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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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별초는 고려 무신정권 시기 최우가 조직한 사병 야별초에서 기원한 군사 조직이다. 몽골의 침략으로 최씨 정권이 몰락하고 고려 원종이 개경 환도를 단행하자, 이에 반발하여 배중손, 노영희 등의 지휘 아래 항쟁을 시작했다. 왕족 왕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강화도에서 진도로 근거지를 옮겨 항쟁을 이어갔으며, 이후 제주도로 이동했으나 1273년 김통정의 지휘 아래 항쟁을 마무리했다. 삼별초는 일본에 몽골을 비난하며 군사 지원을 요청하는 등 외교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삼별초의 잔존 세력이 오키나와로 건너갔다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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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정권은 1170년 정중부의 난부터 1270년 임유무 피살까지 약 100년간 고려에서 무신들이 권력을 잡았던 시대로, 문벌 귀족 사회의 폐단과 무신 차별에 불만을 품은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켜 수립되었으며, 이의방, 정중부, 최충헌 등의 권력자를 거쳐 최씨 무신정권 시대를 대표적으로 거쳤으나 몽골 침입과 내부 권력 투쟁으로 붕괴되어 고려가 원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삼별초 | |
---|---|
개요 | |
명칭 | 삼별초 (三別抄) |
로마자 표기 | Sambyeolcho |
종류 | 군사 조직 |
상세 정보 | |
활동 시기 | 고려 후기 |
주요 활동 | 몽골 제국에 대한 항쟁 |
조직 |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 |
주요 인물 | 배중손 이승온 김통정 |
결성 배경 | 최씨 무신정권의 사병 집단 |
해체 | 여몽연합군에 의해 진압 |
역사적 의의 | |
의의 | 몽골 제국에 대한 고려인의 저항 정신을 보여줌 |
영향 | 제주도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영향을 미침 |
2. 유래
별초(別抄)는 몽골 침입 이전부터 존재했던 군사 조직으로, 기존의 정규 군대 외에 필요에 따라 새로 편성된 부대를 가리킨다. 별초는 무신정권 초기에 일어난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그 활동이 기록되었다. 이후 별초는 지역별, 신분별로 다양하게 편성되기도 하였다.
1231년 몽골의 침략이 시작되자, 당시 고려의 실권자였던 최우를 비롯한 최씨 정권의 지배층은 강화도로 수도를 옮겨 항전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오랜 전쟁과 무신정권의 수탈로 국력은 피폐해져 갔다.
몽골 제국의 침략과 최씨 정권을 비롯한 무신정권 시기를 거치며, 삼별초는 정권의 사병 조직에서 점차 국가의 군사력을 실질적으로 담당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1270년, 원종이 몽골의 요구를 받아들여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무신정권의 군사적 기반이었던 삼별초에게 해산 명령을 내렸다. 이는 몽골에 대한 굴복으로 여겨졌고, 삼별초 내부에서는 강한 반발이 일어났다.
삼별초의 직접적인 기원은 1219년 최우가 도둑을 막기 위해 설치한 야별초(夜別抄)이다. 야별초는 본래 최우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조직한 사병 집단의 성격을 가졌으나, 이후 몽골의 침략에 맞서 싸우면서 점차 정규군으로서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또한 최씨 정권의 핵심 경호 기관인 도방의 직속 부대 성격도 띠었다.
야별초의 규모가 커지자 이를 좌별초(左別抄)와 우별초(右別抄)로 나누었다. 이후 몽골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오거나 탈출한 고려인들로 구성된 신의군(神義軍)이 더해지면서, 이 세 부대를 합쳐 '삼별초'라고 부르게 되었다.[6]
삼별초는 경찰 및 군사 활동 등 공적인 임무를 수행했지만, 최씨 무신정권 아래에서는 정권 유지를 위한 '''사병''' 조직의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지휘관으로 도령(都領), 지휘(指揮), 교위(校尉) 등 국가가 임명한 무관들이 있었으므로, 국가의 공식적인 통제를 받는 군사 조직으로서의 모습도 갖추고 있었다.
3. 대몽항쟁의 배경
1258년, 김준 등은 최충헌의 증손자인 최의를 살해하고 60여 년간 지속된 최씨 정권을 무너뜨렸다.[6] 이는 최씨 정권의 독재에 대한 반발이었으나, 무신정권 자체가 종식된 것은 아니었다. 김준에 이어 임연, 그리고 그의 아들 임유무가 차례로 권력을 장악하며 무신 지배 체제는 계속되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원종은 점차 몽골과의 강화를 추진하였다. 결국 1270년 음력 5월, 원에 다녀온 원종은 개경으로의 환도를 결정하였다. 이는 고려가 몽골의 영향력 아래 놓이는 원 간섭기의 시작을 의미하는 중대한 결정이었다. 개경 환도에 반대하며 저항하려던 무신정권의 마지막 집권자 임유무는 원종의 회유를 받은 삼별초에 의해 제거되었다. 이로써 1170년 무신정변 이후 약 100년간 지속되며 왕권을 능가하는 권력을 휘둘렀던 무신정권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6]
4. 대몽항쟁
결국 1270년 음력 6월, 배중손과 노영희 등 삼별초 지휘관들은 개경 환도를 거부하고 몽골에 맞서 항쟁을 이어가기로 결정했다.[6] 이들은 왕족인 승화후 온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고, 강화도의 물자와 인력을 모아 남쪽의 진도로 근거지를 옮겼다. 진도는 과거 최씨 정권의 농장이 있었고, 전라도와 경상도의 세곡이 모이는 해상 교통의 요충지였기에 항쟁의 거점으로 적합했다.[6]
진도에 도착한 삼별초는 용장사를 임시 궁궐로 삼고 주변에 용장성을 쌓아 수도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들은 진도를 중심으로 남해안 일대를 장악하고 독자적인 정부를 세워 고려의 정통성을 주장했으며, 일본에 사절을 보내 외교 관계를 시도하기도 했다. 1270년 음력 11월에는 제주도까지 세력권을 넓혔다.[6]
그러나 여몽연합군의 공세에 밀려 1271년 진도에서, 1273년에는 마지막 거점이었던 제주도에서 패배하며 삼별초의 항쟁은 막을 내렸다.
4. 1. 진도 항쟁
1271년 음력 5월, 몽골의 주도로 고려-몽골 연합군이 조직되어 좌군·중군·우군, 세 방향으로 나누어 진도를 공격해왔다. 삼별초는 진도의 관문이었던 벽파진에서 연합군 중군을 막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삼별초가 중군 방어에 집중하는 동안, 연합군의 좌군과 우군이 그 틈을 타 배후와 측면에서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이 공격으로 성은 순식간에 함락되었고, 삼별초의 지휘자 배중손과 삼별초가 왕으로 추대한 승화후 온이 전사하였다. 지휘부를 잃은 삼별초는 혼란에 빠져 흩어져 각자 피신하였다. 김방경, 홍다구 등이 이끈 고려-몽골 연합군에 의해 진도의 삼별초 세력은 와해되었다.[6]
진도 항쟁 기간 동안 삼별초는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에 구원을 요청하기도 했으나, 일본 조정과 막부 모두 이를 묵살했다. 또한 1271년 2월 몽골로부터 항복 요구를 받았을 때, 배중손 등 지도부는 전라도 할양을 조건으로 몽골 조정에 직접 복속하겠다는 협상안을 제시하기도 했으나[2], 몽골 측이 이를 거부하면서 협상은 결렬되었다. 이러한 외교적 고립과 내부적 전략의 한계는 진도에서의 패배를 앞당기는 요인이 되었다.
4. 2. 제주도 항쟁
1271년 음력 5월 진도가 함락된 후, 살아남은 삼별초 병사들은 김통정의 지휘 아래 혼란을 수습하고 제주도로 후퇴하였다. 이후 삼별초는 제주도에서 성을 쌓고 방어 시설을 갖추며 여몽 연합군에 항거하였다.
그러나 1273년 음력 4월, 김방경, 홍다구 등이 이끄는 1만여 명의 여몽 연합군이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여 제주도에 상륙했다. 삼별초는 힘없이 무너졌고, 지휘자 김통정은 산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로써 4년에 걸친 삼별초의 항쟁은 막을 내렸다.[6] 삼별초가 완전히 진압되자 몽골은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여 직접 관리하였다.
5. 일본과의 관계
진도에 도착하여 용장사를 임시 궁궐로 삼고 산성과 관아를 세운 삼별초는 남해안 일대를 장악하고 해상력을 기반으로 새로운 정부를 건설하였다.[6] 이들은 스스로 고려의 정통 정부임을 내세우며 일본 등 주변국과 외교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1271년 삼별초는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에 사신을 보내 국서를 전달하고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일본 측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묵살하였다. 당시 일본이 삼별초의 요청을 거절한 배경에는 이전 고려 정부가 보낸 국서와 내용상 차이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일본 도쿄대학 사료편찬소에는 《고려첩장 불심조조》(高麗牒状不審条々)라는 제목의 문서가 소장되어 있다. 이 문서는 1271년 삼별초가 보낸 국서의 내용 중, 이전에 원종 정부가 보낸 국서(1267년 또는 1268년 추정)와 다른 점들을 일본 측에서 기록해 둔 메모이다. 일본의 구게(公家)였던 요시다 쓰네나가(吉田経長)의 일기 《길속기》(吉續記)에는 분에이(文永) 8년(1271년) 9월 5일에 고려로부터 첩장이 전해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9] 이것이 삼별초가 보낸 국서로 추정된다.
《고려첩장 불심조조》를 통해 삼별초가 보낸 국서의 대략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이전 원종 정부의 국서가 몽골의 위엄과 덕을 찬양했던 것과는 달리, 삼별초의 국서는 '위취(韋毳, 짐승 가죽을 걸친 자)'나 '피발좌임(被髮左袵, 머리를 풀어헤치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밈)'과 같은 표현을 써가며 몽골을 비난하고, 수도를 진도로 옮겼음을 알리며 일본에 군사 지원(胡騎數萬兵)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이는 당시 진도를 거점으로 항쟁하던 삼별초 세력의 입장을 반영하는 것이다.
항목 | 이전 국서 (원종 정부, 1268년) | 이번 국서 (삼별초, 1271년) | 일본 측 의문 |
---|---|---|---|
몽골에 대한 태도 | 몽골의 덕을 찬양 | 위취자(韋毳者)라 비난하며 멀리 내다보지 못한다고 함 | 어찌된 일인가? |
연호 사용 | 몽골 연호 사용 | 연호 미사용 | 어찌된 일인가? |
수도 및 정권 인식 | 몽골에 귀부하여 군신의 예를 이룸 | 강화도 40년, 피발좌임(被髮左袵)은 성현이 꺼린 것이라며 진도로 천도했다고 함 | 어찌된 일인가? |
전쟁 원인 | - | 앞부분: 몽골을 따르지 않아 전쟁 발생 / 뒷부분: 몽골이 고려를 부림 | 전후 내용이 서로 다르다. 어찌된 일인가? |
표류민 송환 | - | 풍랑으로 표류된 자들을 호송한다고 함 | - |
병력 파견 | - | 김해부 병사 20여 명을 먼저 일본국으로 보낸다고 함 | - |
국가 정통성 | - | 우리 본조(고려)가 삼한을 통합했다고 함 | - |
국가 운영 방침 | - | 사직을 안녕케 하면서 하늘의 때를 기다린다고 함 | - |
군사 지원 요청 | - | 수만의 호기(胡騎)를 청한다고 함 | - |
외교적 요청 | - | 흉악한 상소가 도착하더라도 너그러이 용서해 달라고 함 | - |
예물 | - | 예물을 드린다고 함 | - |
사신 파견 요청 | - | 귀조(일본)가 사신을 보내 방문하라고 함 | - |
삼별초는 국서를 통해 진도 정부가 고려의 정통 정부임을 강조하고, 몽골 침략이라는 공동의 위협에 맞서 일본과 협력하기를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10][11]
1271년 진도가 함락된 이후에도, 일본으로 파견되었던 삼별초의 사신은 한동안 외교 활동을 지속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271년 9월 19일 일본에 도착한 원의 사신 조양필(趙良弼)과 관련된 기록에는, 고려 탐라(제주도)의 삼별초 세력이 조양필의 사행을 방해하려 했다는 내용이 나타난다.[12] 또한, 도단공(徒單公) 리(履)가 지은 석각 사료 《찬황복현기》(贊皇복顯記)에도 조양필의 공적을 기리며 "반적 탐라가 (조양필의) 길을 막았다"는 기록이 있어, 삼별초 잔존 세력의 외교적 저항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6. 삼별초의 이후
20세기 후반, 오키나와현 우라소에시에 위치한 류큐 왕국 시대의 왕족 무덤인 우라소에 요도레에서 고려 시대의 기와가 발굴되었다. 이 기와의 문양은 삼별초가 진도에 건설했던 용장성 터에서 출토된 기와의 문양과 유사하다. 우라소에 요도레에서 발견된 기와에는 "계유년고려와장조(癸酉年高麗瓦匠造)"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계유년에 해당하는 해는 1153년, 1273년, 1333년, 1393년 등이다.
고쿠시칸 대학의 토다 유지 교수는 이 기와가 1273년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만약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는 삼별초가 제주도에서 마지막 항쟁을 벌이다 패배한 해와 일치하므로, 당시 삼별초의 생존자들이 오키나와로 피신했을 수 있다는 추측으로 이어진다.[3] 실제로 그 시대 토쿠노시마에는 이미 고려의 도공들이 건너가 카무이 야키라는 도자기를 생산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실시되며[4], 『류큐국유래기』에는 우라소에 요도레가 류큐 왕국의 첫 왕통을 세운 에이소 왕에 의해 함순 연간(1265년~1274년)에 건립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연대적으로 일치한다.
7. 역대 지휘자
삼별초는 최우가 도둑을 막기 위해 설치한 야별초(夜別抄)에서 비롯되었다. 야별초는 1219년 최우가 권력 유지를 위해 조직한 사병 집단이었으나, 이후 몽골의 침략에 맞서는 정규군으로 개편되었다. 야별초는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뉘었으며, 몽골에 포로로 잡혔다가 돌아오거나 탈출한 이들로 구성된 신의군(神義軍)을 더해 삼별초라 불리게 되었다.[6] 삼별초는 경찰 및 군사 임무를 수행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최씨 무신정권의 사병적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지휘관으로 무반 관료가 임명되는 등 국가의 통제를 받는 군사 조직이기도 했다.
삼별초의 주요 지휘자는 다음과 같다.
- 배중손 (? ~ 1271년) : 전 신의군의 지휘관 출신으로 삼별초 전체를 이끌었다. 1270년 고려 정부의 개경 환도 결정에 반발하여 항쟁을 시작했으며, 왕족인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진도로 근거지를 옮겨 항전했다.
- 승화후 온 (? ~ 1271년) : 배중손에 의해 삼별초 정권의 왕으로 추대된 고려 왕족이다. 진도에서 항쟁을 이끌었으나 1271년 진도 전투 패배 후 여몽연합군에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 김통정 (? ~ 1273년) : 1271년 진도 함락 이후 살아남은 삼별초 병력을 이끌고 제주도로 이동하여 항쟁을 계속했다. 1273년까지 삼별초를 지휘했으나, 여몽연합군의 총공세에 패배하여 자결함으로써 삼별초의 항쟁은 막을 내렸다.
7. 1. 배중손
배중손(裵仲孫, ? ~ 1271년)은 고려 후기의 무신으로, 삼별초 항쟁의 주요 지도자였다. 그는 본래 몽골과의 전투 경험이 있는 신의군의 지휘관이었으며, 이후 삼별초 조직 전체를 이끄는 총지휘관이 되었다.[6] 1270년 원종이 몽골과의 강화를 맺고 개경 환도를 추진하자, 배중손은 이에 반발하여 삼별초를 이끌고 대몽 항쟁을 이어가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왕족인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하여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고, 강화도를 떠나 진도로 근거지를 옮겼다. 진도에서 용장성을 중심으로 방어 체계를 구축하고 항쟁을 계속했으나, 1271년 김방경 등이 이끄는 고려-몽골 연합군의 대규모 공격을 받아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하였다.7. 2. 승화후 온
승화후 온(재위: 1270년 ~ 1271년)은 고려의 왕족으로, 1270년 삼별초의 지도자 배중손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몽골의 침략에 맞서 고려의 자주성을 지키려 한 삼별초 정권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진도로 근거지를 옮겨 항몽 투쟁을 이어갔으며, 이 과정에서 승화후 온과 삼별초는 여러 차례 고려-몽골 연합군을 격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271년 진도 전투에서 삼별초가 패배하고 배중손이 전사하자, 승화후 온 역시 연합군에 체포되어 처형당하며 그의 짧은 재위는 막을 내렸다.7. 3. 김통정
1271년 음력 5월, 여몽 연합군의 공격으로 진도가 함락되고 배중손과 승화후 온이 사망하자, 김통정은 살아남은 삼별초 병사들을 이끌고 혼란을 수습하여 제주도로 이동했다. 그는 1271년부터 1273년까지 삼별초를 지휘했다.제주도에서 김통정은 상당한 규모의 외성을 쌓는 등 항전 준비를 갖추고 여몽 연합군에 맞서 싸웠다. 삼별초는 끈질기게 저항하며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그러나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가 일본 정벌을 추진하면서 전략적 요충지인 제주도(당시 탐라)를 확보하려 했다.
결국 1273년 음력 4월, 여몽 연합군 진압군 1만여 명이 제주도에 상륙하여 총공세를 펼쳤고, 삼별초는 힘없이 무너졌다. 김통정은 산 속으로 피신했으나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이로써 4년에 걸친 삼별초의 항쟁은 막을 내렸다.[6]
8. 고려 군대 계보
별초(別抄)는 몽골 침입 이전부터 등장하는데, 기존의 정규 군사조직 이외의 새로이 편성된 군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후 별초는 지역별 별초, 신분별 별초 등으로 변화하게 되는데, 이는 고려 전기의 군사 조직을 대체하는 새로운 군사 조직의 등장을 의미한다. 첫 등장은 무신정권 초반기에 발생한 조위총이 일으킨 반란 때부터이다. 대몽항쟁과 관련하여서는 야별초 등이 주로 언급되지만, 지역이나 신분별 별초군 또한 대몽항쟁기에 활동한 모습이 확인된다.
삼별초는 처음에 최우가 도둑을 막기 위해 설치한 야별초(夜別抄)에서 유래한다. 야별초는 1219년 최우가 권력 보호를 위해 조직한 사병이었는데, 뒤에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는 정규군으로 편성되었으며, 도방의 직할 부대의 성격을 띠게 된다. 그에 따라 야별초는 다시 좌별초, 우별초로 나뉘었으며, 몽골에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오거나 탈출한 이들로 이루어진 신의군을 포함하여 삼별초라 불렀다.[6] 삼별초는 주로 경찰·군사 등의 공적(公的) 임무를 띠었으나 무인 정권기의 특성상, 실질적으로는 '''최씨 무신정권의 사병'''에 가까운 조직이었다. 한편으로 그 지휘관에는 도령(都領)·지휘(指揮)·교위(校尉) 등의 무반관료들이 임명되어, 어디까지나 국가의 통제를 받는 군조직이기도 하였다.
참조
[1]
웹사이트
삼별초(三別抄)
http://encykorea.aks[...]
2018-06-24
[2]
서적
元史
元史
1271-04-26
[3]
블로그
珍島からイルボンへ
https://kinur.exblog[...]
[4]
간행물
11~12世紀初頭の日麗交流と東方ユーラシア情勢
帝国書院
2014
[5]
뉴스
사라진 삼별초, 오키나와 건너가 류큐왕국 세웠나?
http://news.chosun.c[...]
[6]
뉴스
문신정권에 맞서다 호국항쟁의 화신이 되다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8-12-11
[7]
논문
김해부 둔병 20명의 실체에 대해 이시이 마사토시(石井政敏)는 몽골에서 일본으로 가는 조양필 일행의 정보를 전하기 위해 일본에 보내어진 병사로 해석한 바 있는데(「분에이 8년에 일본에 왔던 고려 사신에 대하여―삼별초의 일본통교사료의 소개―」(文永八年来日の高麗使について―三別抄の日本通交史料の紹介―) 《도쿄대학사료편찬소보》(東京大學史料編纂所報) 12, 1978, 5쪽). 김윤곤은 당시의 전후 상황과 맞지 않은 해석이라고 지적하였다(김윤곤, 「三別抄의 對蒙抗戰과 地方郡縣民」《한국 중세의 역사상》 (경산: 영남대학교출판부, 2001), 326~329쪽). 류영철은 이들을 앞서 김해에 쳐들어왔다가 삼별초에 억류되었던 왜구로 이해하였다(류영철 「고려첩장불심조조의 재검토」《한국중세사연구》1, 1994, 169~170쪽)
[8]
논문
류영철은 '수만'이라는 병력 규모의 막연성, 또 병력을 요청하면서 상대의 군대를 오랑캐를 지칭하는 용어인 '胡騎'로 명시한 점을 들어 삼별초 정부가 요청했을 가능성을 배제하였는데(같은 논문, 1994, 171쪽). 이에 대해 배상현은 본 문서가 기본적으로 고려측에서 보낸 '첩장'에 대한 당시 일본측의 이해를 반영한 내용이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며 '胡騎'에서 '胡'가 '간극'(戈戟)을 의미하기도 하는 만큼 '잘 무장된 기병'을 요청한 대목으로도 이해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배상현 「삼별초의 남해 항쟁」《역사와 경계》57, 2005, 105쪽).
[9]
서적
伴牒狀趣, 蒙古兵可來責日本, 又乞糴, 此外乞救兵歟, 就狀了見區分.
서울대출판부
[10]
논문
이시이 마사토시(石井政敏), 같은 논문, 1978; 류영철, 같은 논문, 1994; 윤용혁 「삼별초와 여일관계」《몽골의 고려 · 일본 침공과 한일관계》동북아역사재단 편, 경인문화사, 2009 및 같은 사람 《삼별초》 도서출판 혜안, 2014, 188~189쪽.
[11]
서적
윤용혁은 삼별초의 대일첩장은 일본과의 연대에 의한 대몽 공동 대항이 일차적인 목표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삼별초가 제주도 이외의 일본 열도의 유용성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위기시 배후 피란지를 확보한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윤용혁, 같은 책, 도서출판 혜안, 2014, 189쪽).
도서출판 혜안
2014
[12]
논문
旣至, 宋人高麗聃羅, 共沮澆其事
北海道教育大学 史學會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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