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에 데이 마르티리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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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에 데이 마르티리 성당은 297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건설한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을 개조하여 1561년 교황 비오 4세가 헌당한 교회이다. 미켈란젤로가 개조를 맡아 고대 로마 건축 양식과 기독교적 공간을 융합했으며, 이후 야코포 델 두카, 루이지 반비텔리가 공사를 이어받았다. 내부에는 살바토르 로사, 카를로 마라타 등의 무덤과 장 앙투안 우동의 조각상, 나르시스 콰글리아타의 스테인드글라스 돔, 이고르 미토라지의 청동 문 등이 있으며, 18세기 초에는 프란체스코 비안키니가 자오선을 설치하여 천문학적 연구에 활용되었다. 이탈리아 왕국의 공식 국립 교회였으며, 현재는 해외에서 사망한 군인들의 장례식 등 다양한 의식에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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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에 데이 마르티리 성당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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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기본 정보 | |
이름 | 산타 마리아 degli Angeli e dei Martiri 성당 |
로마자 표기 | Santa Maria degli Angeli e dei Martiri |
이탈리아어 이름 | Basilica di Santa Maria degli Angeli e dei Martiri |
라틴어 이름 | Beatissimae Virginis et Omnium Angelorum et Martyrum |
종류 | 가톨릭 성당 |
소속 | 로마 |
봉헌 대상 | 마리아, 기독교 순교자 |
지위 | 소 바실리카, 명예 성당 |
건축 양식 |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루이지 반비텔리 |
기공 | 1562년 |
길이 | 128m |
너비 | 105m |
웹사이트 | 공식 웹사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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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제휴 | |
종교 단체 | 카르투시오회 (1870년까지) |
2. 역사
이 성당은 원래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으며, 이 거대한 로마 시대 공중 목욕탕은 537년 아쿠아 마르키아 수도교 파괴 이후 폐허가 되었다.
1561년 교황 비오 4세는 기독교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성당 건립을 명했으며, 이는 시칠리아 수도사 안토니오 델 두카가 수십 년 전 폐허에서 본 천사 환상에 대한 요청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성당은 '모든 천사와 순교자들의 지극히 복되신 성모'(Beatissimae Virgini et omnium Angelorum et Martyrumlat)에게 봉헌되었으며, 교황 비오 4세 자신의 무덤도 성당 후진의 트리뷴에 마련되었다.[1]
1563년부터 미켈란젤로가 욕장 유적인 ''테피다리움''(미온욕실)과 ''프리지다리움''(냉수욕실)을 활용하여 성당 설계를 시작했다. 그는 고대 건축물의 웅장함을 살려 그리스 십자 형태를 기반으로 공간을 구성했다. 1564년 미켈란젤로 사후에는 그의 제자 야코포 델 두카가 작업을 이어받았고, 1749년에는 루이지 반비텔리에 의해 일부 구조가 변경되었다. 1911년에는 반비텔리 양식의 정면 일부가 철거되고 원래의 로마 시대 벽돌 구조가 복원되었는데, 이 때문에 입구가 폐허처럼 보이기도 한다.[2]
성당 내부는 거대한 아치형 트랜셉트가 특징이다. 트랜셉트 길이는 90.8m에 달하며, 미켈란젤로는 바닥을 28m 높이로 올려 당시 거리 수준에 맞추었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붉은 화강암 기둥 일부가 잘려나가기도 했다. 트랜셉트 너비는 27m로 설계되어 양 끝에 넓은 공간을 제공한다. 현관과 이어진 측면 예배당에는 화가 살바토르 로사와 카를로 마라타의 무덤이 있고, 다른 쪽 예배당에는 장 앙투안 우동이 1766년에 제작한 '성 쾰른의 브루노' 조각상이 있다. 카르투시오회 수도사들이 1581년부터 1873년까지 성당과 수도원을 관리했으며, 수도원 건물은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된다.[1]
성 브루노 예배당에는 밀레니엄 희년을 기념하여 베로나의 오르간 제작자 바르톨로메오 포르멘텔리가 제작하고 로마 시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선물한 포르멘텔리 오르간이 있다.[2]
2001년에는 첫 번째 현관 천장에 이탈리아계 미국인 예술가 나르시스 콰글리아타가 제작한 지름 5m의 스테인드 글라스 돔 '빛과 시간'이 설치되었다. 이 작품은 바닥에 비치는 빛을 통해 해시계 역할을 한다.[2] 2006년에는 폴란드 출신 조각가 이고르 미토라지가 새로운 청동 문과 세례자 요한 조각상을 제작했다.[1] 2010년에는 성당 안뜰에 노벨상 수상자인 리정다오가 구상하고 CCAST(중국 첨단 과학 기술 센터)와 WFS(세계 과학자 연맹)가 기증한 5m 높이의 갈릴레오 갈릴레이 청동 조각상이 세워졌다.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은 이탈리아 왕국(1870–1946) 시절 공식 국립 교회였으며, 현재도 국가적인 장례식이나 행사가 거행되는 중요한 장소이다. 성당 내부에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이탈리아군을 이끌었던 아르만도 디아즈 장군과 파올로 타온 디 레벨 제독의 무덤이 안치되어 있다. 오늘날에도 해외에서 전사한 군인들의 장례식을 포함한 여러 국가 의식이 이곳에서 열린다.
2. 1.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

(1) ''칼다리움'', (2) ''테피다리움'', (3) ''프리지다리움'', (4) ''나타티오'', (5) ''팔라이스트라'', (6) 정문, (7) ''엑세드라''.
교회는 2와 3의 생존 구조로 지어졌다.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에 데이 마르티리 성당이 들어선 자리에는 원래 거대한 공중 목욕탕인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이 있었다. 이 욕장은 297년 황제 막시미아누스의 지시로 건설이 시작되어 306년에 완공되었다. 건설 과정에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노예로서 동원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당시 로마 제국의 화려함 뒤에 숨겨진 비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욕장 건설에는 로마 제국 전역에서 가져온 최고급 자재들이 사용되었다. 이집트산 화강암 통석 기둥과 바이에른 숲에서 벌목한 목재가 아치형 천장을 지탱했으며, 벽면은 정교한 모자이크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이처럼 당대 최고의 건축 기술과 재료가 투입된 욕장은 로마의 번영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축물 중 하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은 로마에 물을 공급하던 주요 수도교 중 하나인 아쿠아 마르키아가 537년에 파괴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수도교 파괴로 물 공급이 끊기자 욕장은 더 이상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점차 폐허로 변해갔다. 이후 사람들은 다른 건물을 짓기 위해 이곳의 값비싼 건축 자재들을 마구 가져가면서 욕장의 쇠퇴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현재 성당 건물은 욕장의 ''테피다리움''(미온욕실)과 ''프리지다리움''(냉수욕실) 일부 구조를 활용하여 지어졌다.
2. 2. 성당의 건립
성당이 들어선 자리는 원래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의 일부였다. 이 거대한 욕장은 297년 황제 막시미아누스의 지시로 건설되기 시작하여 306년에 완공되었으나, 537년 고트족이 로마를 침략하여 수도교인 아쿠아 마르키아를 파괴하면서 물 공급이 끊겨 폐허가 되었다.
성당 건립의 직접적인 계기는 1541년 시칠리아 출신 수도사 안토니오 델 두카가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 유적에서 천사들에 대한 환상을 본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이 환상을 바탕으로 수십 년간 천사들에 대한 공식적인 경배를 교황청에 요청했다.[1]

마침내 1561년 7월 27일, 교황 비오 4세는 칙서를 통해 이 자리에 성당을 건립할 것을 명하고, 성당을 Beatissimae Virgini et omnium Angelorum et Martyrum|모든 천사와 순교자들의 지극히 복되신 성모lat에게 봉헌하도록 했다. 교황은 이 성당 건립의 책임을 성 필립 네리와 성 카를로 보로메오에게 맡겼다. 이 성당은 알려지거나 알려지지 않은 기독교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으며, 동시에 교황 비오 4세 개인의 기념비적인 건축물이기도 하다. 그의 무덤은 성당 후진의 트리뷴에 안치되어 있다.[1]
비미날 언덕에 폐허로 남아있던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의 구조물을 활용하여 성당을 설계하고 개조하는 작업은 1563년부터 1564년까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맡았다. 그는 욕장의 테피다리움과 프리지다리움 공간을 중심으로 성당의 기본 구조를 구상했다. 1564년 미켈란젤로가 사망한 후에는 그의 제자인 야코포 델 두카가 작업을 이어받아 진행했다. 이후 1749년에는 루이지 반비텔리가 일부 개조 작업을 지휘했으며, 1911년에는 반비텔리가 설계했던 정면 일부가 철거되고 로마 시대 벽돌 구조가 복원되기도 했다.[2]
2. 3. 미켈란젤로의 개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테르메''(욕장) 유적은 거대한 규모로 비미날 언덕에 자리 잡고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1563년부터 1564년까지 이 욕장 유적의 일부를 활용하여 교회로 개조하는 작업을 맡았다. 그는 고대 로마 건축물의 웅장함을 살리면서도 기독교적인 공간으로 변화시키는 데 중점을 두었다.미켈란젤로는 그리스 십자 형태에서 발전된 건축 공간을 구현했는데, 이는 각 끝에 입방형 예배당이 있고, 횡단하는 본당과 같은 효과를 내는 지배적인 트랜셉트를 특징으로 한다. 성당에는 별도의 파사드가 없으며, 독특한 오목한 벽돌 모양의 단순한 입구는 ''테르메''의 칼다리움(고온 욕실)에 있던 고대 엑세드라(반원형 공간) 중 하나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2]
거대한 아치형 트랜셉트는 고대 로마 구조물의 규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트랜셉트의 길이는 90.8m에 달하며, 미켈란젤로는 바닥을 16세기 거리 수준에 맞춰 28m 높이로 올렸다. 이 과정에서 트랜셉트와 측면 공간을 연결하던 붉은 화강암 로마 기둥의 일부가 잘려나가게 되었다. 미켈란젤로는 트랜셉트의 너비를 27m로 설계하여, 트랜셉트 양 끝에 거대한 입방체 형태의 공간을 확보했다.
1564년 미켈란젤로가 사망한 후, 그의 제자인 야코포 델 두카가 작업을 이어받았다. 이후 1749년에는 루이지 반비텔리가 일부 건설을 지휘하며 건축에 참여했다. 그러나 1911년, 레푸블리카 광장(당시 에스드라 광장)에 면한 반비텔리 양식의 정면이 철거되고, 대신 칼다리움의 원래 로마 시대 벽돌 구조와 틈새가 복원되었다. 이러한 개입으로 교회의 외관이 덜 드러나게 되어 때때로 폐허로 오인되기도 했으며, 문화재 복원 방식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2]
3. 구조와 예술
이 성당은 알려지거나 알려지지 않은 기독교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교황 비오 4세의 명령으로 1561년 건립이 시작되었다.[1] 교황은 Beatissimae Virgini et omnium Angelorum et Martyrum|모든 천사와 순교자들의 지극히 복되신 성모lat에게 성당을 봉헌하도록 지시했으며, 이 작업은 성 필립 네리와 성 카를로 보로메오가 맡았다. 성당 부지는 고대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의 유적 위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이는 안토니오 델 두카라는 시칠리아 수도사가 겪은 환시와 수십 년간의 로비 활동에 영향을 받은 결정이었다.[1] 또한 이 성당은 교황 비오 4세 개인의 기념비이기도 하며, 그의 무덤은 성당 후진의 트리뷴에 안치되어 있다.
1563년부터 미켈란젤로가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의 구조 일부를 활용하여 성당으로 개조하는 작업을 시작했으며, 그의 사후에는 제자 야코포 델 두카가 작업을 이어받았다.[2] 이후 18세기에는 루이지 반비텔리에 의해 일부 변경이 이루어지기도 했다.[2] 미켈란젤로는 고대 로마 건축물의 웅장함을 살려 그리스 십자 형태를 기반으로 넓은 트랜셉트를 중심으로 하는 공간을 설계했다. 성당의 입구는 별도의 파사드 없이 욕장의 칼리다리움에 있던 고대 엑세드라 중 하나를 그대로 활용한 독특한 형태를 띤다.[2]
성당 내부에는 화가 살바토르 로사와 카를로 마라타의 무덤, 장 앙투안 우동이 조각한 성 브루노 상,[1] 나르시스 콰글리아타가 제작한 스테인드글라스 돔 '빛과 시간'(2001년 설치),[2] 그리고 이고르 미토라지가 만든 청동 문과 세례자 요한 조각상(2006년 설치) 등 여러 시대의 예술 작품들이 있다.[1] 또한 성당 안뜰에는 중국 첨단 과학 기술 센터(CCAST)와 세계 과학자 연맹(WFS)이 기증한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청동 조각상(2010년 설치)이 세워져 있다.
이 성당은 카르투시오회 수도사들이 오랫동안 관리했으며,[1] 이탈리아 왕국 시절(1870–1946)에는 공식 국립 교회로 지정되기도 했다. 현재도 국장(國葬)을 비롯한 국가적인 중요 행사가 거행되는 장소로 사용된다. 성당 내부에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이탈리아군을 이끈 아르만도 디아즈 장군과 파올로 타온 디 레벨 제독의 무덤이 안치되어 있다.
3. 1. 건축적 특징
미켈란젤로는 1563년부터 1564년까지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의 남은 구조 일부를 활용하여 이 성당을 설계하고 개조 작업을 진행했다.[2] 그의 사후에는 제자인 야코포 델 두카가 작업을 이어받았으며, 후대에 루이지 반비텔리 등에 의해 일부 변경이 이루어졌다.[2]
미켈란젤로는 이 성당에서 그리스 십자 형태를 기반으로 발전시킨 건축 공간을 구현했다. 중심에는 지배적인 트랜셉트가 있고, 양 끝에는 입방체 형태의 예배당이 자리 잡고 있다. 성당에는 일반적인 의미의 파사드가 존재하지 않으며, 대신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의 칼리다리움에 있던 고대 엑세드라 중 하나를 입구로 활용했다. 이 입구는 독특한 오목한 벽돌 형태로 마감되었다.[2] 1911년, 기존에 있던 반비텔리 양식의 정면이 철거되고 칼리다리움의 틈새 구조가 로마 벽돌로 복원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2]
거대한 아치형 트랜셉트는 고대 로마 건축물의 웅장한 규모를 잘 보여준다. 트랜셉트의 길이는 90.8m에 달하며, 미켈란젤로는 바닥을 16세기 당시의 거리 수준에 맞춰 28m 높이로 올렸다. 이 과정에서 트랜셉트와 측면 공간을 연결하던 붉은 화강암 로마 기둥의 아랫부분이 잘려나가게 되었다. 트랜셉트의 너비는 27m로 설계되어 양 끝에 넓은 입방체 공간을 확보했다.[2]
성당 내부에는 모서리가 기울어진 현관과 동일한 형태의 측면 예배당들이 있다. 한 예배당에는 화가 살바토르 로사의 무덤이, 다른 예배당에는 카를로 마라타의 무덤이 안치되어 있다. 트랜셉트 반대편에는 두 번째 현관이 있으며, 이곳에는 장 앙투안 우동이 1766년에 제작한 실물 크기보다 큰 쾰른의 브루노 성인상이 놓여 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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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최근에 추가된 건축 요소들도 있다. 첫 번째 현관 천장에는 2001년 이탈리아계 미국인 예술가 나르시스 콰글리아타가 제작한 스테인드글라스 돔이 설치되었다. 지름 5m, 높이 약 23m에 달하는 이 돔은 '빛과 시간'이라는 제목의 추상적인 디자인으로, 바닥에 비치는 빛을 통해 해시계 역할을 하도록 고안되었다.[2] 또한 2006년에는 폴란드 출신 조각가 이고르 미토라지가 성당을 위한 새로운 청동 문과 세례자 요한 조각상을 제작하여 설치했다.[1]
3. 2. 주요 예술 작품
성당 내부에는 여러 중요한 예술 작품들이 있다.측면 예배당에는 화가 살바토르 로사와 카를로 마라타의 무덤이 각각 자리 잡고 있다. 트랜셉트 반대편 현관에는 프랑스 조각가 장 앙투안 우동이 1766년에 제작한 실물보다 큰 ''성 쾰른의 브루노'' 조각상이 있다.[1] 교황 클레멘스 14세는 이 조각상을 보고 "그가 세운 수도회의 침묵 서약만 아니었다면 말을 했을 것"이라고 평했다고 전해진다.[1]
첫 번째 현관 천장에는 이탈리아계 미국인 예술가 나르시스 콰글리아타가 2001년에 제작한 스테인드 글라스 돔이 있다. 지름 5m, 높이 약 23m 규모의 이 작품은 ''빛과 시간''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으며, 추상적인 디자인을 통해 해시계 역할을 수행한다. 바닥에 비치는 빛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시각적으로 느낄 수 있다.[2]
2006년에는 폴란드 출신 조각가 이고르 미토라지가 제작한 새로운 청동 문과 세례자 요한 조각상이 설치되었다.[1]
2010년 4월에는 성당 안뜰에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기리는 높이 5m의 청동 조각상이 세워졌다. 이 조각상은 1957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리정다오가 '신성한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구상하였으며, 중국 첨단 과학 기술 센터(CCAST)와 세계 과학자 연맹(WFS)이 기증했다.
4. 자오선 (메리디안 라인)
성당 내부에는 18세기 초 교황 클레멘스 11세의 의뢰로 천문학자 프란체스코 비안키니가 설계하여 1702년에 완성한 자오선(Meridian Line)이 설치되어 있다. 이것은 일종의 정교한 해시계로서, 로마를 지나는 경도 12° 30' E 선을 따라 성당 바닥에 길게 놓여 있다. 자오선의 길이는 45m에 달하며, 청동으로 만들어져 황백색 대리석으로 둘러싸여 있다.[3] 비안키니는 이 자오선을 이용해 태양의 움직임을 정밀하게 측정했을 뿐만 아니라, 아크투루스나 시리우스와 같은 밝은 별들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에도 활용했다.[5] 이 자오선은 설치 300주년이 되던 2002년에 복원되어 오늘날에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4. 1. 자오선의 설치 목적
18세기 초,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천문학자이자 수학자, 고고학자, 역사학자, 철학자인 프란체스코 비안키니에게 성당 안에 일종의 해시계인 자오선을 만들도록 의뢰했다. 1702년에 완성된 이 자오선은 세 가지 주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교황은 그레고리력 개정의 정확성을 확인하고자 했다. 둘째, 부활절 날짜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 도구를 만들고자 했다. 마지막으로, 당시 볼로냐의 산 페트로니오 성당에 조반니 도메니코 카시니가 건설하여 명성을 얻은 자오선에 버금가는 중요한 자오선을 로마에도 설치하여 도시의 과학적 위상을 높이고자 했다. 실제로 이 자오선은 "배치, 안정성 및 정밀도는 볼로냐의 유명한 자오선보다 훨씬 낫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3]4. 2. 자오선의 작동 원리
자오선은 일종의 해시계로, 프란체스코 비안키니가 설계하여 1702년에 완성되었다. 이 자오선은 로마를 지나는 경도 12° 30' E 선을 따라 성당 바닥에 설치되었다.
매일 정오 무렵, 성당 남쪽 벽의 높은 곳에 뚫린 작은 구멍을 통해 들어온 태양 빛이 바닥의 자오선 위에 정확히 비치도록 설계되었다. 다만, 실제 태양 빛이 자오선에 닿는 시간은 시간 방정식에 따라 매일 조금씩 달라진다. 예를 들어 10월 말에는 UTC 기준 오전 10시 54분경에, 2월에는 UTC 기준 오전 11시 24분경에 빛이 자오선에 닿는다(CET 기준으로는 각각 11시 54분과 12시 24분).[4]
자오선 위에서 태양 빛이 맺히는 위치는 계절에 따라 달라진다. 태양의 고도가 가장 높은 여름 하지에는 빛이 벽에 가장 가까운 지점에 닿는다. 반대로 태양 고도가 가장 낮은 겨울 동지에는 빛이 벽에서 가장 먼 지점까지 이동하여 닿는다. 춘분과 추분에는 태양 빛이 이 두 극단적인 지점 사이의 중간 지점을 지나간다.
이처럼 일 년 동안 자오선 위에서 태양 빛이 움직이는 경로를 정밀하게 관측하면 지구의 공전 주기를 바탕으로 1년의 길이를 매우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다. 자오선의 길이가 길수록 측정의 정밀도가 높아지는데, 이 성당에 설치된 자오선은 길이가 45m에 달하며, 황백색 대리석 안에 청동으로 만들어졌다.
비안키니는 이 자오선을 단순히 태양의 움직임을 관측하는 데만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교황의 문장 뒤 창문에 설치된 움직이는 망원경을 이용하여 아크투루스나 시리우스와 같은 밝은 별들이 자오선을 통과하는 것을 관측하고, 이를 통해 별들의 적경과 적위를 결정하기도 했다.[5] 이 자오선은 제작 300주년이 되던 2002년에 복원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작동하며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고 있다.
4. 3. 과학적 의의
18세기 초,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천문학자, 수학자, 고고학자, 역사학자, 철학자였던 프란체스코 비안키니에게 성당 내부에 해시계의 일종인 자오선을 만들도록 의뢰했다. 1702년에 완성된 이 자오선은 그레고리력 개정의 정확성을 확인하고, 부활절 날짜를 정확하게 예측하며, 당시 볼로냐의 산 페트로니오 성당에 조반니 도메니코 카시니가 건설한 자오선에 버금가는 것을 로마에 만들려는 목적을 가졌다. 천문학자 앨런 쿡은 이 자오선의 배치, 안정성, 정밀도가 볼로냐의 것보다 뛰어나다고 평가했다.[3]
비안키니의 해시계는 로마를 가로지르는 경도 12° 30' E 자오선을 따라 만들어졌다. 성당 벽의 작은 구멍을 통해 들어온 태양 빛은 정오 무렵(정확한 시간은 시간 방정식에 따라 달라지며, 10월 말경 UTC 기준 오전 10시 54분부터 2월 오전 11시 24분 사이) 매일 이 선 위에 비친다.[4] 성당 내부에 설치된 자오선은 길이가 45m에 달하며, 청동으로 만들어져 노란색과 흰색 대리석으로 둘러싸여 있다. 계절에 따라 태양 빛이 닿는 위치가 달라지는데, 여름 하지에는 벽에 가장 가까운 지점, 겨울 동지에는 가장 먼 지점, 춘분과 추분에는 그 중간 지점을 비춘다. 자오선이 길수록 연도의 길이를 더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다.
비안키니는 이 선을 사용하여 태양의 자오선 통과를 측정하는 것 외에도, 교황의 문장 뒤 창문과 이동식 망원경을 이용하여 밤하늘의 밝은 별인 아크투루스와 시리우스 등의 통과를 관측했다. 이를 통해 별들의 적경과 적위를 결정하는 데 활용했다.[5] 이 자오선은 건설 300주년이 되던 2002년에 복원되어 현재까지도 작동하고 있으며, 중요한 과학 유산으로 남아 있다.
5. 추기경 보호자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에 데이 마르티리 성당은 1565년 5월 15일 교황 비오 4세에 의해 추기경 사제 서임 교회가 되었다.[6] 1687년 이후,[7] 다음의 성직자들이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에 데이 마르티리 성당의 추기경 보호자로 봉사했다.
추기경 이름 | 임명 기간 |
---|---|
시지스몬도 파파코다 | 1527년 12월 – 1536년 11월 |
조반니 안토니오 세르벨로니 | 1565년 5월 15일 – 1570년 4월 12일 |
프로스페로 산타크로체 | 1570년 4월 12일 – 1575년 5월 5일 |
조반니 프란체스코 코멘도네 | 1574년 7월 5일 – 1584년 1월 9일 |
마르크 시티히 폰 호엔엠스 | 1577년 10월 3일 – 1578년 10월 3일 |
시메오네 탈리아비아 다라곤 | 1585년 5월 20일 – 1592년 12월 9일 |
페데리코 보로메오 | 1593년 10월 25일 – 1631년 9월 21일 |
에른스트 아달베르트 폰 하라흐 | 1632년 6월 7일 – 1667년 7월 18일 |
마르치오 지네티 | 1644년 10월 17일 – 1646년 2월 19일 |
니콜로 알베르가티-루도비시 | 1646년 6월 25일 – 1666년 10월 11일 |
안토니오 비키 | 1667년 11월 14일 – 1687년 3월 3일 |
라이몬도 카피주키, O.P. | 1687년 3월 3일 — 1691년 4월 22일 |
에티엔 르 카뮈 | 1691년 8월 8일 — 1707년 9월 12일 |
주세페 발레마니 | 1707년 11월 28일 — 1725년 12월 15일 |
멜키오르 드 폴리냐크 | 1725년 12월 19일 — 1741년 11월 20일 |
카밀로 치보 | 1741년 12월 20일 — 1743년 1월 12일 |
조반니 바티스타 스피놀라 | 1743년 9월 23일 — 1751년 11월 15일 |
지롤라모 데 바르디 | 1753년 5월 28일 — 1761년 3월 11일 |
필리포 아치아이올리 | 1761년 4월 6일 — 1766년 7월 24일 |
조반니 오타비오 부팔리니 | 1766년 8월 6일 — 1782년 8월 3일 |
굴리엘모 팔로타 | 1782년 9월 23일 — 1795년 9월 21일 |
이그나치오 부스카 | 1795년 12월 18일 — 1803년 8월 12일 |
필리포 카소니 | 1804년 3월 26일 — 1811년 10월 9일 |
주세페 모로초 델라 로카 | 1816년 3월 8일 — 1842년 3월 22일 |
마리오 마테이 | 1842년 7월 22일 — 1844년 6월 17일 |
도메니코 카라파 델라 스피나 디 트라에토 | 1844년 7월 22일 – 1879년 5월 12일 |
러요시 하이날드 | 1879년 5월 12일 – 1891년 7월 4일 |
안톤 요제프 그루샤 | 1891년 6월 1일 – 1911년 8월 15일 |
제나로 그라니토 피냐텔리 디 벨몬테 | 1911년 11월 27일 – 1915년 12월 6일 |
알폰소 미스트란젤로, 피아리스트 | 1915년 12월 6일 – 1930년 11월 7일 |
장 마리 로드리그 빌뇌브, O.M.I. | 1933년 3월 13일 – 1947년 1월 17일 |
폴 에밀 레제, PSS | 1953년 1월 12일 – 1991년 11월 13일 |
윌리엄 헨리 킬러 | 1994년 11월 26일 – 2017년 3월 23일 |
안데르스 아르보렐리우스 OCD | 2017년 6월 28일 – 현재 |
6. 안장된 주요 인물
이 성당은 이탈리아 왕국 (1870–1946) 시기에 공식 국립 교회였으며, 국가적인 장례식인 국장이 거행되는 장소이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해외에서 사망한 군인들의 장례식을 포함한 여러 국가적 의식이 이곳에서 열린다.[1]
성당 내부에는 다음과 같은 주요 인물들이 안장되어 있다.
- 교황 비오 4세: 성당 건립을 명령한 교황으로, 그의 무덤은 후진 트리뷴에 있다.
- 윌리엄 치좀 (2세): 스코틀랜드 출신의 가톨릭 주교.
- 살바토르 로사: 17세기 이탈리아의 바로크 화가이자 시인. 1673년에 사망했으며, 성당 내 한 예배당에 안장되었다.[1]
- 카를로 마라타: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초반 로마에서 활동한 이탈리아 화가. 살바토르 로사가 묻힌 예배당 맞은편 예배당에 안장되었다.[1]
- 아르만도 디아즈 장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이탈리아 전선에서 군대를 성공적으로 이끈 총참모장.
- 파올로 타온 디 레벨 제독: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이탈리아 해군 총사령관을 역임한 인물.
참조
[1]
웹사이트
"The Basilica"
http://www.santamari[...]
[2]
웹사이트
Basilica di Santa Maria degli Angeli e dei Martiri
https://www.turismor[...]
[3]
논문
A Roman Tercentenary
2002-09
[4]
웹사이트
Solar time
http://theorderoftim[...]
[5]
웹사이트
osservazione_stelle ITALIANO Basilica di Santa Maria degli Angeli e dei Martiri alle Terme di Diocleziano di Roma
http://www.santamari[...]
Basilica S. Maria degli Angeli e dei Martiri
2009-09-29
[6]
웹사이트
Santa Maria degli Angeli
http://catholic-hier[...]
2016-03-16
[7]
서적
Hierarchia catholica medii et recentioris aevi
Monasterii
1923
[8]
서적
伊和中辞典
小学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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