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현왕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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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현왕후전》은 조선 시대 인현왕후가 희빈 장씨의 계략으로 폐위되었다가 복위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인현왕후를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희빈 장씨를 악인으로 대비하여 선과 악의 갈등을 보여준다. 작가와 창작 시기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영조 시대를 배경으로 한 기록을 통해 조선 말기 또는 20세기 초에 집필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소설은 역사적 인물을 소재로 하여 궁중 생활과 풍습을 묘사하며, 19종의 필사본과 1종의 활자본이 전해진다. 실제 역사와는 몇 가지 차이점을 보이며, 다양한 판본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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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현왕후전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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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 미상 |
| 창작 시기 | 미상 (18세기 후반으로 추정) |
| 등장인물 | |
| 주요 인물 | 인현왕후 숙종 장희빈 김만중 |
| 기타 인물 | 민진후 인경왕후 김창집 오태석 최숙빈 |
| 구성 | |
| 갈래 | 고전 소설, 역사 소설, 궁중 소설 |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 문체 | 문어체 |
| 성격 | 전기적, 역사적, 교훈적 |
| 배경 | 조선 숙종 시대의 궁중 |
| 주제 | 인현왕후의 고행과 복권, 장희빈의 악행과 몰락 |
| 특징 | |
| 의의 | 계선문학적 가치 현실주의적 경향 여성 영웅 서사의 선구적 작품 |
| 영향 | 숙종실록 등 역사 기록 구운몽, 사씨남정기 등 고전 소설 현대 드라마, 영화 등 대중 문화 |
| 줄거리 | |
| 주요 내용 | 인현왕후가 장희빈의 모함으로 폐위된 후, 갖은 고초를 겪다가 김만중 등의 도움으로 복위하고 장희빈은 몰락하는 이야기 |
| 상세 줄거리 | 인현왕후는 어질고 덕망 있는 성품으로 숙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장희빈의 모함으로 폐위되어 서인으로 강등된다. 폐위 후에도 자신의 처지를 담담히 받아들이며 덕을 잃지 않는다. 숙종은 꿈을 통해 인현왕후의 억울함을 깨닫고 복위를 결심하고, 김만중 등의 도움으로 장희빈을 처벌하고 인현왕후를 다시 왕후로 맞이한다. 이후 장희빈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고 인현왕후를 해하려다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이한다. |
| 기타 정보 | |
| 관련 작품 | 드라마 인현왕후 (1988) 드라마 장희빈 (1995) 드라마 인현왕후의 남자 (2012)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 (2013) 드라마 해치 (2019) - 인현왕후의 복위를 다룬 부분 |
| 참고 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
2. 내용
전체적 개요는 유교 국가였던 조선에서 이상적인 인성과 품행을 가진 요조숙녀로 만백성의 추앙을 받던 인현왕후가, 천박하고 악독한 첩 희빈 장씨의 간계로 인해 폐비되었다가 권선징악의 구도에 따라 복위되고 희빈 장씨는 참혹한 최후를 맞이한다는 내용이다.
저자와 정확한 창작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조선 후기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7] 처음 학계에 소개되었을 때는 작가가 인현왕후를 가까이에서 모셨던 궁녀일 것이라는 추측이 있었다. 이는 소설 속에서 저자 스스로 숙종 7년(1681년) 인현왕후가 왕비가 된 때부터 곁을 지켰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인현왕후전》은 숙종 시대의 실제 인물인 인현왕후, 희빈 장씨 등을 중심으로 궁중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다룬 역사 소설이다. 이 작품은 조선 시대부터 널리 읽히며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이야기로, 당시 사람들이 역사적 사건을 문학적으로 어떻게 수용하고 즐겼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예시가 된다.
태생부터 성스러웠던 인현왕후는 아름다운 자태와 완벽한 인성, 요조숙녀의 품행과 재기, 높은 학문을 갖춘 여인으로 성장하였다. 외조부인 송준길[1]과 중부 민정중[2]의 찬사와 각별한 사랑을 받았으며, 집안의 노비들을 통해 이웃에게도 명성이 알려져 일찍부터 칭송이 높았다. 경신년(1680년, 숙종 6) 겨울, 숙종의 원비(元妃) 인경왕후 김씨가 후사 없이 승하하자 대왕대비(장렬왕후)가 후사를 걱정하여 간택령을 내렸다. 이때 청풍부원군 김우명이 인현왕후의 덕망을 듣고 대비와 송시열에게 추천하였고, 대비가 궁인을 보내 확인한 후 크게 기뻐하며 혼인을 결정했다.
하늘마저 축복하는 듯 화창하고 상서로운 기운 속에서 치러진 대례식에서 인현왕후의 아름답고 성스러운 모습에 만백성과 궁중 사람들이 감탄하였고, 두 대비와 숙종 역시 크게 기뻐하며 그녀를 아꼈다. 그러나 오랜 기간 수태하지 못하던 중, 계해년(1683년, 숙종 9) 겨울 숙종이 두환[3]에 걸려 위독해졌다. 인현왕후와 대비(명성왕후)는 밤낮으로 정성을 다해 숙종의 쾌유를 빌었다. 연로했던 대비는 인현왕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함께 찬물 목욕과 기도를 하다 병을 얻었고, 숙종은 쾌유했으나 대비는 향년 42세로 승하하였다. 효심 깊은 인현왕후는 크게 슬퍼하며 3년상을 정성껏 치렀다. 대비의 3년상이 끝난 후, 궁인 장씨가 후궁으로 들어와 희빈에 봉해졌다. 간교하고 민첩한 희빈은 숙종의 비위를 잘 맞춰 극진한 총애를 받았으나, 인현왕후는 죽은 시어머니에 대한 슬픔에 잠겨 희빈을 경계하지 못했다.
무진년(1688년, 숙종 14) 정월, 숙종이 서른이 다 되도록 자식이 없자 인현왕후는 후궁 간택을 권유했다. 숙종은 인현왕후의 덕에 감복하여 숙의 김씨를 후궁으로 들였다. 인현왕후는 숙의 김씨를 예로써 대우했으나, 희빈의 시기는 더욱 커져갔다. 같은 해 8월, 인현왕후를 아꼈던 대왕대비 조씨(장렬왕후)마저 승하하고, 10월에는 희빈이 왕자를 생산했다. 아들을 얻은 기쁨에 숙종은 희빈과 왕자를 지나치게 총애했고, 희빈은 분수를 잊고 인현왕후를 모함하며 국모 자리를 탐하기 시작했다. 숙종은 처음에는 희빈의 말을 믿지 않았으나, 희빈이 퍼뜨린 '인현왕후가 왕자를 해치려 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점차 인현왕후를 의심하고 멀리하게 되었다. 희빈은 숙종을 더욱 미혹했고, 숙종은 장씨에게 완전히 빠져 간신들을 등용하고 희빈과 결탁하여 인현왕후를 몰아낼 계략을 꾸몄다.
기사년(1689년, 숙종 15) 인현왕후의 부친 민유중이 사망하자 인현왕후는 슬픔에 잠겨 궁중 사정을 살피지 못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종친과 궁인들이 4월 23일 인현왕후의 탄일에 작은 하례 연회를 열었다. 그러나 이미 폐비를 결심한 숙종은 이를 빌미 삼아 연회를 중단시키고 인현왕후를 질책했다. 인현왕후가 눈물로 억울함을 호소하자 숙종은 이를 '남편에게 대들었다'는 구실로 삼아 폐위를 선포했다. 많은 이들이 만류했지만, 간신들의 부추김 속에 박태보와 같은 충신이 희생되었고, 인현왕후는 결국 폐비되어 친정으로 쫓겨났다. 명안공주 등 왕족과 수많은 궁녀, 백성들이 눈물로 그녀를 배웅하며 통곡하니 천지가 진동하였다.
친정으로 돌아간 인현왕후는 큰오빠 민진후의 장녀와 궁녀 몇 명만 남기고 계모 등을 내보낸 뒤, 본채를 폐하고 별채에서 지냈다. 궁에서 의식을 지원하지 않아 친가에서 수라를 대다가 나중에는 나물 등으로 연명했다. 노비들도 내보내 집은 흉가처럼 변하고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그러던 중 새끼 밴 개 한 마리가 들어와 머물렀고, 곧 새끼 세 마리를 낳아 네 마리가 집을 지키니 귀신이 사라지고 안정을 찾았다. 폐비 생활 중 부친의 3년상을 마친 인현왕후는 더욱 서러워하며 자주 병을 앓았다.
인현왕후 폐위 후 왕비가 된 희빈 장씨와 오라비 장희재는 권력을 남용하고 재물을 긁어모았다. 희빈은 포악하게 행동하며 궁녀들을 학대했고, 숙종은 점차 그녀의 실체를 깨닫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임신년(1692년, 숙종 18) 숙종은 꿈에서 명성왕후를 만나 인현왕후의 억울함과 희빈의 간악함을 깨닫고 희빈을 멀리하며 인현왕후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이를 눈치챈 희빈은 갑술년(1694년, 숙종 20) 무고를 일으켜 인현왕후를 죽이려 했으나, 숙종은 이를 역이용하여 환국을 일으켰다. 남인과 소론 등 희빈파 세력을 몰아내고 노론을 다시 등용한 숙종은 4월 9일 인현왕후의 무죄를 밝히고 별궁으로 모시라는 명을 내렸다. 인현왕후는 처음에는 사양했으나 숙종의 간청과 종친들의 권유로 4월 27일, 만백성의 환호 속에 다시 궁으로 돌아와 복위되었다. 희빈은 다시 후궁으로 강등되어 취선당(낙선재 위치)에 유폐되었다. 숙종은 세자를 생각하여 사사(賜死) 대신 강등과 유폐로 처벌을 낮춘 것이었다. 이후 숙종은 희빈의 처소를 찾지 않고 인현왕후에게 정성을 쏟았다.
원한을 품은 희빈은 인현왕후에게 예를 갖추지 않고 어린 세자를 학대했다. 숙종은 분노하여 세자를 인현왕후에게 맡겼고, 세자는 인현왕후의 사랑 속에서 생모를 잊었다. 이에 분노한 희빈은 인현왕후를 독살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유배 중인 오라비 장희재의 처 숙정과 공모하여 무녀와 술사를 동원해 저주를 시작했다. 처소 서편에 신당을 차리고 인현왕후의 형상을 만들어 화살로 쏘게 하고, 해골 가루를 옷에 뿌리는 등 온갖 저주를 퍼부었다. 이 저주 때문인지 경진년(1700년, 숙종 26) 가을부터 인현왕후는 병들기 시작했다. 숙종이 극진히 간호했으나 신사년(1701년, 숙종 27) 5월부터 병세가 위중해져 8월 14일 사시(오전 9-11시)에 창경궁 경춘전에서 향년 35세로 승하했다.
숙종과 궁중 전체가 슬픔에 잠겼으나, 희빈은 기뻐하며 자신의 생일인 9월 7일에 무당, 술사들과 연회를 열었다. 이때 숙종은 꿈에서 인현왕후의 영혼을 만나 희빈의 악행을 계시받고 취선당으로 향했다. 국상 중에 벌어진 연회와 인현왕후의 죽음을 기뻐하는 모습에 격노한 숙종은 취선당을 수색하여 저주에 사용된 물건들을 찾아냈다. 관련자들을 친국하니 이들은 즉시 죄를 자백했고, 많은 이들이 처형되었다. 대신들은 세자를 걱정하여 희빈의 용서를 청했으나 숙종의 결심은 확고했다. 세자에게 아부하며 용서를 구한 최석정(소론) 등은 유배되었고, 숙종은 희빈에게 사약을 내렸다. 희빈은 "내 아들을 먼저 죽이라"며 발악했지만, 숙종이 친림하여 강제로 사약을 먹이니 일곱 구멍에서 검은 피를 쏟으며 끔찍하게 죽었다. 다음날 입관하려 했으나 시신은 이미 녹아내려 형체도 알아볼 수 없었다. 장희재 역시 사지가 찢겨 죽임을 당했고, 백성들은 기뻐하였다.
10월 13일 숙종은 옥사를 마무리하고 인현왕후의 혼전에 직접 제문을 지어 제사를 올렸다. 세자가 생모의 죄로 인해 죄인을 자처하며 세자 자리를 사양하자, 숙종은 인현왕후가 세자를 아꼈던 것을 생각하여 위로하고 용서했다. 조정의 간청에 마지못해 임오년(1702년, 숙종 28) 중궁 간택을 하여 경은부원군 김주신의 딸(인원왕후)을 새 왕비로 맞이했으나, 조하를 받을 때 인현왕후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3. 작가 및 창작 시기
그러나 소설 마지막 부분에 "(중략) 즉위하시니 이 어른이 곧 '''영조대왕'''이시다. 효의가 출전하시며 요순의 도덕이 계시어 '''50여년 태평을 누리시니''' (중략)"라는 내용이 있어, 궁녀 저작설은 설득력을 잃는다. 영조는 1776년(영조 52년)에 승하하며 영종(英宗)이라는 묘호를 받았고, 1889년(고종 26년)에 이르러서야 묘호가 영조(英祖)로 바뀌었기 때문이다.[6]
이 기록에 따르면, 《인현왕후전》은 영조가 승하한 1776년 이후, 특히 묘호가 영조로 바뀐 1889년 이후인 조선 말기(정조~순종 연간)나 20세기 초에 쓰였을 가능성이 높다.[7] 따라서 시간적으로 저자가 인현왕후를 직접 모신 궁녀일 수는 없다.
이러한 이유로 인현왕후 가문의 후손이나, 인현왕후 폐위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다가 죽음을 맞은 박태보의 가족 등이 저자일 것이라는 다른 의견들이 제기되었다.
4. 특징
작품의 핵심적인 특징은 선과 악의 분명한 대립 구도이다. 인현왕후는 조선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의 미덕을 모두 갖춘 현모양처이자 이상적인 국모로 그려지는 반면, 희빈 장씨는 개인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온갖 악행을 서슴지 않는 악녀로 묘사된다. 이러한 극명한 대비를 통해 결국 선한 인물은 복을 받고 악한 인물은 벌을 받는다는 권선징악의 주제 의식을 강하게 드러낸다.
또한 왕궁을 배경으로 하여 궁중의 생활 모습이나 의례, 풍습 등을 비교적 상세히 묘사하고 있어, 조선 시대 궁중 문화를 이해하는 데 참고 자료로서의 가치도 지닌다. 그러나 소설적 재미를 위해 많은 부분이 각색되었기 때문에, 작품에 묘사된 내용이 실제 역사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세부적인 차이는 하위 '실제 역사와의 차이' 문단에서 다룬다.)
4. 1. 실제 역사와의 차이
《인현왕후전》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실제 역사 기록과는 여러 부분에서 차이가 있다.
5. 판본
총 19종의 필사본과 1종의 활자본이 존재한다. 이 판본들은 모두 한글로 쓰여졌으며, 내용상 큰 차이는 없다. 가장 오래된 판본으로 알려진 유구상 소장본은 간지에 병오(丙午)라고 적혀 있어 1836년 또는 1786년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보존 상태가 가장 좋은 판본은 《인현성모민씨덕행록 63장본(가람본)》으로, 1940년 이병기가 자신의 호인 '가람'을 붙여 《문장》지에 발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이 판본은 묘사가 상세하고 이야기 구조가 치밀하며 문장이 유려하여 작품성이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는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가람문고에 소장되어 있다.
참조
[1]
문서
효종-현종 때의 서인 산당 당수로 [[송시열]]의 전임이자 친족 형이다. 인현왕후가 6세였던 1672년(현종 13)에 사망하였으나 소설에선 이보다 오래 산 것으로 등장한다.
[2]
문서
인현왕후의 부친인 민유중의 둘째 형으로 송시열의 문인이다. 숙종 6년 [[삼복의 옥]]과 [[경신대출척]]을 설계한 [[김석주]]을 보좌하여 남인을 척살하는 역할을 수행해 이 공으로 질녀 인현왕후를 왕비로 만들었음과 동시에 노소분당의 원인을 제공했다.
[3]
문서
두창. 현대어로 [[천연두]]를 뜻한다.
[4]
문서
부묘례를 뜻한다. 명성왕후의 부묘례는 숙종 12년(1686) 2월 10일에 거행됐다.
[5]
문서
대역죄인의 삼척(친척·외척·인척)을 연좌하여 함께 벌을 내리는 것.
[6]
간행물
고종실록 26권, 고종 26년 12월 5일 병자 1번째기사
[7]
문서
20세기 근대에 이 소설을 소장하기 위해 필사하는 과정, 혹은 20세기 중후반에 대한민국 교육부가 이 소설을 중고생을 위한 필수 고전으로 채택하여 일부 문장을 현대어로 완화하는 과정에서 영종이 현대인에게 익숙한 영조로 바뀌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존재한다.
[8]
간행물
숙종실록 11권, 숙종 7년 5월 2일 갑인 5번째기사 중 "지진(地震)의 변괴(變怪)가 여러 날 동안 거듭 일어났고, 더욱이 책비(冊妃)하는 날을 당하여 재이(災異)가 이와 같으니, 전하께서 수성(修省)하시는 도리에 있어서 안연(晏然)하게 행례(行禮)할 수가 없으며, 대례(大禮)를 재이(災異)가 있는 날에 그대로 거행하는 것도 또한 미안(未安)할 듯합니다. 일관(日官)이 앞으로도 길일(吉日)이 있다고 말하였으니, 오늘의 책례(冊禮)를 후일로 미루어 거행하여 경구(警懼)하는 뜻을 보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9]
간행물
숙종실록 11권, 숙종 7년 5월 3일 을묘 2번째기사 중 "지진(地震)의 변괴(變怪)는 그 감응(感應)이 하나만이 아닙니다. 혹 여알(女謁)이 성행(盛行)하거나, 혹 여주(女主)가 정사(政事)에 관여하거나, 혹 환관(閹豎)이 권세를 부리는 데서 오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가지 일은 그 일이 없다는 것으로써 소홀히 여길 수 없으며, 지금 대혼(大婚) 바로 전이니, 더욱더 경계하심이 마땅합니다."
[10]
간행물
숙종실록 21권, 숙종 15년 5월 4일 기해 2번째기사 중 "아! 육례(六禮)를 올릴 때의 일을 생각하건대, 지도(地道: 지진)가 경고(警告)하였고, 이러한 칠거(七去)의 경계함을 범하였으니, 예법(禮法)에 용납하기 어렵다. "
[11]
문서
장렬왕후·조사석·영풍군부인은 서인 산당 가문의 자제들이다.
[12]
간행물
숙종실록 17권, 숙종 12년 2월 27일 신해 2번째기사
[13]
간행물
숙종실록 18권, 숙종 13년 6월 29일 을해 1번째기사
[14]
간행물
숙종실록 18권, 숙종 13년 5월 16일 계사 2번째기사
[15]
간행물
숙종실록 24권, 숙종 18년 5월 25일 갑술 1번째기사
[16]
문서
일설에선 이곳이 인현왕후의 외가라 주장하기도 하지만 인현왕후의 외가는 충청도 회덕(현 대전 광역시)에 위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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