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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사와라 나가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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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가사와라 나가나리는 사가현 출신으로, 도쿠가와 막부의 로주였던 오가사와라 나가미치의 아들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해군 장교로 복무하며 청일 전쟁, 러일 전쟁 등에 참전했다. 앨프레드 테이어 메이한의 해군 전략을 일본에 소개하고,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해군 역사에 대한 저술 활동을 통해 "문학 제독"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1921년 예비역으로 편입된 후에도 궁내청 시종으로 활동했다. 그는 또한 쇼와 천황의 해군 문제 개인 교사 역할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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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사와라 나가나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오가사와라 나가나리
이름오가사와라 나가나리
원어 이름小笠原 長生
원어 이름 (언어)일본어
출생일1867년 12월 15일
사망일1958년 9월 20일
출생지사가현, 일본
군사 복무
소속일본 제국
군종일본 제국 해군
복무 기간1887년 – 1921년
최종 계급해군 중장
주요 전투
참전청일 전쟁
러일 전쟁
가족
배우자히데코 (마쓰다이라 나오카타의 딸)
자녀오가사와라 아키미네
오가사와라 쇼지로
오가사와라 나가타카
오가사와라 나가카쓰
기타 정보
별명도고의 사설 부관
사후 활동궁중 고문관
신위정2위
훈등훈1등
훈장공4급
작위자작
묘소세타가야구의 고류지

2. 생애

오가사와라 나가나리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해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의 생애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오가사와라는 청일 전쟁에서 다카치호에 탑승하여 압록강 해전에 참전하였고, 이후 러일 전쟁제1차 세계 대전까지 해군 정보 장교로 복무하며 1918년 중장까지 진급했다. 그는 암호 해독 전문가이자, 해군 역사에 대한 저술로 '문학 제독'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1]

아키야마 사네유키, 사토 데쓰타로와 함께 도고 헤이하치로의 측근이었던 오가사와라는 앨프레드 테이어 메이한의 해군 전략을 일본에 소개하고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메이한의 저서를 번역하고, 일본 역사의 사례를 들어 설명한 책을 출판하여 해군 예산 증액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얻는 데 기여했다.[5] 또한, 일본해 해전에서 도고 헤이하치로가 사용한 정자 전법을 대중에게 널리 알린 인물이기도 하다.[12]

현역에서 은퇴한 후에는 궁내청의 시종으로 근무하며 황태자 (훗날의 히로히토 천황)에게 해군 문제에 대한 개인 교사 역할을 했다.[7][8] 또한 도고 헤이하치로의 전기를 저술하고, 도고 신격화에 기여했다.[12] 태평양 전쟁 이후에는 공직 추방 처분을 받기도 했지만, 1958년 사망할 때까지 일본 사회에 영향을 끼쳤다.


  • 1930년 자신이 원작한 도고 헤이하치로와 일본해 해전을 그린 닛카쓰 25주년 기념 영화 『격멸(撃滅)』이 제작되었다. 해당 영화의 감독은 장남 오가사와라 메이호이며, 차남 오가사와라 쇼지로가 오가사와라 나가나리를 연기했다.
  • 2·26 사건 발생 당일 아침,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 등과 협의를 진행했으며, 이후 반란군을 방조한 혐의로 헌병대의 심문을 받았다.
  • 아버지의 권유로 소년 시절 주 1회, 네기시에 살던 한학자 나카네 스미요시의 집에 다녔다.
  • 1890년, 히로세 다케오의 권유로 시미즈 지로초와 교류했다.
  • 제35대 요코즈나인 후타바야마 사다지가 단발식을 했을 때 가위를 넣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오가사와라 나가나리는 사가현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도쿠가와 막부의 고위 가신인 로주 오가사와라 나가미치였다. 아버지 나가미치가 메이지 유신보신 전쟁으로 인해 은퇴를 강요당했기 때문에, 오가사와라는 1873년 조부의 뒤를 이어 오가사와라 씨족의 수장이 되었으며, 화족 제도의 자작(시샤쿠)이 되었다.[2]

에도 막부 노중을 지낸 오가사와라 나가유키의 장남으로 에도에서 태어났다. 메이지 6년(1873년) 9월, 의조부 나가쿠니의 은거로 인해 가독을 상속받았다.

그는 가쿠슈인 학습원을 다녔고, 그 후 일본 해군 사관학교 제14기 45명 중 35등으로 졸업했다. 그의 동기로는 훗날 일본 내각총리대신이 된 스즈키 간타로가 있었다.[3] 메이지 13년(1880년), 가쿠슈인에 입학. 공립학교나 공옥사 등에도 다니며, 메이지 17년(1884년) 9월에 해군병학교에 입학. 같은 해 7월, 자작을 수여받았다. 메이지 20년(1887년) 7월, 해군병학교(14기)를 졸업했다.


2. 2. 군 경력

오가사와라 나가나리는 사가현에서 도쿠가와 막부의 고위 가신인 로주 오가사와라 나가미치의 아들로 태어났다. 1873년 조부의 뒤를 이어 오가사와라 씨족의 수장이 되었으며, 화족 제도의 자작(시샤쿠)이 되었다.[2] 가쿠슈인 학습원을 졸업한 후, 일본 해군 사관학교 제14기(45명 중 35등)를 졸업했다. 그의 동기로는 훗날 일본 내각총리대신이 된 스즈키 간타로가 있었다.[3]

소위로 임관한 오가사와라는 청일 전쟁에서 순양함 ''다카치호''에 탑승하여 압록강 해전에 참전했다. 이후 ''아마기''에 복무하다 해군 참모 본부 기록부로 전출되어 전쟁 중 해군 작전에 대한 공식 기록을 작성하는 임무를 맡았고, 이는 1903년에 출판되었다. 러일 전쟁제1차 세계 대전까지 해군 정보 장교로 참모 본부에서 계속 복무했으며, 1918년 중장으로 진급했다. 1903년 ''지요다''의 부관, 1912년 ''도키와'' 및 전함 ''가토리''의 함장을 역임하며 1년 동안 현역으로 복무했다.[4]

아키야마 사네유키, 사토 데쓰타로와 함께 오가사와라는 연합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의 측근이었다. 당시 해군 참모 대학 강사였던 스즈키 간타로는 앨프레드 테이어 메이한의 저서 ''해양 세력의 역사에 미치는 영향''의 영어 원본과 일본어 번역본이 어렵다고 하자, 이토 스케유키 해군 참모총장의 지시를 받아 새로운 번역본을 썼다. 그 결과는 메이한의 저서를 일본 역사의 사례를 들어 설명한 간결한 버전이었으며, 1898년에 출판되었다. 이 책은 해군 예산 증액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얻는 데 사용되었으며, 제국 전역의 중등학교에 배포되었다. 오가사와라는 압록강 해전에서의 자신의 경험을 사용하여 메이한의 제해권 개념과 삼국 간섭을 일본의 해양 취약성의 예로 제시했다.[5]

오가사와라는 나중에 해군 대학 강사가 되어 해양 세력의 중요성을 계속 강조했다. 그는 1921년 예비역으로 편입되었지만 도고의 측근으로 남아 1927년 제네바 해군 군축 회의와 1930년 런던 해군 군축 조약에서 제안된 해군 감축에 강력히 반대했다.[6]

1889년 해군 소위로 임관하여 "닛신" 분대사가 되었다. "텐조" 승무를 거쳐, 1891년부터 1892년까지 해군대학에서 병종 학생으로 수학했다. "야에야마" 승무를 거쳐, 1893년 "다카오" 분대장으로 취임하여 청일 전쟁에 출정, 황해 해전에 참가하였다.

1895년 "텐조" 분대장으로 옮겨간 후, 군령부에 출사하여 청일전사 편찬위원이 되어 군사사에 관한 문필 활동을 시작했다. 1896년 군령부 첩보과원에 취임하여 군령부 출사로 옮겼다.

1899년 해군 소령으로 진급했다. 1902년 "아사마" 분대장으로 옮겨, "치요다" 부장을 거쳐, 1904년 군령부 참모로 취임하여 러일 전쟁을 맞이했다. 같은 해 7월, 해군 중좌가 되었다. 1905년 도고 헤이하치로 지휘 하에 일본 연합함대가 대승을 거둔 일본해 해전에 대해 도쿄에서 강연을 하여 "당일 도고 대장이 사용한 전법이 정자 전법"이라고 말한 것이 다음날 『아사히 신문』에 보도되면서, 일본해 해전의 승리 요인이 적 함대의 진로를 막는 정자 전법이었다는 것이 널리 믿어지는 계기가 되었다[12](일본해 해전#전술 참조).

1908년 해군 대좌로 진급했다. 1911년 군령부 출사 겸 참모로 발령받아, "도키와", "가토리" 각 함장, 군령부 출사 겸 참모를 역임했다.

다이쇼 3년(1914년) 해군 소장으로, 1918년 해군 중장으로 진급하여 대기. 1919년 휴직하고, 1921년 예비역 편입이 되었다.

2. 3. 해군 사상가 및 저술 활동

오가사와라 나가나리는 청일 전쟁러일 전쟁에서 해군 장교로 복무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까지 해군 정보 장교로 참모 본부에서 근무했다. 1918년에 중장으로 진급했다.[1] 암호암호 해독 전문가였지만, 제독 계급에 오른 시점에는 해군 역사에 대한 다채로운 저술로 "문학 제독"이라는 별명을 얻었다.[1]

아키야마 사네유키, 사토 데쓰타로와 함께 오가사와라는 연합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의 측근이었으며, 앨프레드 테이어 메이한의 해군 전략을 초기에 지지했다. 당시 해군 참모 대학 강사였던 스즈키 간타로 제독은 메이한의 저서인 ''해양 세력의 역사에 미치는 영향''의 영어 원본이 이해하기 어렵다고 고백했고, 기존의 일본어 번역본이 고풍스럽고 화려한 문체로 쓰여져 해군 사관생도조차 읽기 힘들다고 불평했다. 당시 소령이었던 오가사와라는 이토 스케유키 해군 참모총장의 지시를 받아 새로운 번역본을 썼다. 그 결과는 메이한의 저서를 일본 역사의 사례를 들어 설명한 책으로, 1898년에 출판되었다. 이 책은 해군 예산 증액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얻는 데 사용되었으며, 제국 전역의 중등학교에 배포되었다. 오가사와라는 압록강 해전에서의 자신의 경험을 사용하여 메이한의 제해권 개념과 삼국 간섭을 일본의 해양 취약성의 예로 제시했다.[5]

오가사와라는 나중에 해군 대학 강사가 되어 해양 세력의 중요성을 계속 강조했다. 그는 1921년 예비역으로 편입되었지만 도고의 측근으로 남아 1927년 제네바 해군 군축 회의와 1930년 런던 해군 군축 조약에서 제안된 해군 감축에 강력히 반대했다.[6]

1905년 6월 29일, 도고 헤이하치로 지휘 하에 일본의 연합함대가 대승을 거둔 일본해 해전에 대해 도쿄에서 강연하여 "당일 도고 대장이 사용한 전법이 정자 전법"이라고 말한 것이 다음날 『아사히 신문』에 보도되면서, 일본해 해전의 승인이 적 함대의 진로를 막는 정자 전법이었다는 것이 널리 믿어지는 계기가 되었다[12](일본해 해전#전술 참조).

오가사와라는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전기를 담은 ''도고 제독의 생애''의 저자였다.[9] 이 책은 1921년에 처음 출판되었다.

그의 저서는 다음과 같다.

제목출판일출판사비고
신작 금파조루리1892-08학원회
해전일록1895-12춘양당
해전일록 (재판)1896-04춘양당
제국 해군사론1898-10춘양당
영황 대관식참례 도영일록1903-04군사교육회
일본 제국 해상 권력사 강좌1904-09춘양당
일본 제국 해상 권력사 강좌2003-03용계서사메이지 후기 산업 발달사 자료 제669권 제12기 경제·사회 일반편 6, ISBN 9784844754657
러일 전쟁 군사 담편1905-03춘양당
여순전화1905-05금항당
도고 원수 상세1921-09춘양당
세 손질1923-06춘양당
관음이야기1926-03춘양당
도고 원수 상세1926-05춘양당
도고 원수 상세 (4판)1927-02춘양당
철앵 수필1926-08실업지일본사
노기 장군과 도고 원수1927-07흥문사소학생 전집 제79권
철앵만담1928-10와세다 대학 출판부
추억을 말하다1929-05실업지일본사
노기 장군과 도고 원수1929-10흥문사소학생 전집 제1권
대해전 비사 황해 해전편1929-11실업지일본사
격멸 일본해 해전 비사1930-05실업지일본사
격멸 일본해 해전 비사 (30판)1930-05실업지일본사
성장 도고 헤이하치로 전1931-08개조사위인전 전집 제1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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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편1936-05유잔카쿠 출판유취전기대일본사 제13권
해군편1981-03유잔카쿠 출판유취전기대일본사 제13권, ISBN 9784639000327
성장 도고 전전 (제1권)1940-10성장 도고 전전 간행회
성장 도고 전전 (제2권)1940-12성장 도고 전전 간행회
성장 도고 전전 (제3권)1941-02성장 도고 전전 간행회
략전 도고 원수1941-05남방출판사
성장 독본1941-12남방출판사
정전오쿠무라 이오코1942-02남방출판사
원수 이토 스케유키1942-06고 이토 원수 전기 편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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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군의 선각무라카미 요시히로1940-01오늘의 문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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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4. 말년

황태자 히로히토의 교육을 담당하는 동궁(어학문소 간사)를 맡았던 오가사와라는, 총재였던 도고 헤이하치로와 친해져 그의 전기나 대중을 위한 전기 소설 『격멸 일본해 해전 비사』 등을 간행하여 도고의 신격화에 기여했다.[12] 1929년 "소년 도고회" 발족에 도고와 함께 참석했으며, 도고 사후에는 도고 신사 건립을 호소했다.[12]

다이쇼 10년(1921년) 4월 예비역 편입 후 궁중 고문관에 취임하여, 쇼와 20년(1945년) 11월까지 재임했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패배하고 연합군 점령 하였던 쇼와 22년(1947년), 공직 추방 처분을 받아 이즈에 칩거했다. 쇼와 33년(1958년), 사망했다.

  • 1930년 쇼와 5년, 자신이 원작한 도고 헤이하치로와 일본해 해전을 그린 닛카쓰 25주년 기념 영화 『격멸(撃滅)』이 제작되었다. 해당 영화의 감독은 장남 오가사와라 묘호(小笠原明峰)이며, 차남 오가사와라 쇼지로(小笠原章二郎)가 오가사와라 나가나리(小笠原長生)를 연기했다.
  • 2·26 사건 발생 당일 아침,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 가토 간지, 마자키 진자부로는 후시미노미야 저택에서 협의를 진행했다. 나가나리 역시 후시미노미야 저택에 달려갔으며, 이후 반란군을 방조한 혐의로 헌병대의 심문을 받았다.
  • 아버지의 권유로 소년 시절 주 1회, 네기시에 살던 한학자 나카네 스미요시의 집에 다녔다. 제자를 받지 않던 나카네가 오가사와라를 받아들일 때 매주 토요일 밤 날씨가 어떻든, 탈것을 타지 않고, 자신의 발로 다닐 것을 조건으로 했기 때문에, 눈이 오는 날 게다의 코가 끊어졌을 때에도 맨발로 울면서 다녔다고 한다.
  • 1890년, 해군 소위로 포술 연습함 "아마기"에 탑승하여 시미즈항 밖에서 훈련을 하던 시기에, 같은 방에서 기거하기도 했던 히로세 다케오가 "시미즈에 가서 지로초를 만나지 않는 멍청이가 있을까"라고 권유하여, 히로세의 소개장을 가지고 시미즈 지로초와 담화를 나누고, 이후에도 친하게 교류했으며, 다음 해에는 "아마기"에 지로초를 초대했다.
  • 제35대 요코즈나인 후타바야마 사다지가 단발식을 했을 때 가위를 넣은 사람은 10명 정도였는데, 그 중 한 명이 오가사와라였으며, 군인으로 후타바야마의 땋은 머리에 가위를 넣은 유일한 인물이다.

3. 평가

(이전 출력이 비어있으므로 수정할 내용이 없습니다. 원본 소스가 제공되면 평가 섹션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4. 가족 관계

구 분내용
아버지오가사와라 나가유키 (1822년 ~ 1891년) - 가라쓰번 오가사와라 가문 세습 (번주라고도 함)
어머니오가사와라 미와코 - 마쓰다 우센의 딸
부인히데코 (1879년 ~ 1947년) - 전 마에바시번주, 백작마쓰다이라 나오카타의 장녀
장녀타케코 (1899년 ~ 1979년) - 가쿠슈인 여자학부 졸업. 히사이번주 17대 도도 타카요시의 장남, 도도 타카히로 자작의 부인[28]
장남나가타카 (1900년 ~ 1946년) - 오가사와라 메이호라 칭하며 영화 감독이 되었고, 오가사와라 프로덕션을 설립
차남나가히데 (1902년 ~ 1974년) - 구스노키 에이지로 (후에 오가사와라 쇼지로)라 칭하며 오가사와라 프로덕션 전속 배우가 되었다. 그의 차남 오가사와라 가즈노리는 오가사와라 가문 16대 당주를 이었다.
삼녀노부코 (1906년 ~ 1988년) - 혼조 무네요시의 장남, 무네히사 자작의 부인. 이후 이마이 타이조의 부인
사녀히사코 (1908년 ~ ?) - 레나운 창업자 사사키 야소하치의 장남, 류이치의 부인
삼남나가요시 (1915년 2월 ~ 1946년 9월) -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
오녀히로코 (1916년 ~ 1949년) - 남편 마쓰이 히사시 (마쓰이 신스케 삼남)과의 딸 마쓰이 야스코 (마키 카즈코)는 여배우. 핑크 영화에 다수 출연
사남나가카쓰 (1919년 ~ 1994년) - 오가사와라 가문 15대 당주. 장남과 차남이 잇달아 영화계에 진출했기 때문에 장남은 폐적, 차남은 분가 취급이 되었고, 삼남이 사망했기 때문에 가독 상속자가 되었다.[29]
여동생


5. 기타


  • 1930년 (쇼와 5년), 자신이 원작한 도고 헤이하치로와 일본해 해전을 그린 닛카쓰 25주년 기념 영화 『격멸(撃滅)』이 제작되었다. 해당 영화의 감독은 장남 오가사와라 묘호(小笠原明峰)이며, 차남 오가사와라 쇼지로(小笠原章二郎)가 오가사와라 나가나리(小笠原長生)를 연기했다.
  • 2·26 사건 발생 당일 아침,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 가토 간지, 마자키 진자부로는 후시미노미야 저택에서 협의를 진행했다. 나가나리 역시 후시미노미야 저택에 달려갔으며, 이후 반란군을 방조한 혐의로 헌병대의 심문을 받았다.
  • 아버지의 권유로 소년 시절 주 1회, 네기시에 살던 한학자 나카네 스미요시의 집에 다녔다. 제자를 받지 않던 나카네가 오가사와라를 받아들일 때 매주 토요일 밤 날씨가 어떻든, 탈것을 타지 않고, 자신의 발로 다닐 것을 조건으로 했기 때문에, 눈이 오는 날 게다의 코가 끊어졌을 때에도 맨발로 울면서 다녔다고 한다.
  • 1890년, 해군 소위로 포술 연습함 "아마기"에 탑승하여 시미즈항 밖에서 훈련을 하던 시기에, 같은 방에서 기거하기도 했던 히로세 다케오가 "시미즈에 가서 지로초를 만나지 않는 멍청이가 있을까"라고 권유하여, 히로세의 소개장을 가지고 시미즈 지로초와 담화를 나누고, 이후에도 친하게 교류했으며, 다음 해에는 "아마기"에 지로초를 초대했다.
  • 제35대 요코즈나인 후타바야마 사다지가 단발식을 했을 때 가위를 넣은 사람은 10명 정도였는데, 그 중 한 명이 오가사와라였으며, 군인으로 후타바야마의 땋은 머리에 가위를 넣은 유일한 인물이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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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관보 叙任及辞令 1897-12-21
[20] 관보 叙任及辞令 1902-12-22
[21] 관보 叙任及辞令 1910-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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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관보 叙任及辞令 1916-07-19
[24] 관보 叙任及辞令 1932-01-16
[25] 관보 辞令二 1941-10-23
[26] 관보 叙任及辞令 1902-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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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웹사이트 藤堂高寬 http://jahis.law.nag[...] 人事興信録 1928-07
[29] 서적 華族総覧 講談社現代新書
[30] 서적 古荘四郎彦の素顔 酣灯社 1955
[31] 서적 아버지와 나와 2·26 사건 고단샤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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