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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전농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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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화전 농업은 숲이나 초지를 태워 토지를 개간하고 작물을 재배하는 농업 방식으로, 세계 여러 지역에서 역사적으로 행해져 왔다. 신석기 혁명 이후 널리 사용되었으며, 한국에서는 고려 시대에 제도적으로 인정되었다. 화전은 토지 비옥도 저하로 인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유목적인 형태였으나, 점차 정착하여 정주 화전으로 변화했다. 1898년 대한제국은 화전에 대한 정리를 시도했고, 일제강점기에는 과세 대상이 되었다. 1960년대 후반 '화전정리법' 공포로 한국의 화전 농업은 종결되었다. 화전 농업은 토양을 비옥하게 하고 잡초 방제에 효과적이지만, 환경 부담이 크고 생산성이 낮다는 단점이 있다. 현대에는 화전 농업의 대안으로 집약적인 농업 방식, 새로운 기술 도입 등이 모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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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전농업
지도 정보
개요
유형이동 농업의 한 형태
다른 이름화전
조옴 (Jhum)
채경농업
소경농업
윤작농업
절단 및 연소 농업
스와든 농업
화경농업
아사르팅
설명숲이나 관목지를 베어내고 태운 후 그 재를 비료로 사용하여 농작물을 경작하는 농업 방식
특징토양 비옥도가 빠르게 감소하여 주기적으로 경작지를 이동해야 함
방법
절단나무와 관목을 베어내고 건조시킴
소각건조된 식생을 불태워 재를 생성
경작재를 비료로 사용하여 작물을 심음
이동토양 비옥도가 떨어지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농경지를 조성
역사
기원신석기 시대부터 시작된 고대 농업 방식
사용 지역열대 지역
아열대 지역
아마존 열대 우림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인도
장점
초기 비옥도태운 재가 비료 역할을 하여 초기에는 높은 생산량 가능
간편함복잡한 농업 기술이나 도구가 필요하지 않음
단점
토양 침식숲을 제거하고 불태우는 과정에서 토양 침식 발생
삼림 파괴지속적인 숲 파괴로 인해 생태계 파괴 및 생물 다양성 감소
대기 오염연소 과정에서 대기 오염 물질 배출
온실가스 증가삼림 파괴 및 연소로 인해 온실가스 배출량 증가
비옥도 감소반복적인 경작으로 인해 토양 비옥도가 감소하고 생산성 저하
환경 영향
토양토양 유기물 감소
영양분 감소
토양 미생물 군집 변화
삼림삼림 파괴 및 서식지 파괴
기후온실 가스 배출 증가
생물 다양성종 감소 및 생태계 변화
헤이즈연소로 인한 헤이즈 발생
현대적 논의
지속 가능성지속 가능한 농업 방식으로의 전환 필요성 증가
대안혼농임업
윤작
지속 가능한 토지 관리 기술
법적 규제일부 지역에서는 산림 파괴를 막기 위해 화전 농업 금지
브라질 정부의 아마존 열대우림 야화 금지
기타 정보
주요 용어야화
개간
이동 농업
벌목
농경지
참고 자료브리태니커 백과사전 - 화전 농업

2. 역사

화전 농업은 신석기 혁명 이후 수렵 채집인들이 정착하여 농경을 시작하면서 널리 사용된 방식이다. 특히 숲이 우거진 지역에서는 농경을 위해 토지를 개간하는 주요 수단이었다.[10]

일본에서는 조몬 시대 중기·후기부터 농경이 존재했으며, 메밀, 보리, 녹두 등의 재배종이 발견되었다.[41] 미야모토 츠네이치는 화전과 산불 후의 산나물 채취에서 진화한 농법으로 추정했다. 고대에는 키나이 주변에서도 화전이 행해졌으며, 중세근세에는 논 경작이 어려운 산간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근세 이전에는 산중을 이동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시대가 흐르면서 정착하여 화전을 중심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마을이 증가했다. 에도 시대 중후기에는 징세 강화, 산불 등의 이유로 화전이 금지되거나 제한되었다. 1899년(메이지 32년) 일본의 국유림 시업안의 영향으로 화전을 경영하는 가구 수가 급감했다. 동북 지방에서는 예로부터 화전을 주요 생업으로 하는 마을이 많았으며, 현재도 화전을 이용한 재배가 이루어지고 있다.[43] 일본에서는 기장, 수수, 메밀, , 을 중심으로 보리, 토란, 등을 더한 잡곡 재배형 화전 농업이 일반적이었다. 경작 기간은 3~5년이며, 그 후 조림하여 15~20년간 방치하여 지력을 회복시켰다.

한국의 화전 기원은 명확하지 않다. 고구려 등 북부의 여러 종족이 화전식 농경을 했다고 하며, 발굴된 경작 도구로는 쇠가래가 있다. 또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진흥왕 창녕비(561)에 백전(白田)이라는 글자가 답(畓)이라는 글자와 구별되어 나타나는데, 이 백전을 화전으로 보기도 한다. 함경남도·함경북도 변경의 산간지대에서 생활하는 재가승려(在家僧侶)들의 화전농업이 한국 화전농업의 기원이라는 설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고려시대에는 화전이 제도상으로 인정되었고, 전제(田制)는 불역전, 일역전, 재역전으로 구분되는데, 일역전과 재역전의 경작 방법은 근래의 화전 경작 방법과 비슷하다. 조선시대에는 화전을 제도상으로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과세를 매기기 위해 화전이 있는 지역을 기록한 지명록(地名錄)을 작성하기도 했으나, 화전민의 실제 파악은 어려웠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인구 증가와 토지 부족으로 소작지에서 밀려난 빈농, 무전(無田) 농민들이 화전 개간에 광범위하게 참여하면서 화전민 파악은 더욱 어려워졌다. 본래 화전은 한 해 동안 농사를 지은 후 지력(地力)이 쇠하면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유농(遊農)이었으나, 점차 산간지대에서 쟁기질을 이용한 경작(여경농업, 犁耕農業)과 함께 정착하여 화전농업을 하는 정주화전(定住火田)으로 바뀌었다.

1898년(광무 2) 대한제국은 양전지계사업(量田地契事業)을 통해 화전에 대한 전면 정리를 추진했다. 지질이 척박한 토지를 일역전·재역전으로 등재하여, 이전까지 화전으로 간주되던 토지들을 전답으로 파악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비과세지였다가 1914년 다시 과세 대상이 되어 1일경(一日耕)에 8전(錢)의 세금이 부과되었고, 8·15 해방 후 농지개혁에 따라 비과세지로 바뀌었다.

일제는 과세 및 국유림 보호를 위해 화전 현황을 상세히 조사했다. 화전에는 불대기(부덱이·火德)·화전·산전(山田)의 3가지가 있었다. 불대기는 원시림에 처음 불을 지른 해에 작물을 심는 경작법이며, 화전은 보통의 것으로 불대기도 2년이 지나면 이에 속했다. 산전은 영구 화전화하여 비옥도가 일반 토지와 큰 차이가 없게 된 것이었다. 화전민들은 급경사지에서도 소 두 마리를 사용하는 겨리쟁기[二頭牛犁]로 수평 경운을 했다. 화전의 수확량은 첫 해에는 보통 밭과 거의 같으나, 2년째부터는 현저히 감소하여 3~4년이 지나면 1/5로 격감했다. 1936년 당시 화전 면적은 약 44만 정보였으며, 그중 함경북도평안북도에 각각 12만 정보가 넘었다. 순화전민은 7만 5,000여 호였는데, 강원도와 함경남도가 각각 2만 호를 넘었으며 평안북도도 1만 5,000여 호 정도였다.

산림녹화 및 토양보존의 필요성 때문에 조선시대나 일제강점기에도 화전을 정리하려는 노력이 있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1965년 남한만의 화전농가 호수는 4만 7,000여 호로 집계되었는데, 이중 강원도가 20여 만 명으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1968년 '화전정리법'이 공포되면서 주로 강원도 산간지방에 남아 있던 화전민을 다른 지방에 정착시키기 시작하여 1976년에 화전정리가 종결되었다.

2. 1. 세계의 화전 농업

역사적으로 화전 농업은 세계 여러 지역에서 행해져 왔다. 불은 농업 발명 이전부터 수렵 채집인들이 이미 사용해 왔으며, 현재에도 사용되고 있다. 불로 만들어진 개간지는 사냥감 동물을 위한 새로운 먹이를 제공하고 특정 종류의 식용 식물을 촉진하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만들어졌다.[10]

신석기 혁명 동안, 수렵 채집인 집단들은 다양한 식물과 동물을 가축화하여 정착하여 농업을 경작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수렵 채집보다 헥타르당 더 많은 영양분을 제공했다. 일부 집단들은 강 유역을 따라 있는 넓은 들판에 쉽게 작물을 심을 수 있었지만, 다른 집단들은 땅에 숲이 우거져 있었다. 따라서 신석기 시대 이후로 화전 농업은 농작물과 가축에 적합하도록 토지를 개간하는 데 널리 사용되어 왔다.[10]

숲에서 방랑하는 대규모 집단은 한때 유럽 선사 시대 사회의 일반적인 형태였다. 확대된 가족은 그들의 화전을 태우고 경작했고, 한 가지 이상의 작물을 파종한 다음 다음 구획으로 이동했다.[11]

인도 북동부의 트리푸라주, 아룬차르프라데시주, 메갈라야주, 미조람주, 나갈랜드주와 방글라데시의 랑가마티, 카그라차리, 반다르반, 실렛 지구에 거주하는 부족 집단들은 화전 농업을 포두(podu), 줌(jhum) 또는 줌(jhoom) 경작이라고 부른다. 이 방식은 화재 또는 벌채를 통해 경제적으로 중요한 벼, 채소 또는 과일과 같은 작물을 재배하기 위해 토지를 개간하는 것을 포함한다. 몇 번의 주기 후에 토지의 비옥도가 감소하면 새로운 지역을 선택한다. 줌 경작은 대부분 울창한 숲이 우거진 언덕의 비탈에서 이루어진다. 경작자들은 햇빛이 땅에 도달하도록 나무 꼭대기를 베어내고 나무와 풀을 태워 새로운 토양을 만든다. 이것이 토지를 비옥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여겨지지만, 토양 침식에 취약해질 수 있다.[14] 찹쌀, 옥수수, 가지, 오이와 같은 작물의 씨앗을 심기 위해 구멍을 낸다.[15] 미조람주 정부는 줌 경작의 영향을 고려하여 주에서 이 방식을 종식시키는 정책을 도입했다.

마야 문명과 같은 일부 아메리카 문명들은 고대부터 화전 농업을 이용해 왔다. 미국의 아메리카 원주민들 또한 농업과 사냥에 불을 사용했다.[16] 아마존에서는 야노마미족과 같은 많은 사람들이 아마존의 열악한 토양 품질 때문에 화전 농업에 의존하여 살아간다.[17]

최근에 불탄 지역
핀란드 텔크매키 자연보호구역(Telkkämäki Heritage Farm)의 최근에 불탄 지역. 이는 그 기법을 보여주는 예이다.


화전(slash-and-burn) 기법은 스웨덴 북동부의 농업 시스템에서 사용되었다. 스웨덴에서는 이러한 관행을 svedjebruksv이라고 한다.[18]

벌채된 토지 사진
스웨덴 스몰란드(Småland)의 화전(1904년)


핀란드 카비(Kaavi)에 있는 텔크매키 자연보호구역(Telkkämäki Nature Reserve)은 화전 농업을 보여주는 야외 박물관이다. 농장 방문객들은 15세기부터 핀란드 동부 북부 사보니아(Northern Savonia) 지역에서 화전이 일반적이었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농사를 지었는지 볼 수 있다. 보호구역의 일부 지역은 매년 불에 태운다.[19]

스베드예브룩(Svedjebruksv)은 스웨덴어와 노르웨이어로 사용되는 용어로, 화전 농업을 의미하며 고대 노르드어 단어 sviðanon에서 유래되었다. 이 단어는 "태우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농법은 러시아 노브고로드 지역에서 유래하여 중세 시대에 핀란드와 스웨덴 동부 지역에 널리 퍼졌다. 16세기, 구스타프 1세(Gustav Vasa) 국왕이 핀란드 이주민들의 이주를 장려하여 울창한 숲을 개간하는 것을 돕도록 하면서 스웨덴 서부로 퍼져나갔다. 나중에 핀란드인들이 현지 스웨덴 사람들에게 박해받자, 스베드예브룩 농법은 난민들에 의해 노르웨이 동부, 특히 스웨덴과 국경을 접한 핀스코겐("핀란드 숲")으로 알려진 솔뢰르(Solør) 동부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이 농법은 북아메리카의 뉴 스웨덴(New Sweden)에도 전파되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농업과 사냥에 불을 사용하는 관행과 더불어, 이는 아메리카 개척에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16]

마다가스카르의 건조낙엽수림에 서식하는 여우원숭이는 농지와 목초지 조성을 위한 삼림 벌채로 인해 위협받고 있다.


화전 혹은 화전 농업(slash and burn)은 몇 년 안에 새로 불태운 초목 지역이나 숲에서 인간 소비를 위한 인류와 작물을 재배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 지역이 자연적으로 재생되는 시간보다 짧은 기간이다.

이는 최초의 인류가 수백만 년에 걸쳐 발전시킨 가장 오래된 형태의 식량 생산 방식이다. 이 긴 시간 동안, 화전 농업은 더 큰 집단의 사람들의 조율된 상호 작용을 필요로 하는 복잡한 과정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생활 방식은 500만 년 전 이상 직립원인(Homo erectus)의 선구자들이 초기 발흥을 보였던 아프리카 및/또는 중국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나중에 그들은 100만 년 전 이전에 북유럽을 포함한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현생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유라시아로 온 것은 100만 년 전보다 훨씬 이전이다. 그들은 이미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이었다. 화전 농업은 공동체 형성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가장 작은 단위는 씨족(clan) - 즉, 경작 팀 - 이었으며, 종종 여러 씨족이 서로 협력했다. 관리자 또는 쿠닝가스(Kuningas)는 여러 가지 기능을 수행했다. 그것은 실용적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의미도 지녔다. 경작은 이동성이 있었고, 씨족은 불을 지르고 식량 작물을 재배하기 위해 새로운 숲으로 이동했다. 그들은 거대한 건축물을 건설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테라 프레타(Terra Preta, 숯이 풍부한 토양) 연구에서조차 고고학적으로 추적하기가 어렵습니다. 화전 농업은 현장의 단일 화전에서 중간 정도의 긴 휴경 기간을 두고 반복되는 정착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이 휴식 기간은 필요한 숲의 재생을 위해 필요했다. 산 속 동굴과 다른 자연 정착지에 대한 조사는 자연림의 재생이 그 사이에 있는 여러 문화층을 밝혀냈습니다. 이 지층은 문화적 발전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무작위 순서로 몇몇 장소를 언급하면 터키의 차탈회위크(Catalhöyük), 스페인 북부의 알타미라(Altamira), 이스라엘의 예리코(Jericho), 러시아의 코스텐키 보로네시(Kostenki Voronezh), 오크니 제도의 스카라 브레이(Skara Brae), 그리고 노르웨이 예렌(Jæren)의 비스테홀라(Vistehola) 동굴이다.

오늘날 우리는 정주 생활 속의 풍요로움에 익숙해져 있다. 우리는 화전 농업을 중요한 문화적 조직 없이 단순하고 원시적인 삶의 형태로 간주하는 유럽 전통 속에서 훈련받고 자랐다.

화전 농업에는 널리 "원시적인" 그리고 "자연 발생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많은 특징이 있다. 그들은 소지품을 적게 가지고 다니려는 유목민이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기술과 지식이 무거운 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화전 농업은 오늘날 사회의 기반이다. 우리의 가치관, 관습, 사상, 관례 등이 모두 화전 농업에서 비롯되었다.

열대 우림의 감소는 오늘날 대부분의 화전 농업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가장 오래된 농업 방식은 화전 농업이다. 그것은 오래전부터 스웨덴에 존재했으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모든 분야에 스며든 것으로 보입니다. 적어도 삼림 지역에서는 가장 오래된 경작 시스템이다"

"카렐리아 숲의 귀리, 스웨덴 땅의 호밀, - 밀은 에스토니아로 돌아가고 - 보리는 수오미 들판에서 자라고 - 완두콩은 해메(Häme) 들판에서 자랍니다, - 곡식이 흐르고, - 곡식은 항상 다음에 있습니다"

2. 2. 한국의 화전 농업

신석기 혁명 이후, 수렵 채집인들이 정착하여 농경을 시작하면서 화전 농업은 널리 사용되었다. 특히 숲이 우거진 지역에서는 농경을 위해 토지를 개간하는 주요 수단이었다.[10]

일본에서는 조몬 시대 중기·후기부터 농경이 존재했으며, 메밀, 보리, 녹두 등의 재배종이 발견되었다.[41] 미야모토 츠네이치는 화전과 산불 후의 산나물 채취에서 진화한 농법으로 추정했다.

고대에는 키나이 주변에서도 화전이 행해졌으며, 중세근세에는 논 경작이 어려운 산간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근세 이전에는 산중을 이동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시대가 흐르면서 정착하여 화전을 중심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마을이 증가했다.

에도 시대 중후기에는 징세 강화, 산불 등의 이유로 화전이 금지되거나 제한되었다. 1899년(메이지 32년) 일본의 국유림 시업안의 영향으로 화전을 경영하는 가구 수가 급감했다.[11]

동북 지방에서는 예로부터 화전을 주요 생업으로 하는 마을이 많았으며, 현재도 화전을 이용한 재배가 이루어지고 있다.[43] 일본에서는 기장, 수수, 메밀, , 을 중심으로 보리, 토란, 등을 더한 잡곡 재배형 화전 농업이 일반적이었다. 경작 기간은 3~5년이며, 그 후 조림하여 15~20년간 방치하여 지력을 회복시켰다.

2. 2. 1. 기원

한국 화전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다. 고구려 등 북부의 여러 종족이 화전식 농경을 했다고 하며, 발굴된 경작 도구로는 쇠가래가 있다. 또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진흥왕 창녕비(561)에 백전(白田)이라는 글자가 답(畓)이라는 글자와 구별되어 나타나는데, 이 백전을 화전으로 보기도 한다. 함경남도·함경북도 변경의 산간지대에서 생활하는 재가승려(在家僧侶)들의 화전농업이 한국 화전농업의 기원이라는 설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역사적으로 화전 농업은 세계 여러 지역에서 행해져 왔다. 불은 농업 발명 이전부터 수렵 채집인들이 이미 사용해 왔으며, 현재에도 사용되고 있다. 불로 만들어진 개간지는 사냥감 동물을 위한 새로운 먹이를 제공하고 특정 종류의 식용 식물을 촉진하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만들어졌다.[10]

신석기 혁명 동안, 수렵 채집인 집단들은 다양한 식물과 동물을 가축화하여 정착하여 농업을 경작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수렵 채집보다 헥타르당 더 많은 영양분을 제공했다. 일부 집단들은 강 유역을 따라 있는 넓은 들판에 쉽게 작물을 심을 수 있었지만, 다른 집단들은 땅에 숲이 우거져 있었다. 따라서 신석기 시대 이후로 화전 농업은 농작물과 가축에 적합하도록 토지를 개간하는 데 널리 사용되어 왔다.[10]

숲에서 방랑하는 대규모 집단은 한때 유럽 선사 시대 사회의 일반적인 형태였다. 확대된 가족은 그들의 화전을 태우고 경작했고, 한 가지 이상의 작물을 파종한 다음 다음 구획으로 이동했다.[11]

2. 2. 2. 고려와 조선 시대

고려시대에는 화전이 제도상으로 인정되었고, 전제(田制)는 불역전, 일역전, 재역전으로 구분되는데, 일역전과 재역전의 경작 방법은 근래의 화전 경작 방법과 비슷하다. 조선시대에는 화전을 제도상으로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과세를 매기기 위해 화전이 있는 지역을 기록한 지명록(地名錄)을 작성하기도 했으나, 화전민의 실제 파악은 어려웠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인구 증가와 토지 부족으로 소작지에서 밀려난 빈농, 무전(無田) 농민들이 화전 개간에 광범위하게 참여하면서 화전민 파악은 더욱 어려워졌다. 본래 화전은 한 해 동안 농사를 지은 후 지력(地力)이 쇠하면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유농(遊農)이었으나, 점차 산간지대에서 쟁기질을 이용한 경작(여경농업, 犁耕農業)과 함께 정착하여 화전농업을 하는 정주화전(定住火田)으로 바뀌었다.

2. 2. 3.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1898년(광무 2) 대한제국은 양전지계사업(量田地契事業)을 통해 화전에 대한 전면 정리를 추진했다. 지질이 척박한 토지를 일역전·재역전으로 등재하여, 이전까지 화전으로 간주되던 토지들을 전답으로 파악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비과세지였다가 1914년 다시 과세 대상이 되어 1일경(一日耕)에 8전(錢)의 세금이 부과되었고, 8·15 해방 후 농지개혁에 따라 비과세지로 바뀌었다.

일제는 과세 및 국유림 보호를 위해 화전 현황을 상세히 조사했다. 조사에 따르면 화전에는 불대기(부덱이·火德)·화전·산전(山田)의 3가지가 있었다. 불대기는 원시림에 처음 불을 지른 해에 작물을 심는 경작법이며, 화전은 보통의 것으로 불대기도 2년이 지나면 이에 속했다. 산전은 영구 화전화하여 비옥도가 일반 토지와 큰 차이가 없게 된 것이었다. 화전민들은 급경사지에서도 소 두 마리를 사용하는 겨리쟁기[二頭牛犁]로 수평 경운을 했다.

화전의 수확량은 첫 해에는 보통 밭과 거의 같으나, 2년째부터는 현저히 감소하여 3~4년이 지나면 1/5로 격감했다. 1936년 당시 화전 면적은 약 44만 정보였으며, 그중 함경북도평안북도에 각각 12만 정보가 넘었다. 순화전민은 7만 5,000여 호였는데, 강원도함경남도가 각각 2만 호를 넘었으며 평안북도도 1만 5,000여 호 정도였다.

2. 2. 4. 해방 이후

1898년(광무 2) 대한제국은 양전지계사업을 통해 화전을 전면 정리했다. 척박한 토지를 일역전·재역전으로 구분하여 화전으로 간주되던 토지를 전답으로 파악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비과세지였다가 1914년 다시 과세 대상이 되어 1일경(一日耕)에 8전(錢)의 세금이 부과되었고, 8·15 해방 후 농지개혁에 따라 비과세지로 바뀌었다.

일제는 과세 및 국유림 보호를 위해 화전을 조사했다. 화전에는 불대기(부덱이·火德), 화전, 산전(山田)의 3가지가 있었다. 불대기는 원시림에 처음 불을 지른 해에 작물을 심는 경작법이며, 화전은 보통의 것으로 불대기도 2년이 지나면 이에 속했다. 산전은 영구 화전화한 결과 비옥도가 일반 토지와 크게 차이가 없게 된 것이었다. 화전민들은 급경사지에서도 소 두 마리를 사용하는 겨리쟁기[二頭牛犁]로 수평 경운을 했다. 화전의 수확량은 첫 해에는 보통 밭과 거의 같으나 2년째부터는 현저히 감소하여 3~4년이 지나면 1/5로 줄었다고 한다.

1936년 당시 화전 면적은 약 44만 정보였으며, 그중 함경북도평안북도에 각각 12만 정보가 넘었다. 순화전민은 7만 5,000여 호였는데, 강원도와 함경남도가 각각 2만 호를 넘었고 평안북도도 1만 5,000여 호 정도였다.

산림녹화 및 토양보존의 필요성 때문에 조선시대나 일제강점기에도 화전을 정리하려는 노력이 있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1965년 남한만의 화전농가 호수는 4만 7,000여 호로 집계되었는데, 이중 강원도가 20여 만 명으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1968년 '화전정리법'이 공포되면서 주로 강원도 산간지방에 남아 있던 화전민을 다른 지방에 정착시키기 시작하여 1976년에 화전정리가 종결되었다.

3. 특징

농민을 그린 그림. 에로 야르네펠트(Eero Järnefelt) 작


1920년대 핀란드 마안인카의 화전 농업


화전 농업은 현대 농법과 달리 경운이나 시비를 하지 않고, 화전 후 재의 잿더미와 휴경 기간 동안 축적된 토양 비옥도를 이용한다.[36]

화전은 다음과 같은 기능을 한다.

  • 열대의 토양은 영양염류 용탈이 심하고, 메마르고 산성인 라토솔이 주를 이루어 작물 재배에 적합하지 않다. 열대우림에 불을 지르면 재가 중화제이자 비료가 되어 토양이 개량된다.
  • 토지를 태우면 토양의 질소 조성이 변화하여 토양이 개량된다.[37]
  • 열에 의해 종자나 액아의 휴면이 깨어난다.
  • 잡초, 해충, 병원체를 방제한다.


휴경을 통해 경작 기간 동안 번성하는 강한 해충인 다년생 초본이 사라지기 때문에 밭농사에서 많은 노동력이 필요한 제초 작업을 줄일 수 있다. 이는 1차 생산력이 높아 잡초가 번성하기 쉬운 습윤 열대 지역에서 화전 농업이 선택되는 중요한 이유이다.[38]

화전 농업은 관개를 이용하지 않는 천수답이다. 넓은 산림에서의 인간 활동은 야생 동물이 마을로 침입하는 것을 줄일 가능성도 있다.

과거 일본에서는 산간 지역을 중심으로 화전 농업이 이루어졌으며, 지역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근현대에 들어 급격히 쇠퇴했지만, 2000년대 이후 전통문화 계승 및 사토야마 재생 등을 위해 다시 시작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에도 시대 이전부터 이어져 온 지역 외에도 약 20개 지역에서만 화전 농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일본 열도에서는 조몬 시대 중기·후기 단계부터 조몬 농경이 존재했다고 추정되며,[41] 유적에서 메밀, 보리, 녹두 등의 재배종이 발견되기도 했다. 과거에는 조몬 후기에 잡곡·뿌리채소 형 상록활엽수림 문화가 도래했다는 연구도 있었으나,[42] 최근 연구에서는 조몬 전기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고대에는 키나이 주변에서도 화전 농업이 행해졌다. 중세·근세에도 화전은 경작이 어려운 산간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근세 이전에는 산속을 이동하며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시대가 흐르면서 정착하여 화전을 중심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마을이 늘어났다.

근세에는 에도 시대 중후기의 징세 강화, 산불 등의 보안 문제, 산림 자원 영향 등으로 인해 화전이 금지되거나 제한되었다. 과거에는 서일본 전역, 일본해 연안 지역을 중심으로 일본 전역에서 화전이 이루어졌지만, 1899년에 시행된 국유림 시업안의 영향으로 화전을 경영하는 가구 수가 크게 감소했다.

동북 지방에서는 예로부터 화전을 주요 생업으로 삼는 마을이 많았으며, 현재도 화전을 이용한 재배가 이루어지고 있다. 임업에서 벌채와 식재의 순환에 따른 지속가능성을 가진 재배 방법이 에도 시대부터 이어져 오고 있다.[43]

3. 1. 경작 방식

화전 농업에서 개간된 땅은 토양이 고갈될 때까지 일반적으로 한 가족이 사용하고 소유한다. 이 시점이 되면 소유권이 포기되고 가족은 새로운 밭을 개간하며 이전 밭에는 나무와 관목이 자라도록 한다. 수십 년 후 다른 가족이나 씨족이 그 땅을 사용하고 용익권을 주장할 수 있다. 이러한 시스템에서는 일반적으로 농지 시장이 없으므로 농지는 공개 시장에서 매매되지 않고 토지 권리는 전통적인 방식을 따른다.

화전 농업에서는 일반적으로 건조기 직전 몇 달 동안 숲을 베어낸다. 베어낸 나무들은 말려 다음 건조기에 태운다.[12][13] 그 결과 생긴 재는 토양을 비옥하게 하고, 다음 우기가 시작될 때 , 옥수수, 카사바 또는 기타 주요 작물을 불에 태운 밭에 심는다. 이 작업은 과거에는 마체테, 도끼, 괭이, 과 같은 간단한 도구를 사용하여 이루어졌다.

스베드예브룩(Svedjebruk)은 침엽수인 소나무가문비나무의 줄기를 둘러싸고 있는 나무껍질을 완전히 제거하거나 나무를 베어 말린 다음, 말린 숲에 불을 지르고 재가 덮인 비옥한 토양에서 농작물을 재배하는 방법을 말한다. 생성된 재는 매우 비옥하지만, 기간은 짧았다. 재가 완전히 가라앉고 충분히 식으면 곧바로 호밀을 심었다. 비가 오면 재가 호밀 주변에 달라붙었다. 호밀은 발아하여 무성하게 자랐고, 25개에서 100개의 줄기(또는 짚)가 나왔으며 각각 여러 개의 곡물이 달렸다. 도구는 도끼와 낫 두 가지 만 필요했다. 도끼는 나무를 베어 순환을 시작했다. 호밀이 익으면 으로 수확했는데, 낫은 벨 때 효과적이지 못한 바위와 그루터기 사이에 닿을 수 있었다.[20]

2년차와 3년차에는 순무양배추를 심었다. 그런 다음 몇 년 동안 방목한 후 다시 숲으로 돌아가도록 할 수 있었다. 스베드예브룩은 매년 새로운 숲을 베어내고 새로운 지역을 불태우는 것을 필요로 했다. 이전 경작지를 10~30년 동안 숲으로 재생시킨 후에야 순환을 반복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주거지는 경작지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이 과정은 노동력 집약적이었기 때문에 대가족이 함께 일하고 밀집된 공동체에서 생활하는 경향이 있었다.

스베드예브룩 농업 방식은 넓은 지역을 필요로 했다. 숲이 풍부했을 때 핀란드인들은 매우 번영했다. 인구가 증가하고 태울 수 있는 숲에 대한 제한이 생기면서 점점 어려워졌다. 스베드예브룩 가족 집단이나 씨족(noite)의 우두머리는 항상 자신의 씨족 활동을 개괄적으로 파악해야 했다.

시간 틀은 인간에 의해 통제되는 기존 식물 제거의 첫 세 가지 단계를 포함하며, 다음 세 가지는 새로운 식물, 작물, 그리고 새로운 숲의 재생을 다룬다. 수확과 재생 사이의 시간은 직접적인 재생으로의 전환에서 스베드예브룩(vuoma)을 두 번째로 사용하는 여러 해를 거쳐 재생되지 않는 것, 즉 작물(pühä)에서 영구적인 농장/정착지(Piha)로의 직접적인 전환까지 다양하다. 자연적 영향은 noite가 평가에 고려하고 고려해야 할 사항일 뿐이며, 기후(비, 바람, 온도), 배수 조건, 토양 유형, 지형, 동식물을 포함한다. Noite는 씨족 내의 모든 부분이 기능하도록 조정하며, 적절한 시기에 지역을 적절히 처리하는 기술(베기, 태우기)과 사회 질서 등이다.

스베드예브룩 경작은 운영 단위로 생존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그룹에 필요했다. 그것은 개인 및/또는 그룹이 협력하여 수행하는 동기화된 과정의 복잡한 순환이다. 이러한 생산 연합은 종종 씨족, 대가족, 친족, thiod, ätt 또는 부족이라고 불린다. 오늘날 핀우그르어의 마을 이름은 küla (külä)이다. 개인주의는 이 사회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현상이었습니다. 복잡한 경작 주기는 밀접한 파트너십 속에서 개인이 수행하는 다양한 세심하게 동기화된 작업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상호 작용은 개인이 공동체와 동의어가 될 정도로 잘 확립되어야 한다. 이러한 정교한 절차는 외부인에게 잘못 인식되며, 오래된 문헌에서는 종종 실용적인 의미를 부여받지 않고 종교 의식으로 특징지어지기도 한다. 스베드예브룩 경작은 다양한 절차가 정확하고 동시에 실행되는 데 의존했다.

현대 농법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경운이나 시비를 하지 않고, 화전 재의 잿더미와 휴경 기간 동안 축적된 토양 비옥도를 이용하는 점이다.[36] 화전에는 몇 가지 기능이 있다고 지적되고 있다. 불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다.

# 열대의 토양은 영양염류의 용탈이 심하고, 메마르고 산성인 라토솔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작물 재배에 적합하지 않다. 그래서 열대우림에 불을 지르고 개척함으로써, 재가 중화제이자 비료가 되어 토양이 개량된다.

# 토지를 태움으로써, 토양의 질소 조성이 변화하여 토양이 개량된다.[37]

# 열에 의한 종자나 액아의 휴면 각성.

# 잡초, 해충, 병원체의 방제.

또한 휴경함으로써 경작 기간 중에 번성하는 강한 해충인 다년생 초본이 사멸하기 때문에, 밭농사를 할 경우 큰 노동력이 드는 제초 작업을 줄일 수 있다. 최근 연구에서는 이것이 1차 생산력이 높은(잡초가 번성하기 쉬운) 습윤 열대에서 화전이 농법으로 선택되는 강력한 이유임이 시사되고 있다.[38]

관개를 이용하지 않는 천수답이다. 화전에서 재배하는 작물은 다양하며, 지역에 따라 카사바, , 토란, 요리용 바나나와 같은 근채류(영양번식) 작물이나, 수수, 기장, 옥수수, 등을 재배하여 주식으로 한다. 현재도 화전에서 재배되는 것은 주로 자급용 작물이다.

열대 기후에 적합한 농법으로 구획을 정하여 화전을 하고, 재배가 끝나면 다른 구획으로 이동한다. 화전 농업은 원래의 구획이 충분한 식생 천이를 거친 후에 다시 경작하는 지속 가능한 농업이다. 마을 전체가 이동하여 새로운 땅을 찾는 경우도 있지만, 이것은 농지 부족 때문이라기보다는 다른 여러 가지 사회적 이유 때문이라는 것이 시사되고 있다.[39] 최근에는 인구 증가나 정주 정책, 상품 작물 재배를 위해 밭농사로 전환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일본에서도 산간 지역을 중심으로 행해졌으며, 여러 지방명으로 불렸다. 근현대에는 급속히 쇠퇴했지만, 2000년대에 들어 전통문화로서의 계승이나 사토야마 재생 등을 위해 다시 시작하는 움직임이 잇따르고 있다. 에도 시대 이전부터 이어져 온 지역 외에도 약 20개 지역에서만 행해지고 있다.

일본 열도에서는 조몬 시대 중기·후기 단계에서 조잡한 조몬 농경이 존재했다고 생각되고 있으며,[41] 유적에서는 메밀, 보리, 녹두 등의 재배종이 발견되었고, 옛날에는 조몬 후기에 잡곡·뿌리채소 형 상록활엽수림 문화가 도래했다는 연구자도 있다.[42] 그러나 최근의 연구 결과에서는 조몬 전기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지적하는 연구자도 있다.

고대 단계에서는 키나이 주변에서도 행해지고 있었다. 중세·근세에 있어서도 화전은 경작이 어려운 산간부를 중심으로 행해졌다. 근세 이전에는 산중을 이동하며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이 존재했지만, 시대가 내려감에 따라 정착하여 화전을 중심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마을이 증가했다.

근세에 있어서는 에도 시대 중후기의 징세 강화나 산불 등의 보안상의 이유, 산림 자원에 대한 영향으로 금지·제한이 행해졌다. 옛날 화전은 서일본 전역, 일본해 연안 지역을 중심으로 일본 전역에서 행해지고 있었지만, 1899년에 시행된 국유림 시업안의 영향으로 화전을 경영하는 호수는 격감했다.

동북 지방에서는 옛날부터 화전을 주요 생업으로 하는 마을이 많았고, 현재도 화전에 의한 재배가 행해지고 있으며, 임업에 있어서의 벌채와 식재의 사이클에 따른 지속가능성을 가진 재배 방법이 에도 시대부터 계속되고 있다.[43]

일본에서는 기장, 수수, 메밀, , 을 중심으로 보리, 토란, 등을 더한 잡곡 재배형 화전 농업이 일반적이다. 화전의 조성은 키오로시라고 불리는 나무의 벌채 작업부터 시작된다. 경작지를 빈터로 한 후, 잠시 건조시켜 불을 붙인다. 그 후 파종하지만, 1년째는 메밀, 2년째는 수수 등과 같이 윤작되는 경우가 많다. 경작 기간은 3~5년이며, 그 후 조림하여 15~20년간 방치하여 지력을 회복시킨다.

3. 2. 재배 작물

화전 농업에서는 지역에 따라 카사바, (야무이모), 타로(타로이모), 요리용 바나나(플랜테인)와 같은 뿌리채소(영양번식) 작물이나, 수수, 기장, 옥수수, 등을 재배하여 주식으로 한다. 현재도 화전에서 재배되는 것은 주로 자급용 작물이다.

일본에서는 기장, 수수, 메밀, , 을 중심으로 보리, 토란, 등을 더한 잡곡 재배형 화전 농업이 일반적이다. 화전 조성은 키오로시라고 불리는 나무 벌채 작업부터 시작된다. 경작지를 빈터로 한 후, 잠시 건조시켜 불을 붙인다. 그 후 파종하는데, 1년째는 메밀, 2년째는 수수 등과 같이 윤작하는 경우가 많다.[20] 2년 차와 3년 차에는 순무양배추를 심기도 한다. 이후 몇 년 동안 방목한 후 다시 숲으로 돌아가도록 할 수 있었다.

3. 3. 윤작 및 휴경

화전 농업에서는 2년차와 3년차에 순무양배추를 심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방목한 후 다시 숲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스베드예브룩(svedjebruk)은 매년 새로운 숲을 베어내고 새로운 지역을 불태우는 것을 필요로 했다. 이전 경작지를 10~30년 동안 숲으로 재생시킨 후에야 순환을 반복할 수 있었다.[20]

현대 농법과 가장 큰 차이점은 경운이나 시비를 하지 않고, 화전 후 재의 잿더미와 휴경 기간 동안 축적된 토양 비옥도를 이용하는 점이다.[36] 휴경함으로써 경작 기간 중에 번성하는 강한 해충인 다년생 초본이 사멸하기 때문에, 밭농사를 할 경우 큰 노동력이 드는 제초 작업을 줄일 수 있다.

일본에서는 기장, 수수, 메밀, , 을 중심으로 보리, 토란, 등을 더한 잡곡 재배형 화전 농업이 일반적이었다. 1년째는 메밀, 2년째는 수수 등과 같이 윤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경작 기간은 3~5년이며, 그 후 조림하여 15~20년간 방치하여 지력을 회복시켰다.

4. 장점과 단점

화전농업은 장점과 단점을 모두 가지고 있다.

'''장점'''으로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식량과 소득을 제공하고, 수천 년 동안 생태적으로 지속 가능하다는 점이다. 아마존과 같은 열대 지역의 토양은 영양가가 매우 빈약하여 화전 농업이 유일한 농업 방식일 수 있다. 또한, 다양한 작물 재배와 모자이크 서식지 조성으로 생물 다양성을 높인다. 현대 농법과 달리 경운이나 시비를 하지 않고, 불을 지른 후 남은 재와 휴경 기간 동안 축적된 토양 비옥도를 이용한다. 불을 사용함으로써, 토양의 영양염류가 풍부해지고, 질소 조성이 변화하며, 종자나 액아의 휴면 각성을 돕고, 잡초, 해충, 병원체를 방제하는 효과가 있다.

'''단점'''으로는, 수출작물 생산에 적합하지 않고, 넓은 토지나 낮은 인구 밀도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인구 밀도가 높아지면 숲이 파괴될 수 있다. 또한, 현대 농법에 비해 환경 부담이 크고 생산성이 낮아 대기오염, 산림 훼손, 토양 침식 등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4. 1. 장점

이 농업 시스템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식량과 소득을 제공하며, 수천 년 동안 생태적으로 지속 가능했다. 아마존과 같은 많은 열대 지역의 침출된 토양은 영양가가 매우 빈약하기 때문에 화전 농업은 이러한 지역에서 실천할 수 있는 유일한 농업 유형 중 하나이다. 화전 농업 농민들은 일반적으로 단일 경작이 아닌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며, 모자이크 서식지를 조성함으로써 더 높은 생물 다양성에 기여한다. 전통적인 화전 농업에서는 작고 일시적인 지역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인 생태계가 손상되지 않는다.[36]

현대 농법과 가장 큰 차이점은 경운이나 시비를 하지 않고, 화전 후 재의 잿더미와 휴경 기간 동안 축적된 토양 비옥도를 이용하는 점이다.[36]

화전에는 몇 가지 기능이 있다:

# 열대의 토양은 영양염류의 용탈이 심하고, 메마르고 산성인 라토솔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작물 재배에 적합하지 않다. 그래서 열대우림에 불을 지르고 개척함으로써, 재가 중화제이자 비료가 되어 토양이 개량된다.

# 토지를 태움으로써, 토양의 질소 조성이 변화하여 토양이 개량된다.[37]

# 열에 의한 종자나 액아의 휴면 각성.

# 잡초, 해충, 병원체의 방제.

또한 휴경함으로써 경작 기간 중에 번성하는 강한 해충인 다년생 초본이 사멸하기 때문에, 밭농사를 할 경우 큰 노동력이 드는 제초 작업을 줄일 수 있다. 최근 연구에서는 이것이 1차 생산력이 높은 (잡초가 번성하기 쉬운) 습윤 열대에서 화전이 농법으로 선택되는 강력한 이유임이 시사되고 있다.[38]

4. 2. 단점

화전 농업은 수출작물 생산에는 적합하지 않다. 넓은 토지나 낮은 인구 밀도가 필요하며, 인구 밀도가 지속 불가능한 수준으로 증가하여 같은 지역에서 너무 자주 실시되면 숲이 파괴될 수 있다.[36]

현대 농법과 가장 큰 차이점은 경운이나 시비를 하지 않고, 화전 후 재의 잿더미와 휴경 기간 동안 축적된 토양 비옥도를 이용하는 점이다.[40]

쟁기질이나 무경운 농업에 비해 환경 부담이 크고 생산성도 낮아, 인구 증가에 따라 대기오염, 산림 훼손, 토양 침식이 문제가 된다.

5. 현대의 화전 농업

일본에서는 조몬 시대 중기·후기부터 조잡한 형태의 농경이 존재했다고 추정되며,[41] 메밀, 보리, 녹두 등의 재배종이 유적에서 발견되었다.[42] 과거에는 조몬 후기에 잡곡·뿌리채소 중심의 상록활엽수림 문화가 유입되었다는 견해도 있었으나,[42] 최근 연구에서는 조몬 전기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미야모토 츠네이치는 화전 후 산나물 채취에서 진화한 농법이 아닌가 추측했다.

고대 일본에서는 기나이 주변에서도 화전이 행해졌다. 중세근세에는 농사가 어려운 산간 지역을 중심으로 화전이 이루어졌다. 근세 이전에는 산 속을 이동하며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시대가 흐르면서 정착하여 화전을 중심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마을이 늘어났다. 근세에는 에도 시대 중후기에 세금 강화, 산불 등의 보안 문제, 산림 자원 영향으로 화전이 금지되거나 제한되었다. 과거 화전은 서일본 전역과 일본해 연안 지역을 중심으로 일본 전역에서 행해졌으나, 1899년 국유림 시업안의 영향으로 화전 농가 수가 크게 줄었다.

동북 지방에는 예로부터 화전을 주 생업으로 하는 마을이 많았으며, 현재도 '히노(카노) 카부'라 불리는 화전을 이용한 재배가 이루어지고 있다. 야마가타현 쓰루오카시의 온나이 무는 임업에서 벌채와 식재 순환에 따른 지속가능성을 가진 재배 방법이 에도 시대부터 이어져 오고 있다.[43]

일본에서는 기장, 수수, 메밀, , 을 중심으로 보리, 토란, 등을 재배하는 잡곡 재배형 화전 농업이 일반적이었다. 화전 조성은 '키오로시'라 불리는 나무 벌채 작업부터 시작된다. 경작지를 빈터로 만든 후 잠시 건조시켜 불을 붙이고 파종한다. 1년 차에는 메밀, 2년 차에는 수수 등과 같이 윤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경작 기간은 3~5년이며, 이후 조림하여 15~20년간 방치하여 지력을 회복시켰다.

과거 일본에서는 산간 지역을 중심으로 화전이 이루어졌으며, 지치부 지방에서는 "사스", 오슈 지방에서는 "카노", "아라키", 히다 지방에서는 "나기", 규슈 지방에서는 "코바" 등 다양한 지방명으로 불렸다. 근현대에는 급격히 쇠퇴했지만, 2000년대 들어 전통문화 계승이나 사토야마 재생 등을 위해 다시 시작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에도 시대 이전부터 이어져 온 미야자키현시이바촌, 야마가타현쓰루오카시 외에도 시마네현오쿠이즈모정, 구마모토현미즈카미촌, 시가현나가하마시(구 요고정) 등 약 20개 지역에서만 행해지고 있다.

5. 1. 한국의 현황

1898년(광무 2) 대한제국은 양전지계사업(量田地契事業)을 통해 화전을 전면 정리했다. 이때 지질이 척박한 토지를 일역전·재역전으로 따로 등재하여, 이전까지 화전으로 간주되던 토지들이 전답으로 파악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비과세지였다가 1914년 다시 과세 대상이 되어 1일경(一日耕)에 8전(錢)의 세금이 부과되었고, 8·15 해방 후 농지개혁에 따라 비과세지로 바뀌었다.

일제는 과세 및 국유림 보호를 위해 화전 현황을 상세히 조사했다. 조사에 따르면 화전에는 불대기(부덱이·火德)·화전·산전(山田)의 3가지가 있었다. 불대기는 원시림에 처음 불을 지른 해에 작물을 심는 경작법이며, 화전은 보통의 것으로 불대기도 2년이 지나면 이에 속했다. 산전은 영구 화전화한 결과 비옥도가 일반 토지와 크게 차이가 없게 된 것이었다. 화전민들은 급경사지에서도 소 두 마리를 사용하는 겨리쟁기[二頭牛犁]로 수평 경운을 했다.

화전의 수확량은 첫 해에는 보통 밭의 소출과 거의 같으나, 2년째 이후로는 현저히 감소하여 3~4년이 지나면 1/5로 격감했다. 1936년 당시 화전 면적은 약 44만 정보였으며, 그중 함경북도평안북도에 각각 12만 정보가 넘었다. 순화전민은 7만 5,000여 호였는데, 강원도함경남도가 각각 2만 호를 넘었고 평안북도도 1만 5,000여 호 정도였다.

조선시대나 일제강점기에도 산림녹화 및 토양보존을 위해 화전을 정리하려는 노력이 있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1965년 남한만의 화전농가 호수는 4만 7,000여 호로 집계되었는데, 이중 강원도가 20여 만 명으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했다. 1968년 '화전정리법'이 공포되면서 주로 강원도 산간지방에 남아 있던 화전민을 다른 지방에 정착시키기 시작하여 1976년에 화전정리가 종결되었다.

5. 2. 대안 모색

많은 개발 또는 환경 단체에서는 화전농업을 권장하지 않는다. 주요 대안으로는 더 집약적이고 영구적인 농업 방식으로 전환하거나, 농업에서 더 높은 임금을 받는 다른 산업으로의 전환을 촉진하는 것이 제시된다. 다른 단체들은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여 농민들의 생산성 향상을 돕는 것을 촉진한다.[21]

베어낸 식물을 완전히 태우지 않고, 그 결과 생긴 숯을 토양에 갈아엎는 방법(화전 숯갈이(slash-and-char))이 수확량을 높이는 방법으로 제안되었다.[21]

2000년대 초의 프로젝트 추진자들은 농부들이 '인가(Inga)' 나무 사이에 후추, 심황, 콩, 옥수수, 카카오, 람부탄, 감귤류 작물을 재배하면 화전 경작을 줄일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를 '인가 나무 사이재배'라고 명명했다.[22][23]

중앙 아메리카에서 일반 콩을 재배하는 데 사용되는 전통적인 개간 경작의 한 유형에서 수확량을 개선하는 방법으로, 토양이 고갈되고 새로운 숲을 개간할 준비가 되었을 때 휴한 작물로 작용하는 콩과 관목을 추가로 심는 '베어내고 덮는(slash-and-cover)' 방법이 제안되었다.[24]

참조

[1] 웹사이트 Slash-and-burn agriculture https://www.britanni[...] 2024-05-22
[2] 웹사이트 Slash and Burn Agriculture http://www.ecologic.[...]
[3] 서적 Banglapedia: National Encyclopedia of Bangladesh Asiatic Society of Bangladesh
[4] 잡지 Jhum https://www.geograph[...] 2010-03-01
[5] 서적 1500+ MCQs with Explanatory Notes For Geography, Ecology & Environment https://books.google[...] Disha Publications
[6] 뉴스 TV highlights 27/09/2011 https://www.theguard[...] 2011-09-24
[7] 웹사이트 Slash and Burn Agriculture – An Overview of Slash and Burn http://geography.abo[...] Geography.about.com 2013-06-22
[8] 논문 The effect of traditional slash-and-burn agriculture on soil organic matter, nutrient content, and microbiota in tropical ecosystems of Papua New Guinea https://onlinelibrar[...] 2019-01-01
[9] 웹사이트 Assarting https://www.thefreed[...] 2020-10-12
[10] 서적 Maya Cities and Sacred Caves Cu bola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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