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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카시라 공원 토막 살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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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노카시라 공원 토막 살인 사건은 1994년 4월 일본 도쿄도 미타카시의 이노카시라 은사 공원에서 발생한 미제 살인 사건이다. 피해자는 35세의 건축가 카와무라 세이치로, 공원 쓰레기통에서 토막 난 시신 일부가 발견되었다. 시신은 27조각으로 절단되었고, 지문이 훼손된 상태였다. 수사는 난항을 겪었고, 2009년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미제 사건으로 남았다. 피해자의 종교 단체 연루설, 원한 관계, 오인 살해 등 다양한 가설이 제기되었으며, 2015년에는 피해자가 다른 인물로 오인되어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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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카시라 공원 토막 살인 사건
사건 개요
사건이노카시라 공원 토막살인 사건
원어ja
발생일1994년 4월 23일
위치도쿄도 미타카시 이노카시라 공원
최초 보고자공원 청소부 여성
원인토막살인
결과공원 내 7개 쓰레기통에서 27조각 난 시신 발견
피해자카와무라 세이치
조사 종료2009년 4월 23일 공소시효 만료

2. 사건 발생

1994년 4월 23일 오전, 도쿄도 미타카시에 위치한 이노카시라 은사 공원에서 토막난 인간의 시신 일부가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공원 내 여러 쓰레기통에서 총 27개의 조각으로 나뉜 시신이 수습되었으나, 경찰의 수사에도 불구하고 범인을 특정할 만한 결정적인 단서나 물증을 찾지 못했다. 결국 이 사건은 2009년 4월 23일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1][3]

2. 1. 최초 발견

1994년 4월 23일 오전, 도쿄도 미타카시에 있는 이노카시라 은사 공원의 쓰레기통에서 고양이에게 줄 먹이를 찾던 청소부 여성이 비닐 봉투에 담겨 버려진 인간의 발목을 우연히 발견했다.[1][2][3] 청소부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관들은 공원 일대를 수색하여 총 7개의 쓰레기통에서 27개 토막으로 잘린 손발과 몸통 일부가 담긴 봉투들을 추가로 찾아냈다.[1][3]

발견된 시신 조각들은 물을 빼기 위한 작은 구멍이 뚫린 검은 비닐 봉투와 반투명 봉투로 이중 포장되어 있었으며, 어부들이 사용하는 특수한 방식으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1][2][3] 시신은 매우 정교하게 전동 을 사용하여 약 20cm 크기로 절단되었고, 혈액이 완전히 제거된 상태로 세척되어 있었다. 이는 고도로 숙련된 기술이 필요한 작업으로 추정되었다.[2]

손발의 지문은 대부분 의도적으로 훼손되었으나, 일부 남은 지문과 DNA 분석을 통해 피해자의 신원이 밝혀졌다.[1][2][3] 피해자는 공원 근처에 거주하던 당시 35세의 1급 건축사 川村誠一|카와무라 세이치일본어였다.[1][2][3]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갈비뼈 근육 섬유에서 약간의 생전 출혈 흔적이 발견되었다.[1][3]

2. 2. 시신 수습

1994년 4월 23일 오전, 도쿄도 미타카시에 위치한 이노카시라 공원의 쓰레기통에서 청소부 여성이 고양이에게 줄 먹이를 찾던 중 인간의 발목이 담긴 비닐 봉투를 우연히 발견했다. 즉시 경찰에 신고가 접수되었고, 출동한 경찰은 공원 일대의 쓰레기통을 수색하여 총 7곳에서 27개 조각으로 절단된 시신 일부를 추가로 찾아냈다.

발견된 시신 조각들은 물을 빼기 위한 작은 구멍이 뚫린 검은 비닐 봉투와 반투명 봉투로 이중 포장되어 있었으며, 어부들이 사용하는 특수한 매듭 방식으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 시신은 전동 을 사용하여 약 20cm 크기로 매우 정교하게 절단되었고, 혈액이 완전히 제거되도록 조심스럽게 세척된 상태였다. 이는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한 작업으로 추정되었다.

손과 발의 지문은 대부분 의도적으로 훼손되었지만, 일부 남아있는 지문과 DNA 분석을 통해 피해자의 신원이 밝혀졌다. 피해자는 공원 인근에 거주하던 당시 35세의 1급 건축사 카와무라 세이치(川村誠一|카와무라 세이치일본어)였다.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갈비뼈의 근육 섬유에서 약간의 생전 출혈 흔적이 확인되었다.

3. 피해자 정보

피해자는 사건 현장인 이노카시라 공원 인근에 거주하던 35세의 1급 건축사 川村誠一|카와무라 세이치일본어로 밝혀졌다. 그는 1994년 4월 22일 자정 무렵 지인과 헤어진 후 행방불명되었다. 또한, 도쿄에 있는 신원 미상의 종교 단체 회원이었다는 정보도 있다.

3. 1. 신원 확인

사건 발생 후 경찰의 수색 과정에서 발견된 시신의 신원을 확인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손발의 지문은 거의 완전히 지워진 상태였으나, 약간 남은 지문과 DNA 분석을 통해 피해자의 신원이 밝혀졌다. 피해자는 공원 근처에 거주하던 당시 35세의 1급 건축사인 川村誠一|카와무라 세이치일본어로 확인되었다.

3. 2. 실종 전 행적

피해자인 1급 건축사 카와무라 세이치(川村誠一|카와무라 세이치일본어, 당시 35세)는 사건 현장인 이노카시라 공원 근처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는 1994년 4월 22일 자정 무렵 지인과 헤어진 후 행방이 묘연해졌다.

실종 직후인 22일 오전 0시가 지나서, 피해자와 매우 닮은 남성이 JR 기치조지역(吉祥寺駅|기치조지역일본어) 백화점 옆에서 젊은 남성 2명에게 폭행당하는 것을 봤다는 목격담이 있었다. 하지만 이후 발견된 시신에서 별다른 폭행 흔적이 발견되지 않아 이 증언의 신빙성은 확실하지 않다.

또한, 피해자가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는 22일 새벽 시간대에 사람과 자동차가 충돌하는 듯한 큰 소리를 들었다는 정보도 제기되었다. 이 때문에 교통사고를 당한 피해자의 시신을 숨기기 위해 토막 낸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나왔다.

피해자의 시신이 발견된 날인 23일 새벽 4시경에는, 이노카시라 공원 안에서 쓰레기 봉투를 들고 서성이던 수상한 남성 2인조를 보았다는 목격담도 있다. 이들은 30대로 추정되었다.

4. 시신의 상태

1994년 4월 23일 아침, 도쿄 이노카시라 공원의 쓰레기통에서 공원 관리인이 토막난 시신 일부를 발견했다.[2] 경찰은 공원 내 여러 쓰레기통에서 총 27개의 시신 조각을 수습했는데, 이는 물을 빼기 위해 구멍이 뚫린 쓰레기 봉투에 담겨 어부들이 사용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묶여 있었다.[2]

피해자는 공원 인근에 거주하던 35세 남성 건축가 카와무라 세이치로 밝혀졌다.[2] 발견된 시신은 매우 정교하게 절단되고 혈액이 완전히 제거된 상태였으며, 신원 확인을 어렵게 하기 위해 지문이 훼손되어 있었다.[1][2][3][4] 이러한 처리 방식은 전문적인 지식과 설비가 필요한 것으로 추정되었다.[1][2][3]

발견된 것은 시신 전체의 약 3분의 1에 불과했으며,[1][2][3] 시신 절단 방식의 특징 등으로 인해 복수 범행 가능성도 제기되었다.[1][3]

4. 1. 절단 및 훼손

절단된 시신은 관절이나 장기 등을 무시한 채, 길이와 굵기가 일정하게 약 20cm 간격으로 잘려 있었다.[1][2][3] 절단에는 전동 톱과 같은 도구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며, 매우 정교하게 작업되었다.[1][2] 시신 조각의 크기는 공원 내 쓰레기통 투입구 크기(세로 20cm, 가로 30cm)와 거의 일치했다.[1][3]

또한 시신에서는 혈액이 한 방울도 남지 않도록 완전히 제거되었는데, 이는 일반 가정의 설비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대량의 의학적 지식이 필요한 작업으로 추정된다.[1][2][3] 시신 절단 방식에서는 최소 3가지 패턴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범인이 여러 명일 수 있다는 복수 범행설의 근거 중 하나가 되었다.[1][3]

피해자의 신원을 감추기 위해 손발의 지문은 거의 모두 깎여 있었지만, 일부 남은 지문을 통해 신원 확인이 가능했다.[1][2][4] 발견된 시신은 전체의 3분의 1 정도에 불과했으며, 피해자머리몸통 대부분, 가슴, 성기 등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1][2][3] 이 부위들은 사건 발각 전날인 4월 22일에 다른 쓰레기 봉투에 담겨 버려졌고, 쓰레기 수거 차량에 의해 이미 처리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1][2][3] 갈비뼈 부근 근육에서 약간의 생전 출혈 흔적이 발견되어 해당 부위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절단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으나[2][4], 정확한 사인은 불명으로 남았다.[2][4]

4. 2. 혈액 제거

발견된 시신은 혈액이 한 방울도 남김없이 완전히 제거된 상태였다. 이러한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일반 가정의 설비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대량의 의학적 지식이 필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국은 범인이 해부학 지식이 풍부하며, 시신 세척 및 배수에 필요한 대량의 물을 확보할 수 있는 환경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이는 고도로 숙련된 의료 전문가 수준의 기술이 요구되는 작업으로 여겨졌다.

4. 3. 발견되지 않은 부위

발견된 시신은 전체의 3분의 1 정도에 불과했으며, 피해자의 두부몸통 대부분(가슴, 성기 등 포함)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이 발견되지 않은 부위들은 사건 발각 전날인 4월 22일에 공원 쓰레기통에 버려졌고, 이후 쓰레기 수거 차량에 의해 수거되어 처리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5. 수사 과정

(내용 없음 - 하위 섹션에서 상세히 다루므로 중복을 피해 생략함)

5. 1. 초동 수사

경찰은 사건 발생 직후 이노카시라 은사 공원 일대의 쓰레기통을 수색하여 총 7곳에서 27개 토막으로 나뉜 피해자의 시신 일부를 발견했다. 시신이 담긴 비닐 봉투는 물을 빼기 위한 작은 구멍이 있었고, 검은 봉투와 반투명 봉투를 이중으로 겹쳐 어부들이 사용하는 특수한 방식으로 묶여 있었다.[1][2]

지문은 대부분 지워졌으나, 남은 일부 지문과 DNA 분석을 통해 피해자는 공원 근처에 거주하던 35세의 1급 건축사 川村誠一|카와무라 세이치일본어로 신원이 밝혀졌다. 사인은 불명확했으나, 갈비뼈 근육 섬유에서 약간의 생전 출혈 흔적이 발견되었다.[1][2]

수사는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진행되었다. 원한 관계, 피해자가 회원이었던 신원 미상의 종교 단체 연루설, 시신 처리 방식의 특이성으로 인한 조직적 범행 가능성 등이 제기되었다.[1][3] 또한, 피해자 실종 추정 시각인 4월 22일 새벽에 사람과 차가 부딪히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는 증언이 있어, 교통 사고를 은폐하기 위해 시신을 훼손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1][4]

경찰은 피해자의 친구와 지인들을 대상으로 광범위한 탐문 수사를 벌였고 자택도 수색했지만, 범인을 특정할 만한 단서는 찾지 못했다.[1][3] 피해자와 닮은 남성이 4월 22일 0시경 기치조지역 근처에서 두 명의 젊은 남성에게 폭행당하는 것을 봤다는 목격담과, 23일 새벽 4시경 공원에서 수상한 남성 2인조가 비닐봉투를 들고 서성이는 것을 봤다는 목격담도 있었으나, 시신에서 뚜렷한 폭행 흔적이 발견되지 않아 증언의 신빙성은 의심받았다.[1][3]

결정적인 물증이나 정보 부족으로 수사는 난항을 겪었다. 특히 사건 발생 11개월 후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이 발생하면서 수사 인력 대부분이 해당 사건으로 차출되어, 이 사건을 담당하는 인원은 극소수만 남게 되었다.[3] 결국 2009년 4월 23일, 범인을 특정하지 못한 채 공소 시효가 만료되어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1][3]

5. 2. 수사 난항

범인을 특정할 만한 물증이나 정보가 부족했고, 피해자 카와무라 세이치의 교우 관계에서도 용의자로 의심할 만한 인물이 드러나지 않았다. 사건 발생 직후에는 시신 절단 및 유기 방식의 기묘함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으나, 불과 3일 뒤인 4월 26일 나고야 비행장에서 발생한 중화항공 140편 추락 사고[1]로 언론의 관심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 사고는 당시 중화항공 역사상 최악의 참사였기에 언론 보도가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사건 발생 약 11개월 후 옴진리교가 일으킨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은 수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경시청 수사1과의 담당 수사원들이 옴진리교 사건 수사에 대거 투입되면서 이 사건의 수사 본부는 사실상 해체되었고, 이후 수사는 관할 미타카 경찰서가 단독으로 맡게 되었다. 결국 경시청 수사1과가 다시 이 사건을 담당하는 일은 없었다.[2][5]

이처럼 결정적인 단서나 용의자를 찾지 못한 채 시간만 흘러, 2009년 4월 23일 공소 시효가 만료되어 사건은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범인의 동기 등 불명확한 부분이 많은 사건이다.

5. 3. 공소시효 만료

피해자의 교우 관계에서는 전혀 범인상이 드러나지 않았고, 범인과 연결되는 물증이나 정보가 부족했다. 결국 살인 사건의 공소시효인 15년이 지난 2009년 4월 23일, 범인을 특정하지 못한 채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범인의 동기 등 불명확한 부분이 많은 사건이다.

사건 수사가 난항을 겪고 결국 공소시효 만료에 이르게 된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 사건 발생 직후에는 시신 절단 및 유기 방식의 기묘함으로 인해 언론의 주목을 받았으나, 사건 발생 3일 후인 1994년 4월 26일나고야 비행장에서 264명의 사망자를 낸 중화항공 140편 추락 사고[1]가 발생하면서 언론의 관심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또한, 사건 발생 약 11개월 후인 1995년 옴진리교에 의한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이 발생하면서, 경시청 수사1과의 본 사건 수사원들이 옴진리교 사건 수사에 대거 투입되었다. 이로 인해 수사 본부는 사실상 해체되고 사건은 미타카 경찰서 단독으로 인계되었으며, 이후 수사1과가 본 사건을 다시 담당하는 일은 없었다[2]. 이러한 상황 속에서 새로운 증거나 단서를 확보하지 못하면서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

6. 제기된 의혹 및 가설

이 사건의 범인을 특정하기 위해 수사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의혹과 가설이 제기되었다. 목격 증언과 시신의 상태 등을 바탕으로 원한 관계, 사고 조우, 종교 단체 연루 등 다양한 가능성이 혼재했다.

피해자의 교우 관계를 중심으로 원한에 의한 범행 가능성이 조사되었으나, 뚜렷한 용의자는 특정되지 않았다. 또한, 시신 처리 방식의 특이성(이상함)과 여러 명이 조직적으로 가담했을 가능성 때문에 특정 종교 단체가 연루되었을 수 있다는 설도 제기되었다.[6]

시신 훼손이 매우 정교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의료 지식이 필요한 절단 방식, 지문 제거 등)과 어부들이 사용하는 특수한 방식으로 봉투를 묶은 점 등을 근거로, 전문적인 기술과 시설을 갖춘 조직범죄 집단의 소행이라는 가설이 유력하게 거론되었다. 이는 피해자가 지역 조직범죄 단체와 어떤 문제로 얽혔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사건 발생 이후인 2015년에는 피해자와 외모 등이 매우 유사했던 다른 인물(A)이 자신이 본래 표적이었으며, 피해자가 자신으로 오인되어 살해당했다는 주장을 제기하면서 오인 살해 가능성도 거론되었다.[4]

이처럼 다양한 가설이 제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범인을 특정할 결정적인 물증이나 정보는 부족했다. 더욱이 사건 발생 직후 중화항공 140편 추락 사고(1994년 4월 26일)와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1995년 3월) 같은 대형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수사 인력이 차출되고 언론의 관심이 분산되어 수사가 제대로 진행되기 어려웠다. 결국 2009년 4월 23일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사건은 미제로 남게 되었다. 범행 동기 등 여전히 많은 부분이 불명확한 사건이다.

6. 1. 원한 관계

피해자 카와무라 세이치(川村誠一) 주변의 원한 관계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으나, 교우관계 등에서 범인으로 의심할 만한 인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범인을 특정할 물증이나 정보 부족으로 결국 2009년 4월 23일 공소시효가 만료되었다.

6. 2. 종교 단체 연루설

시신 처리 방식의 이상한 점과 여러 사람이 조직적으로 범행했을 가능성 때문에 종교 단체가 연루되었을 수 있다는 설이 제기되었다. 피해자가 도쿄도 다카이도의 한 종교 시설에 다녔으며, 해당 단체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있었다.[6] 피해자가 신원 미상의 종교 단체 회원이었고 그 단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피해자가 특정 종교에 가입했다는 설을 부정하는 보도도 있어 사실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피해자의 부인 또한 남편이 종교 시설에 다녔다는 소문을 부인했다.[3] 따라서 종교 단체 연루설은 여러 가설 중 하나일 뿐이며, 명확히 확인된 사실은 없다.

6. 3. 오인 살해 가능성

공소 시효가 만료되고 6년이 지난 2015년, 데일리 뉴스 온라인의 보도를 통해 새로운 증언이 나왔다.[4] 이 증언에 따르면, 이 사건은 피해자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여 살해한 '인물 착오 살인 사건'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4]

증언자는 당시 기치조지에서 창고를 빌려 사용하던 남성(이하 A)으로, 그는 해당 지역 노점상 사이에서 실력자로 통했다. 피해자인 카와무라 세이치와 A는 얼굴, 체격, 나이가 매우 비슷했다고 한다.[4] A는 당시 구역 다툼으로 갈등을 겪던 외국인 노점상을 내쫓으려 했는데, 이 외국인들이 실제로는 특정 국가의 특무 기관에 소속된 공작원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4]

A는 이들 공작원에게 습격 계획이 노출되면서 오히려 감시당하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이로 인해 A는 도쿄 시내의 여러 비즈니스 호텔을 옮겨 다니며 도피 생활을 했고, 사건 발생 당시에도 호텔에 숨어 있었다고 증언했다.[4]

피해자 카와무라 세이치의 집과 A의 창고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으며, A 자신도 카와무라의 지인에게 카와무라로 오인받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정황 때문에, 피해자 카와무라 세이치가 A로 오인되어 외국인 공작원들에게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4]

7. 사건의 사회적 영향

이 사건은 시신을 27조각으로 절단하여 쓰레기통에 유기하는 엽기적인 방식으로 인해 발생 초기 언론의 큰 주목을 받았다.[2] 그러나 사건 발생 불과 3일 뒤 중화항공 140편 추락 사고라는 대형 참사가 발생하고,[1][2][5] 약 1년 후에는 옴진리교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이 일어나면서 언론의 관심은 급격히 식었고, 수사 인력마저 옴진리교 사건에 투입되면서 수사 동력을 상실했다.[2][5] 결국 사건은 해결되지 못한 채 2009년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미제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사건의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있었으며, 1995년에는 피해자의 아버지가 직접 사건의 경위를 담은 책을 자비로 출판하기도 했다.

7. 1. 언론 보도와 여파

사건 발생 직후에는 시신을 절단하여 쓰레기통에 버렸다는 기묘한 점 때문에 언론의 주목을 집중적으로 받았다.[2] 그러나 사건 발생 3일 후인 1994년 4월 26일, 나고야 비행장에서 264명의 사망자를 낸 중화항공 140편 추락 사고[1]가 발생하면서 언론의 관심은 이 항공 사고로 쏠렸고, 이노카시라 공원 사건에 대한 보도는 급격히 줄어들었다.[2][5] 이후 새로운 정보가 부족하여 크게 보도되지 않았다.[2]

또한, 사건 발생 약 11개월 후에는 옴진리교에 의한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이 일어나면서, 경시청 수사1과의 본 사건 담당 수사관들도 옴진리교 사건 수사에 투입되었다. 이로 인해 수사 본부는 해체되었고, 사건은 미타카 경찰서가 단독으로 맡게 되었다. 이후 경시청 수사1과가 이 사건을 다시 담당하는 일은 없었다.[2][5]

1995년에는 피해자의 아버지가 사건의 진상 규명을 바라며 직접 쓴 책인 深사의 궤적|신시노 키세키일본어을 자비로 출판하기도 했다.

7. 2. 미제 사건 해결 노력

사건 발생 초기에는 일본 대중 매체의 큰 주목을 받았으나, 발생 3일 후인 4월 26일 중화항공 140편 추락 사고가 발생하면서 언론의 관심이 분산되었다. 해당 사고는 항공사 역사상 최악의 참사 중 하나였기에, 이 사건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수사관들은 이후 11개월간 수사를 이어갔지만, 1995년 발생한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 수사에 대부분의 인력이 투입되면서 결국 사건은 미결 상태로 남게 되었다. 살인 사건의 공소시효는 사건 발생 15년 후인 2009년에 만료되었다.

사건의 진상 규명과 범인 특정을 위해 여러 가설이 제기되었다. 피해자 "S"가 헤어진 연인에게 복수심에 의한 공격을 당했거나, 해당 연인이 공격을 사주했을 가능성이 거론되었다. 또한 "S"가 속했던 특정 종교 단체가 살해에 연루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으나, 명확한 동기를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는 가설은 "S"가 지역 조직 범죄 단체와 갈등 관계에 있었고, 이들이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시신 훼손 방식이 매우 정교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에 근거한다. 범행에는 단순한 의료 지식을 넘어 산업용 급수 시설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조직적인 범죄 집단만이 가능한 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 조직 범죄 연루설에 힘을 싣는 증언이 2015년에 나왔다. 익명의 제보자 "K"는 사건 당시 사업을 하고 있었으며, 피해자 "S"와 외모 등이 비슷해 여러 차례 오인받은 경험이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K"의 창고는 "S"의 집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고 밝혔다. "K"는 자신이 지역 노점상 다수에게 물품을 공급했으며, 당시 상점을 열려는 외국인 노점상들과 갈등이 있었다고 인정했다. 그는 이들 외국인 노점상 중 일부가 특정 외국 범죄 조직과 연계되어 있었고, 이 조직으로부터 지속적인 감시를 받았으며 보복을 두려워해 호텔 등을 전전하며 숨어 지냈다고 증언했다. 호텔에 머물던 중 "K"는 이 사건 보도를 접했고, "S"의 집이 자신의 창고 근처라는 사실 등을 통해 자신이 표적이었으나 "S"가 오인되어 살해당했을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고 말했다. "K"는 자신이 즉시 나서면 조직이 실수를 깨닫고 자신을 해칠 것을 두려워하여 오랫동안 이 사실을 숨겨왔다고 덧붙였다.

참조

[1] 문서 日本航空123便墜落事故에 次ぐ規模である。また中華航空(現チャイナエアライン)としても創業以来最悪の事故であった
[2] 뉴스 【衝撃事件『未解決』の核心】異常さ際立つ猟奇的犯行 なぜ捜査は暗礁に…井の頭公園バラバラ殺人(上) https://megalodon.jp[...] MSN産経新聞 2009-04-18
[3] 간행물 新潮45 1999-10
[4] 뉴스 "「井の頭公園バラバラ殺人」事件は“人違い殺人”だった【後編】" http://dailynewsonli[...] 데일리뉴스온라인 2015-03-20
[5] 뉴스 【衝撃事件『未解決』の核心】異常さ際立つ猟奇的犯行 なぜ捜査は暗礁に…井の頭公園バラバラ殺人(上) http://s01.megalodon[...] MSN産経新聞 2009-04-18
[6] 간행물 新潮45 1999-10
[7] 웹인용 "「井の頭公園バラバラ殺人」事件は“人違い殺人”だった【後編】" http://dailynewsonli[...] 2018-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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