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원주민론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일본원주민론은 야기리 도메오가 제기한, 야마토 왕조가 외래 정권이며 부락민과 산카가 선주 민족의 후예라는 주장이다. 야기리 사관은 이러한 "원주민"이 황실과 연결되어 황실을 원주민 통합의 상징으로 보았다. 이 이론은 신좌익 세력에 의해 일본 건국 시 원주민 박해를 근거로 일제 타도를 주장하는 데 이용되었고, 반일 테러 및 오컬트 붐과도 연관되었다. 신좌익 사관은 야기리 사관의 해석을 원용하면서도 아이누 민족, 황실의 기원, 후지와라 씨와 율령제에 대한 해석에서 차이를 보였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공산동 적군파 - 국제근거지론
국제근거지론은 세계 혁명론의 한 갈래로, 선진국의 계급 투쟁, 제3세계의 민족 해방 투쟁, '노동자 국가' 관료 독재 타도를 통해 세계 혁명을 목표하며, 소규모 "노동자 국가"에 침투하여 "국제 근거지"를 확보, 세계 혁명 전쟁을 일으키는 전략이다. - 공산동 적군파 - 고교적군
고교적군은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 일본의 학생 운동과 관련하여 교육 개혁, 반전 운동, 사회 개혁 등을 목표로 활동한 다양한 학생 단체들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용어이다. - 역사관 - 식민사관
식민사관은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이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한국사를 왜곡한 역사 해석으로, 일선동조론, 정체성론, 타율성론 등을 통해 한국의 독자성과 주체성을 부정하고 사회의 낙후성과 종속성을 강조하며, 만선사관으로 한국사를 만주사의 일부로 왜곡하는 데 활용되었고, 민족사학 및 사회경제사학계의 비판적 검토를 통해 서구 중심적 역사관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 역사관 - 휘그사관
휘그 사관은 역사를 진보의 관점에서 해석하며 과거를 현재의 시각으로 판단하고 단선적인 발전 단계로 파악한다는 비판을 받는 역사 해석 방식이다. - 일본의 민족 문제 - 반일망국론
반일망국론은 일본의 역사, 문화, 노동 운동 등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며 일본 사회의 전복을 주장하는 사상으로, 일본 황실을 침략 세력의 후예로 보고 일본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죄악시하며 극단적이고 자기모순적인 사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 일본의 민족 문제 - 우토로
우토로는 일본 교토부 우지시에 위치한, 일제강점기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과 그 후손들이 집단 거주하며 형성된 마을로, 오랜 기간 토지 소유권 분쟁과 강제 퇴거 위기를 겪었으나, 현재는 주거 환경 개선 사업이 진행되고 평화 기념관이 건립되었지만, 여전히 차별 및 혐오 범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일본원주민론 | |
---|---|
개요 | |
유형 | 역사적 관점, 민족주의적 주장 |
내용 | 일본 열도에 거주했던 '원주민'의 존재 및 그들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주장 |
주요 주장 | 현재의 일본 민족은 외부에서 온 '정복자'이며, 일본 열도에는 원래 다른 민족이 거주했다는 주장 이러한 '원주민'의 문화와 역사가 현재 일본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 |
관련 용어 | 선주민족 아이누 민족 류큐 민족 고대 일본인 야요이인 조몬인 |
역사적 배경 | |
메이지 시대 | 미나카타 구마구스 등의 학자들이 '일본 원주민론'과 유사한 주장을 펼침 아이누 민족과 류큐 민족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일본 원주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 |
쇼와 시대 초기 | 오리구치 시노부 등이 '일본 원주민론'을 발전시킴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일본 원주민'의 존재를 강조하는 주장이 등장 |
전후 | 우메하라 다케시 등이 '일본 원주민론'을 새로운 관점에서 재조명 '일본 원주민'의 문화와 역사를 재평가하고, 현재 일본 문화와의 연관성을 탐구하는 연구가 진행 |
주요 논점 | |
'원주민'의 정의 | '원주민'의 범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 아이누 민족과 류큐 민족을 '원주민'에 포함시킬 것인지에 대한 이견 |
'정복자'의 정체 | 현재의 일본 민족을 '정복자'로 규정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 '정복자'가 누구인지, 언제 일본 열도로 왔는지에 대한 다양한 주장 |
문화적 영향 | '원주민'의 문화가 현재 일본 문화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논쟁 '원주민'의 문화적 요소가 일본 문화에 어떻게 스며들었는지에 대한 다양한 해석 |
비판적 시각 | |
역사 왜곡 | '일본 원주민론'이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역사를 왜곡할 수 있다는 비판 '원주민'과 '정복자'라는 이분법적인 구도가 역사적 사실을 단순화한다는 지적 |
차별 조장 | '일본 원주민론'이 아이누 민족과 류큐 민족에 대한 차별을 조장할 수 있다는 우려 '원주민'과 '정복자'라는 구분이 사회적 갈등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지적 |
학문적 근거 부족 | '일본 원주민론'을 뒷받침할 만한 충분한 고고학적, 인류학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비판 '원주민'의 존재를 입증할 만한 명확한 증거가 없다는 지적 |
관련 학문 분야 | |
주요 분야 | 역사학 고고학 인류학 언어학 민속학 |
참고 문헌 | |
관련 서적 | 『隠された十字架の国』 (우메하라 다케시) 『日本の原像』 (오리구치 시노부) 『古代を考える』 시리즈 (角川書店) |
관련 항목 | |
관련 주제 | 선주민족 아이누 민족 류큐 민족 조몬 시대 야요이 시대 기마민족 정복왕조설 단일민족 신화 |
논쟁 및 쟁점 | |
역사적 해석 | 일본 민족의 기원과 형성에 대한 다양한 해석 존재 기마민족 정복왕조설 등 다양한 학설 존재 |
민족주의적 관점 | '원주민'과 '정복자'라는 이분법적 구도가 민족주의적 감정을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 역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시도에 대한 경계 필요 |
학문적 엄밀성 | 주장의 근거가 되는 자료의 신뢰성과 해석의 객관성에 대한 비판적 검토 필요 다양한 학문 분야의 연구 결과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함 |
2. 야기리 사관 (八切史観)
야기리 도메오(八切止夫)는 지금까지의 역사 상식을 뒤엎는 다양한 설을 주장했는데, "일본 원주민론"도 그 중 하나였다.[1] 야기리 사관에서 "원주민"은 긴 역사를 통해 황통과 연결되며, 황실이 원주민 통합의 상징이라고 보았다. 야기리는 좌익 사상을 가진 인물은 아니었다.[2][3]
2. 1. 일본 원주민론
야마토 왕조는 외래 정권이며, 그 이전에 존재했던 선주 민족의 후예가 부락민과 산카라는 주장이었다.[1] 야기리 사관에서는 이러한 "원주민"은 긴 역사를 통해 황통의 어느 하나와 연결되어 있으며, 황실이야말로 원주민 통합의 상징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야기리 본인은 좌익 사상의 소유자는 아니었다.[2][3]2. 2. 황실과의 관계
야기리 도메오는 "일본 원주민론"을 통해 야마토 왕조는 외래 정권이며, 그 이전에 존재했던 선주 민족의 후예가 부락민과 산카라고 주장했다.[1]하지만 야기리 사관에서 "원주민"은 긴 역사를 통해 황통(皇統)과 연결되며, 황실이야말로 원주민 통합의 상징이라고 보았다. 야기리 자신은 좌익 사상을 가진 인물은 아니었다.[2][3]
3. 신좌익 사관 (新左翼史観)
야기리의 일본원주민론은 일본 신좌익에 의해 그들의 이념에 맞게 변형되어 이용되었다. 신좌익은 "일본 선주민의 복권"을 주장하며 독자적인 사관을 확립했다. 이들은 "야마토 조정에 멸망당한 환상의 지방 정권"을 칭송하여 "천황제의 상대화"를 꾀했다. 이러한 사관은 일부 신좌익 활동가들의 반일 테러 사건을 유발하기도 했다. 또한, 이들은 고사기·일본서기 이전의 역사를 전한다고 알려진 고사고전에 관심을 가졌다.[4]
3. 1. 우메우치 츠네오와 적군파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 간부 우메우치 츠네오는 야기리 사관에 영향을 받아 잠복 중에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로부터 일제 타도를 지향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를 발표했다. 여기서 처음으로 "일제 타도"의 근거를 "메이지 이후의 대일본 제국의 악행"에서 "일본 건국 시 원주민 박해"로 크게 전환하였다. 궁민 혁명론을 주장한 오타 료도 야기리를 "진정한 인민적 역사학자"라고 극찬했다.[4]3. 2. 오타 류와 궁민 혁명론
오타 류는 궁민 혁명론을 주장하며 야기리를 "진정한 인민적 역사학자"라고 칭송했으며, 이는 일본 신좌익 사관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4]3. 3. 반일 테러와 고사고전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 간부 우메우치 츠네오는 팔절의 일본 원주민론에 영향을 받아,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로부터 일제 타도를 지향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를 발표했다. 이를 통해 ‘일제 타도’의 근거가 ‘메이지 이후 대일본 제국의 악행’에서 ‘일본 건국 시 원주민 박해’로 크게 바뀌었다. 궁민 혁명론을 주장한 오타 료는 팔절을 "진정한 인민적 역사학자"라고 칭찬했다.[4]신좌익 활동가들은 "일본 선주민의 복권"을 내세우는 독자적인 사관을 확립해 갔다. 그 특징은 "야마토 조정에 멸망당한 환상의 지방 정권"을 칭송함으로써 "천황제의 상대화"를 꾀하는 것이었다. 이 사관에 영향을 받은 가토 사부로 등 신좌익 활동가들에 의한 반일 테러 사건도 발생했다. 이들은 ‘고사기·일본서기 이전의 역사를 전한다’고 여겨지는 고사고전에 관심을 가졌다.[4]
위서에 심취한 신좌익 활동가들은 1980년대 오컬트 붐을 일으키는 데 한몫했다. 하라다 미노루는 옴진리교도 이러한 풍조로 두각을 나타낸 일종의 위서 운동이며, 국가 전복까지 꾀한 배경에는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영향을 주고 있다고 분석한다.[4]
3. 4. 옴진리교와의 연관성
연구가 하라다 미노루는 옴진리교도 이러한 풍조 속에서 나타난 일종의 위사 운동이며, 그들의 국가 전복 계획에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영향을 주었다고 분석한다.[4]4. 역사 해석의 비교
신좌익 사관은 야기리 사관의 역사 해석을 원용하면서도, 반일 망국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일부 내용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변경했다는 특징이 있다.[4]
신좌익은 "일본 선주민의 복권"을 내걸고 "야마토 조정에 멸망당한 환상의 지방 정권"을 칭양함으로써 천황제를 상대화하려는 독자적인 사관을 확립했다. 이러한 사관은 가토 사부로 등 논섹트·래디컬 활동가들의 반일 테러 사건을 유발하기도 했다. 또한, 고사기·일본서기 이전의 역사를 전한다고 여겨지는 고사고전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일부 신좌익 활동가들은 위사에 심취하여 1980년대 오컬트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4] 하라다 미노루는 옴진리교 역시 이러한 위사 운동의 일종으로, 국가 전복을 꾀한 배경에는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한다.
야기리 사관과 신좌익 사관은 개별적인 역사적 사건에 대한 해석에서는 큰 차이를 보이지 않지만, 신좌익 사관은 야기리류 역사 해석을 반일 망국론을 위한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4. 1. 아이누 민족
야기리 사관에서는 아이누 민족을 태고부터 홋카이도에만 거주하는 민족으로 간주하며[5], "일본 원주민"과는 다르게 취급한다. 그러나 신좌익 사관에서는 아이누 민족도 "일본 원주민"에 포함하며, 아이누 민족을 "노예화"한 "일본의 악행"을 규탄하는 근거로 삼고 있다.4. 2. 황실의 기원
일본 황실은 대륙에서 온 도래인(渡来人) 출신이라는 기마 민족 정복 왕조설이 제기되었으며, 신좌익은 이를 천황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근거로 활용했다.[4]4. 3. 후지와라 씨와 율령제
백강구 전투에서 왜국은 패배하여, 곽무종이 이끄는 당 군의 진주를 허용하게 되었다. 당군은 오아마를 옹립하여 괴뢰 정권을 수립하고, 구 지배층을 일소했는데, 이것이 임신(壬申)의 난이다. "진주군"은 그대로 눌러앉아 "괴뢰 정권"의 지배층으로 군림하게 되었고, 그들은 "공가"라고 자칭했다. 후지와라 씨의 출자는 "당 진주군"의 사령관에 다름 아니다. 후지와라 씨는 이러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그들의 본래의 모국어인 중국어(한문)로 "일본 서기"를 편찬하여 역사를 왜곡했다. 그리고 "종주국" 당의 율령제를 직수입하여, 급속히 중국화를 진행해 갔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애초에 일본 서기는 순수한 한문으로 쓰여 있지 않다", "당군이 일본에 온 흔적이 없다"는 등, 많은 모순이 있으며, 자신들을 정당화하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4]5. 한국의 관점에서의 비판적 고찰
야기리 사관과 신좌익 사관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역사를 왜곡했다는 비판을 받으며, 특히 일제강점기를 경험한 한국인의 관점에서는 더욱 비판적으로 검토될 필요가 있다.[4]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 간부 우메우치 츠네오는 메이지 이후 대일본 제국의 악행뿐 아니라 일본 건국 시 원주민 박해를 주장하며 일제 타도의 근거로 삼았다. 궁민 혁명론을 주장한 오타 료는 야기리를 "진정한 인민적 역사학자"라고 칭찬했다. 신좌익 활동가들은 "일본 선주민의 복권"을 내걸고, 야마토 조정에 멸망당한 환상의 지방 정권을 칭송하며 천황제를 상대화하려는 독자적인 사관을 확립했다.
이러한 사관은 가토 사부로 등 논섹트·래디컬 활동가들의 반일 테러를 유발했고, 고사기·일본서기 이전의 역사를 전한다고 여겨지는 고사고전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일부 신좌익 활동가들은 위사에 빠져 1980년대 오컬트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라다 미노루는 옴진리교가 이러한 풍조 속에서 위사 운동의 일종으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국가 전복 시도 배경에는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영향을 주었다고 분석한다.
5. 1. 역사 왜곡 문제
신좌익 사관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역사를 왜곡했다는 비판을 받는다.[4]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 간부 우메우치 츠네오는 메이지 이후 대일본 제국의 악행 뿐 아니라 일본 건국 시 원주민 박해를 주장하며 일제 타도의 근거로 삼았다. 궁민 혁명론을 주장한 오타 료는 팔절을 "진정한 인민적 역사학자"라고 칭찬했다. 신좌익 활동가들은 "일본 선주민의 복권"을 내걸고, 야마토 조정에 멸망당한 환상의 지방 정권을 칭송하며 천황제를 상대화하려는 독자적인 사관을 확립했다. 이러한 사관은 가토 사부로 등 논섹트·래디컬 활동가들의 반일 테러를 유발했고, 고사기·일본서기 이전의 역사를 전한다고 여겨지는 고사고전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일부 신좌익 활동가들은 위사에 빠져 1980년대 오컬트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라다 미노루는 옴진리교가 이러한 풍조 속에서 위사 운동의 일종으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국가 전복 시도 배경에는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영향을 주었다고 분석한다.5. 2. 민족주의적 관점
우메우치 츠네오를 비롯한 일본의 신좌익은 야스다 요시유키의 일본원주민론에 영향을 받아, '메이지 이후 대일본 제국의 악행'에서 '일본 건국 시 원주민 박해'로 '일제 타도'의 근거를 전환하였다.[4] 오타 료는 야스다를 "진정한 인민적 역사학자"라고 칭찬했다.신좌익 활동가들은 "야마토 조정에 멸망당한 환상의 지방 정권"을 옹호함으로써 "천황제의 상대화"를 추구하는 독자적인 역사관을 확립했다. 이러한 역사관은 가토 사부로 등 논섹트·래디컬 활동가들의 반일 테러 사건을 유발하기도 했다. 또한, 신좌익 활동가들은 고사기·일본서기 이전의 역사를 전한다고 알려진 고사고전에 관심을 가졌다.
일부 신좌익 활동가들은 위사에 심취하여 1980년대 오컬트 붐을 일으키는 데 영향을 주기도 했다.[4] 하라다 미노루에 따르면, 옴진리교 또한 이러한 풍조 속에서 등장한 위서 운동의 일종이며, 국가 전복을 시도한 배경에는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5. 3. 일제강점기와의 연관성
일본의 신좌익은 '일본 원주민론'을 자신들의 이념에 맞게 이용했다.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 간부 우메우치 츠네오는 '일본 원주민론'에 영향을 받아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로부터 일제 타도를 지향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를 발표했다. 여기서 '일제 타도'의 근거를 '메이지 이후 대일본 제국의 악행'에서 '일본 건국 시 원주민 박해'로 옮겨갔다. 궁민 혁명론을 주장한 오타 료는 팔절을 '진정한 인민적 역사학자'라고 칭찬했다.[4]신좌익 활동가들은 '야마토 조정에 멸망당한 환상의 지방 정권'을 내세워 '천황제의 상대화'를 꾀하는 독자적인 사관을 확립했다. 이 사관은 가토 사부로 등 논섹트·래디컬 활동가들의 반일 테러를 유발했고, 고사기·일본서기 이전의 역사를 전한다고 알려진 고사고전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4]
일부 신좌익 활동가들은 위사에 빠져 1980년대 오컬트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라다 미노루에 따르면, 옴진리교도 이러한 풍조 속에서 등장한 위사 운동의 일종이며, 국가 전복을 시도한 배경에는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4]
참조
[1]
문서
[2]
서적
日本原住民史
[3]
문서
[4]
문서
[5]
문서
[6]
서적
日本原住民史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