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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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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자서는 춘추 시대 초나라 출신의 인물로, 초나라의 멸망에 대한 복수를 위해 오나라에서 활약했다. 그는 초나라 태자 건의 태부였으나, 간신의 모함으로 초나라를 탈출하여 오나라에 망명했다. 오자서는 오나라의 공자 광(훗날 오왕 합려)을 섬기며 손무와 함께 오나라의 부국강병을 이끌었고, 초나라를 공격하여 수도 영을 함락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오왕 부차와 갈등을 겪다 자결했으며, 사후에는 물의 신으로 숭배받았다. 그의 이야기는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되었으며, '일모도원'과 '도행역시' 등의 고사성어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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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서
기본 정보
중국어 간체伍子胥
중국어 정체伍員
병음Wǔ Zǐxū
별칭Wu Yun
별칭 (정체)伍員
별칭 (병음)Wǔ Yún
별칭 (오나라 작위)Shenxu
별칭 (병음)Shēnxū
별칭 (당나라 칭호)영렬왕
별칭 (병음)Yīngliè Wáng
별칭 (강의 신)도신
별칭 (병음)Tāo Shén
쑤저우 판문에 있는 오자서 동상
쑤저우에 있는 오자서 동상
인물 정보
출생지초나라, 건계
사망기원전 484년
사망 장소오나라
직업장군, 정치인
섬긴 군주합려, 부차
아버지오사
형제오상, 오자서

2. 약력

오자서(伍子胥)에 대한 역사 기록은 사마천의 ''사기'', 손자의 ''손자병법'', ''여씨춘추'' 등 유명한 중국 고전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곡량전'', ''공양전''에도 언급된다.[3] 기록마다 차이가 있는데, 이는 그의 역사적 인물에 민간 설화가 상당한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오자서는 초나라 출신이나, 간신 비무기의 모함으로 아버지와 형을 잃고 오나라로 망명하여 복수를 다짐했다. 오나라 왕족 광(光)을 섬겨 그가 합려로 즉위하도록 도왔다.[3]

합려는 오자서를 측근으로 삼고, 손무를 장군으로 임명했다. 오자서는 손무와 함께 합려를 보좌하며 오나라를 부국강병하게 만들고 초나라를 공격하여 수도 영을 함락시켰다. 이 과정에서 오자서는 초 평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채찍질하는 복수를 했다.[3]

합려 사후 아들 부차가 왕위에 오르자, 오자서는 부차를 보좌하며 월나라를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부차는 백비의 말에 넘어가 오자서를 멀리했다. 결국 부차는 오자서에게 자결을 명했고, 오자서는 죽으면서 자신의 눈을 뽑아 오나라 성문에 걸어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보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2. 1. 초나라에서의 비극과 오나라로의 망명

간신 비무기는 초나라 평왕에게 태자 건의 스승인 오사가 반란을 꾀하고 있다고 모함하였다. 평왕은 오사를 가두고, 오사의 아들 오상과 오자서를 불러들여 모두 죽이려 하였다. 오자서는 평왕의 계략을 간파하고 도망쳤지만, 오상은 아버지 오사와 함께 죽임을 당했다.[3] 오사는 죽기 전 오자서가 살아남아 복수할 것이라 예언했다.

오자서는 복수를 다짐하며 태자 건과 함께 송나라를 거쳐 정나라로 망명했다. 정나라에서 태자 건은 진나라의 사주를 받아 반역을 꾀하다 정공에게 살해되었다.[3] 오자서는 태자 건의 아들 승과 함께 오나라로 망명길에 올랐다.

오자서는 초나라의 추격을 피해 장강을 건너야 했다. 초나라는 오자서의 목에 5만 석의 봉록을 현상금으로 내걸었지만, 한 늙은 사공의 도움으로 무사히 장강을 건널 수 있었다.[3] 오자서는 값비싼 검을 주려 했으나, 사공은 "내가 재물을 탐했다면 5만 석의 봉록을 받고 말았을 것이오."라며 거절하였다.

쓰키오카 요시토시가 그린 오자서의 탈출, 우키요에
[4]

전설에 따르면, 오자서는 오나라로 가는 마지막 관문인 조관에서 의사 동고공의 도움을 받았다. 동고공은 오자서를 일주일 동안 숨겨주었고, 그 사이 오자서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머리가 하얗게 세고 얼굴이 늙어 변장한 것처럼 되었다. 이는 뜻밖의 행운으로 작용하여 오자서가 탈출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4]

오나라에 도착한 오자서는 왕족 광(光)을 섬겼다. 광은 사촌 동생 요에게 왕위를 빼앗긴 인물이었다. 오자서는 광에게 전제(專諸)를 소개하여 요를 암살하고 왕위에 오르도록 도왔다. 이 사람이 바로 오왕 합려이다.[3]

2. 2. 오나라의 부국강병과 초나라 복수

광공자의 신뢰를 받는 조언자가 된 오자서는 그의 삼촌[5](또는 사기에 따르면 사촌)인 오나라 요왕 암살을 도왔다. 이후 광공자는 왕위에 올라 오왕 합려가 되었다.[6]

기원전 515년, 초 소왕 통치 시기, 오나라 주력군이 초나라를 공격하는 동안, 오왕 료의 왕위 계승을 부당하게 여긴 광은 쿠데타를 일으켜 료를 암살했다. 광은 합려로 즉위했고, 오자서를 측근으로 삼았다. 오자서는 손무손자병법을 헌상하고 7번이나 등용을 설득하여, 손무는 합려에게 장군으로 임명되었다.

오자서는 손무와 함께 합려를 보좌하며 오나라 국내 정비에 힘썼다. 초나라에 대해서는 소규모 병력으로 국경을 습격하고, 초나라 군대가 오면 물러나는 방식으로 국력을 소모시켰다.

기원전 506년, 합려는 오자서와 손무에게 초나라 공격을 문의했고, 오자서는 당나라와 채나라를 아군으로 끌어들여 초나라를 침공할 것을 제안했다. 백거 전투에서 오나라는 연전연승하여 초나라 수도 영을 함락시켰다. 평왕은 이미 사망했기에, 오자서는 왕릉을 파헤치고 평왕의 시체를 300번 채찍질하여 원한을 풀었다. 이 사건은 "시체에 채찍질하다"라는 고사의 어원이 되었다. 옛 친구 신포서가 이를 책망하자, 오자서는 "나는 해가 저물고 길이 멀어, 나는 일부러 거꾸로 행동하고 그에 반하는 일을 한다(吾日暮塗遠、吾故倒行而逆施之)"라고 답했다. 이는 "해가 저물고 길이 멀다", 사자성어 "도행역시"의 고사가 되었다.

기원전 505년, 윤상의 오나라 공격과 신포서가 진나라의 원군을 얻어내면서 오나라는 불리해졌다. 합려는 초나라에 머물렀지만, 동생 부개가 오왕을 자칭하여 초나라에서 철수하고 부개를 쫓아냈다.

오나라로 돌아온 오자서는 합려를 보좌하며 오나라를 강국으로 만들었다. 이웃 나라 월나라를 공격할 것을 진언했는데, 월나라가 급속도로 국력을 키우고 있어 장래의 화근이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합려는 이를 받아들여 오나라의 부국강병에 힘썼다.

기원전 496년, 월왕 윤상의 부고를 들은 합려는 오자서의 진언에 따라 월나라를 공격했으나, 구천의 가신 범려에게 패하고, 영고부가 쏜 화살에 다리를 부상당해 파상풍으로 상태가 악화되어 병상에 눕게 되었다.

2. 3. 오왕 부차와의 갈등과 죽음

합려의 뒤를 이어 아들 부차가 왕위에 오르자, 오자서는 부왕의 복수를 다짐하는 부차를 계속 보좌하였다. 기원전 494년, 월나라와의 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후, 오자서는 구천을 죽여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지만, 부차는 간신 백비의 말을 듣고 월나라를 속국으로 삼는 선에서 마무리했다.[12] 이후 오자서는 월나라를 지속적으로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중원 진출을 통해 패자가 되려는 부차와의 갈등은 깊어졌다. 월나라범려서시와 백비를 이용하여 부차가 오자서를 모함하게 만들었다.

부차가 북쪽으로 영토를 넓히기 위해 국력을 소모하는 동안, 오자서는 “제나라는 피부병이고 월나라는 속병이니, 패권주의를 버리고 내실을 다져야 합니다”라고 간언했지만, 부차는 이를 무시했다.[13] 백비 또한 오자서를 싫어하여 부차와 오자서 사이를 이간질했다.

오자서는 월나라에게 화를 입을 것을 우려하여 제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아들을 제나라에 맡겼다. 그러나 자신은 오나라를 버리지 않겠다며 돌아왔고, 이 일은 부차에게 알려져 문제가 되었다. 결국 부차는 오자서에게 명검 촉루를 내려 자결을 명했다. 오자서는 분노하며 자신의 무덤에 가래나무를 심고, 두 눈을 뽑아 월나라 방향의 성문에 걸어두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했다. 이는 죽어서도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보겠다는 저주였다.

부차는 오자서의 말에 격노하여 그의 시신을 가죽 자루에 담아 강물에 버렸지만, 사람들은 그를 불쌍히 여겨 근처에 사당을 지어주었다. 오자서가 죽은 후, 오나라는 파멸의 길을 걷게 되었고, 와신상담구천의 월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부차는 죽기 전 오자서를 볼 낯이 없다며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자결했다고 한다.

3. 주요 업적 및 평가

오자서는 굴원과 비슷하게 군주에게 신중한 조언을 하는 강직한 신하로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점에서 "유교적 순교자"로 여겨졌다.[14] 유교 문인들은 두 사람 모두를 옹호했지만, 오자서가 유교 사상가들에게 더 선호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굴원이 더 인기를 얻어 물의 신으로서 오자서를 대체했다.[14]

사마천은 《사기》에서 오자서의 이야기를 상세히 다루면서, 더 큰 목표를 위해 명예로운 자살 대신 거세를 선택한 자신의 결정을 정당화하는 데 오자서를 예시로 들었다.

오자서상(소주 반문 오자서 사당)


오자서는 격정적인 인물로, 이러한 면모 덕분에 큰 공적을 세웠지만, 결국 주군과의 대립으로 자결에 이르렀다. 반면, 범려는 냉정하게 시대의 흐름을 읽고 월나라를 떠나 제나라에서 큰 부자가 되었다. 후세 사람들은 범려의 신중한 처세에 감탄하면서도, 오자서의 격렬한 삶에도 애정을 쏟았다.[14]

조조는 관도 전투에서 항복한 장합 등을 맞이할 때 오자서의 최후를 언급하며, 오자서가 섬기는 군주를 잘못 선택했다고 말하면서도, 장합의 항복은 미자계가 은나라를 배신하고 주나라를 섬긴 것이나 한신항우를 떠나 유방을 섬긴 것과 같은 올바른 행동이라고 칭찬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오자서에 대해 "원한의 해독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왕조차 신하에게 원한을 품게 하는 행위를 할 수 없다."라고 평가했다. 또한 "작은 의를 버리고 큰 치욕을 씻어내어, 그 명성을 후세에까지 남겼다. 비장한 인생이 아닌가."라며 그의 인내와 공명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오자서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춘추곡량전』에서는 오자서의 복수가 군신의 예에 어긋나며 왕을 섬기는 도리를 잃었다고 비판한다.[15] 이처럼 오자서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는데, 아버지와 형의 원수를 갚은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받지만, 옛 군주를 적으로 삼고 시신을 채찍질하는 등 지나치게 격렬한 복수 방식은 혐오감이나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15]

4. 사후

당나라 때 오자서는 영렬왕(英烈王)으로 추존되었다. 오자서는 원대한 공적을 세웠지만, 군주와 대립하여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반면, 범려는 시류를 읽고 제나라로 가서 부호가 되었다고 한다.[18]

조조관도 대전 때 투항해 온 장합 등에게 오자서의 최후를 언급하며, 미자계가 은나라를 배반하고 주나라를 섬긴 것이나 한신항우를 떠나 유방을 섬긴 것과 같은 정당한 행동이라고 칭찬하며 그들을 도정후에 봉했다.

사마천사기에는 오자서의 이야기가 '오자서 열전'으로 기록되어 있다.

오자서는 동중국에서 파도신의 의미인 타오선(Taoshen)으로 숭배받고 있다.[7] 그는 해안파의 신으로 여겨졌으며, 특히 첸탕강 근처에서 숭배받았고, 타이완 도교 신자들에게는 다섯 물의 불멸의 왕 중 한 명으로 숭배받고 있다.[9] 합려왕을 도와 현대 쑤저우를 설계하는 데 기여한 오자서는 물레방아를 발명한 문화 영웅으로 여겨지기도 한다.[9]

단오절은 굴원의 자살과 관련이 있지만, 일부 중국인들은 오자서의 죽음을 기념하는 날이라고 믿는다. 오자서는 강제로 자살한 후 시신이 강에 던져졌는데, 이러한 오자서를 물의 신으로 숭배하는 관행은 한나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한나라 시대의 오자서 수신 신앙은 용선 경주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5. 기타

오자서는 동중국에서 파도신의 의미인 濤神|도신중국어으로 숭배받고 있다.[7] 그는 해안파의 신으로 오랫동안 여겨졌으며, 특히 항저우 근처의 첸탕강에서 숭배받았고, 타이완 도교 신자들에 의해 다섯 물의 불멸의 왕 중 한 명으로 계속 숭배받고 있다.[9] 합려왕을 도와 현대 쑤저우(당시 "합려성"으로 알려짐)를 설계하는 데 기여했으며, 때때로 물레방아를 발명한 문화 영웅으로 여겨지기도 한다.[9]

베이징을 비롯한 여러 중국 극에는 오자서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여러 이야기가 있으며, 그중 하나가 《문소관》(文昭关|문소관중국어)이다.

쑤저우에 오자서를 기리는 기념관이 최근 세워졌다.[10]

5. 1. 민간 설화 및 전설

단오절(음력 5월 5일에 기념)은 일반적으로 시인 굴원(기원전 278년 사망)의 자살과 관련이 있지만, 일부 중국인들은 원래 오자서(기원전 484년)의 죽음을 기념하는 날이라고 믿는다. 그는 강제로 자살한 후 시신이 강에 던져졌다.[3]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주의 사항이 있다. 우선, 오자서를 물의 신으로 숭배하는 관행은 한나라(기원전 202년~서기 220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6세기 자료("형초세시기")는 "[오]자서가 올바른 선례"라고 주장하며, 가짜 한나라 시대의 문서 증거("효녀 처녀 [조아]의 비문")를 인용한다. 비문은 서기 153년에 邯鄲子禮/邯鄲淳|한단자례/한단순중국어라는 남자가 썼다고 전해지지만, 학자들은 그러한 비문의 존재는 조작되었으며, 서예가의 사본 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이 사본은 서기 358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게다가, 한나라 시대의 오자서 수신 신앙은 용선 경주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즉, 인용된 오자서 신앙에 대한 증거는 용선 경주는커녕 어떤 종류의 강 배 경주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 학자에 따르면 축제 달력에 대한 6세기 주석에서는 "보트 경주와 밀접한 유사점"이 언급되었다. 범선은 오자서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의식 무용수를 태웠다는 기록이 있다.

오자서와 굴원은 물에 몸을 던졌다는 점뿐만 아니라 "유교적 순교자"라는 점에서도 유사하며, 두 사람 모두 군주에게 신중한 조언을 하는 강직한 신하로 행동한 결과로 죽음을 맞이했다. 두 사람 모두 "유교 문인"들에 의해 옹호되었지만, 오자서가 유교 사상가들에게 더 선호받았던 것으로 보이며, 이후 굴원이 더 인기를 얻어 물의 신으로서 오자서를 대체했다.

일설에 따르면, 단오절은 오자서의 기일이기 때문에, 5월 5일의 단오절은 오자서를 기념하는 날이 되었다고 한다.

5. 2. 관련 유적

오자서는 동중국에서 파도신의 의미인 타오선(濤神|도신중국어)으로 숭배받고 있다.[7] 그는 또한 해안파의 신으로 오랫동안 여겨졌으며, 특히 항저우 근처의 첸탕강에서 숭배받았고, 타이완 도교 신자들에 의해 다섯 물의 불멸의 왕 중 한 명으로 계속 숭배받고 있다.[9] 합려왕을 도와 현대 쑤저우 (당시 "합려성"으로 알려짐)를 설계하는 데 기여했으며, 오자서는 때때로 물레방아를 발명한 문화 영웅으로 여겨지기도 한다.[9]

베이징을 비롯한 여러 중국 극에는 오자서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여러 이야기가 있으며, 그중 하나가 《문소관》(文昭关중국어)이다.

쑤저우에 오자서를 기리는 기념관이 최근 세워졌다.[10]

5. 3. 대중문화

오자서는 동중국에서 파도신의 의미인 Taoshen|타오선중국어으로 숭배받고 있다.[7] 그는 해안파의 신으로 오랫동안 여겨졌으며, 특히 항저우 근처의 첸탕강에서 숭배받았고, 타이완 도교 신자들에 의해 다섯 물의 불멸의 왕 중 한 명으로 계속 숭배받고 있다.[9] 합려왕을 도와 현대 쑤저우(당시 "합려성"으로 알려짐)를 설계하는 데 기여했으며, 오자서는 때때로 물레방아를 발명한 문화 영웅으로 여겨지기도 한다.[9]

베이징을 비롯한 여러 중국 극에는 오자서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여러 이야기가 있으며, 그중 하나가 《문소관》(文昭关|문소관중국어)이다.

쑤저우에 오자서를 기리는 기념관이 최근 세워졌다.[10]

참조

[1] 링크 http://140.111.34.46[...]
[2] 링크 http://www.zdic.net/[...]
[3] 서적 The Cloudy Mirror
[4] 웹사이트 東周列國志/第072回 - 维基文库,自由的图书馆 https://zh.wikisourc[...] 2024-09-02
[5] 논문 吴王僚和公子光的关系考辨 http://xuewen.cnki.n[...] 2020-05-26
[6] 웹사이트 伍子胥列传 (Biography of Wu Zixu) http://www.guoxue.co[...] 2011-11-30
[7] 간행물 eBeijing http://www.ebeijing.[...] Beijing Foreign Affairs Information Center 2016-12-15
[8] 간행물 Poetry and Painting in Song China: The Subtle Art of Dissent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2000
[9] 간행물 Official site http://www.tainanmaz[...] Grand Matsu Temple 2007
[10] 링크 archived https://web.archive.[...]
[11] 웹사이트 物事を行うに当たって、正しい道理に逆らった手段・方法を採ること。転じて、時代の風潮に逆らうよくない行いにも用いる。 https://imidas.jp/fo[...] イミダス・集英社
[12] 문서 闔閭には早世した長男の太子がいた(『史記索隠』が引く『竹書紀年』では「太子波」、『春秋左氏伝』では「太子終纍」)。他に三男の公子子山がいた(『春秋左氏伝』)。
[13] 문서 『春秋左氏伝』の魯の昭公20年(紀元前522年)にある「楚・伍氏」の系譜によると、子の名は「伍豊」。また、曾祖父の名が「伍参」、祖父の伍挙の別名が「伍椒挙」、叔父の名が「伍椒鳴」と記されている。
[14] 문서 呉の都であった姑蘇は現在の蘇州市であり、伍子胥に因んだ地名が多い。また、2006年には伍子胥の墓があったとされる蘇州市呉中区胥口鎮に、地元企業(日系も含む)も協賛して胥王廟が建設されているなど、地元での人気は今でも根強い。
[15] 서적 中国の復讐者たちーともに天を載かず 大修館書店 2009
[16] 뉴스 端午の節句 http://j.people.com.[...] 2016-08-06
[17] 뉴스 端午節について知らねばならぬこと 端午節の由来 http://japan.visitbe[...] 2016-08-06
[18] 문서 오의 수도에서 만난 고소는 현재의 쑤저우 시이며, 오자서에 연관된 지명이 많다. 또, 2006년에는 오자서의 무덤이 있었다고 여겨지는 쑤저우 시 서구진(zh)에 현지 기업도 협찬해 서왕묘가 건설되고 있는 등, 현지에서의 인기는 지금도 뿌리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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