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조치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에조치는 일본에서 홋카이도, 사할린, 쿠릴 열도 등지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던 명칭이다. 어원은 아이누어 "사람"을 뜻하는 단어에서 유래했으며, 한자로는 새우(蝦)와 오랑캐(夷)를 조합하여 표기했다. 15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가키자키씨가 지배권을 얻었고, 에도 시대에는 마쓰마에 번이 이 지역을 관리했다. 1869년, 에조치는 홋카이도로 개칭되었고, 사할린은 북에조지로 불리게 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아이누 - 도호쿠 지방
도호쿠 지방은 일본 혼슈 북동부에 위치하며 6개 현으로 이루어져 있고, 산악 지형과 화산, 온천이 풍부하며, 쌀 생산이 활발했으나 현재는 인구 감소와 고령화, 지진의 영향으로 지역 경제 활성화가 과제인 지역이다. - 아이누 - 사할린섬
사할린섬은 러시아 최대의 섬이자 세계에서 29번째로 큰 섬으로, 러시아어, 일본어, 한국어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으며, 러시아와 일본 간 영토 분쟁과 석유 및 천연가스 개발, 다양한 민족 거주, 그리고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과 같은 비극적인 사건을 겪은 복잡한 역사를 지닌 섬이다. - 홋카이도의 역사 - 마쓰마에번
마쓰마에번은 홋카이도 남부를 지배하며 에조와의 교역으로 성장한 번으로, 가키자키 가문이 기반을 닦고 마쓰마에로 성씨를 바꾼 후 에조와의 무역 독점권을 인정받아 경제를 유지했으나, 러시아의 남하와 정세 변화 속에서 변동을 겪다가 폐지되었다. - 홋카이도의 역사 - 아베노 히라후
아베노 히라후는 7세기 일본의 인물로, 에조 정벌과 백제 부흥 원정에 참여했으나 기록의 신빙성에 논란이 있으며, 그의 가계와 업적에 대한 해석은 일본과 한국의 관점에서 상반된다.
| 에조치 | |
|---|---|
| 지도 정보 | |
| 일반 정보 | |
| 명칭 | 에조 (蝦夷) |
| 다른 이름 | 에미시 (蝦夷) 예조 (掖 沮) 도이 (貊, 東夷) 모진 (毛人) 츠가루 (津輕) |
| 설명 | 일본 북부에 있던 섬과 그곳에 거주하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역사적인 용어이다. 주로 일본 문헌에서 사용되었으며, 현재의 홋카이도와 그 주변 지역을 지칭한다. 에조는 일본 문화권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이 지역 사람들은 에미시(蝦夷)라고 불렸다. 에조치는 아이누 민족의 땅을 가리킨다. |
| 로마자 표기 | Ezo |
| 역사 | |
| 주요 시기 | 야요이 시대 ~ 에도 시대 |
| 야요이 시대 | 에조는 홋카이도와 혼슈 북부에 살았다. |
| 나라 시대 | 7세기 말부터 에조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증가했다. 일본은 에조 정복을 시도했고,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다. 일본 조정은 에조를 '쓰가루' 또는 '에미시'라고 불렀다. |
| 헤이안 시대 | 에조는 일본과 교역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일부는 일본 문화에 동화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독자적인 사회와 문화를 유지했다. |
| 가마쿠라 시대 | 에조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더욱 강화되었다. 일본인들은 에조를 '도이'라고 불렀다. |
| 무로마치 시대 | 에조를 '모진'이라고도 불렀다. 에조는 혼슈 북부 지역을 포함하여 넓은 지역에 거주했다. |
| 에도 시대 | 에조에 대한 일본의 식민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에조의 땅은 '에조치'라고 불리게 되었다. 에조는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그들의 문화는 억압되었다. 19세기 후반 메이지 유신 이후, 에조치는 홋카이도로 개칭되었다. |
| 와진치 | 에조치에서 일본인(와진)들이 거주하던 지역을 가리킨다. 와진치는 주로 홋카이도 남부에 위치했다. |
| 문화 및 사회 | |
| 언어 | 아이누어 |
| 종교 | 아이누 전통 신앙 |
| 경제 | 사냥 어로 채집 교역 |
| 사회 구조 | 마을 공동체 중심 수장 존재 |
| 현재 | |
| 현대 | 에조는 현대 일본의 일부가 되었다. 아이누 민족은 일본 사회의 소수 민족으로 존재한다. 아이누 문화 보존 노력이 진행 중이다. |
2. 어원
일본어 자료에 따르면 에조(蝦夷)는 enciw|엔츄ain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며, '사람, 사람들'이라는 뜻을 가진다.[6][7][8][9] 1153년 문서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혼슈(本州) 북동부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아닌 사람들을 지칭했다. 이후 1485년에는 주로 홋카이도(北海道), 가라후토(樺太, 사할린), 쿠릴 열도(千島列島)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6][9]
15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오시마 반도 남부의 영주로 성장해 간 가키자키씨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관백, 태합)·도쿠가와 이에야스(정이대장군)로부터 에조지의 지배권, 교역권을 공인받았다. 에도 시대가 되자 가키자키씨는 마쓰마에씨로 개명하여 다이묘 서열에 오르고, 마쓰마에 번이 되었다. 홋카이도 태평양 쪽과 쿠릴 열도를 동에조라 부르고, 홋카이도 일본해 쪽과 사할린을 서에조지라 불렀다. 관정부터 분카 시대에 들어서면 막부는 남하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는 러시아를 경계하여, 1799년(관정 11년)에 동에조지를, 1807년(분카 4년)에 서에조지를 천령으로 하고, 1809년 사할린의 명칭을 북에조지로 공식적으로 정한 뒤 도호쿠 지방의 여러 번에 경비를 목적으로 한 출병을 명령했다. 긴장이 완화된 것으로 여겨졌던 1821년(분세이 4년)에는 에조지의 대부분을 마쓰마에 번으로 반환했지만, 여러 외국과의 긴장이 다시 고조된 1855년(안세이 2년)에는 오시마 반도 남부를 제외하고 다시 천령으로 했다. 막부는 재정 부담 경감을 위해 센다이, 모리오카, 히로사키, 쿠보타, 마쓰마에의 도호쿠의 대번에게 연안의 경비 의무를 할당했고, 아이즈와 쇼나이의 2번도 그 뒤를 이었다.
한자 표기는 음운이 아닌 뜻에 기반한 숙자숙음(熟字熟音) 방식으로, 새우(蝦)와 오랑캐(夷)를 조합한 것이다. 새우를 뜻하는 한자는 아인누 남성들이 기르는 긴 수염을 새우의 더듬이에 비유한 것일 수 있다.
'Yezo'라는 표기는 유럽인들이 일본과 처음 접촉한 1600년경의 발음을 반영한다. 이 역사적 표기는 ''Fragaria yezoensis''와 ''Porphyra yezoensis''에서 볼 수 있듯이 학명의 라틴어(yezoensisla)에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 대합(帆立貝, hotategai)으로 알려진 ''Mizuhopecten yessoensis''처럼 다른 표기를 사용하는 종도 있다.
3. 역사
아이즈·쇼나이 양번이 홋카이도(蝦夷地) 매각을 프로이센 왕국에 제안했다. 비스마르크 총리대신으로부터 회신이 도착하기 전에, 이타가키 다이스케, 이지치 마사하루 등이 아이즈 성을 공략했기 때문에 매각 계획은 저지되었다.[16] 당시 정부에 있던 오무라 마스지로는 주변의 적대 세력을 점차적으로 함락시켜 나가는 장기전을 지시했지만, 전장의 이타가키 다이스케, 이지치 마사하루 등은 이에 반대하고 일거에 적 본진을 공격하는 단기결전을 제안했다. 장기전이 되었더라면 일본의 국경선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해진다.[16]
1869년 6월 27일(메이지 2년 5월 18일(율력)) 하코다테 전쟁이 끝나고 보신 전쟁도 종결되었다. 같은 해 9월 20일(메이지 2년 8월 15일(율력)) 신정부는 태정관포고를 통해 에조치에 홋카이도라는 이름을 붙였고[17], 북에조치는 사할린으로 바꾸었다. 이때까지 에조치였던 지역에는 홋카이도 11국 86군 중 아래의 령제국이 설치되었다(화인지 지역에 설치된 오시마국과 후시국은 제외).지역 구분 설치된 령제국 옛 동에조지(태평양 쪽에서 천섬열도에 이르는 지역) 이부리국(야마코시군은 화인지), 히다카국, 도카치국, 구시로국, 네무로국, 지시마국 옛 서에조지(일본해에서 오호츠크해에 이르는 지역) 이시카리국, 데시오국, 기타미국 옛 북에조지(소야 해협보다 북쪽 지역) 사할린
3. 1. 근세 이전
서구에 에조(蝦夷)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796년 이삭 티칭(Isaac Titsingh)에 의해 유럽에 소개되었다. 그의 소장 일본 서적에는 하야시 시헤이(Hayashi Shihei)의 三国通覧図説가 포함되어 있었다.[10] 이 책은 1785년 일본에서 출판되었으며, 에조 지방과 그곳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다.[11]
1832년, 영국 아시아 번역 기금(Oriental Translation Fund of Great Britain and Ireland)은 티칭이 번역한 三国通覧図説의 프랑스어 번역본 축약판의 사후 출판을 지원했다.[12] 율리우스 클라프로트(Julius Klaproth)가 편집자였으며, 책의 초대 편집자였던 장-피에르 아벨-레뮤사(Jean-Pierre Abel-Rémusat)의 사망으로 미완성된 작업을 완료했다.
3. 2. 에도 시대
15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오시마 반도 남부의 영주로 성장해 간 가키자키씨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관백, 태합)·도쿠가와 이에야스(정이대장군)로부터 에조지의 지배권, 교역권을 공인받았다. 에도 시대가 되자 가키자키씨는 마쓰마에씨로 개명하여 다이묘 서열에 오르고, 마쓰마에 번이 되었다. 홋카이도 태평양 쪽과 쿠릴 열도를 동에조라 부르고, 홋카이도 일본해 쪽과 사할린을 서에조지라 불렀다. 관정부터 분카 시대에 들어서면 막부는 남하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는 러시아를 경계하여, 1799년(관정 11년)에 동에조지를, 1807년(분카 4년)에 서에조지를 천령으로 하고, 1809년 사할린의 명칭을 북에조지로 공식적으로 정한 뒤 도호쿠 지방의 여러 번에 경비를 목적으로 한 출병을 명령했다. 긴장이 완화된 것으로 여겨졌던 1821년(분세이 4년)에는 에조지의 대부분을 마쓰마에 번으로 반환했지만, 여러 외국과의 긴장이 다시 고조된 1855년(안세이 2년)에는 오시마 반도 남부를 제외하고 다시 천령으로 했다. 막부는 재정 부담 경감을 위해 센다이, 모리오카, 히로사키, 쿠보타, 마쓰마에의 도호쿠의 대번에게 연안의 경비 의무를 할당했고, 아이즈와 쇼나이의 2번도 그 뒤를 이었다.
에도 시대까지 일본에서는 북쪽 경계에 대한 인식이 희박했다고 알려져 있다.[14] 러시아의 진출로 에도 시대 말기가 되자 “이민족이 사는 땅”이라는 뜻의 “에조치(蝦夷地)”라는 명칭으로는 부적절하다는 의견이 제기되었으나, 에도 시대에는 개칭은 실현되지 않았다.[14]
3. 2. 1. 당시의 고지도
이삭 티칭(Isaac Titsingh)은 1796년에 하야시 시헤이(Hayashi Shihei)의 三国通覧図説|Sangoku Tsūran Zusetsu일본어를 통해 에조(蝦夷)에 대한 기록을 유럽에 처음으로 소개했다.[10] 1785년 일본에서 출판된 이 책은 에조 지방과 그곳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다.[11]
1832년, 영국 아시아 번역 기금(Oriental Translation Fund of Great Britain and Ireland)은 티칭이 번역한 Sankoku Tsūran Zusetsu일본어의 프랑스어 번역본 축약판을 사후 출판했다.[12] 율리우스 클라프로트(Julius Klaproth)가 편집을 맡아, 초대 편집자였던 장-피에르 아벨-레뮤사(Jean-Pierre Abel-Rémusat)의 미완성 작업을 완료했다.
1712년( 정덕 2년)에 발행된 「화한삼재도회」에는 「에조 섬」 항목과 함께 옛 지도의 삽화가 첨부되어 있다.[15]
1854년( 가영 7년)에는 쿠릴 열도, 사할린 섬 전체와 캄차카 반도까지 명기한 「개정 에조 전도」라는 지도가 있다(가양·토요시마 이즈미 작).
3. 3. 막부 말기
아이즈·쇼나이 양번이 홋카이도(蝦夷地) 매각을 프로이센에 제안하였다. 총리대신(宰相)비스마르크로부터 회신이 도착하기 전에,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 이지치 마사하루(伊地知正治) 등이 아이즈 성(会津城)을 공략했기 때문에 매각 계획은 저지되었다.[16] 당시 정부에 있던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郎)는 주변의 적대 세력을 점차적으로 함락시켜 나가는 장기전을 지시했지만, 전장의 이타가키 다이스케, 이지치 마사하루 등은 이에 반대하고 일거에 적 본진을 공격하는 단기결전을 제안했다. 장기전이 되었더라면 일본의 국경선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해진다.[16]
3. 4. 메이지 시대
1869년 6월 27일(메이지 2년 5월 18일(율력)) 하코다테 전쟁이 끝나고 보신 전쟁도 종결되었다. 같은 해 9월 20일(메이지 2년 8월 15일(율력)) 신정부는 태정관포고를 통해 에조치에 홋카이도라는 이름을 붙였고[17], 북에조치는 사할린으로 바꾸었다. 이때까지 에조치였던 지역에는 홋카이도 11국 86군 중 아래의 령제국이 설치되었다(화인지 지역에 설치된 오시마국과 후시국은 제외).
4. 분할
Ezo|에조일본어 또는 Ezogashima|에조가시마일본어(에조 섬)는 여러 지역으로 나뉘었다. 첫 번째는 오시마 반도 및 그 주변의 일본인 정착지를 포함한 와진치(和人地) 또는 '일본 영토'였다. 에조의 나머지 지역은 Ezochi|에조치일본어(에조 땅) 또는 '아이누 땅'으로 알려져 있었다.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 온 일본인들도 에조치의 해안 지역에 거주했다. 에조치는 다시 북쪽 에조치, 서쪽 에조치, 동쪽 에조치로 나뉘었다. 북쪽 에조치는 사할린 남부를 포함하고, 서쪽 에조치는 홋카이도 북부 절반을 포함하고, 동쪽 에조치는 인구가 많은 홋카이도 남부와 동부 그리고 쿠릴 열도를 포함했다.[13]
참조
[1]
서적
Sea-Girt Yezo: Glimpses at Missionary Work in North Japan
https://books.google[...]
[2]
논문
Notes on the discovery of Ezo
https://www.jstor.or[...]
1950-09-01
[3]
서적
Japan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4]
서적
The Routledge Handbook of the History of Settler Colonialism
https://www.taylorfr[...]
Routledge
2016-01-01
[5]
서적
Historical Atlas of the Medieval World, AD 600–1492
https://books.google[...]
Barnes & Noble
[6]
백과사전
Kokugo Dai Jiten (Shinsō-ban)
Shōgakukan
[7]
백과사전
Shin Meikai Kokugo Jiten Dai Go Han
Sanseidō
[8]
백과사전
Gakken Kokugo Dai Jiten
Gakken
[9]
백과사전
Sanseidō
[10]
웹사이트
Sangoku Tsūran Zusetsu
http://www.worldcat.[...]
[11]
서적
A History of Japan, 1582-1941: Internal and External Worlds
https://books.google[...]
[12]
서적
San kokf tsou ran to sets, ou Aperçu général des trois royaumes
https://books.google[...]
[13]
서적
Ainu Schools and Education Policy in Nineteenth-century Hokkaido, Japan
https://books.google[...]
[14]
웹사이트
北海道の名前について
http://www.pref.hokk[...]
北海道立文書館
2020-01-20
[15]
서적
倭漢三才圖會
吉川弘文館
[16]
서적
板垣精神
一般社団法人板垣退助先生顕彰会
[17]
법령
蝦夷地ヲ北海道ト稱シ十一國ニ分割國名郡名ヲ定ム
http://ja.wikisource[...]
太政官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