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타케야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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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타케야마씨는 간무 헤이시의 후손으로 시작되어, 겐지 하타케야마 가문과 헤이시 하타케야마 가문으로 나뉘어 존재했다. 헤이시 하타케야마 가문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섬기며 겐페이 전쟁에서 활약했으나, 호조씨와의 권력 투쟁에서 몰락했다. 겐지 하타케야마 가문은 아시카가 요시즈미가 계승하여 무로마치 막부에서 슈고 다이묘로 성장했으나, 오닌의 난 이후 내분과 센고쿠 시대를 거치며 쇠퇴했다. 주요 분가로는 니혼마쓰씨, 카와치 하타케야마씨, 노토 하타케야마씨 등이 있으며, 가신단은 무사시슈, 아시카가슈, 가마쿠라슈, 코쿠진슈, 야마토슈 등으로 구성되었다. 에도 시대에는 고케로 남았으며, 일부는 시족으로 존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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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오성은 무로마치 시대에 하타케야마 미쓰노리에 의해 축조되어 하타케야마씨의 노토 지배 거점으로 사용되었으며, 우에스기 겐신에게 함락된 후 오다 노부나가의 세력에 영유되었다가 폐성되었고, 현재는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 하타케야마씨 - 조주인 모리아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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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타케야마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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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정보 | |
성씨 | 하타케야마 (畠山) |
로마자 표기 | Hatakeyama-shi |
가문 문장 | [[파일:Ashikaga mon rev.svg|15px]] 아시카가후타츠히키 (足利二つ引) |
본성 | 간무 헤이시 타카모치 왕류 세이와 겐지 (가와치 겐지) |
가조 | 하타케야마 시게요시 (간무 헤이시) 하타케야마 요시즈미 (세이와 겐지) |
종별 | 무가 사족 |
출신지 | 무사시국 오부스마군 하타케야마고 |
근거지 | 가와치국 기이국 야마토국 엣추국 노토국 무쓰국 |
주요 인물 | 하타케야마 시게타다 하타케야마 구니키요 하타케야마 마사나가 하타케야마 요시히로 하타케야마 요시쓰구 하타케야마 나오요리 |
분가 | 이와마쓰 씨 (무가 → 화족 (남작)) 니혼마쓰 씨 (무가) 다나카 씨 (무가) 가와치 시부카와 씨 (무가) 야스이 씨 (무가) 등 |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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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가문 | [[파일:Ageha-cho.svg|15px]] 타이라 씨 (원래 계통) [[파일:Sasa Rindo.svg|15px]] 미나모토 씨 [[파일:Ashikaga mon.svg|15px]] 아시카가 씨 (복원된 계통) |
분가 (아사노 나가마사 이후) | 아사노 씨 |
분가 | 니혼마쓰 씨 |
2. 헤이시 하타케야마 가
반도하치 헤이시의 일족 치치부 시게히로의 아들 치치부 시게요시가 무사시국 오부스마군 하타케야마고 (현재의 사이타마현 후카야시 하타케야마 주변)에 소령을 얻어 하타케야마 성을 칭한 것이 헤이시 하타케야마 가문의 시작이다.
지쇼ㆍ쥬에이의 난에서 시게요시의 아들 하타케야마 시게타다는 처음에는 헤이시 편이었지만,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따라 이치노타니 전투와 오슈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시게타다는 후에 호죠 토키마사와 대립, 겐큐 2년 (1205년)에 무사시국 후타마타강에서 호죠 요시토키의 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난).[1]
이후 시게타다의 구령과 하타케야마의 묘세키는 아시카가 요시카네의 서장자 아시카가 요시즈미가 시게타다의 미망인인 호죠 토키마사의 딸과 혼인하면서 계승되었다. 이로써 간무 헤이시 중 하나였던 치치부 헤이시는 소멸하고, 세이와 겐지 중 하나인 카와치 겐지 일계 아시카가가의 일문으로 존속하게 되었다.[1]
; 역대 당주
# 하타케야마 시게요시 - 헤이시 하타케야마씨 선조)
# 하타케야마 시게타다
# 하타케야마 시게야스
2. 1. 개요
반도하치 헤이시의 일족인 치치부 시게히로의 아들 치치부 시게요시가 무사시국 오부스마군 하타케야마고 (현재의 사이타마현 후카야시 하타케야마 주변)에 소령을 얻어 하타케야마 성을 칭한 것이 시초이다('''헤이시 하타케야마가'''). 지쇼ㆍ쥬에이의 난에서 그의 아들 하타케야마 시게타다는 처음에는 헤이시 편이었지만,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따라 이치노타니 전투와 오슈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 시게타다는 후에 호죠 토키마사와 대립하여 겐큐 2년 (1205년)에 무사시국 후타마타강에서 호죠 요시토키 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난).[1]그 후, 시게타다의 구령과 하타케야마의 묘세키는 아시카가 요시카네의 서장자 아시카가 요시즈미가 시게타다의 미망인인 호죠 토키마사의 딸과 혼인하면서 계승되었다.[1] 이에 따라 간무 헤이시 중 하나였던 치치부 헤이시는 소멸하고, 세이와 겐지 중 하나인 카와치 겐지 일계 아시카가가의 일문으로 존속하게 되었다.[1]
요시즈미의 가계 ('''겐지 하타케야마가''')는 명문 하타케야마가의 묘세키를 계승한 것으로, 후에 아시카가 일문에서도 별가 취급을 받는 아시카가 오와리가(무위가, 이른바 시바가)에 이어 높은 서열로 나열되어, 호소카와가 등 다른 가신 혈통 분가와는 다른 대우를 아시카가 종가로부터 받게 되었다.[1]
키이 및 카와치, 엣츄의 슈고를 대체로 맡았으며, 분가는 노토 슈고를 맡았다.[1]
2. 2. 주요 인물
- 하타케야마 시게요시: 헤이시 하타케야마씨의 선조이다. 시치부 시게히로의 아들이자 하타케야마 씨의 창시자이다.
- 하타케야마 시게타다 (1165–1205): 겐페이 전쟁에서 미나모토 씨를 위해 싸웠다.
- 하타케야마 시게야스 (사망 1205): 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아들로, 하타케야마 씨 초기 계보의 마지막 인물이다.
- 하타케야마 요시즈미 (1175-1210): 아시카가 요시카네의 아들. 하타케야마 씨 제2 계보의 첫 번째 인물이다.
- 하타케야마 모치쿠니: 1398년 관령이 되었다.
- 하타케야마 요시나리: 1467년 하타케야마 마사나가와 관령 자리를 놓고 경쟁했다.
- 하타케야마 마사나가: 1467년 하타케야마 요시나리와 관령 자리를 놓고 경쟁했다.
- 하타케야마 타카마사 (사망 1576): 카와치 국 하타케야마 분가의 당주였다.
- 니혼마쓰 요시쿠니 (1521–1580): 무쓰 국 하타케야마 분가.
- 니혼마쓰 요시쓰구 (1552–1585): 무쓰 국 하타케야마 분가.
- 니혼마쓰 요시쓰나 (1574–1589)
- 니혼마쓰 요시타카 (1578–1655)
- 하타케야마 요시후사 (1491-1545): 노토 국의 다이묘로 1514년 노토 하타케야마 가문의 당주가 되었다.
- 하타케야마 요시타카 (사망 1576년): 노토 국 하타케야마 가문의 11대 당주.
2. 3. 몰락
지쇼·주에이 전란에서 하타케야마 시게타다(畠山重忠)는 처음에는 헤이케 편에 섰지만, 나중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따라 이치노타니 전투와 오슈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 시게타다는 나중에 호죠 시마사와 대립하여, 겐큐 2년(1205년) 무사시국후타마타가와에서 호조 요시토키의 군대와의 전투에서 패사했다(하타케야마 시게타다의 난).[1]이후, 시게타다의 옛 영지와 하타케야마의 명적은 아시카가 요시즈미(足利義純)가 시게타다의 미망인인 호죠 시마사의 딸과 혼인하여 계승했다. 요시즈미는 원래 닛타 요시카네(아시카가 요시카네와 동명이인)의 딸과 결혼하여 자식도 두었지만, 그 배우자를 의절한 후 계승하였다. 이로써 간무 헤이시의 하나인 칫푸 헤이시의 계보를 잇는 평성 하타케야마씨는 소멸하고, 세이와 겐지의 하나인 가와치 겐지의 일계인 아시카가가의 일문으로서 존속하게 되었다.[1]
요시즈미의 가계('''겐성 하타케야마가''')는 명문 하타케야마가의 명적을 계승했기 때문에, 후에 아시카가 일문 중에서 별가 취급인 아시카가 오와리가(무에가, 이른바 시바가)에 이어 높은 서열에 올랐고, 호소카와가 등 다른 가신 분가와는 다른 대우를 아시카가 종가로부터 받게 되었다.[1]
3. 겐지 하타케야마 가
겐무 3년 (1336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무로마치 막부를 창립하자, 하타케야마 가문은 엣츄, 카와치, 키이의 슈고를 맡았다. 칸노의 소란에서 서류인 하타케야마 쿠니키요는 아시카가 다다요시 편에 섰지만, 후에 다카우지 편으로 갈아타 가세를 유지했다. 한편, 하타케야마가 적류인 하타케야마 다카쿠니, 쿠니우지 부자는 칸노 2년 (1351년) 다다요시파의 키라 사다이에에게 패해 자결하고, 쿠니우지의 아들 니혼마츠 쿠니아키라는 니혼마츠로 옮겨갔다(오슈 하타케야마가).
본래 적류인 오슈 하타케야마가가 쇠퇴하는 가운데, 하타케야마 쿠니키요의 가계(킨고가)가 하타케야마가 부령격이 되었다. 쿠니키요는 칸토 관령에 임명되어 동쪽에서 남조 측과 싸웠지만, 가마쿠라 공방 아시카가 모토우지와 대립해, 게이안 원년 (1361년)에 실각했다. 쿠니키요는 그대로 몰락했지만, 쿠니키요의 동생 하타케야마 요시후카가 나중에 슈고에 임명되어 하타케야마가를 다시 부흥시켰다. 요시후카의 아들 하타케야마 모토쿠니는 메이토쿠 2년 (1391년) 메이토쿠의 난에서 공적을 올리는 등,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신임을 받아 노토 슈고를 맡는 등, 슈고다이묘로서 힘을 길렀다.
오에이 5년 (1398년) 관령으로 임명되어, 같은 아시카가 일문 시바 부에이가나 호소카와 케이쵸가 등과 함께 삼관령가로서 이름을 날리는 가문이 되었다. 모토쿠니의 아들 하타케야마 미츠이에는 요시미츠에게 냉대를 받았지만, 아시카가 요시모치 대에 이르러서야 조정에 복귀해 관령에 취임한다. 미츠이에의 아들 하타케야마 모치쿠니(토쿠모토)는 쇼군 권력의 강화를 목표로 하는 아시카가 요시노리의 간섭에 시달렸지만, 하타케야마가의 내분을 잠재우고 호소카와가나 야마나가와 맞대응하는 세력을 유지했다.
모치쿠니의 아들 하타케야마 요시히로와 조카 하타케야마 마사나가와의 사이에서 가독을 둘러싼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고, 이는 오닌의 난의 한 원인이 되었다. 분메이 9년 (1477년) 오닌의 난이 종식된 후에도 요시히로류(소슈가)와 마사나가류(오슈가)는 내분을 계속해, 이 대립은 양 호소카와가의 난과 함께 키나이를 내전 상태로 만들었다. 하타케야마 마사나가(하타케야마 오슈가)나 하타케야마 요시타카(하타케야마 소슈가)는 관령에 취임했지만, 센고쿠 말기 양가에서 각각 키자와 나가마사(하타케야마 소슈가)와 유사 나가노리(하타케야마 오슈가)에 의한 하극상이 벌어졌다.
엣츄국은 슈고다이 진보씨에게 뺏겼고, 카와치국도 종종 슈고다이 유사씨에게 위협을 받았지만, 오슈가의 키이만큼은 끝까지 세력을 유지했다.[1]
3. 1. 개요
1205년 아시카가 요시카네의 아들 아시카가 요시즈미가 호조 도키마사에 의해 하타케야마 가문을 계승하면서 하타케야마씨가 시작되었다. 요시즈미는 도키마사의 딸이자 이전 하타케야마 분파의 마지막 인물인 하타케야마 시게야스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하타케야마 영지를 상속받았다. 이로써 새로운 하타케야마 가문은 미나모토 씨(세이와 겐지)에서 갈라져 나왔다.겐무 3년 (1336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무로마치 막부를 창립하면서 하타케야마 가문은 엣츄, 카와치, 키이의 슈고를 맡게 되었다. 칸노의 소란에서는 서류인 하타케야마 쿠니키요가 아시카가 타다요시 편에 섰지만, 이후 타카우지 편으로 전향하여 가세를 유지했다. 반면, 하타케야마 적류인 하타케야마 타카쿠니, 하타케야마 쿠니우지 부자는 칸노 2년 (1351년) 타다요시파의 키라 사다이에에게 패해 자결하고, 쿠니우지의 아들 니혼마츠 쿠니아키라는 니혼마츠로 옮겨갔다(오슈 하타케야마가).
본래 적류였던 오슈 하타케야마가가 쇠퇴하면서 하타케야마 쿠니키요의 가계(킨고가)가 하타케야마가의 부령격이 되었다. 쿠니키요는 칸토 관령에 임명되어 동쪽에서 남조 측과 싸웠지만, 게이안 원년 (1361년) 가마쿠라 공방 아시카가 모토우지와의 대립으로 실각했다. 쿠니키요는 몰락했지만, 그의 동생 하타케야마 요시후카가 슈고에 임명되어 하타케야마가를 재건했다. 요시후카의 아들 하타케야마 모토쿠니는 메이토쿠 2년 (1391년) 메이토쿠의 난에서 공을 세워 아시카가 요시미츠의 신임을 얻고, 노토 슈고를 맡는 등 슈고다이묘로 성장했다.
오에이 5년 (1398년), 모토쿠니는 관령에 임명되어 시바 부에이가, 호소카와 케이쵸가와 함께 삼관령가로 이름을 알렸다. 모토쿠니의 아들 하타케야마 미츠이에는 요시미츠에게 냉대받았으나, 아시카가 요시모치 대에 이르러 조정에 복귀하여 관령에 취임했다. 미츠이에의 아들 하타케야마 모치쿠니는 아시카가 요시노리의 간섭에 시달렸지만, 하타케야마가의 내분을 수습하고 호소카와가, 야마나가와 대등한 세력을 유지했다.
하지만 모치쿠니의 아들 하타케야마 요시히로와 조카 하타케야마 마사나가 사이에 가독 상속 분쟁이 발생하여 오닌의 난의 한 원인이 되었다. 분메이 9년 (1477년) 오닌의 난이 끝난 후에도 요시히로류(소슈가)와 마사나가류(오슈가)는 내분을 지속했고, 이 대립은 양 호소카와가의 난과 함께 키나이를 내전 상태로 몰아넣었다. 하타케야마 마사나가(하타케야마 오슈가)와 하타케야마 요시타카(하타케야마 소슈가)는 관령에 취임했지만, 센고쿠 말기 양가에서 키자와 나가마사(하타케야마 소슈가)와 유사 나가노리(하타케야마 오슈가)의 하극상이 발생했다.
엣츄국은 슈고다이 진보씨에게 빼앗겼고, 카와치국은 슈고다이 유사씨에게 위협받았지만, 오슈가의 키이만은 끝까지 세력을 유지했다.
3. 2. 무로마치 시대
겐무 3년 (1336년), 아시카가 타카우지가 무로마치 막부를 창립하자, 하타케야마씨는 그간의 공적으로 엣츄・카와치・키이의 슈고를 맡게 되었다. 칸노의 소란에서는, 서류인 '''하타케야마 쿠니키요'''는 아시카가 타다요시 편에 붙었지만, 후에 타카우지 편으로 갈아타 가세를 유지했다. 한편, 하타케야마가 적류인 '''하타케야마 타카쿠니ㆍ쿠니우지''' 부자는 칸노 2년 (1351년) 타다요시파의 키라 사다이에에게 패해 자살하고, 쿠니우지의 아들 니혼마츠 쿠니토모는 니혼마츠로 옮겼다 (오슈 하타케야마가).본래의 적류인 오슈 하타케야마가가 쇠퇴하는 가운데, 하타케야마 쿠니키요의 가계 (킨고가)가 하타케야마가 부령격이 되었다. 쿠니키요는 칸토 관령에 임명되어 동쪽에서 남조측과 싸웠지만, 그 후 가마쿠라 공방 아시카가 모토우지와 대립해, 고안 원년 (1361년)에 실각했다. 쿠니키요는 그대로 몰락했지만, 쿠니키요의 동생 '''하타케야마 요시후카'''가 나중에 슈고에 임명되어 하타케야마가를 다시 부흥시켰다. 요시후카의 아들 '''하타케야마 모토쿠니'''는 메이토쿠 2년 (1391년)에 메이토쿠의 난에서 공적을 올리는 등, 아시카가 요시미츠의 신임을 받아 노토 슈고를 맡는 등, 슈고다이묘로서 힘을 길렀다.
오에이 5년 (1398년)에 관령으로 임명되어, 같은 아시카가 일문 시바 부에이가나 호소카와 케이쵸가 등과 함께 삼관령가로서 이름을 날리는 가문이 되었다. 모토쿠니의 아들 '''하타케야마 미츠이에'''는 요시미츠에게 냉대를 받았지만, 아시카가 요시모치 대에 이르러서야 조정에 복귀해 관령에 취임한다. 미츠이에의 아들 '''하타케야마 모치쿠니''' (토쿠모토)는 쇼군 권력의 강화를 목표로 하는 아시카가 요시노리의 간섭에 시달리지만, 하타케야마가의 내분을 잠재우고 호소카와가나 야마나가와 맞대응하는 세력을 유지했다.
하지만, 모치쿠니의 아들 '''하타케야마 요시히로'''와 조카 '''하타케야마 마사나가'''와의 사이에서 가독을 둘러싼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고, 그것이 후의 오닌의 난의 한 원인이 되었다. 분메이 9년 (1477년)의 오닌의 난이 종식된 후에도 요시히로류 ('''소슈가''')와 마사나가류 ('''오슈가''')는 내분을 계속해, 이 대립은 양 호소카와가의 난과 함께 키나이를 내전 상태로 만드는 주된 원인이 되었다. 또, 하타케야마 마사나가 (하타케야마 오슈가)나 하타케야마 요시타카 (하타케야마 소슈가)는 관령에 취임했지만, 센고쿠 말기에 양가에서 각각, 키자와 나가마사 (하타케야마 소슈가)와 유사 나가노리 (하타케야마 오슈가)에 의한 하극상이 벌어졌다.
엣츄국은 슈고다이 진보씨에게 뺏겼고, 카와치국도 종종 슈고다이 유사씨에게 위협을 받았지만, 오슈가의 키이만큼은 끝까지 세력을 유지했다.
3. 3. 센고쿠 시대
겐무 3년 (1336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무로마치 막부를 창립하자, 하타케야마 가는 그간의 공적으로 엣츄・카와치・키이의 슈고를 맡게 되었다. 칸노의 소란에서는, 서류인 하타케야마 쿠니키요는 아시카가 다다요시 편에 붙었지만, 후에 다카우지 편으로 갈아타 가세를 유지했다. 한편 하타케야마가 적류인 하타케야마 다카쿠니와 쿠니우지 부자는, 칸노 2년 (1351년) 다다요시파의 키라 사다이에에게 패해 자결하고, 쿠니우지의 아들 니혼마쓰 쿠니아키라는 니혼마쓰로 옮겼다 (오슈 하타케야마가).본래 적류인 오슈 하타케야마가가 쇠퇴하는 가운데, 하타케야마 쿠니키요의 가계 (킨고가)가 하타케야마가 부령격이 되었다. 쿠니키요는 간토 관령에 임명되어 동쪽에서 남조측과 싸웠지만, 가마쿠라 공방 아시카가 모토우지와 대립해 게이안 원년 (1361년)에 실각했다. 쿠니키요는 그대로 몰락했지만, 쿠니키요의 동생 하타케야마 요시후카가 나중에 슈고에 임명되어 하타케야마가를 다시 부흥시켰다. 요시후카의 아들 하타케야마 모토쿠니는 메이토쿠 2년 (1391년)에 메이토쿠의 난에서 공적을 올리는 등,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신임을 받아 노토 슈고를 맡는 등, 슈고다이묘로서 힘을 길렀다.
오에이 5년 (1398년)에 관령으로 임명되어, 같은 아시카가 일문 시바 부에이가나 호소카와 케이쵸가 등과 함께 삼관령가로서 이름을 날리는 가문이 되었다. 모토쿠니의 아들 하타케야마 미츠이에는 요시미쓰에게 냉대를 받았지만, 아시카가 요시모치 대에 이르러서야 조정에 복귀해 관령에 취임한다. 미츠이에의 아들 하타케야마 모치쿠니 (토쿠모토)는 쇼군 권력의 강화를 목표로 하는 아시카가 요시노리의 간섭에 시달리지만, 하타케야마가의 내분을 잠재우고 호소카와가나 야마나가와 맞대응하는 세력을 유지했다.
하지만, 모치쿠니의 아들 하타케야마 요시히로와 조카 하타케야마 마사나가와의 사이에서 가독을 둘러싼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고, 그것이 후의 오닌의 난의 한 원인이 되었다. 분메이 9년 (1477년)의 오닌의 난이 종식된 후에도 요시히로류 (소슈가)와 마사나가류 (오슈가)는 내분을 계속해, 이 대립은 양 호소카와가의 난과 함께 키나이를 내전 상태로 만드는 주된 원인이 되었다. 또, 하타케야마 마사나가 (하타케야마 오슈가)나 하타케야마 요시타카 (하타케야마 소슈가)는 관령에 취임했지만, 센고쿠 말기에 양가에서 각각, 키자와 나가마사 (하타케야마 소슈가)와 유사 나가노리 (하타케야마 오슈가)에 의한 하극상이 벌어졌다.
엣츄국은 슈고다이 진보씨에게 뺏겼고, 카와치국도 종종 슈고다이 유사씨에게 위협을 받았지만, 오슈가의 키이만큼은 끝까지 세력을 유지했다.
3. 4. 에도 시대 이후
에도 시대에는 오슈 하타케야마 가문과 노토 하타케야마 가문이 고케로 남았다. 메이지 유신 이후, 오슈 하타케야마 가문의 당주 하타케야마 모토나가는 아시카가로 복성하여 시족으로 편입되었다. 노토 하타케야마 가문은 하타케야마 성을 그대로 유지하며 시족이 되었다.1884년(메이지 17년) 화족령 제정 당시, 오슈 하타케야마 가문(아시카가 가문)과 노토 하타케야마 가문은 남작 수여 대상에서 제외되어 시족으로 남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명문가를 선호했기에, 가와치(河内), 기이(紀伊), 야마토(大和)를 영유했던 하타케야마 가문을 중용하여 에도 성 내 의례 담당 등의 직책을 맡겼다.
마사노부의 자손은 에도 막부의 고케 가문이 되어 막말까지 가계가 이어졌다. 메이지 유신 이후 당주 하타케야마 모토나가는 아시카가로 복성하여 시족(士族)이 되었다.
4. 주요 분가 및 관련 가문
아시카가 요시카네의 아들 아시카가 요시즈미는 호조 도키마사에 의해 하타케야마 가문을 계승하게 되었다. 그는 도키마사의 딸이자 하타케야마 시게야스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하타케야마 영지를 상속받았다. 이로써 새로운 하타케야마 가문은 미나모토 씨(세이와 겐지)에서 갈라져 나왔다.[1]
이 가문은 남북조 시대의 전쟁 동안 아시카가 쇼군 가문의 동맹으로 야마시로, 키이, 카와치, 에치우, 노토 지방의 ''슈고''(수령) 세습직을 받았다. 15세기에는 ''관령''(쇼군의 부관) 지위를 차지하기도 했으나, 하타케야마 마사나가와 하타케야마 요시나리 사이의 계승 분쟁으로 오닌 전쟁의 촉매제가 되었다.[1]
센고쿠 시대에는 여러 분가로 나뉘었는데, 주요 분가는 다음과 같다.[1]
- 가와치 하타케야마: 하타케야마 마사나가와 하타케야마 요시나리의 후손으로 나뉘어 대립했다.
- 무쓰 하타케야마: 니혼마쓰 성을 거점으로 했으나, 아시나 씨의 가신이 되었다.[1] 다테 씨와 자주 충돌했고, 히토토리바시 전투 이후 1586년 다테 마사무네에 의해 대부분 멸망하였다.[1]
- 노토 하타케야마: 나나오 성을 근거지로 했으나, 내분으로 1570년대에 독립적인 가문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였다.[1]

아사노 나가마사(1546–1611)는 하타케야마 이에쿠니의 후손이며, 아시카가 요시카네(1154-1199)의 후예이다. 나가마사는 어머니의 남동생이자 아사노 성의 영주였던 아사노 나가카츠에게 입양되어 아사노 씨(아사노 씨)의 14대 당주를 계승했다.
; 오슈 하타케야마 가 (니혼마쓰 씨)
이본마쓰 성을 거점으로 했던 오슈 사관령 가문이다. 관응의 난에서 하타케야마 타카쿠니・쿠니우지가 아시카가 나오요시 측에 패해 자결한 후, 쿠니우지의 아들 이본마쓰 쿠니토시가 이본마쓰로 옮겼으나 전국 시대에는 일개 국인으로 쇠퇴하였다. 덴쇼 13년(1585년) 이본마쓰 요시쓰구가 다테 씨와의 항쟁 중 전사하여 멸망했다.
; 역대 당주 (겐세이 하타케야마 본종가: 오슈 하타케야마 가문)
대수 | 이름 | 비고 |
---|---|---|
1 | 하타케야마 요시즈미 | 겐세이 하타케야마 씨의 시조 |
2 | 하타케야마 타이코쿠 | |
3 | 하타케야마 도키쿠니 | |
4 | 하타케야마 타카쿠니 | 오슈 하타케야마 가문의 시조 |
5 | 하타케야마 쿠니우지 | 오슈 하타케야마 가문 |
; 긴고 가
간토 슈지였던 하타케야마 쿠니키요는 가마쿠라 큐슈의 아시카가 모토우지와 대립하여 실각했지만, 그의 동생 하타케야마 요시후카가 슈고에 임명되어 가문을 재흥시켰다. 요시후카의 아들 하타케야마 모토쿠니는 간료에 임명되어 호소카와 쿄쵸가와 스와 무에이가와 함께 삼관료 가문으로 불렸다.
; 역대 당주 (겐세이 하타케야마 본가: 금고가)
대수 | 이름 | 비고 |
---|---|---|
1 | 하타케야마 사다쿠니 | |
2 | 하타케야마 이에쿠니 | |
3 | 하타케야마 쿠니키요 | 간토 슈지 |
4 | 하타케야마 요시후카 | 쿠니키요의 동생 |
5 | 하타케야마 모토쿠니 | 간료, 기이 국, 노토 국, 에치고 국, 가와치 국 슈고 |
6 | 하타케야마 미츠케이 | 가와치 국 슈고 등, 후 노토 하타케야마 가 초대. 모토쿠니의 차남 |
7 | 하타케야마 미츠이에 | 간료, 기이 국, 가와치 국, 에치고 국 슈고. 모토쿠니의 장남 |
8 | 하타케야마 모치쿠니 | 간료, 기이 국, 가와치 국, 에치고 국 슈고. 미츠이에의 장남 |
9 | 하타케야마 모치나가 | 가와치 국 슈고. 미츠이에의 차남. 모치쿠니의 동생 |
10 | 하타케야마 요시나리 | 모치쿠니의 아들, 가와치 국, 기이 국, 에치고 국 슈고 |
11 | 하타케야마 마사나가 | 모치토미(미츠이에의 삼남)의 아들, 간료, 기이 국, 가와치 국, 에치고 국, 야마시로 국 슈고 |
; 비슈 가
오닌의 난 이후 하타케야마 마사나가는 간료가 되었으나, 야마시로 국 잇키로 실각했다. 이후 호소카와 마사모토와 대립하는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에게 중용되었으나, 메이오 정변으로 마사나가는 전사하고 요시타네는 쇼군직을 잃었다.
하타케야마 타네나가는 유사 나가노리에 의해 추방되었고, 이후 당주가 단기간에 교체되었다. 태평사의 전투 이후 타네나가가 복귀했고, 타네나가 사후에는 하타케야마 마사쿠니가 명대가 되었다.
하타케야마 타카마사는 미요시 나가요시 등과 싸우고 아시카가 요시아키, 오다 노부나가와 결탁했다. 이후 타카마사는 은거했으나, 노부나가파였던 동생 하타케야마 아키타카가 요시아키파의 유사 노부노리에게 살해되어 가와치 수호가는 멸망했다.
하타케야마 사다마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연계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항했으나, 기슈 정벌로 축출되어 오슈 가는 멸망했다. 사다마사의 아들 하타케야마 마사노부는 카타기리 카츠모토의 사위가 되었고,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우필로 추천되어 도요토미 가의 직신이 되었다. 그러나 카츠모토가 도쿠가와 가로 주인을 바꾸자 마사노부도 도쿠가와 가에 봉직했다.
마사노부의 자손은 에도 막부의 고케가 되어 막말까지 가계가 이어졌다.
; 역대 당주 (하타케야마 비슈 가)
대수 | 이름 | 비고 |
---|---|---|
1 | 하타케야마 모치토미 | 미쓰이에의 셋째 아들. 모치쿠니의 동생. 마사나가의 아버지 |
2 | 하타케야마 마사히사 | 모치토미의 아들. 마사나가의 형 |
3 | 하타케야마 마사나가 | 오슈 가의 실질적인 초대, 기이 국, 가와치 국, 에치고 국, 야마시로 국 슈고(간료) |
4 | 하타케야마 나오준 | 마사나가의 아들, 기이 국, 가와치 국 반국, 에치고 국 슈고 |
5 | 하타케야마 타네나가 | 나오준의 장남. 기이 국, 가와치 국 반국, 에치고 국 슈고 |
6 | 하타케야마 나가쓰네 | 나오준의 차남. 기이 국, 가와치 국 반국, 에치고 국 슈고 |
7 | 하타케야마 하루히로 | 나오준의 넷째 아들?. 기이 국, 가와치 국 반국 슈고 |
8 | 하타케야마 야쿠로 | 계보 불명. 기이 국, 가와치 국 반국 슈고 |
9 | 하타케야마 마사쿠니 | 나오준의 셋째 아들?. 기이 국, 가와치 국 반국 슈고. 총령 명대로 여겨짐 |
10 | 하타케야마 타카마사 | 마사쿠니의 장남, 기이 국, 가와치 국 반국 슈고 |
11 | 하타케야마 아키타카 | 마사쿠니의 셋째 아들, 가와치 국 반국 슈고 |
12 | 하타케야마 마사나오 | 마사쿠니의 차남, 당주는 아님 |
13 | 하타케야마 사다마사 | 마사나오의 장남. 기이 국의 전국 대명 |
14 | 하타케야마 마사노부 |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우필.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근습 |
15 | 하타케야마 모토히라 | 에도 막부의 기혼 |
; 하타케야마 씨 가신
이름 | 비고 |
---|---|
신보 나가토시 | 가마쿠라 슈 |
죠닌인 미쓰노부 | 야마토 국진슈 |
아다야 시게토시 | 키슈 국진슈 |
이로카와 모리나오 | 키슈 국진슈 |
이로카와 히데타리 | 키슈 국진슈 |
오타 요시마사 | 키슈 국진슈 |
카이쇼 마사하루 | 카와치 국진슈, 전 남조, 쿠스노키 씨 일족. 카이쇼 씨 참조. |
카야부리 사네쓰구 | 카와치 국진슈 |
코야마 타카시게 | 키슈 국진슈 |
사와 치카미쓰 | 야마토 슈, <우다 삼장> |
신보 하루시게 | 가마쿠라 슈 |
슈산미 씨 나가 | 키슈 국진슈 |
단게 모리카타 | 카와치 국진슈 |
단게 모리토모 | 야마토 국진슈, 단게 씨를 계승 |
히라 사부로자에몬 | 야마토 국진슈 |
노나가세 모리쓰구 | 키슈 국진슈, 전 남조. 노나가세 씨 참조. |
하시오 타카하루 | 야마토 슈 |
후세 사쿄료 | 야마토 슈 |
호리우치 우지코 | 키슈 국진슈 |
마쓰우라 히젠노카미 | 센슈 국진슈 |
아미 무네후사 (나오마사는 오류) | 카와치 국진슈 |
유가와 나오하루 | 키슈 국진슈 |
유사 타카키요 | 가마쿠라 슈 |
유사 나가나오 | 가마쿠라 슈, 유사 씨 참조. |
유사 준모리 | 가마쿠라 슈 |
유사 나가노리 | 가마쿠라 슈 |
유사 신쿄 | 가마쿠라 슈 |
요시노 미부 | 야마토 슈, <우다 삼장> |
5. 가신단
하타케야마씨의 가신단은 크게 출신에 따라 무사시슈, 아시카가슈, 가마쿠라슈, 고쿠진슈, 야마토슈의 다섯 계통으로 나뉜다.
; 무사시슈일본어(武蔵衆)
- 하타케야마 시게타다 이전부터 섬겼던 가문으로, 시게타다 사후 아시카가씨로부터 후계자로 들어온 아시카가 요시즈미를 섬긴 가신이다.
- 대표 성씨:토시마씨, 한자와씨(榛沢氏), 한자와씨(半沢氏), 혼다씨
- 대부분 일찍 몰락했다. 토시마씨는 무사시국의 토시마씨와 동족이며, 혼다씨는 센고쿠 시대에 시마즈씨의 가신이 되었다.
; 아시카가슈일본어(足利衆)
- 아시카가 요시즈미가 하타케야마씨 후계자로 들어올 때부터 따랐던 가신이다.
- 대표 성씨:이나사와씨, 사이토씨, 타카시나씨, 토모씨, 히라(平)씨
- 사이토씨와 히라씨는 중신, 이나사와씨와 토모씨는 우마마와리슈로서 잔존했다. 타카시나씨는 몰락했다. 타카시나씨는 코씨와 동계이다. 아시카가슈는 센고쿠 시대에 이르러 당주 측근으로 활약했다. 사이토씨나 히라씨는 부교직이나 유히츠로서 문서를 발급해, 하타케야마씨의 행정 관료적 존재가 되었다. 또한, 이나사와씨와 토모씨는 당주 측근의 평시 경호를 직무로 하여, 전진에서는 우마마와리슈가 되어 전령이나 작전 참모적 위치에 올랐으나, 군권이 슈고다이로 넘어가자 실권을 잃고 몰락하였다.
- * 이나사와씨: 아시카가씨의 시조 아시카가 요시야스의 아버지 미나모토노 요시쿠니의 동생 미나모토노 요시타다의 가계이다. 후손은 도요토미씨 중신 하야미 모리히사에게 객장으로서 섬겨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전사했다.
- * 사이토씨: 사이토 사네모리의 후예로 전해지는 명문이다. 미노국의 사이토씨 등이 유명하다. 하타케야마씨를 섬긴 사이토씨는 무로마치 막부의 부교슈였던 사이토씨와 가까운 일족이었다고 여겨진다. 많은 발급 문서가 잔존하고 있어, 그 세력이 무로마치 시대에 강했음을 알 수 있다.
- * 히라씨: 읽는 법은 "히라"이지만, 타이라씨의 후예이다. 계통은 미상이지만, 가마쿠라 시대에 내관령이었던 헤이시의 분류라는 설이 유력하다. 무로마치 시대부터 센고쿠 시대 중기까지 하타케야마씨 중에서 부교 등으로 문서를 발급하여 권세가 있었다. 히라노 모리토모 등이 유명하다.
- * 토모씨: 그 시조는 오오토모씨라고 불리며 고대 군사 귀족의 후예이다. 오오토모씨의 말엽, 토모노 스케카네가 미나모토노 요리이에의 가신이 되어, 그 일족이 아시카가씨, 하타케야마씨와 역대로 섬겨온 것으로 추정된다.
; 그 외 가신
- 나오마사 야스미(Yasumi Naomasa) (? - 1572)
- 초 츠구츠라(Chō Tsugutsura)
- 초 츠나타츠(Chō Tsunatatsu)
- 유사 츠구미츠(Yusa Tsugumitsu)
- 누쿠이 카게타카(Nukui Kagetaka)
- 미야케 나가모리(Miyake Nagamori)
- 이가와 미츠노부(Igawa Mitsunobu)
- 신보 나가토시(가마쿠라 슈)
- 죠닌인 미쓰노부(야마토 국진슈)
- 아다야 시게토시(키슈 국진슈)
- 이로카와 모리나오(키슈 국진슈)
- 이로카와 히데타리(키슈 국진슈)
- 오타 요시마사(키슈 국진슈)
- 카이쇼 마사하루(카와치 국진슈) - 전 남조, 쿠스노키씨 일족. '''카이쇼씨 참조.'''
- 카야부리 사네쓰구(카와치 국진슈)
- 코야마 타카시게(키슈 국진슈)
- 사와 치카미쓰(야마토 슈) - <우다 삼장>
- 신보 하루시게(가마쿠라 슈)
- 슈산미씨 나가(키슈 국진슈)
- 단게 모리카타(카와치 국진슈)
- 단게 모리토모(야마토 국진슈) 단게씨를 계승
- 히라 사부로자에몬(야마토 국진슈)
- 노나가세 모리쓰구(키슈 국진슈) - 전 남조. '''노나가세씨 참조.'''
- 하시오 타카하루(야마토 슈)
- 후세 사쿄료(야마토 슈)
- 호리우치 우지코(키슈 국진슈)
- 마쓰우라 히젠노카미(센슈 국진슈)
- 아미 무네후사(나오마사는 오류)(카와치 국진슈)
- 유가와 나오하루(키슈 국진슈)
- 유사 타카키요(가마쿠라 슈)
- 유사 나가나오(가마쿠라 슈) - '''유사씨 참조.'''
- 유사 준모리(가마쿠라 슈)
- 유사 나가노리(가마쿠라 슈)
- 유사 신쿄(가마쿠라 슈)
- 요시노 미부(야마토 슈) - <우다 삼장>
참조
[1]
웹사이트
Hatakeyama Clan
https://wiki.samurai[...]
Open Publishing
2007-02-28
[2]
서적
Shogun & Daimyo: Military Dictators of Samurai Japan
Different Worlds Publications
2011
[3]
문서
畠山氏を称したという史実は、横山昭男『上杉鷹山』(吉川弘文館、1987年)の4ページに『勝煕(のちに畠山氏を名乗る)』との記述があることより確認できる。治憲との関わりが薄いこともあり、同書でも上記以外の説明はない。
[4]
간행물
萩尾俊章(『沖縄県立博物館紀要』20号、1994年)114頁
1994-00-00 #날짜 정보가 불완전하여 00-00-00으로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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