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브레히트 리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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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브레히트 리츨은 19세기 독일의 신학자이다. 그는 베를린에서 태어나 본, 할레, 하이델베르크, 튀빙겐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튀빙겐 학파의 영향을 받아 루카 복음서가 마르키온의 복음서에 기초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리츨은 본 대학교와 괴팅겐 대학교에서 신학 교수를 역임했고, 칸트와 슐라이어마허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 칭의와 속죄 교리에 관한 저술을 남겼다. 그는 프로테스탄트 정통주의와 헤겔의 사변 철학을 비판하고, 루터 신학을 진흥하며 성서와 그리스도의 계시성을 회복하려 했다. 리츨은 예수 그리스도를 윤리의 교사로 보고, 칭의와 화해를 인간 측의 주관적인 가치 판단의 문제로 여겼다. 그의 신학은 19세기 부르주아 계급에게 사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종교적 이론을 제공했으며, 그의 학파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독일 신학부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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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브레히트 리츨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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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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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알브레히트 리츨 |
출생일 | 1822년 3월 25일 |
출생지 | 프로이센 베를린 |
사망일 | 1889년 3월 20일 |
사망지 | 독일 제국 괴팅겐 |
국적 | 독일 |
배우자 | 이다 레벡 (1859년 결혼, 1869년 사별) |
종교 | 기독교 |
종파 | 개신교, 루터교 |
학력 및 경력 | |
모교 | 할레 대학교 |
직업 | 신학자, 대학교수 (본 대학교, 괴팅겐 대학교) |
사상적 영향 | 페르디난트 크리스티안 바우어 임마누엘 칸트 헤르만 로체 마르틴 루터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
영향을 준 인물 | 세일럼 블랜드 아돌프 폰 하르나크 빌헬름 헤르만 율리우스 카프탄 |
소속 학파 | 튀빙겐 학파 |
업적 | |
주요 관심사 | 조직신학 |
주요 아이디어 | 자유주의 신학 |
2. 생애
알브레히트 리츨은 베를린에서 태어나 본 대학교, 할레 대학교,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튀빙겐 대학교 등 여러 대학에서 공부했다. 초기에는 바우어의 영향을 받아 튀빙겐 학파를 따랐으나, 이후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발전시켰다. 본 대학교와 괴팅겐 대학교에서 신학 교수로 재직하며, 임마누엘 칸트,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헤르만 로체 등에게 영향을 받았다. 1870년부터 1874년까지 주저 ''기독교의 칭의와 속죄 교리''를, 1882년부터 1886년까지 ''경건주의의 역사''를 출판했다. 1889년 괴팅겐에서 사망했으며, 아들 오토 리츨도 신학자가 되었다.[3][4]
그는 원시 기독교 공동체와 역사적 예수를 이해하기 위해 역사 비평학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 리츨의 제자는 많지 않았지만, 그의 저작에 영향을 받은 리츨 학파가 형성되었으며, 아돌프 폰 하르낙, 빌헬름 헤르만, 율리우스 카프탄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알브레히트 리츨은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게오르크 카를 벤야민 리츨은 1810년 베를린 성 마리아 교회의 목사가 되었고, 1827년부터 1854년까지 포메라니아의 총감독이자 복음주의 감독이었다. 알브레히트 리츨은 본 대학교, 할레 대학교,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및 튀빙겐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할레에서는 율리우스 샬러와 요한 에두아르트 에르트만의 가르침을 통해 헤겔의 영향을 받았다. 1845년 그는 튀빙겐 학파의 추종자가 되었고, 1846년에 출판된 그의 저서 ''마르키온의 복음서와 루카 복음서''에서 루카 복음서가 외경인 마르키온의 복음서에 기초했다고 주장하며, 헤겔주의 신약학자인 페르디난트 바우어의 제자처럼 보였다.[3] 그러나 이는 오래가지 못했는데, 구 가톨릭 교회의 기원에 관한 그의 가장 중요한 저서 ''Die Entstehung der alt-kathol. Kirche''의 두 번째 판(1857)은 첫 번째 판(1850)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며, 바우어의 방법론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음을 보여준다.2. 2. 학문적 활동과 교수 생활
알브레히트 리츨은 본 대학교, 할레 대학교,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튀빙겐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할레에서는 율리우스 샬러와 요한 에두아르트 에르트만의 가르침을 통해 헤겔의 영향을 받았다. 1845년 튀빙겐 학파의 추종자가 되었고, 1846년 ''마르키온의 복음서와 루카 복음서''를 출판하여 루카 복음서가 외경인 마르키온의 복음서에 기초했다고 주장했다.[3] 그러나 1857년 구 가톨릭 교회의 기원에 관한 책(''Die Entstehung der alt-kathol. Kirche'') 제2판에서 바우어의 방법론에서 완전히 벗어났음을 보여주었다.[3]thumb
본 대학교(1852년 강사, 1859년 정교수)와 괴팅겐 대학교(1864년, 1874년 'Consistorialrath')에서 신학 교수를 역임했다. 괴팅겐 대학교에서 행한 종교 강연은 임마누엘 칸트와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에 대한 열정적인 연구의 영향을 보여준다. 1864년 헤르만 로체의 영향을 받았다. 1870년부터 1874년까지 기독교의 칭의와 속죄 교리에 관한 방대한 저서 ''Die Christliche Lehre von der Rechtfertigung und Versöhnung''을 출판했으며, 1882년부터 1886년까지 ''경건주의의 역사''(Die Geschichte des Pietismus)를 출판했다.[4]
교회사학자 페르디난트 크리스티안 바우어에게서 사변적인 역사학을 배우고 바우어 학파에 속하는 학자로서 출발했다. 1857년 『고대 가톨릭 교회의 기원』 제2판을 간행하면서 바우어 학파에서 벗어나[3], 칸트와 슐라이어마허의 영향을 받았다.[4]
1846년 본 대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여, 1864년 괴팅겐 대학교 교수가 되었고, 1889년 사망할 때까지 25년간 그 지위에 있었다.
1870년부터 1874년까지 『의인과 화해에 관한 기독교 교리』를 출판하여 리츨 신학의 주저가 되었다. 리츨의 개인적인 제자는 소수였지만, 그의 저서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리츨 학파를 형성했다. 아돌프 폰 하르낙, 빌헬름 헤르만, 율리우스 카프탄(Julius Kaftan)이 리츨 학파의 후계자이다.
3. 신학 사상
알브레히트 리츨은 루터와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적 전통을 이어받아, 스콜라 철학의 영향에서 벗어나 신앙을 해방시키고자 했다.[2] 그의 신학 사상은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과 슐라이어마허의 종교 철학, 그리고 루돌프 헤르만 로체의 인식론에 큰 영향을 받았다.[2] 리츨의 저작은 당시 독일 신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지만, 동시에 격렬한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학파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독일 신학계를 주도하는 세력으로 성장했다.[2]
리츨은 영적 경험의 현실성과 신앙의 정당성을 강조하며,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통해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개인의 주관적 경험보다는 기독교 공동체의 종교적 경험을 객관적 근거로 삼아, "신학 지식의 직접적인 대상은 공동체의 신앙"이라고 보았다.[2]
그는 스콜라 철학과 개신교 신학 내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헤겔주의와 같은 사변 철학을 비판하며, 이러한 철학들이 종교적 삶의 깊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리츨은 하나님을 "자존하는 존재"로 파악하는 대신, 그의 왕국과의 능동적인 관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2]
리츨은 신학 지식을 인간의 필요 범위로 제한함으로써 현상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그의 인식론은 이러한 약점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었다.[2] 그는 "형이상학"을 배제하고, 성자의 영원한 탄생과 같은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의 상당 부분을 자신의 방법론에서 벗어난 것으로 간주했다.[2]
리츨은 "가치 판단"(''Werthurtheile'') 이론을 통해 종교적 가치 판단이 인간의 도덕적, 영적 복지와 관련하여 대상을 결정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가치 판단은 "이론적" 판단과는 구별되며, 인간의 근본적인 필요에 대한 감각을 반영한다고 보았다.[2]
리츨의 조직신학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그의 사랑의 목적은 "하나님의 왕국"에서 인류의 도덕적 조직이라고 보는 관점을 제시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이자 참된 종교의 모범으로, 그의 왕국 건설은 개인적인 소명이었으며, 그 정신을 신자들에게 전달한다. 죄와 구원 교리에서 지배적인 생각은 가족을 위한 하나님의 아버지적 목적이며, 죄는 그 목적에 대한 모순으로, 죄책감은 가족으로부터의 소외를 의미한다. 구속, 칭의, 중생, 양자, 용서, 화해는 모두 깨어진 가족 관계의 회복을 의미한다.
리츨은 정통주의 신학의 전통주의와 헤겔의 사변 철학을 거부하고, 마르틴 루터의 신학을 발전시켜 성서와 그리스도의 계시성을 회복하고자 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대한 윤리 교사로 보았고, 칭의는 인간의 주관적 가치 판단의 문제로 여겼다. 따라서 인간의 죄, 십자가, 하나님의 심판보다는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과 윤리 교사로서의 그리스도가 강조되었다. 교회는 속죄와 관련되기보다는 선행에 힘쓰는 공동체로 여겨졌다. 이러한 리츨의 신학은 19세기 유럽 부르주아 계급에게 사회 체제 유지를 위한 종교적 이론을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8]
3. 1. 칸트와 슐라이어마허의 영향
알브레히트 리츨은 루터와 슐라이어마허의 영향을 받아 스콜라 철학에서 벗어나 신앙을 해방시키려 했다.[2] 그는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 도덕적으로 조건 지어진 지식의 가치, 목적의 왕국에 대한 교리의 영향을 받았다.[2] 또한 슐라이어마허의 기독교에 대한 역사적 접근, 종교적 친교 개념, 종교적 감정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루돌프 헤르만 로체의 지식 이론과 인격에 대한 접근 방식의 영향도 받았다.[2] 그는 칸트의 인식론이 루터교와 양립할 수 있음을 증명하려 했다.[2]리츨은 칸트에게서는 "실천적 확실성의 기초로서 도덕 감정을 긍정하고, 절대적인 것에 대한 지적 인식을 부정했다는 점"[4]에서, 슐라이어마허에게서는 "신앙의 기초로서 누구나 가지고 있는 종교 의식을 주장한 것"[4]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슐라이어마허의 종교 의식은 "너무나 개인주의적"이라고 생각했고, "그리스도인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의식"[4]이 "진정으로 규범이 되어야 할 의식"[4]이라고 생각했다.
리츨은 형이상학이 기독교 신앙을 밝히는 데 쓸모없다고 보았지만, 철학자 로체의 인식론을 크게 이용했다.[5] 로체와 칸트는 "사물[6] 그 자체는 알려질 수 없다"[5]고 했지만, 로체는 "사물[6]이 그것들의 속성과 활동을 통해 실제로 알려지는 것이다"라고 단언했다.[5] 리츨은 "그와 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7]
3. 2. 역사적 예수와 기독교 공동체
알브레히트 리츨은 루터와 슐라이어마허의 영향을 받아 스콜라 철학에서 벗어나 신앙을 해방시키려 했다.[2] 그는 칸트의 인식론이 루터교와 양립 가능함을 증명하려 했으며,[2] 그의 사상은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 슐라이어마허의 역사적 접근, 로체의 지식 이론 등에 영향을 받았다. 리츨의 저작은 독일 신학에 새로운 자신감을 불어넣었지만, 동시에 비판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츨 학파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독일 신학부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했다.[2]리츨은 영적 경험이 현실이며, 신앙이 정당할 뿐만 아니라 세상에 대한 최고의 해석을 제공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삶이 다른 모든 것을 설명하는 사실이라고 보았다. 리츨은 개인 주체의 입장이 아니라 기독교 공동체의 종교적 경험을 객관적인 근거로 삼았다. 그는 "신학 지식의 직접적인 대상은 공동체의 신앙"이며, 이를 통해 "세계와 인간의 삶에 대한 전체적인 관점"을 구성한다고 보았다.[2]
리츨은 스콜라 및 개신교 신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사변적 철학의 사용을 비판했다. 그는 헤겔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종교적 삶의 깊이를 탐구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리츨은 "신앙"이 하나님을 그의 왕국과의 능동적인 관계 속에서 알지만, "자존하는 존재"로는 알지 못한다고 보았다.[2]
리츨은 신학 지식을 인간의 필요 범위로 제한했는데, 이는 현상주의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의 인식론("우리는 사물을 그들의 활동으로만 안다")은 이러한 약점을 다루지 못했다. 그는 모든 "형이상학"을 배제하고, 성자의 영원한 탄생과 같은 기독교 신앙의 많은 부분을 그의 방법론 범위 밖으로 간주했다. 리츨의 "가치 판단" 이론은 종교적 가치 판단이 인간의 도덕적, 영적 복지에 대한 관련성에 따라 대상을 결정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지식은 "이론적"이고 "무관심한" 판단과는 다르다고 주장했다.[2]
리츨은 칸트와 슐라이어마허에게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4] 칸트에게는 "실천적 확실성의 기초로서 도덕 감정을 긍정하고, 절대적인 것에 대한 지적 인식을 부정했다는 점"[4]에서, 슐라이어마허에게는 "신앙의 기초로서 누구나 가지고 있는 종교 의식을 주장한 것"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4] 그러나 슐라이어마허의 종교 의식은 "너무나 개인주의적"이라고 생각했고, "그리스도인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의식"[4]이 "진정으로 규범이 되어야 할 의식"[4]이라고 생각했다. 리츨은 형이상학은 기독교 신앙을 밝히는 데 쓸모없다고 보았지만, 철학자 루돌프 헤르만 로체의 인식론을 이용했다.[5]
리츨은 정통주의 신학의 전통주의와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의 사변 철학을 폐하고, 마르틴 루터 신학의 진흥과 성서와 그리스도의 계시성 회복을 꾀했다.
리츨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위대한 윤리 교사이며, 칭의는 인간 측의 주관적·가치 판단의 문제로 여겨졌다. 인간의 죄, 십자가, 하나님의 심판은 의미가 없고,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과 윤리 교사로서의 그리스도가 강조되었다. 교회는 속죄와 관련하여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선량한 국민이 선행에 힘쓰는 공동체로 여겨졌다. 리츨의 신학은 19세기의 유럽 부르주아 계급에게 당시의 사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종교적 이론을 제공했다.[8]
3. 3. '하나님의 나라'와 윤리적 실천
알브레히트 리츨은 루터와 슐라이어마허의 영향을 받아, 스콜라 철학에서 벗어나 신앙을 해방시키려 했다. 그의 사상은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과 목적의 왕국 교리, 슐라이어마허의 기독교에 대한 역사적 접근, 로체의 지식 이론 등에 영향을 받았다.[2]리츨은 하나님의 사랑의 목적이 "하나님의 왕국"에서 인류의 도덕적 조직이라고 보았다. 이 개념은 그의 초기 저작에도 적용된다. 그는 스콜라 철학과 개신교 신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사변 철학의 사용을 비판하며, 이러한 철학이 신학에 너무 피상적이라고 주장했다. 헤겔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 모두 종교적 삶의 깊이를 탐구하기에 부족하며, 하나님을 "인간의 신뢰와 상호 관계하는 존재"로 보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리츨은 "신앙"은 하나님을 그의 왕국과의 능동적인 관계 속에서 알지만, "자존하는 존재"로는 알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가치 판단" 이론은 종교적 가치 판단이 인간의 도덕적, 영적 복지에 대한 관련성에 따라 대상을 결정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지식은 "이론적" 판단과는 다르며, "가치"의 세계에서 움직이며, 인간의 근본적인 필요에 대한 감각을 암시한다.
리츨의 긍정적 조직신학에서 하나님은 아버지로 여겨지며, 계시를 통해 공동체에 주어진다. 그분은 영적인 목적성을 통해 드러나는 영적인 인격체로서 "왕국"과의 적극적인 관계에서 간주되어야 한다. 그분의 "사랑"은 왕국 안에서 그분의 목적을 실현하려는 의지이며, "의"는 이 목적에 대한 충실함이다. 자연신학은 믿음에 의존할 때만 가치를 갖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공동체의 종교적 삶에 창시자이자 구속자로서 독특한 가치를 지닌다. 그분은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이며 참된 종교의 모범이다. 그분의 왕국 건설은 개인적인 소명이었으며, 그 정신을 신자들에게 전달한다. 그분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신성"은 예수님이 그분의 창립과 구속 활동에 대해 믿음으로 적용하는 술어이다.
죄와 구원 교리에서 지배적인 생각은 그분의 가족을 위한 하나님의 아버지적 목적이다. 죄는 그 목적에 대한 모순이며, 죄책감은 가족으로부터의 소외이다. 구속, 칭의, 중생, 양자, 용서, 화해는 모두 깨어진 가족 관계의 회복을 의미한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중재에 달려 있다.
리츨은 칸트와 슐라이어마허에게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4] 칸트에게는 "실천적 확실성의 기초로서 도덕 감정을 긍정하고, 절대적인 것에 대한 지적 인식을 부정했다는 점"[4]에서, 슐라이어마허에게는 "신앙의 기초로서 누구나 가지고 있는 종교 의식을 주장한 것"[4]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슐라이어마허의 종교 의식은 "너무나 개인주의적"이라고 생각했고, "그리스도인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의식"[4]이 규범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리츨은 형이상학은 기독교 신앙을 밝히는 데 쓸모없다고 보았지만, 철학자 루돌프 헤르만 로체의 인식론을 이용했다.[5]
정통주의 신학의 전통주의와 헤겔의 사변 철학을 폐하고, 마르틴 루터 신학의 진흥과 성서와 그리스도의 계시성 회복을 꾀했다.
리츨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위대한 윤리의 교사이며, 칭의는 인간 측의 주관적·가치 판단의 문제로 여겨졌다. 인간의 죄나 십자가나 하나님의 심판은 의미가 없고,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과 윤리의 교사로서의 그리스도가 강조되었다. 교회는 속죄가 아니라, 선량한 국민이 선행에 힘쓰는 공동체로 여겨졌다. 리츨의 신학은 19세기의 유럽의 부르주아 계급에게 당시의 사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종교적 이론을 제공했다.[8]
3. 4. 형이상학 비판과 가치 판단
리츨은 루터와 슐라이어마허의 영향을 받아 스콜라 철학에서 신앙을 해방시키려 했다.[2] 그는 칸트의 인식론이 루터교와 양립 가능함을 증명하려 했으며,[2] 그의 저작은 독일 신학에 새로운 자신감을 불어넣었다.[2]리츨은 개신교 신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사변 철학의 사용을 비판했다.[2] 그는 헤겔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 모두 종교적 삶의 깊이를 탐구하기에는 "활력"이 부족하다고 주장했다.[2]
그는 신학 지식을 인간의 필요 범위로 제한했는데, 이는 현상주의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2] 그의 인식론("우리는 사물을 그들의 활동으로만 안다")은 이러한 약점을 다루지 못한다.[2] 그는 모든 "형이상학"을 배제하고, 성자의 영원한 탄생과 같은 기독교 신앙의 많은 부분을 그의 방법론 범위 밖으로 간주했다.[2]
리츨의 "가치 판단" 이론(''Werthurtheile'')은 종교적 가치 판단이 인간의 도덕적, 영적 복지에 대한 관련성에 따라 대상을 결정한다고 보았다.[2] 이러한 가치판단은 인간의 근본적인 필요에 대한 생생한 감각을 암시하며, "이론적"이고 "무관심한" 판단과는 다르다고 하였다. [2]
리츨은 칸트와 슐라이어마허에게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4] 칸트에게는 "실천적 확실성의 기초로서 도덕 감정을 긍정하고, 절대적인 것에 대한 지적 인식을 부정했다는 점"[4]에서, 슐라이어마허에게는 "신앙의 기초로서 누구나 가지고 있는 종교 의식을 주장한 것"[4]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슐라이어마허의 종교 의식은 "너무나 개인주의적"이라고 생각했고, "그리스도인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의식"[4]이 "진정으로 규범이 되어야 할 의식"[4]이라고 생각했다. 리츨은 형이상학은 기독교 신앙을 밝히는 데 쓸모없다고 보았지만, 루돌프 헤르만 로체의 인식론을 크게 이용했다.[5] 로체와 칸트의 주장에 따르면 "사물[6] 그 자체는 알려질 수 없다"[5]고 하지만, 로체는 "사물[6]이 그것들의 속성과 활동을 통해 실제로 알려지는 것이다"라고 단언했다.[5] 리츨은 "그와 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7]
4. 저작물
- The Christian Doctrine of Justification and Reconciliation영어. 에든버러: T & T Clark, 1900. : 그는 루터교와 칼뱅주의간의 차이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인성이 율법에 대한 관계에 대한 이해가 다름을 조사하였다. 칼뱅주의가 루터교의 '속성간의 교류' 교리를 인정하지 않는 차이를 지적하였다.[10]
- Die christliche Lehre von der Rechtfertigung und Versöhnungde. 본: Marcus, 1882.
- Geschichte des Pietismus in der reformierten Kirchede. ''경건주의 역사'' 제1권. 본: Marcus, 1880.
- Geschichte des Pietismus in der lutherischen Kirche des 17. u. 18. Jahrhundertsde. ''경건주의 역사'' 제2권 및 제3권. 본: Marcus, 1884 /1886.
- Die Entstehung der altkatholischen Kirche: eine kirchen- und dogmengeschichtliche Monographiede. 2nd ed. 본: Marcus, 1857.
- Gesammelte Aufsätzede. 프라이부르크: Mohr, 1896.
- [https://archive.org/details/christiandoctri00ritsgoog 정당화와 화해에 관한 기독교 교리]. 에든버러: T & T 클라크, 1900.
- [https://archive.org/details/diechristlichel00ritsgoog 정당화와 화해에 관한 기독교 교리]. 본: 마르쿠스, 1882.
- [https://archive.org/details/geschichtedespi00ritsgoog 개혁 교회 내 경건주의 역사]. ''경건주의 역사'' 제1권. 본: 마르쿠스, 1880.
- 17, 18세기 루터교 교회 내 경건주의 역사. ''경건주의 역사'' [https://archive.org/details/geschichtedespi06ritsgoog 제2권] 및 [https://archive.org/details/geschichtedespi04ritsgoog 제3권]. 본: 마르쿠스, 1884 /1886.
- [https://archive.org/details/dieentstehungde04ritsgoog 구 카톨릭 교회의 기원: 교회 및 교리사적 모노그래프]. 제2판. 본: 마르쿠스, 1857.
- [https://archive.org/details/a606525300ritsuoft 수집된 논문集]. 프라이부르크: 모어, 1896.
- 『구 가톨릭의 성립』
- 『의인과 화해』
-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인의 삶: 기독교 입문』, 심지윤·김정일 역, 춘추사, 2017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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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re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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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worldc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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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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