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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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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는 1185년 안드로니코스 1세 콤네노스를 몰아내고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는 1195년 동생 알렉시오스 3세에게 폐위되어 감금되었으며, 1203년 제4차 십자군에 의해 복위되었으나 1204년 알렉시오스 5세의 반란으로 사망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시칠리아 왕국, 불가리아, 십자군과의 갈등이 있었고, 무능한 통치로 인해 제국은 쇠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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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사키오스 2세의 초상화 ([[Mutinensis gr. 122|15세기 사본]])
이사키오스 2세의 초상화 (15세기 사본, 요안네스 조나라스의 "역사 발췌" 수록)
전체 이름이사키오스 앙겔로스
로마자 표기Isaakios Komnēnos Ángelos
칭호로마인의 황제 및 전제자
왕조앙겔로스 왕조
종교그리스 정교
출생일1156년 9월
사망일1204년 1월 (47세)
사망 장소콘스탄티노플 (현재의 이스탄불, 튀르키예)
아버지안드로니코스 두카스 앙겔로스
어머니에우프로시네 카스타모니티사
통치
즉위1185년 9월 12일
퇴위1195년 4월 8일
이전 통치자안드로니코스 1세 콤니노스
후임 통치자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
대관식1203년 8월 1일
재즉위1203년 7월 19일
최종 퇴위1204년 1월 27일
최종 후임 통치자알렉시오스 5세 두카스
공동 통치자알렉시오스 4세 앙겔로스
공동 통치 형태공동 황제
배우자
배우자 1에이레네 콤네나 또는 팔라이올로기나 (1185년 종료)
배우자 2헝가리의 마르가레트 (1185년 결혼, 1204년 종료)
자녀

2. 생애

이사키오스 2세는 1185년 안드로니쿠스 1세의 폭정에 반발한 시민 봉기로 황제에 추대되었다. 안드로니쿠스 1세는 잔혹함과 귀족 탄압으로 민심을 잃었고, 이사키오스는 시민들의 지지를 받아 황제가 되었다. 니케타스 코니아테스는 이사키오스의 외모를 "혈색이 좋고 붉은 머리카락을 가졌으며, 키는 평균이고 체격은 튼튼했다"고 묘사했다.[1]

스테파노스 하기오크리스토포리테스의 살해, c. 1473, 장 콜롬브의 미니어처, ''Les Passages d'outremer'', BNF.


안드로니쿠스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이사키오스는 아버지, 형제들과 함께 반란에 연루되었으나 처벌받지 않았다. 1185년 9월 11일, 안드로니쿠스의 부관 스테파노스 하기오크리스토포리테스가 이사키오스를 체포하려 하자, 이사키오스는 그를 죽이고 성 소피아 성당으로 피신했다.[2] 백성들의 호응으로 소란이 일어났고, 안드로니코스는 민심을 잃고 이사키오스가 황제로 선포된 것을 알게 되었다. 안드로니코스는 도망치려다 체포되어 이사키오스에게 넘겨졌고, 1185년 9월 12일에 살해되었다.[3]

이사키오스 2세는 시칠리아의 노르만족 침입을 격퇴하고, 헝가리와 동맹을 맺는 등 제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1186년 1월에는 헝가리 국왕 벨러 3세의 딸 헝가리의 마르가레트(마리아로 개명)와 결혼했고, 1191년 이후에는 조카 에우도키아 안젤리나가 세르비아 대공 스테판 네마냐의 아들 스테판과 결혼했다. 그러나 불가리아 제국의 성립, 키프로스 상실 등 어려움도 겪었다. 1185년 말, 아크레에서 형제 알렉시우스 3세를 구출하기 위해 80척의 갤리선을 보냈지만, 시칠리아의 노르만족에게 파괴되었고,[3] 이후 70척의 배를 보냈지만, 키프로스를 되찾는 데 실패했다.[3][4]

제3차 십자군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와 갈등을 겪기도 했지만, 결국 십자군의 통과를 허락했다. 1189년 프리드리히 1세는 비잔틴 제국 통과 허가를 요청했고, 이사키오스는 그가 비잔티움을 정복하려 한다고 의심했지만, 1190년 3월, 아드리아노폴리스를 떠나 헬레스폰트갈리폴리로 가는 것을 허락했다. [7] [8]

불가리아와의 전쟁은 계속되었고, 이사키오스는 직접 원정에 참여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191년, 세르비아에 대한 군사 원정을 시작, 남부 모라바 전투(1191년 가을)에서 승리하여 니쉬를 회복하고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1195년 형 알렉시우스 3세의 반란으로 폐위되어 감금되었다.

1203년 제4차 십자군에 의해 복위되었으나, 쇠약해진 상태였고 아들 알렉시오스 4세가 실질적인 통치자였다. 알렉시오스 4세는 십자군에 크게 의존하여 의무를 다할 수 없었고, 우유부단함으로 십자군과 백성 모두에게 지지를 잃었다. 1204년 1월 말, 알렉시오스 두카스 '무르추플로스'는 폭동을 틈타 알렉시오스 4세를 감금하고 알렉시오스 5세로서 왕위를 찬탈했다. 이 시점에서 이사키오스 2세는 충격으로 사망했고, 알렉시오스 4세는 교살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즉위

이사키오스 2세는 소아시아의 군사 귀족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는 안드로니쿠스 두카스 앙겔로스였고 어머니는 황제 가문의 먼 친척이었다. 1156년 안드로니코스 안젤로스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할아버지는 콘스탄티노스 앙겔로스, 할머니는 콤네노스 왕조 초대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의 딸 테오도라 콤네나이다. 알렉시오스 1세의 증손에 해당한다. 동복 동생으로는 알렉시오스가 있었다.

1185년 9월, 안드로니쿠스 1세의 폭정에 반발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이 봉기하였고, 이사키오스는 이 반란에서 시민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안드로니쿠스 1세는 강압적인 독재 정치로 국민들의 반감을 샀고, 철저한 탄압으로 억눌렀으나, 결국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하여 이사키오스를 지도자로 옹립한 반란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사키오스는 국민귀족의 지지를 얻어 황제로 즉위했다.

니케타스 코니아테스는 이사키오스 2세의 외모를 "혈색이 좋고 붉은 머리카락을 가졌으며, 키는 평균이고 체격은 튼튼했다"고 묘사했다.[1]

안드로니쿠스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이사키오스는 아버지와 형제들과 함께 니케아와 부르사에서 일어난 반란에 연루되었다. 그러나 황제는 그를 처벌하지 않았고, 이사키오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머물렀다. 1185년 9월 11일, 안드로니쿠스가 수도를 비운 사이 그의 부관 스테파노스 하기오크리스토포리테스가 이사키오스를 체포하려 하자, 이사키오스는 하기오크리스토포리테스를 죽이고 성 소피아 성당으로 피신했다.[2] 백성들에게 호소하여 소란이 일어났고, 안드로니코스는 대중의 지지를 잃고 이사키오스가 황제로 선포된 것을 알게 되었다. 안드로니코스는 도망치려 했지만 체포되어 이사키오스에게 넘겨졌고, 1185년 9월 12일에 살해되었다.[3]

2. 2. 첫 번째 재위 (1185년-1195년)

굴리엘모 2세가 이끄는 시칠리아 노르만인의 침입을 알렉시우스 브라나스를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격퇴하였다.[2] 헝가리 왕 벨러 3세와 협정을 맺고 그의 딸 마르가리타를 황후로 맞았다.[2] 또한 자신의 여동생 테오도라를 몬페라토의 코라도에게 시집보내 제위를 튼튼하게 했다.[2] 이사키오스 2세는 1185년과 1186년에 정략 결혼을 통해 황제로서의 지위를 강화했는데, 1186년 1월에는 이사키오스 본인이 헝가리 국왕 벨러 3세의 딸인 헝가리의 마르가레트(마리아로 개명)와 결혼했다. 1191년 이후, 그의 조카 에우도키아 안젤리나는 세르비아 대공 스테판 네마냐의 아들인 스테판과 결혼했다.

1185년에 불가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나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이 세워졌다.[2] 1185년 말, 이사키오스는 아크레에서 형제 알렉시우스 3세를 구출하기 위해 80척의 갤리선을 보냈지만, 시칠리아의 노르만족에게 파괴되었다.[3] 이후 70척의 배를 보냈지만, 키프로스를 되찾는 데 실패했다.[3][4]

1187년 10월 예루살렘이 살라딘의 손에 떨어지자 제3차 십자군이 조직되었다.[2] 1189년 이사키오스는 황제 프리드리히 1세와 긴장상태에 들어갔으나 1190년 2월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조약을 체결하여 프리드리히의 십자군을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소아시아로 가게 했다.[2] 프리드리히 1세는 불가리아인 및 세르비아인과 외교적으로 접촉했고, 1160년대에 비잔틴 제국에 대한 독일의 침략에 대한 소문은 이사키오스의 통치 기간 동안 비잔틴 궁정에서 여전히 기억되었기 때문에 이사키오스는 바르바롯사가 비잔티움을 정복하려 한다고 의심했다. [7] 보복으로 바르바롯사의 군대는 필리포폴리스를 점령하고 도시를 탈환하려던 3,000명의 비잔틴 군대를 격파했다. [8] 1190년 3월, 바르바롯사는 아드리아노폴리스를 떠나 헬레스폰트갈리폴리로 가서 소아시아로 출발했다.

십자군을 보내고 난 뒤 이사키오스는 불가리아와의 전쟁을 계속했다. 그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원정에 참여했으나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1190년에는 군대를 버리고 혼자 도망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2] 1191년, 이사키오스 2세는 세르비아에 대한 군사 원정을 시작했다. 비잔틴 군대는 남부 모라바 전투(1191년 가을)에서 승리하여 니쉬를 회복하고 그에 따른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1195년 이사키오스가 다시 한번 불가리아 원정을 준비하는 사이 이사키오스의 형인 알렉시우스 앙겔루스가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2] 이사키오스는 붙잡혀 눈이 뽑히는 벌을 받고 폐위되어 감금되었다.[2]

2. 3. 두 번째 재위 (1203년-1204년)

1201년 이사키오스 2세의 아들 알렉시오스는 서방으로 가 아버지의 복위를 위해 노력하다 제4차 십자군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끄는 데 성공했다.[2] 1203년 7월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장악했고, 그해 8월 1일 이사키오스는 아들과 함께 공동 황제로 복위되었다. 그러나 십자군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 사이의 알력, 십자군의 횡포로 인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폭동이 일어났고, 1204년 2월 8일 아들 알렉시오스 4세는 암살되고 그 며칠 뒤 이사키오스도 죽었다.[2] 그는 시력 상실과 감금으로 정신과 육체가 쇠약해진 상태였다.[2]

십자군에 크게 의존한 알렉시오스 4세는 자신의 의무를 다할 수 없었고, 그의 우유부단함은 십자군 동맹과 백성 모두에게 지지를 잃게 만들었다. 1204년 1월 말, 궁정 관리 알렉시오스 두카스 '무르추플로스'는 수도의 폭동을 틈타 알렉시오스 4세를 감금하고 알렉시오스 5세로서 황제 자리에 올랐다. 이 시점에서 이사키오스 2세는 충격으로 사망했고, 알렉시오스 4세는 교살되었다. 동로마 제국의 제위는 알렉시오스 3세의 사위인 알렉시오스 무르풀루즈에게 넘어갔으나 결국 십자군에 의해 라틴 제국이 세워졌다.

3. 내치와 외교

이사키오스 2세는 1185년과 1186년에 정략 결혼을 통해 황제로서의 지위를 강화했다. 이사키오스의 누이 테오도라는 이탈리아 후작 몬페라토의 콘라드와 결혼했고, 1186년 1월에는 이사키오스 자신이 헝가리 국왕 벨러 3세의 딸 헝가리의 마르가레트(마리아로 개명)와 결혼했다.[2] 헝가리는 제국의 가장 크고 강력한 이웃 국가 중 하나였으며, 마르가레트는 키예프 루스, 신성 로마 제국 등 여러 왕족 가문과 연결되어 있었다. 1191년 이후, 그의 조카 에우도키아 안젤리나는 세르비아 대공 스테판 네마냐의 아들 스테판과 결혼했다.

이사키오스는 1185년 11월 7일 데메트리체스 전투에서 노르만[2] 시칠리아 왕국의 윌리엄 2세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며 통치를 시작했다. 그러나 다른 정책들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1185년 말, 아크레로 보낸 함대가 시칠리아의 노르만족에게 파괴되었고,[3] 키프로스를 되찾기 위한 시도 역시 실패했다.[4]

1185년 말에는 블라흐-불가리아 봉기[2]가 일어나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이 건국되었다. 1187년, 베네치아 공화국과 협정을 맺어 베네치아는 유리한 무역 양보를 받는 대가로 6개월 안에 40척에서 100척의 갤리선을 제공하기로 했다.[6]

1189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롯사가 제3차 십자군을 이끌고 제국을 통과하려 하자, 이사키오스는 그가 비잔티움을 정복하려 한다고 의심했다.[7] 결국 1190년에 이사키오스는 약속을 이행해야 했고, 십자군은 헬레스폰트갈리폴리로 가서 소아시아로 출발했다.

1191년, 이사키오스 2세는 세르비아에 대한 군사 원정을 시작하여 남부 모라바 전투(1191년 가을)에서 승리하고 니쉬를 회복한 뒤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이후 5년 동안 불가리아와 지속적인 전쟁이 벌어졌고, 이사키오스는 여러 차례 원정을 직접 이끌었다.[2] 1190년 트리야브나 전투에서 이사키오스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고, 1194년 아르카디오폴리스 전투에서 또 다른 주요 패배를 겪었다. 1195년, 황제의 형 알렉시우스 앙겔로스가 스스로 황제를 선포했고, 이사키오스는 눈이 멀게 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투옥되었다.[9][10]

3. 1. 내정

이사키오스 2세의 내정은 관직 매매와 뇌물 수수가 만연하는 등 부패로 얼룩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로 인해 제국의 행정 시스템과 군사 제도인 테마 제도가 유명무실해졌다.[2] 특히, 조선업 전체를 베네치아 공화국에 위탁하는 바람에 비잔티움 제국의 해군력이 크게 약화되었다.[2]

1189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롯사는 제3차 십자군에 참여하기 위해 비잔틴 제국 영토 통과를 요청했고, 이사키오스 2세는 이를 허락했다.[2]

1196년, 이사키오스 2세는 한때 강력했던 비잔틴 해군이 30척의 갤리선으로 감소하는 것을 방치했다.

3. 2. 외교

이사키오스 2세는 헝가리와의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1186년에 헝가리 왕 벨러 3세의 딸 마르가리타와 결혼했다. 헝가리는 동로마 제국의 강력한 이웃 국가였으며, 마르가리타는 키예프 루스, 신성 로마 제국 등 여러 왕가와 혈연 관계를 맺고 있었다.[2] 또한 이사키오스는 자신의 여동생 테오도라를 몬페라토의 코라도에게 시집보내 제위를 튼튼하게 했다. 1191년 이후에는 그의 조카 에우도키아 안젤리나가 세르비아 대공 스테판 네마냐의 아들인 스테판과 결혼했다.

이사키오스는 즉위 직후 굴리엘모 2세의 시칠리아군을 상대로 데메트리체스 전투에서 승리하여 격퇴하였다.[2] 그러나 1185년 말, 아크레로 보낸 함대가 시칠리아의 노르만족에게 파괴되었고,[3] 키프로스를 되찾기 위해 보낸 함대 역시 실패했다.[4] 이 함대는 성지에서 살라딘을 지원한 것으로 오해받기도 했다.[4][5]

1185년 말, 블라흐-불가리아 봉기[2]가 일어나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이 건국되었다. 1187년에는 베네치아 공화국과 협정을 맺어 베네치아가 유리한 무역 특권을 얻는 대가로 동로마 제국에 군함을 제공하기로 했다.[6]

1189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제3차 십자군을 이끌고 동로마 제국을 통과하려 하자 긴장 상태에 들어갔다. 이사키오스는 프리드리히 1세가 동로마 제국을 정복하려 한다고 의심하여[7] 십자군을 끊임없이 괴롭혔다.[8] 결국 이사키오스는 1190년 2월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조약을 체결하여 프리드리히 1세의 십자군을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소아시아로 가게 했다.[7]

1191년, 이사키오스 2세는 세르비아에 대한 군사 원정을 시작하여 남부 모라바 전투에서 승리하고 니쉬를 회복했다.

1195년, 알렉시오스 3세가 반란을 일으켜 이사키오스 2세는 폐위되고 눈이 뽑히는 형벌을 받았다.[9][10]

4. 반란과 찬탈 시도

굴리엘모 2세의 시칠리아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300km 떨어진 모시노폴리스까지 진격해오자, 이사키오스 2세는 즉위 즉시 알렉시우스 브라나스를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격퇴하였다. 1185년에는 불가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나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이 세워졌다.[2] 1187년에는 장군 알렉시우스 브라나스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사키오스 2세는 매제인 코라도를 시켜 진압했다.[2]

1195년 이사키오스 2세가 불가리아 원정을 준비하는 사이, 그의 형인 알렉시우스 앙겔루스가 반란을 일으켜 황제가 되었다. 이사키오스 2세는 붙잡혀 눈이 뽑히는 벌을 받고 폐위되어 감금되었다.[2]

이사키오스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여러 명의 찬탈자들이 일어나 왕위를 빼앗으려 시도했다. 그들은 다음과 같다.

이름설명
알렉시오스 브라나스1187년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사키오스 2세의 매제 몬페라토의 코라도에게 진압됨.
테오도르 망가파스1188년 소아시아 남서부 필라델피아에서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황제를 칭함. 1193년까지 진압됨.
가짜 알렉시오스 2세해당 이름의 인물 다수가 반란을 일으킴.
바실 쵸타스니코메디아 근처 타르시아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체포되어 눈이 멀고 감옥에 갇힘.
이삭 코메노스(안드로니코스 1세 콤네노스의 조카)감옥에서 탈출하여 성 소피아 대성당으로 도망쳐 군중을 선동했으나, 체포되어 고문 후 사망.
콘스탄티누스 타티키오스콘스탄티노폴리스에 500명의 비밀 조직을 결성했으나, 밀고로 체포되어 눈이 멀음.


5. 평가

이사키오스 2세는 비잔티움 제국의 쇠퇴를 가속화시킨 무능한 황제로 평가받는다.[2] 그의 치세 동안 제국은 키프로스, 불가리아, 킬리키아 등지를 상실하며 영토가 축소되었고,[2] 내부적으로는 관직 매매와 뇌물 수수로 인해 테마 제도가 유명무실해지는 등 부패가 만연했다.[2] 베네치아 공화국에 조선업 전체를 위탁하여 제국 해군력을 약화시킨 점,[2] 1186년 불가리아의 독립을 초래한 점[2] 등은 그의 주요 실책으로 꼽힌다. 그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며 측근들에게 국정을 맡기고, 지방에서 거둬들인 세금을 낭비하는 등 무능한 통치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였다.[2]

6. 가족 관계

이사키오스 2세는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 부인은 헤리나(또는 에리나)로, 성은 알려지지 않았다. Ειρήνη|에이레네grc는 '평화'를 뜻하는 그리스어이다. 이 결혼으로 세 자녀를 두었다.

이름생몰년도비고
에우프로시네 앙겔리나?수녀가 됨
이리니 앙겔리나약 1181년 – 1208년시칠리아 왕 루지에로 3세와 결혼했다가 슈바벤의 필립과 재혼. 이사키오스는 필리프와의 이레네의 자녀를 통해 현재 군림하는 모든 유럽 군주의 조상이다.
알렉시우스 4세 앙겔루스약 1182년 – 1204년1203년 공동 황제



두 번째 부인은 헝가리 왕 벨러 3세의 딸 마르가리타였다. 마르가리타와의 사이에서는 두 아들을 두었다.

이름생몰년도비고
요안니스 앙겔로스약 1193년 출생 – 1259년 사망헝가리로 건너가 벨러 4세의 가신이 됨. 시르미아바치 (1227–42)를 통치했다.
마누엘 앙겔로스1195년 이후 출생 – 1212년 사망1205년 비잔틴 제위 계승을 고려[12]



이사키오스 2세의 가계도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 - 콤네노스 왕조 초대 황제 (증조부)
콘스탄티노스 앙겔로스 (조부)
테오도라 콤네네 (조모) - 알렉시오스 1세의 딸
요안니스 앙겔로스 두카스 - 존엄공 (숙부)미하일 1세 콤네노스 두카스 - 에피루스 전제군주국 초대 왕 (숙부의 사생아)
안드로니코스 앙겔로스 (부)
에우프로시네 (모)
에이레네(헬리나) (황후)
알렉시오스 4세 앙겔로스 - 앙겔로스 왕조 3대 황제 (왕자)이리니 - 시칠리아 공동 통치자 루지에로 3세의 부인, 이후 신성 로마 황제필리프의 황후 (왕녀)에우프로시네 앙겔리나 - 수녀, 혹은 키예프 대공로만 므스티슬라비치의 부인 (왕녀)
마르가레테 마리아 - 헝가리 국왕러슬로 3세의 딸, 이후 몬페라토 후국보니파시오 1세의 부인 (황후)
마누엘 앙겔로스 (왕자)요안니스 앙겔로스 (왕자)


참조

[1] 문서 De la Conquête de Constantinople https://sourcebooks.[...]
[2] 간행물 Isaac II. (Angelus)
[3] 논문 The Byzantines and Saladin, 1185–1192: Opponents of the Third Crusade 1962
[4] 논문 The Byzantines and Saladin: Opponents of the Third Crusade? https://www.tandfonl[...] 2010
[5] 서적 Byzantium and the Crusades Bloomsbury 2014
[6] 서적 A History of Venice
[7] 서적 Byzantium and the Crusades Bloomsbury 2014
[8] 서적 A History of the Byzantine State and Society
[9] 문서 Die byzantinischen Kleinchroniken https://archive.org/[...] 1977
[10] 문서 Choniates 1984
[11] 서적 Holy Rulers and Blessed Princesses: Dynastic Cults in Medieval Central Europ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
[12] 서적 The Princes of Achaia and the Chronicles of Morea: A Study of Greece in the Middle Ages https://books.google[...]
[13] 기타 Walther von der Vogelweide. Werke.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 1972
[14] 서적 十字軍の研究 白水社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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