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촌공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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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산촌공작대는 1950년대 초 일본 공산당(JCP)이 중국식 무장 투쟁 노선을 따라 농촌 지역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하기 위해 조직한 비밀 조직이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의 승리와 냉전 심화로 미국이 일본의 재군사화를 추진하고 좌익 세력을 탄압하자, JCP 내에서는 무장 투쟁 노선이 채택되었다. 산촌공작대는 농민들을 중심으로 해방구를 건설하려 했으나, 지역 주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경찰의 단속으로 소멸되었다. 1955년 JCP는 무장 투쟁을 "극좌 모험주의"로 자아비판하고 평화 혁명 노선으로 전환했으며,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이들은 일본 신좌파 운동의 기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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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촌공작대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산촌공작대 |
| 원어 이름 | 山村工作隊 |
| 로마자 표기 | Sanson Kōsakutai |
| 약칭 | 산손코사쿠타이 |
![]() | |
| 활동 기간 | 1950년 ~ 1955년 |
| 이념 | |
| 이념 | 공산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 농본사회주의 반제국주의 반파시즘 혁명적 사회주의 |
| 조직 | |
| 지도자 | 일본공산당 중앙위원회 |
| 상위 단체 | 일본공산당 |
| 활동 | |
| 활동 지역 | 일본 |
| 참전 | 일본공산당 유격전 |
| 적대 국가 | |
| 기타 | |
2. 역사적 배경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새롭게 합법화된 일본 공산당은 초기 노사카 산조의 지도 아래 평화 혁명 노선을 추구하며 일정 지지 기반을 확보했다.[1] 그러나 1949년 중국의 공산화와 냉전 심화는 상황을 바꾸었다. 미국은 점령 정책을 '역코스'로 전환하여 재무장을 추진하고 좌익 세력을 탄압했으며, 대대적인 레드 퍼지가 단행되었다.[1]
이러한 국내외적 압박 속에서 중국의 류사오치와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은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 지역에 중국식 무장 투쟁 노선을 확산시키려 했다. 1950년 6월, 맥아더는 공산당 간부들에 대한 숙청을 명령했고, 같은 시기 소련의 영향을 받는 코민폼은 일본 공산당의 평화 노선을 강하게 비판하며 즉각적인 폭력 혁명을 요구했다.[1]
이 "코민폼 비판"은 당내 노선 갈등을 격화시켰고, 토쿠다 큐이치를 중심으로 한 파벌이 당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무장 투쟁 노선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토쿠다 파벌은 중국으로 망명하여 북경기관을 설치하고, 1951년 제4회 전국협의회와 제5회 전국협의회를 거치며 반미 무장 투쟁 방침과 "농촌 지역에서의 게릴라 전쟁"을 규정한 소위 51년 강령을 채택했다.[13] 이는 평화 노선을 완전히 폐기하고 폭력 혁명 노선으로 전환했음을 의미했다.
이 결정에 따라 산촌공작대, 중핵자위대 등 비공개 군사 조직이 결성되어 열차 폭파, 파출소 방화 등 무장 투쟁을 전개했으나, 이러한 활동은 지역 현실과 동떨어져 주민들의 지지를 거의 얻지 못하고 실패했다. 일본 정부는 1952년 파괴활동방지법을 제정하여 공산당의 무장 활동을 단속했다. 결국 무장 투쟁 노선은 대중적 지지 상실과 1952년 총선거에서의 참패라는 결과로 이어졌고, 일본 공산당은 1955년 제6회 전국협의회에서 무장 투쟁 노선을 "극좌모험주의"로 자아비판하며 공식적으로 폐기했다.[14] 이 노선 전환을 받아들이지 못한 일부 세력은 이후 일본 신좌파를 형성하는 배경이 되었다. 현재 일본 공산당은 당시 무장 투쟁 노선이 소련과 중국의 외압 및 당내 분파주의에 의한 잘못된 결정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14]
2. 1. 전후 일본 공산당의 초기 활동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새롭게 합법화된 일본 공산당(JCP)은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 노사카 산조의 지휘 아래 대중에게 다가가는 전략을 펼쳤다. 노사카는 당이 "사랑받는"(愛される|아이사레루일본어) 이미지를 구축하여, 초기에는 노동자에게 우호적으로 보였던 미국 주도의 일본 점령 상황을 활용해 평화적인 사회주의 혁명을 이루고자 했다.[1] 이 전략은 초기에 상당한 성공을 거두어, 학생 운동과 노동 운동, 그리고 지식인들 사이에서 당의 지지 기반을 크게 넓혔다. 1946년 총선거에서는 노사카를 포함한 5명의 공산당 후보가 일본 국회 의원으로 당선되었고, 당은 4%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어진 1949년 총선거에서는 역대 최고 성적인 약 10%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약진했다.[1]그러나 1949년 중국의 공산화와 전 세계적인 냉전 긴장이 고조되면서, 미국은 일본 점령 정책을 소위 '역코스'로 전환했다. 점령 당국은 군비 축소와 민주화 대신 재무장을 추진하고 좌익 세력을 탄압했으며, 미국의 냉전 전략에 협조하도록 일본 내 보수 세력을 강화했다. 이러한 점령 당국의 압력 아래 일본 정부와 민간 기업들은 대대적인 레드 퍼지를 단행하여, 정부와 기업 내에서 수만 명에 달하는 공산주의자 및 관련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해고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외부로부터의 압력도 거세졌다. 1949년 11월, 중국의 류소기는 이오시프 스탈린과의 협의를 바탕으로 중국식 무장 투쟁 방식을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 전역으로 확산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1950년 6월 6일, 연합군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공산당 중앙위원 24명에 대한 숙청을 명령하고 정치 활동을 금지시켰다. 같은 날, 소련의 지시를 받은 코민폼은 공산당의 평화 노선을 "기회주의"이자 "미국 제국주의 미화"라고 강하게 비판하며, 즉각적인 폭력 혁명을 추진할 것을 요구하는 논평을 발표했다.
이 파괴적인 "코민폼 비판"은 당내 노선 갈등을 격화시켰다. 코민폼의 인정을 받으려는 당내 파벌 간 경쟁 속에서, 서기장 토쿠다 큐이치 등은 이 탄압을 오히려 자신의 당 장악력을 강화할 기회로 여겼다. 토쿠다 파벌은 정식 정치국 회의나 중앙위원회를 소집하지 않고 당규에도 없는 절차를 통해 "임시중앙지도부"를 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미야모토 겐지 등 의견이 다른 중앙위원 7명을 배제하고 비합법적인 지하 활동 체제로 들어갔다. 결국 1951년 여름까지 일본 공산당은 민주적 제도 내에서의 평화 혁명 노선을 포기하고, 마오이즘 방식에 따른 즉각적이고 폭력적인 혁명 노선으로 완전히 전환하게 되었다.
2. 2. 냉전 심화와 미일 관계 변화
전후 초기 일본에서 새롭게 합법화된 일본 공산당(JCP)은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 노사카 산조의 지휘 아래 평화적인 사회주의 혁명을 추구했다. 노사카는 당의 "사랑받는"(ja) 대중 이미지를 구축하는 전략을 통해, 당시 노동자에게 우호적으로 보였던 미국 주도의 일본 점령 상황을 활용하고자 했다.[1] 이 전략은 초기에 상당한 성공을 거두어 학생 운동, 노동 운동, 지식인 사이에서 당 지지 기반을 넓혔다.[1] 1946년 총선에서는 노사카를 포함한 5명의 JCP 당원이 일본 국회 의원으로 당선되었고, 1949년 총선에서는 득표율 약 10%를 기록하며 역대 최고 성적을 거두었다.[1]그러나 1949년 중국의 공산화와 전 세계적인 냉전 긴장 고조는 미국의 일본 점령 정책에 변화를 가져왔다. 미국은 이른바 "역코스"(Reverse Course) 정책을 추진하며 기존의 군축 및 민주화 노선에서 벗어나 일본의 군사 재무장을 추진하고 좌익 세력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는 미국의 냉전 전략에 일본을 편입시키기 위해 보수 세력을 강화하려는 목적이었다.[1] 점령 당국의 압력 아래 일본 정부와 민간 기업들은 대대적인 "붉은 매카시즘"(레드 퍼지)을 단행하여, 정부와 민간 부문에서 수만 명의 공산주의자 및 관련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해고했다.[1]
이러한 국내외적 압박 속에서 1949년 11월, 중국의 류소기는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과 협의를 거쳐 중국식 무장 투쟁 방식을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 전역으로 확산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1950년 6월 6일, 연합군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JCP 중앙위원회 위원 24명에 대한 숙청을 명령하고 정치 활동을 금지했다. 같은 날, 소련의 지시를 받은 코민폼은 JCP의 평화 노선을 "기회주의"이자 "미국 제국주의 미화"라고 강하게 비판하며, 일본에서 즉각적인 폭력 혁명을 추구할 것을 요구하는 논평을 발표했다.[1] 이 파괴적인 "코민폼 비판"은 JCP 내부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 당내 파벌 간 경쟁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이후 JCP가 평화 노선을 버리고 무장 투쟁 노선으로 급격히 전환하는 배경이 되었다.[1]
2. 3. 중국과 소련의 영향
1949년 11월, 중국의 류사오치는 소련의 스탈린과 협의를 거쳐, 중국 공산당 방식의 무장 투쟁을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 지역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했다.1950년 6월 6일, 소련의 지시에 따라 코민폼은 일본공산당의 평화 노선이 "기회주의"이며 "미국 제국주의를 미화"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즉각적인 폭력 혁명을 요구하는 입장을 발표했다. 이러한 외부의 압력과 비판은 일본 공산당 내부의 노선 갈등에 영향을 미쳤다.
레드 퍼지 이후 중국으로 망명한 도쿠다 큐이치 등 일본공산당 지도부는 베이징에 북경기관을 설치하였다. 1951년 2월 23일 열린 제4회 전국협의회(사전협)에서는 반미 무장 투쟁 방침을 공식 결정했다. 이는 중국공산당이 중일전쟁 시기 사용했던 항일 전술을 모방하여, 산촌 지역의 농민을 중심으로 전국 농촌에 해방구를 조직하라는 지시로 이어졌다.
같은 해 10월 16일 제5회 전국협의회(오전협)에서는 "일본의 해방과 민주적 변혁을 평화적인 수단으로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선언하며, "농촌 지역에서의 게릴라전"을 명시한 「일본공산당의 당면 요구 - 새로운 강령」, 소위 51년 강령을 채택했다. 이와 함께 "우리는 무장 준비와 행동을 시작해야 한다"는 군사 방침이 제시되었다.[8][13]
이러한 중국과 소련의 영향 아래 채택된 무장 투쟁 노선에 따라, 산촌공작대와 중핵자위대와 같은 비공개 군사 조직들이 결성되어 활동하게 되었다.
3. 무장 투쟁 노선의 채택과 전개
1949년 중국 류소기의 아시아 무장투쟁 노선 구상과 1950년 GHQ의 일본공산당 탄압은 당내 노선 변화의 배경이 되었다. 토쿠다 큐이치 주류파(소감파)는 이를 계기로 당권을 장악하고 비공개 활동 체제로 전환했으며, 중국 망명 후 북경기관을 통해 1951년 제4회 전국협의회(사전협)와 제5회 전국협의회(오전협)에서 반미 무장투쟁 노선을 공식화했다. 특히 오전협에서는 농촌 게릴라전을 핵심으로 하는 51년 강령을 채택하고 군사 행동 방침을 명확히 했다.[13][8]
이에 따라 산촌공작대, 중핵자위대 등 비공개 조직이 결성되어 열차 폭파, 파출소 방화, 경찰 테러 등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전학련 학생, 예술가, 재일 한국인 등이 동원되어 농촌 지역으로 파견되었고, 도시에서도 1952년 피의 메이데이 시위 등 게릴라 활동이 발생했다.
그러나 마오쩌둥 사상에 기반한 산촌공작대 활동은 일본 농촌 현실과 맞지 않아 주민 지지를 얻지 못했다. 훈련이나 보급, 무기 지원 없이 파견된 대원들은 보수적인 성향의 농민들을 혁명 세력으로 조직하는 데 실패했으며, 식량 부족과 거처 확보의 어려움 등으로 활동을 포기하고 도시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예외적으로 의사가 없는 지역에서의 순회 진료 활동은 호응을 얻기도 했으나, 봉건 지주를 비판하는 가미시바이 등의 선전 활동은 외면당했고, 배포된 기관지나 전단은 그대로 경찰에 넘겨지기 일쑤였다. 결국 산촌공작대는 뚜렷한 성과 없이 경찰의 단속으로 인해 소멸했으며, 체포를 피한 일부 대원들은 당의 지원 없이 방치된 채 자활을 모색하다 흩어졌다. 학업을 포기하고 참여했던 학생들은 이후 당의 노선 전환에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고 전해진다.
무장 투쟁 격화에 일본 정부는 1952년 7월 파괴활동방지법을 제정하고 시행하며 단속을 강화했다. 공산당의 과격 노선은 여론의 비판 속에 1952년 10월 총선거에서 공산당 후보 전원이 낙선하는 참패로 이어졌고, 이는 당이 정치적 영향력을 회복하는 데 20년 가까이 걸릴 정도의 심각한 타격이었다.
결국 일본공산당은 1955년 1월 자아비판을 통해 무장투쟁을 "극좌모험주의"로 규정하고, 같은 해 7월 제6회 전국협의회(육전협)에서 노선을 공식 폐기하며 평화적 민주주의 노선으로 복귀했다.[14][2] 이 전환을 거부한 세력은 일본 신좌파 운동의 기원이 되었다. 현재 일본공산당은 당시 무장투쟁 노선(오전협 정책)이 당의 공식적인 결정이 아니었으며, 소감파에 의한 당 분열과 당 기관 장악, 소련과 중국의 무장 노선 강요에서 비롯된 극좌 모험주의로서 심각한 잘못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14]
3. 1. 임시 중앙 지도부 구성과 당내 분열
1949년 11월, 중국의 류소기는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과 협의하여 중국식 무장투쟁 방식을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 전역으로 확대하려는 구상을 밝혔다.1950년 6월 4일 제2회 참의원의원 통상선거에서 일본공산당 후보 3명이 당선되었으나, 불과 이틀 뒤인 6월 6일 GHQ의 맥아더는 일본공산당 중앙위원 24명 전원에 대해 공직추방 명령을 내리고 정치 활동을 금지시켰다. 이러한 탄압 상황을 일본공산당 서기장 토쿠다 큐이치 등 주류파는 당내 장악력을 강화할 기회로 이용했다. 이들은 정식 정치국 회의나 중앙위원회 소집 없이 당 규약을 무시한 채 비정상적인 절차를 통해 "임시중앙지도부"를 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미야모토 겐지 등 지도부 노선에 비판적이었던 중앙위원 7명이 배제되었고, 당은 비공개적인 활동 체제로 전환되었다.
이후 레드 퍼지가 진행되자 토쿠다 등은 중국으로 망명하여 북경기관을 설치하고 당 지도부를 이어갔다.
3. 2. 무장 투쟁 노선 결정
1949년 11월, 중국의 류소기는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과 협의하여 중국식 무장투쟁 방식을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 전체로 확산시키려는 구상을 밝혔다.1950년 6월 제2회 참의원의원 통상선거에서 일본공산당 후보 3명이 당선되었으나, 맥아더는 곧바로 당 중앙위원 24명의 숙청을 명령하고 정치 활동을 금지시켰다. 당시 서기장이었던 토쿠다 큐이치 등 주류파는 이러한 탄압을 당 장악의 기회로 삼아, 정식 절차 없이 '임시중앙지도부'를 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미야모토 겐지 등 반대파 중앙위원들은 배제되었고, 당은 비공개 활동 체제로 전환했다.
레드 퍼지 이후 중국으로 망명한 토쿠다는 북경기관을 설립했다. 1951년 2월 23일 열린 제4회 전국협의회(사전협)에서는 반미 무장투쟁 방침이 결정되었다. 이는 중국공산당의 항일 전술을 모방하여,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해방구를 조직하라는 지시로 이어졌다.
같은 해 10월 16일 제5회 전국협의회(오전협)에서는 "일본의 해방과 민주적 변화를 평화로운 방법으로 달성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이라는 인식 하에, "농촌지역에서의 게릴라전"을 명시한 '51년 강령' (일본공산당의 당면요구 - 새로운 강령)을 채택했다. 또한 "우리는 무장 준비와 행동을 시작해야 한다"는 군사 방침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13][8]
이러한 결정에 따라 산촌공작대(山村工作隊)와 중핵자위대 등 비공개 무장 조직들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3. 3. 비공개 조직 결성과 무장 투쟁 활동
1949년 11월, 중국의 류소기는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과 상의하여 중국식 무장투쟁 방식을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 전체에 확장하려는 구상을 밝혔다.1950년 6월 제2회 참의원의원 통상선거에서 일본공산당 후보 3명이 당선되었으나, 선거 직후인 6월 6일 맥아더는 일본공산당 중앙위원 24명의 숙청을 명령하고 정치 활동을 금지했다. 당시 서기장 토쿠다 큐이치를 중심으로 한 주류파는 이 탄압을 당내 장악력을 강화할 기회로 삼아, 정식 절차(정치국회의, 중앙위원회)를 거치지 않은 채 당규약에 없는 "임시중앙지도부"를 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미야모토 겐지 등 의견이 다른 중앙위원 7명을 배제하고 비공개적인 지하 활동 체제로 전환했다.
레드 퍼지 이후 중국으로 망명한 토쿠다는 북경기관을 설치하고, 1951년 2월 23일 제4회 전국협의회(사전협)에서 반미 무장투쟁 방침을 결정했다. 이는 중국공산당의 항일 전술을 모방하여, 산촌 지역 농민을 중심으로 전국 농촌에 해방구를 조직하라는 지령이었다.
같은 해 10월 16일 제5회 전국협의회(오전협)에서는 "일본의 해방과 민주적 변화를 평화로운 방법으로 달성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이라며 "농촌지역에서의 게릴라전"을 규정한 「일본공산당의 당면요구 - 새로운 강령」(소위 51년 강령)을 채택했다. 이와 함께 "우리는 무장 준비와 행동을 시작해야 한다"는 군사 방침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13][8]
이러한 결정에 따라 산촌공작대와 중핵자위대 등 비공개 군사 조직들이 결성되었다. 이 조직들은 일본 전역에서 활동하며 열차 폭파, 파출소 방화, 경찰관에 대한 테러 공격 등 다양한 형태의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일본공산당 지도부는 전학련 학생 운동가, 예술가, 보헤미안, 재일 한국인 등 가장 희생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 당원들을 선발하여 산촌공작대 조직을 위해 농촌 지역으로 파견했다.
도시 지역에서도 게릴라 부대가 활동했는데, 1952년 5월 1일 피의 메이데이 사건 시위나 일본 경찰 및 미군 시설에 대한 공격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또한 1952년 6월 히라카타 사건에는 산촌공작대 대원들도 동원되었다.[6] 당의 군사 방침과 관련된 화염병 제조 및 사용법 등은 『구근(球根) 기르는 법』이라는 위장된 제목의 비밀 출판물을 통해 전파되기도 했다.[3]
무장 투쟁이 확산되자 1952년 7월, 일본 정부는 파괴활동방지법을 제정하여 7월 21일부터 시행하며 공산당의 활동을 단속하기 시작했다. 직접적인 화염병 투쟁은 1952년 여름을 기점으로 점차 줄어들었지만, 군사 방침 자체는 유지되어 농촌 지역에서의 활동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산촌공작대 참여는 소감파 노선을 따르는 당 지도부의 지명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일각에서는 미야모토 겐지 파벌에 속했던 학생들에게 징벌적 성격으로 배치가 이루어졌다는 증언도 있다.[4][5][9][10] 대원 중 일부는 무장 투쟁 방침이 현실과 동떨어진 허황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당의 결정이라는 이유로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9][10]
4. 무장 투쟁의 실패와 노선 변화
1949년 중국의 류소기가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과 협의하여 중국식 무장투쟁 노선을 아시아 전역에 확산시키려는 구상을 밝힌 것이 일본공산당의 노선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1950년 맥아더 최고사령관의 레드 퍼지 단행 이후, 토쿠다 큐이치 서기장 등은 비공개 활동 체제로 전환하고 중국 망명 후 북경기관을 통해 무장투쟁 노선을 추진했다. 1951년 제4회 전국협의회(사전협)와 제5회 전국협의회(오전협)를 거치며 51년 강령을 채택하고, 농촌 게릴라전을 포함한 본격적인 무장투쟁 방침을 결정했다.[13]
이에 따라 산촌공작대, 중핵자위대 등 비공개 조직이 결성되어 전국적으로 열차 폭파, 파출소 방화, 경찰 공격 등 무장 활동을 전개했으나, 이는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실패했다. 일본 정부는 1952년 7월 파괴활동방지법을 제정하여 강경하게 대응했고, 같은 해 10월 제25회 중의원의원 총선거에서 공산당은 모든 의석을 잃는 참패를 당했다.
결국 일본공산당은 1955년 1월 1일, 과거 노선을 "극좌모험주의"로 자아비판하고, 같은 해 7월 제6회 전국협의회(육전협)에서 무장투쟁 노선을 공식 폐기하며 평화적 의회 활동 중심으로 복귀했다. 이러한 노선 전환은 당내 일부의 반발을 낳아 일본 신좌파 운동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현재 일본공산당은 당시 무장투쟁 노선을 당의 공식 결정이 아닌 특정 파벌과 외부 압력에 의한 오류로 평가하고 있다.[14][2][11]
4. 1. 산촌 공작대의 실패
산촌공작대 정책은 일본 농촌의 실제 상황과 동떨어져 있어 지역 주민들의 지지를 거의 얻지 못했다. 이는 중국공산당의 항일 전술을 모방한 것이었으나, 1950년대 초 일본의 사회경제적 상황은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중국과는 현저히 달랐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공산당(JCP)은 전학련 학생 운동가, 예술가, 재일 한국인 등 상대적으로 희생될 가능성이 높은 당원들을 중심으로 산촌공작대를 조직하여 산간 지역으로 파견했다.그러나 이들에게는 적절한 훈련, 식량, 보급품 또는 무기조차 제대로 제공되지 않았다. 이들의 임무는 마오쩌둥 사상에 따라 농민들을 급진화시켜 혁명군을 건설하는 것이었지만, 당시 일본 농민들은 비교적 부유하고 교육 수준이 높은 토지 소유자들이 많았으며, 보수 정당에 대한 충성도가 높아 공산주의 혁명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산촌공작대의 활동은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다. 봉건 지주를 비판하는 내용의 紙芝居|가미시바이일본어(그림 연극)와 같은 문화 선전 활동은 주민들에게 외면당했고, 기관지나 삐라(전단) 살포는 주민들이 그대로 경찰에 넘겨주는 경우가 많았다. 예외적으로 파견된 의사들의 순회 진료는 당시 의료 서비스 접근성이 낮았던 농촌 지역에서 일부 호응을 얻기도 했으나, 이는 전반적인 목표 달성에 기여하지 못했다.
결국 산촌공작대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경찰의 단속으로 인해 사실상 와해되었다. 적발을 피한 일부 대원들은 산속으로 들어가 자급자족을 시도했지만, 일본공산당으로부터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자연스럽게 해산되었다. 일본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학업을 포기하고 운동에 참여했던 학생들은 이후 당 노선이 변경되자(1955년 제6회 전국협의회)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고 전해진다.
일부 증언에 따르면, 산촌공작대 참여는 도쿠다 큐이치 파벌(소감파)을 지지하는 중앙위원회의 결정이었으며, 경쟁 파벌이었던 미야모토 겐지 파벌에 속한 학생들에게는 징벌적 성격으로 배치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4][5] 이러한 무장 투쟁 노선은 여론의 비판을 받아 1952년 10월 제25회 중의원의원 총선거에서 일본공산당 후보가 전원 낙선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4. 2. 여론의 비판과 선거 참패
산촌공작대 정책은 당시 일본 농촌의 실정과 동떨어진 것이어서 주민들의 지지를 거의 얻지 못했다. 마오쩌둥 사상에 따라 농민을 혁명군으로 조직하려 했지만, 당시 일본의 고등 교육을 받은 비교적 부유한 농민들은 대부분 보수 정당에 충성했고 공산주의 혁명에는 관심이 없었다. 봉건 지주를 비판하는 그림 연극 같은 선전 활동은 외면당했으며, 공산당의 기관지나 전단은 주민들이 그대로 경찰에 넘기기도 했다. 결국 산촌공작대의 활동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경찰의 단속으로 인해 사실상 소멸했다.이러한 일본공산당의 급진적인 무장 투쟁 노선은 일본 사회의 여론으로부터도 거센 비판을 받았다. 정부는 1952년 7월, 공산당의 무장 활동을 단속하기 위해 파괴활동방지법을 제정하여 시행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치러진 1952년 10월 제25회 중의원의원 총선거에서 일본 유권자들은 공산당의 폭력 노선에 대한 반감을 표출했고, 그 결과 공산당은 기존 국회 의석 35석을 모두 잃는 참패를 당했다. 이는 공산당이 회복하는 데 20년이 걸릴 정도의 큰 타격이었다.
결국 일본공산당은 이러한 여론의 비판과 선거 참패를 받아들여 노선 수정을 단행했다. 1955년 1월 1일, 일본공산당은 지난 무장투쟁 노선이 “극좌모험주의”였다고 자아비판했으며, 같은 해 7월 제6회 전국협의회(육전협)에서 중국식 무장투쟁 노선을 공식적으로 부정하고 평화적인 의회 활동을 통한 노선으로 복귀했다. 육전협 이후 공산당은 무장투쟁 노선의 잘못을 인정하고 새로운 정책을 지지하며 성실하게 노력할 의사가 있는 당원은 배제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취했다.[14][2]
4. 3. 극좌 모험주의 자아비판과 노선 전환
산촌공작대를 비롯한 일본공산당의 무장투쟁 노선은 대중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다. 특히 산촌공작대 정책은 지역 실정과 동떨어져 주민들의 지지를 거의 얻지 못했으며, 문선 활동이나 기관지 배포 등도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경찰에 쉽게 노출되었다.[13] 이러한 활동은 성과 없이 경찰의 단속으로 소멸하였고, 일부 잔존 대원들은 당의 지원 없이 방치되어 자연 소멸했다.이러한 무장투쟁 방침은 여론의 비판에 직면했으며, 1952년 10월 제25회 중의원의원 총선거에서 일본공산당은 의석을 모두 잃는 참패를 겪었다. 또한, 일본 정부는 1952년 7월 파괴활동방지법을 제정하여 공산당의 활동을 강력히 단속했다.
결국 일본공산당은 1955년 1월 1일, 기존의 무장투쟁 노선을 "극좌모험주의"였다고 공식적으로 자아비판했다. 같은 해 7월 29일에 열린 제6회 전국협의회(육전협)에서는 51년 강령으로 대표되는 중국식 무장투쟁 노선을 공식적으로 부정하고, 평화적인 의회 활동을 통해 혁명을 추구하는 노선으로 전환했다. 육전협 이후 당은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새로운 노선을 지지하며 성실히 노력할 의사가 있는 당원은 배제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세웠다.[14][2][11]
그러나 이러한 노선 전환은 모든 당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의 지시에 따라 학업을 포기하고 산촌공작대에 참여했던 대학생 등 일부 참가자들은 육전협의 결정에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시바타 쇼(ja)의 1964년 소설 『されどわれらが日々――일본어』는 이러한 당시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노선 전환을 거부한 이들은 이후 일본 신좌파 운동의 주요 세력이 되었으며, 일본 공산당 리그와 같은 조직을 결성했다.
현재 일본공산당은 당시의 무장투쟁 노선에 대해 "오전협 정책은 토쿠다 파(소감파)에 의한 당 분열과 당 기관 장악, 그리고 소련과 중국의 무장노선 강요에 의해 채택된 것으로, 당이 공식적으로 결정한 방침이 아니다"라고 평가하며, 소감파의 분열과 극좌모험주의를 심각한 오류로 규정하고 있다.[14] 하지만 일각에서는 1951년 8월 코민폼의 지지 표명과 모스크바 방송 보도 이후 국제파가 해산하고 당 통일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51년 강령이 제20회 중앙위원회와 오전협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는 점을 들어, 이것이 분파만의 결정이 아닌 통일된 당의 공식 결정이었다고 반박하기도 한다.[12]
5. 무장 투쟁 노선 이후의 영향
일본공산당의 산촌공작대를 포함한 무장 투쟁 노선은 지역 현실과 동떨어져 주민들의 지지를 거의 얻지 못했고, 결국 경찰의 단속으로 인해 별다른 성과 없이 소멸했다. 이러한 활동은 사회적으로도 큰 비판에 직면했으며, 그 결과 1952년 10월 제25회 중의원의원 총선거에서 공산당 후보 전원이 낙선하는 참패를 겪었다. 또한 일본 정부는 공산당의 무장 투쟁을 단속하기 위해 1952년 7월 파괴활동방지법을 제정하여 시행했다.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실패에 직면한 일본공산당은 노선 전환을 단행했다. 1955년 1월 1일, 당은 과거 무장투쟁 노선이 "극좌모험주의"였다고 공식적으로 자아비판했으며, 같은 해 7월 29일 제6회 전국협의회(육전협)에서는 51년 강령에 기반한 무장 투쟁 노선을 공식적으로 부정하고 평화적인 의회 활동을 통한 노선으로 복귀할 것을 결정했다.[14]
그러나 이러한 일본공산당의 평화 노선으로의 전환을 받아들이지 못한 일부 당원 및 활동가들은 당의 결정에 반발하여 이탈했으며, 이들은 이후 일본 신좌파 운동을 형성하는 주요 세력이 되었다.[2]
5. 1. 일본 신좌파 운동의 기원
일본공산당은 1951년 제5회 전국협의회(오전협)에서 51년 강령을 채택하며 무장투쟁 노선을 공식화했다. 이는 “일본의 해방과 민주적 변화를 평화로운 방법으로 달성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이라는 판단 아래 “농촌지역에서의 게릴라 전쟁”을 포함한 군사 방침을 명시한 것이었다.[13] 이에 따라 산촌공작대, 중핵자위대 등 비공개 조직이 결성되어 전국 각지에서 열차 폭파, 파출소 방화, 경찰 테러 등 무장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전학련 학생 운동가, 예술가, 재일 한국인 등 가장 희생될 가능성이 높은 당원들이 산촌공작대 조직을 위해 파견되었다.그러나 산촌공작대 활동은 당시 일본 농촌의 현실과 동떨어져 주민들의 지지를 거의 얻지 못했다. 훈련, 보급품, 무기 없이 산으로 보내진 대원들은 마오쩌둥 사상에 따라 농민들을 혁명군으로 조직하려 했으나, 당시 일본 농민들은 상대적으로 부유하고 보수 정당에 충성하는 경향이 강해 공산 혁명에 관심이 없었다. 결국 식량 부족과 거처 마련의 어려움으로 많은 대원들이 도시로 돌아왔다. 대신 도시 게릴라 부대가 1952년 5월 1일 피의 메이데이 시위 등에서 더 큰 활동을 보였다.
이러한 무장투쟁 노선은 사회적으로 큰 반발을 샀다. 1952년 7월 일본 정부는 파괴활동방지법을 제정하여 공산당의 활동을 단속했고, 같은 해 10월 총선거에서 공산당은 의석을 모두 잃는 참패를 당했다.
결국 일본공산당은 1955년 1월 1일, 무장투쟁 노선을 "극좌모험주의"였다고 자아비판했으며, 같은 해 7월 제6회 전국협의회(육전협)에서 무장투쟁 노선을 공식적으로 포기하고 평화적인 의회 활동을 통한 노선으로 전환했다.[14]
이러한 일본공산당의 평화 노선 전환을 받아들이지 못한 일부 세력들이 당을 이탈하여 일본 신좌파 운동의 기원이 되었다. 이들은 일본 공산당 리그, 일본 혁명 공산당 리그 등의 조직을 결성하며 독자적인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2]
5. 2. 일본 공산당의 현재 입장
현재 일본 공산당은 과거 산촌공작대 활동을 포함한 1950년대 초반의 무장 투쟁 노선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 당시 채택된 소위 51년 강령과 이에 따른 무장 투쟁 방침은 제5회 전국협의회(오전협)에서 결정되었지만, 현재 공산당의 공식 입장은 이것이 당의 공식적인 결정이 아니었다는 것이다.[14]공산당은 이 노선이 토쿠다 큐이치를 중심으로 한 파벌(소감파)이 당권을 장악하고, 당시 소련과 중국의 무장 노선 강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소감파에 의한 당의 분열과 무장 투쟁은 "극좌모험주의"이자 "심각한 잘못"이었다고 규정하고 있다.[14]
실제로 산촌공작대 활동 등 무장 투쟁 노선은 당시 일본 농촌의 현실과 동떨어져 주민들의 지지를 거의 얻지 못했으며, 결국 1952년 총선거에서 의석을 모두 잃는 등 정치적 실패로 이어졌다.
이러한 실패를 배경으로 일본 공산당은 1955년 1월 1일, 과거 무장 투쟁 노선을 "극좌모험주의"였다고 자아비판했으며, 같은 해 7월 제6회 전국협의회(육전협)에서 공식적으로 무장 투쟁 노선을 부정하고 평화적인 방식으로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노선으로 복귀했다. 육전협 이후 공산당은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새로운 정책 노선을 지지하며 성실하게 노력할 의사가 있는 당원은 배제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세웠다.[14][2]
그러나 이러한 공산당의 평화 노선으로의 전환을 받아들이지 못한 일부 세력은 당을 떠나 일본 신좌파 운동의 기원이 되었다.[2]
5. 3. 『구근 기르는 법』과 산촌 공작대 참여자들의 회고
『구근(球根) 기르는 법』은 일본 공산당의 군사 정책 관련 내용을 담은 비밀 간행물이었다. 실제 명칭은 『내부 및 외부 비판』이었으나, 내용을 위장하고자 『구근 기르는 법』이라는 제목을 사용했다. 이 간행물에는 몰토프 칵테일 제작 및 사용법 등 군사적 내용이 포함되었고, 미메오그래프로 여러 차례 인쇄되어 배포되었다.[3]산촌 공작대는 일본 농촌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 탓에 현지 주민들의 지지를 거의 얻지 못했다. 다만 예외적으로 의료팀이 운영한 이동 진료소는 당시 의사가 없는 마을이 많아 환영받기도 했다. 그러나 가미시바이 등을 활용한 봉건주의적 지주 비판 등의 문화 선전 활동은 주민들에게 외면받았으며, 배포한 신문이나 선전물은 곧바로 경찰에 넘겨지기 일쑤였다. 결국 산촌 공작대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경찰의 단속으로 소멸하였다.
당시 일본 공산당 방침에 따라 학업을 중단하고 산촌 공작대에 참여한 학생들도 있었다. 이들은 1955년 六全協에서 당의 무장 투쟁 노선이 공식적으로 부정되자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고 전해진다. 경찰 단속을 피해 일부 대원들은 산속에 숨어 자급자족을 시도했으나, 일본 공산당으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하고 방치되어 결국 자연 해산되었다.
산촌 공작대 참가자들의 경험담은 이후 일부 신좌파 계열 간행물에 실리기도 했다. 또한 시바타 쇼(柴田翔)가 1964년 발표해 아쿠타가와상을 받은 소설 『それでもわれらが日々|사레도 와레라가 히비일본어』는 산촌 공작대와 六全協 전후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한편 산촌 공작대 참가자 중에는 무장 투쟁 노선 자체에 회의감을 느끼면서도 활동을 이어간 이들도 있었다. 공작대 참여는 당시 당권을 장악했던 도쿠다 규이치(徳田球一) 파벌 중앙위원회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으며, 일각에서는 미야모토 겐지 파벌 소속 학생들에게 징벌적 성격으로 참여가 강요되었다는 증언도 있다.[4][5] 『구근 기르는 법』과 같은 자료 및 참여자들의 회고는 당시 일본 공산당의 무장 투쟁 노선과 그 실패 과정, 그리고 이 속에서 개인이 겪었던 혼란과 좌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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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theblack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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運動史研究4 特集・五〇年問題―党史の空白を埋め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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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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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由井誓遺稿・回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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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
財団法人 労務行政研究所
1952-12-1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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