 모두 잃었다".[47] 네로는 참석자들에게 브리타니쿠스가 단지 간질 발작을 겪고 있다고 주장했다.[44] 그는 54년 12월과 55년 2월 11일 (14세 생일 전날, 성인이 되기로 한 날) 사이에 사망했는데, 이는 그의 아버지 사망 4개월 후였다.[44][28] 황제는 로쿠스타에게 대규모 영지를 보상하고 제자들을 보냈다.[46]
브리타니쿠스는 화장되었고 그의 유해는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안치되었다. 네로는 다음 날 비가 오는 가운데 장례를 치렀으며, 애도 연설을 하지 않았다.[49] 디오는 네로가 독의 영향을 가리기 위해 시신에 석고를 덮었다고 주장한다. 시신이 포룸을 지나가는 동안 비가 시신을 덮은 석고를 씻어내어 독살된 시신의 모습을 모두가 볼 수 있게 했다.[49] 작가이자 역사가인 비참은 디오의 기록을 "과장된" 것으로 여긴다.[50]
브리타니쿠스가 14번째 생일을 불과 며칠 앞두고 사망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브리타니쿠스는 네로의 노래 실력을 비판했고, 양아들인 네로를 본래 이름인 루키우스 도미티우스라고 불렀다.[51]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브리타니쿠스는 훗날 황제가 되는 티투스와 좋은 친구였다. 티투스는 브리타니쿠스가 죽던 날 밤 함께 자리에 있었고, 독을 맛보았으며, 그 결과 심각하고 오래 지속되는 병을 앓았다고 주장했다. 티투스는 어린 시절 친구의 금 조각상을 세우고 그를 기리는 동전을 발행했다.[53]
8. 사후
브리타니쿠스의 죽음으로 클라우디우스의 남자 후손은 단절되었다. 여자 후손 역시 브리타니쿠스의 이부 자매인 클라우디아가 네로에 의해 처형되었고, 이복 누이인 클라우디아 안토니아(30년 - 66년)는 66년에 사망하는 등 매우 단명했다. 클라우디아 안토니아는 가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47년 사망)와 결혼했고, 이후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22년 - 62년)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지만 요절했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는 그의 부하 중 유능한 장군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를 궁정에서 양육했으며, 브리타니쿠스보다 2살 연상이었던 티투스는 좋은 친구였다. 훗날 티투스는 로마 황제가 되었는데, 그는 과거를 되돌아보며 브리타니쿠스가 살해된 밤을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그가 받은 독을 조금 맛보고 오랫동안 병에 걸려 있었다고도 말했다. 티투스는 친구를 추모하며 브리타니쿠스 상을 세우고 동전을 발행했다고 한다.
17세기의 극작가 장 라신은 『브리타니퀴스』라는 비극을 썼다.
9. 관련 작품
장 라신은 1668년에 브리타니쿠스를 소재로 한 비극 《브리타니쿠스》를 썼다.[54] 이 작품은 1670년에 출판되었으며, 라신은 서문에서 자신의 극작법을 설명하고 괴물 네로가 '태어나는' 모습을 극화했다고 밝혔다.
잭 풀먼의 1976년 텔레비전 시리즈 《나는 클라우디우스》에서는 그레이엄 시드가 브리타니쿠스를 연기했다.[55]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는 브리타니쿠스와 좋은 친구였으며, 훗날 황제가 된 후 브리타니쿠스를 추모하며 상을 세우고 동전을 발행했다고 한다.
후지모토 히토미의 소설 『사랑해 로마 야상곡』에도 브리타니쿠스가 등장한다.
10. 가계도
대 마리우스 | |
---|---|
소 마리우스 | Julia Major (sister of Caesar)|율리아|율리아영어 |
카이사르의 아버지 | |
Aurelia Cotta|아우렐리아|아우렐리아 코타영어 | 섹스투스 카이사르 |
율리우스 카이사르 | |
Cornelia Cinna minor|소 코르넬리아|소 코르넬리아영어 | Julia Caesaris (sister of Julius Caesar)|소율리아|소 율리아영어 |
율리아 카에사리스 | |
대 폼페이우스 | Marcus Atius Balbus|아티우스|마르쿠스 아티우스 발부스영어 |
아티아 | |
Gaius Octavius (father of Augustus)|옥타비우스|가이우스 옥타비우스영어 | Scribonia (wife of Octavian)|스크리보니아|스크리보니아영어 |
아우구스투스 | |
리비아 드루실라 | 클라우디우스 네로 |
아그리파 | |
대 율리아 | 소 안토니아 |
티베리우스 | |
대 드루수스 | L・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
대 아그리피나 | |
게르마니쿠스 | 도미티아 레피다 |
클라우디우스 | |
Milonia Caesonia|카이소니아|밀로니아 카이소니아영어 | G・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
칼리굴라 | |
소 아그리피나 | 메살리나 |
율리아 드루실라 | |
네로 | 클라우디아 옥타비아 |
브리타니쿠스 |
참조
[1]
서적
[2]
웹사이트
Roman History
https://penelope.uch[...]
[3]
웹사이트
Life of Claudius, 27
https://www.perseus.[...]
2017-01-06
[4]
서적
[5]
서적
[6]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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