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안명진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안명진은 1968년 북한에서 출생하여 북한 특수공작원 훈련을 받은 후 1993년 대한민국으로 망명한 인물이다. 그는 일본인 납치 사건 관련 증언을 통해 주목을 받았으며, 김정일이 납치를 지시했다는 증언으로 파문을 일으켰다. 2007년 마약 밀매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2016년 중국에서 사망했다는 정보가 발표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대한민국의 실종자 - 김형욱
    김형욱은 5·16 군사정변에 참여하여 박정희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장을 지내며 권력 핵심으로 활동했으나, 미국 망명 후 정권 비판 활동을 하다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되었고, 국가정보원 과거사 진실규명위원회는 그의 죽음을 중앙정보부의 살해로 결론지었다.
  • 대한민국의 실종자 - 방응모
    방응모는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 초기에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사장이 된 언론인이자 기업인, 정치인으로, 광산업과 장학 사업, 간척 사업을 추진하고 잡지 창간 등의 활동을 했으나, 친일 행위와 납북 행적으로 논란이 있다.
  • 북한이탈주민 - 강명도
    강명도는 평양 출신으로 북한 요직을 거쳐 1994년 탈북하여 대한민국으로 망명한 김일성 외척 출신의 북한 전문가로, 대학교수와 방송 활동, 저술 등을 통해 북한 사회의 실상과 내부 비밀을 알리고 있다.
  • 북한이탈주민 - 태영호
    태영호는 1962년 평양 출생으로 북한 외교관 출신이며, 2016년 영국 주재 북한 대사관 공사로 있다가 대한민국으로 망명하여 국회의원과 국민의힘 최고위원을 거쳐 현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처장으로 활동한다.
  • 20세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람 - 박헌영
    박헌영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 정치인으로,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하고 해방 후 조선공산당 재건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나, 한국 전쟁 이후 김일성 정권에 의해 처형되어 그의 생애와 활동은 논란과 재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다.
  • 20세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람 - 김여정
    김여정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김정일과 고용희 사이에서 태어나 김정은의 여동생이며, 조선로동당 핵심 실세로 부상하여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 등 주요 외교 행사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대외적으로 강경한 어조의 담화를 발표하며 대남·대미 압박을 주도하기도 한다.
안명진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안명진
출생 년도1968년
출생지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황해북도 평산군
국적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직업(정보 없음)
실종 날짜2016년 9월 30일 이전
실종 장소중화인민공화국
실종 상태실종

2. 생애

1993년, 조선로동당 작전부 소속으로 대한민국 잠입 임무 중 탈영하여 망명했다. 그는 비무장 지대 남쪽에서 대한민국 군인에게 투항했다.

1997년, 서울에서 김정일 정치군사대학 재학 시절(1988년 9월~1991년 초) 요코타 메구미를 목격했다고 증언하여 일본인 납치 문제가 공론화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이 증언은 1978년의 아베크 실종 사건 등이 북한의 소행임을 밝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1994년 AERA 인터뷰 내용과의 불일치, 납치 피해자 하스이케 가오루의 반박 등 증언의 신빙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2002년 이후 일본의 납북자 구출 단체 '구원회'(북한에 납치된 일본인을 구출하기 위한 전국협의회)의 지원을 받으며 일본에서 생활했고, 국가정보원의 지시 하에 반북 강연 등의 활동을 했다고 전해진다.

2007년 7월, 북한산 각성제 밀수 혐의(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로 체포되어[2] 1심에서 징역 4년 6개월을 선고받았으나,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감형되어 석방되었다. 이 사건 이후 대외 활동이 거의 없었다.

2016년 9월, 다쿠쇼쿠 대학 교수 아라키 가즈히로는 안명진이 중국에서 사망했다는 정보를 발표했다.[1]

2. 1. 북한 공작원 시절

1968년8월 26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황해북도 평산군에서 태어났다.[4] 8년제 외국어 학원을 다닌 후, 1987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직속 정치학교에 입학하여 6년간 북한 특수공작원으로서 혹독한 교육과 훈련을 받았다.[4]

1993년 5월, 작전부 소속 715연락소에 배속되어 대한민국으로 잠입하라는 명령을 받았다.[4] 같은 해 9월, 대한민국 잠입을 위한 특수부대의 일원으로 비무장지대를 통해 남파되던 중, 비무장지대 남쪽에서 한국군에게 투항하여 망명했다.[4][5][6][7]

안명진이 망명을 결심한 계기는 공작원 교육 중 읽게 된 김현희의 수기 '이제, 여자로서'(1991년) 때문이었다고 한다.[8] 이 책은 조선총련이 번역하여 평양으로 보내졌고, 공작원 양성 학교에도 비치되었다. 북한 당국은 제2의 김현희가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공작원들에게 이 수기를 읽고 비판적인 주석을 달게 했지만, 안명진은 책을 읽고 대한민국이 김현희를 사형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8] 그는 115명의 희생자를 낸 테러리스트도 사형당하지 않았는데, 아직 아무런 테러 행위도 하지 않은 자신이 탈북하여 대한민국으로 가도 절대 사형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8] 또한, 대남공작을 위한 '한국인화(현지화) 교육'을 받으면서 오히려 서울 거리에 대한 동경심을 갖게 된 것도 망명의 한 이유였다.[8]

2. 2. 대한민국 귀순

1993년 5월, 조선로동당 3호 청사작전부 소속 715연락소에 배속되어 대한민국 잠입 명령을 받았다.[4] 같은 해 9월, 대한민국 잠입 임무를 부여받은 특수부대원으로 비무장 지대에서 활동하던 중 탈영하여 비무장 지대 남쪽에서 한국군에게 투항, 망명하였다.[4][5][6][7]

안명진이 망명을 결심한 계기는 스파이 교육 중 읽게 된 김현희의 수기 '이제, 여자로서'(1991년)였다고 한다.[8] 이 책은 조선총련 번역으로 평양 공작원 양성 학교에도 비치되었는데, 안명진은 이를 통해 대한민국이 115명의 희생자를 낸 테러리스트 김현희조차 사형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8] 그는 아직 테러 행위를 저지르지 않은 자신이 탈북하여 한국에 가도 절대 사형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으며, 대남공작을 위한 '한국인화 교육' 과정에서 오히려 서울에 대한 동경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8]

망명 후 1997년 2월 3일, 안명진은 서울에서 일본인 저널리스트 다카세 히토시(일본전파뉴스사)에게 1988년 9월부터 1991년 초까지 김정일 정치군사대학에서 실종된 일본인 요코타 메구미를 보았다고 증언했다.[9] 이 증언은 1978년에 발생한 일련의 아베크 실종 사건(일본 내 커플 실종 사건)의 실종자들과 유럽 유학 중 실종된 일본인들이 실제로는 북한에 의해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같은 해 3월, 요코타 시게루와 사키에 부부는 한국을 방문하여 안명진을 만났다.[9] 안명진은 처음에는 납치 피해자 부모를 만난다는 사실에 부담을 느꼈으나, 면담 후 사키에의 위로에 감동하여 자신의 얼굴을 공개하고 납치 문제에 대해 증언하기로 결심했다.[9] 사키에는 헤어질 때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9]

> 메구미에 대한 이야기를 잘 해 주셨습니다. 저는 매일 메구미의 일을 기도하고 있습니다만, 이제부터는 안 씨의 가족분들을 위해서도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이 만남 직후인 1997년3월 25일, 일본에서는 '북조선에 의한 납치 피해자 가족 연락회'가 발족했다.[9]

1997년 7월 말부터 8월까지 안명진은 일본에 초청되어 강연회를 가졌다.[10] 그는 이 자리에서 납치 피해자들이 반항하지 않는 한 살해될 리 없으며,[11] 납치를 지시한 것은 북한 최고 지도자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라고 증언했다.[10] 이는 당시 한국 당국으로부터 '김정일의 이름은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충고를 받았음에도 이루어진 증언이었다.[10] 안명진 자신도 자서전에서 "북한으로부터 반쯤 공공연하게, 나에 대한 암살 명령이 내려졌지만, 겁먹을 생각은 전혀 없다"고 밝혔다.[12] 김정일이 납치를 지시했다는 사실은 이후 전 공작원 신평길 등 여러 증언과, 신광수가 김정일로부터 직접 '일본인을 납치하여 북으로 데려가 일본인으로 완전히 변신한 후, 대(對) 한국 공작 활동을 계속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자백하면서 확인되었다.[10][13] 안명진은 또한 납치 피해자 이치카와 슈이치를 공작원 양성 기관 교관으로 목격했으며, 그가 붉은 넥타이를 즐겨 착용했다는 사실을 증언했는데, 이는 이치카와 가족 외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어서 증언의 신빙성을 높이는 근거로 여겨졌다.[14]

그러나 안명진의 증언에는 몇 가지 의문점이 제기되기도 했다. 망명 4년 만에 갑자기 요코타 메구미 목격 증언을 한 이유, 제3자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직접 본 것처럼 말하는 것이 아닌지, 혹은 한국 당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 아닌지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특히 1994년10월 17일자 AERA와의 인터뷰에서는 납치 피해자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 2003년 한 주간지에서 요코타 부부와의 대담 중 '요코타 메구미는 김정일 패밀리에서 일본어 가정교사로 살고 있다'고 발언한 근거, 망명 후에 건설된 북한 군사 시설 구조를 아는 듯이 언급한 점 등이 지적되었다. 또한 납치 피해자 중 한 명인 하스이케 가오루는 안명진이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서 다른 10명의 일본인과 함께 자신을 보았다'고 증언한 데 대해 '북한에서 그를 만난 적이 없다'고 2005년7월 29일에 반박했다. (이에 대해 안명진은 처음부터 하스이케와 닮았다고 느꼈지만 젊은 시절 사진과 분위기가 달라 확신이 없어 '목격했다'고 말하지 않았고, 일본 경찰 조사에서는 비슷한 일본인 교관이 있었다고 증언했다고 밝혔다.[15])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김정일2002년 9월 북한을 방문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일본 총리에게 북한 공작원의 요코타 메구미 납치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16]

안명진은 2006년 6월, 후지 TV의 북남 이산가족 상봉 행사 프로그램에서 대한민국 정부(통일부) 직원으로 오인되어 '감시를 담당하는 북한 요원'으로 잘못 보도되는 해프닝을 겪기도 했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 외교부의 항의 후 후지 TV의 사과로 마무리되었다. 그는 2002년 일본에서 납치 문제가 부각된 이후 직장을 그만두고, '구출회'(북한에 납치된 일본인을 구출하기 위한 전국협의회)의 지원을 받으며 일본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그는 공익법인 직원 신분이었으나 실제 업무는 거의 없었고, 국가정보원의 지시 하에 북한 관련 활동(주로 반북 선전 강연)에 종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7년 7월 9일, 안명진은 중국 협력자로부터 입수한 북한산 각성제를 밀수한 혐의(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로 동거 여성과 함께 체포되었다([2]연합뉴스). 그는 혐의를 인정했고, 1심에서 징역 4년 6개월을 선고받았으나 항소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으로 감형되어 석방되었다. 이 사건 이후 그는 일본 언론에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2016년 9월 30일, 다쿠쇼쿠 대학 교수이자 특정실종자문제조사회 대표인 아라키 가즈히로는 안명진이 "이미 중국에서 사망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발표했다.[1]

2. 3. 일본인 납북자 증언

1997년 2월 3일, 안명진은 서울특별시에서 일본인 저널리스트 다카세 히토시에게 1988년 9월부터 1991년 초까지 김정일 정치군사대학에서 실종 상태였던 요코타 메구미를 보았다고 증언했다[9]。 이 증언은 1978년에 발생한 일련의 아베크 실종 사건 실종자들과 유럽 유학 중 행방불명된 일본인들이 실제로는 북한에 의해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다카세 히토시를 통해 안명진의 증언이 알려진 다음 달, 요코타 메구미의 부모인 요코타 시게루와 사키에 부부는 한국을 방문하여 안명진과 직접 만났다[9]。 요코타 부부는 안명진이 예의 바른 청년이며 그의 증언이 진실되다고 느꼈고, 그 역시 북한 체제의 희생자라고 생각했다[9]。 안명진은 처음에는 납치 가해 조직에 몸담았던 죄책감에 만남을 피하려 했으나, 면담 후 사키에 여사의 위로에 감동하여 납치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증언하기로 결심했다[9]。 이 만남 직후인 1997년 3월 25일, 일본에서는 '북조선에 의한 납치 피해자 가족 연락회'가 결성되었다[9]

1997년 7월 말부터 8월까지 안명진은 일본에 초청되어 여러 차례 강연회를 가졌다[10]。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납북자들이 살해될 가능성은 낮으며, 납치를 지시한 최고 책임자는 김정일이라고 증언했다[11][10]。 김정일을 직접 언급하는 것은 신변의 위협을 감수해야 하는 발언이었으나[10], 그는 북한의 암살 위협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12]。 김정일의 납치 지시 증언은 다른 탈북 공작원들의 증언과도 일치하며, 특히 공작원 신광수는 김정일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았다고 자백한 바 있다[10][13]

안명진은 또한 납북 피해자 이치카와 슈이치를 공작원 양성 기관의 교관으로 목격했으며, 그가 붉은 넥타이를 자주 착용했다는 구체적인 사실까지 증언했다[14]。 이 내용은 이치카와 가족 외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어서 안명진 증언의 신빙성을 높이는 근거로 여겨졌다[14]

그러나 안명진의 증언에는 몇 가지 의문점도 제기되었다.

  • 1994년10월 17일자 AERA와의 인터뷰에서는 납북 피해자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다가 왜 4년 뒤인 1997년에 갑자기 증언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다.
  • 2003년 한 주간지 인터뷰에서 "요코타 메구미는 김정일 패밀리에서 일본어 가정교사로 살고 있다"고 발언한 근거가 불분명하다는 지적이 있다.
  • 망명 후에 건설된 북한의 군사 시설 구조를 아는 것처럼 언급한 부분에 대한 근거도 의문시된다.
  • 다른 납북 피해자인 하스이케 가오루는 2005년 7월 29일, 안명진이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서 다른 10명의 일본인과 함께 자신(하스이케)을 보았다"고 증언한 데 대해 "북한에서 안명진을 만난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안명진은 하스이케와 닮았다고 느꼈지만 확신이 없어 처음에는 목격했다고 말하지 않았으나, 일본 경찰 조사에서는 비슷한 일본인 교관이 있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15]


이러한 의문점에도 불구하고, 2002년 9월 북일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일본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에게, 북한 공작원들이 요코타 메구미를 납치한 사실은 공식적으로 인정함으로써[16], 안명진 증언의 핵심 내용인 '북한의 일본인 납치' 자체는 사실로 확인되었다.

2. 4. 증언의 의혹

안명진의 요코타 메구미 목격 증언(1997년)은 일본인 납치 문제 해결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나, 이후 그의 증언과 행적에 대해 여러 의문이 제기되었다.

우선, 안명진이 망명한 지 3년이 지난 1994년 10월 17일자 AERA와의 인터뷰에서는 요코타 메구미 등 납치 피해자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다가, 1997년에 이르러서야 구체적인 목격 증언을 내놓은 점이 의문으로 지적된다. 또한 2003년에는 한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요코타 메구미는 김정일 가족의 일본어 가정교사로 살고 있다"고 발언했으나, 그 근거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망명 이후에 건설된 북한 군사 시설의 구조를 아는 것처럼 언급한 부분 역시 의혹을 샀다.

납치 피해자 중 한 명인 하스이케 가오루는 2005년 7월 29일, 안명진이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서 다른 10명의 일본인과 함께 자신(하스이케)을 보았다'고 증언한 데 대해 "북한에서 그를 만난 적이 없다"고 직접 반박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안명진은 하스이케 가오루와 닮았다고 느꼈지만 젊은 시절 사진과 분위기가 달라 확신할 수 없었고, 부모에게 자신 없는 증언을 하는 것이 죄송해 '목격했다'고 단정하지 않았으며, 당시 일본 경찰 조사에서는 그와 비슷한 일본인 교관이 있었다고 증언했다고 해명했다.[15]

반면, 안명진이 납치 피해자 이치카와 슈이치를 공작원 양성 기관 교관으로 목격했으며, 그가 붉은 넥타이를 자주 착용했다는 증언은 이치카와의 가족 외에는 알기 어려운 내용이어서 증언의 신빙성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여겨지기도 했다.[14]

2006년 6월에는 후지 TV가 북남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 참석한 안명진을 대한민국 통일부 직원으로 오인하여 "감시를 담당하는 북한 요원"으로 잘못 보도했다가, 대한민국 외교부의 항의를 받고 사과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안명진은 2002년 일본에서 납치 문제가 크게 불거진 이후 직장을 그만두고, '구원회'(북한에 의한 납치된 일본인 구출을 위한 전국협의회)의 지원을 받아 일본에서 생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국가정보원의 지시 하에 일본 각지에서 반북 선전 강연 등의 활동에 종사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2007년 7월 9일, 안명진은 중국 협력자로부터 입수한 북한산 각성제를 밀수한 혐의(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로 동거 여성과 함께 체포되었다.[2] 그는 혐의를 인정했고, 1심에서 징역 4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후 항소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으로 감형되어 석방되었으나, 이 사건 이후 일본 언론 등에서는 모습을 감추었다.

2016년 9월 30일, 다쿠쇼쿠 대학 교수이자 특정실종자문제조사회 대표인 아라키 가즈히로는 안명진이 "이미 중국에서 사망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발표했다.[1]

안명진 증언의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과 별개로, 김정일은 2002년 9월 방북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일본 총리에게 요코타 메구미를 포함한 일본인 납치 사실 자체는 인정한 바 있다.[16]

2. 5. 마약 밀매 및 체포

2007년 7월 9일, 중화인민공화국의 협력자로부터 입수한 북한산 메스암페타민대한민국 국내에서 밀매한 혐의(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로 동거하던 여성과 함께 체포되었다.[2] 안명진 본인은 혐의를 인정했다. 같은 해 8월 17일 열린 1심 재판에서는 징역 4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는데, 이는 검찰구형량인 징역 3년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재판부는 판결 이유로 "밀수한 양이 많고, 빈번하게 사용했으며, 다른 피고에게도 강요했다"는 점을 들었다. 그러나 10월 19일 열린 항소심에서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으로 감형되어 당일 석방되었다. 이 사건 이후 안명진은 일본미디어에 등장하지 않았다.

2. 6. 사망

2007년 7월 9일, 안명진은 중국의 협력자로부터 입수한 북한산 각성제를 밀수한 혐의(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로 동거하던 여성과 함께 체포되었다.[2] 그는 혐의를 인정했으며, 1심에서 징역 4년 6개월을 선고받았으나, 항소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으로 감형되어 석방되었다. 이 사건 이후 그는 일본 언론 등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2016년 9월 30일, 다쿠쇼쿠 대학 교수이자 특정 실종자 조사 위원회 대표인 아라키 가즈히로는 안명진이 "이미 중국에서 사망했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발표했다.[1]

3. 기타


  • 일본어를 매우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다.
  • 1999년 한국의 스파이 액션 영화로 일본에서도 화제가 된 『쉬리』의 연기 지도를 맡았다[17]. 영화 『쉬리』에는 안명진이 공작원 양성 학교 입학 당시 경험했던, 과거 사진을 모두 처분하는 일화가 묘사되어 있다[17].

4. 저서


  • ''북한 납치 공작원'' (2000년 3월, 도쿠마 쇼텐, 도쿠마 문고, ISBN 4-19-891285-8)
  • ''신 증언・납치 요코타 메구미를 구출하라!'' (2005년 4월, 코사이도 출판, ISBN 4-331-51088-3)

참조

[1] 웹사이트 安明進氏のこと【調査会NEWS2305】(28.9.30) http://araki.way-nif[...]
[2] 뉴스 The former North Korean spy claimed that more than 30 Japanese were kidnapped by the North The Chosun Ilbo (Chinese Edition) 2005-07-28
[3] 문서 안명진 (2005) pp.115-160
[4] 문서 안명진 (2000)
[5] 뉴스 귀순한 북한 대남공작 안내원 안명진씨의 기자회견 KBS 뉴스 1993-09-10
[6] 뉴스 국방부, 북한 대남공작 요원 안명진씨 귀순 https://imnews.imbc.[...] MBC 뉴스데스크 1993-09-10
[7] 뉴스 북한 노동당산하 납치 위한 특수부대 운영 KBS 뉴스9 1994-08-02
[8] 문서 서오카 (2002) pp.38-41
[9] 문서 『家族』(2003) pp.25-28
[10] 문서 서오카 (2002) pp.69-75
[11] 문서 『家族』(2003) pp.36-37
[12] 문서 안명진 (2005) p.40
[13] 문서 서오카 (1997) pp.10-12
[14] 문서 서오카 (2002) pp.42-47
[15] 웹사이트 04_「拉致被害者は13人しかいない」に対する反論-4 http://www.sukuukai.[...]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을 구출하기 위한 전국협의회 2021-10-29
[16] 문서 서오카 (2002) pp.14-21
[17] 문서 『横田めぐみは生きている』(2003) pp.108-110
[18] 웹인용 安明進氏のこと【調査会NEWS2305】(28.9.30) http://araki.way-nif[...]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