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정복고의 대호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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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정복고의 대호령은 1868년 1월 3일(게이오 3년 12월 9일) 일본에서 발표된 선언으로, 일본의 정치 체제를 개편하고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사건이다. 흑선 내항 이후 막부의 권위가 실추되고 공의정체론이 대두되는 가운데, 사쓰마 번 등의 도막파는 대정봉환 이후에도 친막부적인 세력이 영향력을 행사할 것을 우려하여 무력으로 막부를 무너뜨리기로 결정했다. 왕정복고의 대호령은 쇼군직 폐지, 막부 폐지, 셋쇼 및 간파쿠 폐지, 삼직(총재, 의정, 참여) 설치 등의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를 통해 천황 친정 체제를 수립하고 신정부를 구성했다. 이 선언은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반발과 보신 전쟁으로 이어졌으며,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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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정복고의 대호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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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개요 | |
사건명 | 왕정복고 |
발생 장소 | 일본 교토 |
시기 | 1868년 1월 3일 (음력 게이오 3년 12월 9일) |
원인 | 에도 막부의 통치력 약화 존왕양이 운동의 고조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을 중심으로 한 반 막부 세력의 결집 |
주요 참여 세력 | 사쓰마 번 조슈 번 도사 번 아키타 번 오와리 번 구게 |
결과 | 왕정복고 대호령 반포 에도 막부 해체 메이지 유신의 시작 |
영향 | 일본의 근대화 추진 중앙집권 국가로의 전환 천황 중심의 새로운 정치 체제 확립 |
배경 | |
정치적 배경 | 에도 막부의 쇠퇴 막부 정치에 대한 불만 고조 개국 이후 사회적 혼란 심화 |
사상적 배경 | 존왕양이 운동 확산 국학과 수학의 발전 천황 중심 사상의 부활 |
경제적 배경 | 상품 경제 발달로 인한 상인 계층의 성장 농촌 경제의 피폐 물가 상승과 빈부 격차 심화 |
국제적 배경 | 서구 열강의 압력 강화 불평등 조약 체결 외세 배척 운동의 고조 |
전개 과정 | |
1867년 | 10월 14일: 도쿠가와 요시노부, 대정봉환을 통해 정권 반환 12월 9일: 왕정복고 대호령 선포, 막부 폐지 및 새로운 정부 수립 |
1868년 | 1월 3일: 도바·후시미 전투 발발, 보신 전쟁 시작 새로운 정부군, 구 막부군을 진압하며 전국으로 확대 |
주요 전투 | 도바·후시미 전투 고슈 가쓰누마 전투 아이즈 전쟁 하코다테 전쟁 |
주요 인물 | |
왕정복고 세력 | 메이지 천황 이와쿠라 도모미 오쿠보 도시미치 사이고 다카모리 기도 다카요시 고마쓰 아키히토 |
에도 막부 세력 | 도쿠가와 요시노부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야마오카 뎃슈 가쓰 가이슈 |
평가 및 영향 | |
긍정적 평가 | 메이지 유신의 발판 마련 일본 근대화의 기틀 확립 봉건 제도 해체 및 중앙 집권 체제 강화 |
부정적 평가 |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갈등 심화 보신 전쟁으로 인한 인명 피해 발생 사족 계층의 불만 야기 |
영향 |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 추진 동아시아 국제 관계에 큰 변화 초래 |
같이 보기 | |
관련 사건 | 메이지 유신 보신 전쟁 대정봉환 왕정복고 대호령 |
관련 인물 | 메이지 천황 도쿠가와 요시노부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
사건 개요 | |
명칭 | 왕정복고 대호령 |
일본어 명칭 | 王政復古の大号令 |
로마자 표기 | Ōsei fukko no daigōrei |
유형 | 정치적 선언 |
날짜 | 1867년 12월 9일 (음력, 게이오 3년) |
장소 | 일본, 교토 |
발령 주체 | 메이지 천황 |
목적 | 왕정복고 선언 및 에도 막부의 폐지 |
배경 | |
정치적 상황 | 에도 막부의 쇠퇴, 존왕양이 운동의 고조 |
주요 세력 | 사쓰마 번, 조슈 번 등 반 막부 세력의 연합 |
내용 | |
핵심 내용 | 막부의 폐지 새로운 정부 수립 모든 정치 권력의 천황에게 귀속 |
주요 조항 | 관백, 섭정, 정이대장군 등 막부의 모든 직위 폐지 새로운 삼직: 총재, 의정, 참여 설치 모든 국가의 정치는 천황에게 귀속 |
영향 | |
정치적 영향 | 에도 막부의 붕괴 메이지 유신의 시작 중앙집권 국가로의 전환 |
사회적 영향 | 봉건 제도의 해체 새로운 사회 질서 구축 |
같이 보기 | |
관련 사건 | 왕정복고 (일본) 메이지 유신 대정봉환 |
관련 인물 | 메이지 천황 도쿠가와 요시노부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
2. 배경
막부 말기개국 이후, 일본은 새로운 세계 정세에 대응하여 근대화와 국력 양성을 추진해야 했다. 이를 위해 여러 정치 체제가 구상되고 모색되었다. '왕정복고'는 진시황 이전의 주나라 무왕을 최고로 하는 고전 개념에 기초한 것으로, '황정복고'라고 불리지 않았다. 당시 일본에는 서양의 절대 왕정이라는 명칭이 없었다.
사쿠마 쇼잔, 요코이 쇼난 등은 감정적이고 단편적인 쇄국과 양이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막부의 소극적인 태도로는 서양과 대등한 외교 및 통상 관계를 맺을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선진 기술과 산업을 도입하여 경제력과 해군력을 강화하고, 국력과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기존 체제를 개혁하고, 폭넓게 인재와 의견을 수렴하는 공의정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여러 번, 재야 개혁파, 히토쓰바시 파 제후뿐만 아니라 막부 내부에서도 높아졌다.
2. 1. 개국과 막부의 권위 실추
에도 시대 후기, 국학의 발전 등으로 지식인들 사이에서 존황 사상이 퍼져나갔다. 한편, 막부 지배의 정당성의 근거를 대정위임론에 두는 견해도 있었는데, 에도 초기의 금중병공가제법도(제1조)에서 그 싹을 볼 수 있었지만, 간세이 개혁을 주도한 노중·마쓰다이라 사다노부가 주자학을 권장하면서 침투했다고 여겨진다. 어느 쪽이든 정당성의 근원을 천황에게 인정하는 점은 공통되었고, 그 권위는 널리 인식되게 되었다.1853년 흑선 내항 이후, 개국과 통상을 둘러싸고 국론은 양분되었다. 2백 년 동안의 쇄국 방침이 서양의 군사적 위협에 굴복한 결과로 바뀌면서 막부의 위신은 급락했고, 막부는 끓어오르는 양이론을 억누르고 통상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조정의 권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병약한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막부 각료와 여러 번 사이에 '''잇키 파'''와 '''난키 파'''의 대립이 일어났다. 노중 아베 마사히로, 시마즈 나리아키라(사쓰마 번주), 다테 무네나리(우와지마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전 미토 번주), 도쿠가와 요시카쓰(오와리 번주), 야마우치 요도(도사 번주), 마쓰다이라 슈가쿠(에치젠 번주) 등 잇키 파는,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옹립하려 한 반면, 이이 나오스케(히코네 번주) 등 난키 파는, 쇼군 이에사다의 사촌 도쿠가와 요시토미(기슈 번주)를 지지했다. 막부 정치 밖에 있던 친번이나 외양웅번도 참여하는 거국 일치의 신체제 구축을 목표로 하는 세력과, 종래의 막부 체제의 유지를 지향하는 막부 각료, 후다이 중심의 보수파의 대립이었다.
1858년 4월, 이이 나오스케가 다이로에 취임, 6월에는 도쿠가와 요시토미가 쇼군 계승자로 정해지면서 난키 파가 승리한다. 같은 시기부터 9월에 걸쳐 안세이 5개국 조약이 조인되었다. 고메이 천황의 양이 의지는 확고하여 칙허를 얻지 못한 채 조인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양이론은 존왕론과 결합하여 막부를 비난하는 목소리는 더욱 거세졌고, 또한 개국론자가 많은 잇키 파에서도 무칙허 조인이라는 점이 공격받았다. 이이 나오스케는 안세이 대옥을 단행하여 이 움직임을 탄압하지만, 이에 반발하는 미토 번 낭인들에게 암살되었다(사쿠라다몬 외의 변(1860년)).
이이 나오스케의 죽음 후, 노중 수좌인 안도 노부마사 등은 존왕론을 내세워 막부에 반발하는 세력을 진정시키기 위해, '''공무 합체'''에 의해 막부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이전부터 검토되었던 고메이 천황의 여동생 가즈노미야 지카코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요시토미에서 개명)의 결혼을 추진했다. 교섭은 난항을 겪었지만, 시종 이와쿠라 도모미가 천황의 자문에 대해 양이를 조건으로 하는 혼인 승인을 진언했고, 천황은 장래의 양이 실행에 기대하며 이를 칙허했다. 가즈노미야는 1861년 11월에 에도로 내려와, 이듬해 2월에 혼례가 거행되었지만, 그 사이 안도 노부마사는 이 정략 결혼에 반발한 미토 탈번 낭인들에게 습격당해 부상당하고(사카시타몬 외의 변), 4월에 노중에서 파면되었다.
2. 2. 공의정체의 모색
사쿠마 쇼잔, 요코이 쇼난 등은 정서적이고 단편적인 쇄국과 양이(攘夷)가 통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부의 미온적인 태도로는 서양과 대등한 외교, 통상 관계를 맺을 수 없다고 보았다. 이들은 선진적인 산업과 기술을 도입하여 경제력과 해군력을 키우고, 국력과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기존 체제를 바꾸고 더 널리 인재와 의견을 받아들이는 공의정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여러 번(諸藩), 재야 개혁파, 히토쓰바시 파 제후뿐만 아니라 막부 내부에서도 커졌다.조슈 번에서는 나가이 우타가 《항해원략책》을 통해 개국통상으로 국력을 키우고 해외로 웅비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한때 번론(藩論)으로 채택되었다. 막부 노중 안도 노부마사, 구제 히로치카 등도 이를 지지했다. 그러나 나가이의 사상은 체제 변혁 같은 구체적인 방안까지는 제시하지 못했다. 사카시타 문 밖의 변으로 안도 노부마사가 실각하자, 조슈 번에서는 구사카 겐즈이 등의 존왕양이파가 세력을 회복하여 나가이의 주장은 좌절되었다.
1862년(분큐 2년) 4월, 사쓰마 번의 시마즈 히사미쓰가 번병 1천 명을 이끌고 교토로 왔다. 사쓰마 번은 히토쓰바시 파가 시도했던 친번(親藩), 선진 도자마 웅번(雄藩)이 국정에 참여하는 체제, 그리고 조정과 막부라는 이원 체제의 통합을 목표로 했다. 당시 교토는 존왕양이파의 기세가 강해져 불온한 상황이었고, 조정은 히사미쓰에게 낭사(浪士) 진무(鎮撫)의 칙명을 내렸다. 히사미쓰는 데라다야 사건으로 자번(自藩)의 존왕양이 과격파를 숙청하여 신뢰를 얻었고, 이를 계기로 막정 개혁안을 조정에 제시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개혁을 명하는 칙사가 히사미쓰와 함께 에도로 내려갔고, 막부는 분큐의 개혁을 실시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쇼군 후견직으로, 마쓰다이라 슌가쿠가 정사총재(政事総裁) 직에 취임하면서, 이전에는 막정에 참여할 수 없었던 도쿠가와 일문의 이들 두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체제가 우선 발족되었다.
1863년(분큐 3년) 8월 18일의 정변으로 사쓰마 번은 교토 수호직 아이즈 번과 동맹을 맺고 조슈 번 및 산조 사네토미 등 존왕양이파 공경(公卿)을 교토에서 추방했다. 조정은 시마즈 히사미쓰, 도쿠가와 요시노부, 마쓰다이라 슌가쿠, 다테 무네나리, 야마우치 요도 등 개명파 제후들에게 교토로 상경할 것을 명했고, 이들은 연말에 걸쳐 잇따라 교토로 들어왔다. 히사미쓰는 제후 합의에 따른 공의정체 설립에 협조를 구했고, 슌가쿠, 무네나리, 교토 수호직 마쓰다이라 가타모리 등도 이에 동참했다. 조정은 이들 제후를 조정참예(朝廷参預)로 임명하여 조정회의에 참석하게 했다. 이듬해인 1864년(겐지 원년) 2월, 쇼군 이에모치가 상경하자 참예 제후는 로주(老中) 방으로의 진입도 허용되었다. 이로써 천황과 쇼군 아래 일원화되어 친번 · 도자마 웅번이 합의하는 공의정체가 발족되었다.
2. 3. 참예공의의 좌절과 일회상체제
그런데 히토쓰바시 일파의 쇼군 후보로서 사쓰마 번이 옹립에 심혈을 기울여 지원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 본인은 이 시점에서 공의정체 지향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다. 시마즈 히사미쓰의 주도권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요시노부는 쇼군이 조정에 양이 실행을 서약하고 있음을 내세워 요코하마 개항을 주장했고, 참예제후와의 사이에 마찰을 빚는 언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제후들은 차츰 자신들의 번으로 귀국했고, 참예공의도 단기간에 와해되었다.참예회의가 와해된 뒤인 1863년 3월 25일, 요시노부는 '''금리어수위총독''' 겸 '''섭해방어지휘'''에 임명되었다. 요시노부는 교토에 머무르며 교토 수호직인 아이즈 번 및 교토 쇼시다이 구와나 번을 따랐고, 8월 10일 정변 이후 조정의 수뇌가 된 간파쿠 ・ 니조 나리유키나 나카가와노미야 아사히코 친왕과도 제휴하고 공의정체나 다름없는 새로운 공무합체 체제를 구축하였다. 이를 일회상체제(一会桑体制)라고 한다. 이후 몇 년 동안 이 체제가 교토의 정국을 주도해 나가게 된다.
2. 4. 공의정체론의 전개와 대정봉환
분큐 2년(1862년), 당시 외국봉행이었던 막신 오쿠보 이치오는 "양이(攘夷)는 득책이 아니며, 조정이 개국을 인정하지 않고 양이 실행을 강요한다면 도쿠가와 가문은 정권을 반환하고 제후의 반열로 내려가야 한다"는 대정봉환론을 마쓰다이라 슌가쿠에게 제안했다. 이치오의 주장은 도쿠가와 가문을 다른 제후들과 같은 반열에 두는 형태의 공의정체론이었다. 마쓰다이라 슌가쿠와 그의 정치 고문이었던 요코이 쇼난, 막신 가쓰 가이슈, 가이슈의 문하생이었던 사카모토 료마 등은 이에 감복했지만, 막부 요인들은 대체로 불만을 품었다.게이오 3년(1867년) 5월, 사후회의의 설치와 붕괴는 왕정복고 정변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1] 사후회의에 속한 4대 웅번은 공의정체로 국정을 이관하고자 했으나, 쇼군 요시노부의 정치력에 밀려 실패했다.[1] 이에 오쿠보 도시미치, 고마쓰 기요카도, 사이고 다카모리 등 사쓰마 번 수뇌들은 무력으로 막부를 타도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전환했다.[1] 그러나 사쓰마 번 내부에서도 무력 토막에 대한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고, 오쿠보 등은 이와쿠라 도모미를 통해 천황이 직접 막부 토벌을 명하는 밀지를 내려줄 것을 요청했다.[1]
하지만 쇼군 요시노부는 도사 번의 건의를 받아들여 10월 14일에 막부가 맡아오던 정권을 조정에 반환하겠다는 대정봉환을 상주했고, 다음 날 조정은 이를 칙허로 수용했다.[2] 이로써 260년 이상 지속된 에도 막부(도쿠가와 쇼군)는 정권을 조정에 반환하게 되었다.[2] 요시노부는 막부 체제의 교착 상태를 자각하고, 천황 아래 일원화된 새로운 체제에서 자신이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길을 찾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2]

2. 5. 제후회의 소집
조정은 제후회의를 소집하여 합의를 통해 새로운 체제를 정하기로 하고, 오와리 도쿠가와 요시카쓰, 에치젠 후쿠이 마쓰다이라 슌가쿠, 사쓰마 번 시마즈 히사미쓰, 도사 야마노우치 요도, 우와지마 다테 무네나리, 게슈 아사노 시게쿠니, 히젠 나베시마 나오마사, 비젠 이케다 시게마사 등에게 교토로 올라올 것을 명했다. 새로운 체제 발족까지 막부에 국내 통치를 위임하기로 하여, 막부는 그동안 존속했다.도막파 이와쿠라 도모미와 사쓰마 번은 대정봉환으로 막부를 공격할 명분을 잃었고, 조정이 기존의 기구와 문류(門流) 지배를 유지하며 친도쿠가와파 섭정 니조 나리유키와 가야노미야 아사히코 친왕(나카가와노미야, 메이지 유신 이후 구니노미야가 됨)에 의해 주도되는 상황에서는 자신들의 의향이 반영되지 않을 것을 우려했다. 또한 다가올 제후회의에서 요시노부를 지지하는 세력이 커지면 새로운 제도 역시 요시노부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걱정했다. 이를 막기 위해 당시 무쓰히토 천황과 자신들의 파벌인 종실 및 구게를 옹립하고, 니조 섭정과 아사히코 친왕 등 조정 수뇌를 배제하며, 기구와 질서를 일신하는(요시노부를 배제한) 새로운 체제를 수립하려는 정변을 계획했다. 사쓰마 번, 조슈 번, 게슈 번 3개 번은 정변을 위한 출병 동맹을 체결했다.
여러 다이묘들은 제후회의 소집 명령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고, 11월 중에 상경한 웅번은 사쓰마 번, 게슈 번, 오와리 번, 에치젠 번뿐이었으며, 1867년 12월 8일에야 도사 번 야마노우치 요도가 교토에 들어왔다.[1]
3. 경과
1867년 12월 7일(그레고리력 1868년 1월 1일)은 분큐 견유 사절이 런던 각서를 통해 합의한 효고 개항 예정일이었다. 1867년 10월 대정봉환 이후, 웅번(雄藩)들은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정치적 복권을 우려하여 효고 개항 예정일 직전에 정변을 일으키고자 했다.
오쿠보 도시미치 등은 당초 1868년 1월 2일(게이오 3년 12월 8일)에 정변을 계획했으나, 도사 번의 고토 쇼지로의 요청으로 1868년 1월 3일(게이오 3년 12월 9일)로 연기되었다. 전날 밤, 이와쿠라 도모미는 자신의 저택에 사쓰마 번, 도사 번, 아키 번, 오와리 번, 에치젠 번의 중신들을 소집하여 왕정복고를 선언하고 협력을 요청했다.[14]
다섯 번의 군사력을 동원한 정변이 실행되었으나, 참가자들 사이에서는 신정부에서 도쿠가와 가문을 완전히 배제할지에 대한 의견 차이가 있었다. 에치젠 번과 오와리 번 등 공의정체파(公議政体派)는 도쿠가와 가문을 제후(諸侯)의 반열로 낮추는 것을 목표로 했다. 실제로 이들 번의 주선으로 연말에는 요시노부의 의정(議定) 취임이 논의되기도 했다.[15]
오쿠보 등은 아이즈 번 등 대정봉환에 반발하는 세력과의 무력 충돌을 예상했지만, 니조 성의 도쿠가와 세력은 보복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실제로 요시노부는 1867년 12월 31일(게이오 3년 12월 6일) 에치젠 번으로부터 정변 계획을 들었지만, 저지하지 않았다.[6]
1868년 1월 2일(게이오 3년 12월 8일) 저녁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섭정 니조 나리유키(二条斉敬)가 주최한 조의(朝議)에서는 모리 다카치카와 모리 히로토모 부자의 관위 복구 및 입경 허가, 이와쿠라 등 당상(堂上) 공경(公卿)들의 칩거 사면 및 환속, 규슈에 있던 산조 사네토미 등 다섯 공경의 사면 등이 결정되었다.
1868년 1월 3일(게이오 3년 12월 9일), 조의가 끝난 후, 다섯 번의 병사들이 대궐의 아홉 대문을 봉쇄했다. 이들은 대궐 출입을 엄격하게 제한했으며, 니조 나리유키나 아사히코 친왕 등 친막부파 조정 수뇌들조차 입궐이 금지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면된 이와쿠라 도모미 등이 어린 천황 무쓰히토가 있는 대궐의 고가쿠몬쇼(御学問所)에 입궐하여 「'''왕정복고의 대호령'''」을 선포하고 신정부 수립을 알렸다.[9]
3. 1. 왕정복고의 대호령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10월 24일에 상신한 쇼군직 사직을 칙허(왕명으로 허락)한다는 내용과 함께, 교토 슈고직, 교토 쇼시다이, 막부, 셋쇼, 간파쿠를 폐지하고, 총재(総裁) ・ 의정(議定) ・ 참여(参与)로 삼직(三職)을 새롭게 설치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16]이 선언은 12월 14일에 여러 다이묘들에게, 12월 16일에는 서민들에게까지 포고되었다. 요시노부의 쇼군직 사직 칙허, 일회상체제를 지지해 온 아이즈 번 ・ 구와나 번을 내쫓는다는 것으로, 요시노부의 새로운 체제에 대한 참여를 배제하면서, 한편으로 종래의 셋쇼 ・ 간파쿠 이하 조정 기구의 정치권력을 부활시키는 것 역시 아니며, 고셋케(五摂家)를 정점으로 하는 구게 사회의 문류(門流) 지배도 해체하고, 오직 덴노의 친정(親政) ・ 공의정치(公議政治)라는 명분 아래 일부 구게와 다섯 번에 조슈 번을 더하여 유력자가 주도하는 신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3. 2. 삼직
삼직에 임명된 인물은 다음과 같다(이 삼직 제도는 이듬해 게이오 4년 윤4월에 정체서에 의해 폐지되고, 태정관 제도로 이행한다).[1]직책 | 이름 | 비고 |
---|---|---|
총재 |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친왕 | |
의정 | 닌나지노미야 요시아키 친왕 | |
야마시나노미야 아키라 친왕 | ||
나카야마 다다야스 | ||
오기마치산조 사네나루 | ||
나카미카도 쓰네유키 | ||
시마즈 시게히사 | 사쓰마 번 | |
도쿠가와 요시카쓰 | 오와리 번 | |
아사노 나카코토 | 게슈 번 | |
마쓰다이라 요시나가 | 에치젠 번 | |
야마우치 요도 | 도사 번 | |
참여 | 이와쿠라 도모미 | |
오하라 시게토미 | ||
마데노코지 히로후사 | ||
하세 노부아츠 | ||
하시모토 사네야나 | ||
니와 켄 | 오와리 번 | |
다나카 후지마로 | 오와리 번 | |
아라카와 진사쿠 | 오와리 번 | |
나카네 유키에 | 에치젠 번 | |
사카이 쥬노조 | 에치젠 번 | |
모우케 고 | 에치젠 번 | |
쓰지 쇼소 | 게슈 번 | |
사쿠라이 요시로 | 게슈 번 | |
구보타 헤이지 | 게슈 번 | |
참여 | 고토 쇼지로 | 도사 번 |
가미야마 사다에 | 도사 번 | |
후쿠오카 다카치카 | 도사 번 | |
사이고 다카모리 | 사쓰마 번 | |
오쿠보 도시미치 | 사쓰마 번 | |
이와시타 마사히라 | 사쓰마 번 |
3. 3. 고고쇼 회의
1868년 1월 3일 (慶応|게이오일본어 3년 12월 9일) 고고쇼에서 최초의 삼직 회의가 열렸다. 야마노우치 요도 등 공의정체파는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불참을 비난하고 요시노부를 의장으로 하는 제후회의의 정체를 주장하였다. 이와쿠라 도모미 등은 요시노부의 사관납지(내대신 사임과 막부 영지 반납)를 주장했고, 격론 끝에 요시노부에 대한 사관납지가 결정되었다. 다만 마쓰다이라 슌가쿠 등의 노력으로 400만 석 전납에서 2백만 석으로 줄었다.[17]이 회의에서 이와쿠라 도모미가 요시노부를 옹호하는 야마노우치 요도를 크게 질책했다는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으나, 이는 1906년에 완성된 『이와쿠라 공 실기』(岩倉公実記)에 처음 등장하는 것으로, 당시 사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아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존재한다.[17]


4. 이후의 전개
12월 10일,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자신의 새로운 호칭을 "우에사마"로 선언하고, 정이대장군이 폐지되어도 "우에사마"가 막부의 기구를 살린 채 전국 지배를 계속할 의향을 내비쳤다. 또한 사쓰마, 조슈 등의 강경한 움직임에 교토에 있던 여러 번의 대표들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에 도사 번 등 공의정체파가 반격을 시도, 12일에는 히고 번 ・ 지쿠젠 번 ・ 아와 번 등의 대표가 고쇼에서 군대를 물리라고 삿초측에 요구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12월 13일에 이와쿠라나 사이고는 타협안으로 사관납지에 요시노부가 응한다면 요시노부를 의정에 임명하는 동시에 「전임 내대신」(前内大臣)으로 대우하는 것을 인정하겠다는 제안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요시노부의 사관납지도 유명무실화되기 직전에 이르렀고, 16일에는 요시노부가 미국 ・ 영국 ・ 프랑스 ・ 네덜란드 ・ 이탈리아 ・ 프로이센 이렇게 6개 국 공사(公使)와 오사카 성에서 회담을 벌였다. 내정 불간섭과 외교권을 막부가 그대로 갖는 것을 승인하게 하고, 이어 12월 19일에는 조정에 대해 왕정복고 대호령 철회를 공공연하게 요구하기까지 이르게 된다.[13]
이에 대해 12월 22일 조정은 사실상 도쿠가와 막번 체제에 의한 대정 위임의 계속을 승인한다는 내용의 고유문을 냈다. 왕정복고의 대호령이 취소되지는 않았지만, 요시노부의 주장이 완전히 승인된 것이나 다름없었다.[13]
한편 이 사태에 위기감을 느낀 사쓰마 번의 암약으로 옛 막부측 강경파들이 부추김을 받아 들고 일어나, 1월 3일에 도바-후시미 전투(보신 전쟁)가 발발하게 된다. 이 전쟁으로 옛 막부군은 삿초군(薩長軍)에 패하여 물러났고, 옛 막부측의 기세가 꺾였음을 알게 된 조정은 닌나지노미야 요시아키 친왕을 정토대장군에 임명하는 동시에 니시키노미하타와 절도를 주어, 신정부군을 관군(官軍)으로 명하였다. 궁지에 몰렸던 신정부군은 한숨 돌리게 되었고, 한편으로 옛 막부측은 「조적」(朝敵)으로 궁지에 빠지게 되었다.[13]
이때 야마우치 요도는 이와쿠라에게 「이 싸움은 삿초가 일으킨 부당한 싸움이다」라고 항의하였으나, 요도로부터 「알겠소. 그러면 도사 번은 요시노부 편에 서시구려」라고 일갈했고, 침묵해 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그 뒤 요도는 도사 번의 군세를 이타가키 다이스케에게 넘기고 삿초측과 발걸음을 같이하게 되었다.[13]
다만 이제까지의 간토를 중심으로 하는 옛 막부 세력권이 넓었으므로 조정의 도막파 세력들이 진정한 의미로 '막부 타도'를 실현시키는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4월 11일, 신정부군이 에도 총공격을 중지하는 대신 옛 막부의 본거지인 에도 성을 내놓게 하여 막부 해체를 한층 더 진전시켰다. 옛 막신 후쿠치 겐이치로는 자신의 저서 『막부쇠망론』에서 「에도 개성으로 하여 에도 막부는 멸망하였다」고 쓰고 있다.[13]
5. 기타
당시 이와쿠라 도모미 등은 빈번하게 왕래하며 모의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 이 무렵 에에쟈나이카 사건이 발생하여 그쪽으로 시선이 쏠리는 바람에 막부 측에 준비를 들키는 일은 없었다. 한편 유신사(維新史)에서는 "왕정복고 계획은 극비사항이었기에, 시나가와 야지로가 신부(神符) 강하라는 기이한 일을 발안하여, 그 소란을 틈타 계획을 진행하려 했다"고 적고 있다.[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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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京都》御所と離宮の栞 ~其の二十七~ - 宮内庁
https://www.kunaicho[...]
《京都》御所と離宮の栞 - 宮内庁
2021-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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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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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都御所で秋を楽しむ 明治150年ゆかりの順路 - 日本経済新聞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018-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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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河内八郎執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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家近2004、pp.203-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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青山2011、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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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문서
(河内八郎執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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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서적
青山2011、p.248。
[16]
간행물
徳川内府大政返上将軍辞職ノ請ヲ允シ摂関幕府ヲ廃シ仮ニ総裁議定参与ノ三職ヲ置ク(宮堂上ニ諭告)
{{NDLDC|787948/9}}
法令全書
1868-12-09
[17]
서적
高橋2002、pp.6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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