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단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아바단은 이란 후제스탄주에 위치한 도시로, 페르시아만과 샤트알아랍 강에 인접해 있다. 아바단은 아바스 왕조 시대에 소금과 돗자리의 주요 생산지로 발전했으며, 20세기 초 앵글로-페르시아 석유 회사가 정유 공장을 건설하면서 석유 정제 산업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이란-이라크 전쟁과 이슬람 혁명으로 도시가 큰 피해를 입었으나, 이후 재건되어 현재는 이란의 주요 경제 중심지 중 하나로, 아바단 정유소와 아르반드 자유 구역을 통해 경제 발전을 추진하고 있다. 아바단은 또한 다양한 문화 유적과 스포츠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여러 도시와 자매 결연을 맺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후제스탄주의 도시 - 슈슈타르
슈슈타르는 이란 후제스탄 주에 위치한 도시로, 고대 시대부터 중요한 도시였으며,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슈슈타르 역사적 수리 시스템을 통해 농업 발전에 기여했다. - 후제스탄주의 도시 - 수상게르드
수산게르드는 이란 남서부 후제스탄 주에 있는 도시로, 고대 도시 카파지에의 후신으로 여겨지며, 이란-이라크 전쟁 중 격전지였고, 현재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 이란의 도시 - 반다르아바스
반다르아바스는 이란 남부의 주요 항구 도시이자 해군 군항으로, 고대 해상 교역 요충지였으나 포르투갈의 지배를 거쳐 사파비 왕조 시대에 탈환되었고, 이후 무역 경쟁과 쇠퇴기를 겪었지만 20세기 이란 정부의 투자로 재개발되어 현재는 농수산물 생산, 우라늄 채굴, 중계 무역의 중심지이며 발달된 교통망을 갖추고 있다. - 이란의 도시 - 이스파한
이스파한은 이란 중부에 위치한 오랜 역사의 도시로, 사파비 왕조 시대에 수도로 지정되어 번성했으며, 현재는 이란의 주요 산업, 문화, 관광 중심지 역할을 한다. - 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분류 - 공 (악기)
공은 금속으로 제작된 타악기로, 다양한 문화권에서 의식, 신호, 음악 연주 등에 사용되며, 형태와 용도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뉜다. - 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분류 - 국무회의
국무회의는 대한민국 대통령을 의장으로, 예산, 법률안, 외교, 군사 등 국정 현안을 심의하는 중요한 기관이며, 대통령, 국무총리, 국무위원으로 구성되고, 정례회의는 매주 1회, 임시회의는 필요에 따라 소집된다.
| 아바단 - [지명]에 관한 문서 | |
|---|---|
| 지도 정보 | |
| 기본 정보 | |
| 공식 명칭 | 아바단 |
| 로마자 표기 | Ābādān |
| 기타 표기 | , , 아랍어: عبادان |
| 별칭 | (없음) |
| 위치 | 이란 후제스탄 주 |
| 면적 | 1275 제곱킬로미터 |
| 해발 고도 | 3 미터 |
| 시간대 | 이란 표준시(IRST) |
| UTC 오프셋 | +03:30 |
![]() | |
![]() | |
![]() | |
![]() | |
| 행정 구역 | |
| 국가 | 이란 |
| 주 | 후제스탄 주 |
| 군 | 아바단 군 |
| 구 | 중앙 구 (아바단 군) |
| 인구 통계 | |
| 2016년 총 인구 | 231,476명 |
| 인구 순위 (이란 내) | 40위 |
| 인구 밀도 | 자동 계산 |
| 거주민 명칭 | 아바다니 (Abadani) (영어) |
| 정치 및 행정 | |
| 시장 | 야신 카베푸르 |
| 시의회 의장 | 아바단 이슬람 시의회 |
| 경제 및 산업 | |
| 지역 번호 | (+98) 061 |
| 기타 정보 | |
| 기후 | BSk |
| 웹사이트 | 아바단 공식 웹사이트 |
2. 역사
20세기 초까지 아바단은 인구 400명에 불과한 작은 마을이었으나, 이 지역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 급격히 발전하기 시작했다. 1912년에는 한때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했던 아바단 정유소가 완공되었다.
이후 아바단은 여러 역사적 사건의 중심지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영국-소련 연합군의 침공을 받았으며, 1953년에는 니쇼마루 사건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1978년 8월 19일에는 시내 영화관에서 방화 사건이 발생하여 377명이 사망했다[50]. 1980년부터 다음 해까지 이란-이라크 전쟁 중 이라크군의 침공을 받았다.
2. 1. 초기 역사와 어원
아바단 섬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그리스 지리학자 마르키아노스의 저작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그는 이곳을 "Apphadana"라고 표기했다.[5] 이보다 앞서 고전 지리학자 프톨레마이오스는 티그리스강 어귀 근처(오늘날 아바단 섬이 위치한 곳)에 있는 섬을 "Apphana"라고 언급했다. 이름의 어원에 대해서는 B. 파라바시가 페르시아어 단어 "ab"(물)과 어근 "pā"(보호, 감시)에서 유래하여 "해안 경비대"를 의미한다고 주장했다.[6]이슬람 시대에는 역사가 아흐마드 이븐 야흐야 알-발라두리(892년 사망)에 의해 다른 어원이 제시되기도 했다. 그는 Banu Tamim 아랍 부족 출신의 "Abbad bin Hosayn"이라는 인물이 이 마을을 세웠다는 민간 설화를 인용했다. 이 설화에 따르면, 압바드는 우마이야 왕조 시대에 ''Hajjaj''의 통치 아래 그곳에 주둔지를 세웠다고 한다.[6]
이후 몇 세기 동안 페르시아어 형태의 이름이 널리 사용되었고, 1935년 공식 칙령을 통해 현재의 이름 '아바단'이 채택되었다.[6]
2. 2. 이슬람 시대와 근대
아바단은 아바스 왕조 시대에 주요 항구 도시로 발전했으며, 당시 소금과 돗자리(매트)의 주요 생산지였다.[4] 그러나 강 삼각주의 토사 퇴적 작용으로 도시는 점차 해안에서 멀어졌다. 14세기 이븐 바투타는 아바단을 평평하고 염분이 많은 평야에 위치한 작은 항구로 묘사했다.[7]정치적으로 아바단은 주변 세력 간의 분쟁 지역이 되기도 했다. 17세기부터는 아랍 카브(바니 카브) 부족의 영토였으며, 부족의 한 분파인 모하이센(Mohaysen)은 1924년 셰이크 하자알 칸이 축출될 때까지 모하마라(현재의 호람샤르)에 본부를 두었다.[8] 1847년, 페르시아(카자르 왕조)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아바단의 영유권을 확보하여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32]
20세기 초까지 아바단은 한적한 마을이었으며, 1910년 인구는 400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풍부한 유전이 발견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1909년 7월 16일, 영국 제국 영사 퍼시 콕스 경과 아놀드 윌슨의 중재 하에 당시 지역 통치자였던 셰이크 하자알 칸과의 비밀 협상을 통해 영국은 아바단 섬을 포함한 지역의 임대 계약을 체결했다.[9][10][11] 셰이크 하자알 칸은 1924년까지 이 섬을 계속 관리했다.[12] 앵글로-페르시아 석유 회사(Anglo-Persian Oil Company, APOC)는 1909년부터 아바단에 파이프라인 종착지이자 정유 공장 건설을 시작하여 1912년에 완공했고, 같은 해 8월부터 석유 생산이 시작되었다(아바단 정유 공장 참조).[13][14] 정유 공장의 처리량은 1912-1913년 연간 33000ton에서 1931년 4338000ton으로 급증했으며,[12] 1938년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정유 공장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아바단은 이란-소련의 이란 침공 당시 이란군과 영국 및 인도군 사이의 짧은 전투 현장이었다. 당시 영국군 총참모장이었던 앨런브룩은 1942년 8월 일기에 아바단 유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페르시아 유전 상실은 유조선 부족으로 미국에서의 보충이 불가능해져 이집트 상실, 인도양 제해권 상실, 그리고 인도-버마 전선 전체의 위태로움을 초래할 것이라고 적었다.[15] 이후 아바단은 미국이 소련에 렌드-리스 법에 따라 군수 물자(특히 항공기)를 지원하는 주요 병참 기지 역할을 수행했다.[16][17]
1951년, 모하마드 모사데그 총리가 이끄는 이란 정부는 석유 자산 국유화를 단행했고, 아바단 정유 공장의 가동은 중단되었다. 이 과정에서 아바단에서는 폭동이 발생하여 영국인 노동자 3명이 사망하기도 했다.[18] 1953년에는 니쇼마루 사건의 무대가 되었다. 1954년, 영국-미국 주도의 쿠데타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모사데그 정부가 전복된 이후, 국제 석유 회사 컨소시엄이 다시 아바단 유전의 생산 및 정유 작업을 관리하는 협정이 체결되었다.[19] 이 협정은 1973년 이란 국영 석유 회사(NIOC)가 모든 시설을 인수할 때까지 지속되었다.[13] 완전 국유화 이후 이란은 국내 석유 공급에 집중하며 아바단에서 테헤란까지 파이프라인을 건설했다.[13]
아바단은 이란 이슬람 혁명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78년 8월 19일, 민족주의적이고 대중적인 지지를 받던 모하마드 모사데그 총리를 축출한 미국 배후의 쿠데타 기념일에 아바단의 렉스 영화관(Cinema Rex)에서 방화 사건이 발생했다. 시네마 렉스 화재로 인해 약 430명(일부 출처는 377명[50] 또는 400명 이상[21] 등으로 기록)이 사망했으며, 이 사건은 혁명을 더욱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20][22][23] 사건 초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팔라비 왕정의 비밀경찰인 SAVAK이나 샤 본인을 배후로 의심했다.[21][22][23][24]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급진 이슬람주의자들이 방화의 진범임이 밝혀졌는데, 이들은 영화관을 서구 문화 및 미국과의 연결고리로 보고, 방화를 통해 대중의 반정부 감정을 더욱 고조시키려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22][25] 이 화재는 그해 8월 마슈하드, 리자이야, 시라즈 등에서 발생한 다른 방화 사건들과 함께 일어났다.
1980년 9월,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하면서 아바단은 이라크군의 후제스탄 기습 공격으로 거의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 도시는 11개월 동안 포위되어 이라크군의 포격과 공습에 시달렸으나 함락되지 않았고, 1981년 9월 이란군이 포위를 풀었다.[26] 전쟁 기간 동안 도시의 기반 시설과 세계 최대 규모였던 정유 공장(하루 628,000 배럴 처리 능력)은 심각하게 파괴되었다.[27] 전쟁 전 약 30만 명이었던 민간인 인구 대부분은 전쟁을 피해 이란의 다른 지역으로 피난했다.
전쟁 후 최우선 과제는 파괴된 아바단 정유 공장의 재건이었다. 당시 정유 공장의 가동률은 10%에 불과했다.[28] 1993년 정유 공장은 제한적으로 운영을 재개했고 항구도 다시 문을 열었다. 1997년에는 정유 공장이 전쟁 이전 수준의 생산 능력을 회복했다. 최근 몇 년간 아바단은 정유 공장 노동자들이 임금 미지급과 국가 정치 상황에 항의하며 파업과 시위를 벌이는 등 주요 노동 운동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29]
2. 3. 20세기 이후의 발전
20세기 초까지 아바단은 인구 400명 정도의 한적한 마을에 불과했다.[10] 그러나 이 지역에서 풍부한 석유가 발견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1909년 7월, 영국 제국 영사 퍼시 콕스 등의 도움을 받아 셰이크 카잘과의 비밀 협상을 통해 영국은 아바단 섬에 대한 임대 계약을 체결했다.[9][10][11] 이 계약으로 셰이크는 연간 1500GBP와 금화 16500GBP 상당을 받았다.[11] 셰이크 카잘은 1924년까지 섬을 계속 관리했다.[12]같은 해인 1909년, 앵글로-페르시아 석유 회사(Anglo-Persian Oil Company, APOC)는 아바단에 첫 정유 공장 건설을 시작하여 1912년에 완공했다. 아바단 정유 공장에서는 1912년 8월부터 석유가 생산되기 시작했다.[13][14] 정유 공장의 처리량은 빠르게 증가하여 1912-1913년 연간 33000ton에서 1931년에는 4338000ton으로 늘어났으며,[12] 1938년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정유 공장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아바단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1941년 이란-소련의 이란 침공 당시 이란군과 영국 및 인도군 사이에 짧은 전투가 벌어졌다. 영국군 원수 앨런브룩은 1942년 8월 일기에 "모든 것이 아바단의 석유에 달려 있다"고 쓰며, 페르시아 석유를 잃으면 이집트를 잃고 인도양 제해권을 상실하며 인도-버마 전선 전체가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평가했다.[15] 이후 아바단은 미국이 소련에 렌드-리스 법에 따라 군수 물자(특히 항공기)를 지원하는 주요 물류 중심지 역할을 했다.[16][17]
1951년, 모하마드 모사데그 총리가 이끄는 이란 정부는 석유 산업 국유화를 단행했고, 이에 따라 아바단 정유 공장의 운영이 중단되었다. 국유화 결정 이후 아바단에서는 폭동이 발생하여 영국인 노동자 3명이 사망하기도 했다.[18] 1953년에는 일본 유조선 니쇼마루호가 이란산 석유를 싣고 출항하여 국제적인 주목을 받은 니쇼마루 사건이 이곳에서 발생했다. 1954년, 영국과 미국이 주도한 쿠데타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모사데그 정부가 전복된 이후에야, 국제 석유 회사 컨소시엄이 다시 아바단 정유 공장의 운영권을 확보하는 합의가 이루어졌다.[19] 이 컨소시엄 체제는 1973년 이란 국영석유회사(NIOC)가 모든 시설을 인수할 때까지 지속되었다.[13] 완전 국유화 이후 이란 정부는 국내 석유 공급에 집중하며 아바단에서 수도 테헤란까지 이어지는 파이프라인을 건설했다.[13]
아바단은 주요 문화나 종교 중심지는 아니었지만, 이슬람 혁명 과정에서 중요한 사건의 무대가 되었다. 1978년 8월 19일, 과거 모사데그 총리를 축출한 쿠데타 기념일에 아바단의 렉스 영화관에서 시네마 렉스 화재 사건이 발생하여 430명(출처에 따라 377명에서 430명 사이로 다양하게 보고됨)이 사망했다.[20][50][21][22][23] 이 사건은 혁명의 열기를 더욱 고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대중은 이 방화의 배후로 샤 정권과 비밀경찰 SAVAK을 지목하며 분노했지만,[21][22][23][24] 이후 수사를 통해 급진 이슬람주의자들이 정부에 대한 불신을 증폭시키고 서구 문화의 상징인 영화관을 공격하기 위해 저지른 범행임이 밝혀졌다.[22][25]
1980년 9월, 이라크가 후제스탄주를 기습 공격하면서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했고, 아바단은 전쟁 초기 이라크군에게 거의 점령될 뻔했다. 이후 11개월 동안 아바단은 이라크군의 포위 공격과 포격, 공습에 시달렸으나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아바단 포위전).[26] 1981년 9월 이란군은 포위를 풀었지만, 전쟁으로 인해 도시의 상당 부분과 세계 최대 규모(일일 생산량 628,000배럴)를 자랑하던 정유 공장은 심각하게 파괴되었다.[27] 전쟁 전 약 30만 명에 달했던 아바단의 민간인 인구는 전쟁이 끝날 무렵 거의 모두 다른 지역으로 피난한 상태였다.
전쟁 후 아바단 재건의 최우선 과제는 파괴된 정유 공장을 복구하는 것이었다. 당시 정유 공장의 가동률은 전쟁 피해로 인해 10%에 불과했다.[28] 1993년 정유 공장은 제한적인 운영을 재개했고 항구도 다시 문을 열었다. 1997년에는 정유 공장의 생산량이 전쟁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최근 몇 년간 아바단은 정유 공장 노동자들이 임금 미지급과 국가의 정치 상황에 항의하며 파업과 시위를 벌이는 등 주요 노동 운동의 현장이 되고 있다.[29]
2. 4. 이란 혁명과 이란-이라크 전쟁
아바단은 비록 주요 문화나 종교 중심지는 아니었으나, 이슬람 혁명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78년 8월 19일, 미국의 지원을 받은 쿠데타로 민족주의 성향의 모하마드 모사데그 총리가 실각한 날을 기념하는 시점에 아바단의 시네마 렉스 영화관에서 방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시네마 렉스 화재로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는데, 사망자 수는 출처에 따라 377명[50]에서 430명[20] 사이로 기록되어 있다.[21][22][23] 이 사건은 이란 혁명이 확산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초기에는 사건의 배후로 샤 정권이나 비밀경찰인 사바크가 지목되었으나[21][22][23][24], 시간이 지나면서 급진 이슬람주의자들이 정부에 대한 대중의 불신을 증폭시키고 영화관을 서구 문화의 상징으로 간주하여 방화를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22][25] 이 화재는 같은 해 8월 마슈하드, 우르미아, 시라즈 등지에서 발생한 연쇄 방화 사건 중 하나였다.1980년 9월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하면서 아바단은 이라크군의 후제스탄 기습 공격으로 인해 거의 점령될 위기에 처했다. 이후 아바단은 11개월 동안 이라크군에게 포위되어 포격과 공습에 시달렸지만, 끝까지 함락되지 않았고 1981년 9월 이란군이 아바단 포위전을 통해 포위를 풀었다.[26] 이 전쟁 기간 동안 아바단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으며, 당시 세계 최대 규모였던 하루 628,000 배럴 처리 능력의 정유 공장을 포함한 도시 기반 시설 상당수가 파괴되었다.[27] 전쟁 이전에 약 30만 명에 달했던 도시 인구는 전쟁이 끝날 무렵 거의 대부분 이란 내 다른 지역으로 피난해야 했다.
전쟁 이후 가장 시급한 과제는 파괴된 아바단 정유 공장을 재건하는 것이었다.[28] 1993년 정유 공장은 제한적으로 운영을 재개했으며 항구도 다시 문을 열었다. 1997년에 이르러 정유 공장은 전쟁 이전과 같은 수준의 생산 능력을 회복했다.
2. 5. 전후 복구와 현재
이란-이라크 전쟁 이후 가장 큰 과제는 심각하게 파괴된 아바단 정유 공장을 복구하는 것이었다. 전쟁으로 인해 정유 공장의 가동률은 10%까지 떨어졌었다.[28] 1993년, 정유 공장은 제한적으로나마 가동을 재개했으며 항구도 다시 문을 열었다. 1997년에는 마침내 전쟁 이전 수준의 생산 능력을 회복했다.최근 아바단은 노동 운동의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다. 도시의 정유 공장 노동자들은 임금 미지급 문제와 국가의 정치 상황에 항의하며 파업과 시위를 벌이고 있다.[29] 한편, 시 당국은 아바단 정유 100주년을 기념하여 석유 박물관 건립을 계획 중이다.[30] 과거 아바단 정유소는 1965년과 1971년부터 1973년까지 발행된 이란의 100리알 지폐 뒷면에 등장하기도 했다.
현재 아바단은 자유 무역 지대로 지정되어 경제 발전을 꾀하고 있다.[31] 또한 이란과 이라크 간 우호 관계가 증진되면서, 아바단은 두 나라를 40분 만에 연결하는 주요 교통 도시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3. 지리
(내용 없음)
3. 1. 기후
아바단의 기후는 쾨펜의 기후 구분상 건조 기후(''BWh'')에 속한다. 여름은 매우 덥고 건조하며, 기온이 45°C를 넘는 날이 많고, 50°C를 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아바단은 세계에서 가장 더운 지역 중 하나로, 모래 폭풍과 먼지 폭풍이 자주 발생한다. 겨울은 온화하고 습하며, 가끔 밤에 서리가 내린다. 아바단에서는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는다.[51][52][53][54][55][56] 역대 최저 기온은 -4°C (1964년 1월 20일, 1967년 2월 3일), 최고 기온은 53°C (1951년 7월 11일, 1981년 8월 9일, 2022년 8월 5일)이다.[40][38]
4. 인구
| 연도 | 인구 |
|---|---|
| 1910 | 400 |
| 1949 | 173,000 |
| 1956 | 220,000[7] |
| 1980 | 300,000 |
| 1986 | 6 |
| 1991 | 84,774[32] |
| 2001 | 206,073 |
| 2006 | 217,988[33] |
| 2011 | 212,744[34] |
| 2016 | 231,476[35] |
아바단은 이란-이라크 전쟁 (1980–1988) 8년 동안 극심한 파괴를 겪으며 민간인 인구가 거의 사라졌다. 1986년 인구 조사에서는 단 6명만이 도시 거주자로 기록될 정도로 황폐화되었다. 전쟁 이후 도시 재건과 함께 인구가 다시 유입되기 시작하여, 1991년에는 84,774명이 도시로 돌아와 정착했다.[32] 2001년에는 인구가 206,073명으로 크게 증가했으며, 2006년 인구 조사에서는 48,061가구에 217,988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33] 2011년 인구 조사에서는 55,318가구에 212,744명이 집계되었고,[34] 2016년 인구 조사에서는 66,470가구에 231,476명으로 인구가 증가했다.[35]
아바단 정유소는 세계 최대 규모의 정유 시설 중 하나로, 이곳 노동자들의 인구 구성은 아바단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정유소 관리자의 9%만이 후제스탄 출신이었으며, 다수는 다른 지역에서 왔다. 테헤란, 카스피해 연안, 아제르바이잔, 쿠르디스탄 출신 노동자의 비율은 육체 노동자의 4%에서 화이트칼라 노동자의 22%에 달했다. 특히 이스파한과 시라즈 출신은 관리자의 45%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높았다. 반면, 아랍어 사용자는 전체 노동력의 4%에 불과하며 주로 하위 계층에 집중되었다. 전반적으로 아바단은 아랍 문화의 영향을 받았지만, 페르시아인 인구가 60% 이상을 차지하는 도시이다. 나머지 인구는 아제리인, 쿠르드족 등으로 구성되며, 토착 아랍 인구는 4~5% 수준이다. 관리직은 주로 아바단에서 떨어진 지역 출신인 경향이 있었다.[36] 도시 중심부에는 아르메니아 교회인 성 가라페트 교회가 있다.
5. 경제
아바단은 석유 정제 산업이 발달한 도시이다. 아바단 정유 공장은 1909년 건설을 시작하여 1962년 하루 생산량 2,500 배럴 규모로 가동을 시작했다. 한때 세계 최대 규모의 정유 시설 중 하나였으며,[30] 1965년과 1971년부터 1973년까지 발행된 이란의 100리알 지폐 뒷면에 등장하기도 했다. 시 당국은 아바단 정유 100주년을 기념하여 석유 박물관 건립을 계획하고 있다.[30] 정유 공장에 필요한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1939년 아바단 기술 연구소가 설립되었으며,[12] 이 연구소는 엔지니어링과 석유 화학을 전문으로 가르쳤고 현재는 테헤란에 있는 석유 기술 대학교의 분교로 운영되고 있다.[12]
오늘날 아바단은 자유 무역 지대로 지정되었으며,[31] 이란과 이라크 간 우호적인 관계 속에서 두 나라를 연결하는 주요 운송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아바단은 155km2 규모의 산업 및 보안 구역인 아르반드 자유 구역의 일부이다.[49] 이러한 환경 속에서 동아시아 국가들을 중심으로 외부 투자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를 통해 정유 공장 시설 확충 및 부동산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아바단에는 다음과 같은 주요 기업들이 위치하고 있다.
| 기업명 |
|---|
| 아바단 정유 회사 |
| 아바단 석유 화학 회사 |
| 아프라 아르반드 |
| 호마 케미컬 |
| 이라놀 오일 컴퍼니 |
| KPC 카룬 |
| 파르스 오팔 |
| 파사르가드 오일 |
| 시린 디아르 아르반드 |
| 탐 아르반드 머신 |
| U-PVC 노빈 |
| 비나 나흐쉬 산업 그룹 |
| 옉타 타흐비에 아르반드 |
석유 산업 외에도 아바단은 신선한 해산물을 구할 수 있는 활기찬 어시장으로 유명하며, 이곳의 수산물은 현지 요리에 널리 사용된다. 아바단에는 국제 공항 (IATA 공항 코드 ABD)이 있어[48] 물류 및 교류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6. 교육
아바단 기술 연구소는 1939년 아바단에 설립되었다.[12] 이 학교는 엔지니어링과 석유 화학을 전문으로 했으며, 도시의 정유 공장에 근무할 직원을 양성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학교 이름은 여러 차례 바뀌었으나, 1989년부터는 테헤란에 있는 석유 기술 대학교의 분교로 운영되고 있다.
아바단 의과 대학교는 1941년 9월 간호학부로 처음 설립되었고, 2012년에 독립된 의과대학으로 승격되었다. 이 학교의 교육 과정은 이란 내 다른 의과대학들의 커리큘럼과 유사하다.
아바단에 위치한 주요 고등 교육 기관은 다음과 같다.
| 대학명 |
|---|
| 아바단 의과대학교 |
| 아바단 이슬람 아자드 대학교 |
| 메르아르반드 대학교 |
| 석유 기술 대학교 (분교) |
| 아바단 파얌누르 대학교 |
7. 교통
(내용 없음)
7. 1. 항공
아바단에는 아바단 국제공항(IATA 코드: ABD)이 있으며, 이 공항을 통해 여러 상업 항공편을 이용할 수 있다.7. 2. 철도
가장 가까운 기차역은 아바단에서 북쪽으로 약 10km 떨어진 호람샤르에 있다. 아바즈에서 출발하는 주간 열차와 테헤란, 마슈하드에서 출발하는 야간 열차를 이용할 수 있다.8. 스포츠
사나트 나프트 아바단 FC는 현재 이란 프로 축구 리그에 속한 축구 클럽이다. 타흐티 스타디움은 아바단의 주요 경기장이자 이 팀의 홈 구장이다.
9. 주요 명소


- 바흐만시르 다리 (이스타가-에 하프트에 위치)
- 이맘 레자 케이블 다리
- 랑구니하 모스크
- 아바단 박물관
- 역사 및 필사본 문서 박물관
- 아바단 가솔린 하우스 박물관
- 아바단 석유 박물관
- 성 가라페트 아르메니아 교회
- 나프트 시네마
- 시린 영화관
10. 자매 도시
11. 저명한 출신 인물
- 아흐마드 레자 아베드자데 – 축구 선수
- 수산 바바이에 – 미술 사학자
- 패트릭 바부미안 – 스트롱맨
- 모흐센 바야티니아 – 축구 선수
- 나자프 다리얀다리 – 작가
- 파르비즈 데흐다리 – 축구 코치
- 피루제 두마 – 작가
- 비잔 엠카니안 – 배우
- 하미드 파로흐네자드 – 배우
- 바흐만 골바르네자드 – 패럴림픽 사이클 선수
- 파르하드 하산자데 – 시인
- 메흐디 하셰미나사브 – 축구 선수
- 호세인 카나니자데간 – 축구 선수
- 압돌하산 카제미 – 은퇴한 축구 선수
- 모자헤드 카지라비 – 축구 선수
- 마르티크 – 가수
- 골람 호세인 마즐루미 – 축구 코치
- 파르비즈 마즐루미 – 축구 코치
- 마누체르 모하마디 – 영화 프로듀서
- 아미르 나데리 – 감독
- 호세인 나심 – 수구 코치
- 아비 네이선 – 평화 운동가
- 조야 피르자드 – 작가
- 하미드 라시디 – 변호사
- 나세르 타그바에 – 감독
- 호세인 바파에이 – 스누커 선수
- 시마 자르가미 – TV 프로듀서
참조
[1]
지도
Abadan, Abadan County
https://www.openstre[...]
2024-12-13
[2]
뉴스
شهردار آبادان انتخاب شد
https://www.irna.ir/[...]
irna.ir
[3]
보고서
Approval of the organization and chain of citizenship of the elements and units of the national divisions of Khuzestan province, centered in the city of Ahvaz
https://rc.majlis.ir[...]
Ministry of the Interior, Political and Defense Commission of the Government Board
2014-07-26
[4]
학술
[5]
학술
[6]
학술
[7]
학술
[8]
학술
[9]
학술
[10]
학술
[11]
학술
[12]
학술
[13]
학술
[14]
학술
[15]
서적
War Diaries 1939–1945
https://archive.org/[...]
Phoenix Press
2001
[16]
학술
[17]
웹사이트
Document Detail for IRISNUM= 00190278
http://airforcehisto[...]
1987-04-03
[18]
학술
[19]
학술
[20]
학술
[21]
학술
[22]
학술
[23]
학술
[24]
학술
[25]
학술
[26]
학술
[27]
학술
[28]
학술
[29]
학술
[30]
웹사이트
Southern Iran Craves for an Oil Museum
http://www.shana.ir/[...]
2005-10-22
[31]
웹사이트
Privacy Policy – Arvand Free Zone Organization
https://arvandfreezo[...]
2024-07-10
[32]
학술
[33]
보고서
Census of the Islamic Republic of Iran, 1385 (2006): Khuzestan Province
http://www.amar.org.[...]
The Statistical Center of Iran
[34]
보고서
Census of the Islamic Republic of Iran, 1390 (2011): Khuzestan Province
https://irandataport[...]
The Statistical Center of Iran
[35]
보고서
Census of the Islamic Republic of Iran, 1395 (2016): Khuzestan Province
https://www.amar.org[...]
The Statistical Center of Iran
[36]
서적
[37]
서적
[38]
웹사이트
40831: Abadan (Iran)
https://ogimet.com/c[...]
OGIMET
2022-08-04
[39]
웹사이트
World Meteorological Organization Climate Normals for 1991-2020: Abadan
https://www.nodc.noa[...]
NOAA
2024-01-31
[40]
웹사이트
Highest record temperature in Abadan by Month 1951–2010
https://web.archive.[...]
Iran Meteorological Organization
2015-04-08
[40]
웹사이트
Lowest record temperature in Abadan by Month 1951–2010
https://web.archive.[...]
Iran Meteorological Organization
2015-04-08
[41]
웹사이트
Climate and monthly weather forecast Abadan, Iran
https://www.weather-[...]
2024-01-31
[42]
웹사이트
Average Maximum temperature in Abadan by Month 1951–2010
https://web.archive.[...]
Iran Meteorological Organization
2015-04-08
[42]
웹사이트
Average Mean Daily temperature in Abadan by Month 1951–2010
https://web.archive.[...]
Iran Meteorological Organization
2015-04-08
[42]
웹사이트
Average Minimum temperature in Abadan by Month 1951–2010
https://web.archive.[...]
Iran Meteorological Organization
2015-04-08
[43]
웹사이트
Monthly Total Precipitation in Abadan by Month 1951–2010
https://web.archive.[...]
Iran Meteorological Organization
2015-04-08
[44]
웹사이트
Average relative humidity in Abadan by Month 1951–2010
https://web.archive.[...]
Iran Meteorological Organization
2015-04-08
[45]
웹사이트
No. Of days with precipitation equal to or greater than 1 mm in Abadan by Month 1951–2010
https://web.archive.[...]
Iran Meteorological Organization
2015-04-08
[46]
웹사이트
Monthly total sunshine hours in ABADAN by Month 1951–2010
http://www.chaharmah[...]
Iran Meteorological Organization
2015-04-08
[47]
웹사이트
40831: Abadan (Iran)
https://www.ogimet.c[...]
OGIMET
2021-09-02
[48]
웹사이트
Flightradar24.com – Live flight tracker!
https://www.flightra[...]
[49]
서적
Abadan city Book
[50]
뉴스
近代化強行に反発 イラン放火テロの背景
朝日新聞
1978-08-21
[51]
웹인용
Highest record temperature in Abadan by Month 1951–2010
http://www.chaharmah[...]
Iran Meteorological Organization
2015-04-08
[51]
웹인용
Lowest record temperature in Abadan by Month 1951–2010
http://www.chaharmah[...]
Iran Meteorological Organization
2015-04-08
[52]
웹인용
Average Maximum temperature in Abadan by Month 1951–2010
http://www.chaharmah[...]
Iran Meteorological Organization
2015-04-08
[52]
웹인용
Average Mean Daily temperature in Abadan by Month 1951–2010
http://www.chaharmah[...]
Iran Meteorological Organization
2015-04-08
[52]
웹인용
Average Minimum temperature in Abadan by Month 1951–2010
http://www.chaharmah[...]
Iran Meteorological Organization
2015-04-08
[53]
웹인용
Monthly Total Precipitation in Abadan by Month 1951–2010
http://www.chaharmah[...]
Iran Meteorological Organization
2015-04-08
[54]
웹인용
Average relative humidity in Abadan by Month 1951–2010
http://www.chaharmah[...]
Iran Meteorological Organization
2015-04-08
[55]
웹인용
No. Of days with precipitation equal to or greater than 1 mm in Abadan by Month 1951–2010
http://www.chaharmah[...]
Iran Meteorological Organization
2015-04-08
[56]
웹인용
Monthly total sunshine hours in ABADAN by Month 1951–2010
http://www.chaharmah[...]
Iran Meteorological Organization
2015-04-08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