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헬름 마르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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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빌헬름 마르크스는 1863년 쾰른에서 태어나 본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프로이센 왕국 사법부에서 활동했다. 독일 중앙당에 입당하여 프로이센 의회 의원을 거쳐 독일 제국 의회 의원을 지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강화에 의한 평화를 주장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는 총리직을 네 차례 역임하며 경제 안정에 기여했고, 1925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28년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 정계에서 은퇴하여, 1946년 본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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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마르크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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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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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빌헬름 마르크스 |
원어 이름 | Wilhelm Marx |
출생일 | 1863년 1월 15일 |
출생지 | 쾰른, 프로이센 왕국 |
사망일 | 1946년 8월 5일 |
사망지 | 본, 연합군 점령하 독일 |
직업 | 변호사 |
배우자 | 요한나 페어코이엔 (1891년 결혼) |
자녀 | 4명 |
소속 정당 | 독일 중앙당 |
교육 | 본 대학교 |
정치 경력 | |
독일국 수상 | 바이마르 공화국 |
수상 임기 (1) | 1923년 11월 30일 ~ 1925년 1월 15일 |
대통령 (1) |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
부수상 (1) | 카를 야레스 |
수상 선임 (1) |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
수상 후임 (1) | 한스 루터 |
수상 임기 (2) | 1926년 5월 17일 ~ 1928년 6월 28일 |
대통령 (2) | 파울 폰 힌덴부르크 |
부수상 (2) | 오스카르 헤르크트 |
수상 선임 (2) | 한스 루터 |
수상 후임 (2) | 헤르만 뮐러 (1876년생 정치인) |
법무부 장관 | 한스 루터 내각 |
법무부 장관 임기 | 1926년 1월 10일 ~ 1926년 5월 12일 |
법무부 장관 선임 | 요제프 프렌켄 |
법무부 장관 후임 | 요하네스 벨 |
점령 지역 부 장관 | 한스 루터 내각 |
점령 지역 부 장관 임기 | 1926년 1월 10일 ~ 1926년 5월 12일 |
점령 지역 부 장관 선임 | 한스 루터 |
점령 지역 부 장관 후임 | 요하네스 벨 |
프로이센 총리 임기 | 1925년 2월 18일 ~ 1925년 4월 6일 |
프로이센 총리 선임 | 오토 브라운 |
프로이센 총리 후임 | 오토 브라운 |
중앙당 대표 임기 | 1922년 1월 17일 ~ 1928년 12월 8일 |
중앙당 대표 후임 | 루드비히 카스 |
국회의원 | 바이마르 공화국 |
국회의원 임기 | 1920년 6월 24일 ~ 1932년 6월 10일 |
국회의원 선거구 | 튀링겐 (1928년–1932년) 뒤셀도르프 동부 (1920년–1928년) |
국회의원 | 독일 제국 |
국회의원 임기 (제국) | 1910년 3월 2일 ~ 1918년 11월 9일 |
국회의원 선거구 (제국) | 쾰른 6 |
국민의회 의원 임기 | 1919년 2월 6일 ~ 1920년 6월 6일 |
국민의회 의원 선거구 | 뒤셀도르프 동부 |
2. 생애
빌헬름 마르크스는 1863년 1월 15일 쾰른에서 가톨릭 학교 교장의 아들로 태어나 본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졸업 후 프로이센 왕국 사법부에서 판사로 활동하며 경력을 쌓는 동시에 독일 중앙당에 입당하여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1899년 프로이센 의회 의원으로 선출된 것을 시작으로 1910년에는 독일 제국 의회 의원이 되었으며, 이후 중앙당 내에서 입지를 넓혀 1922년 당 의장직에 올랐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그는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 속에서 네 차례(1923-1925, 1926-1928)에 걸쳐 총리직을 역임하며 공화국의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초인플레이션을 수습하기 위한 렌텐마르크 도입, 제1차 세계 대전 배상금 문제 해결을 위한 도스안 수용, 독일의 국제 연맹 가입 등 중요한 정책들이 추진되었다. 그는 온건하고 타협을 중시하는 정치 스타일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1925년에는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대통령 사후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 바이마르 연정(중앙당, 독일 민주당, 독일 사회민주당)의 후보로 출마했으나, 파울 폰 힌덴부르크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다.
1928년 총선 결과에 따라 총리직에서 물러났으며, 같은 해 중앙당 의장직도 사임했다. 이후 사회 활동에 참여하다가 1932년 의원직을 끝으로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했다. 나치 독일 시대에는 정치 활동을 하지 않고 본에서 지내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인 1946년 8월 5일 그곳에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빌헬름 마르크스는 1863년 1월 15일 쾰른에서 가톨릭 학교 교장인 요한 마르크스(Johann Marx, 1822~1882)와 그의 아내 게르트루트(Gertrude, 1826~1909)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에게는 훗날 쾰른의 우르술라 수녀회를 이끌게 된 여동생 바바라(Barbara)가 있었다. 마르크스는 1881년 쾰른의 마르첼레 짐나지움(Dreikönigsgymnasium)에서 아비투어를 취득했다.[1]1881년부터 1884년까지 본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며, 재학 중 가톨릭 학생 협회인 카톨리셔 슈투덴텐페라인 아르미니아 본(Katholischer Studentenverein Arminia Bonn)의 회원이 되었다.[1] 졸업 후에는 쾰른과 발트브뢸(Waldbröl) 법원에서 수습 판사로 일했으며, 짐머른(Simmern)의 저당·부동산국에서도 잠시 근무했다.
1891년 요하나 페르코이엔(Johanna Verkoyen, 1871~1946)과 결혼하여 세 아들과 한 딸, 총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1] 아들 중 한 명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전사했다.[2]
1894년 엘버펠트(Elberfeld) 지방법원 판사로 임명되었고, 10년 후에는 쾰른 법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1907년부터 1921년까지는 뒤셀도르프 법원 판사로 재직했다. 독실한 가톨릭교 신자이자 독일 중앙당 소속이었던 그는 프로이센 왕국 체제 하에서는 더 높은 직위로 승진하기 어려웠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바이마르 공화국이 성립되자 림부르크안데어란 법원장이 되었지만, 곧 베를린 최고재판소 판사로 자리를 옮겼다.
일찍부터 가톨릭에 기반한 독일 중앙당의 정치 활동에 참여하여, 1899년에는 엘버펠트 지구 대표, 1908년에는 뒤셀도르프 지구 대표를 맡았다. 1899년 프로이센 왕국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10년에는 독일 제국 의회 의원이 되었으며, 1916년에는 중앙당 의원단 집행부에 합류했다. 정치인으로서 주로 교육 및 문화 정책 분야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냉정하고 온건한 성향으로 평가받았으며, 타협점을 모색하고 불필요한 적을 만들지 않는 인물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영토 확장이나 승리를 통한 평화가 아닌, 강화를 통한 평화를 주장했다. 전쟁 후에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법 제정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19년부터 1920년까지는 프로이센 주의 헌법 제정 의회 의원으로도 활동했다. 연합군의 라인란트 점령 시기에는 다른 많은 라인란트 출신 의원들과 달리 라인란트가 독일로부터 분리되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베르사유 조약 체결에 찬성했다. 마르크스는 독일 중앙당의 단결을 위해 노력했으며, 중앙당 소속 요제프 비르트 총리가 이끄는 내각을 지지했다.
2. 2. 법조 경력
1881년부터 본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졸업 후 프로이센 왕국 사법부에서 경력을 시작하여 쾰른과 Waldbröl|발트브뢴de 법원에서 수습 판사로 일했다. 1888년 프로이센 공무원 2차 시험에 합격한 뒤, 쾰른과 발트브뢴, 이후 Simmern|짐멜른de 지방 등기소에서 평가관으로 근무했다. 1894년에는 엘버펠트 지방법원 판사가 되었고, 10년 후인 1904년 쾰른 주 지방법원 판사(Landgerichtsrat|란트게리히츠라트de), 1907년 뒤셀도르프 고등주 지방법원 판사(Oberlandesgerichtsrat|오버란트게리히츠라트de)로 승진했다.[1]하지만 독일 제국 시절, 특히 프로테스탄트 중심의 프로이센 왕국에서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중앙당 당원이라는 점 때문에 판사로서 더 높은 자리로 나아가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1]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1921년 1월 림부르크 안 데어 란의 주 지방법원장(Landgerichtspräsident|란트게리히츠프레지덴트de)이 되었고, 같은 해 9월 27일에는 베를린 고등주 지방법원(Kammergericht|카머게리히트de) 상원장으로 임명되었다.[1] 이는 그가 중앙당의 국회 의원단 의장으로 선출된 날이기도 했다.
2. 3. 정치 경력
빌헬름 마르크스는 엘버펠트에서 판사로 재직하며 정치 활동을 시작했으며, 독일 중앙당에 입당하여 주요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그는 프로이센 하원 의원(1899-1918)과 독일 제국 라이히스타크 의원(1910-1918)을 역임하며 주로 교육 및 문화 정책 분야에서 활동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협상을 통한 평화를 지지했으며, 전후 바이마르 공화국 수립을 지지하고 바이마르 국민의회와 바이마르 공화국 라이히스타크 의원(1920-1932)으로 활동했다.[1][2]1921년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 암살 이후 중앙당 라이히스타크 의원단 대표가 되었고, 1922년에는 당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공화국의 안정을 위해 노력했으며, 특히 베르사유 조약 이행 문제와 관련하여 현실적인 접근을 취했다.[3]
마르크스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총 네 차례에 걸쳐 총리직을 수행하며(1923-1925, 1926-1928), 초인플레이션 극복과 정치적 안정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그의 내각은 렌텐마르크 도입, 도스안 수용, 국제 연맹 가입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온건하고 타협을 중시하는 정치 스타일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1925년에는 대통령 선거에 바이마르 연정의 후보로 출마했으나 파울 폰 힌덴부르크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다.[1] 1928년 총리직과 중앙당 의장직에서 물러났으며, 1932년에는 의원직을 사퇴하며 정계에서 은퇴했다. 나치 독일 시대에는 정치 활동을 하지 않고 본에서 은거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인 1946년 8월 5일 그곳에서 사망했다.
2. 3. 1. 초기 정치 활동
엘버펠트에서 지방법원 판사로 활동하며 정치 활동을 시작했고, 독일 중앙당에 입당했다. 1899년부터 1904년까지 엘버펠트 중앙당 대표였으며, 같은 해(1899년)부터 1918년까지 프로이센 왕국 의회 하원인 프로이센 하원 의원을 지냈다. 1906년부터 1919년까지는 프로이센 라인주 중앙당 부대표였고, 1907년에는 뒤셀도르프 중앙당 의장이 되었으며 1908년에는 뒤셀도르프 지구 대표를 맡았다. 1910년에는 아우크스부르크 가톨릭의 날을 주재했다.[2]1910년부터 1918년까지 쾰른 제6선거구 독일 제국 라이히스타크 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했으며, 1916년에는 중앙당 의원단 집행부에 합류했다. 정치인으로서 교육·문화 정책에 주로 관여했으며, 1911년에는 독일 학교 제도의 세속화에 반대하여 뒤셀도르프에 가톨릭 학교 조직을 설립했다.[2] 정치가로서는 냉정하고 온건파였으며, 타협점을 찾고 적을 만들지 않는 유형으로 평가받았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확장주의나 승리에 의한 평화가 아닌, 강화(講和)에 의한 평화를 주장했다. 라인란트 중앙당 당원들 사이에서 지지를 받았던, 영토적 이득 없이 협상을 통한 평화를 요구한 1917년 라이히스타크 평화 결의안을 지지했다. 전쟁이 끝나고 독일 제국이 붕괴된 후, 마르크스는 1919년 바이마르 헌법을 제정한 바이마르 국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1919년부터 1920년까지 프로이센 주 헌법 제정 의회 의원으로도 활동했다. 그는 1918-19년 독일 혁명으로 호엔촐레른 왕가가 전복된 것을 비난했지만, 새롭게 수립된 바이마르 공화국을 지지했다.[1]
연합국군의 라인란트 점령 시에는 많은 라인란트 출신 의원들과 달리 라인란트의 독일 분리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또한 같은 이유로 베르사유 조약에 찬성했는데, 이는 조약을 거부할 경우 프랑스가 라인란트 점령 지역을 합병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2] 마르크스는 중앙당의 결속에 힘썼다.
1921년 우익 테러 단체 오르가니자치온 콘술에 의해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가 암살된 후, 마르크스는 1921년 9월 27일 중앙당 라이히스타크 의원단 대표가 되었고, 1922년 1월 17일에는 당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중앙당 소속 총리 요제프 비르트가 추진한 "이행 정책"(Erfüllungspolitikde)을 지지했다. 이는 베르사유 조약,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배상금을 가능한 한 준수하려고 시도하여 이를 충족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보여주려는 목적이었다.[3] 독립 총리 빌헬름 쿠노는 프랑스와 벨기에의 루르 점령에 대한 시민 불복종을 동원하는 데 마르크스의 도움을 받았다. 그런 다음 마르크스는 독일 인민당(DVP)의 구스타프 슈트레스만이 이끄는 제1차 슈트레스만 내각인 대연정으로 쿠노 내각을 대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923년 11월 제2차 슈트레스만 내각이 붕괴되었을 때, 라이히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마르크스에게 정부 구성을 요청했다.[2]
2. 3. 2. 제1차 세계 대전과 바이마르 공화국
제1차 세계 대전 중 마르크스는 영토적 이득 없이 협상을 통한 평화를 요구한 1917년 라이히스타크 평화 결의안을 지지했다. 이는 당시 라인란트 독일 중앙당 당원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던 입장이었다. 그는 확장주의나 승리에 의한 평화가 아닌 강화를 통한 평화를 주장했다.독일 제국이 붕괴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선 후, 마르크스는 1919년 바이마르 헌법을 제정한 바이마르 국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1920년부터 1932년까지 바이마르 공화국 라이히스타크 의원을 지냈다. 비록 1918-19년 독일 혁명이 호엔촐레른 왕가를 전복시킨 것을 비판적으로 보았지만, 새로운 공화국 체제를 지지했다.[1] 그는 또한 종교와 관계없이 시민권을 보장한 바이마르 헌법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는 종교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던 이전 독일 제국 헌법과 대비되는 점이었다.
마르크스는 라인란트의 분리주의 움직임에 반대했으며, 1918년 12월 라인란트 공화국 수립 시도에도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연합국의 라인란트 점령 시기에도 라인란트가 독일에서 분리되는 것에 반대했다. 이러한 입장의 연장선상에서, 그는 1919년 여름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소수의 중앙당 의원 중 한 명이었다. 이는 조약 거부 시 프랑스가 라인란트 점령 지역을 합병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2]
1921년 우익 테러 단체 오르가니자치온 콘술에 의해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가 암살되자, 마르크스는 그해 9월 27일 중앙당 라이히스타크 의원단 대표가 되었고, 1922년 1월 17일에는 당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중앙당의 결속을 위해 노력했으며, 요제프 비르트 총리가 추진한 이른바 "이행 정책"(Erfüllungspolitikde)을 지지했다. 이 정책은 베르사유 조약,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배상금 조항을 가능한 한 준수하려 시도함으로써 그 이행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을 보이려는 목적을 가졌다.[3]
빌헬름 쿠노 총리가 프랑스와 벨기에의 루르 점령에 맞서 시민 불복종 운동을 벌일 때 마르크스는 이를 도왔다. 이후 마르크스는 쿠노 내각을 독일 인민당(DVP)의 구스타프 슈트레스만이 이끄는 대연정(제1차 슈트레스만 내각)으로 교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23년 11월 제2차 슈트레스만 내각이 붕괴하자,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대통령은 마르크스에게 차기 정부 구성을 요청했다.[2]
정치적으로 마르크스는 냉정하고 온건한 성향을 보였으며, 타협점을 잘 찾고 불필요하게 적을 만들지 않는 인물로 평가받았다.
2. 3. 3. 총리 재임
1923년 11월 30일,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내각이 붕괴하자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대통령의 지명으로 빌헬름 마르크스는 첫 내각을 구성했다. 이는 바이마르 공화국 수립 후 4년 만에 들어선 10번째 내각이었다. 마르크스는 중앙당, 우익 자유주의 정당인 독일 인민당(DVP), 보수적인 가톨릭 정당인 바이에른 인민당(BVP), 중도좌파 자유주의 정당인 독일 민주당(DDP)을 기반으로 소수 내각인 제1 마르크스 내각을 이끌었다. 당시 독일은 초인플레이션이 정점에 달하고 라인란트 분리주의 운동과 좌우익 주 정부의 도전으로 중앙 정부의 권위가 흔들리는 등 극심한 재정 및 경제 위기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마르크스 내각은 1923년 12월, 정부가 "국민과 라이히(Reich, 독일 제국)의 곤경을 고려하여 필요하고 긴급하다고 판단되는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권한 부여 법(Enabling Act)을 통과시켰다.[4] 이를 바탕으로 렌텐마르크 도입을 통한 통화 안정화, 재정 통합, 바이에른 주 우익 정부와의 갈등 해결, 점령된 라인란트 지역의 긴장 완화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1] 또한 1924년 1월 엠밍거 개혁을 통해 독일의 배심원 재판 제도를 판사와 평의원이 함께 참여하는 혼합 시스템으로 변경했으며, 이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회 정책 측면에서는 공무원을 위한 가족 수당 제도를 도입했다.[5] 마르크스는 긴축 재정을 실시하고 예산 및 인원 감축, 새로운 조세 제도 도입을 통해 경제 안정화에 성공했으며, 1924년 2월에는 계엄령을 해제했다.1924년 5월 선거 이후, 6월 3일 제2 마르크스 내각이 구성되었다. 이 내각 역시 중앙당, DVP, DDP로 이루어진 소수 정부였으며, 연합국과의 관계 개선 및 서부 점령 지역에 대한 통제권 회복에 주력했다. 8월에는 독일의 전쟁 배상금 문제를 다룬 다우에스 계획에 서명하여 외교적 위기를 해결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1924년 12월 라이히스타크 선거에서 의석을 줄인 후 내각 구성에 실패하여 12월 15일 사임했고, 1925년 1월 15일 무소속의 한스 루터가 총리직을 맡을 때까지 임시로 직무를 수행했다.[1]
총리직에서 물러난 직후인 1925년 2월, 마르크스는 프로이센 자유주의 수상으로 취임했으나, 에베르트 대통령의 사망으로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곧 사임했다. 중앙당 후보로 나섰으나, 협력을 기대했던 바이에른 인민당 등 가톨릭 세력이 파울 폰 힌덴부르크 지지로 돌아서면서 근소한 차이로 낙선했다. 이후 정계 은퇴를 고려하기도 했으나, 1926년 1월 26일 한스 루터의 제2차 내각에서 사법장관 겸 점령지역 장관으로 임명되어 다시 정부에 참여했다.[1]

루터 내각이 국기 문제로 붕괴하자,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의 추천과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임명으로 1926년 5월 17일 다시 총리직에 올라 제3차 마르크스 내각을 구성했다.[1] 이 내각은 이전 연정 파트너였던 중앙당, DVP, DDP, BVP로 구성되었다. 루터 내각 붕괴의 원인이었던 구 제국 깃발 게양 허용 법령을 폐지하지는 않았으나,[8] 1926년 6월 옛 독일 통치 왕가의 자산을 보상 없이 몰수하는 국민투표가 부결되는 상황 속에서도 내각을 유지했다.[9] 이 시기 마르크스 내각은 독일의 국제 연맹 가입을 성공시켰고, 국방군을 "국가 안의 국가"처럼 운영하던 육군 총사령관 한스 폰 제크트를 사퇴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926년 12월 17일, SPD의 필립 샤이데만이 독일 국방군과 소련 적군 간의 비밀 군사 협력 관계(라팔로 조약 관련)를 폭로하면서 제기된 불신임 투표에서 패배하여 총리직에서 물러났다.[10]

1927년 1월, 마르크스는 이전 연정 파트너에 우익 독일 국가인민당(DNVP)을 추가하여 제4차 마르크스 내각을 구성했다. 이 내각은 1922년 제정된 공화국 보호법을 연장했지만,[11] DNVP의 요구를 수용하여 연장 기간을 2년으로 제한하는 타협을 보였다. 또한 1927년 4월 14일 근로시간에 관한 법률과 7월 16일 포괄적인 실업 보험 제도를 수립한 '고용 서비스 및 실업 보험에 관한 법률'(Gesetz über Arbeitsvermittlung und Arbeitslosenversicherungde)을 통과시키는 등 사회 정책 분야에서 중요한 진전을 이루었다.[1] 정부는 필수 생필품 가격에 따라 지역별로 관리되던 빈민 구호금을 표준화하려고 시도했으며, 독일은 장기 출산 휴가에 관한 워싱턴 협정에 서명한 최초의 주요 산업 국가가 되었다.[5]
그러나 연정은 학교법(Reichsschulgesetzde) 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결국 붕괴되었다. 표면적으로는 DVP에 책임이 있었지만, 실제로는 요제프 비르트, 아담 슈테거발트, 테오도르 폰 규에라르 등 중앙당 내부의 반대가 주요 원인이었다. 마르크스는 1928년 6월 12일에 사임했다. 비상 프로그램을 잠시 실행한 후, 1928년 6월 29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에 의해 공식적으로 총리직에서 해임되었다.[1] 총 4차례에 걸쳐 총리직을 수행한 마르크스는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재임한 총리로 기록되었다.[1]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외무장관은 일관되게 독일 인민당의 슈트레제만이 맡았으며, 그의 외교 정책은 의회 제1당인 사회민주당의 지지를 받기도 했다.
2. 3. 4. 1925년 대통령 선거
1925년 2월, 마르크스는 중앙당의 요청으로 프로이센 주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같은 달 말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3월 18일, 중앙당은 마르크스를 1925년 독일 대통령 선거의 후보로 지명했고, 그는 대통령 선거 출마를 위해 프로이센 주총리직을 사임했다.1차 투표에서 마르크스는 중앙당 단독 후보로 나서 약 4백만 표를 얻었다. 결선 투표에서는 중앙당, DDP, 독일 사회민주당으로 구성된 바이마르 연정의 단일 후보로 나섰다. 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의 영웅이었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에게 1,370만 표 대 1,460만 표라는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다.[1]
마르크스의 패배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중앙당의 자매 정당 격인 바이에른 인민당이 사회민주당과의 연대에 반발하며 힌덴부르크 지지로 돌아선 것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6] 일각에서는 독일 공산당의 에른스트 탈만이 2차 투표까지 완주하여 좌파 표를 분산시킨 것이 패인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역사가 피터 프리체는 공산당이 바이마르 공화국 자체에 적대적이었기 때문에 마르크스를 지지할 가능성은 애초에 비현실적이었다며, 바이에른 인민당의 이탈이 패배의 핵심 원인이라고 반박했다.[7]
대통령 선거 패배 후, 마르크스는 다시 프로이센 주총리직에 복귀하려 했으나 안정적인 내각 구성에 실패하여 결국 사임했다.[12] 1925년 4월, 오토 브라운이 새로운 프로이센 주총리가 되었다.[1]
2. 4. 은퇴 이후
1928년 독일 연방 선거에서 독일 중앙당이 부진한 성적을 거두자, 빌헬름 마르크스는 1928년 6월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같은 해 12월 8일에는 독일 중앙당 의장직에서도 사퇴했다. 이후 그는 여러 협회와 시민 단체 활동에 집중했다. 1932년 라이히스탁(독일 국가의회) 의원직을 사퇴하며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했다.[1][12]1933년 나치 독일 시대가 시작되자, 마르크스는 과거 의장을 맡았던 '독일 가톨릭 인민 협회' 관련 재판에 기소되기도 했으나, 1935년 그에 대한 혐의는 취하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도 본에 계속 거주하다가 1946년 8월 5일 사망했다.[1] 그는 쾰른의 멜라텐 묘지에 안장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Marx, Wilhelm
http://www.deutsche-[...]
Bayerische Nationalbibliothek
2015-07-13
[2]
웹사이트
Wilhelm Marx
https://www.konrad-a[...]
2024-10-15
[3]
웹사이트
Was ist Erfüllungspolitik?
https://www.zeitklic[...]
2023-01-28
[4]
서적
Weimar 1918–1933
C.H. Beck
[5]
서적
Foundations of the Welfare State
Routledge
[6]
학술지
The behaviour of political parties and MPs in the parliaments of the Weimar Republic
SagePub
[7]
학술지
Presidential Victory and Popular Festivity in Weimar Germany: Hindenburg's 1925 Election
[8]
웹사이트
Der Flaggenstreit
https://www.dhm.de/l[...]
2023-01-26
[9]
웹사이트
Volksentscheid über die Fürstenenteignung
https://weimar.bunde[...]
2023-01-28
[10]
웹사이트
Der Streit um die Reichswehr und der Sturz des Kabinetts
https://www.bundesar[...]
2023-01-27
[11]
웹사이트
Vor 100 Jahren: Reichstag verabschiedet Gesetz zum Schutz der Republik
https://www.bundesta[...]
2023-01-28
[12]
웹사이트
Biografie Wilhelm Marx (German)
https://www.dhm.de/l[...]
Deutsches Historisches Museum
2015-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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