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비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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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로비잔은 러시아 극동에 위치한 도시로, 유대인 자치주의 행정 중심지이다. 1930년대 소련 정부는 이 지역에 유대인 정착지를 건설하여 '비로비잔 실험'으로 알려졌으며, 유대인 이주를 장려했다. 그러나 이주민과 지역 간의 문화적 차이, 열악한 환경 등으로 인해 정착은 어려움을 겪었고, 스탈린 시대의 대숙청으로 유대인들은 탄압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유대인 인구는 감소했으며, 현재는 러시아인이 다수를 차지한다. 현재 비로비잔은 유대 문화 부흥을 위한 노력이 진행 중이며, 이디시어를 가르치는 학교와 유대교 관련 시설이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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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로비잔 - [지명]에 관한 문서 | |
|---|---|
| 지도 정보 | |
| 기본 정보 | |
![]() | |
| 로마자 표기 | Birobidzhan |
| 이디시어 발음 | ˌbɪrɔbɪˈdʒan |
| 영어 발음 | ˌbɪrəbɪˈdʒɑːn |
| 러시아어 발음 | bʲɪrəbʲɪˈdʐan |
| 도시의 날 | 5월 마지막 토요일 |
| 설립일 | 1931년 |
| 도시 지위 획득일 | 1937년 |
| 행정 구역 | |
| 국가 | 러시아 |
| 연방주체 | 유대인 자치주 |
| 행정 구역 | 유대인 자치주의 연방 자치시 |
| 행정 중심지 | 유대인 자치주, 비로비잔스키 군 |
| 도시 구역 | 비로비잔 도시 구역 |
| 지방 자치 중심지 | 비로비잔 도시 구역, 비로비잔스키 지방 자치 지구 |
| 정치 | |
| 시장 | 알렉산드르 골로바티 |
| 시의회 | 비로비잔 시의회 |
| 면적 | |
| 총 면적 | 169.38 제곱킬로미터 |
| 인구 | |
| 2010년 인구 조사 | 75,413명 |
| 2010년 인구 순위 | 215번째 |
| 2014년 추정 인구 | 74,791명 |
| 2020년 인구 | 71,843명 |
| 2024년 추정 인구 | 67,788명 |
| 인구 밀도 | 445 명/제곱킬로미터 (2024년 추정) |
| 시간대 | |
| 시간대 | 블라디보스토크 시간대 (UTC+10) |
| 기타 정보 | |
| 우편 번호 | 679000, 679002, 679005, 679006, 679011, 679013–679017, 679700, 679801, 679950 |
| 지역 전화 코드 | +7 42622 |
| 차량 번호판 | 79 |
| 공식 웹사이트 | 비로비잔 공식 웹사이트 |
2. 역사
1915년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티혼스카야(Тихонькая) 역 부근에 첫 정착지가 세워졌다.[51] 1920년대 후반 소련 정부가 이 곳에 유대인 정착지를 건설하기로 하면서, 그 수도가 될 비로비잔의 도시계획을 스위스인 건축가 하네스 마이어(Hannes Meyer)에게 맡겼다. 티혼스카야는 1931년 10월 10일 '''비로비잔'''으로 개칭되었으며, 1937년 3월 2일 도시로 승격되었다.[51]
유대인 자치주가 세워지던 1930년대를 전후해 소련의 유대인들 일부가 비로비잔을 비롯한 유대인 자치주로 이주해 왔으며, 소련 외에 미국, 남아메리카, 유럽, 팔레스타인에 살던 유대인 1400여 명 또한 이 곳으로 이주했다.[52] 그러나 1950년대 이후 유대인의 비중은 줄어만 갔고, 현재는 도시 주민의 대부분이 러시아인이다.
비로비잔은 유대인들을 위한 터전으로 계획되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이 지역과 유대인 이주민 사이에는 중요한 문화적 연관성이 없었다. 유대인들이 비로비잔으로 이주한 주된 이유는 소비에트 정부의 숨겨진 동기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고향에서 전략적으로 이주되었는데, 이 지역에서 유대인 정착은 주민 대다수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다. 유대인들을 비로비잔에 배치한 것은 중국이나 일본의 확장을 막는 완충지대 역할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지역은 또한 시베리아 횡단 철도와 아무르강 유역을 연결하는 곳이었으며, 소비에트 정부는 어류, 목재, 철, 주석, 금과 같은 지역의 천연자원을 개발하려 했다.[15]
비로비잔 건설 직후 스탈린의 대숙청이 시작되면서, 그곳의 유대인들이 표적이 되었다.[17]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수만 명의 난민이 된 동유럽 유대인들이 1946년부터 1948년까지 비로비잔으로 향했다.[18]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조세프 스탈린이 "뿌리 없는 코스모폴리탄"에 대한 탄압을 시작하면서 유대인들은 다시 한번 표적이 되었다.[17] 비로비잔의 거의 모든 이디시어 기관들이 해체되었다.[19]
과거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비로비잔으로 이주했지만, 고립된 지역적 특성과 생활의 어려움으로 대부분 정착하지 못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점에는 유대인 인구가 3만 명에 달했지만, 최근(2010년대)에는 약 2,000명 정도이며, 전체 인구의 약 0.5%에 불과하다.[19]
2. 1. 초기 정착과 도시 건설
1915년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티혼스카야(Тихонькая) 역 부근에 첫 정착지가 세워졌다.[51] 1920년대 후반 소련 정부가 이 곳에 유대인 정착지를 건설하기로 하면서, 그 수도가 될 비로비잔의 도시계획을 스위스인 건축가 하네스 마이어(Hannes Meyer)에게 맡겼다. 티혼스카야는 1931년 10월 10일 '''비로비잔'''으로 개칭되었으며, 1937년 3월 2일 도시로 승격되었다.[51]유대인 자치주가 세워지던 1930년대를 전후해 소련의 유대인들 일부가 비로비잔을 비롯한 유대인 자치주로 이주해 왔으며, 소련 외에 미국, 남아메리카, 유럽, 팔레스타인에 살던 유대인 1400여 명 또한 이 곳으로 이주했다.[52] 1930년대 후반에는 지역 소비에트 청사, 사범학교, 도서관, 문화궁전이 세워졌으며, 1939년까지 철도와 의학교가 완비되었다.[51]

비로비잔은 스위스 건축가 한네스 마이어(Hannes Meyer)가 계획하여 1931년에 건설되었다. 1934년 유대인 자치주(Jewish Autonomous Oblast)의 행정 중심지가 되었고, 1937년에는 도시 지위를 부여받았다.[10] 비로비잔의 36,000 km²는 1928년 3월 28일 폴리트뷰로에 의해 승인되었다.[11]
볼셰비키 혁명 이후 소련에는 비로비잔 정착 유대인들을 지원하는 두 개의 조직, 콤제트(KOMZET)와 오제트(OZET)가 있었다.[12] 이 조직들은 토지 분배와 함께 이주에서 의료 지원에 이르는 생활 전반의 책임을 맡았다. 많은 캐나다 유대인들이 캐나다 공산당 당원이나 동조자로서 소련을 지지했다.[12]
유대인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이 건설한 비로비잔을 "국가 문제에 대한 유일하게 참되고 합리적인 해결책"이라고 믿었다.[12] 소련 정부는 "유대인의 고향으로!"라는 슬로건을 사용하여 유대인 노동자들의 비로비잔 이주를 장려했다. 이 슬로건은 소련 유대인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유대인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13] 1935년, 암비잔(Organization for Jewish Colonization in Russia)은 폴란드, 루마니아, 리투아니아, 독일에서 비로비잔으로 이주하는 유대인 가족들을 돕기 위해 소련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았다.[14] 아르헨티나와 미국에서도 유대인 노동자와 기술자들이 비로비잔으로 이주했다.[13] 소련 정부의 이러한 운동은 비로비잔 실험(Birobidzhan Experiment)으로 알려져 있다.[15]
2. 2. 유대인 이주와 비로비잔 실험
1915년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티혼스카야(Тихонькая) 역 부근에 첫 정착지가 세워졌다.[51] 1920년대 후반 소련 정부가 이 곳에 유대인 정착지를 건설하기로 하면서, 그 수도가 될 비로비잔의 도시계획을 스위스인 건축가 하네스 마이어(Hannes Meyer)에게 맡겼다. 티혼스카야는 1931년 10월 10일에 '''비로비잔'''이라는 이름으로 개칭되었으며, 1937년 3월 2일에 도시로 승격되었다.[51]유대인 자치주가 세워지던 1930년대를 전후해 소련의 유대인들 일부가 비로비잔을 비롯한 유대인 자치주로 이주해 왔으며, 소련 외에 미국, 남아메리카, 유럽, 팔레스타인에 살던 1400여 명 또한 이 곳으로 이주했다.[52] 1930년대 후반에는 지역 소비에트 청사, 사범학교, 도서관, 문화궁전이 세워졌으며, 1939년까지 철도와 의학교가 완비되었다.[51]
볼셰비키 혁명 이후 소련에는 비로비잔 정착 유대인들을 지원하는 콤제트(KOMZET)와 오제트(OZET) 두 조직이 있었다.[12] 이 조직들은 토지 분배, 이주, 의료 지원 등 생활 전반을 책임졌다. 많은 캐나다 유대인들이 캐나다 공산당 당원이거나 동조자로서 소련을 지지했다.[12]
유대인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이 건설한 비로비잔을 "국가 문제에 대한 유일하게 참되고 합리적인 해결책"이라고 믿었다.[12] 소련 정부는 "유대인의 고향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유대인 노동자들의 비로비잔 이주를 장려했다. 이 슬로건은 소련 유대인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유대인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13] 1935년 암비잔(Organization for Jewish Colonization in Russia)은 폴란드, 루마니아, 리투아니아, 독일에서 비로비잔으로 이주하는 유대인 가족들을 돕기 위해 소련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았다.[14] 아르헨티나와 미국에서도 유대인 노동자와 기술자들이 비로비잔으로 이주했다.[13] 이러한 소련 정부의 운동은 비로비잔 실험(Birobidzhan Experiment)으로 알려져 있다.[15]
비로비잔은 유대인들을 위한 터전으로 계획되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 지역과 유대인 이주민 사이에는 중요한 문화적 연관성이 없었다. 증가하는 인구는 문화적으로 다양했고, 이주민들 중 일부는 현대 러시아 시민이 되는 데 집중했고, 일부는 현대 문화에 환멸을 느껴 땅을 일구고 사회주의 이상을 추진하고자 했으며, 문화적 고향을 건설하는 데 관심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유대인들이 비로비잔으로 이주한 주된 이유는 소비에트 정부의 숨겨진 동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고향에서 전략적으로 이주되었는데, 이 지역에서 유대인 정착은 주민 대다수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다. 유대인들을 비로비잔에 배치한 것은 중국이나 일본의 확장을 막는 완충지대 역할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지역은 또한 시베리아 횡단 철도와 아무르강 유역을 연결하는 곳이었으며, 소비에트 정부는 어류, 목재, 철, 주석, 금과 같은 지역의 천연자원을 개발하려 했다.[15]
1917년 러시아 혁명 이전, 유대인들의 거주는 정착지로 제한되어 있었다. 유대인들이 비로비잔으로 이주하면서, 이미 그곳에 거주하고 있던 약 27,000명의 러시아인, 코사크, 한국인, 우크라이나인들과 재산과 토지를 놓고 경쟁해야 했다. 이는 유대인들이 자신들만의 영역을 확보할 만한 넓은 지역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의 정착을 어렵게 만들었다.[15]
비로비잔 정착은 물류적으로나 실질적으로 어려웠다. 부적절한 인프라와 지역의 기후 조건으로 인해, 초기 정착 이후 비로비잔으로 이주한 유대인 정착민의 절반 이상이 남지 못했다.[16]
비로비잔 건설 직후 스탈린의 대숙청이 시작되면서, 그곳의 유대인들이 표적이 되었다.[17]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수만 명의 난민이 된 동유럽 유대인들이 1946년부터 1948년까지 비로비잔으로 향했다.[18] 그들 중 일부는 원래의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유대인들이었다.[17]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조세프 스탈린이 "뿌리 없는 코스모폴리탄"에 대한 탄압을 시작하면서 유대인들은 다시 한번 표적이 되었다.[17] 비로비잔의 거의 모든 이디시어 기관들이 해체되었다.[19]
이디시어 작가 다비드 베르겔손은 비로비잔 홍보에 큰 역할을 했지만, 실제로 그곳에 살지는 않았다.[17] 베르겔손은 다른 나라의 이디시어 신문에 기사를 쓰면서 이 지역을 다른 곳의 반유대주의를 피할 수 있는 이상적인 장소로 묘사했다. 미국과 라틴 아메리카에서 최소 1,000가구가 베르겔손의 영향으로 비로비잔으로 이주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17] 1952년 68세 생일을 맞은 베르겔손은 스탈린의 "뿌리 없는 코스모폴리탄"에 대한 반유대주의 운동에서 처형된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17]
소비에트 극작가 빅토르 핑크(Victor Fink)의 러시아어 희곡 ''노바야 로디나''(''새로운 고향'')에서는 비로비잔을 한국인, 아무르 코사크, 유대인 세 공동체가 하나 되는 곳으로 묘사했다. 각 공동체에는 좋은 등장인물과 나쁜 등장인물이 있지만, 궁극적으로 각 공동체의 좋은 등장인물들은 서로 협력하고 함께 일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달성된 통합을 상징하기 위해, 희곡은 유대인 등장인물 한 명이 한국인과 결혼하고, 다른 유대인 등장인물이 코사크와 결혼하고, 코사크 한 명이 한국인과 결혼하는 혼혈 결혼으로 끝맺는다.
과거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비로비잔으로 이주했지만, 고립된 지역적 특성과 생활의 어려움으로 대부분 정착하지 못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점에는 유대인 인구가 3만 명에 달했지만, 최근(2010년대)에는 약 2,000명 정도이며, 전체 인구의 약 2.5%에 불과하다.[48]
2. 3. 스탈린 시대의 탄압과 유대인 공동체의 변화
1915년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티혼스카야(Тихонькая) 역 부근에 첫 정착지가 세워졌다.[51] 스탈린의 대숙청이 시작되면서 비로비잔의 유대인들이 표적이 되었다.[17]비로비잔 정착은 물류, 실질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부적절한 인프라와 지역의 기후 조건으로 인해, 초기 정착 이후 비로비잔으로 이주한 유대인 정착민의 절반 이상이 남지 못했다.[16]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수만 명의 난민이 된 동유럽 유대인들이 1946년부터 1948년까지 비로비잔으로 향했다.[18] 그들 중 일부는 원래의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유대인들이었다.[17]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조세프 스탈린이 "뿌리 없는 코스모폴리탄"에 대한 탄압을 시작하면서 유대인들은 다시 한번 표적이 되었다.[17] 비로비잔의 거의 모든 이디시어 기관들이 해체되었다.[19]
2. 4. 비로비잔 실험의 배경과 한계
1915년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티혼스카야(Тихонькая) 역 부근에 첫 정착지가 세워졌다.[51] 1920년대 후반 소련 정부가 이 곳에 유대인 정착지를 건설하기로 하면서, 수도가 될 비로비잔의 도시계획을 스위스인 건축가 하네스 마이어(Hannes Meyer)에게 맡겼다. 1931년 10월 10일 비로비잔으로 개칭되었으며, 1937년 3월 2일에 도시로 승격되었다.[51]볼셰비키 혁명 이후 소련에는 비로비잔 정착 유대인들을 지원하는 콤제트(KOMZET)와 오제트(OZET)라는 두 개의 조직이 있었다.[12] 이들은 토지 분배, 이주, 의료 지원 등 생활 전반을 책임졌다. 많은 캐나다 유대인들이 캐나다 공산당 당원이거나 동조자로서 소련을 지지했다.[12]
유대인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이 건설한 비로비잔을 "국가 문제에 대한 유일하게 참되고 합리적인 해결책"이라고 믿었다.[12] 소련 정부는 "유대인의 고향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유대인 노동자들의 비로비잔 이주를 장려했다. 이 슬로건은 소련뿐 아니라 미국, 남아메리카, 유럽, 팔레스타인 등 다른 나라의 유대인 1400여 명을 이주시키는 데 성공했다.[52][13] 1935년에는 암비잔(Organization for Jewish Colonization in Russia)이 폴란드, 루마니아, 리투아니아, 독일에서 비로비잔으로 이주하는 유대인 가족들을 돕기 위해 소련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았다.[14]
그러나 비로비잔은 유대인 인구를 위한 터전으로 계획되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이 지역과 유대인 이주민 사이에는 중요한 문화적 연관성이 없었다. 이주민들은 문화적으로 다양했고, 일부는 현대 러시아 시민이 되는 데 집중했고, 일부는 현대 문화에 환멸을 느껴 땅을 일구고 사회주의 이상을 추진하고자 했으며, 문화적 고향을 건설하는 데 관심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유대인들이 비로비잔으로 이주한 주된 이유는 소비에트 정부의 숨겨진 동기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고향에서 전략적으로 이주되었는데, 이 지역에서 유대인 정착은 주민 대다수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다. 유대인들을 비로비잔에 배치한 것은 중국이나 일본의 확장을 막는 완충지대 역할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지역은 또한 시베리아 횡단 철도와 아무르강 유역을 연결하는 곳이었으며, 소비에트 정부는 어류, 목재, 철, 주석, 금과 같은 지역의 천연자원을 개발하려 했다.[15]
3. 유대인 및 이디시 문화

19세기와 20세기 초 러시아 제국에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유대인 인구가 거주하고 있었으며, 그 대다수는 아슈케나짐 유대인이었다. 소비에트 연방 성립 이전 200만 명의 유대인이 다른 국가로 이주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수가 러시아 제국에 남았다. 비로비잔으로 이주한 유대인들도 수천 명에 달했지만, 극심한 고난과 고립으로 인해 대부분 떠났다. 1939년 유대인 인구는 전체 인구의 20% 미만이었다.[21]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이 지역의 유대인 인구는 약 3만 명으로 최고점에 달했다.[19] 그러나 2010년대 중반에는 약 2,000명의 유대인만이 이 지역에 남아 전체 인구의 0.5%를 차지했다.[19]
당시 유대인 공동체의 공용어로 널리 여겨졌던 이디시어는 유대인 인구를 소비에트 인구에 통합하는 데 기여할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형식은 민족적, 내용은 사회주의적'인 것을 따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22] 1920년대에는 비로비잔으로의 유대인 이주가 강력하게 추진되었다.[22]
비로비잔의 유대인 종교 공동체는 1946년에 공식적으로 등록되었으나, 1950년대 초 박해를 받았다.[23] 소비에트 연방의 다른 지역보다 비로비잔에서 유대 문화가 훨씬 일찍 부흥되었으며, 1970년대에는 이디시어 극장이 문을 열었다.
3. 1. 유대 문화의 부흥 노력
2004년에 시나고그가 문을 열었다.[53] 비로비잔의 랍비 모르데카이 샤이너는 비로비잔에 유대인 4천여 명이 있다고 말했는데, 이는 비로비잔 인구의 5% 남짓에 해당한다.[54] 비로비잔의 중심 도로는 이디시어 작가 숄롬 알레이헴(Sholom Aleichem)의 이름을 땄다.[55] 비로비자너 슈테른은 러시아어와 이디시어로 주 2회 발행되는 유대인 자치주정부 소유 신문이다.1990년대 초부터 이디시어와 유대인 전통은 모든 공립학교에서 유대인의 이국적인 문화가 아닌 지역의 국가 유산의 일부로 가르쳐졌다.[24] 2004년에 완공된 정교회 회당은 일요학교 교실, 도서관, 박물관, 행정 사무실이 있는 복합 건물 옆에 있다. 이 건물들은 유대인 자치주 설립 70주년을 기념하여 2004년에 공식적으로 개관했다.[25]
이스라엘의 랍비 모르데카이 샤이너(Mordechai Scheiner) 전 비로비잔 최고 랍비이자 이 지역의 하바드 루바비치 대표에 따르면, "오늘날 사람들은 이디시어 문화의 이점을 누리고 유대인 전통으로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26] 샤이너는 이 지역에서 러시아 TV 프로그램인 ''Yiddishkeit''를 진행하기도 했다. 2010년부터는 그의 제자 엘리야후 리스(Eliyahu Riss) 랍비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니콜라이 미하일로비치 볼코프(Nikolay Mikhaylovich Volkov) 주지사는 지역 유대인 단체들이 유지하는 모든 가치 있는 계획을 지원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30] 2007년에는 바르일란 대학교(Bar-Ilan University)의 이디시어 연구 교수인 보리스 코틀러만(Boris Kotlerman)에 의해 비로비잔 국제 이디시어 언어 및 문화 여름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31]
엘리 리스(Eli Riss) 랍비는 유대인 자치주에 유대 문화를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현재 슬로건은 "비로비잔을 다시 유대인의 땅으로 만들자"이다. 리스 랍비의 부모는 원래 비로비잔 거주자였지만, 90년대에 주의 대다수 유대인 인구와 함께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그는 유대 문화를 되살리겠다는 계획으로 최고 랍비로 돌아왔다. 리스 랍비는 비로비잔을 '유대인에게 안전한 곳'으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그가 반유대주의를 경험하지 않은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라고 이미 말했습니다.[35]
쇼렘 알레히엠 아무르 주립대학교(쇼렘 알레히엠 아무르 주립대학교)는 지역 종교 공동체와 협력하여 운영된다. 이 대학교는 러시아 극동에서 독특한 사례이다. 교육 과정의 기반은 히브리어, 역사 및 고전 유대교 경전의 연구이다.[38] 오늘날 이 도시의 14개 공립학교는 이디시어와 유대교 전통을 가르쳐야 한다.
3. 2. 교육
쇼렘 알레히엠 아무르 주립대학교(쇼렘 알레히엠 아무르 주립대학교)는 지역 종교 공동체와 협력하여 운영된다. 이 대학교는 러시아 극동에서 히브리어, 역사 및 고전 유대교 경전 연구를 교육 과정의 기반으로 삼는 독특한 사례이다.[38]이 도시에는 현재 이디시어를 가르치는 여러 개의 국립학교와 고등 교육 기관의 영어-이디시어 학과, 종교 교육을 위한 이디시어 학교, 그리고 유치원이 있다. 5세에서 7세 사이의 어린이들은 일주일에 두 번 이디시어를 배우고 유대인의 노래, 춤, 전통을 배우기도 한다.[39] 이는 공립학교로, 이디시어와 유대교 교육 과정을 하루 반나절 동안 제공하며, 학부모가 선택할 수 있다. 약 120명의 학생 중 절반 정도가 이디시어 과정에 등록한다. 그들 중 많은 학생들은 1학년부터 12학년까지 동일한 하루 반나절 이디시어/유대교 교육 과정을 제공하는 2번 공립학교로 진학한다. 이디시어는 비로비잔 사범대학에서도 제공되는데, 이는 러시아에서 몇 안 되는 대학 수준의 이디시어 강좌 중 하나이다.[40] 오늘날 이 도시의 14개 공립학교는 이디시어와 유대교 전통을 가르쳐야 한다.
1990년대 초부터 이디시어와 유대인 전통은 모든 공립학교에서 유대인의 이국적인 문화가 아닌 지역의 국가 유산의 일부로 가르쳐졌다.[24]
4. 지명
도시 이름은 유대인 자치주의 주요 강이자 아무르강의 지류인 비라강과 비잔 강에서 따왔다. 다만 비라강만이 도시 부근을 흐르고 있다.
비로비잔은 중국 국경 근처의 비라강(比拉河, 청나라 이전에는 奇穆尼河)과 비잔강(比詹河, 청나라 이전에는 畢瞻河)을 따라 위치하며, 도시 이름 "비로비잔"의 유래가 되었다.
5. 인구
| 연도 | 인구 |
|---|---|
| 1926 | 831 |
| 1939 | 29,648 |
| 1959 | 40,667 |
| 1970 | 55,724 |
| 1979 | 68,630 |
| 1989 | 83,667 |
| 2002 | 77,250 |
| 2010 | 75,413 |
| 2021 | 68,536 |
과거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비로비잔으로 이주했지만, 고립된 지역적 특성과 생활의 어려움으로 대부분 정착하지 못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점에는 유대인 인구가 3만 명에 달했지만, 최근(2010년대)에는 약 2,000명 정도이며, 전체 인구의 약 2.5%에 불과하다.[48]
6. 기후
비로비잔은 몬순의 영향을 받는 혹독한 습윤 대륙성 기후(쾨펜 기후 분류 ''Dwb'')를 경험하며, 계절별 기온 차이가 매우 크다. 여름은 덥고 습하며, 겨울은 매우 춥고 건조하다. 1월에는 한 번도 0°C 이상의 기온을 기록한 적이 없다.[41]
| 월 | 1월 | 2월 | 3월 | 4월 | 5월 | 6월 | 7월 | 8월 | 9월 | 10월 | 11월 | 12월 | 연평균 |
|---|---|---|---|---|---|---|---|---|---|---|---|---|---|
| 평균 최고 기온 (°C) | -15.6 | -10.9 | 0.2 | 9.5 | 18.2 | 24.5 | 26.8 | 24.3 | 18.1 | 8.5 | -4.1 | -14.2 | 7.0 |
| 평균 기온 (°C) | -22.2 | -16.5 | -6.4 | 5.4 | 13.0 | 18.9 | 21.1 | 19.2 | 12.8 | 3.9 | -9.2 | -18.8 | 1.9 |
| 평균 최저 기온 (°C) | -27.4 | -26.4 | -16.5 | -3.4 | 5.0 | 12.5 | 15.1 | 13.4 | 5.9 | -1.3 | -16.9 | -26.6 | -3.6 |
| 역대 최고 기온 (°C) | -0.4 | 5.9 | 18.4 | 29.8 | 33.7 | 37.1 | 39.9 | 36.8 | 32.7 | 26.9 | 16.1 | 5.2 | - |
| 역대 최저 기온 (°C) | -43.7 | -39.9 | -34.1 | -19.7 | -3.9 | 1.5 | 5.9 | 3.7 | -3.9 | -19.8 | -33.6 | -37.9 | - |
| 강수량 (mm) | 6 | 5 | 13 | 35 | 61 | 108 | 147 | 154 | 88 | 35 | 19 | 11 | - |
| 평균 강수일수 | 2 | 2 | 4 | 6 | 10 | 12 | 13 | 13 | 10 | 5 | 4 | 3 | - |
| 출처: 세계기상기구 (UN)[56] | |||||||||||||
7. 경제
비로비잔에서는 섬유와 신발 제조를 중심으로 한 경공업이 주로 이루어진다. 차량 수리 공장, 가구 공장, 식품 공장도 있다.[1] 가장 가까운 주요 도시인 하바롭스크에는 하바롭스크 노비 공항(KHV/UHHH)이 있으며, 비로비잔 중심부에서 198km 떨어져 있다.
8. 행정 구역
유대인 자치주의 행정 중심지이며, 러시아 행정 구역 체계 내에서 비로비잔스키 군(Birobidzhansky District)의 행정 중심지 역할도 겸한다. 그러나 비로비잔은 비로비잔스키 군에 속하지 않는다.[36] 비로비잔은 주(oblast) 직할시(city of oblast significance)로 별도 편입되어 있으며, 이는 군과 동등한 지위를 갖는 행정 단위이다.[36] 지방 자치 단체로서 비로비잔 주 직할시는 비로비잔 도시구(Birobidzhan Urban Okrug)로 편입되어 있다.[37]
9. 교통
하바롭스크는 비로비잔에서 198km 떨어져 있으며, 비로비잔에서 가장 가까운 주요 공항인 하바롭스크 노비 공항(KHV / UHHH)을 제공한다.[1] 시베리아 횡단철도 비로비잔 1역(Биробиджан I)이 있으며, 하바롭스크에서 2~3시간 소요된다. 본선 외에 레닌스코예로 향하는 지선이 있다. 철도 외에도 하바롭스크로 향하는 장거리 노선 버스도 있다.[1]
10. 스포츠
나데즈다 비로비잔 밴디 클럽은 2016-17 시즌까지 러시아 밴디 최고 리그(Russian Bandy Supreme League)의 2부 리그에서 활동했다.[43][44] 그러나 2017-18 시즌에는 리그에 참가하지 않았다.[45]
11. 자매 도시 및 우호협력도시
비로비잔은 다음과 같은 도시들과 자매 도시 협정을 체결하였다.[46][49][57][58][59]
| 국가 | 도시 | 체결일 |
|---|---|---|
| 비버턴 (오리건주) | 1990년 8월 13일 | |
| 말로트타르시하 | 1995년 10월 15일 | |
| 학강(鶴崗) (헤이룽장성) | 2001년 10월 30일 | |
| 니가타현 도요사카 시(豊栄市: 현재의 니가타시 도요사카에 구) | 2005년 8월 30일 | |
| 이춘(伊春) (헤이룽장성) | 2011년 5월 18일 | |
| Nof HaGalil|노프 하갈릴영어 (북부 지구) |
11. 1. 우호협력도시
| 국가 | 도시 |
|---|---|
| 의정부시 (2010년 11월 2일)[58][60] | |
| 비버턴 (오리건주) | |
| 니가타시 (니가타현) | |
| 학가시(鶴崗市) (흑룡강성) | |
| 의춘시(宜春市) (장시성) | |
| Nof HaGalil|노프 하갈릴영어 (북부 지구) | |
| Ma'alot-Tarshiha|마알로트-타르시하영어 (북부 지구) |
12. 대중 문화
- 현대 오페라 ''소비에트 시온(Soviet Zion)''은 1930년대 비로비잔을 배경으로 한다.
- 다큐멘터리 ''행복을 찾아서(In Search of Happiness)''는 현대 비로비잔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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