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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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테마 제도는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 동로마 제국이 이민족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도입한 군사 및 행정 구역 개편 시스템이다. 초기에는 군사적 목적이 강했으나, 점차 행정 기능이 통합되어 지방 통치의 기본 단위가 되었다. 테마는 군인에게 토지를 분배하고, 군사 및 민사 권한을 통합하여 효율적인 방어 체제를 구축하는 데 기여했다. 7세기부터 11세기까지 동로마 제국의 국방력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11세기 이후 중앙 집권화와 용병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쇠퇴했다. 테마 제도는 동로마 제국의 사회, 군사, 행정 체제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제국의 존속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테마 제도는 소속된 병사에게 농지를 주고 평시에는 자유 농민으로 농업에 종사하게 하여 그 수입으로 무기나 장비를 자급하게 하며, 유사시에는 병사로 소집하여 국토 방위에 임하는 병농일치 제도였다[70][71]。 병사는 스트라티오테스라고 불렸다. 외적의 침공에 노출된 지역에서 평시에는 상주하는 군대의 방대한 식량 수요를 병사가 농민으로서 자급함으로써 보충할 수 있었고[72][71], 유사시에는 병사들은 자신의 땅을 지키기 위해 싸우게 되어 사기는 높았고, 유효한 전력이 되었다[73][71]。 또한 육군뿐만 아니라 해군에도 테마가 형성되었다[74][75]。
2. 역사
원래 군대의 지휘관이었던 테마의 장관은 늦어도 8세기 후기 이후에는 민정 권한도 통합되어 군사·민정 쌍방의 권한을 장악하는 지방 장관이 되었다.
테마의 병력은 시대에 따라 변화가 있으며, 또한 테마의 규모나 인구에 따른 차이도 크지만, 10세기의 제국 동부 육군 테마에 관한 기록에 따르면 최대는 15,000명, 작은 것은 4,000명으로 되어 있다[76]。
7세기경에 나타나는 초기 테마는 야전 기동군의 군단 등을 전신으로 생각하고 있으며[77][78], 테마의 장관의 칭호는 "장군"을 의미하는 "스트라테고스"였다[78]。 다만, 황제 직속 군단을 전신으로 하는 테마 옵시키온의 장관은 그 전력의 명칭으로 "코메스"였고[78], 인접한 테마 옵티마톤의 장관은 "도메스티코스"였다[70]。 그 후 테마의 분할이나 영토 확대 등으로 새롭게 발족한 테마의 장관은 모두 "스트라테고스"를 칭했다[70][79]。 발칸 반도나 이탈리아 반도의 연안부 등에 산재하는 소규모 영토에는 "클레이주라", "알콘티아", "두카톤", "카토에바나테"라고 불리는 소규모 조직이 설치되었으며, 10세기에 테마로 승격되었다[80][81]。
테마의 증강 과정에서는 병력원이 되는 인구 증가책으로서 이민·입식 정책도 추진되어 소아시아·아르메니아 출신자의 트라키아 지방으로의 이식, 슬라브족 투항자의 소아시아 북서부로의 이식 등이 행해졌다[82]。
과거에는 테마 제도가 헤라클리우스 왕조 통치하에서 계획적으로 도입되었다는 견해가 많았지만, 현재는 각지를 방어하고 있던 군단이 임시로 취한 조치를 제국 정부가 추인한 것이 아니냐는 견해도 있다. 어쨌든 아직 국제 비잔틴 학회에서도 논쟁 중이며, 테마의 기원에 대해서는 전란의 시대에 기록이 적어 여러 설이 있는 것이 현상이다. 10세기의 사람들에게도 테마 제도의 기원은 수수께끼였던 듯하며, 황제 콘스탄티노스 7세는 『테마의 기원에 대하여』라는 책을 기록하여 해설을 시도하고 있다[83]。
2. 1. 기원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 동로마 제국은 사방에서 이민족의 잦은 침입에 시달렸다. 동쪽에서는 사산 제국이 시리아, 이집트, 아나톨리아를 공격했고, 북쪽에서는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이 발칸반도를 유린하고 정착했으며, 서쪽에서는 랑고바르드족이 별다른 저항 없이 북부 이탈리아를 점령했다.[98][1] 이러한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마우리키우스 황제(재위 582~602)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재위 527~565)가 정복한 서방 영토에 라벤나 총독부와 아프리카 총독부를 설치하고, 총독에게 군사권과 행정권을 통합하여 부여했다.[98][1] 이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재위 284~305) 이래로 유지되어 온 군정과 민정의 엄격한 분리 원칙을 깨뜨리는 조치였다. 그러나 이는 이미 불안정한 안보 상황 속에서 현지 군 사령관(magister militum)의 영향력이 민간 행정관(Praetorian prefect)보다 커진 현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에 가까웠다.[99]
이러한 군정과 민정 통합 경향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530년대에 시행한 일부 행정 개혁에서도 나타났다. 그는 약탈로 고통받던 소아시아의 일부 속주 행정관에게 군사권을 부여했으며, 이집트에서는 기존의 민정 교구(디오에케시스)를 폐지하고 군사령관(dux)이 통합된 권한을 행사하는 특별 군사-행정 구역인 '콰이스투라 엑세르키투스'(quaestura exercitus)를 창설하기도 했다.[100][101][3][4] 하지만 제국 대부분 지역에서는 옛 제도가 유지되다가, 640년대 이슬람 제국의 맹공으로 시리아와 이집트를 상실하면서 결정적인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제국은 인력과 영토의 막대한 손실 속에서 존망의 위기에 처했다.
이 전례 없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제국은 대대적인 개편을 단행했다. 소아시아에 남은 제국 영토는 네 개의 큰 테마(θέμα)로 재편되었고, 각 테마는 군사권과 행정권을 모두 장악한 스트라테고스(στρατηγός)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비록 초기 민정 행정의 일부 요소가 남아있기는 했지만, 모두 스트라테고스에게 종속되었다.[102][6] 스트라테고스는 황제가 직접 임명했으며, 각 테마 내 공동체에서 세금을 징수하고 신속하고 유연한 지방 군대를 관리하는 것이 주요 임무였다.[5]
테마 제도의 정확한 기원과 초기 성격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많은 논쟁이 있다. '테마'라는 명칭의 어원 자체도 불분명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콘스탄티누스 7세의 기록을 따라 그리스어 θέσις|테시스el("배치")에서 유래했다고 본다.[103][104][7][8] 테마 제도의 창설 시기 역시 불확실하다. 20세기 동안에는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와 같은 학자들이 헤라클리우스 황제(재위 610~641)가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 중인 622년경에 테마 제도를 창설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테오파네스 연대기에서 헤라클리우스가 "테마의 땅에" 도착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들었다.[105][106][9][10]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후대 학자들에 의해 반박되었으며, 최근 연구에서는 테마 제도의 창설 시기를 콘스탄스 2세(재위 641~668) 치세인 640년대에서 660년대 사이로 보는 경향이 우세하다.[107][11]
또한, 테마가 처음부터 스트라테고스가 군정과 민정을 총괄하는 명확한 경계의 행정 구역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다. 오스트로고르스키는 처음부터 지역 단위였다고 보았지만, 최근에는 '테마'라는 용어가 원래는 군대 자체만을 지칭하다가 7세기 말이나 8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군대가 주둔하는 지역까지 의미가 확장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힘을 얻고 있다.[108][109][12]
테마 제도 창설이 사회 및 군사 구조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도 논쟁이 있다. 오스트로고르스키는 테마 제도가 외국인 용병에 의존하던 기존 군대를 대체하여, 국가로부터 토지를 받아 자급자족하는 농민 병사(스트라티오테스)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군대의 창설을 의미한다고 보았다(사산 제국의 아스와란 조직과 비교됨).[103][110][7][13] 하지만 최근 학자들은 테마 제도의 형성이 과거와의 급격한 단절이라기보다는 기존 6세기부터 나타난 경향의 논리적 연장선상에 있으며, 그 직접적인 사회적 영향은 미미했다고 주장한다.[103][7] 테마 제도가 계획적으로 도입되었다기보다는, 각지를 방어하던 야전군 부대가 이슬람군의 침공에 맞서 소아시아 등지로 철수하여 주둔하면서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하고, 점차 농촌 지역에 분산되어 정착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는 견해도 제기된다.[90][91][92] 이 과정에서 군인들은 현지 사회에 동화되고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으며, 중앙 정부는 재정 부담을 덜 수 있었기에 이러한 상황을 용인하고 점차 제도화했다는 것이다.[92] 이때 아르메니아 방면에서 이동한 테마 아르메니아콘과 트라키아 방면에서 이동한 테마 트라케시온은 이전 주둔지의 명칭이 남아있어 소재지와 명칭이 달라졌다.[78][77] 또한, 옛 동방 군단(Oriens)에서 유래한 테마 아나톨리콘[77]은 '동방'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이름이 유래했다.[78]
테마 제도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전히 학계에서 논쟁이 진행 중이며, 10세기 콘스탄티누스 7세 황제 역시 『테마의 기원에 대하여』라는 저술을 통해 그 기원을 설명하려 시도했을 정도로 오래된 의문이다.[83] 어쨌든 테마 제도는 동로마 제국의 방위력을 크게 강화하여 축소된 영토로나마 제국이 존속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97]
2. 2. 초기 테마 (640년대 ~ 770년대)
동로마 제국 초기 지방 제도는 로마 제국 말기의 속주 제도를 따라, 민간 행정관과 군 사령관의 역할이 분리되어 있었다.[84] 그러나 헤라클리우스 시대에 이르러 유스티니아누스 1세 이후 계속된 전쟁으로 재정이 악화되었고, 사산 제국을 가까스로 물리쳤으나 새롭게 등장한 이슬람 제국과 발칸 반도의 불가르족 침입으로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마저 위협받는 상황에 처했다. 기존의 중앙 집권적 지방 제도로는 여러 방면의 침입에 동시에 대응하기 어려워졌고, 이에 따라 현지 군 사령관이 행정권까지 갖는 테마 제도(군관구제)가 도입되었다.[85][86]
테마 제도는 소속 병사에게 농지를 지급하여 평시에는 농사를 짓고, 유사시에는 병사로 복무하는 병농일치 제도였다.[70][71] 병사들은 '스트라티오테스'라고 불렸으며, 자신의 땅을 지키기 위해 싸웠으므로 사기가 높았다.[73][71] 이 제도는 병사들이 평시에 식량을 자급자족하게 하여 군대 유지 부담을 덜었고,[72][71] 육군뿐 아니라 해군에도 적용되었다.[74][75] 테마 제도가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6세기 말부터 8세기에 걸쳐 기존의 콜로누스 기반 대토지 소유제가 점차 해체되고, 슬라브족과 페르시아의 침공으로 타격을 입은 농촌이 중소 농민 중심의 촌락 공동체 사회로 변화한 점이 있다. 특히 제국의 곡창 지대였던 시리아와 이집트를 상실하면서 이러한 변화는 더욱 가속화되었다.[88][89]
테마 제도의 정확한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학설이 존재한다. 과거에는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계획적으로 도입했다는 견해가 우세했으나, 현재는 각 지역 군대가 임시로 취한 조치를 제국 정부가 사후에 승인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7세기 중반, 아마도 630년대 후반에서 640년대 사이에 제국의 야전군이 아나톨리아로 철수하여 특정 구역에 배치된 것이 테마의 시작으로 여겨진다.[14] 이 초기 테마들은 대체로 이전 속주의 경계를 따랐다.[111] 10세기 황제 콘스탄티노스 7세조차 『테마의 기원에 대하여』라는 책을 저술하여 그 기원을 설명하려 했을 정도로, 당시에도 기원은 불분명했던 것으로 보인다.[83]
초기에 설치된 주요 테마는 다음과 같다.
테마 이름 | 첫 언급 | 계승 군대 | 관할 지역 | 수도 | 비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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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아르메니아콘 ({{lang|grc|Θέμα Άρμενιάκων|} | }) || 667년[112][15] || 아르메니아 군대 || 폰토스, 소아르메니아, 북부 카파도키아[112][15] || 아마시아[112][15] || 이슬람 지배하 아르메니아와 인접[115][18]
테마 (그리스어 명칭) | 시기 | 수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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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안드로스 | 1204년 이후 | 니케아 제국 시대에 존재했던 작은 테마로, 나중에는 남부 트라케시안 테마의 일부가 되었다.[67] | |
밀라사 및 멜라누디온 | 1143년 | 키비르레오트 테마와 트라케시안 테마의 일부를 합쳐 만든 작은 테마로, 메안데르 계곡 남쪽의 소아시아 영토를 포함했다. 니케아 제국 시대에도 유지되었다.[68] | |
네오카스트라 | 1162년 ~ 1173년 사이 | 마누엘 1세 콤네노스가 소아시아 국경을 재정비하면서 북부 트라케시안 테마에서 분리하여 만들었다. 니케아 제국 시대에도 유지되었다.[69] |
"테마"라는 용어는 군사적 토지 보유 형태와 행정 구역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어 모호한 측면이 있다.[46] 기본적으로 테마 제도는 병사(스트라티오테스)에게 농지를 제공하여 평시에는 농업에 종사하게 하고, 그 수입으로 무기나 장비를 스스로 마련하게 하는 병농일치 제도였다.[70][71] 유사시에는 이들이 병사로 소집되어 국토 방위에 나섰다. 이들은 기술적으로 군사 부대에 속했으며 스트라테고스의 지휘를 받았다. 병사들이 경작하는 토지는 국가 소유였으며, 토지 사용의 대가로 급여가 일부 삭감되었다.[46] 이 제도는 병사들의 후손 역시 군 복무를 하도록 하여, 징병제의 필요성을 줄이고 군대를 저렴하게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46] 또한, 정복 과정에서 확보된 공공 토지(''프로아스테이온'')에 병사들을 정착시켜 영토 관리에도 활용되었다.[46] 육군뿐 아니라 해군에도 테마가 편성되었다.[74][75]
이 목록은 대략 660년 테마 제도의 시작부터 930년경의 대정복과 새롭고 더 작은 테마의 창설까지의 기간에 걸쳐 확립된 대규모의 "전통적인" 테마를 포함한다.[47]
[1]
간행물
3. 테마의 구조와 조직
테마의 사령관인 스트라테고스는 군사 지휘권뿐만 아니라 해당 지역의 민사 행정권까지 통합하여 행사했다. 이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기 확립된 민정 총독과 군 사령관의 권한 분리 원칙을 폐지하고, 공화정이나 원수정 시대와 유사하게 지방 총독이 군대 지휘까지 겸하는 방식으로 돌아간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구조는 헬레니즘 시대 셀레우코스 제국의 에파르키(eparchy)나 스트라테기아(strategia) 제도와 유사성을 보인다.[46] 초기 테마의 장관 명칭은 대부분 '장군'을 의미하는 스트라테고스였으나[78], 황제 직속 군단을 전신으로 하는 테마 옵시키온의 장관은 코메스[78], 테마 옵티마톤의 장관은 도메스티코스[70]로 불리기도 했다. 이후 신설되거나 분할된 테마의 장관은 대부분 스트라테고스를 칭했다.[70][79] 8세기 후반 이후 민정 권한이 군사령관에게 완전히 통합된 것으로 보인다.[92]
다음 표는 대략 902년에서 936년 사이 트라케시안 테마의 구조를 보여준다.[46]이름 병력 수 하위 부대 수 지휘 장교 테마 9,600 4 투르마이 스트라테고스 투르마 2,400 6 드룽고이 투르마르케스 드루고스 400 2 반다 드루가리오스 반돈 200 2 켄타르키아이 코메스 켄타르키아 100 10 콘토베르니아 켄타르케스/헤카톤타르케스 (펜테콘타르키아) 50 5 콘토베르니아 펜테콘타르케스 콘투베르니온 10 1 "전위대" + 1 "후위대" 데카르코스 "전위대" 5 해당 없음 펜타르케스 "후위대" 4 해당 없음 테트라르케스
테마의 병력 규모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컸다. 10세기의 제국 동부 육군 테마에 관한 기록에 따르면 최대는 15,000명, 작은 것은 4,000명으로 되어 있다.[76] 때로는 발칸 반도나 이탈리아 반도 연안부 등지에 "클레이수라", "알콘티아", "두카톤", "카토에바나테"와 같은 소규모 군사 행정 단위가 설치되었다가 10세기에 테마로 승격되기도 했다.[80][81] 제국 정부는 테마의 병력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소아시아나 아르메니아 출신자를 트라키아 지방으로, 슬라브족 투항자를 소아시아 북서부로 이주시키는 등 인구 이동 정책을 시행하기도 했다.[82]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테마는 잠재적으로 황제에게 위협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중앙 정부는 제국 전체에 대한 징세권과 세수를 군사비 등으로 재분배하는 기능을 확고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93][94], 테마가 반란을 일으키더라도 지방에 할거하여 독립하기보다는 중앙 정권 탈취를 목표로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는 양상을 보였다.[93]
4. 테마 목록
명칭 (그리스어 명칭) 설립 시기 설립 배경 / 최초 영토 이후 분할 수도 주요 도시 에게해†
(thema Aigaiou Pelàgous|테마 아이가이우 펠라구스grc)842/843년경 독립적인 드롱가리아테에서 설립 / 레스보스, 렘노스, 키오스, 임브로스, 테네도스, 헬레스폰트, 스포라데스, 키클라데스 아마도 미틸리니 또는 메팀나 메팀나, 미틸리니, 키오스, 알렉산드리아 트로아스, 아비도스, 람사코스, 키지쿠스, 세스토스, 칼리폴리스 아나톨리콘
(thema Anatolikōn|테마 아나톨리콘grc)
아나톨리아 최초 7개 테마669/670년경 동방 야전군/시리아 출신 / 프리기아, 피시디아, 이사우리아 테마 카파도키아§ (830) 아모리움 이코니움, 폴리보토스, 필로멜리온, 아크로이논, 시난다, 소조폴리스, 테바사, 안티오키아, 데르베, 라란다, 이사우라, 페시누스 아르메니아콘
(thema Armeniakōn|테마 아르메니아콘grc, Armeniakoi)
아나톨리아 최초 7개 테마667/668년경 아르메니아 야전군 출신 / 폰토스, 소아르메니아, 북부 카파도키아 테마 칼디아 (842년경), 테마 카르시아논§ (863), 테마 콜로네이아 (863), 테마 파플라고니아 (826년경) 아마시아 시노프, 아미수스, 에우카이타, 코마나 폰티카 부켈라리온
(thema Boukellarion|테마 부켈라리온grc, Boukellàrioi)
아나톨리아 최초 7개 테마743-767년경 (또는 767/768년경) 테마 옵시키온 출신 / 갈라티아, 파플라고니아 테마 파플라고니아 (일부), 테마 카파도키아 (일부), 테마 카르시아논 (일부), 테마 차시아논 안키라 티오스, 헤라클레아 폰티카, 클라우디오폴리스, 크라테아, 율리오폴리스, 라가니아, 고르디온 카파도키아§
(thema Kappadokias|테마 카파도키아스grc)830년경 아르메니아콘, 부켈라리온의 일부 / 남서부 카파도키아 코론 요새, 후일 티아나 포단두스, 니사, 룰론 요새, 티아나, 나지안주스, 헤라클레아 키비스트라 케팔로니아†
(thema Kephallēnias|테마 케팔레니아스grc)809년경 이오니아 제도, 풀리아 테마 랑고바르디아 (910년경), 테마 니코폴리스 (899년경) 케팔레니아 코르푸, 자킨토스, 레프카다 칼디아
(thema Chaldias|테마 칼디아스grc)840년경 아르메니아콘 (원래는 투르마) / 폰토스 해안 칼디아 공국 트레비존드 리주스, 케라소스, 폴레모니온, 파이페르타 카르시아논§
(thema Charsianoù|테마 카르시아누grc)863–873년 아르메니아콘 (원래는 투르마), 부켈라리안의 일부 / 북서부 카파도키아 카이사레아 카르시아논 케르손/클리마타
(thema Chersōnos|테마 케르소노스grc/Klimata|클리마타grc)833년경 8세기에 하자르에 의해 통치, 테오필로스 황제에 의해 비잔티움 통치 복원 / 남부 크림반도 케르손 소우그데아, 페오도시야, 보스포로스, 갈리타 키비레오테스†
(thema Kibyrrhaiotōn|테마 키비라이오톤grc, Kibyrrhaiotai)
아나톨리아 최초 7개 테마697/698년경 또는 720년경 카라비시아노이 함대에서 창설 / 팜필리아, 리키아, 도데카니사 제도, 에게 해 섬, 이오니아 해안 테마 에게해, 테마 사모스, 테마 셀레우키아 사모스, 후일 아탈레이아 로도스, 미라, 키비르라, 리미라, 파셀리스, 시데, 셀리누스, 아네무륨, 사갈라소스, 텔메소스, 파타라, 할리카르나소스, 이아소스, 밀라사, 셀게, 크니도스, 코스 크레타†
(thema Krētēs|테마 크레테스grc)767년경 (?), 961년에 재설립 크레타 토후국 (828년경 ~ 비잔티움 재정복 961년) / 크레타 찬다크스 레팀노, 고르티스 달마티아
(thema Dalmatias|테마 달마티아스grc)899년경 새로운 영토 / 달마티아 해안 이다사/이에데라 라고우사, 아스팔라토스, 풀라, 트라기리온, 스카르도나 두라키움
(thema Dyrrhachiou|테마 디라키우grc)842년경 새로운 영토 / 일리리아, 알바니아 해안 두라키움 아울론, 아폴로니아, 리스소스 헬라스
(thema Hellàdos|테마 헬라도스grc, Helladikoi)687년/695년 (또는 690년경) 카라비시아노이 / 처음에는 동부 펠로폰네소스와 아티카, 809년 이후 동부 중앙 그리스, 테살리아 테마 케팔로니아 (809년경), 테마 펠로폰네소스 (811년경) 코린토스, 후일 테베 (809년 이후) (809년 이후) 아테네, 라리사, 파르살라, 라미아, 테르모필레, 플라타이아이, 에우리푸스, 데메트리아스, 스타고이 콜로네이아§
(thema Kolōneias|테마 콜로네이아스grc)863년경, 아마도 842년경 아르메니아콘, 9세기 초 클레이수라 / 북부 소아르메니아 칼디아 공국 콜로네이아 사탈라, 니코폴리스, 네오카이사리아 랑고바르디아
(thema Longobardias|테마 롱고바르디아스grc)892년경 케팔로니아 (원래는 투르마) / 풀리아, 루카니아 바리 타란토, 브린데시온, 히드루스, 칼리폴리스 리칸도스
(thema Lykàndou|테마 리칸두grc)916년경 새로운 영토 / 남동부 카파도키아 리칸도스 요새 아라비소스, 코쿠소스, 코마나 마케도니아
(thema Makedonias|테마 마케도니아스grc)802년경 테마 트라키아 / 서부 트라키아 테마 스트리몬 아드리아노폴리스 디디모티코, 모시노폴리스, 아이노스, 마로니아 메소포타미아
(thema Mesopotamias|테마 메소포타미아스grc)899-911년경 새로운 영토 / 상부 유프라테스 메소포타미아 공국 카마차 니코폴리스
(thema Nikopoleōs|테마 니코폴레오스grc)899년경 아마도 펠로폰네소스의 투르마에서 창설 / 에피루스, 아이톨리아, 아카르나니아 나프팍토스 이오안니나, 부스로툼, 로고이, 드리노폴리스, 니코폴리스, 히마라 옵시키온
(Thema Opsikiou|테마 옵시키우grc)
아나톨리아 최초 7개 테마680년경 황실 친위 군대 / 미시아, 북부 프리기아, 서부 비티니아 테마 부켈라리온 (768년경), 테마 옵티마테스 (775년경) 니케아 프루사, 키오스, 말라기나, 도리라에온, 나콜레이아, 크라소스, 코티아이온, 미다에움 옵티마테스
(thema Optimàtōn|테마 옵티마톤grc, Optimatoi)
아나톨리아 최초 7개 테마775년경 옵시키온 / 콘스탄티노폴리스 맞은편의 비티니아 니코메디아 칼케돈, 크리소폴리스 파플라고니아
(thema Paphlagonias|테마 파플라고니아스grc)826년경, 아마도 820년경 아르메니아콘, 부켈라리온 (일부) / 파플라고니아 강그라 아마스트리스, 이오노폴리스, 카스타모누, 폼페이오폴리스 펠로폰네소스
(thema Peloponnēsou|테마 펠로폰네수grc)800년 (또는 811년경) 헬라스의 일부, 일부는 새로운 영토 / 펠로폰네소스 테마 니코폴리스 (899년경) 코린토스 파트레, 아르고스, 라케다이몬, 코린토스, 헬로스, 메토네, 엘리스, 모넴바시아 파시안 (데르제네)
(thema Phasianēs/Derzēnēs|테마 파시아네스/데르제네스grc)935년경 새로운 영토 및 메소포타미아 테마 / 아라스강의 발원지 메소포타미아 공국 아르사모사타 사모스†
(thema Samou|테마 사무grc)899년경 키비레오테스, 걸프 독립 드롱가리아테에서 창설 / 남동부 에게 해 섬, 이오니아 해안 (트라케시온과 공유) 스미르나 사모스, 에페소스, 밀레토스, 마그네시아, 트랄레스, 레베도스, 테오스, 클라조메나이, 포카이아, 페르가몬, 아드라미티온 세바스테이아§
(thema Sebasteias|테마 세바스테이아스grc)911년경 아르메니아콘, c. 900년경 클레이수라 / 북동부 카파도키아와 소아르메니아 세바스테이아 다지몬 셀레우키아§
(thema Seleukeias|테마 셀레우케이아스grc)934년경 키비레오테스, 9세기 초부터 클레이수라 / 서부 킬리키아 셀레우키아 클라우디오폴리스 시칠리아
(thema Sikelias|테마 시켈리아스grc)700년경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 칼라브리아 (무슬림의 시칠리아 정복 후) 시라쿠사 카타네, 타브로메니온, 파노르모스, 아크라가스, 레온티니, 히메라, 마차라, 릴리바이움, 드레파눔 스트리몬§
(thema Strymōnos|테마 스트리모노스grc)899년경, 아마도 840년대 마케도니아, 클레이수라에서 창설 (709) / 대략 현대 그리스의 동부 마케도니아 네아폴리스 세레스 테살로니카
(thema Thessalonikēs|테마 테살로니케스grc)824년경 대략 현대 그리스의 중앙 마케도니아 테살로니키 베로이아, 에데사, 디온, 이에리소스, 모글레나, 카스토리아, 세르비아 트라키아
(thema Thrakēs|테마 트라케스grc/Thrakōon|트라코온grc)680년경 ?옵시키온 / 동트라키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제외 테마 마케도니아 아르카디오폴리스 셀림브리아, 비제, 페린투스, 라이데스투스 트라케시온
(thema Thrakēsiōn|테마 트라케시온grc, Thrakēsioi)
아나톨리아 최초 7개 테마687년경 트라키아 야전군 출신 / 리디아, 이오니아 코나에 히에라폴리스, 사르디스, 티아티라, 라오디케이아
'''참고:'''
† 해군 테마 (thema nautikon|테마 나우티콘grc)
§ 원래 ''클레이수라''로 설립됨
다음은 비잔티움 제국이 정복한 동부(소위 "아르메니아" 테마 또는 총독령, strategiaigrc), 이탈리아, 발칸 반도에 새롭게 설치된 주요 또는 부 테마였다.
{| class="wikitable"
|-
! 테마 (그리스어 이름)
! 설립 시기
! 수도
! 비고
|-
| '''아르체'''
(Ἄρτζε|아르체grc)
| 970년대
| 아르체
| 에스콜리알 탁티콘에서 언급된 부 테마. 979년 다비트 3세에게 양도되었고, 다비트 사후인 1000년에 회복되어 이베리아의 카테파나테에 종속되었다. 1049년 투르크족에 의해 파괴되었다.[48][49]
|-
| '''아스모사톤'''
(Ἀσμόσατον|아스모사톤grc)
| c. 938
| 아스모사톤
| 부 테마, 1050년대에 투르크족에게 정복될 때까지 존속되었다.[48][50]
|-
| '''볼레론/네오스 스트리몬'''
(thema Voleroù/Nèou Strymōnos|테마 볼레루/네우 스트리모노스grc)
| 970년대
| 세레스
|
|-
| '''불가리아'''
(thema Boulgarias|테마 불가리아스grc)
| 1018
| 스쿠피
| 1018년 불가리아의 사무일에 대한 승리와 불가리아 제1제국의 멸망 이후 바실리우스 2세 황제에 의해 설립되었다. 스코페와 오흐리드(현재 북마케도니아와 세르비아 남부)의 광범위한 지역을 기반으로 했다.
|-
| '''칼라브리아'''
(thema Kalavrias|테마 칼라브리아스grc)
| c. 950
| 레기온
| 무슬림의 시칠리아 정복 이후, 902년부터 시칠리아 테마는 칼라브리아로 제한되었지만, 10세기 중반까지 원래 이름을 유지했다.
|-
| '''차피지키온'''
(Χαρπεζίκιον|카르페지키온grc)
| 949
| 차피지키온
| 부 테마.[51] 준 테마.
|-
| '''차우지진'''
(Χαυζίζιον|카우지지온grc)
| 940년 이후
| 차우지진
| 빙골 다그 산맥 지역을 관할하는 부 테마.[52]
|-
| '''초자논'''
(Χόζανον|코자논grc)
| 956년 이전, 아마 948/952
| 초자논
| "아르메니아 테마".[50][53]
|-
| '''키프로스'''
(thema Kyprou|테마 키프루grc)
| 965
| 레우코시아
| 688년부터 965년 비잔티움의 최종 재정복까지 비잔티움-아랍 공동 지배 체제였다.
|-
| '''데르제네'''
(Δερζηνῆ|데르제네grc)
| 948/952
| 초자논
| 부 테마, 데르제네의 행정은 종종 칼디아 테마의 관료들에게 위임되었다.[50][54]
|-
| '''에데사'''
(thema Edēssēs|테마 에데세스grc)
| 1032
| 에데사
| 1032년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나중에 투르크족에게 정복될 때까지(1086년) ''스트라테고스''의 자리였다가 ''둑스''가 되었다.[55]
|-
| '''유프라테스 도시'''
(Παρευφρατίδαι Πόλεις|파레우프라티다이 폴레이스grc)
| c. 1032
|
| 부 테마.[56] 준 테마이다.
|-
| '''헥사코미아''' 또는 '''헥사폴리스'''
({{llang|grc|Ἑξακωμία/Ἑξάπολις|헥사코미아/헥사폴리스
5. 평가
테마 제도는 소속 병사에게 농지를 지급하고, 평시에는 자유농민으로서 농업에 종사하게 하여 그 수입으로 무기와 장비를 스스로 마련하게 하는 병농일치제의 형태를 띠었다[70][71]。 이 병사들은 스트라티오테스라고 불렸다. 이 제도는 특히 외적의 침입이 잦은 지역에서 효과적이었는데, 평시에는 주둔 군대의 막대한 식량 수요를 병사들이 농민으로서 자급자족하여 해결할 수 있었고[72][71], 유사시에는 병사들이 자신의 땅을 지키기 위해 싸우므로 사기가 높아 강력한 전력이 될 수 있었다[73][71]。 이러한 테마는 육군뿐 아니라 해군에도 조직되었다[74][75]。
테마의 장관은 본래 군 지휘관이었으나, 여러 설이 있지만 늦어도 8세기 후반부터는 민정 권한까지 통합하여 군사와 민정 양쪽의 권한을 가진 지방 장관이 되었다. 테마의 병력 규모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컸는데, 10세기 동부 육군 테마의 기록에 따르면 큰 곳은 15,000명, 작은 곳은 4,000명 정도였다[76]。
초기 테마는 7세기경 등장했으며, 야전 기동군 군단 등을 그 기원으로 본다[77][78]。 테마 장관의 칭호는 일반적으로 '장군'을 뜻하는 '스트라테고스'였으나[78], 황제 직속 군단을 전신으로 하는 테마 옵시키온의 장관은 '코메스'[78], 테마 옵티마톤의 장관은 '도메스티코스'라 불렸다[70]。 이후 테마가 분할되거나 영토 확장으로 새로 생긴 테마의 장관은 모두 '스트라테고스'를 칭했다[70][79]。 테마 강화를 위해 병력 자원이 되는 인구를 늘리려는 이민 및 식민 정책도 추진되어, 소아시아나 아르메니아 출신자를 트라키아 지방으로 이주시키거나, 항복한 슬라브족을 소아시아 북서부로 이주시킨 사례가 있다[82]。
테마 제도의 기원에 대해서는 과거 헤라클리우스 왕조 시기에 계획적으로 도입되었다는 견해가 우세했으나, 최근에는 각 지역을 방어하던 군단이 임시로 취한 조치를 제국 정부가 사후에 승인한 형태로 발전했다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전란기의 기록 부족으로 인해 테마 제도의 정확한 기원은 여전히 학계에서 논쟁 중이며 여러 설이 공존한다. 10세기 황제 콘스탄티노스 7세조차 『테마의 기원에 대하여』라는 저술을 통해 그 기원을 설명하려 시도했을 정도로, 당시 사람들에게도 테마 제도의 시작은 명확하지 않은 문제였다[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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