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위효관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위효관은 북위 시대에 태어나 서위와 북주를 거치며 활약한 군인이다. 그는 소보인의 난 진압, 동위와의 외교적 전략, 옥벽 전투에서의 활약, 그리고 양나라 정벌에 참여하여 서위와 북주의 발전에 기여했다. 북주 무제 시대에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아 북제의 멸망에 기여했으며, 580년에는 반란을 진압하고 그해 12월에 사망했다. 그의 아들들은 북주에서 중요한 직책을 역임했으며, 딸은 황보도에게 시집갔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509년 출생 - 긴메이 천황
    긴메이 천황은 6세기에 즉위하여 백제와의 외교를 통해 불교를 수용했지만, 불교 숭배를 둘러싼 갈등 속에 571년까지 재위했다.
  • 509년 출생 - 심각 (남북조)
    심각은 남북조 시대 양나라의 무장이자 정치가로, 학문과 무예에 능했으며 양나라에서 벼슬을 시작하여 진나라 건국에 기여하고 말년에는 오흥군태수 등을 지내며 헌신했다.
  • 580년 사망 - 북주 선제
    북주 선제는 북주 무제의 아들로 황태자를 거쳐 즉위했으나 사치와 폭정, 외척에게 정치를 맡기는 등 실정을 거듭하다 아들에게 양위하고 주색에 빠져 북주 멸망의 원인을 제공하고 22세에 사망했다.
  • 580년 사망 - 울지형
    울지형은 선비족 출신으로 서위의 장군 위치기도의 아들이자 우문태의 조카이며, 금명공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고, 후경의 난을 평정하고 촉 지역을 정벌했으며, 북주에서 촉국공, 군부 장관, 태보, 태사를 역임했지만, 양견의 섭정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키다 자결했다.
  • 경조 위씨 - 위응물
    위응물은 당나라의 시인이자 관료로, 도연명의 영향을 받아 자연의 고요함과 평온함을 담은 시를 창작했으며 유종원과 함께 '왕맹위류'로 불린다.
  • 경조 위씨 - 위탄
    위탄은 삼국시대 위나라의 관료이자 서예가로, 건안 연간에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시중, 중서감, 광록대부 등을 역임했으며, 한단순, 위개와 함께 뛰어난 서예 실력으로 명성을 떨쳤고 특히 초서에 능했으며, 장백영에게 초서를 배워 당대에 이름을 알렸고 문장에도 능하여 《위서》 편찬에 참여하기도 했다.
위효관
기본 정보
위효관의 초상화
위효관의 초상화
칙 (칙)
맹관 (孟寛)
시호장무공(莊武公)
출생507년
사망585년
묘지시안시 창안구
시대남북조 시대
국가북주
관직
직위소주총관(邵州總管)
형주총관(荊州總管)
상주총관(襄州總管)
봉작무양군개국공(武陽郡開國公)
가족 관계
아버지위열 (韋烈)
아들위원랑 (韋 Yuanlang, 韋元朗)
위총 (韋沖)
위혜 (韋翽)
위유 (韋祐)
위간 (韋簡)
기타 정보
관련 인물우문태
양견
왕궤
위효정

2. 북위 시대

위효관은 북위 시대인 509년에 태어났다. 북위 선무제 통치 시기로, 그의 가문은 장안 지역의 산부(三輔)에서 저명한 가문이었으며, 할아버지 위진희(韋真憙)와 아버지 위욱(韋旭) 모두 북위에서 군 태수를 지냈다.

젊은 시절 위효관은 학문에 정진하고 침착했다고 묘사된다. 영안 연간(528–530)에 선위장군·급사중이 되었고 곧 산북현남의 작위를 받았다. 보태 연간(531-532)에 형주 자사 원자공 밑에서 도독이 되어 상성에 주둔했다. 공적으로 석양군태수에 임명되었으며, 이때 신야군 태수였던 독고신과 우정을 맺어 형주에서 "연벽"이라 불렸다.

효무제 통치 기간(532–535)에 위효관은 형주 방어 임무를 맡았다. 534년 효무제가 고환의 영향력을 피해 우문태가 통제하던 장안으로 가면서, 북위서위동위로 분열되었다. 위효관이 언제, 어떻게 서위 정권에 합류했는지는 불분명하며, 효무제가 535년에 사망하고 서위 문제가 즉위한 이후인지 이전인지 명확하지 않다.

2. 1. 소보인(蕭寶夤)의 난 진압

527년 (효창 3년), 소보인이 관우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위효관은 조정 편에 서서 선봉을 자원하여 통군에 임명되었다. 이후 장손치의 서정에 참여하여 공을 세워 국자박사·행화산군사가 되었다.[1]

2. 2. 양간(楊侃)과의 인연

양간동관을 지킬 때 위효관을 불러 사마(司馬)로 삼았다. 양간은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자신의 딸을 위효관에게 시집보냈다.[1]

2. 3. 북위 효장제와 절민제 시대

위효관은 북위 시대인 509년에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장안 지역의 산부(三輔)에서 이름난 가문이었으며, 할아버지 위진희(韋真憙)와 아버지 위욱(韋旭)은 모두 북위에서 군 태수를 지냈다.

젊은 시절 위효관은 학문에 힘쓰고 침착했다고 전해진다. 527년 장군 소보인이 반란을 일으켜 장안 지역을 점령했을 때, 그는 수도 낙양에 있었고, 소보인에 대항하는 군대에서 복무할 것을 자원했다. 그는 봉익공(豐邑公) 장손승업(長孫承業) 휘하의 장교로 복무하며 군대의 성공에 기여했고, 낙양 국립대학의 교사와 군 태수 대행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그는 저명한 관리 양간(楊侃) 밑에서 동관을 지켰는데, 양간은 그에게 감명받아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효장제 통치 기간(528–530)에 위효관은 장군이 되었고 산북남작으로 봉해졌다. 이어진 절민제 통치 기간(531–532) 동안 그는 형주 (지금의 허난성 남부)의 태수인 관리 원자공(源子恭) 휘하에서 군 태수로 복무했다. 이때 그는 형주의 군 태수였던 동료 장군 독고신과 친구가 되었다.

2. 4. 북위 효무제 시대와 서위 건국

534년 우문태원주에서 옹주로 향할 때, 위효관은 그를 따라 종군했다.[1] 535년 (대통 원년), 동관 전투에서 동위군을 격파하여 홍농군 태수에 임명되었다.[1] 537년 (대통 3년), 두태를 격파하고 좌승을 겸하며 의양 지역의 군사를 통제했다.[1] 낙양 점령 당시 독고신과 함께 낙양성에 입성했다.[1] 이후 동위의 영주 장사 하약통 등이 서위에 항복하자, 우문귀, 이봉 등과 함께 이들을 맞이하고, 공격해 온 동위의 임상, 요웅 등의 군대를 영천에서 격퇴했다.[1] 위효관은 평락구로 진격하여 동위의 예주를 함락시키고 자사 풍옹을 사로잡았다.[1]

538년 (대통 4년), 하교・망산의 전투에 참전했다.[1] 서위가 낙양을 잃자, 대장군 겸 행의양군사가 되어 질서 회복을 도모했다.[1] 얼마 후 남연주 자사로 전임되었다.[1]

같은 해, 동위의 단침과 요걸이 다시 의양을 점령하고, 동위의 웅주 자사 우도항이 국경 지대 주민들을 선동했다.[1] 이에 위효관은 첩자를 보내 우도항의 필적을 입수, 우도항과 자신이 서신을 주고받은 것처럼 위조하여 단침의 손에 들어가게 했다.[1] 이로 인해 단침이 우도항을 의심하게 되자, 위효관은 기습하여 우도항과 단침을 모두 사로잡았다.[1]

539년 (대통 5년), 작위가 후로 승진했다.[1] 542년 (대통 8년), 진주 자사로 전임되었고, 곧 옥벽으로 옮겨 주둔하며 섭남분주사를 겸임했다.[1] 서위 통치에 반항하던 산호를 귀순시키고 대도독으로 승진했다.[1]

546년 (대통 12년), 동위의 고환이 군사를 일으켜 옥벽을 공격했다.[1] 50일 간의 포위 공격에도 불구하고, 위효관의 뛰어난 방어 능력으로 고환의 군대는 결국 철수했다 (옥벽의 전투).[1] 위효관은 표기대장군, 개부의동삼사로 승진하고 건충군공으로 봉해졌다.[1]

3. 서위 시대

538년, 서위와 동위 간의 대규모 전쟁 중 위효관은 문제를 수행했고, 홍농군(弘農, 대략 현대의 산먼샤, 허난성) 태수로 임명되었다. 이후 독고신과 함께 낙양 (서위가 일시적으로 점령)에 진입하여 한동안 도시를 방어하려 했지만, 결국 낙양 근처에서 철수해야 했다.[1]

542년 (대통 8년), 진주 자사로 전임되었다.[2] 곧 옥벽으로 옮겨 진무하고 섭남분주사를 겸임했다. 서위 통치에 반항하던 산호의 귀순을 꾀하고 대도독으로 진급했다.[2]

553년 (폐제 2년), 옹주 자사가 되었다. 1리마다 길가에 회나무 한 그루를 심는 사업을 벌여 여행객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그늘을 만들었다.[1]

556년 (공제 3년), 우문태가 북쪽 지방을 순찰할 때 위효관에게 옥벽을 방어하는 책임을 다시 맡겼다.[1]

3. 1. 홍농 전투와 동위와의 대립

534년 (영희 3년), 우문태원주에서 옹주로 향할 때 위효관은 그를 따라 종군했다. 535년 (대통 원년), 동관에서 동위군을 격파하고 홍농군 태수에 임명되었다. 537년 (대통 3년), 두태를 격파하고 좌승을 겸하며 의양의 군사를 통제했다. 낙양을 점령하자 독고신과 함께 낙양성에 들어갔다. 동위의 영주 장사 하약통 등이 서위에 항복하자 우문귀와 이봉 등과 함께 응대하여 공격해 온 동위의 임상, 요웅 등의 군대를 영천에서 격퇴했다. 평락구로 진격하여 동위의 예주를 함락시키고 자사 풍옹을 사로잡았다.

538년 (대통 4년), 하교・망산의 전투에 참전했다. 서위가 낙양을 잃자 대장군, 행의양군사가 되어 질서 회복을 꾀했고, 곧 남연주 자사로 전임되었다.

같은 해, 동위의 단침, 요걸이 다시 의양을 점령하고, 동위의 웅주 자사 우도항이 국경 지대의 주민을 선동했다. 이에 첩자를 파견하여 우도항의 필적을 입수하고, 우도항과 위효관이 서신을 주고받은 것처럼 위조하여 단침의 손에 넘어가도록 했다. 이 때문에 단침은 우도항을 의심하게 되었고, 이간책의 효과를 본 위효관은 기습하여 우도항과 단침을 사로잡았다.[2]

539년 (대통 5년), 작위를 후로 승진시켰다.[2]

3. 2. 옥벽성 전투 (546년)

546년 (대통 12년), 동위고환이 군사를 일으켜 옥벽을 공격, 50일 동안 포위했다. 하지만 위효관은 뛰어난 방어 능력을 보여주며 고환의 군대를 철수하게 만들었다. (玉壁之戰 (546年)중국어).[1] 이 공으로 위효관은 표기대장군, 개부의동삼사 지위를 받고 건충군공으로 봉해졌다.[1]

고환은 옥벽 성벽 위를 넘기 위해 토목 공사를 벌였지만, 위효관은 성벽 위 망루에 건물을 추가 건설하여 항상 높은 위치를 유지하며 동위의 공격을 막았다.[1]

고환이 성벽 아래에 터널을 파자, 위효관은 이를 예측, 동위군 터널과 연결되는 터널을 파 불을 질러 동위 병사들을 몰살시켰다.[1] 동위군의 충차에도 불을 질렀으며, 고환의 모든 공격 전략에 대해 적절한 방어책을 마련했다.[1]

고환은 비서 조정에게 항복 권유 편지를 쓰게 했지만, 위효관은 거절했다.[1] 결국 고환은 60일간의 포위에도 옥벽을 점령하지 못하고, 병으로 인해 철수했다.[1]

3. 3. 강릉 공격과 우문씨 성 하사

538년(대통 4년), 하교・망산의 전투에 종군했다. 서위가 낙양을 잃자 대장군・행의양군사가 되어 질서 회복을 꾀했다. 곧 남연주 자사로 전임했다.[1]

같은 해, 동위의 단침・요걸이 다시 의양을 점령하고, 동위의 웅주 자사 우도항이 국경 지대의 주민을 선동했다. 이에 위효관은 첩자를 보내 우도항의 필적을 입수하고, 우도항과 위효관이 서신을 주고받은 것처럼 위조하여 단침의 손에 넘어가도록 했다. 이 때문에 단침은 우도항을 의심하게 되었고, 이간책의 효과를 본 위효관은 기습하여 우도항과 단침을 사로잡았다.[1]

554년(공제 원년), 대장군 연국공 우근과 함께 남조 양의 강릉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 공으로 양현공에 봉해졌고, 장안으로 개선하여 상서우복야에 임명되었으며, 우문씨 성을 하사받았다.[1]

4. 북주 시대

556년 우문태가 북순하자 위효관은 그의 명을 받아 다시 옥벽에 주둔했다. 557년 북주효민제가 즉위하자 소사도로 임명되었다.

4. 1. 효민제와 명제 시대

557년 새해 무렵, 우문호서위 공제에게 위문각에게 선위하도록 강요하여 서위를 멸망시키고 북주를 건국했다. 효민제는 "천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위효관은 내무부 차관이 되었다. 557년 후반, 우문호가 효민제를 폐위하고 살해한 후, 위효관은 위문태의 또 다른 아들인 우문유 영도공(명제)이 즉위하면서 황실 연구원으로서의 책임을 추가로 맡게 되었다. 이는 우문호가 위효관의 절친한 친구인 독고신이 우문호에 반대하여 557년에 자결하도록 강요된 상황에서 위효관에게 불명예를 주지 않고 군사 지휘에서 물러나게 하려는 의도였을 수 있다. 560년, 우문호는 명제를 독살했고, 명제의 동생인 우문옹 노공이 황제가 되었다(무제).

명제 초년에 위효관은 린지전 학사가 되어 도적의 교정에 종사했다.

4. 2. 무제 시대

韋孝寬|위효관중국어북주 무제 시대에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561년, 위효관은 이전 유비에서의 큰 승리로 유비와 주변 지역이 순주(勳州)로 지정되면서 그 지사가 되었다. 그는 이 지역 백성들에게 관대하게 대하면서도 첩보망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북제로 투항한 부하 쉬펑(허분)을 암살하기도 했다.

이 무렵, 순주는 북주나 북제에 복종하지 않는 흉노족의 약탈에 시달렸다. 이들은 북제 영토 내에 기반을 두고 펀강(汾水)의 강 교통을 차단했다. 위효관은 부하 야오위에(요악)를 보내 펀강 근처에 요새를 건설하여 약탈 경로를 차단하려 했다. 야오는 북제의 공격을 두려워했지만, 위효관은 주변 언덕에 봉화를 설치하여 북제군이 야오가 대규모 군대의 지원을 받고 있다고 믿게 하여 요새를 완성할 수 있었다.

564년, 위효관은 북제가 우문태의 누이와 우문호의 어머니를 북주로 돌려보내는 평화 협상을 도왔다. 같은 해 말, 우문호가 북제 공격을 준비할 때 위효관은 비서 신다오셴(신도헌)을 보내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570년, 두 나라는 이양(宜陽)의 지배권을 놓고 교착 상태에 빠졌다. 위효관은 이양이 노력을 들일 가치가 없다고 판단, 펀강 북쪽에 요새를 건설하여 영토를 지키자는 제안을 했으나 우문호는 거절했다.

570년 후반, 위효관은 순공(勳公)으로 승진했다. 그해 겨울, 북제 장군 훌려광이 펀강 북쪽의 북주 영토를 침범하여 요새를 건설하고 상당한 영토를 점령했다. 위효관은 훌려를 만나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우문현 제왕이 지휘하는 증원군이 온 후에도 교착 상태는 계속되었고 영토는 상실되었다.

572년, 훌려가 북제 황제 고위의 신임을 받는 관리 주팅(주정)과 무제파와 갈등을 겪자, 위효관은 훌려가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인상을 주는 노래를 지어 퍼뜨렸다. 노래는 다음과 같다.

:''백 개의 성(升) [(100 ''성''이 한 ''호''(斛)를 이룬다)]가 하늘로 날아오르리,''

:''밝은 달(明月, 밍위에, 훌려의 )]이 장안을 비추리라.''

:''높은(高, 가오) 산은 저절로 무너지고,''

:''다이묘 참나무(槲, 후)는 저절로 똑바로 서리라.''

이 노래는 북제의 수도 예청 근처에 퍼져 인기를 얻었고, 주(주정)는 이 상황을 이용하여 두 줄을 더 추가했다.

:''눈먼 자가 큰 도끼를 들고,''

:''말 많은 여자는 말을 할 수 없으리라.''

장님이었던 주와 고위의 유모이자 "말 많은 여자"였던 루링쉬안은 노래에 의심을 품고 고위에게 훌려를 죽이도록 설득하여 북제의 군사력을 약화시켰다.

훌려가 죽은 후, 황제 무는 북제를 정복하려는 야망을 가졌고, 위효관은 황제 무에게 북제 정복을 위한 세 가지 전략을 제출했다. 그는 노령을 이유로 여러 차례 사임을 제안했지만, 황제 무는 그에게 머물러 달라는 조서를 보냈다.

576년, 황제 무가 북제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을 때, 유비를 방문하여 위효관을 칭찬했다. 위효관은 선봉 지휘관이 되겠다고 제안했지만, 황제 무는 위효관이 유비를 방어해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대신 위효관은 황제 무의 형제 우문자오 조왕을 도와 부차적인 작전을 수행했다. 577년, 황제 무가 북제를 정복한 후, 위효관을 수도 장안으로 데려와 농부 직무로 승진시켰다. 이후 황제 무는 위효관을 연주(延州, 대략 현대 옌안)의 지사로 임명하여 주변 지방을 관리하게 했다.

4. 3. 선제와 정제 시대

578년(선정 원년), 무제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우문운이 뒤를 이었다. 579년(대상 원년), 선제는 어린 아들 우문제에게 양위했지만, 태상황으로서 권력을 유지했다. 그해 말, 위효관은 서주(徐州, 대략 오늘날의 쉬저우, 장쑤성)와 주변 지역을 관할하게 되었고, 에 대한 작전에 참여하여 양쯔 강과 회허 사이의 지역을 빼앗는 데 기여했다. 특히 수양을 점령하고, 선제의 사촌 우문량을 격파한 공으로 아들 중 한 명이 화공에 봉해졌다.[1]

580년 (대상 2년) 3월, 위효관이 개선하는 도중 예주에 이르렀을 때, 우문량이 거병하여 수백 기로 위효관의 진영을 습격했다. 그러나 우문량의 위관 여관이 사전에 반란 계획을 밀고했기 때문에, 위효관은 반란에 대한 대비를 갖추고 있었다. 우문량은 습격에 실패하여 도주했고, 위효관은 추격하여 그를 사로잡았다.[1]

같은 해 5월, 선제가 사망하고 양견정제를 보좌하게 되자, 위지경이 맡고 있던 상주 총관의 임무를 위효관으로 교체하려 했다. 위효관은 위지경의 변고를 감지하고 병을 핑계로 진행을 늦추었고, 위지경의 반란이 분명해지자 도망쳐 돌아왔다.[1]

6월, 관중의 병사를 발동하여 위효관이 원수로서 위지경의 난을 토벌하게 되었다. 7월, 위효관의 군대는 하양에 들어갔고, 위지경이 임명한 의동 설공례 등이 회주를 포위하고 있었으나, 위효관은 군사를 파견하여 이를 격파했다. 위지경의 아들 위지돈을 격파하고 패주시켰다. 위지경은 궁지에 몰려 자결했고, 반란은 평정되었다. 10월, 위효관은 장안으로 개선했다. 11월 27일, 장안의 저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72세. 태부・상주국・도독 등의 지위를 추증받았다. 시호는 양이었다.[1]

5. 사망

580년(대상 2년) 3월, 위효관이 개선하는 도중 예주에 이르렀을 때, 우문량이 거병하여 수백 기로 위효관의 진영을 습격했다. 그러나 우문량의 위관 여관이 사전에 반란 계획을 밀고했기 때문에, 위효관은 반란에 대한 대비를 갖추고 있었다. 우문량은 습격에 실패하여 도주했고, 위효관은 추격하여 그를 사로잡았다.

5월, 선제가 사망하고 양견이 정제를 보좌하는 임무를 맡게 되자, 위지경이 맡고 있던 상주 총관의 임무를 위효관으로 교체하려 했다. 또한 소사도 질렬장차를 상주 자사로 임명하여 먼저 업으로 가게 했다. 위효관은 뒤이어 업으로 향했으나, 조가에 이르러 위지경의 대도독인 하란귀의 서신이 도착했다. 위효관은 하란귀의 말에서 변고를 감지하고, 병을 칭하며 진행을 늦추었다. 탕음에 들어가 질렬장차가 도망쳐 돌아오는 것을 마주쳤고, 위효관의 형의 아들인 위군 태수 위예 또한 군을 버리고 도망쳐 왔다. 위지경의 반란이 분명해지자 위효관도 도망쳐 돌아왔고, 도중에 다리를 부수고 역마를 얻었다. 의동 양자강이 수백 기를 이끌고 위효관을 추격해 왔으나, 역사가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도망칠 수 있었다.

6월, 관중의 병사를 발동하여 위효관이 원수로서 위지경의 난을 토벌하게 되었다. 7월, 위효관의 군대는 하양에 들어갔고, 위지경이 임명한 의동 설공례 등이 회주를 포위하고 있었으나, 위효관은 군사를 파견하여 이를 격파했다. 회현 영교성 동남으로 군을 진격시켰다. 이곳 성은 요충지에 있었고, 위지경이 파견한 병사가 지키고 있어 매우 굳건했다. 관군의 여러 장수들이 이곳을 함락시키기 위해 다투어 선봉을 자원했으나, 위효관은 함락시키지 못할 경우를 두려워하여 군을 무척으로 돌렸다. 위지경의 아들 위지돈을 격파하고 패주시켰다. 군을 업 서쪽 문표사 남쪽으로 진격시켰다. 위지경이 스스로 출전해 오자 위효관은 다시 이를 격파했다. 위지경은 궁지에 몰려 자결했고, 반란은 평정되었다. 10월, 위효관은 장안으로 개선했다. 11월 27일, 장안의 저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72세. 태부・상주국・도독 회형려상조명패창영위기 11주 제군사・옹주목의 지위를 추증받았다. 시호는 양이었다.

6.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부인홍농 양씨양간(楊侃)의 딸
부인정비라형양 정씨(滎陽 鄭氏) 출신, 하란씨(賀蘭氏)로 개성
부인원유아탁발씨(拓跋氏)로 개성
아들위나뤄요절
아들위심자(字)는 봉충(奉忠), 의동대장군, 능봉이주자사, 양현개국공
아들위총자(字)는 선회(善回), 개부, 경조윤, 하남군개국공
아들위수자(字)는 세령(世寧), 개부의동대장군, 경조윤, 활국공
아들위제자(字)는 개운(開雲), 개부의동대장군, 안읍현개국백
아들위진자(字)는 실달(悉達), 의동대장군, 무양군개국공
아들위무루영안현개국공


참조

[1] 서적 Book of Zhou
[2] 서적 주서(周書) 및 북사(北史)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