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제도는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 동로마 제국이 이민족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도입한 군사 및 행정 구역 개편 시스템이다. 초기에는 군사적 목적이 강했으나, 점차 행정 기능이 통합되어 지방 통치의 기본 단위가 되었다. 테마는 군인에게 토지를 분배하고, 군사 및 민사 권한을 통합하여 효율적인 방어 체제를 구축하는 데 기여했다. 7세기부터 11세기까지 동로마 제국의 국방력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11세기 이후 중앙 집권화와 용병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쇠퇴했다. 테마 제도는 동로마 제국의 사회, 군사, 행정 체제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제국의 존속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2. 역사
테마 제도는 소속된 병사에게 농지를 주고 평시에는 자유 농민으로 농업에 종사하게 하여 그 수입으로 무기나 장비를 자급하게 하며, 유사시에는 병사로 소집하여 국토 방위에 임하는 병농일치 제도였다[70][71]。 병사는 스트라티오테스라고 불렸다. 외적의 침공에 노출된 지역에서 평시에는 상주하는 군대의 방대한 식량 수요를 병사가 농민으로서 자급함으로써 보충할 수 있었고[72][71], 유사시에는 병사들은 자신의 땅을 지키기 위해 싸우게 되어 사기는 높았고, 유효한 전력이 되었다[73][71]。 또한 육군뿐만 아니라 해군에도 테마가 형성되었다[74][75]。
원래 군대의 지휘관이었던 테마의 장관은 늦어도 8세기 후기 이후에는 민정 권한도 통합되어 군사·민정 쌍방의 권한을 장악하는 지방 장관이 되었다.
테마의 병력은 시대에 따라 변화가 있으며, 또한 테마의 규모나 인구에 따른 차이도 크지만, 10세기의 제국 동부 육군 테마에 관한 기록에 따르면 최대는 15,000명, 작은 것은 4,000명으로 되어 있다[76]。
7세기경에 나타나는 초기 테마는 야전 기동군의 군단 등을 전신으로 생각하고 있으며[77][78], 테마의 장관의 칭호는 "장군"을 의미하는 "스트라테고스"였다[78]。 다만, 황제 직속 군단을 전신으로 하는 테마 옵시키온의 장관은 그 전력의 명칭으로 "코메스"였고[78], 인접한 테마 옵티마톤의 장관은 "도메스티코스"였다[70]。 그 후 테마의 분할이나 영토 확대 등으로 새롭게 발족한 테마의 장관은 모두 "스트라테고스"를 칭했다[70][79]。 발칸 반도나 이탈리아 반도의 연안부 등에 산재하는 소규모 영토에는 "클레이주라", "알콘티아", "두카톤", "카토에바나테"라고 불리는 소규모 조직이 설치되었으며, 10세기에 테마로 승격되었다[80][81]。
테마의 증강 과정에서는 병력원이 되는 인구 증가책으로서 이민·입식 정책도 추진되어 소아시아·아르메니아 출신자의 트라키아 지방으로의 이식, 슬라브족 투항자의 소아시아 북서부로의 이식 등이 행해졌다[82]。
과거에는 테마 제도가 헤라클리우스 왕조 통치하에서 계획적으로 도입되었다는 견해가 많았지만, 현재는 각지를 방어하고 있던 군단이 임시로 취한 조치를 제국 정부가 추인한 것이 아니냐는 견해도 있다. 어쨌든 아직 국제 비잔틴 학회에서도 논쟁 중이며, 테마의 기원에 대해서는 전란의 시대에 기록이 적어 여러 설이 있는 것이 현상이다. 10세기의 사람들에게도 테마 제도의 기원은 수수께끼였던 듯하며, 황제 콘스탄티노스 7세는 『테마의 기원에 대하여』라는 책을 기록하여 해설을 시도하고 있다[83]。
2. 1. 기원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 동로마 제국은 사방에서 이민족의 잦은 침입에 시달렸다. 동쪽에서는 사산 제국이 시리아, 이집트, 아나톨리아를 공격했고, 북쪽에서는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이 발칸반도를 유린하고 정착했으며, 서쪽에서는 랑고바르드족이 별다른 저항 없이 북부 이탈리아를 점령했다.[98][1] 이러한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마우리키우스 황제(재위 582~602)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재위 527~565)가 정복한 서방 영토에 라벤나 총독부와 아프리카 총독부를 설치하고, 총독에게 군사권과 행정권을 통합하여 부여했다.[98][1] 이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재위 284~305) 이래로 유지되어 온 군정과 민정의 엄격한 분리 원칙을 깨뜨리는 조치였다. 그러나 이는 이미 불안정한 안보 상황 속에서 현지 군 사령관(magister militum)의 영향력이 민간 행정관(Praetorian prefect)보다 커진 현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에 가까웠다.[99]
이러한 군정과 민정 통합 경향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530년대에 시행한 일부 행정 개혁에서도 나타났다. 그는 약탈로 고통받던 소아시아의 일부 속주 행정관에게 군사권을 부여했으며, 이집트에서는 기존의 민정 교구(디오에케시스)를 폐지하고 군사령관(dux)이 통합된 권한을 행사하는 특별 군사-행정 구역인 '콰이스투라 엑세르키투스'(quaestura exercitus)를 창설하기도 했다.[100][101][3][4] 하지만 제국 대부분 지역에서는 옛 제도가 유지되다가, 640년대 이슬람 제국의 맹공으로 시리아와 이집트를 상실하면서 결정적인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제국은 인력과 영토의 막대한 손실 속에서 존망의 위기에 처했다.
이 전례 없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제국은 대대적인 개편을 단행했다. 소아시아에 남은 제국 영토는 네 개의 큰 테마(θέμα)로 재편되었고, 각 테마는 군사권과 행정권을 모두 장악한 스트라테고스(στρατηγός)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비록 초기 민정 행정의 일부 요소가 남아있기는 했지만, 모두 스트라테고스에게 종속되었다.[102][6] 스트라테고스는 황제가 직접 임명했으며, 각 테마 내 공동체에서 세금을 징수하고 신속하고 유연한 지방 군대를 관리하는 것이 주요 임무였다.[5]
스킬리체스 연대기에 묘사된 아랍군의 아모리움 포위 공격(838년). 성벽 위에서 테마 아나톨리콘의 병사들이 방어하고 있다.
테마 제도의 정확한 기원과 초기 성격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많은 논쟁이 있다. '테마'라는 명칭의 어원 자체도 불분명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콘스탄티누스 7세의 기록을 따라 그리스어 θέσις|테시스el("배치")에서 유래했다고 본다.[103][104][7][8] 테마 제도의 창설 시기 역시 불확실하다. 20세기 동안에는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와 같은 학자들이 헤라클리우스 황제(재위 610~641)가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 중인 622년경에 테마 제도를 창설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테오파네스 연대기에서 헤라클리우스가 "테마의 땅에" 도착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들었다.[105][106][9][10]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후대 학자들에 의해 반박되었으며, 최근 연구에서는 테마 제도의 창설 시기를 콘스탄스 2세(재위 641~668) 치세인 640년대에서 660년대 사이로 보는 경향이 우세하다.[107][11]
또한, 테마가 처음부터 스트라테고스가 군정과 민정을 총괄하는 명확한 경계의 행정 구역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다. 오스트로고르스키는 처음부터 지역 단위였다고 보았지만, 최근에는 '테마'라는 용어가 원래는 군대 자체만을 지칭하다가 7세기 말이나 8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군대가 주둔하는 지역까지 의미가 확장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힘을 얻고 있다.[108][109][12]
테마 제도 창설이 사회 및 군사 구조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도 논쟁이 있다. 오스트로고르스키는 테마 제도가 외국인 용병에 의존하던 기존 군대를 대체하여, 국가로부터 토지를 받아 자급자족하는 농민 병사(스트라티오테스)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군대의 창설을 의미한다고 보았다(사산 제국의 아스와란 조직과 비교됨).[103][110][7][13] 하지만 최근 학자들은 테마 제도의 형성이 과거와의 급격한 단절이라기보다는 기존 6세기부터 나타난 경향의 논리적 연장선상에 있으며, 그 직접적인 사회적 영향은 미미했다고 주장한다.[103][7] 테마 제도가 계획적으로 도입되었다기보다는, 각지를 방어하던 야전군 부대가 이슬람군의 침공에 맞서 소아시아 등지로 철수하여 주둔하면서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하고, 점차 농촌 지역에 분산되어 정착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는 견해도 제기된다.[90][91][92] 이 과정에서 군인들은 현지 사회에 동화되고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으며, 중앙 정부는 재정 부담을 덜 수 있었기에 이러한 상황을 용인하고 점차 제도화했다는 것이다.[92] 이때 아르메니아 방면에서 이동한 테마 아르메니아콘과 트라키아 방면에서 이동한 테마 트라케시온은 이전 주둔지의 명칭이 남아있어 소재지와 명칭이 달라졌다.[78][77] 또한, 옛 동방 군단(Oriens)에서 유래한 테마 아나톨리콘[77]은 '동방'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이름이 유래했다.[78]
테마 제도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전히 학계에서 논쟁이 진행 중이며, 10세기 콘스탄티누스 7세 황제 역시 『테마의 기원에 대하여』라는 저술을 통해 그 기원을 설명하려 시도했을 정도로 오래된 의문이다.[83] 어쨌든 테마 제도는 동로마 제국의 방위력을 크게 강화하여 축소된 영토로나마 제국이 존속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97]
동로마 제국 초기 지방 제도는 로마 제국 말기의 속주 제도를 따라, 민간 행정관과 군 사령관의 역할이 분리되어 있었다.[84] 그러나 헤라클리우스 시대에 이르러 유스티니아누스 1세 이후 계속된 전쟁으로 재정이 악화되었고, 사산 제국을 가까스로 물리쳤으나 새롭게 등장한 이슬람 제국과 발칸 반도의 불가르족 침입으로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마저 위협받는 상황에 처했다. 기존의 중앙 집권적 지방 제도로는 여러 방면의 침입에 동시에 대응하기 어려워졌고, 이에 따라 현지 군 사령관이 행정권까지 갖는 테마 제도(군관구제)가 도입되었다.[85][86]
테마 제도는 소속 병사에게 농지를 지급하여 평시에는 농사를 짓고, 유사시에는 병사로 복무하는 병농일치 제도였다.[70][71] 병사들은 '스트라티오테스'라고 불렸으며, 자신의 땅을 지키기 위해 싸웠으므로 사기가 높았다.[73][71] 이 제도는 병사들이 평시에 식량을 자급자족하게 하여 군대 유지 부담을 덜었고,[72][71] 육군뿐 아니라 해군에도 적용되었다.[74][75] 테마 제도가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6세기 말부터 8세기에 걸쳐 기존의 콜로누스 기반 대토지 소유제가 점차 해체되고, 슬라브족과 페르시아의 침공으로 타격을 입은 농촌이 중소 농민 중심의 촌락 공동체 사회로 변화한 점이 있다. 특히 제국의 곡창 지대였던 시리아와 이집트를 상실하면서 이러한 변화는 더욱 가속화되었다.[88][89]
테마 제도의 정확한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학설이 존재한다. 과거에는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계획적으로 도입했다는 견해가 우세했으나, 현재는 각 지역 군대가 임시로 취한 조치를 제국 정부가 사후에 승인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7세기 중반, 아마도 630년대 후반에서 640년대 사이에 제국의 야전군이 아나톨리아로 철수하여 특정 구역에 배치된 것이 테마의 시작으로 여겨진다.[14] 이 초기 테마들은 대체로 이전 속주의 경계를 따랐다.[111] 10세기 황제 콘스탄티노스 7세조차 『테마의 기원에 대하여』라는 책을 저술하여 그 기원을 설명하려 했을 정도로, 당시에도 기원은 불분명했던 것으로 보인다.[83]
| 테마 옵시키온 (Θέμα Ὀψικίου|grc) || 680년[117][20] || 제국 경호대 (Obsequium|la) || 소아시아 북서부 (비티니아, 파플라고니아, 일부 갈라티아)[117][20] || 니케아[117][20] || 지휘관 칭호가 "코메스"(κόμης|grc, 백작)[117][20]
|}
해군력의 경우, "카라비시아노이"(Kαραβισιάνοι|grc, "선박의 사람들")라는 대규모 해군 부대가 680년경 처음 언급된다. 이들은 일리리쿰 군대나 옛 ''퀘스투라 에르키투스''의 잔여 병력으로 구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소아시아 남부 해안과 에게해 군도를 관할했고 스트라테고스는 아마도 사모스에 주둔했을 것이다. 이들은 마스트 해전 이후 아랍 함대에 맞서 동로마 해군력의 대부분을 제공했다.[119][21] 하지만 카라비시아노이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고 판단되자, 720년경 해체되고 대신 완전한 해군 테마인 테마 키비레오테스(Θέμα Κιβυρραιωτῶν|grc)가 창설되어 소아시아 남부 해안과 에게해 제도를 관할하게 되었다.[120][121][22][23]
발칸 반도에서는 불가리아인의 위협에 대응하여 680년경 트라키아 지역이 테마로 조직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한동안 트라키아의 지휘권은 옵시키온의 코메스가 행사했을 수도 있다.[24][25][26] 헤라클리우스 왕조 황제들의 원정으로 슬라브족으로부터 중앙 그리스 지역을 되찾으면서 687년에서 695년 사이에 헬라스 테마가 설립되었다.[27]시칠리아 역시 7세기 말 테마로 편성되었으나, 이탈리아 본토의 제국 영토는 라벤나 총독 또는 지역 ''두케스''에 남아 있었고, 비잔틴 아프리카는 698년 카르타고가 함락될 때까지 아프리카 총독의 통치하에 있었다. 크레타와 크림 반도의 케르손은 독립적인 ''아르콘티아''를 형성했다.[25][28]
테마 제도는 제국 방어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지만, 테마의 규모와 권력이 커지면서 지휘관인 스트라테고스(장군)들의 반란 위험도 커졌다. 이는 695년에서 715년 사이의 혼란기와 741년-742년 아르타바스도스의 대규모 반란에서 드러났다.[29] 아르타바스도스의 반란 진압 이후, 강력했던 옵시키온 테마는 부켈라리안 테마와 옵티마토이 테마로 분할되었고, 황제 직속의 새로운 정예 부대인 ''타그마타''가 창설되어 황실 경호 임무를 맡게 되었다.[30]
초기 테마의 장관은 군사 지휘관이었으나, 늦어도 8세기 후반에는 민정 권한까지 통합하여 군사와 민정을 모두 관장하는 강력한 지방 장관이 되었다.[70][71] 테마 병력은 시대와 규모에 따라 달랐으며, 10세기 기록에 따르면 동부 육군 테마의 경우 큰 곳은 15,000명, 작은 곳은 4,000명 정도였다.[76] 테마 장관의 칭호는 주로 "스트라테고스"였으나, 옵시키온은 "코메스", 인접한 옵티마톤은 "도메스티코스"라는 고유 칭호를 사용했다.[78][70] 이후 신설된 테마의 장관은 대부분 "스트라테고스"를 칭했다.[70][79] 제국은 병력 확보를 위해 소아시아나 아르메니아 주민을 트라키아로 이주시키거나, 항복한 슬라브족을 소아시아 북서부에 정착시키는 등의 이민 및 입식 정책도 추진했다.[82]
2. 3. 테마의 발전과 확장 (780년대 ~ 950년대)
950년경 아나톨리아의 비잔틴 ''테마''.
테마 제도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테마가 제국 행정 시스템의 기본 단위로 완전히 자리 잡기까지는 시간이 소요되었다. 비록 8세기 초부터 특정 지역과 연관되기 시작했지만, 기존의 속주 체계를 대체하여 민간 재정 행정이 테마를 중심으로 조직되기 시작한 것은 8세기 말에 이르러서였다.[31] 각 테마의 군사 및 민간 업무에 대한 통합된 통제권을 해당 ''스트라테고스''(장군)가 행사하게 되는 이러한 과정은 9세기 중반까지 완료되었으며,[32] 이는 10세기의 ''클레토롤로기온''과 ''제국 통치론''과 같은 저작물에서 묘사된 "고전적" 테마 모델에 해당한다.
동시에, 아랍의 침략으로부터 비잔틴 제국의 아나톨리아 핵심 지역을 방어할 필요성이 커지면서, 8세기 후반과 9세기 초에는 여러 개의 소규모 국경 군사 구역인 ''클레이수라이''(또는 ''클레이수라르키아이'', "협곡, 울타리"라는 의미)가 창설되었다. 본래 이 용어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새화된 산길을 지칭했으나, 점차 ''클레이수라르케스''라는 지휘관 아래 독립된 사령부를 갖춘 지역 전체를 의미하게 되었다. 이들은 게릴라전을 수행하고 소규모에서 중규모의 침략과 습격을 지역적으로 격퇴하는 임무를 맡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 중 다수는 정식 테마로 승격되어 테마 제도의 확장에 기여했다.[33][34]
테마 제도는 소속 병사인 스트라티오테스에게 농지를 부여하고, 평시에는 이들이 자유 농민으로서 농업에 종사하며 그 수입으로 무기와 장비를 스스로 마련하게 하는 병농일치 시스템이었다.[70][71] 이를 통해 외적의 침입에 노출된 지역에서 평시 상주 군대의 막대한 식량 수요를 병사들이 자급자족하여 충당할 수 있었고,[72][71] 유사시에는 병사들이 자신의 땅을 지키기 위해 싸우므로 사기가 높고 효과적인 전력이 되었다.[73][71] 이러한 테마 제도는 육군뿐만 아니라 해군에도 적용되어 해군 테마가 조직되기도 했다.[74][75]
테마의 장관인 스트라테고스는 본래 군 지휘관이었으나, 늦어도 8세기 후반 이후에는 민정 권한까지 통합하여 군사와 민정 양쪽의 권한을 장악한 지방 총독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테마의 병력 규모는 시대와 테마의 크기, 인구에 따라 다양했지만, 10세기 동부 육군 테마에 관한 기록에 따르면, 가장 큰 테마는 약 15,000명, 작은 테마는 약 4,000명의 병력을 보유했던 것으로 추정된다.[76]
초기 테마 중 일부(예: 테마 옵시키온, 테마 옵티마톤)는 장관의 칭호가 '코메스'나 '도메스티코스'였으나,[78][70] 이후 테마가 분할되거나 영토 확장으로 새롭게 설치된 테마의 장관은 모두 "스트라테고스"라는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70][79] 발칸 반도나 이탈리아 반도 연안부 등에는 "클레이수라", "알콘티아", "두카톤", "카토에바나테" 등으로 불리는 소규모 행정 단위들이 존재했으며, 이들 중 일부는 10세기에 이르러 정식 테마로 승격되기도 했다.[80][81]
테마의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한 과정에서 병력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인구 증가 정책, 즉 이민 및 정착 정책도 추진되었다. 예를 들어, 소아시아나 아르메니아 출신 주민들을 트라키아 지방으로 이주시키거나, 항복한 슬라브족을 소아시아 북서부에 정착시키는 등의 조치가 시행되었다.[82]
테마 제도의 정확한 기원에 대해서는 10세기 당시 사람들에게도 명확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황제 콘스탄티노스 7세는 『테마의 기원에 대하여』(Περὶ θεμάτων|페리 테마톤grc)라는 저술을 통해 그 기원을 설명하고자 시도하기도 했다.[83]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테마는 때때로 황제에 대한 반란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반란은 대개 지방에서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려는 목적보다는,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여 중앙 정권 자체를 장악하려는 형태로 나타났다.[93] 이는 중앙 정부가 제국 전체의 징세권과 그 세수를 군사비 등으로 재분배하는 재정권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93][94]
2. 4. 테마 제도의 쇠퇴 (960년대 ~ 1070년대)
10세기 비잔틴 제국은 동방과 발칸 반도에서 공세를 펼쳤다. 특히 군인 황제로 알려진 니케포로스 2세(재위 963년–969년), 요한 1세 치미스케스(재위 969년–976년), 바실 2세(재위 976년–1025년)의 통치 아래 새롭게 획득한 영토에도 테마가 설치되었다. 이 새로운 테마들은 일반적으로 7세기와 8세기에 만들어진 초기 테마들보다 규모가 작았다.[35]
바실 2세 사망 시점인 1025년의 비잔틴 제국의 ''테마''.
이 시기에는 이른바 "소(小) 테마"(μικρὰ θέματα|미크라 테마타grc) 또는 "아르메니아 테마"(ἀρμενικὰ θέματα|아르메니카 테마타grc)라고 불리는 새로운 종류의 테마가 등장했다. 비잔틴 자료들은 이를 전통적인 "대(大) 테마" 또는 "로마 테마"(ῥωμαϊκά θέματα|로마이카 테마타grc)와 명확히 구분했다. 이 작은 테마들은 대부분 요새 하나와 그 주변 영토로 구성되었으며, 하위 ''스트라테고스''(아랍인들은 zirwar|지르와르ar로, 아르메니아인들은 zoravar|조라바르hy로 불렀다)가 지휘하는 약 1,000명의 병력(주로 보병)이 수비대로 배치되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테마의 병력은 대부분 아르메니아인들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토착민이거나 비잔틴 당국에 의해 이주된 사람들이었다. 이 테마들의 특징 중 하나는 장교 수가 매우 많았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카르페지키온 테마에는 선임 ''투르마르키'' 22명과 하위 ''투르마르키'' 47명이 있었다.[32][36][37]
"아르메니아" 테마는 방어에는 효과적이었지만, 대규모 침략에 맞서거나 독자적으로 지속적인 공세를 펼칠 능력은 부족했다. 따라서 960년대부터는 기존의 중앙군인 ''타그마타''와 새롭게 창설된 전문 부대들이 국경을 따라 주둔하게 되었다. 이 부대들과 작은 국경 테마의 군대를 통합 지휘하기 위해, ''두크스''(dux) 또는 ''카테파노''(katepano)가 이끄는 여러 개의 대규모 지역 사령부("두카테스" 또는 "카테파나테스")가 설치되었다. 동방에서는 요한 치미스케스가 안티오크의 ''두크스'', 칼디아의 ''두크스'', 메소포타미아의 ''두크스''라는 세 개의 초기 사령부를 설치했다. 11세기 초 비잔틴 제국이 대 아르메니아 지역으로 확장하면서, 이 사령부들은 이베리아, 바스푸라칸, 에데사, 아니의 사령부로 보완되거나 대체되었다.[38][39] 이러한 맥락에서, "아르메니아" 테마들은 11세기 중반 무렵에는 단일 ''스트라테고스''의 지휘 아래 통합된 것으로 보인다.[37]
바실 2세를 정점으로 한 군인 황제들의 시대는 1025년까지 비잔틴 제국이 적들보다 군사적으로 우위에 서는 상황을 만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기동성이 뛰어나고 전문적인 ''타그마타'' 부대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제국 내부의 오래된 테마 군대(및 함대)는 점차 소홀해지기 시작했다. 실제로 11세기 초부터 군 복무는 점차 현금을 내고 면제받는 방식으로 대체되었다. 국경의 두카테스들은 대부분의 지역적 위협에 대처할 수 있었지만, 오래된 테마 기반 방어 시스템이 해체되면서 비잔틴 방어 체계는 전략적 깊이를 잃게 되었다. 만지케르트 전투(1071년) 당시 비잔틴 군대는 이미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 외국 용병과 동맹 및 종속 국가의 군대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문관 관료와 지방의 토지를 소유한 군사 엘리트(''디나토이'') 사이의 갈등으로 인한 반란과 내전이 겹치면서 군대는 약화되었다. 결국 만지케르트 전투에서의 패배는 비잔틴 군대의 완전한 붕괴로 이어졌다.[40]
2. 5. 11세기 ~ 12세기의 변화와 쇠퇴
1045년 비잔틴 제국의 테마 지도
콤네노스 왕조 시대에는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가 '콤네노스 군대'로 알려진 새로운 군대를 창설하면서 제국의 운명이 잠시 회복되었으나, 이는 기존 테마 제도의 결정적인 변화를 의미했다. 이 새로운 군대는 황제와 통치 왕조를 중심으로 고도로 중앙 집권화되었으며, 콤네노스 시대 부흥기의 안정을 가져왔다. 하지만 이전 군대보다 바랑기안 친위대와 같은 용병에 대한 의존도가 훨씬 높아지면서 테마의 중요성은 점차 줄어들었다. 제국의 중앙 집권화가 강화됨에 따라, 각 테마를 관리하던 ''스트라테고스''의 권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황제는 종종 자신의 친척들을 총독으로 임명하여 지방의 자율성을 줄이고 중앙 집권적인 제국 행정을 강화하려 했다.[41]
특히 만지케르트 전투의 패배로 심각하게 약화된 아나톨리아 지역의 테마들을 관리하기 위해 새로운 시스템이 필요해졌다. 콤네노스 시대의 부흥기에는 총독이 황제의 친족으로서 황제에게만 충성하는 방식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제국 전체의 중앙 집권화 경향을 따르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과거 강력했던 아나톨리아 테마들의 독립적인 성격은 약화되었다. '두크스' 또는 '카테파노스'라고 불린 새로운 군사 총독들은 황제를 대신하여 강력한 중앙 집권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은 토지를 소유한 ''프로노이아'' 신분의 외국인 용병들의 군 복무를 관리하고, 반란 발생 시 이를 진압하는 임무를 맡았다. 총독직은 주로 콤네노스 가문의 친척들에게만 주어졌다. 이는 단기적으로는 효율적인 비상 조치였지만, 장기적으로는 제국이 외국 용병에 더욱 의존하게 만들고, 다수의 토착 그리스인 군인을 배출하지 못하게 했으며, 서유럽 세력의 영향력에 더 취약해지는 결과를 낳았다.[42]
각 테마는 군사권과 행정권을 모두 가진 ''카테파노스'' 또는 ''두크스''가 감독했다. 테마는 다시 '카테파나키아'라는 하위 단위로 나뉘었는데, 이는 이전의 투르마를 포함하는 개념이었다. 각 카테파나키아는 프라이토르가 통치했으며, 이들은 기존의 투르마르케스를 대신하여 민간 및 군사적 역할을 수행했다. 한편, 군사력의 핵심은 점차 ''프로노이아르''라고 불리는 이들의 손에 넘어갔다. 프로노이아르는 제국 군대의 주력을 이루게 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토지를 소유한 수도원이나 디나토이(지방 유력자)와 비슷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알렉시오스 1세의 세금 개혁 이후, 이들 프로노이아르나 디나토이는 불법적으로 획득했던 마을과 공동체 소유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기도 했으며, 새로운 영토에서 발생하는 세금을 국고로 확보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황제가 여러 기관에 크리소스불라스(황금 인장이 찍힌 칙령)를 남발하면서 더욱 복잡해지고 악화되었다.[43][44]
콤네노스 시대의 비잔틴 군대는 전성기 테마 제도의 인력을 제대로 동원하지 못했으며, 새로운 군사 시스템은 장기적으로 유지하는 데 더 많은 비용이 들었다. 또한 이 시스템이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군인 황제가 지속적으로 통치해야 한다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마누엘 1세 콤네노스가 1180년에 사망하면서 비잔티움 제국은 다시 쇠퇴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2. 6. 후기 테마 (12세기 ~ 13세기)
안젤루스 왕조 시대에 들어 중앙 정부의 무관심과 권력 약화가 심화되면서, 12세기 말부터 테마 제도의 중요성은 점차 줄어들었다. 중앙 권력이 약해진 틈을 타 '데스포테이트'와 같은 지방 세력이 힘을 키웠고, 결국 팔레올로고스 왕조가 들어설 무렵에는 테마 제도가 사실상 기능을 멈추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과거 테마 제도의 의미가 퇴색하고, 제국 내 소규모 지방들은 ''카테파나키아''(''katepanakia'') 또는 ''케팔라티키온''(''kephalatikion'')이라는 단위로 직접 관리되었다. 각 지역은 요새나 주요 길목을 중심으로 군사권과 행정권을 모두 가진 ''카테판''(''katepan'') 또는 ''케팔레''(''kephale'')가 다스렸으며, 세부적인 업무는 대리인에게 맡겼다.[45]
테마 (그리스어 명칭)
시기
수도
비고
마이안드로스
1204년 이후
니케아 제국 시대에 존재했던 작은 테마로, 나중에는 남부 트라케시안 테마의 일부가 되었다.[67]
밀라사 및 멜라누디온
1143년
키비르레오트 테마와 트라케시안 테마의 일부를 합쳐 만든 작은 테마로, 메안데르 계곡 남쪽의 소아시아 영토를 포함했다. 니케아 제국 시대에도 유지되었다.[68]
네오카스트라
1162년 ~ 1173년 사이
마누엘 1세 콤네노스가 소아시아 국경을 재정비하면서 북부 트라케시안 테마에서 분리하여 만들었다. 니케아 제국 시대에도 유지되었다.[69]
3. 테마의 구조와 조직
"테마"라는 용어는 군사적 토지 보유 형태와 행정 구역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어 모호한 측면이 있다.[46] 기본적으로 테마 제도는 병사(스트라티오테스)에게 농지를 제공하여 평시에는 농업에 종사하게 하고, 그 수입으로 무기나 장비를 스스로 마련하게 하는 병농일치 제도였다.[70][71] 유사시에는 이들이 병사로 소집되어 국토 방위에 나섰다. 이들은 기술적으로 군사 부대에 속했으며 스트라테고스의 지휘를 받았다. 병사들이 경작하는 토지는 국가 소유였으며, 토지 사용의 대가로 급여가 일부 삭감되었다.[46] 이 제도는 병사들의 후손 역시 군 복무를 하도록 하여, 징병제의 필요성을 줄이고 군대를 저렴하게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46] 또한, 정복 과정에서 확보된 공공 토지(''프로아스테이온'')에 병사들을 정착시켜 영토 관리에도 활용되었다.[46] 육군뿐 아니라 해군에도 테마가 편성되었다.[74][75]
테마의 사령관인 스트라테고스는 군사 지휘권뿐만 아니라 해당 지역의 민사 행정권까지 통합하여 행사했다. 이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기 확립된 민정 총독과 군 사령관의 권한 분리 원칙을 폐지하고, 공화정이나 원수정 시대와 유사하게 지방 총독이 군대 지휘까지 겸하는 방식으로 돌아간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구조는 헬레니즘 시대 셀레우코스 제국의 에파르키(eparchy)나 스트라테기아(strategia) 제도와 유사성을 보인다.[46] 초기 테마의 장관 명칭은 대부분 '장군'을 의미하는 스트라테고스였으나[78], 황제 직속 군단을 전신으로 하는 테마 옵시키온의 장관은 코메스[78], 테마 옵티마톤의 장관은 도메스티코스[70]로 불리기도 했다. 이후 신설되거나 분할된 테마의 장관은 대부분 스트라테고스를 칭했다.[70][79] 8세기 후반 이후 민정 권한이 군사령관에게 완전히 통합된 것으로 보인다.[92]
테마의 병력 규모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컸다. 10세기의 제국 동부 육군 테마에 관한 기록에 따르면 최대는 15,000명, 작은 것은 4,000명으로 되어 있다.[76] 때로는 발칸 반도나 이탈리아 반도 연안부 등지에 "클레이수라", "알콘티아", "두카톤", "카토에바나테"와 같은 소규모 군사 행정 단위가 설치되었다가 10세기에 테마로 승격되기도 했다.[80][81] 제국 정부는 테마의 병력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소아시아나 아르메니아 출신자를 트라키아 지방으로, 슬라브족 투항자를 소아시아 북서부로 이주시키는 등 인구 이동 정책을 시행하기도 했다.[82]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테마는 잠재적으로 황제에게 위협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중앙 정부는 제국 전체에 대한 징세권과 세수를 군사비 등으로 재분배하는 기능을 확고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93][94], 테마가 반란을 일으키더라도 지방에 할거하여 독립하기보다는 중앙 정권 탈취를 목표로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는 양상을 보였다.[93]
4. 테마 목록
이 목록은 대략 660년 테마 제도의 시작부터 930년경의 대정복과 새롭고 더 작은 테마의 창설까지의 기간에 걸쳐 확립된 대규모의 "전통적인" 테마를 포함한다.[47]
명칭 (그리스어 명칭)
설립 시기
설립 배경 / 최초 영토
이후 분할
수도
주요 도시
에게해† (thema Aigaiou Pelàgous|테마 아이가이우 펠라구스grc)
842/843년경
독립적인 드롱가리아테에서 설립 / 레스보스, 렘노스, 키오스, 임브로스, 테네도스, 헬레스폰트, 스포라데스, 키클라데스
| '''헥사코미아''' 또는 '''헥사폴리스''' ({{llang|grc|Ἑξακωμία/Ἑξάπολις|헥사코미아/헥사폴리스
5. 평가
테마 제도는 소속 병사에게 농지를 지급하고, 평시에는 자유농민으로서 농업에 종사하게 하여 그 수입으로 무기와 장비를 스스로 마련하게 하는 병농일치제의 형태를 띠었다[70][71]。 이 병사들은 스트라티오테스라고 불렸다. 이 제도는 특히 외적의 침입이 잦은 지역에서 효과적이었는데, 평시에는 주둔 군대의 막대한 식량 수요를 병사들이 농민으로서 자급자족하여 해결할 수 있었고[72][71], 유사시에는 병사들이 자신의 땅을 지키기 위해 싸우므로 사기가 높아 강력한 전력이 될 수 있었다[73][71]。 이러한 테마는 육군뿐 아니라 해군에도 조직되었다[74][75]。
테마의 장관은 본래 군 지휘관이었으나, 여러 설이 있지만 늦어도 8세기 후반부터는 민정 권한까지 통합하여 군사와 민정 양쪽의 권한을 가진 지방 장관이 되었다. 테마의 병력 규모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컸는데, 10세기 동부 육군 테마의 기록에 따르면 큰 곳은 15,000명, 작은 곳은 4,000명 정도였다[76]。
초기 테마는 7세기경 등장했으며, 야전 기동군 군단 등을 그 기원으로 본다[77][78]。 테마 장관의 칭호는 일반적으로 '장군'을 뜻하는 '스트라테고스'였으나[78], 황제 직속 군단을 전신으로 하는 테마 옵시키온의 장관은 '코메스'[78], 테마 옵티마톤의 장관은 '도메스티코스'라 불렸다[70]。 이후 테마가 분할되거나 영토 확장으로 새로 생긴 테마의 장관은 모두 '스트라테고스'를 칭했다[70][79]。 테마 강화를 위해 병력 자원이 되는 인구를 늘리려는 이민 및 식민 정책도 추진되어, 소아시아나 아르메니아 출신자를 트라키아 지방으로 이주시키거나, 항복한 슬라브족을 소아시아 북서부로 이주시킨 사례가 있다[82]。
테마 제도의 기원에 대해서는 과거 헤라클리우스 왕조 시기에 계획적으로 도입되었다는 견해가 우세했으나, 최근에는 각 지역을 방어하던 군단이 임시로 취한 조치를 제국 정부가 사후에 승인한 형태로 발전했다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전란기의 기록 부족으로 인해 테마 제도의 정확한 기원은 여전히 학계에서 논쟁 중이며 여러 설이 공존한다. 10세기 황제 콘스탄티노스 7세조차 『테마의 기원에 대하여』라는 저술을 통해 그 기원을 설명하려 시도했을 정도로, 당시 사람들에게도 테마 제도의 시작은 명확하지 않은 문제였다[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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