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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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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거는 전한 무제의 장남이자 첫 번째 태자로, 효무사황후의 아들이다. 그는 평화주의적 성향을 보였지만, 무고의 옥 사건에 휘말려 반란을 일으켰다는 누명을 쓰고 자결했다. 이후 무제는 유거의 억울함을 깨닫고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으며, 그의 손자 유병의가 선제가 되어 황위에 올랐다. 선제는 유거에게 "려(戾)"라는 시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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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유거
로마자 표기Ryu Geo
칭호황태자 (戾太子)
시호여황(戾皇)
생애
출생기원전 128년
출생지장안
사망기원전 91년 9월 30일 (향년 37세)
사망지호현
매장지여황묘(戾皇廟)
가족 관계
아버지한무제
어머니위황후
배우자사양제
자녀도황
왕위 계승 정보
전임 황태자유철
황태자 책봉기원전 122년 6월 1일
후임 황태자유석
재위 기간기원전 122년 ~ 기원전 91년
기타 정보
유거(劉據)

2. 가계


  • 부황: 한 무제
  • 모후: 무사황후
  • 서모: 조첩여
  • 이복동생: 소제
  • 처: 민부인(民夫人) - 이름만 전하며 행적이 전하지 않는다.
  • 후궁: 사양제
  • * 서자: 유진
  • * 며느리: 도황후 왕씨
  • ** 손자: 선제
  • 후궁: 이씨
  • 후궁: 이름 불명

3. 생애

유거는 무제의 장남으로 기원전 122년 태자에 책봉되었다. 어머니 위자부가 아버지의 총애를 잃은 후에도 태자 지위를 유지했다. 『춘추공양전』과 『춘추곡량전』을 배웠다.

무제는 만년에 강충을 신임하여 감찰관 역할을 맡겼는데, 강충은 권세가나 황족이라도 탄핵했으며, 태자 관련 일도 탄핵했다. 이로 인해 유거와 강충은 대립하게 되었다.

강충은 무고의 옥을 조사하면서 황후와 태자의 궁궐에서도 증거를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한서』 강충전 안사고 주 『삼보구사』에 따르면 강충의 헛소문). 이 사실을 알게 된 유거는 처형될 위기에 처하자 장안에서 거병하여 강충을 체포했다.

유거는 강충에게 "조의 하놈아, 네놈이 고향의 국왕 부자 (조경숙왕 유팽조와 태자 유단)의 관계를 어지럽히는 것으로도 부족하여 우리 부자까지 어지럽히려느냐"라고 욕하며 눈앞에서 강충을 참살했다. 또한 조사에 종사한 한설도 살해했다.[4]

이 일이 감천궁에 가 있던 무제에게 전해지자, 무제는 태자가 모반을 일으켰다고 판단하여 유굴모에게 토벌을 명했다. 유거는 유굴모와 교전하여 장안을 전란에 휘말리게 했지만, 병력 부족으로 호현의 신발 가게로 도망쳐 숨었다. 그러나 이수와 장부창 등의 추격에 포위되어 자결했다. 유거의 거병과 실패로 인해 세자인 유진(사황손)을 비롯한 그의 처자식들은 모반인의 가족으로 처형되었고, 당시 젖먹이였던 유병기(유진의 아들, 후의 선제)만이 살아남았다. 또한 생모인 위자부도 황후 지위를 박탈당하고 자결했으며, 유거를 도망시킨 전숙의 막내아들 田仁|전인중국어임안과 함께 요참에 처해졌고, 그 일족도 처형되었다.

사건의 배경이 밝혀지고 강충의 악행이 폭로되자, 무제는 이를 후회하여 유거 등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고, 반대로 강충의 일족을 몰살했다. 또한, 무고 조사를 함께 했던 환관 蘇文|소문중국어위수의 다리 위에 묶여 화형에 처해졌다. 무제는 아들이 억울하게 죽은 것을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태자가 죽은 호현에 사자궁(思子宮)을 건설했다.[5]

무고의 옥에서 살아남은 손자 유병기는 민간 가정에서 길러져 성인이 되었다. 무제의 사후, 그의 막내아들 유불릉(소제)이 즉위했지만, 소제 또한 사망하자 그의 조카 유하가 뒤를 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곽광에 의해 폐위되었다. 이후 곽광은 유병기를 황제로 옹립했다 (한의 선제). 선제 즉위 후, 유거에게는 "려(戾)"[5]라는 시호가 내려져 '''려태자'''라고 불리게 되었다.

3. 1. 태자 책봉과 초기 활동

위자부는 무제의 두 번째 황후였다. 무제의 첫 번째 황후는 진교였는데, 그녀는 불임이었고 질투심이 강했다. 게다가 그녀가 무제의 다른 후궁들을 저주하기 위해 마법을 사용한 것이 발각되자, 기원전 130년 8월에 공식적으로 폐위되었다. 위자부는 기원전 138년부터 무제의 총애를 받는 후궁이 되었고, 그 당시 이미 그에게 세 딸을 낳아주었다. 기원전 128년, 그녀는 무제의 첫 아들인 유거를 낳았고, 그 결과 그해 4월에 황후로 책봉되었다.

무제는 첫 아들이 태어났을 때 이미 29세였는데, 매우 기뻐하며 시인들에게 "대태자"의 탄생을 축하하는 찬가를 쓰도록 명령했고, 이는 유거가 당연히 황위 계승자가 될 것임을 암시했다. 유거는 6세인 기원전 122년 6월에 정식으로 태자로 책봉되었다.

무제는 유거에게 큰 기대를 걸어 아들이 모든 학파의 학자들을 접할 수 있도록 "박망원"(博望苑)을 건설하여 최고의 교육을 받도록 했다. 유거가 언제부터 정치에 관여하게 되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그가 성장하고 무제가 수도를 떠나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기원전 113년부터 그의 부재 시에 섭정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 위후는 나이가 들고 무제의 총애를 잃었지만 여전히 궁궐의 내정을 돌보는 임무를 맡았다. 유거와 위후는 모두 무제에게 존경을 받았다.

유거는 과대망상적이고 끊임없이 영토 확장을 추구하여 백성들에게 큰 부담을 주었던 무제와는 달리, 평화주의자로 여겨졌으며, 백성들의 사회적 복지와 경제 회복에 더 관심이 있었고, 많은 정책에 대해 아버지와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그는 관대함과 다양한 의견에 대한 개방성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궁궐에 많은 수의 고문과 친구들을 두었다. 유거는 더 관대한 정책을 선호하고 종종 억울한 판결을 뒤집도록 도왔기 때문에, 아버지의 더 가혹하고 권위주의적인 정책을 따라 승진한 법관들과 갈등을 겪었다.

기원전 113년, 유거는 유일하게 잘 알려진 황태자비인 사량제(史良娣)와 결혼하여 아들 유진(劉進)을 낳았다. 유진은 나중에 유병의를 낳았는데, 유병의는 기원전 91년 정치적 혼란으로 그의 온 가족이 살해당했을 때 불과 몇 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유거는 또한 두 아들과 딸이 있었다.

유거의 존경받는 삼촌인 위청 장군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유거는 정치적으로 안전했다. 위청이 기원전 106년에 사망한 후, 일부 관리와 파벌들이 유거를 음모하기 시작했다.

3. 2. 무고의 난과 비극적 최후

무고의 옥은 무제가 만년에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상대로 주술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점점 더 편집증적인 두려움을 갖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특히 무장한 낯선 사람이 지나가는 모습의 환각 사건과 수백 개의 작은 나무 인형이 막대기로 그를 때리는 악몽을 꾼 후 더욱 심해졌다.[4] 대대적인 단속이 명령되었고, 주술 혐의를 받는 사람들은 종종 그들의 전체 가문과 함께 즉결 처형되었다. 이 마녀사냥의 희생자에는 재상 공손하(公孫賀, 유거의 외숙부)의 일가족, 유거의 누이들(그리고 무제의 딸들) 양석공주(陽石公主)와 주읍공주(諸邑公主), 그리고 위청의 아들 위강(衛忼) 등이 포함되었으며, 사실상 한나라 조정에서 태자의 정치적 지지자들을 거의 모두 제거했다.

또한 무제의 총애를 받던 후궁은 젊은 조 부인(趙婕妤)이었는데, 그녀는 "권부인" (拳夫人) 또는 "구억부인" (鉤弋夫人)으로도 알려져 있었다. 그녀가 태어날 때 구축된 꽉 쥔 주먹을 가지고 있었고, 무제가 그것을 마사지했을 때 마법처럼 열리면서 손바닥에서 옥 갈고리가 나타났다는 전설 때문이었다. 그녀는 전설적인 요임금과 마찬가지로 14개월의 임신 기간을 거쳐 무제의 막내아들 유불릉을 낳았다. 66세의 나이에도 이토록 신성한 의미를 가진 아들을 낳을 수 있게 된 무제는 매우 기뻐하며 조 부인의 가문을 "요모문"(堯母門)이라고 명명했다. 이러한 제스처는 눈에 띄었고, 유거를 3살 된 부릉으로 교체하여 새로운 태자로 삼으려는 의도가 있다는 추측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추측은 유거를 폐위하려는 음모에 더욱 불을 지폈다.

태자 유거에 대한 음모자 중 한 명은 비밀 정보 기관의 잔혹하고 기회주의적인 수장인 강충(江充)이었다. 그는 황실 통행권을 부적절하게 사용한 유거의 조력자 중 한 명을 체포한 후 유거와 갈등을 겪었다. 무제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태자 유거가 언젠가 왕위에 올라 과거의 충돌에 대해 자신을 처벌할 것을 두려워한 강충은 태자를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또 다른 음모자는 무제의 수석 내시인 소문(蘇文)이었는데, 그는 유거가 무제의 어린 후궁들과 간통을 저질렀다고 거짓으로 반복적으로 고발했다. 소문은 또한 유거와 위태후가 당시 감천(甘泉, 현재 섬서성 시안)에 머물고 있던 무제와 소통하려는 모든 시도를 막았다.

같은 해에 강충과 소문은 다시 주술을 핑계로 유거를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강충은 무제의 승인을 받아 다양한 궁궐을 수색했는데, 겉으로는 주술 물품을 찾는다는 명목이었지만 결국 위태후와 유거의 가문에 이르렀다. 강충의 부하들은 곳곳에 구멍을 파서 태후와 태자가 침대에 누울 공간조차 거의 남기지 않았다. 강충은 이후 유거의 궁궐에 인형과 신비한 글씨가 적힌 천 조각을 심어 주술의 증거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처음에는 숨길 것이 없다고 믿었던 유거는 충격을 받고 자신의 선택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그의 스승 석덕(石德)은 조고가 영부소를 살해하려는 음모를 언급하면서 무제가 이미 사망했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유거에게 강충을 제거하기 위해 봉기를 시작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유거는 처음에는 망설였고 신속하게 감천궁으로 가서 아버지에게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려 했지만, 강충의 사자들이 이미 "죄"를 보고하러 가는 중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석덕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유거는 자신의 부하 중 한 명에게 무제의 사자를 사칭하여 강충 일당을 체포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소문은 체포를 피해 도망쳤다. 그들이 제압된 후 유거는 직접 9월 1일에 강충을 처형했다.[4] 그는 이후 자신의 행동을 어머니에게 보고했고, 어머니는 그에게 그녀의 궁궐 경비대를 동원하고 강충의 공모자들의 보복에 대비하기 위해 그가 모을 수 있는 모든 민간 지지자들에게 무기를 분배할 권한을 부여했다. 한편, 소문은 감천궁으로 도망쳐 무제에게 태자가 반란을 일으켜 그를 전복하려 한다고 말했다. 무제는 자신의 자애로운 아들이 반역을 저지르리라고는 믿지 않았고, (이 시점에서는 정확하게) 유거가 단순히 강충에게 화가 난 것일 뿐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래서 황제는 낮은 직급의 내시를 수도 장안으로 보내 유거를 소환하여 자신의 행동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도록 했다. 이 사자는 감히 장안으로 가지 못하고 대신 유거가 자신을 죽이려 했기 때문에 도망쳤다고 무제에게 거짓 보고했다. 분노한 무제는 조카인 재상 유굴마(劉屈犛)에게 반란을 진압하라고 명령했다.

유거는 또한 정규 군대를 동원하기 위해 두 명의 사자를 보냈다. 한 명은 수도 외곽에 주둔하고 있는 투항한 흉노 기병대에 파견되었지만, 무제의 사자가 먼저 도착하여 기병대에게 유거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다른 사자는 수도를 경비하는 북군에게 파견되었지만, 책임자인 임안(任安)은 관여를 거부했다. 정규 군대의 지원 없이 궁궐 경비대와 무장한 민간인으로 구성된 유거의 군대는 유굴마의 군대에 맞설 수 없었다. 게다가 무제의 깃발이 수도 밖에서 펄럭이자 무제가 여전히 지휘하고 있으며 유거는 아버지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래서 태자에 대한 대중의 지지가 사라졌다. 그런 다음 양측은 장안의 거리에서 5일 동안 격전을 벌였고, 유굴마의 군대가 승리했다. 9월 9일, 유거는 두 아들과 함께 수도에서 도망쳐야 했다. 같은 날, 그의 어머니 위태후는 무제가 그녀의 봉기를 지원한 벌로 그녀의 인장을 압수하라는 사자를 보낸 후 자살했다. 유거의 나머지 가족은 살해되었고, 생후 몇 달 된 손자 유병의만이 예외로 감옥에 던져졌다.

무제는 유거를 체포하라고 명령했지만, 령호무(令狐茂)라는 젊은 관리가 목숨을 걸고 유거를 옹호하자 무제의 분노가 가라앉기 시작했지만, 아직 아들에게 사면을 내리지는 않았다. 이 시점에서 유거는 호현(현재 허난성 산먼샤)으로 도망쳐 가난한 구두 수선공의 집에 피신했다. 그는 마음이 따뜻한 주인이 짊어진 재정적 부담을 알고 호현에 사는 옛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하려 했지만 이로 인해 그의 소재가 드러났다. 지방 관리들은 신속하게 그 집을 추적하여 포위했다. 도망갈 기회가 없다고 판단한 유거는 목을 매 자살했다. 그의 두 아들과 그들을 보호한 가족은 정부 군인들이 마침내 들이닥쳐 모두를 살해했을 때 함께 죽었다. 책임을 맡은 관리인 이수(李壽)와 장부창(張富昌)은 유거의 시신을 장안으로 가져가 무제로부터 보상을 요구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고, 무제는 아들의 죽음에 큰 슬픔을 느끼면서도 자신의 말을 지켜야 했다.

3. 3. 사후 복권과 역사적 평가

무제는 기원전 91년의 무고 사건이 거짓 고발이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기원전 89년, 전천추가 "백발 노인"이 꿈에 나타나 무장 봉기의 죄는 형벌로 처형되는 것이 아니라 기껏해야 매질을 당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보고했다. 무제는 음모자들이 자신의 신뢰를 악용하고 아들의 죽음을 꾸몄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소문(蘇文)을 산 채로 불태워 죽이고, 강충(江充)의 직계 및 방계 가족을 처형했으며, 태자를 추적하는 데 공을 세워 승진한 모든 관리들을 처형했다. 그는 또한 전천추를 재상으로 임명하고, 죽은 아들이 지지했던 이상을 옹호하는 주요 정책 변화를 단행했다. 아들의 죽음에 대한 후회를 표현하기 위해 무제는 사자궁(思子宮)과 귀래망사대(歸來望思台)를 건설하여 공식적으로 유거(劉據)의 이름을 복권시켰다.[5]

유거의 유일한 생존 자손인 손자 유병의는 결국 기원전 74년 황제(선제)가 되었다. 선제는 처음에는 할아버지의 칭호를 복원하려 하지 않았다. 기원전 73년에 이르러서야 그는 태자 유거의 칭호를 복원했지만 (다소 불명예스러운 사후 시호인 "려"를 사용했는데, 이는 "뉘우치지 않음"을 의미한다) 조부모와 부모를 재매장했다.

4. 위태자 사건

무제 말년에 일어난 무고의 옥은, 무제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상대로 주술을 사용한다는 편집증적인 두려움을 가지면서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데, 기원전 91년에는 재상 공손하(公孫賀, 유거의 외숙부)의 일가족, 유거의 누이들인 양석공주(陽石公主)와 주읍공주(諸邑公主), 그리고 위청의 아들 위강(衛忼) 등이 처형되었다. 이 사건으로 태자 유거의 정치적 지지자들이 제거되었다.

무제의 총애를 받던 후궁 조 부인(趙婕妤)은 유불릉을 낳았는데, 무제는 이를 신성하게 여겨 유거 대신 유불릉을 태자로 삼으려는 의도를 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거를 제거하려는 음모가 시작되었다. 음모자 중 한 명인 강충(江充)은 유거와 갈등을 겪었고, 내시 소문(蘇文)은 유거가 무제의 후궁들과 간통했다고 모함했다.

강충과 소문은 주술을 핑계로 유거를 공격했고, 강충은 유거의 궁궐에서 주술의 증거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유거는 강충을 제거하기 위해 봉기를 일으켰고, 강충을 처형했다.[4] 하지만 소문은 무제에게 유거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거짓 보고했다. 무제는 재상 유굴마(劉屈犛)에게 반란을 진압하라고 명령했다.

유거는 군대를 동원했지만, 유굴마의 군대에게 패배했다. 유거는 도망쳤지만, 결국 자살했고, 그의 가족들은 살해되었다. 유거의 죽음 이후, 태자가 살아있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시원 5년(기원전 82년)에는 자신이 유거라고 주장하는 남자가 나타났지만, 결국 거짓으로 밝혀져 처형되었다.

참조

[1] 인용
[2] 인용
[3] 인용
[4] 인용
[5] 인용
[6] 서적 참고 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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