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민주청년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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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민주청년동맹(민청)은 1923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아 일본공산청년동맹으로 창립된 청년 단체이다. 창립 초기에는 참정권, 천황제 타도 등을 주장하며 탄압을 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공산당 재건과 함께 재건되었으며, 1960년대에는 미일 안보 조약 반대 운동에 참여했다. 1970년대 이후 회원 수가 감소하였으나, 평화 운동, 청년 권익 보호, 사회 연대 활동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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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회주의청년동맹은 1960년 일본 사회당의 청년부로 결성되어 사회주의 혁명을 목표로 활동하다가, 1971년 사키사카 파벌이 주도권을 잡고 1996년 해산될 때까지 사회당의 청년 부서로 활동했다. - 일본의 청소년 단체 - 해양소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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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카 산조는 일본의 공산주의 운동가로, 영국 유학 중 공산주의 활동을 시작하여 일본 공산당 창립에 참여했으며, 제2차 중일 전쟁 기간에는 중국에서 활동했고, 전후 일본 공산당에서 활동하며 국회의원을 지냈으나 과거 동료 살해 연루 의혹으로 제명되었다.
일본민주청년동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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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조직 | |
관련 단체 | |
국제 관계 | |
기타 | |
2. 역사
1923년 일본 제국에서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아 일본공산청년동맹으로 설립되었다. 일본공산당과 마찬가지로 18세 이상 일본 청년의 참정권, 천황제 타도, 동일노동 동일임금, 군국주의 반대에 초점을 맞추었다. 치안유지법에 따라 금지되었으며, 가와이 요시토라, 다카시마 마토, 이이지마 키미 등 일부 회원들은 경찰에 체포되어 심문 중 사망하거나 감옥에서 사망하기도 했다.[8][9][10]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공산당의 재건과 함께 일본공산청년동맹도 재건되었다. 1950년대 일련의 폭력적인 사건 이후, 일본공산당은 이전의 과격한 노선에서 물러섰고, 일본공산청년동맹은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한 세력"으로 재편되어 일본민주청년동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68년-1969년 일본 대학 시위가 절정에 달했을 때, 민청 학생들은 평화로운 활동 방식을 강조했다. 더 과격한 학생들은 민청의 이러한 활동을 "화장지 노선"이라고 조롱했다. 전공투 활동가들이 대학 캠퍼스를 바리케이드로 막자, 일부 민청 학생들은 헬멧과 곤봉으로 무장하고 과격 학생 활동가들과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
1969년을 정점으로 한 학생 운동의 고양기에,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 큰 힘을 가지고 있던 전공투 등의 반대목파 학생이나 신좌익 여러 분파를 「트로츠키스트」라고 비판하고, 격렬하게 대립했다.
민청의 회원 수는 1970년에 약 20만 명으로 정점을 찍은 후, 일본공산당과 일본 학생 운동의 전반적인 쇠퇴와 함께 꾸준히 감소했다. 2017년에는 약 9,500명이었고, 현재는 약 1만 명으로 기록되고 있다.
오키나와 반환을 계기로 1972년 5월 28일 오키나와 민청 동맹이 합류하여 일본민주청년동맹 오키나와현위원회가 되었다.[18]
역대 대회 및 대표자는 다음과 같다.
2. 1. 창립과 초기 활동 (1923년 ~ 1945년)
1923년 4월 5일,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은 다이쇼 시대에 일본공산청년동맹(교세이)이 설립되었다. 일본공산청년동맹은 일본민주청년동맹의 전신이다.[3] 교세이는 천황 중심의 전전 시대 일본에서 “만 18세 이상 남녀의 선거권, 피선거권”, “동일 노동 동일 임금”, “천황제 타도”, 침략 전쟁과 군국주의 반대를 내걸고 탄압을 받았다.[8] 가와이 요시토라, 다카시마 마토[9], 이이지마 키미[10] 등 체포되어 살해되거나 옥사한 동맹원도 있었다.

2. 2. 재건과 노선 전환 (1945년 ~ 1960년)
제2차 세계 대전 후, 일본공산당의 재건과 함께 일본공산청년동맹도 재건되었다. 1950년대 일본공산당은 즉각적인 공산 혁명을 선동하려 했고, 일본공산청년동맹에 "산촌 게릴라 부대" 편성을 위해 산으로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이러한 일련의 폭력적인 모험은 실패로 끝났다.[11] 이후 일본공산당은 이전의 과격한 노선에서 물러섰고, 일본공산청년동맹은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한 세력"으로 재편되어 일본민주청년동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민세이(일본민주청년동맹의 약칭)의 마지막 과격 활동은 1960년 안보 투쟁(미일 안보 조약 반대) 기간에 일어났으며, 많은 민세이 학생들이 참여했다. 그러나 그 이후 일본공산당과 민세이는 의회 외의 거리 시위를 점차 삼갔다. 1960년 제6차 전국대회에서 민세이는 "합의"와 "청년동맹에 대한 호소"를 통해 "평화적인 과학적 사회주의"를 추구할 것을 약속했다.[11]
이후, 일본공산당의 소감파와 국제파의 분열과 대립(50년 문제)을 수반하여, “폭력적 조류가 있었다”고 자기반성하고, 일본민주청년단(민청단)으로 개칭하여 일단 과학적 사회주의를 포기했다. 그러나 다른 교류 서클과의 차이를 찾을 수 없게 되어 다시 자기반성하고, 일본민주청년동맹으로 개칭과 함께 과학적 사회주의 노선이 부활했다.
2. 3. 1960년대 안보 투쟁과 학생 운동
1960년 미일 안보 조약 반대 투쟁(안보 투쟁)에 참여했으나, 이후 의회 밖 거리 시위를 점차 삼갔다.[11] 1968년-1969년 일본 대학 시위가 절정에 달했을 때, 민청은 평화적인 활동 방식을 강조하며, 전공투 등 과격 학생들과 대립하기도 했다.[15]다른 학생들이 경찰에게 돌을 던지는 와중에, 민청 학생들은 1968년 국제 반전의 날과 같은 주요 행사를 공원에서 평화로운 팟럭 피크닉을 열어 기념했고, 캠퍼스 시설 개선을 위해 대학 당국에 청원하는 등 평화적인 활동 방식을 강조했다. 이러한 일상생활에 대한 초점은 더 과격한 학생들로부터 "화장지 노선"이라는 조롱 섞인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전공투 활동가들이 대학 캠퍼스를 바리케이드로 막기 시작하자, 일부 민청 학생들은 헬멧과 곤봉으로 무장하고 과격 학생 활동가들과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 민청 학생들은 대학을 "방어"하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다른 학생들이 곤봉을 "폭력 봉(gebabō)"이라고 부른 반면, 민청 학생들은 곤봉을 "민주화 봉(minshūkabō)"이라고 불렀다.
1969년을 정점으로 한 학생 운동의 고양기에,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 큰 힘을 가지고 있던 전공투 등의 반대목파 학생이나 신좌익 여러 분파를 「트로츠키스트」라고 비판하고, 격렬하게 대립했다. 노란 헬멧과 「민주화봉」이라고 하는 궤바르토봉으로 무장한 민청의 방위대는 「아카츠키 행동대」라고 불리며, 수천 명 규모의 전공투를 수백 명의 부대로 압도하기도 했다.[15] 1967년 선린학생회관 사건에서는 중국 공산당 정부의 주장을 하는 재일 화교 학생이나 그 지원자들 사이에 유혈 사건을 일으켰다. 한편, 민사당 계의 「젊은 뿌리의 모임」과 같은 교류 서클의 한 면도 겸비하고, 교류회나 여행 등의 기획을 실시하고 있었다. 또한, 관련 단체의 중앙합창단이나 일본의 우타고에 실행위원회(현: 일본의 우타고에 전국협의회) 등을 통해 우타고에 운동을 주도했다. 그 일로부터 신좌익으로부터 「노래하고 춤추고 일공민청」이라고 조롱받기도 했다.
2. 4. 1970년대 이후의 변화
일본민주청년동맹(민세이)의 회원 수는 1970년에 약 20만 명으로 정점을 찍은 후, 일본공산당과 일본 학생 운동의 전반적인 쇠퇴와 함께 꾸준히 감소했다. 최근에는 회원 수가 약 1만 명으로 기록되고 있다.[16]1972년 5월 28일, 오키나와 반환을 계기로 오키나와 민청 동맹이 일본민주청년동맹 오키나와현위원회로 통합되었다.[18]
3. 주요 활동
민청은 청년들의 생활 향상, 평화, 독립, 민주주의, 사회 진보를 목표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 왔다. 주요 활동으로는 일본공산당과 연계한 일미 안보조약 반대 등의 평화운동, 반핵 운동, 등록금 인상 반대 운동, 각종 서명 활동 및 봉사활동, 학습회, 동세대 간의 교류와 연대 등이 있다.[3]
1968년-1969년 일본 대학 시위 당시 민청 학생들은 경찰에게 돌을 던지는 다른 학생들과 달리, 평화로운 팟럭 피크닉을 열거나 캠퍼스 시설 개선을 위해 대학 당국에 청원하는 등 평화적인 활동을 강조했다. 전공투 활동가들이 대학 캠퍼스를 바리케이드로 막자, 일부 민청 학생들은 헬멧과 곤봉으로 무장하고 과격 학생 활동가들과 격렬한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코로나 쇼크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학생·청년들이 늘어나면서, 각 지부에서는 푸드뱅크 사업을 실시하고 있다.[5][6] 일부 지부에서는 twitter를 통해 인터칼리지 동아리를 운영하며, 대학 당국에 정식 동아리로 인가받은 곳도 있다.[7]
4. 조직
민청은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추고 있다. 각 도도부현에는 도도부현 위원회가 있고, 지역에는 지역 위원회가 있다. 반은 3명 이상의 동맹원으로 결성되며, 직장, 지역, 학원(대학, 고등학교 등) 단위로 조직한다. 1개 학교에서 반을 조직할 수 없을 때는 2개 이상 학교에 걸쳐 반을 만들기도 한다.[3]
중앙위원회의 본부 사무소인 "민주청년회관"은 오랫동안 도쿄도 시부야구 신야마초에 있었으나, 현재는 같은 구내 센다가야로 이전하였다. 민청회관에는 민청과 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 전국노동조합총연합 청년부, 일본신문노동조합연합 청년부녀부협의회, 전국상공단체연합회 청년부협의회, 농민운동전국연합회 청년부 등이 가맹하는 "밝은 혁신 일본을 향한 중앙청년학생연락회의"(중앙청학연) 사무소가 함께 있다.
시즈오카현 이토시에는 과거 연수시설인 "이즈청년학습회관"이 있었다.
4. 1. 중앙 조직
일본민주청년동맹의 중앙위원회는 최고 의사 결정 기구이며, 매년 전국대회를 개최한다.[3] 중앙기관지로 '민주청년신문'을 발행하고 있다.4. 2. 지역 조직
각 도도부현에는 도도부현 위원회와 지역 위원회가 있으며, 매년 전국대회를 개최한다.[3] 전국대회는 과거 2~3년에 한 번 개최되었으나, 중앙위원(중앙상임위원과 도도부현 위원장이 대부분이다) 교체 촉진 등을 위해 매년 개최로 변경되었다. 지역위원회는 "반은 직접 도도부현위원회가 지도한다"는 방침으로 1990년대 후반에 일단 폐지되었으나, 현재는 재건을 추진하고 있다. 지역위원회는 일본 공산당의 지역위원회와 거의 일치한다.반은 3명 이상의 동맹원으로 결성되며, 직장·지역·학원(대학, 고등학교 등) 단위로 활동한다. 1개의 학교에서 반을 조직할 수 없을 때는 2개 이상의 학교에 걸쳐 반을 만든다(학생반, 고등학생반, 낭인반 등).
4. 3. 기초 조직
반은 3명 이상의 동맹원으로 결성되며, 직장, 지역, 학원(대학, 고등학교 등) 단위로 활동한다.[3] 1개의 학교에서 반을 조직할 수 없을 때는 2개 이상의 학교에 걸쳐 반을 만든다(학생반, 고등학생반, 낭인반 등).5. 다른 단체와의 관계
1969년을 정점으로 한 학생 운동 고양기에, 민청은 전공투 등 반대목파 학생이나 신좌익 여러 분파를 「트로츠키스트」라고 비판하며 격렬하게 대립했다. 노란 헬멧과 「민주화봉」이라고 하는 궤바르토봉으로 무장한 민청의 방위대는 「아카츠키 행동대」라고 불렸으며, 수천 명 규모의 전공투를 수백 명의 부대로 압도하기도 했다.[15] 1967년 선린학생회관 사건에서는 중국 공산당 정부의 주장을 하는 재일 화교 학생이나 그 지원자들 사이에 유혈 사건을 일으켰다.
한편, 민사당 계의 「젊은 뿌리의 모임」과 같은 교류 서클의 한 면도 겸비하고, 교류회나 여행 등의 기획을 실시하기도 했다. 또한, 관련 단체인 중앙합창단이나 일본의 우타고에 실행위원회(현: 일본의 우타고에 전국협의회) 등을 통해 우타고에 운동을 주도했다. 이 때문에 신좌익으로부터 「노래하고 춤추고 일공민청」이라고 조롱받기도 했다.
구 소련 공산당이나 중국 공산당과 일본공산당의 대립이 격화되었을 때는, 「일본의 운동에 간섭을 가해 온 시기가 있었지만, 간섭을 뿌리쳤다」고 하고 있다.[3]
5. 1. 일본공산당
민청은 청년의 절실한 요구에 응하여 생활 향상, 평화, 독립, 민주주의, 사회 진보를 목표로 하는 자주적인 청년 조직이다.[3] 과학적 사회주의와 일본공산당 강령을 배우고, 자연과 사회, 문화에 대해 폭넓게 배우면서 인간성을 함양하고, 사회의 주역으로 성장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3]민청은 일본공산당을 상담 상대로 하여 지원을 받아 활동하며,[3] 민청의 조직화에도 일본공산당이 협력하고 있다.[29] 단, 동맹원 자격은 일본공산당 당원 자격과는 완전히 별개이며, 조직적으로도 일본공산당의 청년 조직과는 다르다.[3]
5. 2. 기타 단체
일본사회주의청년동맹, 청년법률가협회, 일본청년단협의회 등과 평화운동 등에서 협력하고 있다.[29] 세계민주청년연맹에 과거 소속되어 있었으며, 갓사이 료(笠井亮)와 니시자와 슌이치(西沢舜一) 등이 파견되었다.6. 출신 인물
일본민주청년동맹(민청) 출신 인물들은 정치, 문화, 사회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정치인
이름 | 직책 |
---|---|
이토 가쿠 | 중앙위원 및 사이타마현 위원장 |
이노우에 테쓰지 | 교토대 지역 위원장 |
이와부치 유 | 중앙위원 및 후쿠시마현 위원장 |
카사이 료 | 중앙위원회 국제부장 |
카미 토모코 |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
시오카와 테쓰야 | 사이타마 남서 지역 위원장 |
타케다 료스케 | 중앙위원 및 나가노현 위원장 |
다무라 토모코 | 중앙상임위원 및 「우리 고등학생」・「민주청년신문」 편집장 |
미야모토 가쿠시 | 중앙위원 및 오사카부 위원장 |
야마시타 요시오 | 기타카와치 지역 위원장 및 오사카부 부위원장 |
전·전직 정치인
이름 | 직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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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하타 모토오 | 중앙위원회 위원장 |
하루나 나오아키 |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
이케우치 사오리 | 도쿄도 위원회 부위원장 |
우메무라 사에코 | 리쓰메이칸 1부 지역 위원장 및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
하타노 키미에 | 중앙위원 및 가나가와현 위원장 |
오오히라 요시노부 | 중앙상임위원, 히로시마현 위원장 및 「우리 고등학생」편집장 |
마시마 쇼조 | 토바타 지역 위원장 |
후데사카 히데요 | 일본공산당 전 정책위원회 책임자 및 서기국장 대행 역임, 탈당 후 보수계 평론가로 활동 |
타 정당 소속 정치인
이름 | 직책 및 경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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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와 가쓰히코 | 전 중의원 의원(6기), 자유민주당→신당·자유와 희망 소속. 자치대신,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 역임. 변호사. |
무라야마 마사요시 | 전 중의원 의원(4기), 자유민주당→신당 사키가케→사키가케→민주당 소속. 야마시시 시장(1기), 시가현지사(3기), 내각관방장관, 대장대신 역임. |
가와다 에쓰코 | 전 중의원 의원(1기), 무소속 (일본 공산당이 자주적으로 지원, 이후 나카무라 아쓰오 등과 관계가 깊어져 공산당과 대립). 가와다 류헤이(입헌민주당 참의원 의원)의 어머니. |
타케나카 헤이조 | 전 참의원 의원(1기), 자유민주당 소속. 산업경쟁력회의, 국가전략특구자문회의 유식자 의원[32] |
문화 예술인
이름 | 직업 및 경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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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이 토시오(永井智雄) | 배우. 일본공산당 청년동맹의 전 고베시 위원장. |
나타니 고로(納谷悟朗) | 배우, 성우, 연출가. 일본 청년 공산 동맹 시절 동맹원. |
히토미 미노루(瞳みのる) | 드러머(더 타이거스(ザ・タイガース)), 중국 문학자[30] |
이케다 리요코(池田理代子) | 만화가[31] |
니시자와 슌이치(西沢舜一)(가쓰야마 슌스케) | 문예평론가, 소설가, 극작가. 세계민주청년연맹 서기국원을 거쳐 일본공산당 중앙위원회 문화부장 등을 역임. |
기타
6. 1. 정치인
- 이토 가쿠 - 중앙위원 및 사이타마현 위원장 역임
- 이노우에 테쓰지 - 교토대 지역 위원장 역임
- 이와부치 유 - 중앙위원 및 후쿠시마현 위원장 역임
- 카사이 료 - 중앙위원회 국제부장 역임
- 카미 토모코 -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역임
- 시오카와 테쓰야 - 사이타마 남서 지역 위원장 역임
- 타케다 료스케 - 중앙위원 및 나가노현 위원장 역임
- 다무라 토모코 - 중앙상임위원 및 「우리 고등학생」・「민주청년신문」 편집장 역임
- 미야모토 가쿠시 - 중앙위원 및 오사카부 위원장 역임
- 야마시타 요시오 - 기타카와치 지역 위원장 및 오사카부 부위원장 역임
; 전·전직
- 오오하타 모토오 - 중앙위원회 위원장 역임
- 하루나 나오아키 -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역임
- 이케우치 사오리 - 도쿄도 위원회 부위원장 역임
- 우메무라 사에코 - 리쓰메이칸 1부 지역 위원장 및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역임
- 하타노 키미에 - 중앙위원 및 가나가와현 위원장 역임
- 오오히라 요시노부 - 중앙상임위원, 히로시마현 위원장 및 「우리 고등학생」편집장 역임
- 마시마 쇼조 - 토바타 지역 위원장 역임
- 후데사카 히데요 - 일본공산당 전 정책위원회 책임자 및 서기국장 대행 역임, 현재는 탈당하여 보수계 평론가로 활동.
; 타 정당 소속 정치인
- 백가와 가쓰히코 - 전 중의원 의원(6기), 자유민주당→신당·자유와 희망 소속. 자치대신,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 역임. 변호사.
- 무라야마 마사요시 - 전 중의원 의원(4기), 자유민주당→신당 사키가케→사키가케→민주당 소속. 야마시시 시장(1기), 시가현지사(3기), 내각관방장관, 대장대신 역임.
- 가와다 에쓰코 - 전 중의원 의원(1기), 무소속 (일본 공산당이 자주적으로 지원, 이후 나카무라 아쓰오 등과 관계를 깊게 하여 공산당과 대립). 가와다 류헤이(입헌민주당 참의원 의원)의 어머니.
- 타케나카 헤이조 - 전 참의원 의원(1기), 자유민주당 소속. 산업경쟁력회의, 국가전략특구자문회의 유식자 의원[32]
6. 2. 문화 예술인
- 나가이 토시오(永井智雄) - 배우. 일본공산당 청년동맹의 전 고베시 위원장.
- 나타니 고로(納谷悟朗) - 배우, 성우, 연출가. 일본 청년 공산 동맹 시절 동맹원.
- 히토미 미노루(瞳みのる) - 드러머(더 타이거스(ザ・タイガース)), 중국 문학자[30]
- 이케다 리요코(池田理代子) - 만화가[31]
- 니시자와 슌이치(西沢舜一)(가쓰야마 슌스케) - 문예평론가, 소설가, 극작가. 세계민주청년연맹 서기국원을 거쳐 일본공산당 중앙위원회 문화부장 등을 역임.
6. 3. 기타
- 마쓰자키 아키라 - 노동운동가이자 신좌익 활동가이다. 일본민주청년동맹 탈퇴 후 일본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혁명적마르크스주의파(혁마르파) 부의장, 국철동력차노동조합(동로) 위원장, 전일본철도노동조합총연합회(JR총련)·동일본여객철도노동조합(JR동노조) 고문 등을 역임했다.[1]
- 와카즈키 슌이치 - 의사이다. 도쿄제국대학 입학 후 공산주의청년동맹에 가입하여 동대 의학부 캡을 역임하고, 기관지 「적문전사」를 발행했다. 사쿠 종합병원 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다.[2]
- 야마무라 마사아키 - 재일 한국·조선인으로, 성서그리스도교회 회원이었다. 분신자살로 세상에 충격을 주었다.[3]
- 오쿠히라 고시 - 신좌익 활동가이다. 일본민주청년동맹 탈퇴 후 교토대 파르티잔의 영향을 받아 전학공투회의, 공산주의자동맹적군파를 거쳐 일본적군을 결성했다. 텔아비브 공항 무차별 총격 사건에서 사망했다.[4]
- 시노하라 조이치로 - 저널리스트, 정치·군사 평론가이다. 필사카 히데요, 히가시나카 미쓰오, 오자와 가즈아키 의원 비서를 역임했다. 일본민주청년동맹 낭인반 출신으로, 현재는 공산당에서 제명되고 보수파로 전향하여 참정당 임원을 역임했다.[5]
- 후지오카 신쇼 - 교육학자이다. 현재는 공산당을 탈퇴하고 우파로 전향했다. 도쿄대학, 다쿠쇼쿠대학 교수 등을 역임했다. 자유주의사관연구회 대표,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부회장을 맡았다. 아내의 부모인 후나야마 켄지와 후나야마 신, 그리고 켄지의 형인 후나야마 신이치는 모두 공산당원이었다.[6]
- 오타 코우료 - 종교가, 정치 활동가이다. 일본민주청년동맹 탈퇴 후 「전국대학연합원리연구회」(J-CARP) 회장이 되고, 국제승공연합 회장, 세계일보(日本) 이사, 세계평화연합 회장 등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구 통일교) 계열 단체의 간부를 역임했다.[7]
- 유이 요시오 - 사법서사이자 사회운동 연구가이다. 일본민주청년동맹 중앙위원·시즈오카현 위원장, 공산당 시즈오카현 위원을 역임했지만 신온건주의 사건에 관련된 혐의를 받고 직책에서 해임되었다. 후에 탈당하고 사건에 관한 서적을 저술했다.[8]
- 야노 유타카 - 전 고마에 시장이다. 판례시보사 노동조합 위원장, 고마에 시의원 등을 역임했다.[9]
- 요시다 만조 - 제5대 아다치 구청장, 치과의사였다. 전일본민주의료기관연합회(민의련), 중앙사회보장추진협의회(사보협) 임원을 역임했다.[10]
- 마쓰타케 노부유키 - 저널리스트이다. 전학련 위원장, 일본민주청년동맹 임원, 공산당 국회의원 비서, 정책위원, 안보·외교부장 등을 역임했다. 후에 공산당에서 제명되었다.[11]
7. 비판 및 논란
1969년을 정점으로 한 학생 운동 고양기에, 민청은 전공투 등 반대목파 학생이나 신좌익 여러 분파를 "트로츠키스트"라고 비판하며 격렬하게 대립했다. 민청 방위대는 노란 헬멧과 "민주화봉"이라는 궤바르토봉으로 무장한 "아카츠키 행동대"로 불렸으며, 수천 명 규모의 전공투를 수백 명 부대로 압도하기도 했다.[15] 1967년 선린학생회관 사건에서는 중국 공산당 정부의 주장을 옹호하는 재일 화교 학생 및 지원자들과 유혈 충돌을 일으켰다. 한편, 민사당 계열 "젊은 뿌리의 모임"과 같은 교류 서클 역할도 하며 교류회나 여행 등을 기획했다. 또한, 관련 단체인 중앙합창단이나 일본의 우타고에 실행위원회(현: 일본의 우타고에 전국협의회)를 통해 우타고에 운동을 주도하여 신좌익으로부터 "노래하고 춤추고 일공민청"이라는 조롱을 받기도 했다.
2023년 현재 동맹원 수는 6,460명이다. 1970년 최성기에는 약 20만 명에 달했으나, 2002년 11월 제30회 대회에서 "2만 2,000의 봉우리를 돌파"라고 발표한 후 동맹원 수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16] 그러나 2023년 11월 제47회 대회에서 시스템 집계 결과 6,460명으로 확인되었다.[17] 주간 금요일의 시이 가즈오 인터뷰(2017년)에서는 약 9,500명, 공식 사이트에서는 "약 1만 명"이라고 언급되었다.
총무성이 2014년 11월 28일 공표한 헤이세이 25년 정기 공표분 정치자금 수지 보고서에 따르면, 시부야구 신야마쵸에 있던 민청 회관 건물과 토지가 매각되어 수입에 계상되었다.[19]
7. 1. 신좌익과의 대립
1960년대 학생 운동 시기, 전공투 등 신좌익 세력과 격렬하게 대립했다. 1968년-1969년 일본 대학 시위가 절정에 달했을 때, 다른 학생들이 경찰에게 돌을 던지는 와중에, 민세이 학생들은 1968년 국제 반전의 날과 같은 주요 행사를 공원에서 평화로운 팟럭 피크닉을 열어 기념했고, 캠퍼스 시설 개선을 위해 대학 당국에 청원하는 등 평화적인 활동 방식을 강조했다. 이들은 일상생활에 대한 초점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더 과격한 학생들로부터 "화장지 노선"이라는 조롱 섞인 별명을 얻게 되었다.그러나 전공투 활동가들이 대학 캠퍼스를 바리케이드로 막기 시작하자, 일부 민세이 학생들은 헬멧과 곤봉으로 무장하고 과격 학생 활동가들과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 민세이 학생들은 대학을 "방어"하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다른 학생들이 곤봉을 "폭력 봉(gebabō)"이라고 부른 반면, 민세이 학생들은 곤봉을 "민주화 봉(minshūkabō)"이라고 불렀다.
7. 2. '가짜 좌익' 비판
민청은 신좌익 세력을 '트로츠키스트', '가짜 "좌익" 폭력집단' 등으로 비판하며, 폭력적인 투쟁 방식을 거부했다. 1968년-1969년 일본 대학 시위가 절정에 달했을 때, 다른 학생들이 경찰에게 돌을 던지는 와중에, 민청 학생들은 1968년 국제 반전의 날과 같은 주요 행사를 공원에서 평화로운 팟럭 피크닉을 열어 기념했고, 캠퍼스 시설 개선을 위해 대학 당국에 청원하는 등 평화적인 활동 방식을 강조했다. 이러한 일상생활에 대한 초점은 더 과격한 학생들로부터 "화장지 노선"이라는 조롱 섞인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전공투 활동가들이 대학 캠퍼스를 바리케이드로 막기 시작하자, 일부 민청 학생들은 헬멧과 곤봉으로 무장하고 과격 학생 활동가들과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 민청 학생들은 대학을 "방어"하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다른 학생들이 곤봉을 "폭력 봉(gebabō)"이라고 부른 반면, 민청 학생들은 곤봉을 "민주화 봉(minshūkabō)"이라고 불렀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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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型コロナ 生活困窮者に食料支援民青県委が無料配布 /宮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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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戸でコロナ禍の学生支援へ 食料や日用品募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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コンパクトに「闘争・死」と刻み 獄死した飯島喜美と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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