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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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오덕은 (1926년 ~ 2003년) 대한민국의 아동문학가이자 교육자, 우리말 지킴이 운동가이다. 그는 초등학교 교사로 43년간 재직하며 동화와 동시를 쓰고, 우리말을 지키고 가꾸는 데 힘썼다. 한자말, 외래어, 외국어 사용을 경계하고, 어린이와 시골 할머니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우리말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육행정의 획일주의와 입시 위주의 교육을 비판하며, 참교육과 민주주의를 위한 운동에 참여했다. 주요 저서로는 《우리글 바로쓰기》, 《어린이는 모두 시인이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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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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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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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이름 | 李五德 |
장르 | 아동 문학 동화 동시 수필 |
출생일 | 1925년 11월 14일 |
출생지 |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영천군 |
사망일 | 2003년 8월 25일 (향년 77세) |
사망지 | 대한민국 충청북도 충주시 |
수상 | 제2회 한국아동문학상 제3회 단재상 |
학력 | 경상북도 영덕고등농림학교 졸업 |
소속 | 前 대구교육대학교 초빙교수 前 춘천교육대학교 특임강사 |
활동 기간 | 1954년 ~ 2003년 |
2. 생애
경상북도 영천군 현서면(현재는 청송군에 편입)에서 태어나 청송군에서 성장했다. 1944년 교원 시험에 합격하여[1][2] 1986년까지 43년 동안 초등학교 교사, 교감, 교장으로 재직하며 주로 농촌 지역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교직 생활 중이던 1954년 잡지 《소년세계》에 동시 〈진달래〉를 발표하며 아동문학가로 등단했다.
평생 동안 우리말을 지키고 가꾸는 '우리말 지킴이'이자 아이들 중심의 참된 교육을 실천하는 교육 운동가로 헌신했다. 그는 한자어, 일본어 잔재, 서구 외래어의 무분별한 사용을 비판하며, 민중의 삶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우리말의 소중함을 강조했다.[3][4][5][9] 또한 획일적인 입시 위주 교육과 교육 행정의 간섭을 비판하며 아이들이 삶과 자연을 직접 경험하며 성장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로 인해 교육 당국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여러 차례 학교를 옮겨 다녀야 했다.[5]
1986년, 아이들의 입장에서 교육 행정을 비판하는 글을 쓴 일로 대한민국 전두환 군부 정권의 압박에 시달리다 결국 스스로 교직을 떠났다.[8] 퇴직 후에도 대학 강의, '우리말 연구소' 설립, 저술 활동 등을 통해 우리말 바로 쓰기 운동과 교육 운동을 꾸준히 펼쳤으며, 1987년 전국교사협의회와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설립 운동 등 민주 교육 운동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1][5] 말년에는 지병인 신장염과 위염이 악화되어 투병 생활을 하다가 2003년 8월 25일 향년 77세로 별세했다.[9]
2. 1. 어린 시절과 교직 생활
경상북도 영천군 현서면(현재는 청송군에 편입)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청송군에서 자랐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책을 가까이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집안 형편 때문에 2년간 농사를 지어야 했고, 이후 학비가 없는 2년제 국립 농업학교에 진학했다. 학창 시절에는 주로 농사일을 했으며, 이를 통해 "땀 흘리며 일하는 것과 밥을 해서 함께 나누어 먹는 것"의 가치를 배웠다고 한다.농업학교 졸업 후 영덕군청에서 잠시 사무원으로 일하다가, 1944년 교원 시험에 합격하여 청송의 부동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하며 교직 생활을 시작했다.[1][2] 1986년까지 43년 동안 초등학교 교사, 교감, 교장으로 재직했으며, 주로 농촌 지역 학교에서 근무했다. 교직에 있으면서 동화와 동시를 쓰는 한편, 어린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고 이를 위한 교육 방법을 연구하고 실천했다.
1954년에는 아동문학가 이원수가 발행하던 잡지 《소년세계》에 동시 〈진달래〉를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했고, 이후 동화작가로도 활동했다.
이오덕은 평생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지키고 가꾸는 데 헌신하여 '우리말 지킴이'로 불렸다. 그는 한자어, 일본어 잔재, 서구 외래어의 무분별한 사용을 "잡스런 말"이라 비판하며, 특히 일본어의 영향이 깊고 복잡하게 얽혀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3] 그는 지식인이나 관료들이 인위적으로 말을 만들어내는 것이 오히려 겨레의 말을 어지럽힌다고 보았으며,[4] 시골 할머니나 어린아이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살아있는 우리말을 지키고 살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5][9] 그는 말이 한번 잘못 병들어 굳어지면 정치나 혁명으로도 되돌릴 수 없기에, 이 땅의 민주주의나 통일과 같은 중요한 가치 역시 우리말로써 창조하고 가꾸어가야 한다고 믿었다.[9]
교육 현장에서는 아이들을 시험 점수 따는 기계로 만드는 획일적인 교육 방식을 비판했다. 대신 아이들이 삶과 자연을 직접 느끼고 경험하며 참되게 성장하도록 이끌었다. 아이들에게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를 가르치고 함께 노래 부르기를 즐겼으며, 부모의 노동과 이웃, 마을 공동체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려 노력했다.[5] 그는 자신의 아동문학관에 대해 "나는 비단 같은 말로 아이들을 눈가림하여 속이는 것이 싫습니다. 동시가 사탕과자나 장난감이 아니고, 더욱 커다란 감동스런 세계를 창조하는 시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 나로서는 오늘날 이 땅 아이들의 참모습을 정직하고 진실하게 노래하면서 그들의 영혼을 살리고 싶었습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6]
2. 2. 우리말 지킴이와 교육 운동
1944년 교원시험에 합격하여[1][2] 청송의 부동초등학교에 부임한 이래 1986년까지 43년 동안 초등학교 교사, 교감, 교장을 지냈다. 이 기간 동안 동화와 동시를 쓰고, 한국 말과 글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다듬는 일에 힘써 '우리말 지킴이'로 불렸다. 1954년에는 아동문학가 이원수 선생이 발행하던 <<소년세계>>에 동시 <진달래>를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했다. 주로 농촌 지역에 근무하면서 어린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고 이를 위한 교육 방법을 연구하고 실천했다. 그는 한자어와 외래어, 외국어의 영향 속에서도 우리말을 지키고 되살리는 데 평생을 바쳤다.그는 대표작 《우리글 바로쓰기》 서문에서 밖에서 들어온 말을 중국글자말, 일본말, 서양말로 나누며, 특히 일본말이 다른 외래어까지 함께 들여와 우리말에 깊이 뿌리내린 현실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3] 언어 민중주의자이자 민족주의자로서, 그는 생전에 어린이 시집과 비평집 등 50권이 넘는 책을 펴냈다. 그는 지식인이나 학생들이 책상 앞에서 말을 만들어내는 행위가 관료들이 제멋대로 말을 만드는 것과 다름없이 우리말을 어지럽힌다고 비판했다.[4] 또한 외국 말과 외국 말법에서 벗어나 우리말을 살리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며, 말이 한번 변질되면 정치나 혁명으로도 되돌릴 수 없다고 주장하며 우리말 보존의 중요성을 역설했다.[9] 시골 할머니나 어린아이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살아있는 말을 지키고 가꾸려 노력했으며,[5] 아동문학 역시 예쁘고 귀여운 말로 현실을 가리는 대신, 아이들의 참모습을 정직하게 노래하여 영혼을 살리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6]
교육 현장에서는 아이들을 시험 점수 따는 기계로 만드는 교육 현실을 비판하며, 아이들이 삶과 자연을 직접 느끼고 경험하며 참답게 성장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글쓰기, 그림 그리기, 노래 부르기 등을 통해 아이들이 자연과 교감하고, 부모의 일과 이웃, 마을 공동체를 돌아보도록 가르쳤다.[5] 교육 행정의 지나친 간섭, 획일주의, 입시 위주의 출세주의 교육을 비판하는 그의 소신 때문에 교육 당국의 미움을 사 18번이나 학교를 옮겨 다녀야 했지만, 교육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1986년, 아이들 편에서 교육 행정을 비판하는 글을 쓴 것이 문제가 되어 당시 대한민국 전두환 군부 정권의 압박에 시달리다 결국 스스로 교직을 떠났다.[8] 마지막 근무지는 경상북도 성주군 대서초등학교였다. 퇴직 후에는 사회의 교사로서 대학에서 글쓰기를 강의하며 "지식인들의 유식병"을 경계했고, "우리말 연구소"를 세워 우리말과 글을 바로 쓰는 운동을 펼쳤다.
1987년 전국교사협의회 창립과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설립 운동을 비롯한 교육 민주화 운동에 정신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는 '교사는 노동자가 아니라 교육자'라는 주장에 반박하며, 참교육을 위해서는 교사 역시 아이들과 함께 일(놀이)하는 '일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교사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들을 위해 교육 운동을 하는 사람이라고 덧붙였다. 그의 저서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삶과 믿음의 교실》, 《이 땅에 살아갈 아이들 위해》 등에는 잘못된 교육 풍토를 바로잡으려는 그의 고민이 담겨 있다.[1][5]
이오덕은 일하는 사람들이 쓰는 일상의 언어가 가장 자연스럽고 올바른 말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노동 현장에서 땀 흘려 일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노동자들의 글 모음인 《작은책》에 대해 "글은 유식한 사람들이 쓰는 것이라고 흔히 잘못 알지만 노동하는 사람들의 삶이 담긴 글이 참글"이라고 평가했다. "우리 문장 쓰기", "우리 글 바로 쓰기" 등을 집필하고 "우리말 살리는 겨레 모임" 공동대표를 지내는 등, '한글 전용'을 넘어 '우리말 살려 쓰기'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그는 외국어의 범람으로 우리말이 위축되는 현실을 "민중들이 다 쉽게 알아듣는 말을 써서는 지식인의 권위가 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권위주의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2. 3. 민주화 운동과 말년
1986년, 아이들 편에서 교육 행정을 비판하는 글을 쓴 이유로, 대한민국 전두환 군부 정권의 탄압에 시달리다 스스로 학교를 떠났다.[8] 그는 교육 행정의 지나친 간섭과 획일주의, 입시 위주 출세주의 교육을 비판하는 생각으로 교육 당국의 미움을 받아 18번이나 학교를 옮기면서도 교육 현장을 지켰다. 1986년 마지막 근무지는 경상북도 성주군 대서초등학교였다.이후 사회의 교사로서 활동했다. 1987년 전국교사협의회,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설립 운동, 교육·학교 민주화 운동 등 현장에서 벌어진 민주 교육 운동에 좋은 영향을 끼쳤으며, ‘교사는 노동자가 아니라 교육자’라는 말에 반박했다. 참교육을 하려면 아이들이 즐겁게 일(놀이)을 하도록 해야 하고, 그것을 가르치는 선생님들도 아이들과 같이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교사는 기본적으로 ‘일하는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교사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들을 위해 교육운동을 하는 사람이라고 덧붙였다. 저서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삶과 믿음의 교실》, 《이땅에 살아갈 아이들 위해》는 그가 잘못된 교육 풍토를 바로잡으려 고민한 흔적이다.[1][5]
이오덕 선생은 일하는 사람들이 쓰는 일상의 언어야 말로 가장 자연스럽고 올바른 것이라는 생각으로, 노동 잡지 《작은책》에 "글은 유식한 사람들이 쓰는 것이라고 흔히 잘못 알지만 노동하는 사람들의 삶이 담긴 글이 참글"이라고 했다. 또한 “우리말 연구소”를 세워 한국 말과 글을 바로 쓰는 운동을 펼치고, 《우리 문장 쓰기》, 《우리 글 바로 쓰기》를 집필했다. “우리말 살리는 겨레 모임” 등에서 활동하면서 한국 말의 오용을 질책하고 '한글만 쓰기'(한글 전용)에서 더 나아가 '우리말 살려쓰기'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외국어의 밀물로 한국말이 퇴화하는 것을 두고 “민중들이 다 쉽게 알아듣는 말을 써서는 지식인의 권위가 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권위주의 때문” 이라며 비판했다.
퇴임 이후 경기도 과천에서 살았으나, 1999년경 지병인 신장염과 위염이 악화하자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수월리 자택으로 거처를 옮겼다. 2003년 8월 25일 향년 77세로 자택에서 지병으로 별세했으며, “집안 사람들 만으로 간소하게 장례를 치르고, 부고는 장례 후에 알리며, 일체의 부의금과 조화도 받지마라”고 유언했다.[9] 2003년 8월 19일 아침 병실에서 시 한 수를 마지막으로 남겼다.
한 달 동안 병원에서
밤낮 노래를 들었다.
며칠 뒤에는 고든박골 병실로 옮겨
햇빛 환한 침대에 누워
새소리 바람소리 벌레소리를 듣는다.
아 내가 멀지 않아 돌아갈 내 본향
아버지 어머니가 기다리는 곳
내 어릴 적 동무들 자라나서 사귄 벗들
모두모두 기다리는 그 곳
빛과 노래 가득한 그 곳
그리고 보니 나는 벌써
그곳에 와 있는 것 아닌가
그곳에 반쯤 온 것 아닌가
나는 가네 빛을 보고 노래에 실려
3. 주요 활동 및 사상
아동 문학가이자 교육 운동가, 우리말 운동가로서 평생을 어린이 교육과 우리말 살리기에 헌신했다. 1944년 교원시험에 합격하여[1][2]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한 이래 1986년까지 43년간 교직에 몸담으며, 주로 농촌 지역에서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고 참교육을 실천하고자 노력했다.
1954년 동시 〈진달래〉 발표를 통해 문단에 등단한 후[1][2], 동화와 동시를 쓰며 아이들의 실제 삶과 정서를 진솔하게 담아내는 문학 활동을 펼쳤다. 그는 교육 현장에서 입시 위주 교육과 획일적인 교육 행정을 비판하며 아이들이 자연과 삶 속에서 배우고 성장하는 교육을 강조했다. 이러한 신념 때문에 교육 당국과 갈등을 겪으며 여러 차례 학교를 옮겨야 했고, 1986년에는 전두환 군부 정권의 압력으로 교직을 떠나게 되었다.[8]
이오덕은 한자어와 일본어 잔재, 무분별한 외래어 사용이 우리말을 병들게 한다고 보고, 민중의 삶에 뿌리내린 쉽고 살아있는 우리말을 되살리는 데 힘썼다. 그는 언어 민족주의와 민중주의 관점에서 우리말 살리기가 민주주의나 통일만큼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라고 역설했다.[3][4][9]
또한 1987년 전국교사협의회 창립과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설립 운동에 참여하는 등 교육 민주화 운동에도 기여하며, 교사가 아이들을 위해 일하는 노동자로서 참교육 실현에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했다.[1][5] 교직 퇴임 후에도 '우리말 연구소'를 세우고 《우리 문장 쓰기》, 《우리 글 바로 쓰기》 등을 저술하며 우리말 바로 쓰기 운동을 꾸준히 펼쳤다.
3. 1. 아동 문학과 교육관
1954년 아동문학가 이원수 선생이 내던 잡지 《소년세계》에 동시 〈진달래〉를 발표하며 등단했다.[1][2] 이후 동화작가로 활동하며 주로 농촌 지역에서 근무하면서 어린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고 이를 위한 교육을 연구하고 실천했다. 그는 한자말과 외래어, 외국어의 영향 속에서 한국말을 지키고 되살리는 데 평생을 바쳤다.밖에서 들어온 잡스런 말을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으니, 첫째는 중국글자말이요, 둘째는 일본말이요, 셋째는 서양말이다. 이 세 가지 바깥말이 들어온 역사도 중국글자말-일본말-서양말의 차례가 되어 있는데, 중국글자말은 가장 오랫동안 우리 말에 스며든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일본말은 중국글자말과 서양말을 함께 끌어 들였고 지금도 끊임없이 끌어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그 깊은 뿌리와 뒤엉킴을 잘 살펴야 한다. 정말 이제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넋이 빠진 겨레가 될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겠다.[3]
이오덕은 언어 민중주의자이자 언어 민족주의자로 평가받으며, 어린이 시집과 비평집 등 생전에 50권이 넘는 책을 펴냈다. 그는 지식인들이 인위적으로 말을 만드는 것을 비판하며, 시골 할머니나 어린아이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일상적인 말을 지키고 가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4][5]
오늘날 우리가 그 어떤 일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외국 말과 외국 말법에서 벗어나 우리말을 살리는 일이다. 민주고 통일이고 그것은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을 하루라도 빨리 이루는 것이 좋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3년 뒤에 이루어질 것이 20년 뒤에 이루어진다고 해서 그 민주와 통일의 바탕이 아주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말이 아주 변질되면 그것은 영원히 돌이킬 수 없다. 한번 잘못 병들어 굳어진 말은 정치로도 바로잡지 못하고 혁명도 할 수 없다. 그것으로 우리는 끝장이다. 또 이 땅의 민주주의는 남의 말과 남의 글로써 창조할 것이 아니라 우리말로써 창조하고 우리말로써 살아가는 것이다.[9]
아동 문학에 대해서는 단순히 예쁘고 귀여운 것을 넘어, 아이들의 실제 삶을 정직하게 담아내고 그들의 영혼을 살리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나는 비단 같은 말로 아이들을 눈가림하여 속이는 것이 싫습니다. 동시가 사탕과자나 장난감이 아니고, 더욱 커다란 감동스런 세계를 창조하는 시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 나로서는 오늘날 이 땅 아이들의 참모습을 정직하고 진실하게 노래하면서 그들의 영혼을 살리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6]
교육 현장에서는 아이들을 점수 따는 기계로 만드는 교육 현실을 비판하며, 아이들이 삶을 느끼고 자연과 교감하며 참되게 성장할 수 있도록 가르쳤다. 글쓰기, 그림 그리기, 노래 부르기 등을 통해 아이들이 자연과 부모의 노동, 이웃과 마을 공동체를 경험하도록 이끌었다.[5] 그는 교육 행정의 지나친 간섭과 획일주의, 입시 위주의 출세주의 교육을 비판하는 글로 인해 교육 당국의 견제를 받아 18번이나 학교를 옮겨 다녀야 했다. 1986년에는 아이들의 입장에서 교육 행정을 비판하는 글을 쓴 것이 문제가 되어, 당시 대한민국 전두환 군부 정권의 압박 속에서 스스로 교직을 떠났다. 그는 당시 상황을 "대한민국 전두환 군부정권이 하도 발악을 하고 거기에 시달리다 보니까 그만 몸서리가 나서[8]"라고 회고했다. 마지막 근무지는 경북 성주군 대서초등학교였다. 퇴직 후에는 사회의 교사로서 대학에서 글쓰기를 강의하고 '우리말 연구소'를 세워 우리말 바로 쓰기 운동을 펼쳤다.
1987년 전국교사협의회 창립과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설립 운동 등 민주 교육 운동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교사는 노동자가 아니라 교육자'라는 주장에 반박하며, 참교육을 위해서는 교사 역시 아이들과 함께 일하는 '노동자'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교사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들을 위해 교육 운동을 하는 사람이라고 덧붙였다. 그의 저서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삶과 믿음의 교실》, 《이땅에 살아갈 아이들 위해》 등에는 잘못된 교육 풍토를 바로잡으려는 그의 고민이 담겨 있다.[1][5]
이오덕은 일하는 사람들이 쓰는 일상의 언어가 가장 자연스럽고 올바르다고 생각했으며, 특히 노동 현장에서 땀 흘려 일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노동자들의 글을 모은 《작은책》을 통해 "글은 유식한 사람들이 쓰는 것이라고 흔히 잘못 알지만 노동하는 사람들의 삶이 담긴 글이 참글"이라고 평했다. 또한 《우리 문장 쓰기》, 《우리 글 바로 쓰기》 등을 집필하고 '우리말 살리는 겨레 모임' 공동대표를 지내는 등 활동하며 '한글 전용'을 넘어 '우리말 살려 쓰기' 운동을 벌였다. 그는 외국어의 무분별한 사용으로 한국말이 퇴화하는 현실을 "민중들이 다 쉽게 알아듣는 말을 써서는 지식인의 권위가 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권위주의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3. 2. 언어관과 우리말 운동
1944년 교원시험에 합격하여[1][2] 청송의 부동초등학교에 부임한 이후 1986년까지 43년 동안 초등학교 교사와 교감, 교장을 지냈다. 그는 교직 생활을 하면서 동화와 동시를 쓰고, 한국 말과 글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다듬는 일에 힘써 우리말 지킴이로 불렸다. 주로 농촌 지역에 근무하면서 어린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고 이를 위한 교육을 연구하고 실천했다.이오덕은 한자어와 외래어, 외국어의 영향 속에서 한국 고유어를 지키고 되살리는 데 평생을 바쳤다. 그는 "밖에서 들어온 잡스런 말을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으니, 첫째는 중국글자말이요, 둘째는 일본말이요, 셋째는 서양말이다. [...] 정말 이제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넋이 빠진 겨레가 될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겠다."[3]고 주장하며 외래어의 무분별한 사용을 경계했다. 특히 일본말에 대해서는 "중국글자말과 서양말을 함께 끌어 들였고 지금도 끊임없이 끌어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그 깊은 뿌리와 뒤엉킴을 잘 살펴야 한다"고 강조했다.[3]
그는 언어에 있어 민중주의와 민족주의적 관점을 견지했다. "지식인이나 학생들이 책상 앞에 앉아서 말을 만들어내는 것은 관청의 관리들이 제멋대로 말을 만들어내는 것과 다름없이 겨레말을 어지럽힌다"[4]고 비판하며, 시골 할머니나 어린아이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살아있는 우리말을 지키고 가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5] 그는 우리말을 살리는 일이 민주주의나 통일 문제보다 더 시급하고 근본적인 과제라고 보았다. "말이 아주 변질되면 그것은 영원히 돌이킬 수 없다. 한번 잘못 병들어 굳어진 말은 정치로도 바로잡지 못하고 혁명도 할 수 없다. 그것으로 우리는 끝장이다. [...] 이 땅의 민주주의는 남의 말과 남의 글로써 창조할 것이 아니라 우리말로써 창조하고 우리말로써 살아가는 것이다."[9]라고 역설하며 우리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언어관은 그의 아동 문학 및 교육 활동에도 깊이 반영되었다. 그는 "나는 비단 같은 말로 아이들을 눈가림하여 속이는 것이 싫습니다. [...] 오늘날 이 땅 아이들의 참모습을 정직하고 진실하게 노래하면서 그들의 영혼을 살리고 싶었습니다."[6]라고 말하며, 아이들의 삶과 현실을 진솔하게 담아내는 글쓰기를 추구했다. 또한 아이들을 시험 점수 기계로 만드는 교육을 비판하고, 아이들이 삶과 자연을 직접 느끼고 경험하며 참답게 성장할 수 있도록 글쓰기, 그림 그리기, 노래 부르기 등을 통해 자연과 이웃, 공동체를 돌아보게 하는 교육을 실천했다.[5]
3. 3. 민주화 운동 참여
교육행정의 지나친 간섭과 획일주의, 입시 위주의 출세주의 교육을 비판하는 신념 때문에 교육 당국의 견제를 받아 18번이나 학교를 옮겨 다녀야 했다. 1986년에는 아이들의 편에서 교육 행정을 비판하는 글을 쓴 것이 빌미가 되어 대한민국 전두환 군부 정권의 탄압에 시달렸고, 결국 스스로 교직을 떠났다.[8] 마지막 근무지는 경상북도 성주군 대서초등학교였다.1987년 전국교사협의회 창립과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설립 운동에 참여하는 등 교육 및 학교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기여하며 현장의 민주 교육 운동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교사는 노동자가 아니라 교육자’라는 통념에 반박하며, 참교육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교사 역시 아이들과 함께 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므로 본질적으로 ‘일하는 사람’, 즉 노동자라고 주장했다. 다만 교사의 교육 운동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들을 위한 것이어야 함을 분명히 했다. 그의 저서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삶과 믿음의 교실》, 《이 땅에 살아갈 아이들 위해》 등은 당시의 잘못된 교육 현실을 바로잡고자 했던 그의 깊은 고민을 보여준다.[1][5]
이오덕은 일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일상의 언어가 가장 자연스럽고 올바르다고 생각했으며, 특히 노동 현장에서 땀 흘려 일하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작은책》에 기고한 글에서 "글은 유식한 사람들이 쓰는 것이라고 흔히 잘못 알지만 노동하는 사람들의 삶이 담긴 글이야말로 참글"이라고 말하며 노동의 가치를 역설했다. 또한 외국어의 무분별한 사용으로 한국어가 제 빛을 잃어가는 현실을 비판하며, 이는 "민중들이 다 쉽게 알아듣는 말을 써서는 지식인의 권위가 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권위주의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우리말 연구소'를 세우고 '우리말 살리는 겨레 모임' 등에서 활동하며 '한글 전용'을 넘어선 '우리말 살려 쓰기' 운동을 펼쳤다.
4. 이오덕과 권정생
어린이 문학가 이원수와 연수 모임 같은 곳에서 가까이 지냈다.[5] 1970년대 초, 〈강아지똥〉을 읽고 안동에 머물던 권정생 작가를 직접 찾아갔다. 서로 통하자마자 12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평생의 벗이 된 두 작가는 어린이 문학에 대한 고민, 세상에 대한 성찰, 불합리한 현실에 대한 분노 등을 나누며 서로를 위로하고 북돋웠다. 사후 유언에 따라 권정생 작가의 〈밭 한 뙈기〉와 이오덕 작가의 〈새와 산〉이 적힌 시비가 무덤가에 마주보고 서 있다.
2003년 가을, 두 작가가 주고받은 편지가 《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이 납니다》라는 제목으로 한길사에서 출간되었다.[7]
5. 이오덕 학교
이오덕학교는 충주시 신니면 광월리에 있는 대안학교이다. 이 학교는 이오덕 선생이 이끌던 사단법인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에서 시작되었다.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는 1983년 경기도 과천에서 현직 교사 47명이 방과 후에 모여 글쓰기 연구를 하던 모임이었다. 이오덕 선생은 학교 퇴직 후 무너미 마을로 이사하여 글쓰기 연수원을 짓고, 이를 중심으로 마을 공동체를 꾸리고자 하였다. 이후 학교 설립을 결심하고 2000년 학교 정관을 만들었으나, 뜻밖에 암 선고를 받고 3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오덕 선생의 맏아들이자 현 교장이 선친의 뜻을 이어받아 2003년 학생 30명으로 학교 문을 열었다.[10]
6. 수상 경력
7. 작품 목록
(내용 없음)
7. 1. 주요 저서
- 1965년 〈글쓰기 교육의 이론과 실제〉
- 1969년 〈어린이는 모두 시인이다〉 (창작과비평사)
- 1987년 동화집 〈종달새 우는 아침〉 (창작과비평사)
- 1992년 〈우리 문장 바로쓰기〉1,2 (한길사)
- 1992년 〈우리글 바로쓰기〉1,2 (한길사)
- 1997년 〈글쓰기 어떻게 가르칠까〉 (보리)
- 2001년 어린이 문학 비평집 〈농사꾼 아이들의 노래〉 (한길사)
- 2002년 〈문학의 길, 교육의 길〉 (창작과비평사)
- 2002년 〈어린이책 이야기〉 (창작과비평사) (소년한길)
- 2004년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 (보리)
- 2004년 〈아이들에게 배워야 한다〉 (길)
- 2004년 2005년 〈우리말 살려쓰기〉1,2,3 (아리랑나라)
- 2005년 〈거꾸로 사는 재미〉 (한길사)
- 2007년 〈무엇을 어떻게 쓸까〉 (보리)
7. 2. 어린이 문학
연도 | 제목 | 출판사 |
---|---|---|
1966년 | 〈별들의 합창〉 | |
1969년 | 〈어린이는 모두 시인이다〉 | 창작과비평사 |
1969년 | 〈탱자나무 울타리〉 | |
1974년 | 〈까만새〉 | |
1977년 (2002년) | 〈일하는 아이들〉 | 보리 |
1981년 | 〈개구리 울던 마을〉 | 창작과비평사 / 한길사 |
1987년 | 동화집 〈종달새 우는 아침〉 | 창작과비평사 |
2001년 | 어린이 문학 비평집 〈농사꾼 아이들의 노래〉 | 한길사 |
2002년 | 〈어린이책 이야기〉 | 창작과비평사 / 소년한길 |
7. 3. 시집
(내용 없음)7. 4. 교육 비평
- 1965년 〈글쓰기 교육의 이론과 실제〉
- 1969년 〈어린이는 모두 시인이다〉 (창비)
- 1977년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 1978년 〈삶과 믿음의 교실〉 (한길사)
- 1986년 〈이 땅에 살아갈 아이를 위해〉
- 1986년 〈우리 언제쯤 참선생 노릇 한번 해볼까〉 (한길사)
- 1987년 동화집 〈종달새 우는 아침〉 (창비)
- 1990년 〈참교육으로 가는길〉 (한길사)
- 1992년 〈우리 문장 바로쓰기〉1,2 (한길사)
- 1992년 〈우리글 바로쓰기〉1,2 (한길사)
- 1997년 〈글쓰기 어떻게 가르칠까〉 (보리)
- 2001년 어린이 문학 비평집 〈농사꾼 아이들의 노래〉 (한길사)
- 2002년 〈문학의 길, 교육의 길〉 (창비)
- 2002년 〈어린이책 이야기〉 (창비, 소년한길)
- 2004년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 (보리)
- 2004년 〈아이들에게 배워야 한다〉 (길)
- 2004년~2005년 〈우리말 살려쓰기〉1,2,3 (아리랑나라)
- 2005년 〈거꾸로 사는 재미〉 (한길사)
- 2005년 〈내가 무슨 선생 노릇을 했다고〉 (삼인)
- 2007년 〈무엇을 어떻게 쓸까〉 (보리)
참조
[1]
웹인용
이오덕
http://www.ewhadew.c[...]
이화듀
2003-10-01
[2]
문서
[3]
서적
우리글 바로쓰기
한길사
1993-01-25
[4]
웹인용
이오덕의 우리글 바로쓰기
http://news.hankooki[...]
한국일보
2006-04-25
[5]
서적
지난 두 해 동안 이오덕 선생님에게 배운 것 - 교육사상가열전
교육비평
2006
[6]
뉴스
부산일보
http://news20.busan.[...]
2009-03-28
[7]
웹인용
이오덕 선생 무덤가에 권정생 ‘시비’ 놓인 까닭은…
http://www.hani.co.k[...]
한겨레
2010-08-15
[8]
웹인용
이오덕 선생은 누구?
http://www.hani.co.k[...]
한겨레
2010-08-15
[9]
뉴스
겨레의 큰 스승 이오덕 선생 고이 잠드시다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3-08-26
[10]
웹인용
"우리는 몸으로 생각할 수 있는 아이를 키웁니다"
http://www.ohmynews.[...]
OhmyNews
2020-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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