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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다이토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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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키다이토섬은 필리핀해에 위치한 융기 환초로, 오키나와현 나하시에서 북서쪽으로 약 408km 떨어진 무인도이다. 1543년 발견 이후 여러 이름으로 불리다가 1900년 일본 제국에 편입되었으며, 1907년 개척자들이 정착했다. 20세기 초 인광석 채굴로 인해 지형이 크게 변형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군사적 요충지로 이용되었다. 종전 후에는 미국의 폭격 훈련장으로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자위대 훈련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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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다이토섬 - [지명]에 관한 문서
지도
오키다이토 제도
오키다이토섬의 위치
기본 정보
공식 명칭오키다이토지마 (沖大東島)
별칭라사섬 (ラサ島, Rasa Island)
위치필리핀해 (태평양)
좌표24°28′N 131°11′E
소속 제도다이토 제도
면적1.19 km²
해안선 길이4.5 km
최고 고도31.1 m
오키다이토지마 항공 사진
항공 사진 (1978년)
행정 구역
국가일본
오키나와현
시마지리군
기타다이토촌
인구0명 (무인도)
시간대
시간대UTC+9

2. 지리

오키다이토섬은 미나미다이토섬에서 남쪽으로 약 110km, 키타다이토섬에서 남쪽으로 약 160km 떨어진 비교적 고립된 산호섬이다. 오키나와현 나하시에서는 북서쪽으로 408km 떨어져 있다.[3][4] 섬은 기타다이토섬과 유사한 삼각형 모양이며, 둘레는 약 4.34km, 면적은 약 1.19km2이다. 섬의 최고 지점은 북부에 위치하며 해발 31.1m이다.[5] 섬 중앙부는 주변보다 10~15m 정도 낮은 함몰 지형을 이루고 있으며, 해안선은 절벽으로, 주변은 산호초로 둘러싸여 있다.

2. 1. 기후

오키다이토섬은 매우 더운 여름과 온화한 겨울을 보이는 습윤 아열대 기후 (쾨펜 기후 구분 ''Cfa'')를 가지고 있다. 강수량은 연중 상당하며, 강수량이 가장 많은 달은 6월이고, 가장 적은 달은 2월이다. 섬은 잦은 태풍의 영향을 받는다.[6] 전전 관측 기록에 따르면 연평균 기온은 24.0도이고, 연간 강수량은 1296.6mm이다. 여름에는 소나기가 많이 내리지만 강수량은 비교적 적다.[6] 7월부터 10월은 태풍 시즌이며, 라사 섬 광업소에 의한 인광산이 가동되었던 시기에는 광석 수송 등이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았다.[7]

2. 2. 지형 형성

오키다이토섬은 융기된 환초로,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가파른 해안 절벽과 함몰된 중심부를 가지고 있다. 섬은 대략 삼각형 모양이며, 둘레는 약 4.5km이다. 20세기 초 광범위한 인산염 채굴과 미국 해군의 폭격 및 사격 훈련장으로 사용되어 표토가 거의 없고 나무도 없다.[3][4]

오키다이토섬은 필리핀해 북서부에 있는 오키다이토 해령의 최고 지점이다. 필리핀해판의 이동에 따라 오키다이토 해령은 북서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섭입대인 류큐 해구에 가까워지면 굴곡을 이루며 융기대가 형성된다. 오키다이토섬은 약 50만 년 전부터 60만 년 전에 해구 주변 융기대에 들어가 육화된 것으로 보인다.[10][11]

미나미다이토섬, 기타다이토섬환초가 융기한 융기 환초이며, 중앙부에 석호의 흔적인 명확한 함몰지가 형성되어 있다.[12] 반면 오키다이토섬은 중앙부에 함몰지가 있지만 주변 고지와의 고저차는 10~15m 정도로, 원래 환초와 같은 석호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규모는 작고 수심도 얕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융기 환초와 융기 탁상환초의 중간적 성질인 융기 준탁상환초로 분류되고 있다.[13]

융기가 진행되는 가운데 오키다이토섬에서는 해안 단구가 형성되었으며, 홍적세의 4개의 단구면이 확인된다. 오키다이토섬에서 해안 단구가 발달한 것은, 미나미다이토섬, 기타다이토섬에 비해 해산 부분의 경사가 완만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14]

육화가 진행되면서 오키다이토섬에서는 많은 바닷새가 서식하게 되었다. 바닷새의 배설물이 퇴적되어 구아노가 생성되고, 더 나아가 구아노 중의 인산이 석회암과 반응하여 인광석이 형성되어 갔다.[15][16][17] 1911년부터 1944년에 걸쳐 약 160만ton의 인광석이 채굴되었다.[18] 1978년 조사에 따르면, 인광석의 잔존 추정 매장량은 약 350만ton이다.[19] 인광석 채굴로 인해 섬의 지형은 크게 변형되었다.[20][21]

2. 3. 인광석 광상

오키다이토섬에서는 많은 바닷새가 서식하면서 바닷새의 배설물이 쌓여 구아노가 만들어졌다. 이 구아노 속의 인산 성분이 석회암과 반응하면서 인광석이 형성되었다.[15][16][17] 1911년부터 1944년까지 약 160만ton의 인광석이 채굴되었다.[18] 1978년 조사에 따르면, 인광석의 잔존 추정 매장량은 약 350만ton이다.[19]

1911년부터 1944년까지 이어진 인광석 채굴로 인해 오키다이토섬의 지형은 크게 변했다. 원래 섬 중심부는 해발 약 15미터 정도로 비교적 평평했지만, 채굴로 인해 큰 함몰이 생겨 가장 낮은 곳에서는 바닷물이 스며 나오게 되었다. 또한 섬 전체 지형도 표층의 인광석 채굴 때문에 암석이 울퉁불퉁하게 솟아오른 형태로 바뀌었다.[20][21]

3. 생태

1912년 야마다 겐타로의 보고에 따르면 오키다이토 섬의 동물 종류는 적으며, 파충류와 포유류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남다이토 섬, 기타다이토 섬에 서식하는 다이토큰박쥐는 오키다이토 섬에 서식하지 않았다.[36][37]

섬 안에는 눈 테두리가 많았으며,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아 쉽게 잡을 수 있었다. 계절에 따라 알바트로스 등이 날아와 번식하기도 했다.

곤충류로는 나비, 나방, 메뚜기, 잠자리 등이 발견되었고, 인간과 함께 유입된 것으로 보이는 파리, 모기, 벼룩도 발견되었다. 섬 내에는 야자게가 서식하고 있었지만, 맛이 좋아 남획되어 라사 섬 광업소 개소 약 1년 만에 그 수가 감소했다.[38]

3. 1. 식물상

오키다이토 섬의 식물상에 대한 조사는 1912년 라사 섬 광업소의 인광석 채굴 직후 모리오카 고등 농림 학교 야마다 겐타로 교수[22]와 1989년 류큐 대학 미야기 고이치 교수[23]가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1903년 오키나와 현 지사 나라하라 시게루의 다이토 제도 시찰 기록도 있다.[24][25]

1903년 나라하라 지사 일행은 해안 절벽 안쪽은 황폐한 풀밭이지만, 그 안쪽에는 아단 숲, 빈랑 숲이 있다고 보고했다.[26] 1912년 야마다 교수는 해수 부근에는 쇠비름 정도만 보이고, 안쪽에는 순비기나무 숲, 아단 숲, 섬 중심부에는 빈랑 순림이 펼쳐져 있다고 보고했다. 아단 숲과 빈랑 숲 사이에는 붉은나무, 먼나무, 무쿠이누비와 등 활엽수가 자라고 있었다.[27]

섬 중심부 빈랑 순림은 낮에도 어두웠고 풀은 거의 없었다. 빈랑은 한 평에 약 1.5그루 비율로 자랐고, 높이는 14.5m에 달했다.[28][29]

1912년 야마다 조사에서는 종자식물 42종, 양치식물 2종이 확인되었고, 식물 종류는 매우 적었다.[30][31] 미야기 고이치는 오키다이토 섬의 원생 식물이 섬이 작고 수계가 없어 빈약하지만, 미나미다이토 섬, 기타다이토 섬과 유사하다고 분석했다.[32]

라사 섬 광업소의 인광석 채굴은 섬 식생을 크게 변화시켰다. 1925년 시찰 기록에는 울창했던 빈랑 숲이 채굴로 인해 광업소 부근에만 남고, 서해안을 제외하고는 수목이 드물다고 보고되었다.[33] 1944년 채굴 최종기에는 높이 5m 이하 빈랑 13그루, 직원 주택과 해안부 약간의 풀밭만 남고, 나머지는 채굴 후 암석만 남아 초목이 거의 없었다.[34]

1989년 미야기 고이치 조사에서는 41종의 식물이 확인되었다. 식물상은 빈약했고, 대부분 해안부에 생육하며, 귀화 이입종이 15종(30% 이상)이었다. 하토마 섬, 야카비 섬, 구바 섬 등 비슷한 면적의 섬보다 종 수가 적고 귀화 이입종 비율이 높았다. 이는 인광석 채굴, 전후 사격장 사용 등 인위적 교란 때문으로 보인다.[35]

1989년 조사에서는 빈랑, 무쿠이누비와가 확인되지 않아 멸종된 것으로 추정된다. 섬 내 수림대는 없고, 초본성 식물 중 순비기나무, 아단 등 관목만 보일 뿐이다.

3. 2. 동물상

1912년 야마다 겐타로의 보고에 따르면 오키다이토섬의 동물 종류는 적으며, 파충류와 포유류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남다이토섬, 기타다이토섬에 서식하는 다이토큰박쥐는 오키다이토섬에 서식하지 않았다.[36][37]

섬 안에는 눈 테두리가 많았으며,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아 쉽게 잡을 수 있었다. 계절에 따라 알바트로스 등이 날아와 번식하기도 했다.

곤충류로는 나비, 나방, 메뚜기, 잠자리 등이 발견되었고, 인간과 함께 유입된 것으로 보이는 파리, 모기, 벼룩도 발견되었다. 섬 내에는 야자게가 서식하고 있었지만, 맛이 좋아 남획되어 라사 섬 광업소 개소 약 1년 만에 그 수가 감소했다.[38]

4. 역사

오키다이토섬은 1543년 스페인 항해사에 의해 처음 발견된 이후 여러 나라 탐험가들에게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으며, 1900년 일본 제국에 공식 편입되기 전까지 무인도였다.

1907년 하치조지마 출신 다마오키 한에몬 일행이 정착하면서 유인도가 되었고, 1911년 라사섬 인광 주식회사(ラサ島燐礦株式會社|라사도 인광 주식회사일본어) 설립 후 인광석 채굴이 시작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인광석 생산량 증가로 최대 2,000명이 거주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군사 요충지로 일본군이 주둔, 미군의 공격을 받았으며, 1945년 주민들은 오키나와 본토로 대피했다. 종전 후 미군 폭격 훈련장으로 사용되다가 1972년 일본에 반환되었으나, 현재도 라사 산업 소유지로 일반인 출입은 제한된다. 1979년 인광석 광산 재개발 및 석유 비축 기지 활용 계획은 일본 정부 반대로 무산되었다.

2015년 미일 합동 위원회에서 자위대와의 공동 사용이 합의되었다.[1]

4. 1. 발견과 명명

1543년 9월 25일, 스페인 항해사 베르나르도 데 라 토레가 필리핀에서 누에바 에스파냐로 항해를 시도하다가 실패하는 과정에서 처음 발견하였다. 섬은 평평하고 해수면과 거의 같아 항해에 위험했기 때문에 'Abreojos'(눈을 크게 뜨세요!)로 지도에 표기되었다.[1] 1587년 7월 28일, 마닐라 갤리언이 페드로 데 우나무노의 지휘 하에 섬을 발견하고 'Islas sin Provecho'(쓸모없는 섬)로 지도에 표기하였다. 1773년에는 또 다른 마닐라 갤리언인 ''Nuestra Señora de la Consolación''호가 펠리페 톰슨의 지휘 하에 섬을 발견하고 'Isla Dolores'로 지도에 표기했다.[1]

1788년, 영국인들도 섬을 발견하고 "Grampus Island"라고 명명했지만, 기록된 좌표는 정확하지 않았다. 1807년에는 프랑스인도 섬을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1815년, 마지막 마닐라 갤리언인 스페인 프리깃함 ''San Fernando de Magallanes''호가 현재의 좌표에서 확실하게 섬을 발견하고, 섬을 "Isla Rasa"(스페인어로 평평한 섬)라고 명명했다.[1]

이 섬은 1900년 일본 제국이 공식적으로 영유하기 전까지는 무인도였다. 1807년, 프랑스 군함 카노니엘호가 "라사 섬"이라고 명명했다. 라사의 어원은 분명하지 않지만, 스페인어 등 라틴어 계열 언어에서 "라사"는 평평하다는 뜻이며, 오키다이토섬의 비교적 평탄한 지형에서 명명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42] 라사 섬이라는 명칭은 정식 명칭이 오키다이토섬으로 결정된 후에도 계속 사용되고 있다.[43]

4. 2. 일본령 편입

1885년, 기타다이토 섬과 미나미다이토 섬은 일본령으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당시 같은 다이토 제도에 속한 오키다이토 섬은 일본령으로 편입되지 않았다.[44] 이후 남방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1891년, 미국 선적의 배가 다이토 제도 부근에서 조난당해 미나미다이토 섬에 승무원이 표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오키나와현은 해군성에 남방 탐험을 위한 군함 파견을 요청했다.[45][46]

오키나와현의 요청으로 1892년 8월, 해군 함선 카이몬이 파견되었다. 오키나와현 측은 센카쿠 열도를 포함한 섬들은 이미 탐험이 완료되었으니, 미조사 상태인 라사 섬과 미나미하테루마 섬을 우선 탐험해 달라고 요청했다.[47] 그러나 카이몬은 먼저 미나미다이토 섬을 조사한 후 라사 섬에서 약 1시간 반 동안 조사를 실시하고, 기타다이토 섬은 상륙하지 않고 해상 시찰만으로 탐험을 마쳤다.[48][49]

사사모리 기스케는 이러한 짧은 탐험에 대해 직무를 소홀히 했다고 비판했다.[50] 야마시타 겐타로 대위 등은 라사 섬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섬 내륙부는 풀과 나무가 울창하고 알바트로스 무리가 둥지를 짓고 있으며, 수원지는 없고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없다고 보고했다.[51][52]

1898년 9월, 미나미토리 섬을 개발하던 미즈타니 신로쿠가 알바트로스 깃털 채취를 목적으로 라사 섬을 탐험했다.[53][54] 1899년 6월에는 미야코 섬에서 인두세 폐지를 위해 활약한 나카무라 쥬사쿠가 라사 섬을 탐험했다.[55]

1900년 6월, 나카무라는 내무성에 라사 섬 차용을 신청했다. 내무성은 해군성 수로부에 문의하여 1892년 카이몬의 조사 자료를 받았다. 섬의 존재를 확인한 내무성은 오키나와현에 라사 섬을 시마지리 군에 편입하는 절차를 진행하고 싶다는 질의서를 보냈고, 오키나와현 지사 나라하라 시게루는 이에 동의했다.[56]

1900년 9월 11일, 내무대신 사이고 주도는 나카무라 쥬사쿠의 차용 신청이 제출된 라사 섬을 정식으로 일본령으로 선포하고 오키나와현 시마지리 군에 편입, 섬 명칭을 "오키다이토 섬"으로 하는 안건을 각의에 부쳤다. 이 제안은 승인되었고, 오키다이토 섬은 오키나와현 시마지리 군에 속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57] 사이고 내무대신은 오키나와현에 훈령을 발령했고, 오키나와현은 10월 17일 오키다이토 섬을 정식으로 시마지리 군에 편입하는 고시를 실시했다.

나카무라 쥬사쿠의 차용 신청은 기각되어 섬 차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58]

4. 3. 인광석 광산 시대

1900년 일본 제국이 공식적으로 영유하기 전까지 무인도였던 오키다이토섬은, 1907년 하치조지마 출신의 다마오키 한에몬이 이끄는 개척자들에 의해 처음으로 사람이 살게 되었다.[1] 1908년 농상무성의 츠네토 노리타카가 섬을 측량하여 구아노 자원 개발을 권고했고, 1911년 라사섬 인광 주식회사(ラサ島燐礦株式會社|라사도 인광 주식회사일본어; 현재 ラサ工業|라사 공업일본어)가 설립되어 인광석 채굴이 시작되었다.[1]

라사섬 광업소를 설립한 츠네토 노리타카


미즈타니 신로쿠는 인 자원 개발에 힘쓰던 츠네토 노리타카의 의뢰를 받아 오키다이토섬의 암석과 토사를 채취했다.[74][75] 츠네토는 미나미토리 섬에서 구아노를 발견하고 채굴 사업을 하던 미즈타니와 협력 관계를 맺고 있었다.[76][77][78][79][80][81] 미즈타니의 조카가 가져온 돌을 통해 츠네토는 오키다이토섬에 인광석이 매장되어 있음을 확인했다.[82]

이후 츠네토는 1907년 8월과 1910년 11월 두 차례에 걸쳐 오키다이토섬에 자원 조사단을 파견했고,[85][86] 1911년 초 개발권을 확보하여 라사섬 인광 합자회사를 설립하고 사장에 취임했다.[87] 1911년 5월 1일, 라사섬 광업소를 창업하여 본격적인 인광석 채굴을 시작했다.[89]

라사도 광업소는 초기에는 태풍 피해와 노동력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90] 1912년 2월부터는 오키나와현에서 노동자를 모집하여 인력난을 해결해 나갔다.[91] 또한, 비료 회사들의 불매 동맹으로 판로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자사에서 인광석을 원료로 한 비료 제조를 시작하면서 돌파구를 찾았다.[92][93] 1913년 5월에는 라사도 린광 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94]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선박 부족으로 인광석 수입이 어려워지자 오키다이토섬의 인광석 생산량은 증대되었다.[99][100] 1918년에는 약 18만 톤의 인광석을 채굴하고, 약 2000명의 광산 노동자가 섬에서 생활하며 최성기를 맞이했다.

오키다이토섬은 지방 자치가 실시되지 않아 라사도 린광 주식회사와 그 후신 기업의 통제 하에 있었다.[102] 회사는 학교, 병원, 통신, 우편 등의 공공 서비스와 경제 시스템을 관리했으며, 치안 유지를 위해 청원 순사가 파견되었다.[102] 섬 주민들은 국세와 현세를 납부하고 징병 대상이었지만, 섬으로의 전입 절차가 불가능하여 출가자로 취급되었다.[102]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불황으로 생산이 축소되기도 했으나, 1933년 조업이 재개되었다.[107][108] 농림수산성의 증산 요청과 중요 산업 지정으로 우대 조치를 받았지만,[109] 전시 상황으로 인한 인력 부족과 인광석 품위 저하로 어려움을 겪었다.[114] 전황 악화로 해상 수송이 어려워졌음에도 불구하고,[115] 1938년부터 1944년까지 라사도 광업소는 일본 영내에서 가장 많은 약 32만 톤의 인광석을 채굴했다.

4. 4.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5년, 공격 위협이 증가하면서 주민들은 오키나와 본토로 대피했다.[1]

1935년 9월부터 1938년 4월까지 해군 수로부의 이동 관측반이 미나미다이토섬에서 기상 관측을 실시했다. 그 결과 다이토 제도에서의 기상 관측 중요성이 인정되어 1938년에 미나미다이토섬과 오키다이토섬에 기상 관측소 신설이 결정되었다.[116] 1940년 1월, 중앙 기상대가 관할하는 오키다이토 측후소가 개설되었다. 1942년 8월에는 해군 망루가 건설되어 해군 군인 8명과 관측원 9명이 상주했다.[117] 1944년 11월, 오키다이토섬의 해군 병력으로 견시 요원 29명과 다른 임무를 맡는 2명, 총 31명이 새로 섬에 들어왔다.[118]

대본영은 다이토 제도를 군사적 요충지로 판단하고 방위 체제 강화를 도모했다.[119] 1944년 3월 24일, 대본영은 제85병참경비대를 보병 제36연대에 편입한 후 다이토 제도에 전개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따라 미나미다이토섬에는 보병 제36연대 본부와 제1, 제3대대, 다이토섬 지대가, 기타다이토섬에는 제2대대, 오키다이토섬에는 제4중대가 배치되었다.[120][121]

1944년 2월 25일, 오키다이토섬은 미군 함포 사격 공격을 받았다. 4월 16일에는 짐을 싣는 작업 중이던 배가 잠수함 공격을 받아 승무원 대부분이 사망했다. 이런 긴박한 상황 속에서 4월 26일, 육군의 라사섬 수비대가 상륙했다.

라사섬 수비대는 라사섬 광업소의 전면적인 지원을 받아 강력한 진지를 구축했다.[122][123] 9월 29일 첫 공습을 받으면서 위험이 커졌고, 4월 이후 시작된 라사섬 광업소 종업원들의 순차적인 퇴거가 가속화되었다.

인광석을 채굴하는 라사섬 광업소는 식량 증산에 중요했기 때문에 전면 철수 결정이 쉽게 내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라사섬의 인광석은 품질이 저하되어 외국산 우수 광석과 섞어야만 사용할 수 있었고, 해상 수송마저 어려워져 섬 안에 채굴된 광석이 쌓여 더 이상 채광이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다. 결국 1944년 말 전면 철수가 결정되었고,[124] 1945년 1월 22일 라사섬 광업소 종업원 전원이 오키다이토섬을 떠나면서 광업소는 폐쇄되었다.[125]

광업소 폐쇄 후, 미군은 함포 사격과 공습을 가해 왔다.[126][127] 3월 11일 보급선이 들어왔지만, 이것이 마지막 보급이었고 종전 때까지 보급은 완전히 끊겼다.[128] 보급이 끊긴 후, 라사섬 수비대는 고구마 재배나 물고기를 잡는 등 자급자족을 위한 노력을 했다.[129]

이후에도 미군의 공습은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130] 미군이 투하한 불발탄을 바다에서 폭파시켜 물고기를 기절시키는 어업은 수비대원들 사이에서 "트루먼 급여"라고 불렸다.[131] 보급이 끊긴 상황에서 자급자족을 이어갔지만, 8월경에는 각기병 환자가 늘기 시작했다.[132]

8월 15일 종전 후, 25일이 되어서야 정식 항복 명령이 라사섬 수비대에 전달되었다.[133] 10월 12일 미군이 오키다이토섬에 상륙하여 무장 해제를 했고, 10월 14일 라사섬 수비대가 철수했다. 라사섬 수비대원 전사자는 7명이었다.[134] 철수 후, 오키다이토섬은 라사섬 광업소 조업 시작 이전의 무인도로 돌아갔다.[135]

4. 5. 전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섬은 미국에 의해 점령되었고 미국 해군의 폭격 훈련장으로 사용되었다. 1972년에 일본에 반환되었으며, 현재도 라사 산업의 사유 재산으로 남아 있다.[1]

전후, 오키나와를 통치한 미군 군정은 비료가 되는 인광석을 산출하는 오키다이토섬과 키타다이토섬을 둔 다이토 제도를 주목하여 "오키나와의 보물창고"의 필두로 위치시켰다. 1946년 6월, 미군 군정 당국은 다이토 제도에 오키다이토섬, 키타다이토섬의 인광석 조사를 명목으로 조사단을 파견했다.

인광석 조사가 목적이었지만, 실제로는 다이토 제도의 정치, 행정, 경제 등 다방면에 걸쳐 조사를 실시했다. 1946년 6월 12일, 오키나와 민정부의 지시에 의해 다이토 제도에 촌제가 시행되었다. 다이토 제도의 촌제 시행에 따라 오키다이토섬은 키타다이토 촌에 속하게 되었다. 왜 키타다이토 촌에 속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지만, 지리적인 관점이 아닌 산업적인 면, 즉 인광석 산지인 키타다이토섬과 오키다이토섬 모두 인광석 자원 재개발을 실시하는 것을 고려한 것으로 추측된다. 오키나와 반환 후인 1973년 8월 18일, 오키다이토섬은 키타다이토 촌 아자 라사와 아자의 구역 설정이 이루어졌다.

1950년 한국 전쟁 개전 후, 고철 수요가 높아지면서 오키다이토섬에 버려진 라사섬 광업소의 기계류나 레일, 그리고 라사섬 수비대가 남긴 스크랩류를 회수하기 위해 스크랩 업자들이 찾아오게 되었다. 1954년에는 스크랩 회수를 위해 오키다이토섬으로 향했던 12명의 노동자가, 파견처의 경영 부실로 인해 마중 배를 내지 못해 버려진 사건이 발생했다.

4. 6. 오키다이토섬 사격 폭격장

1956년 4월 16일, 오키다이토 섬은 미국 해군의 함대지 및 공대지 사격 폭격 훈련장인 오키다이토 섬 사격 폭격장이 되었다. 훈련은 월 15일 이내, 연간 180일 이내로 제한되었다. 1972년 오키나와 반환 이후에도 기지 사용은 계속되고 있다.[142] 오키나와 반환 후, 오키다이토 섬은 국유지가 되었으나, 1937년 라사 공업에 불하된 사실이 확인되어 1973년 10월 12일 민유지로 정정되었다.[143] 라사 공업에는 기지 사용 임대료가 지급되었으며, 1984년 임대료는 3.3억이었다.[144] 이후 임대료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1991년 기타다이토 촌 당국자 추정으로는 약 5억이다.[145]

1979년 1월, 라사 공업은 라사 섬을 인광석 광산으로 재개발하고 채굴 종료 후 석유 비축 기지로 활용할 계획을 세웠다. 같은 해 7월, 히로시마 대학 오키무라 유지 교수를 단장으로 라사 공업과 방위 시설청 합동 인광석 조사가 실시되었다. 조사 결과, 인광석 매장량은 약 350만 톤으로 추정되었다.[146] 라사 공업과 기타다이토 촌은 사격 폭격장 계약 해제 및 반환을 요구했으나, 일본국 정부는 이에 동의하지 않아 실현되지 않았다.[147] 오키다이토 섬은 미국군 사격 폭격장으로 일반인 출입이 금지된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148]

1989년 5월, 기타다이토 촌, 미나미다이토 촌 공동으로 오키다이토 섬 현황 및 어업 조사가 실시되었다. 양 촌 직원, 오키나와현 의회 의원 3명, 어업 관계자, 류큐 대학 교수 등 66명이 참가했다. 섬 내에서는 바닷새가 발견되지 않았고, 라사 섬 광업소 시절 잔해로는 콘크리트 잔교, 저수조, 트로코 부설 흔적 등이 남아있었다. 사격 폭격으로 인한 구멍, 탄피, 불발탄도 발견되었다. 한편, 섬 주변은 풍부한 수산 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149][150]

2012년, 오키다이토 섬 남서부 해역의 작은 섬(암초)이 '남서 소도'로 명명되었다.[151][152]

2015년 10월 6일, 미일 합동 위원회에서 미군 사격 폭격장인 오키다이토 섬과 주변 수역・공역을 자위대가 항시적으로 공동 사용하기로 합의했다. 대지 함포 사격 외에 착륙 훈련 모의 훈련 등도 검토되고 있다.[153]

5. 인물

나키진촌 출신의 오키나와 민요 연구가 나카소네 코이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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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간행물 排他的経済水域(EEZ)外縁を根拠付ける離島の地図・海図に記載する名称の決定について 首相官邸総合海洋政策本部 2012-03-02
[152] 웹사이트 南西小島の位置 国土地理院25,000分の1地形図、沖大東島 http://watchizu.gsi.[...]
[153] 뉴스 米軍と自衛隊、沖大東島を恒常使用へ 合同訓練強化の恐れ https://ryukyushimpo[...] 琉球新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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