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쓰노미야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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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쓰노미야씨는 후지와라씨 또는 나카하라씨를 조상으로 하는 일본의 씨족이다. 시모츠케국을 본관으로 시모츠케 우쓰노미야씨가 적류이며, 22대에 걸쳐 500년간 시모츠케국을 다스렸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간토 제일의 활잡이"로 불린 우쓰노미야 토모츠나가 활약했고, 5대 우쓰노미야 요리츠나는 와카 문화를 발전시켰다. 센고쿠 시대에는 우쓰노미야 나리쓰나가 가문을 중흥시켰으나, 도요토미 정권 시대에 개역되어 쇠퇴했다. 우쓰노미야씨는 여러 분가와 서류를 형성했고, 와카 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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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쓰노미야씨 - 우쓰노미야 요리쓰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유모 양자이자 오슈 전투 공훈자인 우쓰노미야 요리쓰나는 호조씨 득세에 협력했지만 모반 혐의로 출가하여 렌쇼라 칭하며 후지와라노 사다이에와 교류하고 우쓰노미야 가단을 발전시킨 가인이다. - 우쓰노미야씨 - 우쓰노미야성
우쓰노미야성은 헤이안 시대에 축성되어 에도 시대까지 존속했던 일본의 성으로, 후지와라 씨 일족의 거점, 고호조 씨의 공격,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배를 거쳐 혼다 마사즈미에 의해 개축되었으나 보신 전쟁 때 소실, 현재는 일부가 복원되어 공원으로 공개되었다. - 간토 지방의 씨족 - 사타케씨
사타케씨는 미나모토노 요시미쓰의 손자 사타케 마사요시를 시조로 하는 무가로, 히타치국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무로마치 시대 히타치국 세습 수호를 역임하고 센고쿠 시대 히타치국을 통일했으며,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구보타번을 통치하며 에도 시대, 보신 전쟁, 메이지 유신을 거쳐 현재까지 아키타 지역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 간토 지방의 씨족 - 하타케야마씨
하타케야마씨는 헤이안 시대 무사시국에서 기원하여 겐페이 전쟁과 남북조 시대를 거치며 세력을 키운 무가로, 아시카가 씨와 관계 깊은 겐지 하타케야마씨가 막부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가문 내 분열과 센고쿠 시대 혼란으로 쇠퇴, 에도 시대에는 고케,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시족으로 이어졌다. - 우쓰노미야시의 역사 - 가와치정 (도치기현)
도치기현에 위치했던 가와치정은 후루사토촌과 다와라촌의 합병으로 설립되어 정으로 승격했으나, 가누마 강 등의 하천이 흐르고 오카모토역과 국도 4호선이 지나는 교통의 요지였음에도 불구하고 2007년 우쓰노미야시에 편입 합병되었다. - 우쓰노미야시의 역사 - 가미카와치정
가미카와치정은 1889년 가미카와치촌으로 시작하여 1994년 정으로 승격되었으나 2007년 우쓰노미야시에 편입되어 합병되었다.
우쓰노미야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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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가문명 | 우츠노미야씨 (宇都宮氏) |
가몬 | 히다리미츠토모에 (左三ツ巴) |
본성 | 후지와라 북가미치카네류? 후지와라 북가나카미카도류? 시모츠케노노아손? 나카하라노아손? |
시조 | 후지와라노 소엔 |
종별 | 무가, 사족 |
출신지 | 시모츠케국 |
근거지 | 시모츠케 우츠노미야씨 시모츠케국 히타치국 일부 코즈케국 (삿타야마타이세이) 에치고국 (삿타야마타이세이) 카즈사국 (무로마치 시대 중기) 부젠 우츠노미야씨 부젠국 이요 우츠노미야씨 이요국 치쿠고 우츠노미야씨 치쿠고국 |
주요 인물 | |
씨족 | |
우츠노미야 씨족 | 무가 |
2. 출자
후지와라씨 일족인 후지와라 북가의 후지와라노 미치카네의 증손자라고 칭하는[1] 후지와라노 소엔이 미나모토노 요리요시, 미나모토노 요시이에의 오슈 아베씨 토벌 (전9년의 역)에서의 공로로 우쓰노미야 (현 도치기현 우쓰노미야시 후타아라야마 신사의 별칭) 별당직에 임명되어, 소엔의 손자인 우쓰노미야 도모쓰나부터 성씨 (성)로 우쓰노미야씨를 칭했다. 그러나, 『우쓰노미야시 역사(宇都宮市史)』나 『성씨가계대사전(姓氏家系大辞典)』에서는 후지와라노 소엔을 후지와라노 미치카네의 후손으로 하는 것은 후세의 가짜이고, 우쓰노미야씨는 나카하라씨 출신 또는 고대 쓰케노씨의 일족으로 야다베씨 (또는 샤모치기미) 후예로 한다고 적혀있다. 또한, 근래에는 『주유키(中右記)』의 기술을 근거로 지금까지의 각종 계보를 부정하여, 후지와라노 소엔은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손자 (3대 우쓰노미야 도모쓰나 이후에 실존 인물인 후지와라노 소엔을 조상으로 가짜로 썼을 가능성도 있다)라는 지적도 있다.
시모쓰케국 이치노미야 명신대사였던 우쓰노미야 후타아라야마 신사 좌주 및 닛코산 별당직 등을 맡아 키세이 양당을 이끌고 22대, 500년에 걸쳐 시모쓰케국을 다스렸다.[1] 고쿠시와 슈고도 역임했으며, 현재는 센고쿠 다이묘로도 평가받고 있다.[1]
3. 시모쓰케 우츠노미야씨 (적류)
3. 1. 가마쿠라 시대
초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 "'''간토 제일의 활잡이'''"라고 불린 우쓰노미야 도모쓰나는 3대 우쓰노미야 씨 당주이다.[1] 5대 우쓰노미야 요리쓰나는 무인으로 오슈 후지와라씨 공격에도 공적이 있었으나, 가마쿠라 막부로부터 모반 혐의를 받은 것을 계기로 호넨에 귀의하여 출가해 승려가 되어 지쓰신보 엔세이(実信房蓮生일본어)라고 칭하고 교토에 은거하여 우쓰노미야 가단(歌壇일본어)이라 불리는 와카 흐름을 확립하였다.[1] 교토 사가노의 오구라 산기슭의 암자에 살았으며, 그 후스마 색지에는 친분이 있던 후지와라노 사다이에가 선정한 수가가 쓰여지고, 이것이 오구라 백인일수의 기원으로 전통문화로 이어지고 있다.[1] 정토종을 신앙한 요리쓰나는 교토, 기류, 우쓰노미야에 염불당을 건립하였으며, 현재도 각각 뉴호잔 사이호지, 우메다잔 사이호지, 호우쿠잔 세이간지에 계승되고 있다.[1] 요리쓰나는 막부로부터 사면된 뒤인 1215년에는 온조지 (현재의 미이데라) 재건에 힘썼고, 그 공으로 이요국 슈고에 임명되었다 (1220年일본어 경 - 1235年일본어 경).[1]
가마쿠라 시대 중기, 제8대 우쓰노미야 사다쓰나는 몽골의 일본 침략 때, 가마쿠라 막부에 의한 토벌군의 총대장으로서 규슈로 향했고, 이에 승리하자 가마쿠라 막부 히키츠케슈에 임명되었다.[1] 사다쓰나는 망모의 13주기에 전국적으로도 드문 거대한 철제 탑파를 봉납했다고 한다(우쓰노미야시 세이간지 소장: 국가 중요 문화재).[1]
3. 2. 무로마치 시대
간오의 교란에서 우쓰노미야 우지츠나가 아시카가 다카우지 측에 서서 무공을 세웠고, 다카우지의 의향으로 고즈케・에치고 슈고직을 맡아, 북간토 및 간토 전체에서의 지배적 지위를 확고히 했다(삿타 산 체제).[1] 그러나 다카우지 사후, 가마쿠라 구보였던 아시카가 모토우지는 자신의 측근이자 간오의 교란에서 다카우지와 적대했던 전 고즈케・에치고 슈고직 우에스기 노리아키를 강제로 간토 관령에 복귀시켰다. 우에스기 노리아키가 고즈케・에치고 슈고직을 우지츠나에게서 강제로 반환하려 하자 우지츠나가 이를 거부했고, 모토우지는 간토 관령에 대한 반항을 이유로 우지츠나를 추토했다.[1]
시모쓰케 슈고직인 오야마 요시마사에게 우지츠나의 아들 11대 우쓰노미야 모토츠나가 살해되자 가마쿠라 구보는 우쓰노미야 씨를 지원했다(오야마씨의 난).[1] 13대 우쓰노미야 모치츠나가 가즈사 슈고직에 임명되자, 가마쿠라 구보의 경계를 받아 토벌을 받았다.[1] 우쓰노미야 씨는 무로마치 막부 직속의 교토 후치슈에 가담하여 가마쿠라 구보에 대항하며 세력 회복을 도모했다.[1]
지쓰나 사망 후 우쓰노미야 씨는 일문인 무모 씨를 중심으로 하는 친 무로마치 막부파와, 시오야 씨나 중신인 하가 씨 · 마시코 씨를 중심으로 하는 친 가마쿠라 부파의 두 파벌 간의 가독을 둘러싼 항쟁이 계속되었다. 시오야 씨 출신의 우츠노미야 이에쓰나가 가마쿠라 부의 공인을 받아 당주로 인정받았으나, 에이쿄 3년(1431년)에 무로마치 막부와 가마쿠라 부의 화해 조건으로 우쓰노미야 씨의 가독 문제가 거론되었고, 막부의 의향에 따라 지쓰나의 유복자인 우쓰노미야 모치츠나가 14대 당주로 계승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쓰노미야 씨는 모치쓰나파와 이에쓰나파로 분열되었고, 이 불안정한 상태는 유키 전투에서 이에쓰나가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교토쿠 3년(1454년), 교토쿠의 난이 발발하자 모치쓰나는 막부로부터 아시카가 시게우지 추토 명령을 받은 이마가와 노리타다의 군세에 호응하여 가마쿠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그러나 오야마 씨에게 의지하여 고가로 도망친 아시카가 시게우지는 오야마 모치마사, 나스 스케모치 등에 의한 우쓰노미야 토벌을 감행하여 우쓰노미야 성을 포위했다. 그러던 중 중신 하가 씨나 모치쓰나의 적남 우츠노미야 아키쓰나가 고가 부 측으로 전향했기 때문에 모치쓰나는 아키쓰나에게 가독을 양도하고 출가했다.
이 무렵 오야마 씨의 세력은 간토 관령 우에스기 씨에 필적할 정도였고, 15대 우츠노미야 아키쓰나와 16대 우츠노미야 마사츠나는 오야마 모치마사의 조카 관계였기 때문에, 우쓰노미야 영지 남부와 쓰가 군을 양도하고 후견을 받았다.
우츠노미야 마사쓰나는 시오야 씨, 무모 씨와 같은 주요 일문을 신종화하여, 전국 시대 우쓰노미야 가문의 원형을 만들었다.
3. 2. 1. 남북조 시대
가마쿠라 시대 말기 가와치국에서 쿠스노키 마사시게 등이 거병하자, 제9대 우츠노미야 키미츠나는 토벌군에 참가했고, 마사시게로부터 "'''반동 제일의 궁술가'''"라는 평가를 받았다.[7] 키세이 양당은 "전장에서 목숨을 버리는 것은, 티끌이나 쓰레기보다 가벼운 것"이라고 우츠노미야 씨의 무용을 높이 평가했다.[7] 막부 멸망 후 고다이고 천황의 겐무의 신정이 시작되자 잡소결단소를 맡았다. 아시카가 타카우지가 가마쿠라에서 신정에서 이반한 후에도 키미츠나는 남조 측으로 활동했지만, 아들인 10대 우츠노미야 우지츠나는 아시카가 씨에 속했다. 아시카가 가문의 내분에서 발전한 간오의 교란에서는 타카우지 측에 선 우지츠나가 무공을 세웠고, 타카우지의 의향으로 고즈케・에치고 국 슈고직을 맡아, 북간토 및 간토 전체에서의 지배적 지위를 확고히 했다(삿타 산 체제).
타카우지가 죽자 가마쿠라 쿠보였던 아시카가 모토우지 (타카우지의 아들)는 자신의 측근이면서 간오의 교란에서는 타카우지와 적대했던 전 고즈케・에치고 슈고직 우에스기 노리아키를 강제로 간토 칸레이로 복귀시켰다. 게다가 우에스기 노리아키가 고즈케・에치고 슈고직을 우지츠나로부터 강제로 반환하려 하자 우지츠나가 이를 거부했고, 모토우지는 간토 칸레이에 대한 반항을 이유로 우지츠나를 추토했다. 그 후, 시모츠케 슈고직의 오야마 요시마사에게 우지츠나의 아들 11대 우츠노미야 모토츠나가 살해되자 가마쿠라 쿠보는 우츠노미야 씨를 지원했다(오야마 씨의 난). 서류에서 우츠노미야 씨에 들어간 13대 우츠노미야 모치츠나가 카즈사 국 슈고직에 임명되자, 가마쿠라 쿠보의 경계를 받아 토벌을 받았다. 이러한 가마쿠라 쿠보의 방침에 불만을 품은 우츠노미야 씨는 무로마치 막부 직속의 교토 후치슈에 가담하여 가마쿠라 쿠보에 대항하며 세력 회복을 도모했다.
우츠노미야 우지츠나・모토츠나 부자가 시모츠케 국 슈고에 보임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이를 지지하는 신카와 타케노리・이소카이 후지오와 이를 비판하여 오야마 씨의 세습이 지속되었다고 주장하는 마츠모토 카즈오・에다 이쿠오의 논쟁이 있다. 이 논쟁을 배제하더라도 오야마 모치마사가 사망하고 오야마 씨가 쇠퇴한 15세기 후반의 우츠노미야 마사츠나・나리츠나 시대에는 우츠노미야 씨는 시모츠케 국 슈고직의 지위를 획득했다고 여겨지고 있다.
지쓰나 사망 후 우츠노미야 씨는 일문인 무모 씨를 중심으로 하는 친 무로마치 막부파와, 일문인 시오야 씨나 중신인 하가 씨 · 마시코 씨를 중심으로 하는 친 가마쿠라 부파의 두 파벌 간의 가독을 둘러싼 항쟁이 계속되었다. 시오야 씨 출신의 우츠노미야 이에쓰나가 가마쿠라 부의 공인을 받아 우쓰노미야 씨의 당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에이쿄 3년(1431년)에 무로마치 막부와 가마쿠라 부의 화해 교섭이 이루어졌을 때 조건 중 하나로 우츠노미야 씨의 가독 문제가 거론되었고, 최종적으로 가독은 막부의 의향에 따라 지쓰나의 유복자인 우츠노미야 모치츠나가 14대 당주로 계승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츠노미야 씨는 모치쓰나파와 이에쓰나파로 분열되었고, 이 불안정한 상태는 유키 전투에서 이에쓰나가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교토쿠 3년(1454년)에 교토쿠의 난이 발발하자 모치쓰나는 막부로부터 아시카가 시게우지 추토 명령을 받은 스루가 수호 이마가와 노리타다의 군세에 호응하여 우쓰노미야 세력을 일으켜 가마쿠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그러나 오야마 씨에게 의지하여 고가로 도망친 아시카가 시게우지는 보복으로 오야마 모치마사, 나스 스케모치 등에 의한 우쓰노미야 토벌을 감행하여 우쓰노미야 성을 포위했다. 그러던 중 중신 하가 씨나 모치쓰나의 적남 우츠노미야 아키쓰나가 고가 부 측으로 전향했기 때문에 모치쓰나는 아키쓰나에게 가독을 양도하고 출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우쓰노미야 성에서 추방되었다.
이 무렵 오야마 씨의 세력은 간토 관령 우에스기 씨에 필적할 정도였고, 15대 우츠노미야 아키쓰나와 16대 우츠노미야 마사츠나는 오야마 씨 당주 오야마 모치마사의 조카 관계였기 때문에, 우츠노미야 영지 남부와 우츠노미야 영지 쓰가 군을 양도하고 후견을 받음으로써 침공을 면하고 있었다.
우츠노미야 마사쓰나는 시오야 씨, 무모 씨와 같은 주요 일문을 신종화하여, 전국 시대 우쓰노미야 가문의 원형을 만들었다.
3. 2. 2. 무로마치 시대 중기
간오의 교란에서 우지츠나가 타카우지 측에 서서 무공을 세웠고, 타카우지의 의향으로 고즈케・에치고 슈고직을 맡아, 북간토 및 간토 전체에서의 지배적 지위를 확고히 했다(삿타 산 체제).[1] 그러나 타카우지 사후, 가마쿠라 구보였던 모토우지 (타카우지의 아들)는 자신의 측근이자 간오의 교란에서 타카우지와 적대했던 전 고즈케・에치고 슈고직 우에스기 노리아키를 강제로 간토 관령에 복귀시켰다. 게다가 우에스기 노리아키가 고즈케・에치고 슈고직을 우지츠나에게서 강제로 반환하려 하자 우지츠나가 이를 거부했고, 모토우지는 간토 관령에 대한 반항을 이유로 우지츠나를 추토했다.[1] 그 후, 시모쓰케 슈고직인 오야마 요시마사에게 우지츠나의 아들 11대 모토츠나가 살해되자 가마쿠라 구보는 우츠노미야 씨를 지원했다(오야마씨의 난).[1] 서류에서 우츠노미야 씨에 들어간 13대 모치츠나가 카즈사 슈고직에 임명되자, 가마쿠라 구보의 경계를 받아 토벌을 받았다.[1] 우츠노미야 씨는 이러한 가마쿠라 구보의 방침에 불만을 품고 무로마치 막부 직속의 교토 후치슈에 가담하여 가마쿠라 구보에 대항하며 세력 회복을 도모했다.[1]
3. 3. 센고쿠 시대
전국 시대에 우쓰노미야 나리쓰나 사후 우쓰노미야 가문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나리쓰나의 아들인 18대 다다쓰나는 가신단을 강력하게 통제하려 했으나, 이는 가신들의 반란을 불러왔다. 다이에이의 내분으로 인해 우쓰노미야 씨 당주의 권위는 크게 떨어졌다.[1]
19대 우쓰노미야 오키쓰나와 20대 우쓰노미야 도시쓰나 시대에는 우쓰노미야 씨 당주가 가신단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무케 씨나 마쓰노 씨와 같은 일족도 사타케 씨에게 항복하여 우쓰노미야 가문을 떠났다.[1]
21대 우쓰노미야 히로쓰나 시대에는 아버지 우쓰노미야 히사쓰나가 기레가와 사오토메자카 전투에서 나스 씨에게 살해당하고, 숙부인 미부 쓰나후사·미부 쓰나오 부자에게 우쓰노미야 성을 빼앗기는 하극상까지 당했다. 그러나 중신 하가 다카사다의 도움과 1557년 호조 우지야스, 사타케 요시아키 등의 협력으로 우쓰노미야 성을 되찾았다. 이후 우에스기 겐신, 사타케 요시시게 등과 함께 호조 씨와 대립했다. 히로쓰나는 난로인과 결혼하여 사타케 씨와의 관계를 강화했다.[1]
22대 우쓰노미야 구니쓰나는 방어에 취약한 우쓰노미야 성을 가신에게 맡기고, 다케야마 성을 북간토 최대 규모의 산성으로 개축하여 본거지로 삼았다. 이는 호조 씨, 미부 씨, 나스 씨, 미나가와 씨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주변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우쓰노미야 씨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시노이 금산에서 얻은 이익으로 방어 시설과 무기를 정비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1]
3. 3. 1. 우쓰노미야 나리쓰나의 등장
전국 시대 초기에 제17대 당주인 우쓰노미야 나리쓰나가 등장했다. 그는 "우쓰노미야 씨 중흥의 조"라고 불리며, 우쓰노미야 씨의 전성기를 구축한 명장으로 평가받는다.[1] 나리쓰나는 어린 나이에 가독을 상속받았지만, 뛰어난 능력으로 가문을 이끌었다.
가독 상속 후, 나리쓰나는 반란을 일으킨 무모 씨를 중신 하가 다카마스, 하가 가게타카의 도움을 받아 진압하고, 고가 공방 아시카가 나리우지의 지원을 받아 재신종시켰다.[1] 또한, 오야마 모치마사 사후 혼란에 빠진 오야마 씨의 영지를 공격하여 세력을 확대했다.[1]
나리쓰나는 외교에도 능숙하여, 고가 공방 아시카가 나리우지의 차남이자 차기 간토 간레이로 여겨지는 우에스기 아키자네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고, 자신의 딸 즈이운인을 차기 고가 공방 아시카가 다카모토에게 시집보내는 등 고가 공방 가문 및 간토 간레이 우에스기 가문과 긴밀한 관계를 구축했다.[1] 가미나스 씨 당주 나스 스케치카, 오다 씨 당주 오다 나리하루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고, 유키 씨 당주 유키 마사토모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는 등 주변 세력과의 관계도 강화하여 기타칸토에서의 지배적 지위를 확고히 했다.[1]
가신단 재편에도 힘써, 유력 일문인 시오야 씨나 무모 씨에게 형제를 잇게 하는 등, 우쓰노미야 씨 당주를 정점으로 하는 전국 시대 우쓰노미야 가문을 형성했다.[1] 또한, 신종한 자에게는 이름에 "강" 자를 부여하여 가신들과의 결속력을 높이려 했다.[1]
에이쇼 연간에 고가 공방 가문의 분쟁이 발생하자, 나리쓰나는 사위 아시카가 다카모토를 비호하고, 다카모토의 고가 공방 옹립을 지원했다.[1] 그러나, 필두 중신 하가 다카카쓰가 아시카가 마사우지의 지지를 표명하며 나리쓰나와 대립했고, 나리쓰나는 다카카쓰의 책략에 의해 아들 다다쓰나에게 가독을 양위하고 은거했다.[1] 하지만, 나리쓰나는 후견인으로 동생 시오야 다카쓰나를 붙여 다다쓰나가 다카카쓰의 괴뢰가 되는 것을 막았다.[1]
1512년, 나리쓰나는 다카카쓰를 살해하고, 우쓰노미야 착란을 진압했다.[1] 1514년에는 고가 공방 아시카가 마사우지 파의 사타케 요시스미 등이 이끄는 연합군과 다케바야시 전투에서 승리하여 아시카가 다카모토의 고가 공방 취임을 확정지었다.[1] 1516년에는 다시 침공해 온 사타케 요시스미와 이와키 씨의 연합군을 나와쓰리의 전투에서 격파했다.[1] 이러한 승리들을 통해 나리쓰나는 우쓰노미야 씨의 세력을 안정화하고 전성기를 이끌었다.[1]
3. 3. 2. 우쓰노미야씨의 쇠퇴
에이쇼 연간 고가 공방 가문의 분쟁이 발생한 후, 나리쓰나 사후 우쓰노미야 가문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나리쓰나의 아들인 18대 다다쓰나는 가신단을 강력하게 지배하려 했으나, 이는 가신들의 반란을 불러왔다. 다이에이의 내분으로 인해 우쓰노미야 씨 당주의 권위는 크게 떨어지고 약화되었다.[1]
19대 우쓰노미야 오키쓰나와 20대 우쓰노미야 도시쓰나 시대에는 우쓰노미야 씨 당주가 가신단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무케 씨나 마쓰노 씨와 같은 일족도 사타케 씨에게 항복하여 우쓰노미야 가문을 떠났다.[1]
21대 우쓰노미야 히로쓰나 시대에는 아버지 우쓰노미야 히사쓰나가 기레가와 사오토메자카 전투에서 나스 씨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설상가상으로 숙부인 미부 쓰나후사·미부 쓰나오 부자에게 우쓰노미야 성을 빼앗기는 하극상까지 당했다. 그러나 중신 하가 다카사다의 도움과 1557년 호조 우지야스, 사타케 요시아키 등의 협력으로 우쓰노미야 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후 우에스기 겐신, 사타케 요시시게 등과 함께 호조 씨와 대립했다. 히로쓰나는 사타케 요시아키의 딸 난로인과 결혼하여 사타케 씨와의 관계를 강화했다.[1]
22대 우쓰노미야 구니쓰나는 방어에 취약한 우쓰노미야 성을 가신에게 맡기고, 다케야마 성을 북간토 최대 규모의 산성으로 개축하여 본거지로 삼았다. 이는 호조 씨, 미부 씨, 나스 씨, 미나가와 씨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주변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우쓰노미야 씨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시노이 금산에서 얻은 이익으로 방어 시설과 무기를 정비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1]
3. 4. 도요토미 정권기 이후
덴쇼 18년(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다와라성 공격(오다와라 정벌)으로 호조씨가 몰락하면서 우쓰노미야씨는 시모쓰케국 18만 석의 영지를 유지했다. 구니쓰나는 1592년 조선 출병에도 참전했고, 귀환 후에는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아 종5위하에 임명되었으나, 1597년 갑작스럽게 개역되어 비젠국으로 유배되었고, 1608년 에도 아사쿠사의 이시하마에서 실의 속에서 병사했다. 이로 인해 22대, 500년에 걸쳐 번영한 간토의 명문 우쓰노미야씨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개역 이유는 다이코 검지를 위해 파견된 아사노 나가마사에게 석고 부정을 호소당한 점, 아사노 나가마사의 차남 나가시게와 우쓰노미야가의 양자 문제의 꼬임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 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에 가담하는 것을 구니쓰나가 거부했기 때문에 가문 재흥이 인정되지 않았다고 여겨졌지만, 최근 발견된 사료에 의해 세키가하라 전투 직전에 구니쓰나가 이에야스에게 섬기고 있었음이 확인되었고, 또한 동생인 하가 다카타케가 이시다 미쓰나리의 가신이 되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오늘날에는 구니쓰나가 동군에 가담하여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하려 했지만, 동생인 하가 다카타케, 유키 아사카쓰의 활약으로 인해 옛 신하의 대부분이 서군에 가담하여 이에야스의 아이즈 정벌을 방해했기 때문에 전공이 인정되지 않아 도요토미 정권 붕괴 후에도 가문의 재흥은 인정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구니쓰나의 아들 우쓰노미야 요시쓰나는 미토번・도쿠가와 요리후사를 섬겼고, 아들인 우쓰노미야 다카쓰나는 가로로 발탁되었다. 이후 자손은 에도 시대에 미토번의 무사, 메이지 유신 이후 사족이 되었다.
방계로는 히타치국 수호 오다씨나, 미카와국 출신으로 에도 시대에는 도쿠가와 가문후다이 다이묘로서 오다와라를 다스린 오쿠보씨[3]가 시조로 존경하는 무케씨가 있다.
4. 서류
우쓰노미야씨의 서류로는 후지와라 무네요의 둘째 아들인 나카하라 무네후사가 부젠국 나카쓰군 조이향에 지토 직으로 부임한 것이 '''부젠 우쓰노미야씨'''의 시작이라고 한다. 그 아들 우쓰노미야 노부후사는 부젠노카미에 임명되어 규슈부젠국으로 내려갔고, 한때는 쓰쿠시군 혼조성을 거점으로 우사, 쓰쿠시, 시모게, 나카쓰, 다가와 등 각 군에 서가를 배치했다. 우쓰노미야 가게후사는 규슈 평정의 공적으로, 가게후사의 아들 우쓰노미야 노부카게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로부터 막부 효조슈, 규슈 시봉행에 임명되어 규슈 무사들을 통괄하기도 했다. 부젠 우쓰노미야씨 7대 우쓰노미야 후유쓰나(조이 후유쓰나)가 조이씨의 조상이 된다.
지쿠고국에 세력을 떨친 '''지쿠고 우쓰노미야씨'''도 알려져 있다. 우쓰노미야 사다쓰나(원나라의 일본 침략 때 토벌군 총대장)와 함께 규슈에 동행했고, 지쿠고국야마토군 오키를 거점으로 삼았던 사다쓰나의 동생인 우쓰노미야 야스무네의 자손이 직접적인 시조이다. 야스무네의 아들인 우쓰노미야 사다야스는 남북조 시대에 시코쿠이요국에 세력을 유지했고, 남조의 가이라쿠 친왕과 함께 조이씨의 거점인 부젠국 나카쓰로 옮겨갔지만, 북조 측의 부젠 우쓰노미야씨에 대해, 남조 측에서 히고국 야쓰시로로 옮겨간 우쓰노미야 사다야스의 차남 우쓰노미야 사다히사가 시작이라고 한다. 사다히사의 손자 우쓰노미야 히사노리가 지쿠고 15성 으뜸인 우쓰노미야씨 계 가마치씨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히사노리의 조카로, 옛 지반인 오키 성주였던 우쓰노미야 도모나가는 "오키"로 성을 개명했다고 전해진다. 메이지 시대에 정치가로 활약한 오키 다카토는 오키씨의 서류에 해당한다.
다만, 근년의 연구에서는 지쿠고 우쓰노미야씨가 가마치씨로 전환했다는 설은 에도 시대 중기에 성립된 『가마치 이야기』에 처음 등장하는 이야기이므로, 창작일 것이라고 한다.
시코쿠이요국의 '''이요 우쓰노미야씨'''는 이요노카미에 임명된 우쓰노미야 도요후사가 시조이다. 도요후사는 부젠 우쓰노미야씨 7대가 된 우쓰노미야 후유쓰나(조이 후유쓰나)의 동생이었다. 덧붙여, 후유쓰나는 우쓰노미야씨 제9대 당주 우쓰노미야 기미쓰나의 동생이다. 도요후사에게는 자식이 없어, 우쓰노미야 사다야스의 넷째 아들 우쓰노미야 무네야스가 잇는다.
근년, 그 존재가 지적되고 있는 것은 미노국을 거점으로 한 '''미노 우쓰노미야씨'''이다. 이 가문은 미노 슈고였던 우쓰노미야 야스쓰나의 아들 우쓰노미야 모리쓰나의 자손이라고 전해지며, 미노 난구 다이샤의 사가인 우쓰노미야씨도 이 씨의 말예라고 하는 전승이 있다. 이 씨의 상세한 계보는 불명이지만, 아시카가 요시히사를 섬긴 호코슈 중에 미노국을 본거지로 하는 우쓰노미야 지카쓰나·무네쓰나 (후에 후지쓰나로 개명) 부자가 존재했던 것이 알려져 있다. 또한, 이치무라 다카오미는 호코슈의 미노 우쓰노미야씨는 우쓰노미야 사다야스의 형 우쓰노미야 사다무네의 계통이었다고 하는 설을 채택하고 있다.
5. 우쓰노미야씨 씨족
후지와라씨 일족인 후지와라 북가의 후지와라노 미치카네의 증손이라고 칭하는 후지와라노 소엔이 미나모토노 요리요시, 요시이에의 오슈 아베씨 토벌 (전9년의 역)에서의 공로로, 우쓰노미야 (현 도치기현 우쓰노미야시 후타아라야마 신사의 별칭) 별당직에 임명되어, 소엔의 손자인 우쓰노미야 도모쓰나부터 우쓰노미야씨를 칭했다. 그러나 『우쓰노미야시 역사(宇都宮市史)』나 『성씨가계대사전(姓氏家系大辞典)』에서는 소엔을 후지와라노 미치카네의 후손으로 하는 것은 후세의 가짜로, 우쓰노미야씨는 나카하라씨 출신 또는 고대 쓰케노씨의 일족으로 야다베씨 (또는 샤모치기미) 후예로 한다. 근래에는 『주우키(中右記)』의 기술을 근거로 지금까지의 각종 계보를 부정하여, 소엔은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손자로 보는 지적도 있다.[2]
우쓰노미야씨는 시모쓰케국이 본관이었기 때문에, 시모쓰케 우쓰노미야씨라고도 불린다. 시모쓰케국 이치노미야 명신대사였던 우쓰노미야 후타아라야마 신사 좌주 및 닛코산 별당직 등을 맡아 기세이 양당을 이끌고 22대, 500년에 걸쳐 시모쓰케국을 다스렸다. 고쿠시와 슈고도 역임하여, 현재는 센고쿠 다이묘로 평가받고 있다.
우쓰노미야씨는 대씨족으로, 전국에 분포하고 있다. 지방사를 포함해 역사에 이름이 남은 우쓰노미야씨는 대략 다음과 같다.
적류 | 서류 | 비고 |
---|---|---|
시모쓰케 우쓰노미야씨 | 부젠 우쓰노미야씨 | 시모쓰케국을 본거지로 함. |
하가씨 | 기이씨 | 부젠국을 본거지로 함. |
무모씨 | 야마가씨 | |
이마이즈미씨 | 아소씨 | |
마쓰노씨 | 이즈카씨 | |
다코씨 | 사다씨 | |
요코타씨 | 지쿠고 우쓰노미야씨 | 지쿠고국을 본거지로 함. |
이마이즈미씨 | 가마치시 | |
시오야씨 | 오오키씨 | |
가사마시 | 이누즈카씨 | |
고오카씨 | 이마무라씨 | |
아키모토씨 | 이사하야 우쓰노미야씨 | |
오치아이씨 | 이요 우쓰노미야씨 | 이요국을 본거지로 함. |
우지이에씨 | 히젠 우쓰노미야씨 | |
니시카타씨 | 히고 우쓰노미야씨 | |
고야마씨 | 오오스미 우쓰노미야씨 | |
가모씨 | ||
이시이씨 | ||
가미노카와씨 | ||
오사카베시 | ||
야나씨 | ||
구와시마씨 | ||
오오야마다씨 |
이들 우쓰노미야씨는 분가한 뒤에도 양자 및 혼인을 통해 동족적 유대관계를 보였다. 예를 들어 시모쓰케 우쓰노미야씨 6대 우쓰노미야 사다쓰나의 동생이자 큐슈로 내려가 지쿠고국 야마토군 오오기성을 본거지로 한 우쓰노미야 야스무네의 아들로, 큐슈 부젠 나카츠에 있던 우쓰노미야 사다야스의 장남 우쓰노미야 요시쓰나의 아들 우쓰노미야 모토쓰나는 부젠 우쓰노미야 기이씨에 들어갔고, 사다야스의 차남 우쓰노미야 사다히사의 아들 우쓰노미야 가네히사는 지쿠고 우쓰노미야 가마치씨가 되었고, 사다야스의 4남 우쓰노미야 무네야스는 이요 우쓰노미야씨를 이었다. 가네히사의 동생 우쓰노미야 도모쓰나의 아들 우쓰노미야 마사나가는 시조인 우쓰노미야 야스무네의 오오키성을 이어, 지쿠젠 우쓰노미야 오오키씨로 칭했다.
다음은 우쓰노미야씨의 방계이다. 소엔의 아들 핫타 무네쓰나의 계루인 핫타 일족의 가문들이지만, 핫타 무네쓰나의 적자인 우쓰노미야 도모쓰나 (핫타 도모쓰나)를 선조로 하는 종족인 우쓰노미야씨와는 분리되었다고 할 수 있는 세력을 구축한 가문이다. 따라서 위의 서가와는 나누어 적는다. 이 핫타 일족은 주로 히타치국, 히젠국의 오다씨나 아키국의 시시도씨 등이 배출되었다.
- 핫타 도모이에
- * 서류 오다씨
- * 서류 시시도씨
- * 서류 모테기씨
도쿠가와씨의 가신인 미카와국 오오쿠보씨도 우쓰노미야씨의 후손을 자칭하며, 오오쿠보 계보에 의하면, 우쓰노미야 사다쓰나의 동생 우쓰노미야 야스무네 (무모 야스무네)의 아들 우쓰노미야 도키카게의 아들 우쓰노미야 야스토가 되는 인물을 시조로 한다. 손자 도이 때에 우츠(宇津)로 칭하며, 그의 5대 후의 우츠 다다토시가 오오쿠보씨의 선조로 여겨진다.
『번한보(藩翰譜)』에 의하면, 우쓰노미야 야스토는 남조측으로, 닛타 요시사다가 토벌되었을 때, 에치젠국을 떠나 미카와국 오오쿠보에 살았던 것에서 비롯된다고 하지만, 에도시기 이전의 자료에는 그러한 기재는 없고, 미카와 토착의 오오쿠보씨는 우츠씨라고 전해지며, 결국 우쓰노미야씨와는 별개로 여겨진다.
6. 와카의 일족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 "'''관동 제일의 궁술가'''"라고 불린 우쓰노미야 도모쓰나는 제3대 우쓰노미야 씨 당주이다. 5대 우쓰노미야 요리쓰나는 무인으로 오슈 후지와라 씨 토벌에 공을 세웠으나, 가마쿠라 막부로부터 모반 혐의를 받자 호넨에게 귀의하여 출가했다. 승려가 된 요리쓰나는 지신보 렌쇼라 칭하며 교토에 은거하여 '''우쓰노미야 가단'''을 확립했다.
교토 사가노의 오구라 산기슭 암자에 살면서 후지와라노 사다이에와 친분을 쌓았는데, 그 암자의 미닫이 종이에 사다이에가 선정한 노래가 쓰여졌고, 이것이 오구라 백인일수의 기원이 되었다. 정토종을 신앙한 요리쓰나는 교토 토키와, 기류, 우쓰노미야에 염불당을 건립했고, 현재도 각각 뇨보잔 사이호지, 바이덴잔 사이호지, 호큐잔 세이간지에 계승되고 있다. 요리쓰나는 막부로부터 사면받은 후인 1215년에는 온조지(미이데라) 재건에 힘썼고, 그 공으로 이요 국 슈고에 임명되었다 (1220년경 - 1235년경).
가마쿠라 시대 중기, 제8대 우쓰노미야 사다쓰나는 몽골의 일본 침략 때 가마쿠라 막부 토벌군 총대장으로서 규슈로 출정하여 승리하고, 가마쿠라 막부 히키츠케슈에 임명되었다. 사다쓰나는 망모의 13주기에 전국적으로도 드문 거대한 철제 탑파를 봉납했다고 한다(우츠노미야시 세이간지 소장: 국가 중요 문화재).
우쓰노미야 요리쓰나는 후지와라노 사다이에와 친교를 맺어 우쓰노미야 가단을 교토 가단, 가마쿠라 가단에 비견될 정도로 발전시켰다. 1229년(칸키 원년)에는 후지와라노 사다이에와 후지와라노 이에타카 두 가인이, 우쓰노미야 다이묘진(후타라야마 신사)에서 진구지를 지었을 때, 후스마를 장식하는 쇼지 노래로서 야마토국의 명소 노래 10수를 색지에 써서 증정했다.[6] 1235년(가테이 원년) 여름에는 사다이에가 요리쓰나의 의뢰를 받아 교토 서쪽 교외인 사가의 주인의 요리쓰나가 세운 산장의 쇼지 노래 색지를 써서 증정했다. 백인일수는 이때 사다이에가 선정해 준 와카 98수를 그 후스마 그림으로 장식한 데서 시작되었다고 한다.[6]
요리쓰나의 동생 시오야 아사나리 (신쇼)의 『신쇼 호시슈』, 아사나리의 아들 카사마 토키토모의 『전나가토노카미 토키토모 뇨쿄 이나카 우치키키슈』, 요리쓰나의 손자 우쓰노미야 카게쓰나 (렌유)의 『사미 렌유슈』가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요코타 요리나리 (요리쓰나의 차남), 핫타 토키이에 (요리쓰나의 조부 아사쓰나의 동생 핫타 토모이에의 아들), 무모 야스무네 (카게쓰나의 삼남)가 칙찬집 등에 이름을 남기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우쓰노미야나 카사마 등에서 가회가 열려, 우쓰노미야 가단은 가마쿠라 다음 가는 지방 가단의 성황을 보였다.[6]
6. 1. 『신◯와카슈』
5대 우쓰노미야 요리쓰나는 동족인 후지와라노 사다이에와 친교를 맺어 우쓰노미야 가단을 교토 가단, 가마쿠라 가단에 비견될 정도로 끌어올렸으며, 이들을 합쳐 '''일본 3대 가단'''이라고 불렀다.[6]주산대집이나 우쓰노미야 가단의 가집인 『신◯와카슈』에는 요리쓰나와 그 자손의 작품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6] 요리쓰나 자신의 와카는 『신○와카슈』에 59수가 수록된 것을 시작으로, 『신초쿠센 와카슈』(3수), 『조쿠고센 와카슈』(6수), 『조쿠슈이 와카슈』(6수), 『신고센 와카슈』(6수) 등의 칙찬 와카집에는 39수가 뽑혔으며, 중복을 제외하면 약 90수 정도가 현존한다.[6]
우쓰노미야 일족은 요리쓰나와 후지와라노 사다이에의 친교처럼 수도의 문화인과 교류하며 많은 가인을 배출했다. 이들의 와카를 중심으로 정리된 것이 『신○와카집』이다. 후타라야마 신사에 전해지는 간분 12년(1672년) 사본 오쿠가키에 따르면, 니조 타메우지가 우쓰노미야로 내려와 편찬한 와카집은 원래 『신식 와카집』이었으나, 어떤 사정으로 한 글자가 제거되어 「신○와카집」이 되었다고 한다.[6]
『신○와카집』은 후지와라노 사다이에와 요리쓰나의 손자 니조 타메우지가 선별했다고 전해지며, 186명의 875수가 수록되어 있다. 요리쓰나가 사망한 쇼겐 원년(1259년) 11월 12일 직전인 같은 해 9월 즈음에 완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렌쇼의 59수를 시작으로 노부오(시오야 토모나리), 렌유(우쓰노미야 카게쓰나) 등 우쓰노미야 일족 외에 미나모토노 사네토모, 사다이에와 타메이에 부자 등 교토, 가마쿠라를 대표하는 가인들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어, 우쓰노미야 일족의 문화 수준과 폭넓은 인맥을 보여준다.[6]
7. 역대 당주
대수 | 이름 | 비고 |
---|---|---|
초대 | 후지와라노 소엔 | 우쓰노미야씨 선조, 우쓰노미야 좌주 |
2대 | 핫타 무네츠나 | 나카하라 무네츠나라고도 함. 핫타 권두, 시모우사노카미 |
3대 | 우쓰노미야 토모츠나 | 후지와라노 토모츠나. 무네츠나의 적자. 핫타 토모츠나라고도 함. 우쓰노미야 검교, 우쓰노미야 사무직.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 "간토 제일의 활잡이"라고 불림.[1] |
4대 | 우쓰노미야 나리츠나 | 후지와라노 나리츠나. 좌위몬위 |
5대 | 우쓰노미야 요리츠나 | 우쓰노미야 검교, 이요 슈고. 호넨에 귀의하여 출가, 승려가 되어 지쓰신보 엔세이(実信房蓮生)라 칭함. 오구라 백인일수의 기원에 기여.[1] |
6대 | 우쓰노미야 야스츠나 | 효죠슈, 시모츠케노카미 |
7대 | 우쓰노미야 카게츠나 | 히키츠케슈, 효죠슈, 시모츠케노카미, 오와리노카미, 검교 |
8대 | 우쓰노미야 사다츠나 | 히키츠케슈, 검교, 좌위문위, 시모츠케노카미, 미카와노카미, 비젠노카미 |
9대 | 우쓰노미야 킨츠나 | 히키츠케슈, 좌마권두, 지부 다이스케, 비젠노켄스이, 우쓰노미야 검교 |
10대 | 우쓰노미야 우지츠나 | 시모츠케 슈고, 코우즈케 슈고, 에치고 슈고, 시모츠케노카미, 이요노카미 |
11대 | 우쓰노미야 모토츠나 | 시모츠케 슈고, 시모츠케노카미, 좌마두 |
12대 | 우쓰노미야 미츠츠나 | 시모츠케노카미 |
13대 | 우쓰노미야 모치츠나 | 코우즈케 슈고, 비젠노카미, 히타치노스케, 좌마두 |
14대 | 우쓰노미야 히토츠나/토모츠나 | 시모츠케노카미 |
15대 | 우쓰노미야 아키츠나 | 효부 다이스케, 시모츠케노카미 |
16대 | 우쓰노미야 마사츠나 | 시모츠케 슈고, 시모츠케노카미, 좌마두 |
17대 | 우쓰노미야 시게츠나 | 우마권두, 시모츠케노카미 |
18대 | 우쓰노미야 타다츠나 | 우마권두, 시모츠케노카미 |
19대 | 우쓰노미야 오키츠나 | 좌위문위, 좌위문독, 시모츠케노카미 |
20대 | 우쓰노미야 히사츠나 | 와위문위, 시모츠케노카미, 우마두 |
21대 | 우쓰노미야 히로츠나 | 시모츠케노카미 |
22대 | 우쓰노미야 쿠니츠나 | 시모츠케노카미, 하시바 쿠니츠나. 1597년 개역. |
23대 | 우쓰노미야 요시츠나 | 미토번사. 100인부지, 미토번 고가 |
24대 | 우쓰노미야 타카츠나 | 미토번사. 시모츠케노카미. 토리츠기역, 1000석, 가로, 죠다이 |
25대 | 우쓰노미야 히로츠나 | 미토번사. 코쇼가시라, 700석, 서원번두, 오반가시라, 오오요리아이가시라, 가로, 1000석 |
26대 | 우쓰노미야 토시츠나 | 미토번사. 1000석, 카미요리아이 |
27대 | 우쓰노미야 세이츠나 | 미토번사. 500석, 요리아이구미, 어요물번, 보행두, 소십인두, 진물번두, 서원번두, 오반가시라, 대기합두, 700석, 노중, 800석 |
'''● 부젠 우츠노미야씨''' (부젠국)
이름 | 비고 |
---|---|
나카하라 무네후사 | 핫타 무네쓰나의 동생 |
우쓰노미야 노부후사 | 야마토노카미 |
우쓰노미야 카게후사 | 이키노카미 |
우쓰노미야 노부카게 | 좌위문위 |
우쓰노미야 미치후사 | 사츠마노카미 |
우쓰노미야 요리후사 | 야마토노카미 |
우쓰노미야 후유쓰나 | 키이 후유쓰나. 히타치노스케 |
'''● 치쿠고 우츠노미야씨''' (치쿠고국)
이름 | 비고 |
---|---|
우쓰노미야 아스무네 | 우츠노미야씨 6대 우쓰노미야 사다츠나의 동생. 히타치노스케. 히사치노카미, 좌위문위 |
우쓰노미야 사다야스 | 미카와노카미 |
우쓰노미야 사다히사 | 사다야스의 차남. 이키노카미. 큰형 우쓰노미야 요시츠나, 동생 우쓰노미야 사다쿠니, 우쓰노미야 무네야스 |
우쓰노미야 카네히사 | 이키노카미 |
우쓰노미야 히사노리 | 카마치 히사노리. 미카와노카미, 이키노카미 |
'''● 이요 우츠노미야씨''' (이요국)
이름 | 비고 |
---|---|
우쓰노미야 토요후사 | 우쓰노미야 후유쓰나의 동생. 사츠마노카미 |
우쓰노미야 무네야스 | 우쓰노미야 사다야스의 4남. 토토미노카미 |
우쓰노미야 야스스케 | 시키부 사콘노다이스케 |
우쓰노미야 이에츠나 | 좌위문위 |
우쓰노미야 야스츠나 | 사콘노다이스케, 스오노카미 |
우쓰노미야 노부츠나 | 사콘노쿠로우도 |
우쓰노미야 키요츠나 | 사콘노다이스케 |
우쓰노미야 토요츠나 | 토토미노카미 |
참조
[1]
서적
尊卑分脈
[2]
서적
中右記
[3]
문서
대구보 씨가 무모 씨의 자손이라는 이야기는 도쿠가와 씨가 닛타 씨의 자손이라는 것과 같은 종류의 가모라고 한다
[4]
서적
尊卑分脈
[5]
문서
아버지는 [[우츠노미야 시게츠나]] 또는 [[우츠노미야 오키츠나]]라고 되어있는데, 여기서는 종래의 설인 [[우츠노미야 오키츠나]]를 아버지로하는 계보를 썼다.
[6]
웹사이트
백인일수 유카리의 무장 우츠노미야 요리츠나 (렌쇼)
https://utsunomiya-8[...]
[7]
서적
존비분맥
[8]
문서
아버지는 [[우츠노미야 시게츠나]] 또는 [[우츠노미야 오키츠나]]라고 되어있는데, 여기서는 종래의 설인 [[우츠노미야 오키츠나]]를 아버지로하는 계보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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