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마르코 국립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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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산마르코 국립박물관은 이탈리아 피렌체에 위치한 박물관으로, 13세기 실베스트로회 수도원에서 시작되어 도미니코회 수도원으로 전환된 후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아 재건되었다. 르네상스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프라 안젤리코의 프레스코화, 프라 바르톨로메오의 작품, 도서관 등을 소장하고 있다. 1808년 세속화 이후 박물관으로 개관하여 프라 안젤리코의 작품을 중심으로 전시하고 있으며,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거주했던 공간도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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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마르코 국립박물관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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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정보 | |
이름 | 산마르코 국립 미술관 |
원어 이름 | Museo nazionale di San Marco |
위치 | 이탈리아 피렌체 산마르코 광장 3, 50121 |
유형 | 미술관, 사적지 |
개관 | 1869년 |
웹사이트 | 공식 웹사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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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산마르코 국립박물관의 역사는 13세기 말, 실베스트린 수도회를 위한 건물 건축으로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수도원이자 교구 교회의 역할을 겸했으나, 1418년 수도회 규칙 이행 문제로 실베스트린 수도사들은 이곳을 떠나게 되었다.
이후 피렌체의 유력 가문인 메디치 가문의 코시모 데 메디치의 개입이 중요해졌다. 그의 후원과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중재를 통해 1437년, 피에솔레에서 온 개혁 도미니코회 수도사들이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당시 수도원 건물은 매우 노후하여, 코시모 데 메디치는 건축가 미켈로초에게 르네상스 건축 양식에 따른 대대적인 재건축을 의뢰했다. 1438년부터 시작된 공사는 약 10여 년간 진행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수도원은 현대적이고 기능적인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특히 코시모는 수도원 내부에 개인 도서관을 마련하여 인문주의 연구의 중심지 역할도 수행하도록 했다.
재건축과 거의 동시에 수도사 화가였던 프라 안젤리코는 1438년부터 1446년경까지 수도원 곳곳에 프레스코화를 그렸다. 그의 작품들은 수도사들의 신앙생활과 묵상을 돕는 동시에, 오늘날 박물관의 가장 중요한 소장품으로 남아있다. 대표작으로는 2층 복도의 ''수태고지'' 등이 있다.
15세기 말에는 개혁가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수도원장으로 활동하며 피렌체 사회와 교황청을 강하게 비판하다 1498년 화형에 처해지는 등, 산마르코는 피렌체 역사의 중요한 무대가 되기도 했다.
19세기 초 나폴레옹 시대에 수도원은 처음으로 세속화되었고, 이후 이탈리아 왕국 성립 후 1866년 국유화되었다. 1869년 국가 기념물로 지정되고 복원 작업을 거쳐 국립박물관으로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20세기에는 우피치 미술관과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있던 프라 안젤리코의 주요 제단화들이 이곳으로 옮겨져, 명실상부한 프라 안젤리코 전문 미술관으로서의 위상을 확립했다.
2. 1. 실베스트로회 수도원 (13세기-1418)
수도원의 건설은 1300년 이전에 시작되었으며, 원래 실베스트리니 신도회를 위해 지어졌다. 초기에는 수도원으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교구 교회의 역할도 함께 수행했다.1418년, 당시 수도원에 있던 실베스트린 수도회 수도사들은 수도원 규칙의 퇴폐를 이유로 비난받았고, 결국 수도원에서 철수하라는 권고를 받게 되었다.
2. 2. 도미니코회 수도원으로의 전환 (1418-1437)
원래 이 건물은 1300년 이전에 실베스트리니 신도회를 위해 지어졌으며, 수도원이자 교구 교회의 역할도 수행했다. 그러나 1418년, 수도회 규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은 실베스트리니 수도사들은 수도원에서 나가라는 권고를 받았다.이후 코시모 데 메디치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그는 이미 1420년에 프란체스코회의 보스코 아이 프라티 수도원 건설을 지원한 경험이 있었고, 1434년 피렌체 추방에서 돌아온 후에는 피렌체에 도미니코회 교단을 정착시키려는 의지를 보였다.
결국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직접적인 중재와 바젤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수도원은 1437년에 피에솔레에서 온 개혁 도미니코회 수도사들에게 공식적으로 넘어갔다. 당시 이 도미니코회는 훗날 피렌체의 안토니누스로 알려지게 되는 안토니노 피에로치가 이끌고 있었다. 기존의 실베스트리니 신도회는 산 조르조 알라 코스타 수도원으로 이전했다.
도미니코회가 수도원을 넘겨받았을 때, 건물은 매우 낡고 허물어져 가는 상태였다. 수도사들은 약 2년 동안 습기 찬 방에서 지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코시모 데 메디치는 다시 한번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자신의 비용으로 건축가 미켈로초에게 새로운 수도원 건물 건축을 의뢰했다. 미켈로초는 약 10년(1436-1446)에 걸쳐 기존 건물의 구조를 활용하면서도 현대적이고 기능적인 수도원을 설계하고 건설했다. 그는 1층의 방들을 조화롭게 배치된 회랑 주변으로 연결하고, 건물의 층고를 높여 2층에 많은 수의 수도실을 갖춘 기숙사를 만들었다.[1] 이 대규모 건축 사업은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널리 알리는 데에도 기여했다.

2. 3. 메디치 가문의 후원과 수도원 재건 (1437-1452)
1418년, 기존에 수도원을 사용하던 실베스트린 수도회 수도사들은 수도원 규칙의 퇴폐를 이유로 철수 권고를 받았다. 이후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중재와 바젤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1437년 수도원은 피렌체의 안토니누스가 이끌던 피에솔레의 개혁 도미니코회 수도사들에게 정식으로 이전되었다.이 과정에서 메디치 가문의 코시모 데 메디치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그는 1420년에 이미 프란체스코회의 보스코 아이 프라티 수도원을 후원한 경험이 있었고, 1434년 피렌체 추방에서 돌아온 후 도미니코회를 피렌체에 정착시키려는 의지를 보였다. 실베스트린 수도회는 산 조르조 알라 코스타 수도원으로 이전했지만, 도미니코회가 넘겨받은 산마르코 수도원 건물은 매우 낡고 허물어져 수도사들은 2년간 열악한 환경에서 지내야 했다.
이에 1437년, 코시모 데 메디치는 가문의 후원을 받는 건축가 미켈로초에게 당시 최신 르네상스 건축 양식으로 수도원 재건을 의뢰했다. 미켈로초는 13세기 말에 지어진 기존 실베스트린 수도원의 벽 구조를 능숙하게 활용하여[1], 조화롭고 기능적인 수도원 건축을 계획했다. 재건 공사는 1438년에 시작되어 약 5년 만인 1443년 주현절 밤, 교황 에우제니오 4세 등이 참석한 가운데 봉헌식을 가졌으나, 일부 공사는 1452년까지 계속되었다. 이 새로운 수도원은 메디치 리카르디 궁전과 산 로렌초 성당과 함께 '메디치 지구'라 불리는 피렌체 북부 지역의 주요 건물이 되었으며,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상징하는 건축물로 자리 잡았다. 특히 1439년 피렌체 공의회 개최와 맞물려 이러한 후원은 더욱 부각되었다.
바사리는 예술가 열전에서 코시모가 수도원 재건에 4만 피오리니 이상을 투자했다고 기록했다. 미켈로초는 1439년부터 1444년까지 작업을 진행하며 간결하면서도 우아하고 기능성을 갖춘 건물을 설계했다. 흰색 석고로 마감된 벽면과 두 개의 회랑(산 안토니노 회랑, 산 도메니코 회랑)을 중심으로 공간이 구성되었다. 1층에는 참사회 회의실, 식당, 손님 접대 공간 등이 배치되었고, 2층에는 수도사들의 개인 독방들이 마련되었다. 북쪽 회랑, 참사회 회의실, 공동 침실은 1440년-1441년에, 남쪽 공동 침실은 1442년에 완공되었다.[1]
특히 2층의 도서관은 아치형 천장과 두 줄의 열주로 세 부분으로 나뉜 삼랑식 구조로 설계되었다. 많은 창문을 통해 자연광이 풍부하게 들어와 수도사들의 연구, 독서, 필사본 제작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다. 이곳에서는 아뇰로 폴리치아노나 피코 델라 미란돌라와 같은 인문주의자들이 메디치 가문이 수집한 귀중한 그리스어 및 라틴어 고문서를 연구하기도 했다.
2. 4. 프라 안젤리코와 프레스코화 (1438-1446)
1437년 코시모 데 메디치는 메디치 가문이 후원하는 건축가 미켈로초에게 수도원 재건축을 의뢰했다. 당시 최신 르네상스 건축 양식으로 설계된 수도원은 1438년에 착공하여 5년 뒤인 1443년 주현절 밤,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참석한 가운데 봉헌되었다. 이 재건축에는 바사리의 예술가 열전에 따르면 4만 피오리니 이상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미켈로초는 1439년부터 1444년까지 작업을 진행했으며, 간소하면서도 우아하고 기능적인 건물을 완성했다. 벽면은 흰색 석고로 칠해졌고, 1층에는 주교좌 성당 찬미 회의실, 식당, 객실 등이, 2층에는 수도사들의 독방이 마련되었다.수도원 상층의 수도사 숙소는 프라 안젤리코가 1439년부터 1443년까지 그린 프레스코화로 유명하다. 그는 44개의 수도사 방이 있는 세 개의 복도 전체에 프레스코화를 그렸는데, 이는 조수들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그의 완전한 작품으로 여겨진다.[2] 각 방에는 방을 사용하는 수도사가 묵상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생애와 수난을 주제로 한 프레스코가 그려져 있다.
복도에도 프라 안젤리코의 중요한 프레스코 세 점이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수태고지''이며, 다른 두 작품은 ''십자가를 숭배하는 성 도미니크''와 ''그림자의 성모'' (''신성한 대화'')이다.

세 개의 복도는 각각 다른 특징을 지닌다.
- '''첫 번째 복도 (아버지들의 복도):''' 1437년에 가장 먼저 완성된 공간으로, 미켈로초가 처음 정착한 도미니크 수도사들을 위해 지었다. 복도 왼쪽의 프레스코는 프라 안젤리코가 직접 그렸고, 오른쪽은 그의 디자인을 바탕으로 조수들이 주로 작업했다.
- '''수련생 복도:''' 아버지들의 복도보다 조금 늦게 지어졌으며, 수련생들을 위해 마련되었다. 방의 크기가 더 크며, 모든 방에는 ''십자가를 숭배하는 성 도미니크'' 프레스코가 그려져 있다. 단, 성 도미니크가 기도하는 자세는 각기 다르다. 복도 끝에는 15세기 말 프라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사용했던 방이 있으며, 그의 유물(외투, 십자가 등)이 전시되어 있다.
- '''세 번째 복도 (평신도 형제 및 손님용):''' 코시모 데 메디치를 위해 마련된 두 개의 방이 포함되어 있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1443년 수도원 축성식 때 이곳에 머물렀다. 이 복도의 프레스코는 다른 곳보다 더 묘사적이고 색상이 밝으며, 구도가 복잡하고 조수들의 참여가 더 두드러진다.
이 수도원 재건과 프레스코 작업은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례이며, 1439년 피렌체 공의회 개최와 맞물려 메디치 가문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2. 5. 사보나롤라 시대 (1489-1498)

프라 안젤리코, 안토니노 피에로치, 프라 바르톨로메오 외에도 이 수도원에는 1489년부터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거주했다. 수도원장이 된 후 피렌체 주민들의 사치스럽고 음란한 모습을 격렬하게 비난하기 시작했고, 보르자 가문 출신의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이끄는 교황청과 대립하다가 마침내 1498년 시뇨리아 광장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2. 6. 수도원의 세속화와 미술관 개관 (1808-현재)
유럽의 많은 수도원들과 마찬가지로, 산마르코 수도원 역시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제국 시기의 격동 속에서 세속 권력에 의해 재산을 몰수당하는 과정을 겪었다. 산마르코는 1808년 나폴레옹에 의해 처음 접수되었고, 나폴레옹 몰락 후 잠시 도미니코 수도회에 반환되었으나, 1866년 7월 7일 새롭게 탄생한 이탈리아 왕국의 법령에 따라 다시 대부분의 재산이 몰수되어 국유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도미니코 수도회는 교회 건물과 성 도미니크 수도원에 면한 일부 방들만을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가톨릭 학자 아리고 레바스티(1886-1973)가 기증한 10,000권 이상의 영성 관련 서적을 기반으로 1979년 그의 이름을 딴 스피리투알리타 도서관이 설립될 공간이 마련되었다.1869년, 수도원 건물은 국가 역사 기념물로 지정되었고, 복원 작업과 일부 조정을 거쳐 박물관으로 일반에 공개되었다. 이 시기에 화가 가에타노 비안키에 의해 프라 안젤리코의 프레스코화가 복원되었다. 1906년에는 19세기 도시 정비 과정에서 철거된 건물들 중 건축적 가치가 있는 유물들을 보존하기 위해 박물관으로 옮겨와 별도의 "피렌체 고대 박물관"(Museo di Firenze anticaita)을 조성하기도 했다.
1922년, 당시 관리자였던 조반니 포지의 노력으로 우피치 미술관과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던 프라 안젤리코의 주요 작품들이 산마르코 박물관으로 대거 이관되었다. 이를 통해 산마르코 국립박물관은 오늘날까지 프라 안젤리코의 가장 중요한 작품들을 소장한 곳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1934년부터 1977년까지 피렌체 시장을 역임했던 조르조 라 피라가 수도원 내부에 여러 차례 거주하기도 했다.
1966년 피렌체를 덮친 대홍수 당시, 산마르코 박물관은 피렌체 북부에 위치하고 아르노강에서 비교적 떨어져 있으며 지대가 약간 높아 다른 주요 미술관들에 비해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1979년부터 1983년까지는 디노 디니의 주도로 개보수 공사가 진행되었고, 옛 객실 공간은 프라 바르톨로메오의 작품들을 전시하기 위한 공간으로 새롭게 단장되었다. 2006년에는 "홍수의 피해를 입은 작고 위대한 보물"이라는 제목의 특별 전시를 통해 1966년 홍수 이후 복원된 작품들을 선보였다. 2007년에는 피렌체 미술관 특별 감독국과 피렌체 저축 은행 재단이 구입한 ≪산마르코 제단화≫의 일부였던 성인상 패널 두 점이 박물관 소장품에 추가되었다.
3. 주요 공간 및 작품
산마르코 국립박물관은 15세기 피렌체 르네상스 건축의 걸작으로 꼽히는 옛 도미니코회 수도원 건물에 자리 잡고 있다. 건축가 미켈로초가 메디치 가문의 수장 코시모 데 메디치의 후원을 받아 설계했으며, 수도원의 기능성과 르네상스의 미학적 이상을 조화롭게 구현했다.[1] 박물관 내부는 크게 1층과 2층으로 나뉘며, 각 공간은 수도원 생활과 관련된 역사적 의미와 함께 중요한 예술 작품들을 품고 있다.
1층은 수도원 생활의 중심이었던 산 안토니노 회랑을 비롯하여 순례자들을 맞이하던 숙소, 수도사들이 함께 모이던 참사회 회의실, 식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회랑과 각 방에는 프라 안젤리코를 비롯한 여러 화가들의 프레스코 벽화가 남아 있어 방문객을 맞이한다. 순례자 숙소는 현재 프라 안젤리코의 주요 패널화 작품들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며[1], 세면대 방과 인접한 공간에서는 프라 바르톨로메오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소식당에는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유명한 ''최후의 만찬'' 프레스코화가 있다.
2층은 수도사들의 개인적인 신앙 공간이었던 독방들과 르네상스 시대의 중요한 도서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2층 복도와 44개의 각 독방에는 프라 안젤리코와 그의 조수들이 그린 프레스코 연작이 남아있어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이 프레스코화들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수난을 주제로 하며, 수도사들의 묵상을 돕기 위해 그려졌다.[2] 2층에는 또한 코시모 데 메디치가 후원하여 설립한 아름다운 도서관[3][4]과, 피렌체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수도사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생활했던 방도 보존되어 있다.
각 공간과 주요 작품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아래 하위 섹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
3. 1. 1층
박물관은 수도원의 가장 오래된 부분에 위치하며 전체 공간의 약 절반을 차지한다. 건물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확장되어 현재는 전체 블록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일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수사들이 사용하고 있다. 이 건물은 중세 실베스트린 수도원 터 위에 건축가 미켈로초가 코시모 데 메디치의 특별한 요청과 비용 지원으로 건설한 것이다. 이는 당시 안토니노 피에로치가 이끌던 피에솔레의 개혁 도미니코회를 수용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미켈로초는 약 10년(1436년~1446년)에 걸쳐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기리는 현대적이고 기능적인 수도원 건축을 완성했으며, 13세기 말의 기존 실베스트린 수도원 구조를 활용했다.[1] 1층에는 산 안토니노 회랑을 중심으로 여러 방들이 배치되어 있다.3. 1. 1. 산 안토니노 회랑
교회 뒤편에 위치한 이 회랑은 방문객에게 균형 잡힌 수도원 건축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이는 질서정연하고 균형미를 갖춘 피렌체 르네상스 건축의 전형적인 예이다. 건축가 미켈로초가 코시모 데 메디치의 후원으로 1440년 이전에 건설하였다.[1]
회랑으로 들어서면 입구 맞은편에 프라 안젤리코가 그린 ''십자가에 경배하는 성 도미니코'' 프레스코화가 눈에 띈다. 본래 이 그림은 회랑을 장식하는 유일한 그림이었으나, 17세기에 산마르코 수도사들이 성 안토니누스를 기리기 위해 당대 유명 피렌체 화가들에게 의뢰하여 ''성 안토니누스의 생애 장면''을 담은 루네트들을 추가하면서 회랑의 모습이 변화했다.
회랑에서 가장 오래된 프레스코 장식은 프라 안젤리코가 직접 그린 다음 5개의 르네타(lunette, 반원형 벽화)이다.
- ≪침묵을 명하는 베로나의 성 베드로≫
- ≪도미니코회의 규칙을 나타내는 성 도미니코≫
- ≪『신학대전』을 가진 성 토마스 아퀴나스≫
- ≪두 명의 도미니코회 수도사에 의해 영접되는 순례자 모습의 그리스도≫
- ≪자비의 그리스도≫
특히 북서쪽 모퉁이에는 프라 안젤리코의 중요한 작품인 ≪십자가형과 성 도미니코≫ 대형 프레스코화가 있다.
회랑의 다른 루네트 장식 대부분은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사이에 베르나르디노 포체티(Bernardino Poccetti)와 같은 화가들이 완성한 것이다.
3. 1. 2. 순례자 숙소
수도원 회랑의 오른쪽에서 들어갈 수 있는 이 큰 방은 산마르코 광장(Piazza San Marco) 쪽 건물 전체를 차지한다. 이 공간은 중세 시대에 실베스트린 수도사들이 수도원에 거주할 때부터 이미 존재했다. 15세기 수도원 재건 당시, 건축가 미켈로초는 이곳 전체를 교차 볼트로 덮고 건물의 층고를 높여 두 번째 수사들의 기숙사를 만들었다.[1] 내부에는 프라 안젤리코가 두 번째 문에 그린 프레스코화 ''도미니코회 수도사들이 환영하는 순례자 그리스도''에 언급된 것처럼 순례자들을 위한 병원도 있었다.[1]원래 이곳은 신분이 낮은 순례자들을 맞이하는 숙소로 사용되었으며(신분이 높은 순례자는 별도의 객실로 안내되었다), 오늘날에는 프라 안젤리코의 작품을 전시하는 주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피렌체의 여러 교회와 수도원에서 옮겨온 그의 중요한 패널화 작품들을 다수 소장하고 있으며, 대표적으로 『리나이올리의 벽감 제단』 등이 이곳에 전시되어 있다.[1]

3. 1. 3. 세면대 방과 프라 바르톨로메오 전시실
이 방은 원래 수도원의 세면대(Lavabo|라바보it)가 있던 곳으로, 회랑에서도 접근 가능하며 부엌 옆의 큰 식당 앞에 위치했다. 수도원 규칙에 따라 수도사들은 식사 전에 이곳에서 손을 씻는 정화 의식을 거쳤다. 입구 문 위에는 프라 안젤리코가 그린 프레스코화가 일부 훼손된 상태로 남아 있는데, 이는 부활을 암시하며 자신에게 영양을 공급받는 이들을 기다리는 '피에타'의 그리스도를 묘사한 것이다.오늘날 이 방과 과거 수도원의 부엌으로 사용되었던 인접한 방("스페사" 회랑 근처)에는 16세기 초 산 마르코 수도원에 머물렀던 또 다른 중요한 화가인 프라 바르톨로메오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의 본명은 바초 델라 포르타였으나, 1500년 25세의 나이로 도미니코회에 입회하면서 프라 바르톨로메오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는 당시 피렌체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사보나롤라에게 깊이 귀의하였고, 그 영향으로 이전에 그렸던 세속적인 주제의 작품들을 스스로 파괴하고 종교적인 주제의 그림만을 그리는 데 전념하게 되었다. 프라 바르톨로메오는 1517년 사망할 때까지 산 마르코 수도원에서 화실을 운영했다.
프라 바르톨로메오는 15세기 피렌체 화풍의 합리적이고 고전적인 특징을 바탕으로, 색 공간과 디자인을 더욱 자유롭게 사용하는 독자적인 예술 양식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그의 화풍은 젊은 라파엘로에게도 영감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면대는 수도원 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설로, 주로 식당 가까이에 배치되어 식사 전 정결 의식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산마르코의 이 세면대 공간은 14세기 후반에 지어진 외관을 오늘날까지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있다.
3. 1. 4. 참사회 회의실
구 참사회 회의실의 외부 모습은 노출된 석조 벽과 양쪽에 큰 창문이 있는 출입구가 특징이며, 이는 수도원의 14세기 부분에 해당함을 보여준다. 이 방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프라 안젤리코가 그린 대형 프레스코화인 '성인과 함께 있는 십자가형'이다.
이 프레스코화는 배경 복원 상태 때문에 다소 비현실적으로 보이는데, 원래 파란색이었던 배경이 현재는 회색과 빨간색으로 변색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안료가 떨어져 나가 밑바탕이 드러난 결과이다. 그림 내용은 십자가형 사건에 대한 집단적 성찰을 표현하는 듯하며, 역사적 인물뿐만 아니라 여러 종교 단체의 창립자들도 함께 묘사되어 있다.
3. 1. 5. 소식당
이 작은 방은 인접한 게스트 로지에 머무는 수도원 손님들을 위한 식당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17세기부터는 로지 내부에 위치한 병동에서 치료를 받던 아픈 수도사들을 위한 식당으로도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방은 수도원 건설 후 약 40년이 지난 1486년에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와 그의 조수들에 의해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었다. 대표적인 작품은 ''최후의 만찬''이다. 오늘날 이 방에는 ''최후의 만찬''보다 약간 늦게 제작된 델라 로비아 공방의 유약 테라코타 부조 작품들도 소장되어 있다.
3. 2. 2층
2층에는 수도사들이 거주했던 독방들과 도서관이 자리 잡고 있다. 건축가 미켈로초는 이곳의 벽면을 매끄럽게 조성하였으며, 프라 안젤리코가 1438년부터 1446년경까지 이 벽면에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림을 그려 장식했다. 이곳의 모든 프레스코화는 1976년부터 1983년에 걸쳐 복원 작업을 거쳤다.3. 2. 1. 수도사들의 방
상층에는 수도사들의 숙소가 있다. 이 숙소는 1439년에서 1443년 사이에 프라 안젤리코가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린 44개의 수도사 방이 있는 세 면의 회랑을 둘러싸고 있는 세 개의 복도로 구성되어 있다. 계단을 올라 2층으로 올라가면 눈앞에 프라 안젤리코가 1440년부터 1450년경에 걸쳐 제작한 걸작인 ≪수태고지≫ 프레스코화가 나타난다. 이는 프라 안젤리코가 수도사 방 밖 복도 벽에 그린 세 개의 프레스코 중 하나이다(다른 두 개는 ''십자가를 숭배하는 성 도미니크''와 ''그림자의 성모''로 알려진 ''신성한 대화''). 수도사들은 도미니크 규칙에 따라 정해진 시간과 방식으로 공동 기도를 했다. 각 방에는 방을 사용하는 수도사만이 홀로 묵상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생애와 수난에 관한 프레스코가 그려져 있다.[2]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이 프레스코 연작은 조수들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프라 안젤리코의 완전한 작품으로 여겨진다. 프라 안젤리코는 이 외에도 같은 주제의 수태고지 작품 세 점을 더 제작했으며, 이는 각각 프라도 미술관, 코르토나, 산 조반니 발다르노에 현존한다.=== 첫 번째 복도 (아버지들의 복도) ===
계단을 오르면 바로 보이는 복도로, 미켈로초가 수도원에 막 정착한 도미니크 수도사들을 수용하기 위해 처음 지었다. 1437년에 이미 첫 20개의 방이 완성되었으며, 복도 양쪽에 배치되었다. 곧이어 프라 안젤리코가 이 방들에 프레스코화를 그렸다. 왼쪽(북쪽 면) 독방의 프레스코는 프라 안젤리코가 전적으로 그렸지만, 오른쪽 독방의 프레스코는 그가 디자인했지만 대부분 조수들이 그린 것이다. 루네타(반달형) 장식에는 그리스도 생애의 여러 장면이 표현되어 있다.
위치 | 방 번호 | 프레스코 제목 | 비고 |
---|---|---|---|
왼쪽 (북쪽 면) | 1 | 나를 만지지 마시오 | 프라 안젤리코 작 |
2 | 그리스도의 애도와 성 도미니코 | ||
3 | 수태고지 | 프라 안젤리코 작 | |
4 | 그리스도의 십자가형과 성 도미니코, 성 예로니모 | ||
5 | 아기 예수의 경배와 알렉산드리아의 성녀 카테리나, 베로나의 성 베드로 | ||
6 | 그리스도의 변용 | 프라 안젤리코 작 | |
7 | 그리스도의 조롱과 성모, 성 도미니코 | 프라 안젤리코 작 | |
8 | 그리스도의 부활 | ||
9 | 성모 대관 | 프라 안젤리코 작 | |
10 | 성전 봉헌 | 프라 안젤리코 작 | |
11 | 성모자,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 토마스 | ||
오른쪽 (남쪽 면, 회랑 방향) | 15 | 십자가를 숭배하는 성 도미니코 | |
16 | 십자가와 성모 | ||
17 | 십자가와 성모, 성 도미니코, 천사 | ||
18 | 그리스도의 세례 | ||
19 | 그리스도의 십자가형, 성모, 막달라 마리아, 성 도미니코 | ||
20 | 그리스도의 애도와 성모, 성 도미니코 | ||
21 | 그리스도의 채찍질과 성모, 성 도미니코 | ||
22 |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 | ||
23 | 그리스도의 십자가형과 성모, 베로나의 성 베드로 | 베노초 고촐리 작 | |
24 | 그리스도의 십자가형과 성모, 베로나의 성 베드로 | ||
25 | 변방의 그리스도 |
''그림자의 성모''라고 불리는 프레스코화는 독방 24와 25 사이의 복도에 있으며, 옥좌에 앉은 성모자상과 성인들(성 도미니코, 코스마와 다미아노, 성 마르코, 복음사가 요한, 토마스 아퀴나스, 로렌초, 베로나의 피에트로)을 묘사하고 있다.
=== 수련생 복도 ===
이 숙소는 수련생을 위해 마련되었으며, 아버지들의 숙소보다 조금 늦게 지어졌다. 회랑을 바라보는 정면에서 볼 수 있듯이, 복도 끝에 있는 세 개의 방과 인접해 있으며, 15세기 말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사용하기 전에는 옷장이었다. 수련생들이 점차 좁은 개인 공간에 익숙해지도록 하기 위해 아버지들의 방보다 크게 만들어졌으며, 모든 방에는 동일한 주제인 ''십자가를 숭배하는 성 도미니크'' 프레스코가 그려져 있다. 프레스코의 유일한 차이점은 성 도미니크가 보여주는 다양한 기도 방식에 따른 무릎 꿇은 자세이다. 소위 원장의 방으로 올라가기 전 마지막 두 개의 방에는 사보나롤라의 외투와 묵상용 십자가와 같은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위치 | 방 번호 | 프레스코 제목 | 비고 |
---|---|---|---|
왼쪽 (서쪽 면) | 26 | 산상 설교, 그리스도의 유혹 | 두 개의 공간으로 구성, 아마도 고촐리 작 |
27 | 유다의 배신,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 | 두 개의 공간으로 구성, 아마도 고촐리 작 | |
28 |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 아마도 고촐리 작 | |
29 | 성찬의 성사 | ||
30 |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과 성 롱기누스, 두 명의 유대인 사제, 성모, 막달라 마리아 | ||
31 |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과 성모, 성 도미니코, 성 토마스 | ||
32 |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 | ||
오른쪽 (서쪽 면) | 33 |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 | |
34 |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 | ||
35 |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 | ||
36 |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과 성 마르코, 백인대장, 성 도미니코, 마리아와 마르타 | ||
38 |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과 성 코스마, 다미아노 | 코시모 데 메디치 전용 앞방 (메디치 가문 수호성인) | |
39 | 동방 박사의 경배 | 코시모 데 메디치 전용 독방 (프라 안젤리코와 고촐리 등 조수들 작) |
=== 세 번째 복도 방 ===
세 번째 복도 방은 평신도 형제와 손님을 위해 지정된 공간이었다. 코시모 데 메디치를 위해 마련된 두 개의 방(38, 39번 방)이 있으며, 이 방에는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1443년 주현절 밤에 새로운 교회를 축성하기 위해 방문했을 때 머물기도 했다. 이 복도의 프레스코는 다른 방들과 몇 가지 차이점을 보인다. 언어가 더 묘사적이고 색상이 더 밝으며, 구도는 더 복잡하고, 주인의 지도 아래 조수들의 기여가 더 두드러진다. 복도 안쪽에 있는 코시모 데 메디치 전용 독방 두 곳은 그가 기도를 위해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사용했던 특별한 공간이다. 앞방(38번)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과 성 코스마, 다미아노 (메디치 가문의 수호성인)''가 그려져 있고, 안쪽 방(39번)에는 프라 안젤리코와 고촐리를 포함한 조수들이 그린 ''동방 박사의 경배''가 있다. 이 복도 중앙에는 도서관이 있다.
=== 주요 프레스코 이미지 ===
3. 2. 2. 도서관
코시모 데 메디치는 산마르코 국립박물관의 도서관 건립을 적극 후원하였다. 그는 인문학자 니콜로 니콜리가 소장하고 있던 고전, 그리스어 및 라틴어 텍스트가 풍부한 방대한 장서를 1441년[3]에 구입하여 도서관의 기초를 마련했다. 또한, 코시모는 프라 안젤리코의 가까운 협력자였던 자노비 스트로치가 삽화를 그린 교회용 전례서 제작을 지원하기도 했다.도서관은 메디치 가문이 후원한 건축가 미켈로초에 의해 수도원 2층에 세워졌다. 미켈로초는 1439년부터 1444년까지 수도원 전체 재건 작업을 진행했으며, 도서관 역시 이 시기에 지어졌다. 도서관 내부는 넓고 밝은 공간으로 설계되었으며, 두 줄로 늘어선 돌기둥이 아치를 이루며 공간을 세 개의 통로로 나누는 삼랑식 구조를 갖추고 있다. 많은 창문을 통해 풍부한 자연 채광이 들어와, 수도사들의 연구와 독서, 필사본 제작에 이상적인 환경을 제공했다.
1444년에 문을 연 산마르코 도서관은 르네상스 시대에 처음으로 일반 대중에게 공개된 도서관 중 하나로 여겨진다. 설립 초기부터 코시모 데 메디치와 니콜로 니콜리의 후원자들은 이곳을 특정 개인을 위한 공간이 아닌, 공공의 지식 함양을 위한 인문학적 장서의 중심지로 만들고자 했다. 이는 피렌체 인문주의의 이상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도서관은 종교 서적과 세속 서적을 동등하게 중요하게 다루었다. 개관 당시 도서관에는 64개의 열람용 벤치와 400권이 넘는 장서가 비치되어 있었다. 코시모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특히 전통적인 분야의 코덱스(필사본)를 중심으로 장서를 꾸준히 확충해 나갔다.[3]
도서관의 장서는 훗날 교황 니콜라오 5세가 되는 토마소 사르차나의 지시에 따라 베스파시아노 다 비스티치가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교황 니콜라오 5세는 교황직에 오르기 전부터 도서관 설립 계획에 참여하여 소장할 도서 목록을 제안했으며, 교황이 된 후에도 도서관 이용자들을 위한 지침을 마련하는 등 깊은 애정을 보였다.[4]
로렌초 데 메디치 시대에 이르러 산마르코 도서관은 아뇰로 폴리치아노,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와 같은 당대 최고의 피렌체 인문주의자들이 모여 메디치 가문이 수집한 귀중한 그리스어 및 라틴어 고문헌을 연구하고 토론하는 중요한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두 인물은 후에 산마르코에 안장되었다.
원래 설치되었던 서가(플루테이)와 17세기에 이를 대체했던 벽장들은 후대에 제거되면서, 미켈로초가 설계한 간결하면서도 우아한 초기 르네상스 건축 양식이 다시 드러나게 되었다. 최근의 복원 작업을 통해 중앙부에서 15세기 원래의 색상 배색이었던 녹색 모조 대리석 일부와 풍향계 파편이 발견되었다. 또한, 17세기 개조 당시에 이아코포 키아비스텔리 Iacopo Chiavistelliit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문 주변의 건축 환상주의 프레스코화도 확인되었다. 현재 도서관에는 다른 교회나 수도원에서 가져온 중세 및 르네상스 시대의 아름다운 삽화가 담긴 성가집들이 번갈아 가며 전시되고 있다.
3. 2. 3. 사보나롤라의 방
산마르코 수도원에는 프라 안젤리코, 안토니노 피에로치, 프라 바르톨로메오 외에도 1489년부터 도미니코회 수도사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거주했다. 그는 수도원장이 된 후 당시 피렌체의 사치와 도덕적 해이를 강하게 비판했으며, 보르자 가문 출신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이끄는 교황청의 부패에 맞서 개혁을 외쳤다. 이러한 활동으로 교황청과 극심한 갈등을 겪었고, 결국 1498년 피렌체의 시뇨리아 광장에서 이단으로 몰려 화형에 처해졌다.
박물관의 두 번째 복도 남쪽 날개 안쪽에는 사보나롤라가 생활했던 "원장실"이 있다. 이곳은 3개의 작은 독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가 사용했던 방들에는 프레스코 벽화가 남아있지 않다. 이는 일반 수행자들이 사용했던 다른 독방들과는 대조적인데, 회랑에 면한 수행자들의 독방에는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으나 그 수준은 상대적으로 높지 않다고 평가된다. 일부 독방에는 '십자가를 숭배하는 성 도미니크'를 주제로 한 프레스코화가 있다.
참조
[1]
서적
Museum of San Marco, Firenze
Giunti
1999
[2]
서적
The frescoes by Angelico at San Marco, Florence
Giunti
2004
[3]
서적
The public library of Renaissance Florence
Editrice Antenore
1972
[4]
논문
Florentine Convent as Practiced Place: Cosimo de'Medici, Fra Angelico, and the Public Library of San Marco
https://scholarworks[...]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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