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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우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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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른스트 우데트는 독일 제국의 군인이자 1차 세계 대전의 에이스 파일럿으로, 62기의 격추 기록을 세웠다. 그는 1896년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태어나 뮌헨에서 성장했으며, 어린 시절부터 항공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1차 세계 대전 참전 후, "리히트호펜 서커스"에 합류하여 활약했으며, 종전 후에는 항공기 제작, 곡예 비행, 영화 출연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나치 정권 하에서 군에 복무했으나, 1941년 11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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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우데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에른스트 우데트
별명해당 없음
출생일1896년 4월 26일
사망일1941년 11월 17일
출생지독일 제국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사망지나치 독일 베를린
안장지베를린 Invalidenfriedhof
소속
정치 체제독일 제국(1914년–1918년)
바이마르 공화국(1918년–1919년)
나치 독일(1934년–1941년)
군 복무1914년–1919년, 1934년–1941년
병과18px 항공대 (1915년–1919년)
20px독일 공군 (1934년–1941년)
군사 경력
최종 계급[[File:DR-Oberleutnant 1918.png|60px]] 중위 (1918년)
[[File:Luftwaffe epaulette Generaloberst.svg|50px]] 상급대장 (1940년)
참전 전투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지휘제37 전투비행대, 제4 전투비행대
부대제68 비행대
제206 (A) 비행대
KEK Habsheim
제4 전투비행대
제11 전투비행대
제15 전투비행대
제37 전투비행대
훈장
훈장 내역철십자 훈장 1급 및 2급
철십자 훈장 약장 1급 및 2급
호엔촐레른 왕가 기사 십자 훈장 (검 포함)
한자 십자 훈장 함부르크 및 뤼베크 버전
1914/1918 세계 대전 명예 십자 훈장
국방군 장기 복무상 4급 및 3급
푸르 르 메리트
독일 제국 조종사 배지
금강석 박힌 금 조종사/관측병 배지
기사 철십자 훈장

2. 생애

1896년 4월 26일 독일 제국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태어난 에른스트 우데트는 뮌헨에서 성장하며 어린 시절부터 항공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17][18] 1909년에는 모형 비행기 클럽을 결성하고 글라이더를 직접 만들기도 했으며,[4][21] 1913년에는 테스트 파일럿과 함께 비행하는 경험을 했다.[4]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군에 지원했으나 작은 키로 거절당했다가, 오토바이를 소유한 덕분에 제26. ''뷔르템베르크'' 예비 사단에 운전병으로 채용되었다.[18][22][23][24] 이후 아버지의 지원으로 비행 훈련을 받고 1915년 4월 조종사 면허를 취득, 독일 제국 항공대에 합격하여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23][25]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우데트는 뛰어난 전투기 조종사로 활약했다. 1916년 3월 18일 첫 적기를 격추하고,[24] 1917년에는 프랑스군 에이스 조르주 기네메르와 공중전을 벌이기도 했다.[27]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의 인정을 받아 '리히트호펜 서커스' 제1 전투기 대대에 합류했으며,[29][28] 1918년 3월부터 제11 전투기 중대 중대장을 맡았다.[30] 리히트호펜 사후에는 헤르만 괴링과 함께 '리히트호펜 서커스'를 이끌었다. 총 62기를 격추하여 독일군 내에서 두 번째로 높은 기록을 세웠으며, 전쟁에서 살아남은 조종사 중에서는 가장 높은 격추 수를 기록했다.[33]

우데트가 그의 포커 DVII 옆에 서있는 모습, 별명 "Lo"


전쟁 후, 우데트는 로베르트 폰 그라임과 함께 항공기 쇼를 개최하고,[35] 1921년 "우데트 항공기 제작소"를 설립하여 스포츠기를 제조했다.[36][37] 그러나 사업은 실패했고,[38] 이후 곡예 비행 조종사로 복귀하여 큰돈을 벌었지만, 술과 여자에 낭비하여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39]

에른스트 우데트의 착색된 초상화


베를린에서 레니 리펜슈탈을 만나 영화계에 입문, 《죽음의 은령(de)》(1929년), 《몽블랑의 폭풍(de)》, 《SOS 빙산(de)》 등에 출연하며 배우로도 활동했다.[43][45]

1933년 헤르만 괴링의 권유로 나치당에 입당한 우데트는 독일 공군에 급강하 폭격기를 도입하는 데 기여했다.[12] 1936년에는 제국 항공부 기술 사무소(''T-Amt'')의 수장이 되었지만, 이 직책에 적응하지 못하고 알코올 중독에 빠졌다.[16]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항공기 생산 요구 급증과 원자재 공급 제한으로 우데트의 어려움은 커졌다. 괴링은 아돌프 히틀러에게 거짓 보고를 하고, 영국 본토 항공전 패배 책임을 우데트에게 돌리려 했다.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되면서 우데트는 절망에 빠졌고, 괴링에게 진실을 보고하지 않았다.[15]

1941년 11월 17일, 우데트는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머리에 총을 쏴 자살했다. 그의 죽음은 대중에게 숨겨졌고, 장례식에서 그는 새로운 무기를 시험하던 중 사망한 영웅으로 칭송받았다.[69] 우데트는 베를린의 인벨리데 frihof 묘지에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 옆에 묻혔다.

1941년 11월 21일, 베를린 항공성에서 열린 우데트의 국장

2. 1. 초기 생애 (1896년 ~ 1915년)

에른스트 우데트는 1896년 4월 26일 독일 제국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공장을 경영하는 엔지니어 아돌프 우데트의 아들로 태어났다.[17][18] 뮌헨에서 성장했으며, 어린 시절부터 밝은 성격과 항공에 대한 관심으로 유명했다. 어린 시절에 근처의 비행기 공장과 육군 비행선 부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1909년에는 친구들과 함께 "뮌헨 에어로 클럽"이라는 모형 비행기 클럽을 결성하여 글라이더를 직접 만들기도 했지만, 제대로 날지 못했다.[4][21] 1913년에는 그가 자주 방문했던 구스타프 오토가 소유한 인근 오토 공장에서 테스트 파일럿과 함께 비행했다.[4]

우데트는 뮌헨의 학교에서 소문난 문제아였고, 학교 성적은 매우 나빴다고 한다.[19]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비행기에 관심이 있었고, 세계 최초로 시험 비행에 성공한 라이트 형제를 동경했다.[20]

2. 2.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1914년 ~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직후, 우데트는 군에 지원했지만, 작은 키 때문에 처음에는 거절당했다. 그러나 오토바이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1914년 8월, 제26. ''뷔르템베르크'' 예비 사단에 운전병으로 채용되었다.[18][22][23][24]

이후 파일럿의 꿈을 이루기 위해 아버지의 지원으로 민간 비행 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1915년 4월 조종사 면허를 취득,[23][25] 독일 제국 항공대에 합격하여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1915년 6월, 제9항공대에 재입대했고, 11월에는 제68야전항공대 전투기 조종사로 배속되었다.[24] 1916년 3월 18일, 첫 적기를 격추했다.[24]

1917년, 제15전투기 중대에 소속되어 프랑스군 에이스 조르주 기네메르와 공중전을 벌였다.[27] 기관총 고장으로 승부를 내지 못했지만, 이 사건은 우데트의 용맹함을 보여주는 일화로 남아있다.[26][28]

이후 독일군 최고 에이스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의 인정을 받아 '리히트호펜 서커스' 제1 전투기 대대에 합류,[29][28] 1918년 3월부터 제11 전투기 중대 중대장을 맡았다.[30]

리히트호펜 사후, 우데트는 헤르만 괴링과 함께 '리히트호펜 서커스'를 이끌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총 62기를 격추하여 독일군 내에서 두 번째로 높은 기록을 세웠으며, 전쟁에서 살아남은 조종사 중에서는 가장 높은 격추 수를 기록했다.[33]

2. 2. 1. 입대 및 초기 활동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직후인 1914년 8월 2일, 우데트는 독일 제국 육군에 입대하려 했지만, 키가 160cm에 불과해 당시에는 입대 자격이 되지 못했다.[4] 그 달 말, ''전독일 자동차 클럽(Allgemeiner Deutscher Automobil-Club)''이 오토바이를 가진 지원자를 모집하자, 우데트는 지원하여 합격했다. 우데트의 아버지는 그가 첫 해 시험에 합격했을 때 오토바이를 사주었고, 우데트는 친구 4명과 함께 제26. ''뷔르템베르크'' 예비 사단에 "메신저 기수"로 배치되었다.[4] 그는 파일럿이 되기를 희망했지만, 군에서 파일럿 훈련을 받기에는 너무 어리다고 여겨졌다.[24]

우데트는 뮌헨의 테레지엔-김나지움에 다녔다.


오토바이가 포병 포탄 폭발로 생긴 구덩이에 부딪혀 어깨를 다친 후, 그는 군 병원으로 보내졌고, 오토바이는 수리를 위해 보내졌다. 우데트는 제26사단을 찾으려 했지만, 찾을 수 없었고 나뮈르의 차량 보급창에서 복무하기로 결정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쇼니 비행 부대의 장교들을 만나 항공 관측사로 전속할 것을 권유받았다. 명령을 받기 전에, 육군은 자원 오토바이 부대를 해산했고, 우데트는 다시 징집관에게 보내졌다.[4]

우데트는 전투에 복귀하려 했지만, 육군에서 제공하는 조종사 훈련이나 항공기 정비사 훈련을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훈련된 조종사라면 즉시 육군 항공대에 합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린 시절에 자주 드나들던 항공기 공장의 소유주인 가족 친구 구스타프 오토를 통해 우데트는 사설 비행 훈련을 받았다. 이 훈련에는 2000마르크(1915년 미국 달러로 약 400USD)와 아버지 회사에서 받은 새로운 욕실 설비가 소요되었다.[4] 우데트는 1915년 4월 말에 민간 조종사 면허를 받았고, 즉시 독일 제국 항공대에 합격했다.[4] 10월에 예비역으로 편입된 것을 계기로 아버지에게 학비를 지원받아 오버비젠펠트의 민간 파일럿 양성소에 다니며, 1915년 4월에 민간 항공기 조종 면허를 취득했다.[23][25]

우데트는 처음에는 관측 부대인 ''Feld Flieger-Abteilung'' 206 (FFA 206)에서 관측 장교 브루노 유스티니우스 소위와 함께 ''Unteroffizier''(부사관) 조종사로 활동했다.[4] 그는 관측 장교와 함께 날개 케이블의 샤클이 끊어진 후 손상된 아비아틱 B.I 2인승기를 독일군 진영으로 복귀시킨 공로로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우데트는 2급, 소위는 1급).[1] 유스티니우스는 적진 뒤에 착륙하여 포로가 되는 대신, 날개를 잡고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밖으로 기어 나왔다. 이 구조적 결함과 빈터 소위와 프라이스 부사관이 사망한 유사한 사고 이후, 아비아틱 B는 현역에서 퇴역했다.

이후 우데트는 비행단에서 좋지 않은 판단의 결과라고 여긴 사고로 항공기를 잃어 군사 재판에 회부되었다. 연료와 폭탄을 과도하게 실은 항공기는 급격한 뱅크 후 실속하여 지면으로 추락했다. 기적적으로 우데트와 유스티니우스는 경미한 부상만 입고 살아남았다. 우데트는 7일 동안 헌병대에 구금되었다.[5] 헌병대를 나오던 중 그는 하트만 소위와 함께 벨포르에 대한 폭격 임무를 관측하기 위해 비행할 것을 요청받았다. 소위가 손으로 던진 폭탄이 착륙 장치에 걸렸지만, 우데트는 곡예 비행을 하여 폭탄을 떨어뜨리는 데 성공했다.[1] 공군 참모 장교는 이 사건 당시 우데트의 활약에 대해 듣자마자 우데트를 전투기 사령부로 전출하라고 명령했다.

2. 2. 2. 전투기 조종사로의 활약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직후, 우데트는 독일 제국 육군에 지원하려 했으나 작은 키로 인해 실패했다. 하지만 ''전독일 자동차 클럽(Allgemeiner Deutscher Automobil-Club)''에서 오토바이 소지 지원자를 모집하자, 아버지에게 받은 오토바이를 가지고 제26. ''뷔르템베르크'' 예비 사단에 지원하여 배치되었다. 그러나 오토바이 사고로 어깨 부상을 당해 군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이후 차량 보급창에서 복무했다. 그곳에서 우데트는 항공 관측사 전속을 권유받았지만, 육군 자원 오토바이 부대 해산으로 다시 징집관에게 보내졌다.[4]

전투 복귀를 희망한 우데트는 가족 친구의 도움으로 사설 비행 훈련을 받고 1915년 4월 말 민간 조종사 면허를 취득, 독일 제국 항공대에 합격했다.[4]

우데트는 합스하임의 FFA 68 부대에 배정받아 포커기를 몰았다. 첫 공중전에서 프랑스 Caudron을 조준했지만, 긴장으로 공격하지 못하고 오히려 공격받았다. 총알이 뺨을 스치고 비행 고글을 부쉈지만, 살아남은 우데트는 공격적인 전술을 익혀 승리하기 시작했다.[1][4] 1916년 3월 18일, Farman F.40을 격추하며 첫 승리를 거두고 철십자 훈장 1급을 받았다. 그는 불타는 폭격기에서 추락하는 관측병을 보며 승리감만 느꼈다고 회상했다.[6][7]

FFA 68은 ''Kampfeinsitzer Kommando'' Habsheim으로 개칭되었고, 1916년 9월 28일 ''야크트슈타펠'' 15가 되었다. 우데트는 5번 더 승리한 후, 1917년 6월 ''야스타'' 37로 전출되었다. 1916년 10월 12일 첫 승리에서 프랑스 브레게기를 독일 영토에 안전하게 착륙시켰고, 근처에 착륙하여 승무원들의 파괴를 막았다. 우데트의 포커기에 박힌 총알로 타이어가 펑크 나 비행기가 뒤집혔지만, 우데트와 프랑스 조종사는 악수를 나누었다.[8] 1917년 1월, 우데트는 ''Leutnant der Reserve'' (예비 중위)로 임관했다. 같은 달, ''야스타'' 15는 쌍발 동기식 Maschinengewehr 08 기관총을 장착한 신형 알바트로스 D.III로 재장비했다.[4]

''야스타'' 15 복무 중, 우데트는 프랑스 에이스 조르주 귀네메르와 1대1 공중전을 벌였다. 서로의 기관총이 고장난 상황에서 귀네메르는 우데트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났다. 우데트는 귀네메르가 공정한 싸움을 원해 자신을 살려주었다고 회상했다.[4]

''야스타'' 15 조종사 대부분이 사망한 후, 우데트는 ''야스타'' 37로 전출을 신청했다. 11월 말, 트리플 에이스이자 ''야스타퓌러''가 된 우데트는 쿠르트 그라소프의 추천으로 ''야스타'' 37 지휘관이 되었다.[4] 1917년 11월 7일 우데트의 지휘관 승진은 6일 후 호엔촐레른 왕가 훈장 수여로 이어졌다. 우데트는 겉으로는 부주의했지만, 새로운 조종사들을 코칭하고 사격술을 강조하는 훌륭한 비행대 지휘관이었다.[4]

1915년 6월, 제9항공대에 재입대했고, 11월에는 제68야전항공대 전투기 조종사로 배속되었다.[24] 12월, 프랑스군 복엽기와 첫 공중전을 벌였지만, 긴장하여 격추하지 못했다.[25] 우데트의 첫 적기 격추는 1916년 3월 18일이었다.[24] 우데트는 자서전에 "그때 감정은 형용할 수 없었다. 기쁨과 자랑스러움에 소리 지르고 싶었다"고 썼다.[26]

1917년 4월, 제15전투기 중대에 소속되어 6월 6일 프랑스군 에이스 조르주 기네메르와 1대1로 맞붙었다.[27] 그러나 우데트 기의 기관총 고장, 기네메르 기의 고장(추정)으로 승부가 나지 않았다.[26][28] 8월, 제37전투기 중대 중대장으로 임명되었다.[24][27]

2. 2. 3. "리히트호펜 서커스" 에이스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은 독일군 최강의 에이스 파일럿으로, 르 카토 기지에 주둔하며 우데트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자신이 지휘하는 제1 전투기 대대(일명 '리히트호펜 서커스')에 초청했다.[29][28] 우데트는 1918년 3월 24일부터 '리히트호펜 서커스' 소속 제11 전투기 중대(Jagdstaffel 11)의 중대장이 되었다.[30]

1918년 4월, 리히트호펜이 전사하고, 7월에는 그의 후임이었던 빌헬름 라인하르트도 사고로 사망했다. 이후 '리히트호펜 서커스' 대대장으로 우데트가 임명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으나, 헤르만 괴링 중위가 신임 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31][32] 우데트는 처음에는 괴링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곧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24]

우데트는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62기를 격추하여 리히트호펜에 이어 독일군 내 격추 수 2위를 기록했으며, 대전에서 살아남은 파일럿 중에서는 1위였다.[33] 그는 푸르 르 메리트 훈장과 호엔촐레른 왕가 훈장 등 많은 훈장을 받았다. 그의 탑승기에는 "''Du doch nicht!''" (너는 안 돼!)라는 문구가 크게 쓰여 있었다.

2. 3. 전간기 활동 (1919년 ~ 1933년)



에른스트 우데트는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919년 로베르트 폰 그라임과 함께 항공기 쇼를 개최하고, 독일과 오스트리아 간 최초의 국제 항공 서비스를 시작하려 했으나 연합 위원회에 의해 좌절되었다.[35] 1921년 미국에서 사업에 성공한 친구의 지원을 받아 "우데트 항공기 제작소"를 설립하여 스포츠기를 제조했지만, 1925년까지 25대 판매에 그쳐 사업은 실패했다.[36][37][38] 이후 곡예 비행 조종사로 복귀하여 큰돈을 벌었지만, 술과 여자에 낭비하여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39]

베를린에서 레니 리펜슈탈을 만나 영화계에 입문하여, 《죽음의 은령(de)》(1929년), 《몽블랑의 폭풍(de)》, 《아프리카를 나는 미지의 새》, 《SOS 빙산(de)》, 《비행의 기적》(1935년) 등에 출연하며 배우로도 활동했다.[43][44][45][46] 특히 《아프리카를 나는 미지의 새》 촬영을 위해 탄자니아를 방문하여 아프리카 문화에 대한 경험을 쌓았다.[44]

2. 3. 1. 항공기 사업과 곡예 비행

전쟁 후, 우데트는 군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가던 중 자신의 가슴에서 훈장을 떼어가려는 공산주의자에 맞서 싸워야 했다. 우데트는 로베르트 폰 그라임과 함께 바이에른에서 잉여 항공기를 사용하여 주말에 포로 구호 단체를 위해 모의 공중전을 펼쳤다. 그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간 최초의 국제 항공 서비스를 시작하라는 초대를 받았지만, 첫 비행 후 연합 위원회가 그의 항공기를 압수했다. 1920년 2월 25일, 우데트는 엘레노어 "로" 징크와 결혼했지만, 3년도 채 안 되어 1923년 2월 16일에 이혼했다. 이는 우데트의 잦은 염문 때문으로 보인다. 그는 저글링, 만화 그리기 등 다양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에른스트 우데트가 1930년경에 찍은 사진


1936년 우데트가 조종한 스위스 포커 D.VII.


전간기에 우데트는 스턴트 조종사이자 플레이보이로 알려졌다. 그는 영화에어쇼를 위해 비행했다. 예를 들어, 날개 끝으로 땅에서 천을 집어 올리거나, 낮은 다리 밑을 비행하고, 지상에서 불과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루프를 완료하는 등의 묘기를 선보였다. 우데트가 수행한 유일한 스턴트는 공중에서 엔진을 끄고 측면 활공으로 항공기를 착륙시킨 후 마지막 루프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그는 레니 리펜슈탈과 함께 ''피츠 팔루의 백색 지옥''(1929), ''몽블랑 위의 폭풍''(1930), ''S.O.S. 아이스버그''(1933) 세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우데트는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열린 전국 항공 경주에 초대되었다. 1935년에는 하인츠 파울이 감독한 ''비행의 기적''(1935)에서 본인 역으로 출연했다.[10][11]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데트는 자서전 ''Mein Fliegerleben''(나의 비행 생활) (1935년 출판)으로 예술 경연 문학 부문에 참가했다.[12]

이러한 활동은 우데트에게 좋은 홍보가 되었다. 밀워키 출신의 미국인 윌리엄 폴은 항공기 제조 회사를 후원하겠다는 제안과 함께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데트 플루크조이그바우는 밀베르트쇼펜의 창고에서 탄생했다. 그 목적은 일반 대중이 비행할 수 있는 소형 항공기를 제작하는 것이었다. 곧 연합 위원회와 문제가 생겨 벌집과 닭장 공장으로 운영을 이전했다.

우데트 회사가 생산한 첫 번째 비행기는 ''U2''였다. 우데트는 아에로 클럽 알레만(Aero Club Aleman)의 비용으로 두 번째 모델인 U4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윌버 컵 경주에 출전시켰지만 성능이 떨어졌다. 클럽은 그에게 비용을 상환하기 위해 담배 광고를 하기를 원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그는 아르헨티나 철도청장인 스웨덴계 남성 토른키스트의 도움을 받아 빚을 청산했다.

1924년, 우데트는 일반인을 위한 것이 아닌 4기통 항공기 U11 콘도르를 건설하기로 결정하면서 우데트 플루크조이그바우를 떠났다. 그는 전쟁에서 만난 또 다른 친구 앙거문트와 함께 독일에서 전시 비행 사업을 시작했는데, 이 역시 성공했지만 우데트는 "결국 이것도 지루해지기 시작한다. ... 우리는 현재에 서서 생계를 위해 싸우고 있다. 항상 쉬운 것은 아니다. ... 그러나 생각은 생존을 위해 싸울 가치가 있었던 시절로 돌아간다."라고 말했다.

우데트는 전쟁 당시 동료였던 수초키와 함께 아프리카 영화 촬영 원정대의 조종사가 되었다. 촬영 기사는 또 다른 참전 용사인 슈네베르거였고, 우데트는 그를 "벼룩"이라고 불렀으며, 가이드는 전 동아프리카 농장주였던 지덴토프였다. 우데트는 아프리카에서 사자가 낮게 나는 항공기를 덮쳐 수초키의 날개 표면을 뜯어낸 사건을 묘사했다. 우데트는 아프리카에서 사냥을 했다.

1918년 12월,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괴링과 함께 뮌헨으로 돌아왔다.[34] 구스타프 오토 제작소에서 자동차 기술자로 일했지만[24][33], 우데트는 다시 파일럿이 되기를 희망했다. 1919년에는 친구 로베르트 폰 그라임과 함께 항공기 쇼(항공기 결투 시뮬레이션)를 개최했지만, 1920년 1월 10일에 정식으로 발효된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불가능하게 되었다.[35]

이후 1921년에 미국에서 사업에 성공한 친구의 자금 지원을 받아 "우데트 항공기 제작소"를 설립하여 스포츠기를 제조하게 되었다.[36][37] 연합국에 의한 독일 감시가 점점 완화되었기 때문에, 우데트는 잇달아 스포츠기를 제조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25년까지 구매자가 나타난 기체는 25대에 불과하여, 사업으로서는 성립되지 않았다.[38]

1931년의 우데트


항공기 제조에 싫증이 난 우데트는 곡예 비행 조종사로 돌아갔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에이스로서 인지도가 높았던 우데트의 쇼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그는 큰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러나 술과 여자에 낭비가 심해 순식간에 다 써 버렸고, 그는 항상 청구서에 시달렸다.[39]

우데트는 매우 향락적인 생활을 하며, 애기 "플라밍고"를 몰고 여기저기 날아다녔다. 베를린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아이프 호수(:de:Eibsee)에서 생선을 먹고, 생모리츠에서 칵테일을 마시는 하루를 즐겼다.[40] 통 크게 쏘는 것을 좋아해 술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술을 사주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41] 여성 편력도 심해서, 종전 직후 결혼한 여성과는 1923년에 이혼했고, 이후 백작 부인 등 다양한 여성과 관계를 가졌다. 여성에게 못을 가슴에 박혀 살해당할 뻔한 적도 있었다.[42]

2. 3. 2. 영화 배우 활동

전간기 우데트는 스턴트 조종사이자 플레이보이 같은 행동으로 주로 알려졌다. 그는 영화에어쇼에서 비행을 했는데, 예를 들어 날개 끝으로 땅에서 천을 집어 올리거나, 낮은 다리 밑을 비행하고, 지상에서 불과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루프를 완료하는 등의 묘기를 선보였다. 우데트가 수행한 유일한 스턴트는 공중에서 엔진을 끄고 측면 활공으로 항공기를 착륙시킨 후 마지막 루프를 완성하는 연속 루프였다.[10] 그는 레니 리펜슈탈과 함께 피츠 팔루의 백색 지옥(1929), 몽블랑 위의 폭풍(1930), S.O.S. 아이스버그(1933) 세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영화에서 우데트의 스턴트 조종사 활동은 그를 캘리포니아로 이끌었다. 1933년 10월호 ''뉴 무비 매거진''에는 칼 렘믈 주니어가 할리우드에서 우데트를 위해 연 파티 사진이 실려 있는데, 렘믈은 미국-독일 합작 영화인 ''SOS 아이스버그''를 제작한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수장이었다. 우데트는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열린 전국 항공 경주에 초대되었다. 1935년에는 하인츠 파울이 감독한 비행의 기적(1935)에서 본인 역으로 출연했다. 그의 상대 배우인 위르겐 올센은 이전에 매우 인기 있는 영화 ''히틀러 청년 퀘스: 독일 청년의 희생 정신에 관한 영화''에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조종사 아버지를 잃고 그의 우상인 우데트의 도움을 받는 청소년 역할을 맡았다.[11]

우데트는 베를린에서 여성 영화감독 레니 리펜슈탈을 알게 되어, 그녀의 권유로 영화 《죽음의 은령(de)》(1929년)에 출연했다.[43] 이 영화는 대히트를 기록했고, 속편인 《몽블랑의 폭풍(de)》에도 출연했다.[43] 이후 탐험 영화 《아프리카를 나는 미지의 새》에 출연하여, 탄자니아에서 로케이션 촬영을 진행했다.[44] 우데트는 탄자니아에서 동물의 머리, 방패, 창, 가면 등을 기념품으로 가져왔으며, 이후 아프리카에서의 모험 이야기를 자주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게 되었다.[44] 이어서 《SOS 빙산(de)》에 출연하여, 그린란드에서 로케이션 촬영을 진행했다.[45] 에스키모와 교류를 깊게 하고, 그들을 비행기에 태워주기도 했다고 한다.[45] 1935년에 개봉한 영화 《기적의 비행》이 마지막 영화 출연작이 되었다.[46]

2. 4. 나치 정권과 제2차 세계 대전 (1933년 ~ 1941년)

에른스트 우데트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지만, 1933년 헤르만 괴링의 권유로 나치당에 입당했다. 괴링은 우데트에게 미국산 커티스 호크 II 쌍엽기 두 대를 사주겠다고 약속했고, 이는 융커스 Ju 87 ('슈투카') 급강하 폭격기 개발에 영향을 주었다. 우데트는 1936년 하계 올림픽 에어쇼에서 이 비행기를 직접 조종했다.[12]

1936년, 우데트는 급강하 폭격기의 주요 지지자가 되었고, 독일 공군에 급강하 폭격기를 도입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그는 정치적 연줄로 제국 항공부 기술 사무소(''T-Amt'')의 수장이 되었지만, 이 직책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관료주의에 대한 적성 부족으로 알코올 중독에 빠졌다.[16]

1939년, 우데트는 이탈리아령 북아프리카를 방문하여 이탈로 발보와 함께 비행했다.[13] 같은 해 2월, 그는 ''Luftwaffe'' ''게네랄루프트체이그마이스터''(조달 및 공급 책임자)가 되었지만, 조직적인 자질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14]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면서 항공기 생산 요구 급증과 원자재 공급 제한으로 우데트의 어려움은 커졌다. 괴링은 아돌프 히틀러에게 거짓 보고를 하고, 영국 본토 항공전 패배 책임을 우데트에게 돌리려 했다.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되면서 우데트는 절망에 빠졌다. 그는 소련 공군과 항공 산업의 강력함을 경고했지만, 괴링은 이를 히틀러에게 보고하지 않았다.[15]

우데트는 진실과 충성 사이에서 갈등하며 심리적 붕괴를 겪었고, 괴링은 그의 약점을 이용해 조종했다. 결국 우데트는 무능함이 드러났고, 에르하르트 밀히는 우데트의 추방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통보받았다.

2. 4. 1. 죽음

1941년 11월 17일, 우데트는 여자친구 잉게 블레이와 통화 중 머리에 총을 쏴 자살했다. 우데트의 자살은 대중에게 숨겨졌고, 그의 장례식에서 그는 새로운 무기를 시험하던 중 비행 중 사망한 영웅으로 칭송받았다.[69] 우데트의 장례식에 참석하러 가던 중, 제2차 세계 대전 전투기 에이스 베르너 묄더스는 브레슬라우에서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고, 고위 ''루프트바페'' 임원 공군 상장 헬무트 빌베르크는 드레스덴 근처에서 또 다른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우데트는 베를린의 인벨리데 frihof 묘지에서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 옆에 묻혔다. 묄더스는 우데트 옆에 묻혔다.

우데트의 전기에 따르면, ''독수리의 몰락''에서 그는 "잉겔라인, 왜 나를 떠났어?"와 "아이언 원, 당신은 내 죽음에 책임이 있어"라는 내용의 유서를 붉은 연필로 썼다고 한다. "잉겔라인"은 그의 여자 친구 잉게 블레이를 지칭했고, "아이언 원"은 헤르만 괴링을 지칭했다.

1941년 11월 17일 오전 9시, 우데트는 애인 잉게 브라이레 부인에게 전화하는 도중 권총 자살했다. 이때 우데트는 "필리 쾰러(괴링의 오랜 친구이자 정권 장악 이전부터 측근이었으며, 프로이센 내무 차관 및 4개년 계획 차관 등을 역임)에게 내 유언을 이행해 달라고 전해달라"고 말했다.[65] 자살 현장에는 꼬냑 빈 병 2병이 굴러다녔고, 벽에는 빨간 크레용으로 "철인(괴링)아, 너는 나를 버렸다. 너는 왜 밀히와 가브렌츠(병비본부 계획부장·루프트한자 독일 항공 간부)와 같은 유다에게 굴복했는가"라고 갈겨 써 있었다.[66]

괴링은 우데트의 자살에 충격을 받았지만, 이 스캔들이 절대 새어 나가지 않도록 명령했다.[69] 전시 중이었기 때문에, 우데트는 신형 무기 개발 중 사고에 휘말린 것으로 처리되어 국장이 거행되었다. 11월 21일의 국장에서는 갈란트를 비롯한 기사 철십자 훈장 수훈자들이 관의 의장병을 섰고, 괴링은 조사를 통해 "나는 최고의 친구를 잃었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70]

3. 계급

진급일계급
1915년 9월 21일예비역 상등병[71]
1915년 11월 28일예비역 병장[71]
1916년 3월 13일예비역 하사[71]
1916년 11월 5일준위[71]
1917년 1월 2일예비역 소위[72]
1918년 9월 14일예비역 중위[24]
1934년 6월 1일중령[18][24]
1935년 6월 1일대령[18][24]
1937년 4월 1일소장[18][24]
1938년 11월 1일중장[24]
1940년 4월 1일항공 대장[18][24]
1940년 7월 19일상급대장[18][24]


4. 수훈

훈장수여 일자
1914년형 2급 철십자장[24]1915년 9월 24일
1939년형 2급 철십자장 약장 (2차 대전 중)[24]
1914년형 1급 철십자장[24]1916년 3월 20일
1939년형 1급 철십자장 약장 (2차 대전 중)[24]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24]1940년 7월 4일
호엔촐레른 왕가 훈장 검 부착 기사 십자장[24]1917년 11월 13일
풀 르 메리트 훈장[24]1918년 4월 9일
전상장 은장 (1차 대전 중)[24]
프로이센 왕국 조종사 배지 (1차 대전 중)[24]
조종사 배지 (:de:Flugzeugführerabzeichen) 다이아몬드장
조종사 겸 관측원 배지 황금 다이아몬드장[2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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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뉴스 'Chutist Tactic Credited To Udet, Reich Stunt Ace https://www.nytimes.[...] 1940-05-08
[3] 서적 Carl Zuckmayer und Ernst Udet - Freundschaft als Missverständnis: Literaturgeschichte und Nationalsozialismus https://books.google[...] LIT Verlag 2023-11-22
[4] 웹사이트 Ernst Udet: The Rise and Fall of a German World War I Ace http://www.historyne[...] 2006-06-00
[5] 서적 Ace of the Iron Cross Ace Books
[6] 서적 Sharks Among Minnows Grub Street
[7] 서적 "Early German Aces of World War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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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웹사이트 Wunder des Fleigens - http://www.filmporta[...] filmportal.de 2012-09-17
[12] 웹사이트 Ernst Udet https://www.olympedi[...] 2020-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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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서적 Command and Leadership in the German Air Force https://books.google[...] Pickle Partners Publishing 2017-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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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웹사이트 "Udet, Ernst" http://www.lexik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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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서적 クノップ(2002)
[43] 서적 クノップ(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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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서적 クノップ(2002)
[49] 서적 クノップ(2002)
[50] 서적 キレン(1973)
[51] 서적 『ドイツ空軍全史』(学研)
[52] 서적 キレン(1973)
[53] 서적 山崎(2009)
[54] 서적 クノップ(2002)
[55] 서적 ヴィストリヒ(2002)
[56] 서적 クノップ(2002)
[57] 서적 クノップ(2002)
[58] 서적 クノップ(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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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서적 モズレー(1977)下巻
[61] 서적 モズレー(1977)下巻
[62] 서적 モズレー(1977)下巻
[63] 서적 モズレー(1977)下巻
[64] 서적 モズレー(1977)下巻
[65] 서적 モズレー(1977)下巻
[66] 서적 モズレー(1977)下巻
[67] 서적 モズレー(1977)下巻
[68] 서적 モズレー(1977)下巻
[69] 서적 モズレー(1977)下巻
[70] 서적 モズレー(1977)下巻
[71] 문서 Dixon(2009),p211
[72] 문서 Dixon(2009),p212
[73] 웹인용 Ernst Udet - Second Highest German Ace of WWI http://www.acepilots[...] 2012-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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