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펠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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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펠레스는 기원전 4세기에 활동한 고대 그리스의 화가로, 이오니아 콜로폰 출신으로 추정된다. 그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궁정 화가로 활동하며 명성을 얻었으며, 특히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그린 그림으로 유명하다. 아펠레스는 섬세한 선과 뛰어난 색채 감각, 인물의 감정을 포착하는 능력이 뛰어났으며, "하루도 선을 그리지 않고 보내지 않는다"는 격언을 남길 정도로 예술에 대한 열정이 높았다. 그의 작품은 현재 남아있지 않지만,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라파엘로, 보티첼리 등이 그의 작품을 재해석하여 제작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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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아펠레스는 기원전 4세기경 이오니아 지방의 콜로폰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에페소스의 에포루스에게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고, 이후 시키온의 팜필로스에게 사사하며 도리아 양식의 엄격함과 이오니아 양식의 우아함을 겸비하게 되었다.[2]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에게 발탁되어 궁정 화가로 활동하며,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의 초상화를 그렸다.[3] 특히 번개를 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그림은 리시포스의 작품과 비견될 정도로 뛰어났다고 전해지나, 플루타르코스는 아펠레스가 알렉산드로스의 피부색을 너무 어둡게 묘사했다고 평가했다.[4]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아펠레스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와 갈등을 겪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하였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과거 아펠레스를 싫어했다.[5] 수년 후 폭풍으로 인해 이집트 왕국에 상륙하게 되었을 때, 아펠레스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광대의 거짓 초대로 곤경에 처했지만, 뛰어난 그림 실력으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였다.[5]
아펠레스는 동시대 화가인 프로토게네스와 선 긋기 경쟁을 벌인 일화가 있다. 아펠레스는 로도스 섬에 있는 프로토게네스의 작업실을 찾아갔으나 부재중이었고, 그림판에 매우 가는 선을 그려 자신의 방문을 알렸다. 돌아온 프로토게네스는 그 선을 보고 아펠레스의 솜씨를 알아챘다.[6] 그는 다른 색으로 더욱 가는 선을 그렸고, 아펠레스는 다시 돌아와 두 선 사이에 또 다른 선을 그어 더 이상의 솜씨를 보일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프로토게네스는 패배를 인정하고 아펠레스를 직접 찾아 나섰다.[15]
아펠레스는 코스 섬에서 아프로디테를 그리던 중 사망했다.[15] 그의 미완성 작품은 다른 화가들이 감히 손대지 못할 정도로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아펠레스의 명성은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루키아누스가 묘사한 ''중상(Calumny)''은 무고한 청년이 거짓으로 고발당하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르네상스 시대에 예술과 시의 관계를 논할 때 자주 언급되었다.[8] 산드로 보티첼리는 이 그림을 바탕으로 ''아펠레스의 중상''을 그리기도 했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아펠레스를 정신적 동요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아타락시아를 설명하는 비유로 사용했다. 아펠레스가 말의 거품을 표현하려다 실패하고 분노하여 스펀지를 던졌는데, 그 자국이 오히려 말의 거품 효과를 냈다는 일화를 통해 아타락시아의 경지를 설명했다.[9]
2. 1. 출생과 초기 생애
아펠레스는 기원전 4세기경 이오니아 지방의 콜로폰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에페소스의 에포루스에게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고, 이후 시키온의 팜필로스에게 사사하며 도리아 양식의 엄격함과 이오니아 양식의 우아함을 겸비하게 되었다.[2]2. 2. 마케도니아 궁정 화가
아펠레스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에게 발탁되어 궁정 화가로 활동했다.[3] 필리포스 2세와 젊은 알렉산드로스의 초상화를 그리며 명성을 얻었다.[3] 특히 번개를 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그림은 조각가 리시포스의 작품과 비견될 정도로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총애를 받아 그의 첩 캄파스페를 선물 받았다는 일화가 있다.[15]
2. 3. 프톨레마이오스 1세와의 관계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아펠레스는 프톨레마이오스 1세와 갈등을 겪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하였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알렉산드로스의 수행원 시절 아펠레스를 싫어했다.[5]수년 후, 아펠레스는 바다를 여행하던 중 폭풍을 만나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다스리는 이집트 왕국에 상륙하게 되었다.[5] 이때,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광대는 아펠레스의 경쟁자들에게 매수되어 아펠레스를 속여 만찬에 초대했다.[5]
아펠레스가 예고 없이 나타나자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분노하며 누구의 초대로 왔는지 물었다. 아펠레스는 벽난로에서 숯을 가져와 벽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몇 번의 획만으로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그림 속 인물이 자신의 광대임을 알아보았다.[5] 이 일화를 통해 아펠레스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2. 4. 프로토게네스와의 경쟁
아펠레스는 동시대 화가인 프로토게네스와 선 긋기 경쟁을 벌였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플리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아펠레스는 프로토게네스를 만나기 위해 로도스 섬에 있는 그의 작업실을 찾아갔다. 프로토게네스는 부재중이었고, 아펠레스는 그림판에 매우 가는 선을 그려 자신의 방문을 알렸다. 돌아온 프로토게네스는 그 선을 보고 아펠레스의 솜씨를 단번에 알아챘다.[6] 그는 다른 색으로 더욱 가는 선을 그 위에 그렸고, 아펠레스는 다시 돌아와 이 두 선 사이에 또 다른 선을 그어 더 이상의 솜씨를 보일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이를 본 프로토게네스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아펠레스를 직접 찾아 나섰다.[15]2. 5. 죽음
아펠레스는 코스 섬에서 '아프로디테 아나디오메네'를 그리던 중 사망했다.[15] 그의 미완성 작품은 다른 화가들이 감히 손대지 못할 정도로 뛰어났다고 전해진다.3. 작품
아펠레스의 작품은 현재 전해지지 않지만, 고대 문헌 기록을 통해 주요 작품들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그림 중 여러 점은 로마로 옮겨져 공개 전시되었는데, 아프로디테 아나디오메네도 그중 하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그린 두 작품(카스토르와 폴룩스, 승리의 여신과 알렉산드로스 대왕, 알렉산드로스의 개선차 뒤에서 손이 묶인 채 따라가는 전쟁의 모습)에서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나중에 알렉산드로스의 얼굴을 그의 조부 아우구스투스의 얼굴로 대체하였다.[10]
3. 1. 주요 작품
- 번개를 휘두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그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의 여러 초상화 중 하나이다.[10]
- 아프로디테 아나디오메네(바다에서 솟아오르는 아프로디테):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여신을 그린 그림으로, 플리니우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전 애인인 캄파스페를 아프로디테의 모델로 사용했다는 전통을 전한다. 아테네오스에 따르면,[10]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아프로디테"라는 아이디어는 프리네에서 영감을 받았는데, 그녀는 엘레우시니아와 포세이돈 축제 기간 동안 바다에서 알몸으로 수영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16]
- 안티고노스 1세의 기승상 초상화: 그의 짝눈을 교묘하게 가린 4분의 3 측면상이다.
- 아르테미스의 초상화: 제물을 바치는 소녀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모습으로, 『오디세이아』 6.102ff를 기반으로 한다.
- 코스 섬의 희생 제사: 헤로다스의 『희극』(4.59)에 묘사되었다.
- 클리투스와 마케도니아의 아르켈라오스 1세의 초상화.
-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대사제의 행렬.
- 거대한 풍자화 "중상모략": 보티첼리의 『아펠레스의 비방』에 영감을 주었다.
3. 2. 로마로 옮겨진 작품
아펠레스의 그림들 중 여러 점이 로마로 옮겨져 공개 전시되었다. 그중에는 아프로디테 아나디오메네도 포함되었는데,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그린 두 작품( 카스토르와 폴룩스, 승리의 여신과 알렉산드로스 대왕, 알렉산드로스의 개선차 뒤에서 손이 묶인 채 따라가는 전쟁의 모습)에서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나중에 알렉산드로스의 얼굴을 그의 조부 아우구스투스의 얼굴로 대체하였다.4. 예술적 특징과 영향
아펠레스는 섬세한 선 묘사와 뛰어난 색채 감각을 가진 화가로, 인물의 감정을 포착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플리니우스는 아펠레스가 '우아함'이라는 특별한 재능을 지녔다고 평가했다.[15] 그는 자연을 모방하는 것을 넘어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했으며,[15] 검은색 바니시를 사용하여 그림을 보존하고 색상을 부드럽게 만드는 기법을 사용했으나, 이 기법은 그의 사후에 사라졌다.[15]
아펠레스는 경쟁자에게 관대한 태도를 보였으며, 자신의 작품을 경쟁자의 작품으로 팔아 그림의 가치를 높여주기도 했다.[15] 또한 멜란티오스의 인물 배치, 아스클레피오도로스의 대칭과 비례 감각 등 다른 화가들의 장점을 인정했다.[15]
플리니우스는 아펠레스에 관한 여러 격언을 소개했는데, 그중에는 "그림에서 손을 뗄 때를 알았다"라는 말과 "구두 수선공은 구두 이상을 넘보지 마라"라는 말이 있다.[11] 또한 "하루도 선을 그리지 않고 보내지 않는다"라는 격언도 전해지지만, 이는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15]
아펠레스의 명성은 르네상스 시대까지 이어져, 라파엘로는 아테네 학당에서 자신을 아펠레스의 모습으로 묘사했고, 보티첼리는 비너스의 탄생과 아펠레스의 중상을 그의 작품을 바탕으로 제작했다.[15]
5. 아펠레스의 격언과 철학
아펠레스와 관련된 여러 격언과 그의 철학은 고대 문헌, 특히 플리니우스의 『박물지』에 기록되어 전해진다.
- "그림에서 손을 뗄 때를 알아야 한다": 이 격언은 프로토게네스에 대한 평가에서 비롯된 것으로, 너무 완벽을 추구하기보다는 적절한 시점에 작품을 마무리하는 것이 중요함을 의미한다.[15]
- "구두 수선공은 구두 이상을 넘보지 마라": 아펠레스가 자신의 그림에 대한 구두 수선공의 비판을 듣고 한 말로,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닌 것에 대해 함부로 비판하지 말라는 뜻을 담고 있다.[15] 이는 각자 전문 분야에 집중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 "하루도 선을 그리지 않고 보내지 않는다": 꾸준한 연습과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격언이다. 비록 플리니우스가 직접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후대에 아펠레스의 철학을 나타내는 말로 널리 알려졌다.[15]
- "나는 영원을 위해 그림을 그린다" : 이 격언은 플리니우스의 『박물지』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예술가의 사명감을 보여주는 문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아펠레스는 경쟁자에게 관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다른 화가의 작품으로 팔아 그 가치를 높여주기도 했다.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아펠레스는 멜란티오스의 배치와 아스클레피오도로스(Asclepiodorus)의 균형 감각(mensurae)을 존중하며, 다른 화가들이 자신보다 뛰어난 점이 있다고 인정하기도 했다.[15]
플리니우스는 아펠레스가 그림의 보존과 색조를 부드럽게 하는 검은 바니시를 개발하는 등, 그림에 유용한 여러 혁신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그 비법은 아펠레스만이 알고 있었고, 그가 죽으면서 함께 사라졌다고 한다.[15]
6. 후대에 미친 영향
아펠레스의 명성은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라파엘로는 ''아테네 학당''에서 자신을 아펠레스로 묘사했으며,[13] 산드로 보티첼리는 ''비너스의 탄생''과 ''아펠레스의 중상'' 두 그림을 아펠레스의 작품을 바탕으로 제작했다.[13] 특히 보티첼리의 '아펠레스의 중상'은 루키아누스(Lucian)의 ''에크프라시스(ekphrasis)''에 있는 그림과 동등하게 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으로 그려졌다.[8] 15세기 수학자 루카 파치올리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포함한 그의 작품을 칭찬하면서, 아펠레스조차도 이제 레오나르도에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예술가의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13]
참조
[1]
웹사이트
Natural History
https://www.perseus.[...]
Tufts University
2017-03-23
[2]
서적
Natural History
http://attalus.org/t[...]
[3]
문서
Alexander and Apelles
[4]
서적
Alexander
https://penelope.uch[...]
[5]
서적
Natural History
http://attalus.org/t[...]
[6]
에세이
On the Subject of Modern Painting
Les Soirées de Paris
1912-02
[7]
서적
A Companion to Greek Studies
1916
[8]
서적
Behind the Picture: art and evidence in the Italian Renaissance
1997
[9]
서적
Outlines of Pyrrhonism
Harvard University Press
1933
[10]
서적
Deipnosophistae
http://attalus.org/o[...]
[11]
논문
Ne supra crepidam sutor
2008
[12]
서적
The Christian Life
New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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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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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scribd.c[...]
[14]
웹사이트
Alexander Ceding Campaspe to Apelles
https://www.getty.ed[...]
Getty
2023-01-24
[15]
에세이
現代美術のテーマについて
レ・ソワレ・ド・パリ
1912-02
[16]
서적
食卓の賢人たち
http://members.aol.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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