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쿠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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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쿠치 씨는 일본의 무가 씨족으로, 삼국지 위지 왜인전에 등장하는 구노국의 관직 구고지비구를 기쿠치히코와 연관 짓는 설을 통해 기원한다. 후지와라노 다카이에의 손자 후지와라노 노리타카가 히고국에 정착하며 후지와라 성을 자칭했다는 설이 유력하나, 기씨, 구고지비구 후예, 겐지 등 다양한 기원 설이 존재한다. 겐페이 전쟁, 가마쿠라 시대, 남북조 시대를 거치며 규슈 지역에서 세력을 떨쳤으나, 센고쿠 시대에 가문 내 분열과 주변 세력의 압박으로 멸망했다. 기쿠치 씨는 멸망 이후에도 다양한 방계 가문과 후손을 통해 그 명맥을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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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쿠치씨 | |
|---|---|
| 기본 정보 | |
| 성씨 (일본어) | 菊池氏 (きくちし, Kikuchi-shi) |
![]() | |
| 가문 | 후지와라 씨 미나모토 씨 (다른 이론) 귀실 씨 (다른 이론) 기 씨 (다른 이론) |
| 본거지 | 히고 국 |
| 창시자 | 기쿠치 노리타카 (추정) |
| 마지막 통치자 | 기쿠치 유리코 |
| 설립 연도 | 1070년 (추정) |
| 해체 연도 | 1554년, 오토모 소린의 침공 |
| 분가 | 아카호시 씨 조 씨 사이고 씨 |
| 가계 | |
| 본성 | 후지와라 씨 (藤原氏) (주장) |
| 가조 | 후지와라 노리타카 |
| 씨족 정보 | |
| 가문 문장 | (나라비타카노하) |
| 출신지 | 히고 국기쿠치 군 |
| 주요 인물 | 기쿠치 다카나오 기쿠치 다케후사 기쿠치 다케토키 기쿠치 다케시게 기쿠치 다케미쓰 기쿠치 다케토모 |
| 분파 | 히고 씨 (무가) 도요타 씨 (무가) 야쓰시로 씨 (무가) 오오가히라 씨 (무가) 우토 씨 (무가) 아카호시 씨 (무가) 가이 씨 (무가) 이이호시 씨 (무가) 메라 씨 (무가) 다케자키 씨 (무가) 조 씨 (무가) 사이고 씨 (무가) 시키 씨 (무가) |
2. 기원
기쿠치 씨는 여러 가지 기원 설을 가지고 있다.
- 후지와라 북가(藤原北家) 후손설: 헤이안 시대 중관백(中関白) 후지와라노 미치타카의 아들 후지와라노 다카이에의 후손이라고 알려져 왔지만, 1959년 시카 마사카즈(志方正和)는 겐지모노가타리 연구를 통해 도이의 입구 때 다카이에와 함께 싸운 다자이후 관리 후지와라노 마사노리의 후손이며 족보를 위조한 것이라는 설을 제시했고, 현재 이 설이 유력하다.[15]
- 기타 기원 설:
- 오타 아키라(太田亮)는 대대로 다자이후 관리를 지낸 기(紀) 성을 쓰는 지방 호족이라는 설을 주장했다.
- 스즈키 마토시(鈴木真年)는 백제 왕족 출신 도래인 귀실복신의 후예라는 설을 주장했다.
- 구나노쿠니(狗奴国)의 관리 구고지비구(기쿠치히코)의 후예라는 설.
- 고대 기쿠치(鞠智) 족 후예 설.
- 미나모토노 쓰네모토의 후예라는 겐지(源氏) 설.[18]
최근에는 마사노리의 첫 이름이 모토사다(基定)라고 기록된 족보와 유서가 공개되면서, 다카이에의 다섯째 아들 모토사다(히젠노카미 종5위하)라는 학설도 제기되었다. 또한 다카이에에게는 종5위하 우근장감 '노리타다'(則忠), 종5위하 무부소보(武部少輔) '노리무네'(則宗), 종5위하 히젠노카미 '다케시게'(武重) 이렇게 세 명의 동생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기쿠치라는 지명은 헤이안 시대 초기에 편찬된 《속일본기》에 몬무 천황 2년(698년) 다자이후에 명하여 오노(大野), 기이(基肄), 기쿠치(鞠智)의 세 성을 수리하게 했다는 기록에서 처음 나타난다. 나라 시대의 기록에는 '기쿠치 다리히토'(鞠智足人)라는 인명이 보이며, 헤이안 시대 중기 사전 《화명류취초》에는 '久々知'라고 주석되어 있어, 상고 시대부터 '久々知'라고 읽고 '鞠智'로 표기했음을 알 수 있다. 967년에 시행된 《엔기시키》에는 이미 '기쿠치'(菊池)라는 표기가 나타나 이 시기에 '鞠智'를 '菊池'로 바꾸어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2. 1. 초기 기원 설화
일본 헤이안 시대 중관백(中関白) 후지와라노 미치타카의 아들로 다자이노곤노소치(大宰権帥) 후지와라노 다카이에의 후손이라 전해지지만, 실제로는 도이의 입구 때 다카이에와 함께 분전한 다자이후 관리로, 그 전공으로 다자이노쇼니, 쓰시마노카미가 된 후지와라노 마사노리의 후손으로 보인다.[16][15]11세기 후반부터 히고국기쿠치군(구마모토현기쿠치시)의 재지 영주로서 세력을 확대하였다.[16] 헤이안 시대 말 지쇼·주에이의 난 때의 당주 기쿠치 다카나오는 히고 일국의 도료와 같은 존재로서 '''기쿠치노 곤노카미'''(菊池権守)라고 불렸으며, 가마쿠라 시대에는 가마쿠라 막부의 고케닌이 되었고, 가마쿠라 중기의 당주 기쿠치 다케후사는 몽골 습래 때 분전했다.[16]
1333년 기쿠치 다케토키가 규슈 단다이 관저에 쳐들어갔다가 전사했지만, 그 아들 기쿠치 다케시게는 고다이고 천황의 겐무 신정 하에서 히고노카미로 임명되었고, 이후 남북조 시대에 기쿠치 다케시게, 기쿠치 다케토시, 기쿠치 다케미쓰가 규슈의 남조 측 무장으로 활약했다. 남북조 합일 후에는 기쿠치 다케토모가 히고의 슈고가 되고 기쿠치 요시유키까지 이어졌다. 센고쿠 시대에는 아소 고레나가(기쿠치 다케쓰네)와 오토모 시게하루(기쿠치 요시타케) 등이 기쿠치의 이름을 이었지만, 요시타케 시대에 오토모 소린에 의해 멸망당했다.
요시유키의 자손은 휴가국 메라(미야자키현 고유군 니시메라촌)으로 도망쳐서 이후 메라씨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16] 메라 씨는 에도 시대에는 고다이요리아이(산킨코타이를 하되, 5000석 격의 무고(無高)로 히고국 히토요시번 사가라씨의 부양이라는 특수한 고다이요리아이 집안이었다)에 이어 메이지 시대에 기쿠치 성으로 돌아왔으며[17], 남조 충신 기쿠치 씨의 후예라는 유래로 화족의 남작에 서임되었다.
중국 역사서 《삼국지》 ‘위지(魏志)’ 제30권 오환선비동이전왜인조(위지왜인전)에 등장하는 구노국의 관직 구고지비구(くこちひく)를, 그 이름에서 '菊池彦'로 통하는 것으로 보아, 구마모토현 기쿠치군과 기쿠치 씨의 관련을 지적하는 설이 있다. 헤이안 시대 초기에 편찬된 칙찬(勅撰) 사서인 《속일본기》에는 몬무 천황 2년 5월 갑신(698년 7월 8일) 조에 "다자이후에 명하여 오노, 기이, 기쿠치, 이 세 성을 수리하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나라 시대 덴표쇼호 원년 11월 3일(749년 12월 16일)에 나라 도다이지가 오야케노 가제마로(大宅可是麻呂)로부터 진상받은 61명의 노비를 기록한 『노비첩』(奴婢帖)에는 "우쿄 4조 4방 호주 기쿠치 다리히토"(右京四條四坊戸主鞠智足人)의 이름이 보인다. 헤이안 시대 중기 조헤이 연간(931년 - 938년)에 편찬된 사전 《화명류취초》에는 이 지명을 '久々知'라고 주석을 붙이고 있어, 상고에서 고대에 걸쳐 이 지역은 '久々知'라고 읽고 '鞠智'로 표기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호 4년(967년)에 시행된 《엔기시키》에 이미 '기쿠치'(菊池)라는 기재가 있어 이 시기에는 '鞠智'를 '菊池'라고 가자(佳字)를 맞추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기쿠치 씨는 간닌 3년(1019년) 도이의 입구에 공적이 있던 다자이노곤노소치 후지와라노 다카이에의 손자라는 후지와라노 노리타카가 히고국으로 낙향, 그곳에 토착하여 후지와라 성(후지와라 북가)을 자칭하고 각종 족보도 이에 따른 내용이 있지만, 1959년 일본 사학자 시카 마사카즈(志方正和)는 문신이 남긴 일기나 《겐지모노가타리》를 연구한 결과, 후지와라노 다카이에의 후예로 자처한 것은 가모(仮冒), 즉 족보 가탁이며, 후지와라노 다카이에의 부하로 다자이노쇼니였던 노리타카(則隆)의 아버지 후지와라노 마사노리라는 인물에 대해 히고 국 거주자로 기술되어있는 것을 들어, 마사노리-노리타카 부자가 1070년경 기쿠치 주변에 토착했다는 설을 발표하였으며, 이 이론은 현재까지도 유력하다. 이러한 출자에 대해, 오타 아키라(太田亮)가 주창한 대대로 다자이후의 관리를 지낸 기 성(紀姓)을 쓰는 지방 호족이라는 설, 스즈키 마토시(鈴木真年)가 주장한 백제 왕족 출신의 도래인으로 귀실복신의 후예라는 설 또는 구나노쿠니의 관리 · 구코치히쿠(狗古智卑狗: 菊池彦)의 후예라는 설, 고대 기쿠치(鞠智, 쿠쿠치: 산기슭의 골짜기에서 평야에 나오는 입구) 족 후예 설, 미나모토노 쓰네모토의 후예라는 겐지설[18] 등 다양한 설이 있다.
최근 마사노리의 첫 이름이 모토사다(基定)라고 기록된 족보와 유서가 공개되어 이를 다카이에의 다섯째 아들 · 모토사다(히젠노카미 종5위하)라는 학설과 함께, 다카이에에게는 종5위하 우근장감 '노리타다'(則忠), 종5위하 무부소보(武部少輔) '노리무네'(則宗), 종5위하 히젠노카미 '다케시게'(武重) 이렇게 세 명의 동생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2. 2. 후지와라 북가(藤原北家) 후손설과 비판
기쿠치 씨는 헤이안 시대의 후지와라노 미치타카의 아들인 후지와라노 다카이에(藤原隆家)의 후손이라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도이의 입구 때 다카이에와 함께 싸운 다자이후 관리 후지와라노 마사노리(藤原政則)의 후손으로 여겨진다.[7] 마사노리는 이 공으로 다자이노쇼니(大宰少弐)와 쓰시마노카미가 되었다.1959년 일본 사학자 시카 마사카즈(志方正和)는 《겐지모노가타리》 연구를 통해 기쿠치 씨가 후지와라노 다카이에의 후예를 자처한 것은 족보를 위조한 것이며, 실제로는 후지와라노 마사노리의 아들 노리타카(則隆) 대에 기쿠치 지역에 정착했다는 설을 제시했고, 이 설이 현재 유력하다.
오타 아키라(太田亮)는 기쿠치 씨가 대대로 다자이후 관리를 지낸 기(紀) 성을 쓰는 지방 호족이라는 설을 주장했다. 스즈키 마토시(鈴木真年)는 백제 왕족 출신 도래인 귀실복신의 후예라는 설을 주장했다. 그 외에도 구나노쿠니(狗奴国)의 관리 구코치히쿠(狗古智卑狗, 기쿠치히코)의 후예라는 설, 고대 기쿠치(鞠智) 족 후예 설, 미나모토노 쓰네모토의 후예라는 겐지(源氏) 설 등 다양한 설이 있다.
최근에는 마사노리의 첫 이름이 모토사다(基定)라고 기록된 족보와 유서가 공개되면서, 다카이에의 다섯째 아들 모토사다(히젠노카미 종5위하)라는 학설도 제기되었다. 또한 다카이에에게는 세 명의 동생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기쿠치 씨의 시조는 후지와라노 노리타카(藤原 則隆)로, 원래 후지와라 씨(藤原氏)였으며 처음으로 기쿠치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노리타카의 아버지 마사노리(政則)는 후지와라 씨(藤原氏)를 섬겼다. 족보학자들은 마사노리가 후지와라노 다카이에(藤原 隆家)의 아들이라고 보았지만, 새로운 증거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치카노리(親則)였다. 마사노리는 1022년 4월 3일 토이(刀伊)의 침략에 맞서 싸운 공로로 쓰시마 국사로 임명되었고, 이름을 쓰시마노카미 쿠라노리(対馬守 蔵則)로 바꾸었다.[7]
3. 역사
헤이안 시대 중기의 관백(關白) 후지와라노 미치타카의 아들 다자이노곤노소치(大宰権帥) 후지와라노 다카이에(藤原隆家)의 후손이라고 전해지지만, 실제로는 도이의 입구 때 다카이에와 함께 싸운 다자이후 관리로서 그 공으로 다자이노쇼니(大宰少弐)와 쓰시마노카미가 된 후지와라노 마사노리(藤原政則)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11세기 후반부터 히고 국 기쿠치 군(구마모토 현 기쿠치 시)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헤이안 시대 말 겐페이 전쟁 시기의 당주 기쿠치 다카타다는 히고 일국의 도료(棟梁)와 같은 존재로서 '''기쿠치노 곤노카미'''('''菊池権守''')라고 불렸으며, 가마쿠라 시대에는 가마쿠라 막부의 고케닌이 되었다. 기쿠치 다케후사는 몽골 습래 때 활약했다.
1333년 기쿠치 다케토키가 규슈 단다이를 공격하다 전사했지만, 그 아들 기쿠치 다케시게가 고다이고 천황의 겐무 신정에서 히고노카미로 임명되었다. 이후 남북조 시대에 기쿠치 다케시게, 기쿠치 다케토시, 기쿠치 다케미쓰가 규슈의 남조 측 무장으로 활약했다. 남북조 합일 후에는 기쿠치 다케토모가 히고의 슈고가 되었고 기쿠치 요시유키까지 이어졌다. 센고쿠 시대에는 아소 고레나가(기쿠치 다케쓰네)와 오토모 시게하루(기쿠치 요시타케) 등이 기쿠치의 이름을 이었지만, 요시타케의 시대에 오토모 소린에 의해 멸망당했다.
요시유키의 자손은 휴가 국 메라(미야자키현 고유 군 니시메라 촌)로 도망쳐서 메라 씨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메라 씨는 에도 시대에 고다이요리아이(交代寄合)에 속했으며, 메이지 시대에 기쿠치 성으로 복성하여 남작 작위를 받았다.
3. 1. 겐페이 전쟁 시기
헤이케가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주도로 송과의 무역에 힘을 쏟으면서 히고노카미(肥後守)로 취임하는 등 히고 국 통제를 강화하자, 기쿠치 씨는 헤이케의 게닌으로 전락했다.[9] 그러나 1180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헤이케 타도를 외치며 군사를 일으킨 이듬해인 1181년, 6대 기쿠치 다케타다는 요와의 난을 일으켜 헤이케에 도전했다.[9] 하지만 다케타다는 이듬해 다이라노 사다요시(平貞能)가 이끄는 토벌군에 항복했고, 이후 헤이케의 게닌(家人)으로 겐페이 전쟁에 참전했지만, 단노우라 전투에서 겐지 측으로 돌아서 고케닌이 되었다.[9]
쓰네무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6대 당주 '''기쿠치노 지로 타카나오'''(菊池 次郎 隆直)는 겐페이 전쟁이 시작되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편에 섰지만, 다이라노 사다요시에게 패했다.[8] 이후 타카나오는 단노우라 전투에 참전했으나, 같은 해 그의 영주인 오가타노 사부로 코레요시가 그를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에게 넘겨 로쿠조 강둑에서 참수되었다.[8]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일본어는 "당신의 가신 중 한 명인 기쿠치노 지로 타카나오는 수년 동안 나의 적이었습니다... 기쿠치를 처형하라고 넘겨주시면 저를 믿으셔도 좋습니다."라고 말했다.[8]
12세기 말, 일본 최초의 군사 정부인 가마쿠라 막부 수립으로 이어진 전쟁으로 기쿠치 씨족은 강력한 무사 연맹으로 뭉쳤다.[9] 1181년~1182년, 기쿠치 타카나오는 분고국의 오가타 코레요시와 함께 다이라 씨족에 반란을 일으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동맹이 되었으나, 하루다 타네나오에 의해 진압되었다.[9] 그 후, 기쿠치는 이전의 적과 손을 잡고 규슈의 주요 무사들과 함께 단노우라 전투에서 패배하여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일본의 군사 지도자로 부상했다.[9]
3. 2. 가마쿠라 시대
8대 기쿠치 요시타카는 조큐의 난에서 고토바 상황 측에 가담했다가 호조 요시토키에 의해 영지를 삭감당했다. 호조씨가 장악한 가마쿠라 막부는 조큐의 난 이후 규슈 단다이를 설치하여 사이고쿠를 제압하였다. 10대 기쿠치 다케후사는 원나라의 일본 원정 때, 가마쿠라 막부에 의해 하카타로 소집되어 일족의 노토(郎党)를 이끌고 몽골군과 전투를 벌여 격퇴하였다.[3]기쿠치 씨는 전통적으로 겐페이 세력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재지 세력의 용기와 의지를 보여왔지만, 가마쿠라 막부의 쇠퇴가 눈에 띄게 드러나자 조정과의 관계를 깊게 했다. 12대 기쿠치 다케토키는 고다이고 천황의 윤지에 따라 1333년(겐코 3년/쇼쿄 2년) 아소 고레나오 · 쇼니 사다쓰네 · 오토모 사다무네를 초대 규슈 단다이 호조 히데토키를 하카타에서 맞아 싸웠으나, 사다쓰네 · 사다무네의 배신으로 선전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규슈 단다이 관내에서 전사했다.
다케토키의 뜻은 적남 13대 기쿠치 다케시게에게로 이어졌고, 겐무 신정 성립 후,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추천도 있어 히고노카미(肥後守)에 임명되었다. 다케토키의 무공은 높게 평가되고, 그 서자 기쿠치 다케시게 · 기쿠치 다케즈미 · 기쿠치 다케토시 등도 관위와 관직을 받았다.
3. 3. 남북조 시대
1333년 기쿠치 다케토키가 규슈 단다이 관에 쳐들어갔다가 전사했지만, 그의 아들 기쿠치 다케시게가 고다이고 천황의 겐무 신정 아래에서 히고노카미로 임명되었다. 이후 남북조 시대에 기쿠치 다케시게, 기쿠치 다케토시, 기쿠치 다케미쓰가 규슈의 남조 측 무장으로 활약했다.[10] 남북조 합일 후에는 기쿠치 다케토모가 히고의 슈고가 되었고 기쿠치 요시유키까지 이어졌다.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겐무 신정에서 이탈해 반기를 들자, 다케시게는 고다이고 천황을 가까이서 받들고 일본 각지를 전전하였다. 다케시게가 간토에서 싸우고 있을 무렵 교토에서 쫓겨난 다카우지가 규슈로 도망쳐 왔고, 쇼니 사다쓰네의 아들 쇼니 요리히사가 다카우지를 아카마세키로 맞이하러 나온 틈을 타 다케시게의 동생 기쿠치 다케토시는 다자이후의 사다쓰네를 쳐서 멸망시켰다.
겐무 2년(1335년) 기세가 오른 다케토시는 아소 고레타다, 아키즈키 다네미치, 가마치 다케히사, 호시노 이에요시 등을 꾀어 다타라하마 전투에서 아시카가 측과 싸웠으나 패하고 기쿠치로 퇴각했다. 다카우지가 교토로 치고 올라가자 다케토시는 다시 봉기하여 아시카가 측에 반항했다. 또한 교토를 탈출한 다케시게는 1337년(남조 : 엔겐 2년, 북조 : 겐무 4년) 돌아와서 다케토시와 합류, 아시카가 측의 잇시키 노리우지, 쇼니 요리히사와 싸웠다. 이로써 규슈도 남북조 전란에 말려들게 된다.
다케시게 · 다케토시 형제 사후 키쿠치 씨 세력은 침체기를 맞이했지만, 남조 · 고다이고 천황의 황자 가네요시 친왕이 1339년(남조 : 엔겐 4년 북조 : 랴쿠오 2년) 정서장군으로 규슈로 내려왔다. 중간 이요국에 체류하던 가네요시 친왕은 우쓰노미야 사다야스를 데리고 1341년(남조 : 오코쿠 2년 북조 : 랴쿠오 4년) 사쓰마 다니야마에 상륙, 1343년 (남조 : 오코쿠 4년/북조 : 고에이 2년) 히고 국의 우도(宇土)에서 15대 기쿠치 다케미쓰의 환영을 받았다. 가네요시 친왕은 아소 고레즈미의 본거지 미후네를 통해 와이후 성으로 입성했다.
이때 중앙에서 쇼군 다카우지와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 사이에 갈등이 깊어지고, 1349년(남조 : 쇼헤이 4년, 북조 : 조와 5년) 다다요시의 양자(이자 쇼군 다카우지의 서자) 아시카가 다다후유가 규슈로 낙향하여 왔기 때문에, 규슈의 정세는 삼파전으로 전개되었다. 잠시 이러한 삼파전 양상이 이어졌지만 1351년 (남조 : 쇼헤이 6년 북조 : 간노 2년) 다다요시의 실각으로 다다후유가 규슈를 떠나면서 득세하게 된 가네요시 친왕은 1358년(남조 : 쇼헤이 13년/북조 : 엔분 3년) 다케미쓰와 그 형제 기쿠치 다케요시, 기쿠치 다케즈미 등의 부추김으로 다자이후를 공략했다. 이후 다자이후에 정서부가 설치되어 규슈에서 공공 기관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한편, 화가 치민 막부는 1371년(남조 : 겐토쿠 2년, 북조 : 오안 4년)에 새롭게 이마가와 사다요를 규슈 단다이에 임명했다. 다케미쓰는 사다요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이듬해에는 다자이후를 잃었다. 이런 가운데 다케미쓰와 16대 기쿠치 다케마사가 차례로 사망하고, 17대 기쿠치 다케토모가 뒤를 이었으나, 1377년(남조 : 덴주 3년, 북조 : 에이와 3년)의 니나우치 전투에서 북조에 대패하는 등 다시금 패전을 거듭하여 1381년 (남조 : 고와 원년/북조 : 에이토쿠 원년)에 본거지에서 쫓겨나기에 이른다.
그리고 1392년(메이토쿠 3년)의 남북조 합일을 계기로 다케토모는 아소 고레마사와 함께 료슌과 화목하게 되었다.
3. 4. 무로마치 시대
1333년에 기쿠치 다케토키가 규슈 단다이관에 쳐들어갔다가 전사했지만, 그 아들 기쿠치 다케시게가 고다이고 천황의 겐무 신정 하에서 히고노카미로 임명되었다. 이후 남북조 시대에 기쿠치 다케시게, 기쿠치 다케토시, 기쿠치 다케미쓰가 규슈의 남조측 무장으로 활약했다.[9] 남북조 합일 후에는 기쿠치 다케토모가 히고의 슈고가 되고 기쿠치 요시유키까지 이어졌다.18대 기쿠치 가네토모는 무로마치 막부에 충실한 자는 아니었지만, 막부는 가네토모를 슈고에 임명했다. 19대 기쿠치 모치토모 시대에는 오우치 씨와 함께 막부에 반항적인 쇼니 씨 · 오토모 씨와 싸우고 오토모 씨가 가지고 있던 지쿠고 슈고 직을 받았다. 20대 기쿠치 다메쿠니 대에 오토모 씨가 막부로부터 사면되어 지쿠고는 오토모 씨와 기쿠치 씨의 반국수호가 되었고, 이에 반발한 다메쿠니는 오토모 씨와 싸웠다는 이유로 막부의 분노를 사 지쿠고 슈고 직을 빼앗겼다.
한편, 기쿠치 씨의 본국인 히고에서도 아소 군은 이전 슈고인 아소 씨가 아소 대궁사라는 입장을 이용하여 장악하고 있었으며, 기쿠치 씨의 세력은 소국 지방에 침투해 있을 뿐이었다. 구마 군과 아시키타 군도 가마쿠라 초기 이래의 영주인 사가라 씨가 장악하고 있었으며, 원칙적으로 자립한 존재였다. 야쓰시로 군을 지배하고 있던 나와(名和)씨도 기쿠치 씨와 오랜 기간 남조측에서 싸워 온 관계로, 기쿠치 씨와 함께 무로마치 막부를 따르게 된 후에도 독립적인 존재로 남아 있었다(우도 군을 지배하는 우도 씨는 멸망하여 해당 군이 합병되었다). 기쿠치 씨가 슈고로서 확실하게 지배할 수 있는 지역은 아마쿠사 군과 '국중'으로 불리는 7군(타마 · 야마모토 · 야마 · 기쿠치 · 아키타 · 다쿠마 · 마스지로 각 군) 및 지쿠고 슈고 시대에 영향권 아래에 들어간 지쿠고의 일부 지역에 한정되어 있었고, 그나마도 후술할 내분으로 축소되게 된다.

기쿠치 다케토키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릴 적에 주오이노게(従五位下|종5위 하일본어)의 관위를 받았다. 아버지와 형제들은 호조 씨를 공격하여 참수당했을 때 쇼니 씨와 오토모 씨에게 배신당했다. 이 사건 이후 다케시게는 기쿠치 성으로 급히 돌아가 고다이고 천황으로부터 히고 국의 지사 칭호를 받았다. 1335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고다이고 천황을 공격하자 다케시게와 그의 형제 다케야스는 닛타 요시사다와 힘을 합쳐 교토로 후퇴하는 아시카가를 물리쳤다.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교토로 돌아와 다케시게를 사로잡았으나 풀어주었다. 1337년 다시 남조 군과 싸웠으나 1338년 사망했으며, 그의 남동생이 그 뒤를 이었다.
기쿠치 다케토키의 장남인 다케시게가 사망한 후, 다케히토가 가문의 다음 수장이 되었다. 다른 형들이 있었지만, 그는 적실에서 태어난 유일한 아들이었다. 어릴 적 이름은 '''마타지로'''(又次郎)였다. 그는 유약하게 통치했고, 형제인 다케시게와 토케토시가 그를 도와 가문을 다스렸다. 오토모 씨의 공격을 받았고, 군사적 상황을 처리할 수 없어서, 형제인 기쿠치 다케미쓰가 가문을 장악하고 그를 몰아냈다. 그 후 다케히토는 승려가 되었고, 노년에 사망했다.

기쿠치 다케토키의 여덟 번째 아들이자 기쿠치 다케미쓰의 형이었다.
다케토시는 형제들과 아버지처럼 아시카가와 북조에 맞서 싸웠다. "타케토시는 이미 동쪽의 닛타를 지원하러 갔지만, 그의 동생은 다른 규슈 지도자들과 함께 기쿠치 가문이 거점으로 삼았던 히고에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따라서 타카우지는 규슈에서의 진척을 막고 싶어하는 아소, 미하라, 쿠로키와 같은 유망한 인물들을 포함한 영향력 있는 집단을 상대해야 했다. 그들은 타카우지가 해협을 건너기 며칠 전에 그 목적을 위해 히고에 들어갔다. 4월 초에 타케토시는 지쿠젠국의 쇼니 씨의 거점인 다자이후를 공격했다. 요새를 함락시키고 이웃 언덕에서 저항했지만 철저하게 패배하여 여러 친족과 함께 자결한 쇼니 사다쓰네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9]
다타라하마 전투 (1336년 4월) – 규슈, 북조에 함락
1336년 초, 몇몇 규슈 씨족들은 쇼군 군대의 움직임을 예상하고 연합하여 강력하게 저항하려 했다. 쇼군에게 충성하는 씨족들을 상대로 다자이후 포위전을 포함한 몇 차례의 소규모 전투가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쇼니 씨족의 거점이 함락되었다; 쇼니 사다쓰네는 도망쳤지만 곧 패배하여 여러 가신들과 함께 자결했다.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4월 초에 멀지 않은 무나카타에 도착하여 다자이후 포위와 쇼니 사다쓰네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되었다. 병력을 모아 4월 15일 무나카타에서 출발하여 약 24.14km 떨어진 다타라하마로 가서 기쿠치 다케토시가 지휘하는 기쿠치 씨, 아소 씨, 미하라, 쿠로키 씨족의 전사들로 구성된 적군과 마주했다.
군사 연대기인 바이쇼론은 다타라하마를 "남쪽 끝에 작은 개울이 가로지르는 약 4.83km이 넘는 건조한 갯벌"로 묘사하고 있다. 하코자키 하치만 신사의 구역은 약 약 12.95km2의 소나무 숲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쪽에는 하카타 시가 있다."
전투가 끝날 무렵, 기쿠치 씨족 군대는 아시카가 다다요시에 의해 다자이후로 쫓겨났고, 그들은 언덕으로 도망쳤다. 아소 씨와 아키즈키 씨족의 지휘관들은 자결했고, 다른 지휘관들은 항복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용감하고 헌신적인 지휘관들에게 보상을 했지만,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여러 씨족과 상대에게 사면을 제안하여 그들이 전투 후에 그와 합류하도록 했다. 이로써 규슈는 막부와 북조 아래 통일되었다.

다케미쓰는 기쿠치 다케토키의 아홉 번째 아들이었으며, 아버지처럼 천황을 위해 계속 싸웠다. 남북조 시대의 장군으로, 가네요시 친왕(懐良親王|가네나가일본어)(1326–1383) (고다이고 천황의 아들)과 함께 천황 측에서 싸웠다. 지쿠고강에서 유명한 전투를 벌이는 장면은 아마도 그의 가장 유명한 장면일 것이다. 그는 바쿠후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가네나가 친왕의 가장 강력하고 믿음직한 동맹이었다. 아시카가 요시노리, 아시카가 다카쓰네, 아시카가 다다아키 군대의 삼중 위협에 시달렸다. 이로 인해 다케미쓰는 다자이후 포위를 풀고 다자이후 방어에 힘써야 했다. 세 아시카가 군대가 다자이후를 포위했고, 1372년 9월 말 이전에 함락되었다. 다케미쓰는 퇴각했고 가네나가 친왕과 함께 지쿠고로 도망쳤다. 다케미쓰가 죽자 왕당파 방어는 진정으로 시험받은 지도자를 잃었고, 그의 후계자 다케마사도 유망한 병사였지만 1374년에 사망했다.[9]
오호바루 전투 (지쿠고 강 전투):
40000명의 병력이 기쿠치 다케미쓰를 따라 구마모토의 기쿠치에서 가네요시 친왕과 함께 북쪽으로 진격했으며, 지쿠고강 건너 북조 군대와 대치했다. 기쿠치 다케미쓰는 5000명의 병력에게 지쿠고강을 건너 현재의 미야세 주변에 진지를 구축하도록 지휘했다. 기쿠치 다케미쓰 부대는 현재의 오무타 철도선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하여 아지사카로 향했다. 그러나 쇼니 씨 가문의 군대는 전투를 피하여 현재 오호역 근처로 후퇴했다. 이 전투선에서 반달 동안 교착 상태가 지속되었지만, 8월 15일 자정에 다케미쓰는 3000명의 자살 부대를 이끌고 쇼니 씨 가문의 군대 동쪽으로 조용히 이동하여 양쪽에서 공격했다. 잠시 후, 기쿠치 다케마사가 이끄는 1000명의 기병대가 지원을 위해 도착했고, 오호바루 전투가 시작되었다. 양 군대는 오고리 주변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반복했지만, 기쿠치 군대는 점차 쇼니 씨 군대를 압박했고, 쇼니 씨 군대는 현재 아마기 철도선을 따라 북동쪽으로 퇴각하여 현재 타치아라이에 걸쳐 있는 야마쿠마하라에 도착했다. 쇼니 씨 군은 하나타테야마 산에서 흩어진 군대를 재정비하려 했지만, 기쿠치 군의 맹렬한 추격에 의해 흩어져 15km 북쪽의 호만잔 산으로 도망쳤다.[11]
기쿠치 지로 다케마사라고도 불렸다.
1342년 7월 6일, 다케미쓰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아버지와 함께 규슈에서 북조와 싸워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마가와 사다요(今川 貞世|이마가와 사다요일본어)(1326–1420)가 적군의 수장이 되면서 기쿠치 가문에게 불리한 상황이 시작되었다. 1373년 11월, 그의 아버지가 사망하고 그가 가문의 수장이 되었으며, 다케미쓰의 죽음을 들은 이마가와는 다케마사를 공격하여 많은 전투에서 승리했다. 기쿠치 다케마사는 아소 고레타카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는 북조와의 전쟁에서 가장 신뢰받는 가신 중 한 명이었다.
다케마사는 아버지의 사망 1년 후인 1374년 5월 26일에 사망했다.[12]
기쿠치 다케토모는 다케마사의 장남이자 상속자로 태어나 17대 당주가 되었다. 그는 기쿠치 씨의 족보에 대한 "타케토모 모시조"를 저술했다. 그는 자신의 조상이 후지와라노 미치타카이며, 미치타카의 4대손 노리타카가 히고국에 정착했다고 말했다. 그는 족보 사본을 정부에 보냈다. 이 행위는 당시 기쿠치 씨의 쇠퇴하는 상황을 설명하고 후지와라 씨의 혈통을 보여줌으로써 기쿠치 씨에게 더 많은 명성과 권력을 부여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마사노리의 아버지 치카노리는 백제 이민자의 후손으로 여겨진다. 타케토모는 《겐지 이야기》에 등장하며, 무라카미 부인은 그를 추와모노(황야의 강력한 지도자)라고 부른다.
3. 5. 센고쿠 시대와 기쿠치 씨의 종언
센고쿠 시대에는 아소 고레나가(기쿠치 다케쓰네)와 오토모 시게하루(기쿠치 요시타케) 등이 기쿠치의 이름을 이었지만, 요시타케의 시대에 오토모 소린에 의해 멸망당했다.[9]18대 기쿠치 가네토모의 아들인 19대 기쿠치 모치토모 시절부터 기쿠치 씨 일족은 가독을 둘러싼 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20대 기쿠치 다메쿠니의 동생으로 우토 다메미쓰가 분메이 16년(1484년)에 거병하였다. 다메미쓰는 이때 패하였으나 21대 기쿠치 시게토모가 사망한 뒤인 분키 원년(1501년) 다시 거병했다. 다메미쓰에게 쫓겨난 22대 당주 기쿠치 요시유키는 아리마 씨를 의지하여 다마나를 거쳐 시마바라로 달아났고, 이듬해인 분키 2년(1502년) 조 시게미네 · 구마베 유키하루 등과 호응하여 다메미쓰를 자결로 몰아갔다. 그러나 요시유키는 전쟁에서 입은 부상으로 에이쇼 원년(1504년) 불과 23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후 기쿠치 씨의 상속자는 서류(庶流)에서 배출되게 되었으며, 이마저도 가독 계승이 아소 씨와 오토모 씨의 방해로 차단되어, 기쿠치 씨는 멸망하였다.
요시유키 사후 히고국에서는 하극상이 난무하는 전국 시대로 돌입하게 되는데, 기쿠치 씨가 소유했던 영지는 기쿠치 삼가로(菊池三家老)라 불리던 아카보시 씨 · 조 씨 · 구마베 씨 등의 영지가 되었다.
오토모 가문의 당주 오토모 요시아키는 그의 동생 오토모 시게하루를 히고의 키쿠치 가문의 후계자로 앉혔다. 오토모 소린(大友 宗麟일본어)(1530–1587)은 오토모 요시아키의 아들이였다. 키쿠치 요시타케는 오우치를 선택하여 요시아키에 대항하여 무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는 형을 당해낼 수 없었고, 밀려났다. 1543년까지 오토모 요시아키의 히고 지배는 확고해져서 그는 그 지방의 슈고로 임명되었다.[13] 구마모토성을 되찾았을 때, 그의 가신 아카보시 치카이에(赤星親家일본어)는 오토모 편에 섰다. 치카에는 후에 요시타케의 다른 가신 구마베 치카나가와 싸우다 죽었다. 오토모 소린(오토모 요시시게)은 1550년에 오토모 가문의 당주가 되었고, 그의 삼촌 키쿠치 요시타케는 거의 같은 시기에 독립을 선언했다. 소린은 그를 공격하여 1554년에 그를 멸망시켰고, 키쿠치 씨족의 오랜 계보는 막을 내렸다.[9]
4. 기타
1333년 기쿠치 다케토키가 규슈 단다이관에 쳐들어갔다가 전사했지만, 그 아들 기쿠치 다케시게가 고다이고 천황의 겐무 신정 하에서 히고노카미로 임명되었다. 이후 남북조 시대에 기쿠치 다케시게, 기쿠치 다케토시, 기쿠치 다케미쓰가 규슈의 남조측 무장으로 활약했다. 남북조 합일 후에는 기쿠치 다케토모가 히고의 슈고가 되고 기쿠치 요시유키까지 이어졌다. 센고쿠 시대에는 아소 고레나가(기쿠치 다케쓰네)와 오토모 시게하루(기쿠치 요시타케) 등이 기쿠치의 이름을 이었지만, 요시타케의 시대에 오토모 소린에 의해 멸망당했다.[1]
요시유키의 자손은 휴가 국 메라(미야자키현 고유 군 니시메라 촌)으로 도망쳐서 이후 메라 씨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메라 씨는 에도 시대에 고다이요리아이(交代寄合, 산킨코타이를 하되, 석고 없이 히고 국 히토요시 번 사가라 씨의 부양이라는 특수한 고다이요리아이 집안이었다)에 이어 메이지 시대에 기쿠치 성으로 되돌렸으며 남작의 반열에 들었다.[1]
남북조 시대에 기쿠치 일족은 고다이고 천황의 남조측에 서 있었다. 고다이고 천황이 요시노 산에서 남조를 열고 교토 조정(북조)와 요시노 조정(남조)이 병립하는 남북조 시대에 고다이고 천황은 다카요시 친왕과 쓰네요시 친왕 등을 닛타 요시사다에게 맡겨 호쿠리쿠로 보냈고, 이밖에도 가네요시 친왕을 정서장군으로 임명하여 규슈로 보내고, 무네요시 친왕을 동국에, 노리요시 친왕을 무쓰 국으로 보내는 등 각지에 자신의 왕자를 보내 북조에 대항하려 했다.[1]
기쿠치 씨가 멸망 후 히고 국의 호족 메라 씨가 기쿠치 요시유키의 아들 메라 시게쓰구(米良重次)의 후예를 자칭하여 에도 시대에 교다이요리아이(交代寄合)에 오르게 되었다. 메라 씨는 산킨코타이를 하였으나 석고가 없이 히고 국 히토요시 번 사가라 씨의 부양이라는 특수한 교체寄合집이었다.[1]
메이지 시대가 되어 기쿠치 성으로 복귀하고 남작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쇼와 초기에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는 발언을 했던 나카지마 구마키치(中島久万吉) 상공장관과 천황기관설을 주창한 미노베 다쓰키치 귀족원 의원을 각각 "황실에 불충하는 자"로 규탄하여 기어이 사직하게 만든 기쿠치 다케오가 기쿠치 집 남작이다. 또한 기쿠치의 서류 계총인 야시로 씨의 12대 당주 다카야(隆屋)는 일족과 노토(郎党)을 데리고 휴가 국의 다이묘인 기타하라 씨에 의지하여, 새로운 본거지로 삼은 마사키인의 지명을 따서 오코비라(大河平)로 성을 바꾸었고, 기타하라 씨가 멸망한 뒤에는 사쓰마 시마즈 씨의 가신이 되어, 사쓰마 번사로 살아남았다.[1]
다른 서류로 사이고 씨가 있는데,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생모 사이고노 쓰보네, 아이즈 번의 가로 사이고 다노모(西郷頼母), 사쓰마 번의 하급 무사로써 메이지 유신의 삼걸로 꼽히는 사이고 다카모리는 모두 기쿠치 씨로부터 나온 이들이 된다.[1]
그 외 미야자키현 고유 군 니시메라 촌, 군마현 이세사키 시 기타센기 정 , 미나미센기 정 등에도 기쿠치 성을 가진 사람을 찾아 볼 수 있다.[1]
5. 역대 당주
후지와라노 미치타카의 아들 후지와라노 다카이에(藤原隆家)의 후손이라 전해지지만, 실제로는 도이의 입구 때 다카이에와 함께 분전한 다자이후 관리 후지와라노 마사노리(藤原政則)의 후손으로 보인다. 11세기 후반부터 히고 국 기쿠치 군(구마모토 현 기쿠치 시)의 재지 영주로써 세력을 확장하였다.
겐페이 전쟁 시절의 당주 기쿠치 다카타다는 히고 일국의 도료와 같은 존재로서 '''기쿠치노 곤노카미'''('''菊池権守''')라고 불렸으며, 가마쿠라 시대에는 가마쿠라 막부의 고케닌에 들었고 가마쿠라 중기의 당주 기쿠치 다케후사는 몽골 습래 때에 분전했다.
1333년 기쿠치 다케토키가 규슈 단다이관에 쳐들어갔다가 전사했지만, 그 아들 기쿠치 다케시게가 고다이고 천황의 겐무 신정 하에서 히고노카미로 임명되었고, 이후 남북조 시대에 기쿠치 다케시게, 기쿠치 다케토시, 기쿠치 다케미쓰가 규슈의 남조측 무장으로 활약했다. 남북조 합일 후에는 기쿠치 다케토모가 히고의 슈고가 되고 기쿠치 요시유키까지 이어졌다.
센고쿠 시대에는 아소 고레나가(기쿠치 다케쓰네)와 오토모 시게하루(기쿠치 요시타케) 등이 기쿠치의 이름을 이었지만, 요시타케의 시대에 오토모 소린에 의해 멸망당했다.
역대 당주는 다음과 같다.
| 이름 | 비고 |
|---|---|
| 후지와라노 노리타카(藤原則隆) | |
| 후지와라노 쓰네타카(藤原経隆) | |
| 후지와라노 쓰네요리(藤原経頼) | |
| 기쿠치 쓰네무네(菊池経宗) | |
| 기쿠치 쓰네나오(菊池経直) | |
| 기쿠치 다카나오(菊池隆直) | |
| 기쿠치 다카타다(菊池隆定) | |
| * 기쿠치 다카쓰구(菊池隆継) | |
| 기쿠치 요시타카(菊池能隆) | |
| 기쿠치 다카야스(菊池隆泰) | |
| 기쿠치 다케후사(菊池武房) | |
| * 기쿠치 다카모리(菊池隆盛) | |
| 기쿠치 도키타카(菊池時隆) | |
| 기쿠치 다케토키(菊池武時) | |
| 기쿠치 다케시게(菊池武重) | |
| 기쿠치 다케히토(菊池武士) | |
| 기쿠치 다케미쓰(菊池武光) | |
| 기쿠치 다케마사(菊池武政) | |
| 기쿠치 다케토모(菊池武朝) | |
| 기쿠치 가네토모(菊池兼朝) | |
| 기쿠치 모치토모(菊池持朝) | |
| 기쿠치 다메쿠니(菊池為邦) | |
| 기쿠치 시게토모(菊池重朝) | |
| 기쿠치 요시유키(菊池能運) | |
| 기쿠치 마사타카(菊池政隆) | |
| 기쿠치 다케쓰네(菊池武経) | 아소씨 |
| 기쿠치 다케카네(菊池武包) | 다쿠마 씨 |
| 기쿠치 요시타케(菊池義武) | 오토모 씨 |
참조
[1]
서적
The Last Samurai: the Life and Battles of Saigō Takamori
John Wiley & Sons
[2]
문서
菊池系図
[3]
웹사이트
The root of Kikuchi clan
https://web.archive.[...]
2011-07-05
[4]
웹사이트
Kikuchi clan
[5]
서적
Onei Senkan
[6]
웹사이트
Samurai DNA project
https://www.familytr[...]
[7]
서적
Shōyūki
[8]
서적
The Tale of the Heike (平家物語 Heike Monogatari)
[9]
서적
A History of Japan, 1334–1615
Stanford University Press
[10]
서적
Hakata Nikki
[11]
서적
Land and Lordship in Early Modern Japan
Stanford University Press
[12]
서적
A History of Japan, 1334–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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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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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mbridge University Press
[14]
간행물
Hurusato (Old Country) Tokushu Sengoku Jidai Sera-gun de Katsuyaku shita Shitobito (People of Sera-gun in the Sengoku Era)
Kosan-cho Culture Association
[15]
웹사이트
菊池氏
https://kotobank.jp/[...]
[16]
웹사이트
菊池氏
https://kotobank.jp/[...]
[17]
웹사이트
菊池氏
https://kotobank.jp/[...]
[18]
서적
応永戦覧
[19]
웹사이트 # 추정
日本の苗字7000傑
[20]
문서
一族・菊池重安の子。22代能運のはとこにあたる。
[21]
문서
阿蘇惟憲の子。
[22]
문서
米良則忠の代から菊池に復姓。
[23]
문서
菊池氏一門。菊池武澄流詫摩氏からの養子。
[24]
문서
大友義長の子。19代持朝の来孫にあたる。
[25]
문서
菊池伝兵衛武清所有『藤原姓菊池系図』、菊池清庵貴忠所有『菊池清庵系譜』参照。
[26]
문서
菊地茂左衛門尹信 所有『藤原姓菊地氏系図』参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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