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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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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군영은 1704년 숙종에 의해 한성부 방어와 국왕 호위를 위해 설치된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을 통칭하는 조선 시대 군사 조직이다. 이인좌의 난 이후 영조에 의해 수도 방어 책임을 세분화하여 개편되었으며, 1746년에는 서울의 다섯 구역을 삼군영에 배속했다. 삼군영은 1884년 조선군의 근대화 과정에서 폐지되었으며, 각 부대는 깃발로 구분되었다. 삼군영은 수도 방어, 순찰, 궁궐 경비, 도시 유지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으며, 군인들은 생계를 위해 상업, 농업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며 한양 경제에도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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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군영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개요
조선의 문장
조선의 문장
국가조선
소속조선 국왕
군 종류수도 방위대
상급 부대오군영
주둔지연화방
연혁
창설1704년
해체1884년
규모
병력246명
지휘관
지휘관미상
기타
군기image_file:Ensign of the Joseon Navy.png
관련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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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개천을 치다" (서울시설공단)

2. 설치 배경 및 연혁

1704년, 숙종은 한성부의 방어를 강화하고 국왕을 호위하기 위해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을 삼군문(三軍門)의 경비를 담당하게 했다. 1745년 이인좌의 난 이후, 영조는 이들 진영 간의 업무 혼선을 인지하고, 수도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군영의 책임을 세분화하여 더욱 상세하게 개편했다. 1746년(영조 22년), 영조는 수도 방어를 위해 진지를 구축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서울의 다섯 구역에 거주하는 민간인을 삼군영(三軍營)으로 알려진 세 부대로 나누었다. 삼군영은 19세기 말 조선군의 근대화의 일환으로 1884년에 폐지되었다.

2. 1. 훈련도감 설치 (1593년)

훈련도감임진왜란 중이던 1593년에 설치되었다. 조선군이 일본군의 조총에 고전하자, 이에 대한 대처 방안으로 새로운 군대가 창설되었다. 명나라 장수 척계광이 저술한 『기효신서』를 참고하여 삼수병(三手兵) 체제(조총, 활, 칼, 창을 사용하는 병사)를 갖추었다. 처음에는 임시 조직이었지만,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도 존속하여 중앙군의 핵심이 되었다. 그 결과, 약 5,000명의 상비군이 한양에 주둔하게 되었다.[1]

2. 2. 어영청 설치 (1623년)

인조는 반정을 통해 집권한 이후, 국내외적으로 급변하는 정세에 대비하고자 수도 방어를 강화하려 했다. 어영청 설치는 후금과의 전투에 대비해 모집한 260명의 어영 군사가 이괄의 난(1624년) 때 해산되지 않고 국왕 호위에 투입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1652년 효종의 북벌 계획에 따라 규모가 확대되어 중앙 군영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1]

2. 3. 금위영 설치 (1682년)

숙종은 한성을 방어하고 국왕을 호위하기 위해 8만 5천 명의 병력으로 수도 방어사(수도 방어영, 금위영)를 창설했다. 이 중 3만 명은 다른 4군영의 군사 요소를 기반으로 한 전문 병력이었다. 영조에 의해 독립적인 부대로 재편성되었다.[6][7][8][9] 금위영은 삼군영 중 마지막으로 창설되었으며, 한성의 방어를 강화하고 상비군의 훈련으로 인한 재정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 설립되었다. 1682년, 수도 방어영은 병조의 정초청(精抄廳)과 훈련원의 훈련별대(訓鍊別隊) 병력을 통합하여, 훈련도감어영청과 함께 한성을 방어하는 삼군영 체제를 완성했다.[1][3]

2. 4. 삼군영의 개편 (18세기)

1745년 이인좌의 난 이후, 영조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간의 업무 혼선을 인지하고, 수도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군영의 책임을 세분화하여 더욱 상세하게 개편했다.[1]

1746년 (영조 22년), 영조는 수도 방어를 위해 진지를 구축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서울의 다섯 구역에 거주하는 민간인을 삼군영(三軍營)으로 알려진 세 부대로 나누었다.[1]

2. 5. 삼군영의 폐지 (1884년)

1884년, 삼군영은 19세기 말 조선군의 근대화 과정에서 폐지되었다.[1]

3. 편제 및 조직

각 부대는 고유한 깃발을 사용했는데, 훈련도감은 노란색, 금위영은 파란색, 어영청은 흰색 깃발을 사용했다. 이 깃발들은 각 부대의 구역 이름과 삼군문 소속을 나타냈다.[5]

3. 1. 군사 구성

훈련도감은 1593년 임진왜란(1592년-1598년) 중에 창설되었다. 조선군이 일본군의 조총에 고전하자,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참고하여 삼수병(三手兵) 체제(조총, 활, 칼, 창을 사용하는 병사)를 갖추었다. 처음에는 임시 조직이었지만, 임진왜란 이후에도 존속하여 중앙군의 핵심이 되었다. 그 결과, 약 5,000명의 상비군이 한양에 주둔하게 되었다.[1]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인조 정권은 수도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어영청을 설치했다. 어영청은 후금과의 전투를 대비하여 모집된 260명의 어영 군사가 이괄의 난(1624년) 때 해산되지 않고 국왕 호위에 투입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1652년 효종의 북벌 계획에 따라 규모가 확대되면서 중앙 군영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1]

숙종은 한성을 방어하고 국왕을 호위하기 위해 8만 5천 명의 병력으로 수도 방어사(수도 방어영, ''금위영'')를 창설했다. 이 중 3만 명은 다른 4군영의 군사 요소를 기반으로 한 전문 병력이었다. 영조에 의해 독립적인 부대로 재편성되었다.[6][7][8][9] 금위영은 삼군영 중 마지막으로 창설되었으며, 한성의 방어를 강화하고 상비군의 훈련으로 인한 재정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 설립되었다. 1682년, 수도 방어영은 병조의 정초청(精抄廳)과 훈련원의 훈련별대(訓鍊別隊) 병력을 통합하여, 훈련도감어영청과 함께 한성을 방어하는 삼군영 체제를 완성했다.[1][3]

훈련도감어영청의 본부와 지사가 창덕궁창경궁 옆(오늘날의 원남동, 연지동, 효제동, 종신동 지역)에 위치해 군인들의 주요 거주지가 되었다.[1][2][3]

지방에서 서울로 온 군인들은 한양에서 집을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낮은 봉급으로 인해 삼군영의 군인들은 상업, 농업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했다. 삼군영 군인들의 이러한 활동은 도시로서의 수도 한양의 기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3]

총 246명의 군인으로 구성된 삼군영은 한성부 전체 지역에서 순찰을 실시했다. 각 부대는 책임을 8개 조로 나누어 총 24명의 지휘관이 222명의 군인을 이끌고 성 안팎에서 야간 순찰을 실시했다.[5]

3. 2. 병력 규모 및 역할

훈련도감임진왜란 중이던 1593년에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 대응하기 위해 창설되었다.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참고하여 삼수병(三手兵) 체제(조총, 활, 칼, 창을 사용하는 병사)를 갖추었고, 처음에는 임시 조직이었으나 임진왜란 이후에도 존속하여 중앙군의 핵심이 되었다. 약 5,000명의 상비군이 한양에 주둔하게 되었다.[1]

어영청인조이괄의 난(1624년) 이후 국왕 호위를 위해 해산하지 않은 260명의 어영 군사를 모체로 설치되었다. 이후 1652년 효종의 북벌 계획에 따라 규모가 확대되면서 중앙 군영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1]

금위영은 숙종이 한성을 방어하고 국왕을 호위하기 위해 8만 5천 명의 병력으로 수도 방어사(수도 방어영)를 창설하면서 만들어졌다. 이 중 3만 명은 다른 4군영의 군사 요소를 기반으로 한 전문 병력이었다. 영조에 의해 독립적인 부대로 재편성되었다.[6][7][8][9] 1682년, 수도 방어영은 병조의 정초청(精抄廳)과 훈련원의 훈련별대(訓鍊別隊) 병력을 통합하여, 훈련도감어영청과 함께 한성을 방어하는 삼군영 체제를 완성했다.[1][3]

삼군영은 총 246명의 군인으로 구성되어 한성부 전체 지역에서 순찰을 실시했다. 각 부대는 책임을 8개 조로 나누어 총 24명의 지휘관이 222명의 군인을 이끌고 성 안팎에서 야간 순찰을 실시했다.[5]

삼군영 군인들은 낮은 봉급으로 인해 상업, 농업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이들은 한양을 지키는 군인이면서 동시에 다양한 직업을 통해 한양 경제의 중심축 역할을 했다.[1][3]

3. 3. 무기 및 복장

훈련도감임진왜란(1592년-1598년) 중 조총에 대응하기 위해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참고하여 삼수병(三手兵), 즉 조총, 활, 칼, 창을 사용하는 병사 체제를 갖추었다.[1] 삼군영은 평상시에는 정복을 착용하고 비가 올 때는 기름을 먹인 비옷을 입었다.[1] 이들은 조총, 활, 그리고 후장식 회전포(불랑기포[佛郞機砲])로 무장했다.[3] 각 부대는 훈련도감은 노란색 깃발, 금위영은 파란색 깃발, 어영청은 흰색 깃발을 사용했다.[5]

4. 주요 임무 및 활동

1704년(숙종 30년), 숙종은 한성부 방어를 강화하고 국왕을 호위하기 위해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을 삼군문(三軍門)으로 묶어 경비를 담당하게 했다.[1] 1745년(영조 21년), 이인좌의 난 이후 영조는 삼군영 간 업무 혼선을 바로잡고 수도 질서 유지를 위해 군영 책임을 세분화했다.[1] 1746년(영조 22년)에는 수도 방어 진지 구축 명령을 내리고, 서울 거주 민간인을 삼군영으로 나누어 편성했다.[1]

삼군영 군사들은 수도 방어, 궁궐 호위, 군사 훈련 외에도 준천(청계천 바닥을 깊게 파 물길을 확보하는 사업)과 금송(소나무 벌채 금지) 등 도시 유지 사업에도 동원되었다.[1] 1759년(영조 35년)에는 군사들에게 무과 시험을 치르게 했다.[1]

삼군영은 19세기 말 조선군 근대화 과정에서 1884년에 폐지되었다.

4. 1. 수도 방어 및 순찰

훈련도감은 1593년 임진왜란(1592년-1598년) 중에 창설되었다. 조선군이 일본군의 조총에 고전하자, 새로운 군대가 필요했다. 명나라 장수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참고하여 삼수병(조총, 활, 칼, 창을 다루는 병사) 체제를 갖추었다. 처음에는 임시 조직이었지만, 임진왜란 이후에도 중앙군의 핵심이 되었다. 약 5,000명의 상비군이 한양에 주둔했다.[1]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후, 급변하는 정세에 대비하여 수도 방어를 강화했다. 어영청후금과의 전투를 위해 모집된 260명의 어영 군사가 이괄의 난(1624년) 때 해산되지 않고 국왕 호위에 투입되면서 시작되었다. 1652년 효종의 북벌 계획에 따라 규모가 커지면서 중앙 군영이 되었다.[1]

숙종은 한성을 방어하고 국왕을 호위하기 위해 8만 5천 명의 병력으로 수도 방어사(수도 방어영, ''금위영'')를 만들었다. 이 중 3만 명은 다른 4군영의 군사를 기반으로 한 전문 병력이었다. 영조 때 독립적인 부대로 재편성되었다.[6][7][8][9] 금위영은 삼군영 중 마지막으로 만들어졌으며, 한성 방어를 강화하고 상비군 훈련으로 인한 재정 부담을 줄이기 위해 설립되었다. 1682년, 수도 방어영은 병조의 정초청(精抄廳)과 훈련원의 훈련별대(訓鍊別隊) 병력을 통합하여, 훈련도감어영청과 함께 한성을 방어하는 삼군영 체제를 완성했다.[1][3]

도성삼군문 경계 지도를 설명하는 삽화 파일.


영조 재위 기간 동안의 선원보와 선원등록청.


삼군영의 방어 책임은 다음과 같았다.

군영담당 구역
훈련도감주로 북부와 서부, 중부 지역 일부
금위영주로 남부와 서부, 중부 지역 일부
어영청주로 동부 지역과 남부, 중부, 서부 지역 일부

[5]

1759년에는 군사들에게 무과 시험을 보게 했다. 삼군영의 군사들은 수도 방어, 궁궐 호위, 군사 훈련 외에도 준천(청계천 바닥을 깊게 파서 물이 쉽게 흐르도록 하는 사업)과 금송(소나무 벌채 금지 사업)과 같은 도시 유지에도 동원되었다.[1][10][3]

궁궐을 포함한 도성 안팎 방어를 위해 엄격한 순찰을 했다.

군영순찰 구역
훈련도감돈의문에서 종각까지 서쪽, 숭례문에서 마포까지 남쪽, 형인문에서 종암까지 동쪽
금위영도성 안에서 동대문과 서대문을 경계로 남산에서 삼청동까지 북쪽, 도성 밖에서는 서빙고, 마포, 망원정 주변
어영청도성 안에서는 오간수문에서 청계천까지, 서대문에서 종각까지, 도성 밖에서는 아현에서 모화관까지, 홍제원을 포함하여, 동대문에서 왕십리, 뚝섬, 제기동, 종암동, 마포, 용산까지

[5]

삼군영은 성곽과 궁궐 경내 침입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매일 점검했다. 침입이 발견되면 책임 부서에서 해당 지역을 수리하고 보강했다.

군영책임 구역
훈련도감숙정문 동쪽에서 무사석까지
금위영돈의문에서 광희문 근처 남촌까지
어영청광희문에서 숙정문까지

[5]

4. 2. 성곽 및 궁궐 경비

훈련도감임진왜란조총에 대응하기 위해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참고하여 삼수병 체제로 창설된 중앙군의 핵심이었다.[1] 인조이괄의 난(1624년) 이후 수도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어영청을 설치했고, 효종 대에 북벌 계획으로 규모가 확대되었다.[1] 숙종은 한성 방어와 국왕 호위를 위해 8만 5천 명 규모의 수도 방어사(수도 방어영, 금위영)을 창설했다. 금위영훈련도감어영청과 함께 한성을 방어하는 삼군영 체제를 완성했다.[1][3]

삼군영의 방어 책임 구역은 다음과 같았다.[5]

군영담당 구역
훈련도감주로 북부와 서부, 중부 지역 일부
금위영주로 남부와 서부, 중부 지역 일부
어영청주로 동부 지역과 남부, 중부, 서부 지역 일부



삼군영은 궁궐을 포함한 도성 안팎을 엄격하게 순찰했다.[5]

군영순찰 구역
훈련도감돈의문에서 종각까지 서쪽, 숭례문에서 마포까지 남쪽, 형인문에서 종암까지 동쪽
금위영도성 안에서 동대문과 서대문을 경계로 남산에서 삼청동까지 북쪽, 도성 밖에서는 서빙고, 마포, 망원정 주변 지역
어영청도성 안에서는 오간수문에서 청계천까지, 서대문에서 종각까지, 도성 밖에서는 아현에서 모화관까지, 홍제원을 포함하여, 동대문에서 왕십리, 뚝섬, 제기동, 종암동, 마포, 용산까지



삼군영은 성곽과 궁궐 경내 침입 여부를 매일 점검하고, 침입이 발견되면 해당 지역을 수리 및 보강했다. 삼군영의 책임 구역은 숙정문 동쪽에서 무사석까지는 훈련도감, 돈의문에서 광희문 근처 남촌까지는 금위영, 광희문에서 숙정문까지는 어영청이었다.[5]

4. 3. 도시 유지 및 경제 활동

1704년, 숙종은 한성부의 방어를 강화하고 국왕을 호위하기 위해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을 삼군문(三軍門)의 경비로 담당하게 했다.[1]

1745년, 이인좌의 난 이후, 영조는 이들 진영 간의 업무 혼선을 인지하고, 수도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군영의 책임을 세분화하여 더욱 상세하게 개편했다.

1759년에는 군사들에게 무과 시험을 치르도록 했다. 삼군영의 군사들은 수도 방어, 궁궐 호위, 군사 훈련 외에도 준천(청계천 바닥을 깊게 파서 물이 쉽게 흐르도록 하는 사업)과 금송(소나무 벌채 금지 사업)과 같은 도시 유지에도 동원되었다.[1]

궁궐을 포함한 도성 안팎의 방어를 위해 엄격한 순찰을 실시했다. 훈련도감은 돈의문에서 종각까지 서쪽, 숭례문에서 마포까지 남쪽, 형인문에서 종암까지 동쪽을 순찰했다. 금위영은 도성 안에서 동대문과 서대문을 경계로 하여 남산에서 삼청동까지 북쪽을 순찰했다. 도성 밖에서는 서빙고, 마포, 망원정 주변 지역을 순찰했다. 어영청은 도성 안에서는 오간수문에서 청계천까지, 서대문에서 종각까지 순찰했다. 도성 밖에서는 아현에서 모화관까지, 홍제원을 포함하여, 동대문에서 왕십리, 뚝섬, 제기동, 종암동, 마포, 용산까지 순찰했다.[5]

삼군영은 성곽과 궁궐 경내에 대한 침입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매일 점검을 실시했다. 만약 침입이 발견되면 책임 부서에서 해당 지역의 수리 및 보강을 담당했다. 숙정문 동쪽에서 무사석까지는 훈련도감, 돈의문에서 광희문 근처 남촌까지는 금위영, 광희문에서 숙정문까지는 어영청의 책임이었다.[5]

총 246명의 군인으로 구성된 삼군영은 한성부 전체 지역에서 순찰을 실시했다. 각 부대는 책임을 8개 조로 나누어 총 24명의 지휘관이 222명의 군인을 이끌고 성 안팎에서 야간 순찰을 실시했다.[5]

삼군영의 방어 책임은 다음과 같았다.

  • 훈련도감: 주로 북부와 서부, 중부 지역 일부
  • 금위영: 주로 남부와 서부, 중부 지역 일부
  • 어영청: 주로 동부 지역과 남부, 중부, 서부 지역 일부[5]


지방에서 서울로 온 군인들은 한양에서 집을 구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낮은 봉급으로 인해 삼군영의 군인들은 상업, 농업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했다. 삼군영 군인들의 이러한 활동은 도시로서의 수도 한양의 기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들은 한양을 지키는 군인들이었지만, 동시에 다양한 직업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새로운 유형의 도시 거주자였다. 그들은 한양 경제의 중심축 역할을 함으로써 한양이 도시로서 기능하도록 만든 사람들이었다.[1][3]

5. 주요 인물

이지건과 이우복이 삼군영에 소속되어 있었다.

참조

[1] 뉴스 도성을 지켰던 삼군영 군인은 모두 몇 명? https://www.koya-cul[...] Woori Culture Newspaper 2023-11-01
[2] 뉴스 ‘한양을 지켜라’ 조선 삼군영 군인의 삶 엿보기 http://www.sijung.co[...] Sijeong Ilbo 2023-11-01
[3] 뉴스 "[SC서울문화] 한양을 지켜라~ 삼군영 소속 한 군인 집안의 고군분투기" https://www.seoulcit[...] Seoul City 2023-11-01
[4] 웹사이트 영조 개천을 치다 https://www.sisul.or[...] Seoul Facilities Corporation 2023-11-01
[5] 웹사이트 임란의 경험에서 나온 조선 후기의 수도 방어 체제 http://contents.hist[...]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2023-11-01
[6] 웹사이트 오군영(五軍營) http://encykorea.aks[...]
[7] 웹사이트 오군영 https://tcatmon.com/[...]
[8] 서적 The Age of Gunpowder An Era of Technological, Tactical, Strategic, and Leadership Innovations https://history.emor[...] Emory College 2013
[9] 서적 The Seoul City Wall Walking the History of Seoul https://www.seoulsol[...] The Seoul Institute 2018
[10] 뉴스 도성을 지켰던 삼군영 군인은 총 몇 명이었을까? https://www.rcnews.c[...] Residential Environment News 2023-11-01
[11] 뉴스 도성을 지켰던 삼군영 군인은 모두 몇 명? https://www.koya-cul[...] Woori Culture Newspaper 2023-11-01
[12] 뉴스 ‘한양을 지켜라’ 조선 삼군영 군인의 삶 엿보기 http://www.sijung.co[...] Sijeong Ilbo 2023-11-01
[13] 뉴스 "[SC서울문화] 한양을 지켜라~ 삼군영 소속 한 군인 집안의 고군분투기" https://www.seoulcit[...] Seoul City 2023-11-01
[14] 웹인용 영조 개천을 치다 https://www.sisul.or[...] Seoul Facilities Corporation 2023-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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