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회주의청년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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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사회주의청년동맹은 1960년 일본 사회당의 청년부로 결성된 단체이다. 1960년대 안보 투쟁 실패 이후 분열된 학생 운동의 일부를 제도화하기 위해 설립되었으며, 사회주의 혁명을 목표로 활동했다. 1960년대 후반 사회주의 협회 내 분열로 여러 파벌로 나뉘었으나, 1971년 사키사카 파벌이 주도권을 잡았다. 이후 1996년 해산될 때까지 사회당의 청년 부서로 활동했으며, 현재도 일부 후계 조직이 존재한다. 이념적으로는 과학적 사회주의를 지향하며, 사회민주당 등과 협력 관계를 가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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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회주의청년동맹 - [정당]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로마자 표기 | Nihon Shakaishugi Seinen Dōmei |
약칭 | 사청동 |
전신 | 일본 사회당 청년부 |
창립일 | 1960년 10월 15일 |
해산일 | 불명 |
후신 | 없음 |
이념 | 사회주의 |
위치 | 일본 도쿄도 분쿄구 오쓰카 3-28-7 임야회관 2F |
관련 조직 | 일본사회당 입헌민주당 (생추어리, 사회민주주의 포럼) 사회민주당 신사회당 사회주의협회 원자폭탄수소폭탄금지일본국민회의 세계민주청년연맹 |
웹사이트 | 일본 사회주의 청년 동맹 공식 웹사이트 |
조직 구조 | |
주요 기구 | 중앙위원회, 전국대회, 도도부현 지구 본부 |
관련 정보 | |
소속 정당 | 일본사회당 |
2. 역사
1960년, 전학련은 미일 안보 조약 통과를 막지 못한 안보 투쟁 실패에 대한 책임 문제로 분열되어 해산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 사회당(JSP)은 당의 청년 부서로 일본사회주의청년동맹(사청동)을 설립하여 분열된 학생 운동의 일부를 흡수하려 했다. 이후, "사회청년동맹 전학련"은 "진정한" 전학련의 칭호를 놓고 경쟁하는 여러 전학련 중 하나가 되었다.
초기 사청동은 JSP의 "구조개혁" 파벌이 주도했지만, 1964년 제4차 대회에서 사회주의협회 파벌로 대체되었다. 사회주의협회는 일본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추구했지만, 일부 급진적인 사회주의 청년 운동가들은 이마저도 점진적이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1965년에 "해방파"를 결성하여 분리되었다.
1967년, 사회주의협회가 분열되면서 사청동 내에서도 추가 분열이 발생했다. 1969년 제9차 대회에서는 사키사카 파벌, 오타 파벌, "반전" 파벌 사이에 공개적인 대립이 나타났다. 이후 몇 년 동안 여러 파벌들이 추방되거나 자발적으로 탈퇴했으며, 1971년 제10차 대회까지 사키사카 파벌이 조직을 거의 완전히 통제하게 되었다.
1971년 이후, 사청동은 비교적 통일된 상태를 유지하며 1996년 당 해산까지 JSP의 청년 부서로 기능했으며, 일부 후계 조직은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다.
2. 1. 결성과 초기 활동 (1960년대)
일본 사회당 청년부를 모체로 1960년에 결성되었다. 초대 위원장은 니시카제 이사오였다.[1] 결성 초기부터 안보 투쟁과 미이케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안보와 미이케에서 생겨났다"고 불릴 정도였다. 초기에는 구조개혁론을 지지하는 활동가들이 주도했으나, 1964년 사회주의협회 계열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후카다 하지메가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2]2. 2. 내부 분열과 재편 (1970년대)
1967년, 사회당 내 사회주의협회의 분열은 일본사회주의청년동맹(사청동)에도 영향을 미쳐 내부 분열을 심화시켰다.[3] 1969년 9월 제9차 대회에서는 고사카(고사카 이츠로)파, 반전파(해방파, 제4 인터 등), 오타(오타 카오루)파 간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이들은 각각 제1견해, 제2견해, 제3견해로 불렸다.[3]주된 논쟁은 반전청년위원회 운동의 성격을 둘러싸고 발생했다. 제1견해파(고사카파)는 일본사회당과 총평 강화 입장을 취하며, 반전청년위원회를 청년부 단체 활동으로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2견해파(반전파)는 신좌익 세력으로, 사청동 및 사회당 해체와 혁명당 창출을 주장했다. 제3견해파(오타파)는 사회당과 총평 해체에는 반대했지만, 당시 방향에 확신을 갖지 못했다.[3] 결국 제3견해파는 대회를 보이콧하고, 제1, 2견해파 연합 집행부가 성립하며 사청동은 해체를 면했다.
이후 반전파와 고사카파의 대립이 심화되어, 1971년 2월 제10차 대회에서 고사카파가 집행부를 독점하고, 제2견해파(혁노협, 제4 인터)는 제명되었다.[3] 제3견해파는 별도 조직을 결성했으나, 사회당은 고사카파의 사청동을 유일한 청년 단체로 승인했다.
1970년대 전반, 국철, 우정 등의 반(反) 마르생(생산성 향상 운동) 투쟁과 춘투 고조 속에서 사청동은 조직을 확대했다. 노동조합 측은 30%를 넘는 임금 인상을 획득했다. 노동운동과 반전운동이 강화되면서, 일본자본주의는 커다란 위기를 맞이했다. 미키 다케오 내각은 "대화와 협조"를 주장하며, 기업은 "불황, 적자" 선전으로 노동운동의 노사 협조화를 추진했다. 사회주의협회와 사청동의 계급투쟁 노선과 그 영향 아래 청년 활동가들은 자본, 경영자, 일부 노동조합에게 배제 대상이 되었다. 전전통의 "협회 규제"로 상징되는 노동운동 내 좌파 억압은 민간 노조에서 제2노조 결성과 제1노조 고립으로 확대되었다. 1980년대 연합 결성, 총평 해체라는 노동 전선 재편이 진행되었고, 사청동은 반대했지만 막지 못했다.
2. 3. 쇠퇴와 현재 (1980년대 ~ 현재)
1980년대 일본 노동 전선 재편(총평 해산, 연합 결성)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1990년대 소련 붕괴, 일본 사회당 분열, 버블 붕괴 이후 불황 등으로 인해 더욱 쇠퇴했다. 현재는 직장 실태 토론, 청년 단결 집회 등을 통해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중앙 차원에서는 특정 정당과 협력 관계를 맺지 않고 있지만, 지역 차원에서는 사민당, 신사회당, 입헌민주당과 협력하기도 한다.예를 들어, 2005년 연합의 회장 선거에서 UI 젠센 동맹의 다카기 고우의 대립 후보가 된 전국 커뮤니티 유니온 연합회의 카모 모모요(남편은 전 나라시노시 의회 의원인 카모 테츠토시이며 사청동 활동을 통해 알게 됨)나, 같은 시기에 연합 회장 대행을 맡았던 일교조의 모리코시 야스오도 과거 청년 시절에는 사청동의 활동가였다.
2022년 9월 3일,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2년 연기된 사청동 결성 60주년 리셉션이 도쿄 일본 청년관에서 개최되었으며, 사회민주당, 신사회당, 요시카와 하지메 중의원 의원 (입헌민주당) 등이 축사를 했다. 사청동 초대 위원장 니시카제 이사오도 메시지를 보냈다.
3. 조직 및 활동
일본사회주의청년동맹(사청동)은 기관지 "청년의 소리"를 2009년부터 월 2회 발행하고 있다.[2] 각 지역 및 직장 실태, 투쟁 보고, 춘투(춘계 임금 인상 투쟁) 정세, 평화 운동, 학습 활동 등이 실린다.[2] 다른 청년 조직, 정치 조직과 비교했을 때 다양한 직장 실태를 중심으로 보고하는 것이 『청년의 소리』의 중요한 특징이다.[2]
직장과 산별(산업별)을 초월한 청년들의 학습 및 교류는 청년공투운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3] 과거에는 사청동, 노동조합 청년부, 일본 사회당의 '삼자 공투'로 평화 우호제나 단결 집회 등이 개최되었으나,[3] 현재는 노동조합 청년부를 중심으로 청년 단결 집회와 평화 우호제 운동이 지속되고 있다.[3]
히로시마현 히로시마 평화 기념 공원에서 채화한 평화의 불을 토치에 점화하여 각지를 잇는 반핵 평화의 불 릴레이 운동은, 사청동 동맹원이 배치된 노동조합뿐만 아니라 연합계 노동조합, 시민 운동 단체의 참여도 얻어 전국 규모로 개최되고 있다.[3]
3. 1. 조직 구조
일본사회주의청년동맹(사청동)은 중앙, 지본, 지부, 반으로 구성되며, 반을 조직의 기본 단위로 한다.[2] 15세부터 30세까지의 청년 남녀는 동맹의 강령과 규약을 인정하고 반에 소속되어 활동하면 동맹원이 될 수 있다.[2]동맹원 대부분은 노동조합이나 노조 청년부 활동가이며, 자치노련, 일교조, 사철총련, JP노조, 임야노조, 국노, 전농림, 전노금, 농단노, 정보노련 등 구 총평계의 관공노, 대노조가 중심이다.[2] 소수지만, 기간노련, 전기연합, 전수도, JAM, 헬스케어노협, UA젠센 등에도 동맹원이 있다.[2] 주요 산별에는 직장반의 협의회(반협)가 존재한다.[2]
동맹원 대부분이 비교적 노동 조건이 좋은 관공노, 대노조에 소속되어 있어, 민간이나 미조직 동맹원이 적어 활동・토론의 폭이 좁고, 사청동 활동을 노동조합운동의 연장선상에서만 파악하는 경향을 지적하는 의견도 있다.[2] 또한, 노동조합 내에서 사청동만으로 파벌을 만들거나, 학습 거점이었던 동맹이 "학교 정치"라고 불리는 등 노동조합이 다른 당파를 포함하여 조합원 대중으로부터 괴리되는 폐해도 컸다.[2]
3. 2. 주요 활동
일본사회주의청년동맹은 기관지 "청년의 소리"를 발행하고 있으며, 2009년부터 월 2회 발행한다.[2] 각 지역 및 직장 실태, 투쟁 보고, 춘투(춘계 임금 인상 투쟁) 정세, 평화 운동, 학습 활동 등이 게재된다.[2] 다양한 직장 실태를 중심으로 보고하는 지면 구성은 다른 청년 조직, 정치 조직과 비교했을 때 『청년의 소리』의 중요한 특징이다.[2]직장과 산별(산업별)을 초월한 청년들의 학습 및 교류의 장은 청년공투운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3] 과거에는 일본사회주의청년동맹(사청동), 노동조합 청년부, 일본 사회당의 '삼자 공투'로 평화 우호제나 단결 집회 등이 개최되었다.[3] 현재는 노동조합 청년부를 중심으로 청년 단결 집회와 평화 우호제 운동이 지속되고 있다.[3]
히로시마현 히로시마 평화 기념 공원에서 채화한 평화의 불을 토치에 점화하여 각지를 잇는 반핵 평화의 불 릴레이 운동은 사청동 동맹원이 배치된 노동조합뿐만 아니라 연합계 노동조합, 시민 운동 단체의 참여도 얻어 전국 규모로 개최되고 있다.[3]
3. 3. 학생 운동
1960년 일본 사회당(JSP)은 미일 안보 조약 통과를 막지 못한 안보 투쟁 실패에 대한 책임으로 분열된 학생 운동의 일부를 제도화하기 위해 일본 사회주의 청년 동맹(사청동)을 설립하고, 산하에 학생반 협의회(학협)를 설치했다.1960년대 초, 사청동 학생반은 도쿄대 교양학부 자치회 집행부를 획득하는 등 기세를 보였으나, 곧 학협을 거점으로 해방파가 발생하여 주류가 되었다. 1966년 도쿄 지본 93사건을 계기로 전국학협은 사실상 붕괴되었지만, 같은 해 말 도쿄 지본 재건과 함께 도쿄 지본 학생반 협의회(도학협)가 재건되었다. 도학협은 도쿄 학생 회관(동학관) 투쟁 등을 지도하며 영향력을 확대했고, 반 안보 개헌 저지 학생 회의를 개최, 기관지 『조직자』를 간행했다.
1960년대 말, 전공투 운동이 일어나자, 사청동 학생반은 도쿄 대학과 주오 대학 등에서 전공투에 참가했고, 초기 나리타 공항 반대 운동에도 참가했다. 나리타 투쟁 참가는 1971년 9월 제2차 강제 대집행까지 이어졌다. 또한, 도요 대학을 둘러싸고 해방파와 격렬한 무장 충돌을 반복하기도 했다.
1970년대 들어 사청동 학생 운동은 전진하여, 1973년 전국학협이 재건되고 『조직자』는 전국학협 기관지가 되었다. 도요 대학, 주오 대학, 고베 대학, 슈쿠토쿠 대학 등이 거점교였으며, 도학협에는 20개가 넘는 학생반이 결집하여 학생 운동에서 민청, 중핵, 혁마 다음가는 동원력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학생 운동 전반의 정체와 함께 사청동 학생 운동은 급속히 쇠퇴했다. 학생층의 변화에 맞는 방침을 내놓지 못했고, 일본 공산당과 신좌익과 달리 조직 전체에서 학생 대책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 후반 이후 학협으로서의 활동은 중단되었고, 현재 소수의 학생 동맹원이 존재하지만, 학내 운동이나 사청동 내 학습 활동보다는 정당 선거 운동에 매몰되는 경향을 보이며 존재감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4. 사상 및 정치적 입장
일본사회주의청년동맹(사청동)은 마르크스-레닌주의(과학적 사회주의)를 학습하며 사회주의 혁명을 목표로 하는 청년 조직으로, 일본 사회당의 사회민주주의, 평화혁명 노선과는 다른 입장을 취한다.[5]
초기에는 구조개혁론을 지지하는 활동가들이 집행부를 구성했으나, 1964년 제4회 대회 이후 사회주의협회 계열이 실권을 잡았다.[2] 1969년 제9회 대회에서는 '세 가지 견해'가 대립하며 분열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일본민주청년동맹이 "일본공산당의 지도를 받는다"고 명시한 것과는 달리, 사청동은 일본사회당과 지지·협력 관계를 맺었을 뿐, 이론 및 행동 면에서 직접적인 지도를 받지 않았다.
"개헌 저지"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호헌을 내세우는 사회민주당, 신사회당과는 차별화된다. 국제적으로는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계열의 국제사회주의청년동맹이 아닌, 소련과 각국 공산당 계열 청년 조직의 영향력이 강한 세계민주청년연맹에 가맹하고 있다.[5]
4. 1. 이념
일본 사회당의 사회민주주의, 평화혁명 노선과는 달리, 마르크스-레닌주의(과학적 사회주의)를 학습하며 사회주의 혁명을 목표로 한다.[5]일본민주청년동맹이 "일본공산당의 지도를 받는다"고 자기 성격을 규정하는 것과는 달리, 일본사회주의청년동맹(사청동)은 구 일본사회당과 지지·협력 관계를 맺고 있지만, 청년 조직으로서 정당으로부터 이론이나 행동 면에서 직접적인 지도를 받지는 않는다.[5]
사청동은 "개헌 저지"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호헌을 내세우는 사회민주당, 신사회당과는 차별화된다. 국제적으로는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계열의 국제사회주의청년동맹이 아닌, 소련과 각국 공산당 계열 청년 조직의 영향력이 강한 세계민주청년연맹에 가맹하고 있다.[5]
4. 2. 정당과의 관계
일본사회당 청년부를 전신으로 하며, 1960년 10월 15일 창립대회에서 정식으로 결성되었다.[1] 초대 위원장은 니시카제 이사오였다. 일본사회당의 지원을 받았지만, 독자적인 강령과 규약을 가지고 활동했다.일본민주청년동맹이 일본공산당의 지도를 받는다고 명시한 것과 달리, 일본사회주의청년동맹(사청동)은 일본사회당과 지지·협력 관계를 맺었을 뿐, 이론 및 행동 면에서 직접적인 지도를 받지는 않았다.
현재 중앙 차원에서는 사회민주당, 신사회당, 입헌민주당과 공식적인 협력 관계를 맺지 않고 있다.[5] 그러나 각 지방 본부나 지부에서는 지역 상황에 따라 이들 정당의 활동에 관여하기도 한다.
국제적으로는 세계민주청년연맹(WFDY)에 가맹하고 있다.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계열의 국제사회주의청년동맹(IUSY)과는 다르다.
5. 출신 인물
일본사회주의청년동맹(사청동) 출신 인물들은 정치, 노동 운동, 언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분야 | 이름 | 비고 |
---|---|---|
정치인 | 요시카와 하지메 | 현역 국회의원[4] |
마타이치 세이지 외 9명 | 전 국회의원[4] | |
노동운동가 | 가모 모모요 외 9명 | 전국커뮤니티유니온연합회 전 회장 등[4] |
기타 | 사토 마사루 외 1명 | 작가, 외교관 등[6] |
5. 1. 정치인
- 요시카와 하지메 : 현역 국회의원[4]
- 마타이치 세이지 : 전 국회의원[4]
- 후카다 하지메 : 전 국회의원[4]
- 미네자키 나오키 : 전 국회의원[4]
- 히모리 후미히로 : 전 국회의원[4]
- 간노 데쓰오 : 전 국회의원[4]
- 오카자키 히로미 : 전 국회의원[4]
- 에다 사츠키 : 전 국회의원[4]
- 가네코 데쓰오 : 전 국회의원[4]
- 요코미치 다카히로 : 전 국회의원[4]
5. 2. 노동운동가
- 가모 모모요: 전국커뮤니티유니온연합회 전 회장[4]
- 가나자와 히사시: 전노협 전 의장
- 사카구치 도모히코: 국노 전 위원장
- 다노헨 고이치: 사철총련 위원장
- 이와사키 슌로: 임야노조 전 위원장
- 이시다 데루마사: 전노금 전 위원장
- 다나무라 히로미: 전농림 전 위원장
- 오카모토 야스이로: 일교조 전 위원장
- 도시 에이사부로: 정노련 전 위원장
- 가와 아쓰시: 자치노 위원장
- 모리코시 야스오: 일교조 전 위원장[4]
5. 3. 기타
6. 같이 보기
참조
[1]
간행물
社会主義青年同盟をつくろう
http://roudousyaundo[...]
日本社会主義青年同盟準備委員会
1960-03-10
[2]
서적
改憲阻止・反合理化の基調
http://roudousyaundo[...]
日本社会党中央本部
1986-07
[3]
간행물
革労協・第四インターに関する決議
http://roudousyaundo[...]
青年の声
1971-02-22
[4]
웹사이트
社青同(日本社会主義青年同盟)結成60周年レセプション開催
http://roudousyaundo[...]
労働者運動資料室HP管理人
[5]
간행물
党問題に関する決議
http://roudousyaundo[...]
青年の声
1997-06-09
[6]
서적
彼は早稲田で死んだ
문춘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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