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이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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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이머우는 중국의 대표적인 영화 감독으로, 1950년 시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문화혁명 시기에 노동자로 일하며 사진술을 익혔고, 베이징 영화학원에서 촬영을 전공했다. 1980년대부터 영화 감독으로 데뷔하여, 《붉은 수수밭》으로 베를린 국제 영화제 금곰상을 수상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후 《홍등》, 《귀주 이야기》, 《인생》 등 사회 현실을 반영한 작품들을 통해 중국 영화의 위상을 높였다. 2000년대 이후에는 《영웅》, 《연인》과 같은 무협 영화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폐막식 총감독을 맡아 화려한 영상미를 선보였다. 장이머우는 공리, 장쯔이 등 세계적인 배우들을 발굴했으며, 5세대 감독을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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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이머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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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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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장이머우 (张诒谋) |
출생일 | 1950년 11월 14일 |
출생지 | 시안 시, 산시 성, 중국 |
국적 | 중국 |
직업 | 영화 감독, 프로듀서, 촬영 기사, 배우 |
가족 | 장웨이머우, 장치머우 |
자녀 | 장모, 장이난, 장이딩, 장이쟈오 |
부모 | 장빙쥔, 장샤오유 |
학력 | 베이징 영화 학원 |
배우자 | |
경력 | |
주요 작품 | 만강홍 연인 절벽위의 스파이 진링의 13소녀 |
알려진 이유 | 중국 "5세대 감독"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명 |
교수 | 베이징 영화 학원 특빙 교수 |
수상 | |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 외국어 영화상 | 1991 홍등 1994 인생 |
베를린 국제 영화제 황금곰상 | 1988 붉은 수수밭 |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은사자상 | 1991 홍등 |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황금사자상 | 1992 귀주 이야기 1999 하나도 적지 않아 |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 | 1994 인생 |
보스턴 영화 비평가 협회상 감독상 | 2004 연인 |
전미국 영화 비평가 협회상 감독상 | 2004 영웅; 연인 |
금계장 | 감독상 1999 하나도 적지 않아 2000 집으로 가는 길 2003 영웅 남우주연상 1988 오래된 우물 |
외부 링크 | |
공식 웹사이트 | 후쿠오카 상 |
2. 영화 감독 데뷔 이전의 삶
장이머우는 영화 감독으로 데뷔하기 전, 다사다난한 삶을 경험했다. 문화대혁명의 여파로 학업을 중단하고 농촌과 공장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예술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고, 독학으로 사진과 영화를 공부하며 꿈을 키웠다.
문화대혁명 이후, 중국 영화계는 새로운 인력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분위기였다. 1982년 베이징 영화 학원 졸업 후, 장이머우는 고향인 시안의 영화 스튜디오에서 카메라맨으로 일하며 장쥔자오 감독의 《하나와 여덟개》, 첸카이거 감독의 《황토지》(1984), 《대열병》(1986) 촬영에 참여했다. 또한 《노정》(1986)에서는 촬영과 주연을 맡아 도쿄 국제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117]
2. 1. 유년 시절 및 문화대혁명
장이머우는 1950년 11월 14일 중국 시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국공 내전 당시 중국 국민당 소속 장교였고, 어머니는 의사였다. 중국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면서 그의 가족은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비판을 받고 베이징에서 멀리 좌천되었다.[116]중학생 시절, 장이머우는 문화대혁명(1965~1969)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그는 홍위병 활동에 참여하고 시골에서 일하기도 했다. 1968년에는 재교육을 위해 샨시 지방의 농장에서 3년간 일했고, 이후 1978년까지 방직 공장에서 7년간 노동자로 일했다.[116]
방직 공장에서 일하는 동안 장이머우는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그리며 예술적 재능을 키웠고, 사진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피를 팔아 5개월 간 돈을 모아 첫 카메라를 구입했다.[116] 문화혁명 이전에 출판된 책들을 보며 필름과 사진을 간이 암실에서 현상하면서 사진술을 독학했고, 그의 사진들은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117]
1971년, 장이머우는 다시 도시로 돌아와 시안 근처 한양(咸陽)의 방직 공장에서 7년간 노동자로 일했다. 이 시기에도 그는 그림을 그리고, 문혁 이전 출판된 영화 관련 서적을 읽으며 사진 미학을 독학했다.[118]
2. 2. 베이징영화학원 입학
마오쩌둥 사망 후 문화혁명이 끝난 1978년, 장이머우는 27세의 나이로 베이징영화학원에 응시했다. 시험에는 합격했지만, 제한 연령보다 5살이나 많아 처음에는 불합격 처리되었다.[118] 장이머우는 학교 결정에 두 번 항의한 후, 문화부 장관에게 직접 40개의 포트폴리오와 함께 문화혁명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들어 예외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118] 두 달 후, 그는 영화학교 입학을 허가받았다.가오카오가 부활하고 베이징영화학원이 신입생을 받기 시작했을 때, 장이머우는 촬영학과 입학 연령 제한인 22세를 넘었고 필요한 학력도 갖추지 못했다.[21] 베이징에 있는 친척들의 도움으로 장이머우는 백학시, 황용유, 화준우(당시 문화부 서기) 등 유명 예술가들과 학과 교수들에게 호소했다. 화준우는 장이머우의 사진 포트폴리오를 황진 문화부장에게 보여주었고, 황진은 장이머우의 재능에 감명받아 학원에 그를 2년간 수료생으로 입학시키라고 지시했다. 2년 후, 장이머우는 정식 학생이 되어 4년 과정을 모두 마쳤다.[22]
2. 3. 영화계 입문
장이머우는 1978년 베이징 영화 학원에 응시하여 영화계에 입문하였다. 처음에는 나이 제한으로 불합격 처리되었지만, 문화부 장관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예외를 인정받았다.[118]문화 대혁명 이후, 중국 영화계는 새로운 인력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분위기였다. 장이머우는 1982년 베이징 영화 학원 졸업 후, 광시 영화 스튜디오에서 촬영 감독으로 일하며 장쥔자오 감독의 《하나와 여덟개》와 첸카이거 감독의 《황토지》(1984), 《대열병》(1986) 제작에 참여했다. 이 영화들은 홍콩 영화제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문화 대혁명 시대의 선전 영화와는 다른 새로운 중국 영화를 세계에 알리는 데 기여했다.[3][23]
1985년, 고향 시안으로 돌아온 장이머우는 우톈밍 감독의 영화 《고갱》(1987)에서 촬영 감독 겸 주연 배우로 참여하여 도쿄 국제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23] 또한, 《노정》(1986)에서는 촬영과 주연을 맡아 도쿄 국제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117]
3. 시기별 영화적 특성과 작품활동
장이머우는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다양한 장르와 스타일의 영화를 선보이며 중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영화는 시기별로 뚜렷한 특징을 보이며, 중국 사회의 변화와 함께 발전해왔다.
초기에는 《붉은 수수밭》, 《국두》, 《홍등》 등 이른바 '붉은 3부작'을 통해 강렬한 색채와 미장센을 선보이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 시기 영화들은 중국의 전통적인 삶의 방식과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그려냈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책상 서랍 속의 동화》, 《집으로 가는 길》, 《행복한 날들》과 같이 소박하고 따뜻한 영화들을 통해 현대 중국 사회의 변화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특히, 《일점만》과 《귀향》은 비전문 배우 기용과 로케이션 촬영 등 신사실주의적 기법을 활용하여 현실감을 높였다.
2000년대 이후에는 《영웅》, 《연인》, 《황후화》 등 무협 영화를 통해 화려한 영상미와 스펙터클한 액션을 선보이며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시기 영화들은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소재로 하여 웅장한 스케일과 시각적인 즐거움을 제공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최근에는 《진링십삼채》, 《5일의 마중》, 《섀도우》, 《원 세컨드》, 《절벽 위의 스파이》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통해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2008년 하계 올림픽 개·폐막식, 2022년 동계 올림픽 개·폐막식 등 올림픽 개·폐막식 총감독을 맡는 등 영화 외적인 활동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장이머우는 초기작부터 현재까지 다양한 스타일의 변화를 보여주었다. 초기에는 특정 색상을 강조하는 색채 구성이 두드러졌고, 《추국지사》나 《인생》에서는 사실주의에 기반한 이야기를 전개했다. 2000년대 이후로는 와이어 액션과 특수 효과를 다용한 무협 영화도 제작하고 있다.
초기 작품에서는 공리를 자주 기용했으며, 《귀향》에서는 장쯔이를 데뷔시켰다. 장이머우 영화를 통해 데뷔한 배우들은 "무녀랑(謀女郎)"이라고 불린다.
3. 1. 초기 (1980년대 ~ 1990년대 초)
장이머우는 1988년 영화 《붉은 수수밭》으로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금곰상을 받으며 국내외의 주목을 받았다.[26] 이후, 《국두》(1990)와 《홍등》(1991)을 연이어 발표하며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중국 민중의 이야기를 스크린에 담았다. 《국두》와 《홍등》은 모두 그 해 아카데미 시상식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올랐다.[28] 이 세 작품들은 민중의 삶에 초점을 맞추어 중국 봉건사회의 잔재를 비판하면서도 색채의 대비와 조화를 중요시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장이머우는 서구 영화계를 중심으로 강렬한 색채미학을 바탕으로 중국적이면서도 상업영화와 예술영화의 경계를 허물었다는 평단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1992년 작품 《귀주이야기》는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31] 이 영화는 현대 중국인의 삶을 사실적이고 섬세하게 묘사하며, 다큐멘터리 형식을 차용하여 주인공인 시골 아낙네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잔잔하게 풀어간다. 장이머우는 《귀주이야기》를 통해 중국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중국 평단의 인정도 받게 되었다.
1994년 영화 《인생》은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32][33] 이 영화는 인형극과 중국의 역사, 그리고 주인공의 일생을 통시적 관점에서 보여준다.
장이머우 감독의 초기작들은 현재와의 연관성을 두고 논쟁거리가 되어 왔다. 초기 3부작(《붉은 수수밭》, 《국두》, 《홍등》)은 외국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중국 정부의 검열로 인해 《국두》와 《홍등》은 중국에서 바로 개봉하지 못했다. 《인생》은 아직도 중국 내에서 상영이 금지되어 있다.
1995년 작품 《트라이어드》는 1930년대 상하이를 배경으로 한 장이머우식 느와르 영화이며, 칸 영화제에서 기술공헌상을 받았다.
1989년에는 정치 스릴러 장르의 소규모 실험작인 《코드네임 쿠거(퓨마 액션)》가 개봉되었는데, 공리와 게유가 출연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했고, 장이머우는 나중에 이 영화를 자신의 최악의 작품으로 꼽았다.[27]
1997년에는 현대 중국 생활을 다룬 블랙 코미디 영화 《일촉즉발》이 개봉되었다.
1999년 영화 《일점만》에서는 비전문 배우들을 기용하고 로케이션 촬영을 하는 신사실주의 방식으로 돌아왔다.[36][37][38] 이 작품으로 장이머우는 베니스에서 두 번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39]
《일점만》 직후 촬영된 1999년 영화 《귀향》에는 신예 여배우 장쯔이가 데뷔작으로 주연을 맡았다.
3. 2. 중기 (1990년대 중반 ~ 후반)
장이머우의 작품 세계는 1990년대 중반 이후 초기의 작품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초기작들은 비판적인 색채가 강했지만, 《책상 서랍속의 동화》, 《집으로 가는 길》, 《행복한 날들》은 일상적이고 소박한 경향을 보였다. 초기작들처럼 과거 봉건사회를 비판하거나 사회주의적 윤리규범에 어긋나는 소재보다는 현대 중국의 일상과 고민들을 감성적으로 풀어냈다.[119]《책상 서랍속의 동화》(1998)는 시골 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사건을 다룬 영화로,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집으로 가는 길》(1999)은 도시에서 온 선생님을 기다리는 시골 처녀의 순수함과 기다림을 감성적인 영상과 함께 그려냈으며, 장쯔이의 데뷔작이다. 이 영화는 베를린영화제에서 은곰상과 선댄스영화제에서 관객상을 받았다. 《행복한 날들》(2000)은 맹인 소녀와 나이든 노총각 사이의 사회적 약자들의 이야기를 따뜻하고 유쾌하게 풀어냈다.[119]
이 시기의 작품들은 1990년대 중국이 자본주의를 수용하면서 사회주의적인 가치와 충돌이 일어났던 개혁개방 시기 중국 사회의 고민을 담고 있다. 《키프 쿨》(1997)은 현대 중국 도시사회의 서구화된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자본주의 유입과 급속한 산업화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119]
1995년에는 공리가 장이머우 감독과 함께한 일곱 번째 영화인 《상하이 트라이어드》가 개봉되었다. 두 사람은 연애 관계를 맺었지만, 《상하이 트라이어드》 제작 중에 관계가 끝났다.[35] 장이머우와 공리는 2006년 영화 《황금갑(黃金甲)》에서 다시 함께 작업하기 전까지 협업하지 않았다.
1997년에는 현대 중국 생활을 다룬 블랙 코미디 영화 《일촉즉발》이 개봉되었다. 《일촉즉발》은 《구주(秋菊) 이야기》 이후 장이머우가 현대를 배경으로 한 두 번째 영화였다. 《구주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장이머우는 1999년 영화 《일점만》에서 비전문 배우들을 기용하고 로케이션 촬영을 하는 신사실주의(neorealism) 방식으로 돌아왔다.[36][37][38] 이 작품으로 베니스에서 두 번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39] 《일점만》 직후 촬영된 장이머우의 1999년 영화 《귀향》에는 장쯔이가 데뷔작으로 주연을 맡았다. 이 영화는 화자의 부모 사이의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단순한 회상적인 이야기에 기반을 두고 있다.
3. 3. 후기 (2000년대 초반 ~ 현재)
2000년대 이후, 장이머우는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민중의 삶을 그리는 것보다 먼 과거의 중국 왕조 시대로 카메라의 초점을 바꾸었다. 그리고 영상에 있어 과거와는 매우 차별화되는 스타일의 변화가 생겼다. 과거 중국 왕조 시대를 배경으로 무협적인 요소를 도입하여 할리우드와 같은 스펙터클한 장면들을 연출하고 영상미를 극대화하였다. 2002년 《영웅》은 이러한 경향을 잘 나타내는 작품으로 전국시대 말, 진시황 시대를 배경으로 진시황을 암살하려고 하는 협객들의 이야기이다. 《영웅》은 중국과 해외에서 상업영화로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였고, 2003년 아카데미 수상을 하였다.뒤이어 《연인(2004)과 《황후화》(2006)에서도 과거 중국 왕조를 배경으로 색채중심의 화려한 영상미를 선보였다.
이 시기의 작품은 영상미학적인 측면에서는 전작들과 비교하여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지만,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소시민의 일상에 초점을 맞추어 영상을 담아내던 과거와는 다르게 국가권력을 옹호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는 색감과 미장센 연출에 특출나다. 특히 화려한 중국적인 색채(붉은색, 황금빛)를 가장 잘 살리는 감독으로 손꼽힌다. 그런 탓에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개막식, 폐막식의 총감독을 맡았다. 당시 개폐막식 영상을 보면 그야말로 아낌없는 물량과 사람 공세로 압도적인 스케일을 자랑한다. 개막식에서 가장 공을 들인 '공자의 3천 제자들' 파트는 하이라이트이자 압권인 부분. 또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 폐막식에서 차기 개최국인 중국의 공연 총감독을 맡았다.
장예모는 2004년 하계 올림픽(그리스 아테네)와 2018년 동계 올림픽(대한민국 평창)과 같이 두 번의 올림픽 폐막식 중 베이징에서 열린 부분을 연출하도록 선정되었다. 그는 공동 연출가이자 안무가인 장지강과 함께 개막식과 폐막식을 연출했다.[57] 또한 2022년 동계 올림픽과 2022년 동계 패럴림픽의 개·폐막식도 연출했다.[58]
2008년 타임지 올해의 인물 후보에 올랐다.[59]
2009년에는 코엔 형제의 《블러드 심플》(1984년)을 시대극으로 리메이크한 《여인과 총과 황야의 면옥》을, 2010년에는 문화대혁명을 소재로 한 세 번째 영화 《산사나무 아래》를 감독했다.
2011년, 중국 영화 사상 최고액인 6억위안(780억원)의 제작비를 투입하여 난징 대학살을 그린 《진링십삼채》를 발표했다. 같은 해 중국 연간 1위인 약 71억원의 흥행 수입을 기록했고,[99] 중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100] 이 작품은 골든 글로브상 외국어영화상에 노미네이트되었고,[101] 아카데미상 외국어영화상 후보로도 선정되었지만,[102] 수상 가능성이 거론되던 중 주연 배우인 크리스찬 베일이 가택 연금 상태에 있는 천광청을 방문하려다 중국 당국과 마찰을 빚으면서 무산되었다.[103]
2013년, 장이머우가 일가정 정책에 위반하여 7명의 자녀를 두었다는 이유로 당국이 조사에 착수했고,[106] 장이머우의 사무실은 아내와 사이에 3명의 자녀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당국의 조사에 협조할 것을 표명했다.[107] 2014년, 장쑤성 우시시의 계획생육국으로부터 사회 부양비로 7487854CNY(약 13억원)의 지불을 명령받았다.[108] 같은 해, 문화대혁명을 소재로 한 네 번째 영화 《5일의 마중》을 감독했다. 2016년, 항저우에서 열린 제11회 G20 정상회의 연출을 감독했다.[109] 같은 해, 할리우드 스타 맷 데이먼을 주연으로 한 중미 합작 판타지 사극 액션 영화 《그레이트 월》을 감독했다.
2018년, 대한민국의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 폐막식에서 2022년 베이징 동계 올림픽으로의 인계식 총연출을 맡았다.[110] 같은 해, 가공의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그림자 무사를 주인공으로 한 대작 사극 《섀도우》를 감독했다. 2020년에는 문화대혁명을 소재로 한 다섯 번째 영화 《원 세컨드》를, 2021년에는 1930년대 만주국을 배경으로 한 서스펜스 영화 《절벽 위의 스파이》를 감독했다.
2022년 동계 올림픽 개·폐막식, 패럴림픽 개·폐막식 총감독을 맡아 호평을 받았다.[111] 2023년 도쿄국제영화제에서 특별 공로상을 수상했다.[112] 2024년 아시아 필름 어워드에서 평생공로상을 수상했다.[113]
4. 영화 외 작품과 베이징 올림픽
장이머우는 영화뿐만 아니라 공연과 무대예술에도 관심을 가졌다. 1998년에는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를 기획, 감독하였으며, 야외공연으로 화제가 되었다.[120] 2002년에는 영화 《홍등》을 발레극으로 각색하여 경극과 그림자극, 전통의상 치파오 등 중국적 색채를 입혀 연출하였다.[121] 2003년에는 구이린 지방의 이강(Li river) 위에 무대를 설치하여 인상유삼제 공연을 기획하였는데, 이는 세계 최대 규모의 수상공연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러한 공연무대 예술 경험과 성공은 장이머우가 2008년 베이징하계올림픽 개폐막식 총감독을 맡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베이징하계올림픽 개폐막식 총감독 선정은 큰 화제가 되었으며, 장이머우의 연출 아래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은 역사상 최대 규모인 10만여 명의 인원과 1조원이 투입되어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이로 인해 장이머우는 2008년 타임지가 선정하는 100인에 포함되기도 하였다.[122] 2018년 2월 25일에는 평창올림픽 폐막식에서 8분짜리 공연을 연출하였다.[123]
5. 5세대 감독
장이머우는 중국의 5세대 감독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이다. 문화대혁명 이후 베이징영화전문학교에서 영화를 공부한 이들을 5세대 감독이라고 부르는데, 천카이거, 장이머우, 톈좡좡 등이 대표적이다.[114] 이들은 중국 개혁개방 시기에 영화를 배우며 새로운 사상과 예술 기법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5세대 감독들은 1985년 첸 카이거의 영화 《황토지》가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것을 시작으로, 장이머우의 《붉은 수수밭》이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하는 등 여러 국제영화제를 석권했다. 이들의 영화는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농촌과 민중을 역사적 사실과 연관시켜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작가주의적 경향을 보였으며, 내러티브보다는 빛과 색채, 몽타주 등의 시각 효과를 부각하며 새로운 영상 언어와 영상 미학을 추구했다.[115]
한편, 장이머우는 여러 차례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며 7명의 자녀를 낳았으나 신고하지 않았다. 이 사실은 계획생육정책을 시행하던 중국에서 폭로되어 비판 여론이 높아졌고, 결국 748만 위안(약 12억원)의 벌금을 물었다. 장이머우는 《붉은 수수밭》, 《홍등》 등 초기 영화에서 당시 중국의 가부장제와 여성 차별, 축첩으로 인해 여성들의 삶이 파국으로 치닫는 모습을 비판적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6. 장이머우가 발굴한 세계적인 배우들
- 공리는 장이머우에게 캐스팅되어 《붉은 수수밭》으로 데뷔하여 《트라이어드》에 이르기까지 초기 장이머우 감독의 작품에 모두 참여하였다. 가장 최근 출연작은 《5일의 마중》이다. 초기작들에서 장이머우의 페르소나로 작품과 함께 세계적인 배우로 성장하였다. 공리는 장이머우의 영화 《구주(秋菊) 이야기》,《인생》,《상하이 트라이어드》등에 출연하며 지속적으로 주연을 맡았다.[64][65]
- 장쯔이는 장이머우가 발굴해 낸 배우로, 《집으로 가는 길》을 통해 영화에 데뷔하였다. 《집으로 가는 길》로 주목을 받은 장쯔이는 세계적인 배우로 성장하게 되고 뒤이어 《영웅》과 《연인》에도 출연한다.[64][65]
- 그 외에도 장이머우 영화로 데뷔한 둥지에, 저우동위, 니니, 류하오춘 등을 포함하여 이들은 "무녀랑(謀女郎, 모우 걸즈)"이라고 불린다.
7. 작품 목록
장이머우는 다양한 영화를 감독했는데, 초기에는 주로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다룬 작품을 만들었다. 대표작으로는 붉은 수수밭(1987), 국두(1990), 홍등(1991) 등이 있으며, 이 영화들은 국제 영화제에서 큰 상을 받으며 장이머우를 세계적인 감독 반열에 올려놓았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귀주 이야기(1992), 인생(1994)처럼 사실주의에 기반한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또한 책상 서랍 속의 동화(1999), 집으로 가는 길(1999), 행복한 날들(2000)과 같이 현대 중국 사회의 모습을 담은 영화도 제작했다.
2000년대에는 영웅(2002), 연인(2004) 등 와이어 액션과 특수 효과를 활용한 무협 영화를 선보였다. 또한 황후화(2006)와 같은 대규모 역사극도 연출했다.
최근에는 진링의 13소녀(2011), 5일의 마중(2014), 그레이트 월(2016), 삼국: 무영자(2018)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만들고 있다.
장이머우는 영화감독뿐만 아니라 촬영감독, 배우, 제작자로도 활동했다. 황토지(1984), 대열병(1986) 등의 영화에서 촬영을 담당했고, 고정(1986)에서는 주연 배우로 출연하여 도쿄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7. 1. 감독
연도 | 한국어 제목 | 중국어 제목 | 비고 |
---|---|---|---|
1987년 | 붉은 수수밭 | 红高粱 | 베를린 국제 영화제 황금곰상 |
1988년 | 대호미주표 | 代号美洲豹 | 공동 감독 |
1990년 | 국두 | 菊豆 | |
1991년 | 홍등 | 大红灯笼高高挂 |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은사자상 |
1992년 | 귀주 이야기 | 秋菊打官司 |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황금사자상 |
1994년 | 인생 | 活着 | 칸 영화제 심사위원그랑프리 |
1995년 | 트라이어드 | 摇啊摇,摇到外婆桥 | |
1995년 | 장이머우 | 옴니버스 영화 《뤼미에르와 친구들》 수록 | |
1997년 | 키프 쿨 | 有話好好說 | |
1999년 | 책상 서랍 속의 동화 | 一个都不能少 |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황금사자상 |
1999년 | 집으로 가는 길 | 我的父亲母亲 | 베를린 국제 영화제 심사위원그랑프리 |
2000년 | 행복한 날들 | 幸福時光 | |
2002년 | 영웅 | 英雄 | |
2004년 | 연인 | 十面埋伏 | |
2005년 | 천리주단기 | 千里走单骑 | |
2006년 | 황후화 | 满城尽带黄金甲 | |
2007년 | 《영화 보는 날》 | 看電影 | 옴니버스 영화 《그들 각자의 영화관》 수록 |
2009년 | 삼창박안경기 | 三枪拍案惊奇 | |
2010년 | 산사나무 아래 | 山楂树之恋 | |
2011년 | 진링의 13소녀 | 金陵十三钗 | |
2014년 | 5일의 마중 | 归来 | |
2016년 | 더 그레이트 월 | 長城 | |
2018년 | 삼국: 무영자 | 影 |
1987년 장이머우는 붉은 수수밭으로 감독 데뷔했다. 이 영화는 공리가 주연을 맡았으며,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하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26]
1989년에는 공리와 게유가 출연한 정치 스릴러 코드네임 쿠거를 공동 감독했으나, 평가는 좋지 않았다.[27] 같은 해, 장이머우는 리바오톈과 공리 주연의 주두 제작에 착수,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오르며 호평을 받았다.[28] 1989년에는 제16회 모스크바 국제영화제 심사위원을 맡았다.[29]
수퉁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홍등(1991)은 공리 주연으로, 1920년대 부유한 집안의 삶을 묘사하며 국제적인 찬사를 받았다. 제64회 아카데미 시상식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올랐으나, 메디테라네오에 밀려 수상에는 실패했다.[30]
1992년 공리 주연의 귀주 이야기는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31]
유화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인생(1994)은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하고 게유는 남우주연상을 받았다.[32][33] 중국에서는 공식적으로 금지되었지만 극장에서 상영되었다.[34]
1995년 상하이 트라이어드는 공리와의 일곱 번째 협업 작품이었으며, 이 영화를 끝으로 둘의 연인 관계도 끝났다.[35] 이후 2006년 황후화에서 다시 협업했다.
1997년 키프 쿨은 현대를 배경으로 한 블랙 코미디 영화였다. 1999년 책상 서랍 속의 동화는 비전문 배우들을 기용하고 로케이션 촬영을 하는 신사실주의 방식으로 제작되어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36][37][38][39] 같은 해 장쯔이 주연의 집으로 가는 길을 제작했다.
2000년 행복한 날들은 모옌의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으며, 조본산과 동결이 주연을 맡았다.[40]
2002년 영웅은 이연걸, 장만옥, 양조위, 장쯔이, 견자단 등 아시아 스타들이 출연한 무협 드라마로, 진시황과 암살자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미라마크스 필름을 통해 북미에서 개봉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제75회 아카데미 시상식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올랐다.[41]
2004년 연인은 장쯔이, 유덕화, 가네시로 다케시 주연의 무술 서사시로, 당나라를 배경으로 한 삼각관계를 다루었다.[42]
2005년 천리주단기는 다카쿠라 켄 주연으로, 아들과의 관계 회복을 원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다룬다.[44]
2006년 황후화는 공리, 주걸륜, 주윤발 주연으로, 차오위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 시대극이다.[45]
장이머우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연출로 피바디상을 수상했다.[47] 2010년 예일 대학교에서 명예 미술 박사 학위를 받았다.[48]
2011년 진링의 13소녀는 제작비 9020만달러로 당시 그의 가장 비싼 영화였다.[49] 2016년 장성이 1.5억달러로 그 기록을 경신했다.[50] 2018년 삼국: 무영자는 제55회 금마장 시상식에서 최우수 감독상을 포함한 4개 부문을 수상했다.[51][52]
7. 2. 촬영
장이머우는 1982년 베이징영화학원을 졸업하고 시안영화제작소에 배속되어 장예모 감독의 황토지(1984년)와 대열병(1986년)에서 촬영감독을 맡았다. 1986년에는 우티엔밍(吳天明) 감독의 고정(1986년)에 주연으로 출연하여 제2회 도쿄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89]연도 | 작품명 | 역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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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 일인과 팔인 一個和八個 | 촬영 |
1984년 | 황색의 대지 黄土地 | 촬영 |
1986년 | 대열병 大閲兵 | 촬영 |
1986년 | 고정 老井 | 촬영·출연 |
7. 3. 출연
연도 | 한국어 제목 | 중국어 제목 | 역할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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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 오래된 우물 | 손왕권(孫旺泉) | 황금닭상 남우주연상 수상 | |
1987 | 붉은 수수밭 | |||
1989 | 진시황릉과의 싸움과 사랑 | 톈펑(田 Fong) | ||
1997 | 침착해 | 잡동사니 장수 | ||
2001 | 대저택의 문 | 리렴영 | ||
2021 | 나의 조국, 나의 부모 | 텔레비전 사장 | 광고맨(AD MAN) (세그먼트 3) 카메오 출연 |
8. 수상 목록
『LOV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