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데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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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마데오 1세는 스페인 국왕으로, 이사벨 2세의 퇴위 후 1870년 스페인 왕위에 올랐으나, 정치적 혼란과 공화주의자들의 반대로 1873년 자진 퇴위했다. 사보이아 왕가의 일원으로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으며, 사르데냐 왕립 육군에서 복무하고 결혼 후 이탈리아 왕립 해군 중장이 되었으나 스페인 왕위에 오르면서 직위를 내려놓았다. 스페인에서는 카를리스트 봉기, 쿠바 독립 전쟁 등의 어려움에 직면했고, 결국 퇴위 후 이탈리아로 돌아가 아오스타 공작 칭호를 사용했다. 그는 1890년 사망했으며, 필리핀의 아마데오 시와 호주의 아마데우스 호 등 여러 지명에 그의 이름이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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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데오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아마데오 1세 | |
![]() | |
작위 | |
칭호 | 아오스타 공작 |
스페인 국왕 | |
즉위 | 1870년 11월 16일 |
퇴위 | 1873년 2월 11일 |
이전 국왕 | 이사벨 2세 (스페인 여왕으로서) |
이전 국왕 | 1대 라 토레 공작 프란시스코 세라노 (스페인 섭정으로서) |
이후 | 에스타니슬라오 피게라스 (공화국 대통령으로서) |
이후 | 알폰소 12세 (스페인 국왕으로서) |
섭정 | 후안 바우티스타 토페테 라 토레 공작 마누엘 루이스 소리야 3대 산 라파엘 후작 호세 말캄포 프락세데스 마테오 사가스타 2대 멘디고리아 후작 페르난도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 마누엘 루이스 소리야 |
개인 정보 | |
출생일 | 1845년 5월 30일 |
출생 장소 | 토리노 왕궁, 토리노, 사르데냐 왕국 |
사망일 | 1890년 1월 18일 |
사망 장소 | 토리노 왕궁, 토리노, 이탈리아 왕국 |
매장지 | 수페르가 대성당, 이탈리아 |
배우자 | 마리아 비토리아 달 포초 (1867년 5월 30일 결혼, 1876년 11월 8일 사망) 마리아 레티시아 보나파르트 (1888년 9월 11일 결혼) |
자녀 | 아오스타 공작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토리노 백작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아브루치 공작 루이지 아메데오 살레미 백작 움베르토 |
왕가 | 사보이아 |
아버지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
어머니 | 아델라이데 폰 외스터라이히 여대공 |
종교 | 가톨릭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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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사르데냐 왕국의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오스트리아 대공녀 마리아 아델라이데의 차남으로 1845년 5월 30일 토리노 왕궁에서 태어났다. 사보이아 가문의 일원으로 태어나 아오스타 공작 작위를 받았다. 1861년 아버지가 이탈리아 왕국을 선포하고 형 움베르토 1세가 왕세자가 되자, 아메데오는 아오스타 공작으로서 사보이아-아오스타 가를 이루며 분가했다.
1867년 마리아 비토리아 달 포초 델라 치스테르나와 결혼하여 세 아들을 두었다. 1868년 스페인 혁명으로 이사벨 2세가 퇴위하자, 스페인 의회의 요청으로 1870년 국왕으로 선출되어 '''아마데오 1세'''로 즉위했다.[23] 그러나 그의 주요 지지자였던 후안 프림 장군이 암살되는 등 정치적 혼란이 극심했고, 공화주의자들의 반대와 제3차 카를리스트 전쟁 등으로 통치 기반이 매우 불안정했다. 결국 1873년 2월 11일, 즉위 3년 만에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났다. 그의 퇴위 후 스페인은 잠시 공화정이 되었다가 알폰소 12세가 즉위하며 왕정이 복고되었다.
스페인 왕위에서 물러난 후 이탈리아로 돌아가 아오스타 공작으로 지냈다. 1876년 첫 부인과 사별하고, 1888년 조카인 마리 레티시아 보나파르트와 재혼하여 아들 하나를 더 두었다. 이 결혼은 당시 논란이 있었으나 교회의 허락을 받았다. 1890년 1월 18일 토리노에서 44세의 나이로 병사했으며, 아오스타 공작 작위는 장남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가 계승했다.
2. 1. 초기 생애


사보이아의 아메데오 왕자는 1845년 5월 30일, 당시 사르데냐 왕국의 일부였던 토리노의 왕궁에서 태어났다. 그는 훗날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초대 국왕이 되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오스트리아 대공녀 아델라이데의 세 번째 자녀이자 두 번째 아들이었다. 그의 형은 훗날 움베르토 1세가 된다. 사보이아 가문의 일원으로서, 그는 출생과 동시에 가문의 발상지 이름을 딴 아오스타 공작 세습 작위를 받았다. 1861년 아버지가 이탈리아 왕국을 선포하고 형 움베르토가 왕세자가 된 후, 아메데오는 아오스타 공작의 칭호와 영지를 받아 사보이아-아오스타 가를 이루며 분가했다.
1859년 사르데냐 왕립 육군에 소령으로 입대하여 군 경력을 시작했다. 1866년에는 중장 계급으로 제3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에 참전하여 쿠스토차 전투에서 자신의 여단을 직접 이끌었으며, 몬테 크로체에서 부상을 입기도 했다. 1868년 결혼 후에는 이탈리아 왕립 해군의 중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이 직위는 훗날 스페인 왕위에 오르면서 그만두게 된다.[1]
1867년 5월 30일, 아메데오는 아버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신하였던 치스테르나 공작 가문의 돈나 마리아 비토리아 딸 포초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혔는데, 국왕은 마리아 비토리아 가문의 지위가 왕자와 결혼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여겼고, 아들이 독일 공주와 결혼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2][18] 또한 당시 적령기의 동등한 귀족 여성이 적었던 점도 결혼 상대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18] 마리아 비토리아는 왕족 출신은 아니었으나 피에몬테의 오래된 명문 귀족 가문 출신이었고[19], 아버지의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을 유일한 상속인이었다.[2] 이 재산은 훗날 아오스타 공작들에게 상속되어, 왕가의 사유지나 국왕 수당과는 별개로 사보이아-아오스타 가문의 부를 형성하는 기반이 되었다.[2][19] 치스테르나 가문은 모나코의 그리말디 가와도 연관이 있었다.[19] 결혼식 당일에는 신혼여행을 떠나려던 기차역에서 역장이 열차 바퀴에 깔려 사망하는 불행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3]
결혼 생활 중 마리아 비토리아는 남편의 외도 문제로 고통받았다. 1870년 3월, 그녀는 남편의 부정을 문제 삼아 시아버지인 국왕에게 남편을 꾸짖어 달라고 호소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국왕은 그녀의 감정을 이해한다면서도 "그대에게는 왕족인 남편을 지휘할 권리가 없다"며 질투심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냉담한 답장을 보냈다.[2][20] 이처럼 마리아 비토리아는 사보이아 가문 내에서 차별적인 대우를 받기도 했다.[20] 아메데오와 마리아 비토리아 사이에서는 세 아들,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토리노 백작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아브루초 공 루이지 아메데오가 태어났다.
2. 2. 결혼과 가족
아마데오 1세는 1867년 5월 30일 돈나 마리아 비토리아 딸 포초와 첫 번째 결혼을 했다. 그의 아버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국왕은 처음에는 마리아 비토리아 가문의 지위가 왕족에 미치지 못하고, 아들이 독일 공주와 결혼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이 결혼에 반대했다.[2] 마리아 비토리아는 피에몬테 귀족 출신이었으나 왕족은 아니었지만, 아버지의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을 유일한 상속인이었다.[2] 결국 국왕은 의회 의원 프란체스코 카신스의 간청을 받아들여 결혼을 승낙했다.[2] 이 결혼을 통해 아오스타 공작들은 마리아 비토리아의 재산을 상속받아, 왕가의 사유지나 국왕에게서 받는 수당 외에도 상당한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2] 치스테르나 공작가는 자유주의적이었지만 귀족적인 가풍은 아니었으나, 오래된 명문 귀족 가문이었으며[19] 모나코의 그리말디 가문과도 관련이 있었다.[19]
그러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1870년 3월, 마리아 비토리아는 남편 아마데오의 부정으로 상처와 굴욕감을 느껴 시아버지인 국왕에게 남편을 나무라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국왕은 그녀의 감정을 이해한다고 하면서도, 아내에게 남편의 행동을 지시할 권리는 없으며 질투심은 부적절하다고 냉담하게 답했다.[2][20] 사보이아 가문 내에서도 마리아 비토리아는 차별 대우를 받았다.[20] 또한 두 사람의 결혼식 날에는 축하객의 권총 자살, 궁전 문지기의 자해, 국왕 친구의 낙마 사망, 의상 담당자의 자살, 경호 장군의 급사, 신혼여행 기차역장의 사고사 등 불행한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했다고 한다.[3][21]
마리아 비토리아와의 사이에서 아마데오 1세는 세 아들을 두었다.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 1869년 1월 13일 | 1931년 7월 4일 | 아오스타 공작, 이탈리아 원수. 오를레앙의 헬레네 공주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으며, 그중 아들 아오스타 공작 아이모네는 잠시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국왕 토미슬라브 2세가 되었다.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 1870년 11월 24일 | 1946년 10월 10일 | 토리노 백작. 결혼하지 않고 사망했다. |
루이지 아메데오 | 1873년 1월 29일 | 1933년 3월 18일 | 아브루치 공작, 이탈리아 왕립 해군 소장. 결혼하지 않고 사망했다. |
첫 부인 마리아 비토리아가 사망한 후, 아마데오 1세는 1888년 9월 11일 마리아 레티치아 보나파르트와 재혼했다. 마리아 레티치아는 나폴레옹 1세의 동생인 제롬 보나파르트의 손녀이자, 아마데오 1세의 누나 마리아 클로틸데 디 사보이아의 딸이었다. 이는 삼촌과 조카 사이의 결혼(숙질혼)이었기에 유럽 귀족 사회에서 논란이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교회의 허락을 받았다.
마리아 레티치아와의 사이에서는 아들 하나를 두었다.
2. 3. 스페인 국왕 즉위
19세기 스페인은 과거 식민지 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잃고 급속한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카스티야 중심의 통일 정책에 대한 카탈루냐와 바스크 지역의 자치 및 독립 요구가 높아졌고, 의회 내에서는 절대 군주제와 입헌 군주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카를리스트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이 전쟁에서 승리한 입헌 군주파는 이사벨 2세를 왕위에 올렸으나, 그녀는 오히려 반동적인 통치를 행하고 멕시코 파병에 참여하는 등 실정을 거듭했다. 왕의 남편인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 데 보르본 공작의 개인적인 문제까지 겹치면서, 제국과 스페인 부르봉 왕조에 대한 환멸이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갔다. 결국 입헌 군주파는 카를리스트 전쟁의 영웅이었던 후안 프림 장군을 중심으로 1868년 영광스러운 혁명을 일으켜 이사벨 2세를 퇴위시켰다.[23]
육군 원수 겸 제국 의회 의장으로 실권을 장악한 프림은 입헌 군주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부르봉 가문 외의 왕족 중에서 새로운 군주를 찾기로 했다. 여러 논의 끝에 이웃 이탈리아의 사보이아 왕가에 요청이 이루어졌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국왕은 차남인 아오스타 공작 아메데오를 추천했다. 아메데오는 어머니 오스트리아의 아델라이데 대공녀를 통해 부르봉 가문과도 혈연관계가 있었으며, 아버지 쪽으로는 카탈리나 미카엘라 인판타와 그녀의 아들 카리냥 공 토마스 프란시스코를 통해 필리페 2세의 후손이었고, 어머니 쪽으로는 마리아 루이사 인판타를 통해 카를로스 3세의 후손이기도 했다.
1870년 11월 16일, 코르테스(스페인 의회)는 아메데오를 새로운 국왕으로 선출했다. 그는 '''아마데오 1세'''로서 1871년 1월 2일 마드리드에서 헌법을 준수할 것을 맹세하며 즉위했다.

그러나 아마데오 1세가 스페인으로 향하던 중, 그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였던 후안 프림 장군이 암살당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아마데오는 프림의 시신 앞에서 왕으로서의 맹세를 해야 했다.[4]

아마데오 1세의 통치는 시작부터 험난했다. 불안정한 스페인 정치 상황 속에서 공화주의자들의 퇴위 요구가 거셌고, 카를리스트들은 봉기를 일으켰으며(바스크와 카탈루냐 지역 중심), 쿠바에서는 독립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또한 정당 간의 극심한 대립과 정부의 불안정, 심지어 국왕 자신에 대한 암살 시도까지 겪어야 했다. 아마데오 1세가 의지할 수 있는 세력은 진보당뿐이었으나, 이마저도 군주제 지지파와 헌법주의자로 분열되어 국정 불안을 심화시켰다. 1872년에는 당파 간 갈등이 폭력적인 양상으로 치달았고, 육군 포병대가 파업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1872년 8월 18일, 아마데오 1세는 자신에 대한 암살 음모가 있다는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예방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왕비와 함께 부엔 레티로 공원에서 마드리드 시내로 돌아오던 중, 비아 아베날(Via Avenal)에서 여러 차례 총격을 받았다. 왕실 마차에는 여러 발의 총탄 자국이 남았고 말들이 부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아마데오 1세 부부는 무사했다. 이 사건 이후 잠시 정국이 안정되는 듯 보였다.[1]
2. 4. 스페인 통치와 퇴위
1868년 영광스러운 혁명으로 이사벨 2세가 퇴위하자, 스페인의 새로운 코르테스는 그녀를 대체할 자유주의 성향의 새로운 군주를 물색했다. 당시 아오스타 공작이었던 아마데오는 후안 프림 장군의 지지를 받아 후보로 고려되었다. 아마데오는 아버지 쪽으로는 필리페 2세의 후손이었고, 어머니 쪽으로는 카를로스 3세의 후손이라는 혈통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다.[23]1870년 11월 16일, 아마데오는 스페인 국왕 아마데오 1세로 선출되었고, 철갑선 누만시아를 타고 스페인으로 향했다. 1871년 1월 2일 마드리드에 도착하여 헌법 준수를 맹세하며 마드리드 왕궁에 입성했다. 그러나 그가 스페인에 도착하기 직전인 1870년 12월 28일, 그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였던 후안 프림 장군이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아마데오 1세는 프림 원수의 시신 앞에서 헌법 준수를 맹세했고, 이는 그의 통치가 시작부터 불안정했음을 보여준다.[4]

(안토니오 히스베르트 그림, 1875년)
아마데오 1세의 통치는 극심한 혼란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불안정한 스페인 정치 상황, 공화주의자들의 음모와 퇴위 요구, 카를리스트의 봉기(제3차 카를리스트 전쟁), 쿠바에서의 독립 전쟁(제1차 쿠바 독립 전쟁), 끊임없는 당파 간 분쟁, 정부의 불안정, 그리고 여러 차례의 암살 시도에 직면해야 했다. 그의 지지 기반은 진보당에 한정되었으나, 이마저도 군주제 지지자와 헌법주의자로 분열되어 불안정을 심화시켰다. 1872년에는 당파 간 갈등이 폭력적으로 분출되었고, 바스크와 카탈루냐 지역에서는 카를리스트 봉기가, 전국 도시에서는 공화주의 봉기가 일어났다. 심지어 육군 포병대가 파업을 벌이자, 정부는 아마데오 1세에게 이들을 징계하라고 요구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1872년 8월 18일, 암살 음모에 대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예방 조치를 거부했던 아마데오 1세는 왕비와 함께 부엔 레티로 공원에서 마드리드로 돌아오던 중 총격을 받았다. 왕실 마차가 여러 발의 총알에 맞고 말이 부상당했지만, 다행히 아마데오 1세와 왕비는 무사했다.[1]
결국 대중의 지지 없이 통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아마데오 1세는 포병대 징계 명령을 내리는 것을 거부하고, 1873년 2월 11일 스페인 왕위에서 스스로 퇴위할 것을 선언했다. 그는 코르테스 앞에 서서 스페인 국민은 자신이 통치할 수 없는 대상임을 솔직하게 인정했다("이 나라는 내 손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 같은 날 밤 10시, 스페인 제1공화국(제1공화정)이 선포되었다.
아마데오 1세는 스페인 문화에 대한 이해나 관심이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저택 앞을 지나가다 "그 유명한 소설가의 집입니다"라는 부하의 말을 듣고 "그런가. 그렇게 유명하다면 알현할 기회가 있겠군"이라고 답했다는 일화는[22] 그가 스페인 국민의 정서를 얻지 못하고 통치를 안정시키지 못한 원인 중 하나로 여겨진다.
퇴위 후 아마데오 1세는 이탈리아로 돌아가 Amedeo di Savoia-Aosta|아메데오 디 사보이아-아오스타it라는 이름으로 아오스타 공작으로서의 삶에 전념했다. 스페인에서는 제1공화정이 1년 만에 무너지고, 왕당파와 카를리스트, 공화파 간의 내전이 계속되다가 결국 이사벨 2세의 아들인 알폰소 12세가 왕위에 오르며 스페인 부르봉 왕조가 복고되었다.
2. 5. 퇴위 이후
스페인 왕위에서 물러난 아마데오 1세는 이탈리아로 돌아가 아오스타 공작 칭호를 다시 사용했다. 그가 떠난 스페인에서는 2년이 채 안 되어 제1차 스페인 공화국이 막을 내렸고, 1874년 11월 이사벨 2세의 아들인 알폰소 12세가 국왕으로 선포되었다. 잠시 안토니오 카노바스 델 카스티요가 섭정을 맡기도 했다.아마데오의 첫 번째 부인 마리아 비토리아 달 포초 델라 치스테르나는 1876년에 사망했다. 이후 1888년, 그는 자신의 조카인 프랑스 출신의 마리아 레티치아 보나파르트 아오스타 공작 부인(1866년 11월 20일 – 1926년 10월 25일)과 재혼했다. 마리아 레티치아는 아마데오의 누이인 마리아 클로틸데와 나폴레옹 1세의 조카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친왕 사이의 딸이었다. 이 결혼은 아마데오가 마리아 레티치아의 어머니 마리아 클로틸데의 남동생이었기 때문에 삼촌과 조카 사이의 결혼(숙질혼)에 해당했다. 이는 당시 유럽 귀족 사회에서 근친혼으로 간주되어 금기시되었기에 상당한 논란을 일으켰으나, 결국 교회의 판단에 따라 허락되었다. 아마데오와 마리아 레티치아 사이에서는 아들 움베르토(1889년–1918년)가 태어났다. 움베르토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했다.
아오스타 공작으로 돌아온 후 아마데오의 삶은 비교적 평온했으며, 스페인 국왕 시절과 같은 정치적 혼란에 휘말리지는 않았다. 그는 1890년 1월 18일 토리노에서 44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그의 친구였던 작곡가 푸치니는 그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현악사중주곡 ''크리산테미''를 작곡했다.[5] 아오스타 공작 작위와 가문의 수장 자리는 장남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가 계승했다.
배우자 | 자녀 | 생몰년 | 작위 |
---|---|---|---|
마리아 비토리아 달 포초 델라 치스테르나 (1867년 결혼, 1876년 사별) |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 1869년 – 1931년 | 아오스타 공작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 1870년 – 1946년 | 토리노 백작 | |
루이지 아메데오 | 1873년 – 1933년 | 아브루치 공작 | |
마리아 레티치아 보나파르트 (1888년 결혼) | 움베르토 | 1889년 – 1918년 | 살레미 백작 |
필리핀의 카비테 주에 있는 아마데오 시는 과거 스페인의 식민지 시절, 아마데오 1세의 통치 기간 중인 1872년 7월 15일에 설립되면서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
백과사전
Amedeo Ferdinando Maria di Savoia
3. 유산
호주 중앙부에 위치한 거대한 소금 호수인 아마데우스 호와 이후 이름 붙여진 아마데우스 분지 역시, 1872년 이 호수를 처음 발견한 유럽 탐험가 어니스트 자일스가 아마데오 1세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이다.
참조
[2]
학술지
Spain's Forgotten Queen
2006-08
[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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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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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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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eijiseitoku.[...]
明治聖徳記念学会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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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journaldemon[...]
[14]
학술지
Königlich Preussische Ordensliste
https://babel.hath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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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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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문서
Sveriges Statskalender
https://runeberg.org[...]
2018-01-0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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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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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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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La historia de España contada para escépticos
Ed. Planeta
[23]
서적
스페인 역사 100장면
가람기획
2003-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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