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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열보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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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열보병은 고대부터 존재해온 밀집 대형으로 운용되는 중장보병의 일종으로, 머스킷과 총검을 주 장비로 사용하며 야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8세기까지는 수류탄을 사용하는 척탄병과 유사한 기능을 수행했으나, 총포의 발달로 인해 밀집 대형이 쇠퇴하면서 산병 전술이 중심이 되었다. 19세기 후반 이후에는 소총의 발달과 기관총의 등장으로 인해 전열보병의 개념은 사라졌지만, 일부 국가에서는 전통적인 명칭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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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열보병
개요
유형보병
역할전열 형성, 전투
존속 시기17세기 중반 ~ 19세기 중반
소멸 원인라이플의 발달, 전술 변화
전술 및 특징
대형전열 (line formation)
무기머스킷, 총검
훈련집단 사격 훈련, 백병전 훈련
장점높은 화력 집중, 통제 용이
단점기동성 제한, 측면 공격에 취약
중요성당시 전술의 핵심, 군사력의 상징
역사
등장 배경화약 무기의 발전, 중앙 집권 국가의 등장
발전 과정17세기 구스타프 아돌프의 전술 개혁, 18세기 전술 체계 확립
주요 전투잉글랜드 내전, 30년 전쟁, 나폴레옹 전쟁
쇠퇴라이플의 발달, 산병 전술의 등장, 크림 전쟁
기타
관련 용어종대보병, 산병, 제병협동전술

2. 역사

전열 보병은 고대부터 존재했던 밀집 진형을 갖춘 중장보병의 계보를 잇는 병과로, 야전군의 핵심이었다. 18세기 무렵까지는 척탄병이라고 불리는 수류탄 투척병이 있었으나, 시대가 흐름에 따라 척탄병의 역할은 전열 보병과 거의 같아졌다. 다만 "척탄병"이라는 명칭은 엘리트 부대를 지칭하는 용어로 남아 있었다.

전열 보병은 머스킷총검을 주 무기로 사용했으며, 30년 전쟁 무렵부터 직업 군인의 우위가 사라지면서 각국 군대에 편성되었다. 스위스 용병이나 헤센 병사[22]와 같은 용병이나 징병된 일반인을 짧은 훈련을 통해 대량으로 양성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전국 시대의 조총 (텟포) 병: 나가시노 전투 그림 병풍에서


일본에서는 전국 시대 말기에 조총鉄砲|뎃포일본어 아시가루를 주력으로 하는 전열 보병과 비슷한 병과가 존재했다. 그러나 일본에 전래된 화승총은 인도·동남아시아에서 개량된 순발식이었고, 독자적인 조총술이 확립되어 조총 아시가루는 전열 보병과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였다. 시마바라의 난 이후, 도쿠가와 막부는 아시가루를 귀농시키고 무사 계급을 총포에서 격리시키는 정책을 취해 조총 아시가루는 에도 시대 중기에 사실상 절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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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바·후시미 전투에서의 전투를 그린 그림. 후시미 전선 다카세강 부근 교전 장면. 오른쪽은 조슈번도사번 병사, 왼쪽은 구 막부군.


프랑스군 복장의 도쿠가와 요시노부


일본에 서양식 전열 보병 도입은 에도 시대 후기에 이루어졌다. 다카시마 슈호는 네덜란드식 군제 도입을 시도했고, 1834년 사가번이 이를 도입했다.[26] 아편 전쟁에서의 청나라 패배를 본 도쿠가와 막부도 서양식 군제 도입을 검토, 1862년 막부 육군이 발족했지만,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상황이었다.

19세기 중반, 총포 발달로 미니에 소총과 근대적 후장식 포가 출현하면서 전열 보병의 밀집 진형은 큰 피해를 입었다. 이에 따라 보병 운용은 산병에 의한 침투 전술 중심으로 변화했고, 전열 보병은 쇠퇴했다. 군복 또한 눈에 띄지 않는 보호색으로 변화했으며, 현대 위장복으로 이어졌다.

2. 1. 유럽의 전열보병

선형 보병은 유럽 국가에서 가장 흔한 유형의 보병이었다. 이전에는 정예 부대였던 머스킷총병과 척탄병은 점차 선형 전술로 전환하며 선형 보병의 일부가 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선형 보병 전술은 유럽 외 지역으로 확산되었으며, 이는 종종 유럽 제국주의의 결과였다. 모국에서 인구가 적은 유럽 식민지와 정착지에서는 선형 보병 부대가 종종 현지 인구에서 징집되었으며, 영국의 동인도 회사세포이가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사례이다.[22]

선형 전술은 엄격한 규율과 자연스러운 수준까지 훈련된 단순한 동작을 필요로 했다. 훈련 중에는 연병과 체벌이 널리 사용되었다. 1814년,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동안 정규 프랑스 선형 보병 신병의 훈련은 동맹군의 끈질긴 공격으로 인해 제한되었다. 신병은 두 개의 실탄과 네 개의 공포탄을 발사하는 것으로 훈련받았다. 또한 여러 대형을 갖추는 가벼운 훈련도 있었다. 그러나 대량의 정예 선형 보병을 훈련시키는 것은 일반적으로 복잡한 과정이었다.

전열 보병은 고대부터 존재했던 밀집 진형을 갖추어 운용되는 중장보병의 계보를 잇는 병과로, 야전군의 핵심을 이루는 병과였다. 야전에서 전열 보병은 산병으로 운용되는 경보병이나 엽병, 기병·포병과 같은 다른 각 병과의 지원을 받으면서, 적의 주력을 똑같이 구성하고 있는 전열 보병을 격파하는 것을 주요 역할로 삼았다. 18세기 무렵까지는 척탄병이라고 불리는 수류탄을 적진에 던지는 선발 보병이 유럽 각국의 군대에 존재했지만, 시대가 흐름에 따라 척탄에 의한 전투가 사라지면서, 전장에서의 기능은 전열 보병과 거의 같아졌다. 다만 근대 이후에도 얼마 동안 "척탄병"이라는 명칭은 체격·체력과 무용·전기 및 정신력 등이 뛰어난 병사를 선발한 엘리트 부대로서 유지되었다.

전열 보병은 "Musketeer"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총병대로, 창 대신 머스킷총검이 보병의 주 장비가 되면서 직업 군인의 우위가 사라진 30년 전쟁 무렵부터 각국 군대에서 일반적으로 편성되었다. 용병으로서 긴 역사를 가진 스위스 용병이나, 헤센 병사[22]와 같은 공모된 용병(대부분 다중 채무자나 범죄자로 구성되어 있었다)이나, 징병된 일반인을 소수의 전문가에 의한 비교적 짧은 기간의 훈련을 통해 대량으로 전력으로 양성할 수 있다는 이점 때문에, 널리 세계적으로 채용되는 보병 운용 방식이 되었다.

2. 2. 전열보병 전술의 확산

선형 보병은 유럽 국가에서 가장 흔한 유형의 보병이 되었다. 이전에는 정예 부대였던 머스킷총병과 척탄병은 점차 선형 전술로 전환하며 선형 보병의 일부가 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선형 보병 전술은 유럽 외 지역으로 확산되었으며, 이는 종종 유럽 제국주의의 결과였다. 모국에서 인구가 적은 유럽 식민지와 정착지에서는 선형 보병 부대가 종종 현지 인구에서 징집되었으며, 영국의 동인도 회사세포이가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사례일 것이다.

선형 전술은 엄격한 규율과 자연스러운 수준까지 훈련된 단순한 동작을 필요로 했다. 훈련 중에는 연병과 체벌이 널리 사용되었다. 1814년,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 동안 정규 프랑스 선형 보병 신병의 훈련은 동맹군의 끈질긴 공격으로 인해 제한되었다. 신병은 두 개의 실탄과 네 개의 공포탄을 발사하는 것으로 훈련받았다. 또한 여러 대형을 갖추는 가벼운 훈련도 있었다. 그러나 대량의 정예 선형 보병을 훈련시키는 것은 일반적으로 복잡한 과정이었다.

전열 보병은 고대부터 존재했던 밀집 진형을 갖추어 운용되는 중장보병의 계보를 잇는 병과로, 야전군의 핵심을 이루는 병과였다. 야전에서 전열 보병은 산병으로 운용되는 경보병이나 엽병, 기병, 포병과 같은 다른 병과의 지원을 받으면서, 적의 주력을 똑같이 구성하고 있는 전열 보병을 격파하는 것을 주요 역할로 삼았다. 18세기 무렵까지는 척탄병이라고 불리는 수류탄을 적진에 던지는 선발 보병이 유럽 각국의 군대에 존재했지만, 시대가 흐름에 따라 척탄에 의한 전투가 사라지면서, 전장에서의 기능은 전열 보병과 거의 같아졌다. 다만 근대 이후에도 얼마 동안 "척탄병"이라는 명칭은 체격, 체력, 무용, 전기 및 정신력 등이 뛰어난 병사를 선발한 엘리트 부대로서 유지되었다.

전열 보병은 "Musketeer"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총병대로, 창 대신 머스킷총검이 보병의 주 장비가 되면서 직업 군인의 우위가 사라진 30년 전쟁 무렵부터 각국 군대에서 일반적으로 편성되었다. 용병으로서 긴 역사를 가진 스위스 용병이나, 헤센 병사[22] 와 같은 공모된 용병 (대부분 다중 채무자나 범죄자로 구성되어 있었다)이나, 징병된 일반인을 소수의 전문가에 의한 비교적 짧은 기간의 훈련을 통해 대량으로 전력으로 양성할 수 있다는 이점 때문에, 널리 세계적으로 채용되는 보병 운용 방식이 되었다.

일본에서는 전국 시대 말기에 조총아시가루를 주력으로 하는 전열 보병과 비슷한 병과가 세계에 앞서 존재했다. 그러나 일본에 전래된 화승총은 당시 유럽에서 제조되던 것과는 달리, 인도·동남아시아에서 개량된 파생품이었고, 저격에 적합한 순발식이었기 때문에, 기존의 궁술과의 유사성에서 저격 기술을 터득하는 독자적인 조총술이 확립되어 갔다. 조총 아시가루도 각자의 무공을 겨루는 소집단의 집합체였기 때문에, 조총 아시가루는 전열 보병과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였다고 현재는 생각되고 있다. 농민, 낭인, 기독교, 조총이 결합하여 강력한 반란으로 성장한 시마바라의 난 이후, 도쿠가와 막부의 국내 안정화 정책 하에서 아시가루의 대부분은 귀농하게 되었고, 무사 계급을 의도적으로 총포에서 격리시키는 정책이 취해졌기 때문에 조총 아시가루의 운용 수법은 형해화된 병학으로서만 전승되었고, 에도 시대 중기에는 사실상 절멸해 버린다.

일본에 서양식 전열 보병의 도입은 에도 시대 후기에 이루어졌다. 열강 제국과의 군사적 트러블이 증가하기 시작한 에도 시대 후기에, 열강과의 화포의 성능·운용의 차이를 알게 된 다카시마 슈호에 의해 전열 보병을 포함한 네덜란드식 군제의 도입이 시도되었고, 1834년에는 나가사키 경호를 맡고 페이턴 호 사건을 경험했던 사가번이 이를 도입했다.[26]

아편 전쟁에서의 청나라 패배 정보를 얻었던 도쿠가와 막부도, 1841년에 무주 도쿠마루가하라(현·도쿄도 이타바시구 다카시마다이라)에서 슈호에 의한 서양식 군제의 공개 연병을 실시하는 등 한 결과, 여러 번에서도 널리 도입이 검토되었지만, 슈호가 모반 혐의로 투옥되는 등의 곡절[28]을 거쳐 1862년에 이르러서야 서양식 군제의 막부 육군이 발족했다. 이는 사가번이 다카시마 슈호의 지도 하에 서양식 군제를 도입한 지 약 30년이나 지난 후였고, 그 사이에 사가번, 사쓰마번, 우와지마번 등의 여러 번은 초보적인 공업을 갖춘 선진적인 군사력을 구축하여, 구태의연한 막부와의 실력 차이는 역력했다.

3. 운용

전열보병은 장교의 호령이나 북 소리에 맞춰 도보로 이동했다. 보폭은 75cm 전후로, 1분당 70~90보(약 60m/분)를 걷는 것이 기준이었다. 북 소리로 속도를 조절했다.

병사들은 밀집 진형을 신속하게 갖추도록 훈련받았고, 적을 위협하기 위해 화려한 색의 제복을 입었다. 머스킷총[24], 총검, 칼이 주 장비였으며 [https://www.vondonop.org/images/Musketeer.JPG (참조: 헤센의 장비 예시)], 공격 시에는 주로 3열 횡대로 운용되었다.[25] 방어 시에는 횡대를 재구성하여 사각진형을 갖추기도 했다.

전열보병의 기본적인 운용 방식은 다음과 같다.

번호내용
1호령에 따라 머스킷총에 장전한다.
2진형을 유지한 채 행진하여 적진에 접근한다.
3적진과의 거리가 100m 정도가 되면 행진 속도를 늦춘다.
4적진에서 50m 정도 되는 지점에서 정지한다.
5호령에 따라 머스킷총을 적진을 향한다.
6열 단위로 적진을 향해 일제 사격, 재장전, 다시 일제 사격 (반복)
7적진이 충분히 혼란에 빠져 진형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호령에 따라 총검을 장착한다.
8호령에 따라 적진에 돌격한다.
9적병과 접촉하면 능숙하게 찔러 죽인다.



당시 전투에서는 진형 유지가 불가능해지면 조직적 전투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항복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공격과 방어 모두 상대의 진형을 무너뜨리는 것이 중요했다.

적진 공격에는 전열보병의 일제 사격과 착검 돌격 외에도 기병의 돌입, 포병의 유탄, 산탄 · 포탄을 지표면에서 바운스시키는 공격 등이 사용되었다.

전열보병은 정면 공격의 공포를 이겨내고 진형을 유지하며, 지휘관에게 절대 복종해야 했다. 전투 중 함부로 발포하거나 진형을 이탈하면 징벌을 받았고, 도망자는 참살당했다.

3. 1. 전열

17세기 중반부터 소형 화기가 보병 부대에 널리 채택되면서, 전장은 보병을 어깨를 맞대고 길고 얇은 선으로 정렬시켜 일제 사격을 가하는 선형 전술이 지배하게 되었다. 전열보병은 주로 종대, 방진, 그리고 열의 세 가지 대형을 사용했다. 종대는 2열, 3열 또는 4열의 병사로 구성되었다.

병사들은 장교의 명령에 따라 일제 사격을 하도록 훈련받았지만, 실제로는 전투 초반 몇 분 동안만 그렇게 이루어졌다. 한두 번의 일제 사격 이후, 각 병사는 자신의 재량으로 소총을 장전하고 사격했으며, 장교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이는 체계를 무너뜨렸고, 화약 연기는 정확한 사격을 방해했다. 이러한 연기 속의 총격전은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었고, 그 결과는 예측 불가능했다. 또한,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지는 동안 병사들은 사격에 너무 집중하여 측면에서 기병의 공격을 감시하지 못했다. 이러한 이유로, 경험 많은 장교들은 이러한 불확실한 교전을 피하려고 노력했고, 병사들이 너무 일찍 사격하지 않도록 자제시켜 적의 대열에 최대한 가까이 접근하여 짧은 거리에서 몇 차례의 치명적인 일제 사격을 가할 수 있도록 했다. 어떤 경우에는 근거리에서 단 한 번의 일제 사격으로 적을 격파할 수도 있었다.[24]

종대는 최대의 화력을 배치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기본적인 전투 대형으로 간주되었다. 주변의 적 기병에 대항하여, 종대 보병은 신속하게 보병 방진 대형을 채택하여 보호를 제공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방진은 (4열로 구성되어) 창병과 구식 머스킷병의 방진과는 달리 속이 비어 있었다.

산병 대형의 병력은 엄폐물을 사용하고 주도권을 가질 수 있었지만, 기병에 매우 취약했고 진격하는 보병 종대에 맞서 지상전을 펼칠 수 없었다. 종대 보병은 위협받을 경우 산병과 기병이 후퇴할 수 있는 "방어선"을 제공했다.

종대 대형에서의 이동은 느렸고, 연대가 훌륭하게 훈련되지 않은 한, 특히 고르지 않거나 숲이 우거진 지형에서는 대형이 붕괴될 수 있었다. 그 결과, 종대는 주로 사격 대형으로 사용되었고, 병력은 종대 대형으로 이동한 다음 목적지에 도착하여 종대로 배치되었다. 일반적으로 종대는 이동 및 백병전 공격에 사용되었다.

전열보병은 사격술 훈련을 받았고, 이 훈련의 주요 목표는 종대의 신속한 배치, 신속한 사격 및 기동이었다. 전열 보병은 장교의 간단한 호령이나 북 소리에 따라 행동했으며, 그 이동은 도보였다. 횡대의 전원이 거의 같은 정도의 보폭(75cm 전후)이 되도록 신장의 기준이 마련되었고, 1분당 보폭 수는 70~90보(약 60m/분)가 기준 보행 속도였다. 이에 북 소리에 의한 지시가 주어지면서 속도가 조정되었다.

병사들은 신속하게 각종 밀집 진형을 갖출 수 있도록 일상적으로 훈련받았으며, 적병을 위압하기 위해 위압색이라고 불리는 화려한 색채의 제복을 착용했다. 머스킷총[24]과 총검, 자위용 칼이 주된 장비였던 전열 보병은 공격 시 단순한 3열 횡대로 운용[25]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방어 시에는 횡대를 재구성하여 사각진형을 갖출 수 있었다. 기본적인 운용은 다음과 같았다.

번호내용
1병사들은 호령에 따라 머스킷총에 장전한다.
2진형을 유지한 채 행진하여 적진에 접근한다.
3적진과의 거리가 100m 정도가 되면 행진 속도를 늦춘다.
4적진에서 50m 정도 되는 지점에서 정지한다.
5호령에 따라 머스킷총을 적진을 향한다.
6열 단위로 적진을 향해 일제 사격, 재장전, 다시 일제 사격 (반복)
7적진이 충분히 혼란에 빠져 진형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호령에 따라 총검을 장착한다.
8호령에 따라 적진에 돌격한다.
9적병과 접촉하면 능숙하게 찔러 죽인다.



당시 전투에서는 교전 중에 진형을 유지할 수 없게 된 시점에서 조직적인 전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어, 붕괴된 진을 지휘하는 장교는 그 시점에서 항복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공격과 방어 모두 상대의 진형을 붕괴시키는 것이 전투의 주된 목적이 되었다.

적진에 대한 공격은 전열 보병에 의한 일제 사격과 착검 돌격 외에 칼, 창을 든 기병의 돌입, 포병에 의한 유탄, 산탄(포에서 발사되는 산탄) · 포탄을 지표면에서 바운스시키는 공격 등과 같은 수법이 사용되었다.

전열 보병에게 요구된 것은 이러한 정면 공격의 공포를 극복하고 진형을 유지하는 것과 지휘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것이었으며, 전투 중에 함부로 발포하거나 진형을 무너뜨린 자는 감독자인 장교에게서 징벌을 받았고, 도망을 시도한 자는 사브르로 참살당했다.

3. 2. 종대

전열보병은 2열, 3열 또는 4열로 구성된 종대 대형으로 이동 및 백병전 공격을 수행했다. 종대 대형은 최대 화력을 배치할 수 있어 기본적인 전투 대형으로 간주되었지만, 이동 속도가 느리고 고르지 않거나 숲이 우거진 지형에서는 대형이 붕괴될 수 있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러나 주변의 적 기병에 대항하여 신속하게 보병 방진 대형으로 전환하여 방어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전열보병은 종대 대형으로 이동한 다음 목적지에 도착하여 사격 대형으로 배치되었다. 산병 대형의 병력은 엄폐물을 사용하고 주도권을 가질 수 있었지만, 기병에 매우 취약했고 진격하는 보병 종대에 맞서 지상전을 펼칠 수 없었다. 종대 보병은 위협받을 경우 산병과 기병이 후퇴할 수 있는 "방어선"을 제공했다.

전열 보병은 사격술 훈련을 받았으며, 이 훈련의 주요 목표는 종대의 신속한 배치, 신속한 사격 및 기동이었다.[24] 장교의 간단한 호령이나 북 소리에 따라 행동했으며, 도보로 이동했다. 횡대의 전원이 거의 같은 정도의 보폭(75cm 전후)을 유지하도록 신장 기준이 마련되었고, 1분당 보폭 수는 70~90보(약 60m/분)가 기준 보행 속도였다. 북 소리에 의한 지시로 속도가 조정되었다.[25]

3. 3. 방진

전열보병은 전투에서 종대, 방진, 열의 세 가지 대형을 사용했다. 이 중 방진은 주변의 적 기병에 대항하기 위해 사용된 대형이다. 종대 보병은 신속하게 보병 방진 대형을 갖춰 방어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방진은 창병과 구식 머스킷병의 방진과는 달리 속이 비어 있는 형태였다.

산병은 엄폐물을 이용하고 주도권을 가질 수 있었지만, 기병에 매우 취약했고 진격하는 보병 종대에 맞서 버틸 수 없었다. 종대 보병은 위협받을 경우 산병과 기병이 후퇴할 수 있는 "방어선"을 제공했다.

방어 시에는 횡대를 재구성하여 사각진형을 갖추는 것으로 충분했다.[25]

3. 4. 기타

전열보병은 전투에서 종대, 방진, 열의 세 가지 대형을 주로 사용했다. 17세기 중반부터 소형 화기가 보병 부대에 널리 채택되면서, 전장은 보병을 어깨를 맞대고 길게 늘어선 얇은 선으로 정렬시켜 일제 사격을 가하는 선형 전술이 지배하게 되었다.

병사들은 장교의 명령에 따라 일제 사격을 하도록 훈련받았지만, 실제로는 전투 초반 몇 분 동안만 그렇게 이루어졌다. 한두 번의 일제 사격 이후에는 각자 재량으로 소총을 장전하고 사격하여 장교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이는 체계를 무너뜨렸고, 화약 연기는 정확한 사격을 방해했다. 이러한 연기 속의 총격전은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었고, 그 결과는 예측 불가능했다. 또한,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지는 동안 병사들은 사격에 너무 집중하여 측면에서 기병의 공격을 감시하지 못했다. 이러한 이유로, 경험 많은 장교들은 이러한 불확실한 교전을 피하려고 노력했고, 병사들이 너무 일찍 사격하지 않도록 자제시켜 적의 대열에 최대한 가까이 접근하여 짧은 거리에서 몇 차례의 치명적인 일제 사격을 가할 수 있도록 했다. 어떤 경우에는 근거리에서 단 한 번의 일제 사격으로 적을 격파할 수 있었다.

종대는 최대의 화력을 배치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기본적인 전투 대형으로 간주되었다. 주변의 적 기병에 대항하여, 종대 보병은 신속하게 보병 방진 대형을 채택하여 보호를 제공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방진은 창병과 구식 머스킷병의 방진과는 달리 속이 비어 있었다.

산병 대형의 병력은 엄폐물을 사용하고 주도권을 가질 수 있었지만, 기병에 매우 취약했고 진격하는 보병 종대에 맞서 지상전을 펼칠 수 없었다. 종대 보병은 위협받을 경우 산병과 기병이 후퇴할 수 있는 "방어선"을 제공했다.

종대 대형에서의 이동은 느렸고, 연대가 훌륭하게 훈련되지 않은 한, 특히 고르지 않거나 숲이 우거진 지형에서는 대형이 붕괴될 수 있었다. 그 결과, 종대는 주로 사격 대형으로 사용되었고, 병력은 종대 대형으로 이동한 다음 목적지에 도착하여 종대로 배치되었다. 일반적으로 종대는 이동 및 백병전 공격에 사용되었다.

전열보병은 사격술 훈련을 받았고, 이 훈련의 주요 목표는 종대의 신속한 배치, 신속한 사격 및 기동이었다. 전열 보병은 장교의 간단한 호령이나 북 소리에 따라 행동했으며, 그 이동은 도보였다. 횡대의 전원이 거의 같은 정도의 보폭(75cm 전후)이 되도록 신장의 기준이 마련되었고, 1분당 보폭 수는 70~90보(약 60m/분)가 기준 보행 속도였다. 이에 북 소리에 의한 지시가 주어지면서 속도가 조정되었다.

병사들은 신속하게 각종 밀집 진형을 갖출 수 있도록 일상적으로 훈련받았으며, 적병을 위압하기 위해 위압색이라고 불리는 화려한 색채의 제복을 착용했다. 머스킷총[24]과 총검, 자위용 칼이 주된 장비였던 전열 보병 [https://www.vondonop.org/images/Musketeer.JPG (참조: 헤센의 장비 예시)]은 공격 시 그림처럼 단순한 3열 횡대로 운용[25]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방어 시에는 횡대를 재구성하여 사각진형을 갖출 수 있다면 충분한 수준이었다.

전열보병의 기본적인 운용은 다음과 같았다.

# 병사들은 호령에 따라 머스킷총에 장전한다.

# 진형을 유지한 채 행진하여 적진에 접근한다.

# 적진과의 거리가 100m 정도가 되면 행진 속도를 늦춘다.

# 적진에서 50m 정도 되는 지점에서 정지한다.

# 호령에 따라 머스킷총을 적진을 향한다.

# 열 단위로 적진을 향해 일제 사격, 재장전, 다시 일제 사격 (반복)

# 적진이 충분히 혼란에 빠져 진형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호령에 따라 총검을 장착한다.

# 호령에 따라 적진에 돌격한다.

# 적병과 접촉하면 능숙하게 찔러 죽인다.

당시 전투에서는 교전 중에 진형을 유지할 수 없게 된 시점에서 조직적인 전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어, 붕괴된 진을 지휘하는 장교는 그 시점에서 항복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공격과 방어 모두 상대의 진형을 붕괴시키는 것이 전투의 주된 목적이 되었다.

적진에 대한 공격은 전열 보병에 의한 일제 사격과 착검 돌격 외에, 칼, 창을 든 기병의 돌입, 포병에 의한 유탄, 산탄(포에서 발사되는 산탄) · 포탄을 지표면에서 바운스시키는 공격 등과 같은 수법이 사용되었다.

전열 보병에게 요구된 것은 이러한 정면 공격의 공포를 극복하고 진형을 유지하는 것과 지휘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것이었으며, 전투 중에 함부로 발포하거나 진형을 무너뜨린 자는 감독자인 장교에게서 징벌을 받았고, 도망을 시도한 자는 사브르로 참살당했다.

4. 무기와 장비

전열보병은 머스킷 사격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갑옷이 너무 비싸고 무거웠기 때문에 대부분 보호 장비를 갖추지 않았다. 다만 척탄병의 구리 미터 캡처럼 이전의 정예 부대만이 전통에 따라 몇 가지 보호 요소를 유지했다.

4. 1. 주무장

16세기 중반, 일부 전열보병의 화승총에는 총검이 장착되었다. 총검은 총구에 부착되어 전열 부대가 백병전에 돌입했을 때 사용되었으며, 기병에 대한 방어에도 도움이 되었다.

17세기 말, 화승총 설계의 결함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이 모색되었다. 화승총은 점화선이라는 천천히 타는 끈을 사용했는데, 이 끈이 때때로 실수로 총기의 화약 저장고에 불을 붙여 화약이 조기에 폭발, 사수에게 심각한 부상이나 사망을 초래했다. 이러한 이유 등으로, 화승총은 프랑스를 시작으로 다른 국가에서도 총사와 같은 가볍고 저렴한 플린트락으로 대체되기 시작했으며, 무게는 5kg이고 구경은 17.5mm였다. 많은 국가에서 새로운 총들은 "머스킷"이라는 이름을 유지했다. 머스킷과 총사 모두 활강총이었는데, 이는 정확성과 사거리를 감소시켰지만, 더 빠른 장전, 적은 양의 총신 오염, 그리고 더 견고하고 덜 복잡한 화기를 만들었다.

활강 머스킷의 정확성은 보병 또는 기병의 열을 상대로 약 274.32m~약 365.76m 범위였다. 그러나 단일 적을 상대로는 유효 사거리가 약 45.72m~약 91.44m에 불과했다. 일반적인 전열 보병은 화약과 납의 비용 때문에 조준 사격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현대 재연자들은 활강 머스킷을 발사하여 훨씬 더 나은 결과를 얻는다). 전열 보병은 빠른 재장전 훈련을 받았다. 신병은 분당 3발을 장전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며, 숙련된 병사는 분당 4~6발을 장전할 수 있었다.[3][4][5] 전투 상황에서는 이 숫자가 감소했으며, 전투 시작 후 몇 분이 지나면 훈련이 잘 된 병사조차 분당 2발 이상을 기대할 수 없었다.[6][7]

4. 2. 부무장

16세기 중반, 일부 전열보병의 화승총에는 총검이 장착되었다. 총검은 총구에 부착되어 전열 부대가 백병전에 돌입했을 때 사용되었으며, 기병에 대한 방어에도 도움이 되었다.

17세기 말, 화승총은 점화선의 문제 등으로 인해 프랑스를 시작으로 다른 국가에서도 총사와 같은 가볍고 저렴한 플린트락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이 플린트락은 무게가 5kg이고 구경은 17.5mm였다. 많은 국가에서 새로운 총들은 "머스킷"이라는 이름을 유지했다. 머스킷과 총사 모두 활강총이었는데, 이는 정확성과 사거리를 감소시켰지만, 더 빠른 장전, 적은 양의 총신 오염, 그리고 더 견고하고 덜 복잡한 화기를 만들었다.

활강 머스킷의 정확성은 보병 또는 기병의 열을 상대로 약 274.32m 범위였다. 그러나 단일 적을 상대로는 유효 사거리가 약 45.72m에 불과했다. 일반적인 전열 보병은 화약과 납의 비용 때문에 조준 사격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전열 보병은 빠른 재장전 훈련을 받았는데, 신병은 분당 3발, 숙련된 병사는 분당 4~6발을 장전할 수 있었다.[3][4][5] 전투 상황에서는 이 숫자가 감소했으며, 전투 시작 후 몇 분이 지나면 훈련이 잘 된 병사조차 분당 2발 이상을 기대할 수 없었다.[6][7]

전열 보병의 대부분은 보호 장비를 갖추지 못했는데, 머스킷 사격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갑옷은 너무 비싸고 무겁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전의 정예 부대만이 전통에 따라 몇 가지 보호 요소를 유지할 수 있었는데, 예를 들어, 척탄병의 구리 미터 캡이 있었다.

4. 3. 보호 장비

전열 보병 대부분은 보호 장비를 갖추지 못했는데, 머스킷 사격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갑옷은 너무 비싸고 무겁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전의 정예 부대만이 전통에 따라 몇 가지 보호 요소를 유지할 수 있었는데, 예를 들어 척탄병의 구리 미터 캡이 있었다.[3]

5. 다른 보병과의 관계

전열보병은 고대부터 존재했던 밀집 진형을 갖춘 중장보병의 계보를 잇는 병과로, 야전군의 핵심이었다. 야전에서 전열보병은 산병으로 운용되는 경보병이나 엽병, 기병, 포병 등의 다른 병과 지원을 받으며 적의 주력인 전열보병을 격파하는 것이 주요 역할이었다. 18세기 무렵까지는 척탄병이라 불리는 수류탄 투척 선발 보병이 있었지만, 시대가 흐르면서 척탄 전투는 사라지고 전장에서의 기능은 전열보병과 거의 같아졌다. 다만 근대 이후에도 "척탄병"은 체격, 체력, 무용, 전기, 정신력 등이 뛰어난 병사를 선발한 엘리트 부대로서 명칭만 남아 있었다.

전열보병은 "Musketeer"라는 이름처럼 총병대로, 창 대신 머스킷총검이 보병의 주 장비가 되면서 직업 군인의 우위가 사라진 30년 전쟁 무렵부터 보편화되었다. 스위스 용병이나, 헤센 병사[22] 와 같은 용병(주로 다중 채무자나 범죄자로 구성)이나, 징병된 일반인을 소수의 전문가에 의한 짧은 훈련을 통해 대량으로 전력화할 수 있다는 이점 때문에 널리 채택되었다.

19세기 중반, 미니에 소총과 근대적인 후장식 포의 등장으로 전열보병의 밀집 진형과 흑색 화약 연기 속에서 적과 아군 식별, 위협을 위해 화려한 원색을 사용한 군복[23]은 장거리 사격의 표적이 되어 사상자가 급증했다. 이에 따라 보병 운용은 밀집을 피하고 주변 환경에 숨어 행동하는 산병의 침투 전술 중심으로 변화했고, 전열보병은 쇠퇴했다.

전열보병 소멸 이후에도 반동기 개발에 의한 화포 연사 속도 향상, 근대 폭약에 의한 유탄 위력 향상, 무연 화약 보급에 따른 화기 사정, 위력, 명중 정확도 향상과 시계 개선, 기관총과 철조망 등장으로 야전에서 보병 사상률은 더욱 증가했다. 병사 군복은 눈에 띄지 않는 암색 계통이나 보호색으로 변화했고, 최종적으로 위장복에 이르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전국 시대 말기에 조총아시가루를 주력으로 하는 전열보병과 비슷한 병과가 있었다. 그러나 일본에 전래된 화승총은 당시 유럽과 달리 인도·동남아에서 개량된 파생품이었고, 저격에 적합한 순발식이었기에 궁술과의 유사성에서 저격 기술을 터득하는 독자적인 조총술이 확립되었다. 조총 아시가루는 각자 무공을 겨루는 소집단의 집합체였기에 전열보병과 본질적으로 달랐다. 시마바라의 난 이후 도쿠가와 막부의 국내 안정화 정책 하에 아시가루는 귀농했고, 무사 계급을 총포에서 격리시키는 정책으로 조총 아시가루 운용은 형해화된 병학으로만 전승, 에도 시대 중기에 사실상 절멸했다.

일본에 서양식 전열보병 도입은 에도 시대 후기에 이루어졌다. 다카시마 슈호는 열강과의 화포 성능, 운용 차이를 인지하고 네덜란드식 군제 도입을 시도, 1834년 나가사키 경호를 맡았던 사가번이 도입했다.[26]

아편 전쟁에서 청나라 패배를 알게 된 도쿠가와 막부도 1841년 도쿠마루가하라에서 슈호의 서양식 군제 공개 연병을 실시, 여러 번에서 도입이 검토되었지만, 슈호 투옥 등 곡절[28]을 거쳐 1862년에야 서양식 군제 막부 육군이 발족했다. 사가번이 다카시마 슈호 지도 하에 서양식 군제를 도입한 지 약 30년 후였고, 그 사이 사가번, 사쓰마번, 우와지마번 등은 선진 군사력을 구축, 막부와의 실력 차이는 컸다.

막부에게 불운하게도 이 시기는 화기 발전기와 겹쳐 1862년 발족한 막부 육군과 여러 번이 도입한 머스킷총(일본에서 게베르총) 주체 전열보병 방식은 시대에 뒤떨어졌다. 제2차 조슈 정벌에 참전한 막부 육군과 여러 번 병사는 시모노세키 전쟁 참패 후 오무라 마스지로 지도 하에 군제 개혁을 실행, 장사정, 고명중 미니에총(엔필드총)을 장비하고 산병 중심 보병 운용을 구축했던 조슈 제대에 참패했다.[29]

이 패배로 1866년 도쿠가와 요시노부 아래 대규모 프랑스식 군제로 변경, 막부 육군 전열보병 운용은 4년 만에 종료되었지만, 군사 기술을 막부 경유로 얻었던 여러 번에게는 보신 전쟁 종결까지 “정당한” 서양식 군제로 운용, 진화된 군제, 장비를 갖춘 신정부군에 패배를 거듭했다.

메이지 유신으로 신제 막부 육군과 서남 웅번 혼성군이었던 신정부군은 통합되어 일본 육군이 되었고, 1872년 1869년판 프랑스식 보병 교전 규칙이 도입되어 근대군 운용이 시작되었다.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프랑스군 패배[30]와 프랑스식 육군 최고위 사이고 다카모리가 일으킨 1877년 세이난 전쟁, 1878년 다케바시 사건으로 프랑스 모델 방침이 흔들리고 프로이센 모델 관심이 높아져 1891년 프로이센식 보병 교전 규칙이 도입, 이후 대일본 제국 육군 종언까지 독일식 보병 운용이 계승되었다.

5. 1. 창병

초기 화기를 장비한 병사들은 기병의 공격에 취약했기 때문에, 대부분 군대에서 창병이 보병의 대다수를 차지했다. 17세기 중반까지 선형 대형으로 배치된 머스킷병이 서유럽 군대 보병의 절반을 차지했지만, 총검이 발명된 후 머스킷병이 적 기병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게 되면서 창병의 비율은 점차 감소했다. 1699년 오스트리아군을 시작으로 1703년 프랑스군, 1704년 영국군, 1708년 네덜란드군이 창을 포기했다. 표트르 1세는 1699~1721년에 거의 모든 러시아 보병 연대를 선형 보병으로 전환했다. 창을 포기하고 새로운 플린트락 머스킷과 종이 탄약통이 도입되어 더 빠른 발사가 가능해지면서, 근접전을 중시하는 창병에게 더 적합한 부대 대형이 보병 부대의 화력을 극대화하는 얕은 선으로 대체되었다.

5. 2. 경보병

18세기 후반부터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경보병은 주로 강선 소총과 조준 사격 및 엄폐물 사용 훈련을 받은 소총(독일 예거 등)으로 구성되었다. 경보병은 선형 보병이 사용하는 밀집 대형과 달리 확산 대형(산병 대형)으로 작전을 수행했다.

영국에서는 많은 경보병이 평탄한 강선의 머스킷총을 장비했으며, 소수의 연대만이 강선 머스킷총을 사용했다.[8]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혁명 전쟁나폴레옹 전쟁 동안 근위대, 선형 보병, 경보병으로의 구분이 형식적으로 유지되었으며, 선형 및 "경" 연대는 동일한 무기(평탄한 강선의 소총)와 전술을 사용했다. 그러나 선형 및 "경" 연대의 각 대대에는 산병으로 활동하고 선으로 배치될 수 있는 볼티져 부대가 포함되었다.[9]

러시아 제국에서는 경보병이 매우 빠르게 형성되었고, 18세기 말에는 경보병 연대가 총 4만 명(''예거'')에 달했다. 경보병은 선형 보병과 무장이 달랐는데, 고품질 머스킷총과 권총(근접전용)을 장비했다.[10][11] 파벨 1세의 실패한 군 개혁 이후 러시아 군대의 경보병 수는 크게 감소하여 전체 야전 보병의 8%에 불과했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곧 18세기에 시작된 경보병 수를 늘리는 추세로 돌아섰다. 1811년까지 러시아군에는 50개의 경보병 연대가 편성되었다. 또한 각 선형 대대는 100명의 최고의 사격 병사를 보유하여 적의 산병으로부터 대대를 방어해야 했다. 경보병의 총 수는 전체 야전 보병의 40%에 달했다. 경보병 수의 급증은 훈련 및 장비의 질에 큰 영향을 미쳤다.[12][13] 1854년의 러시아 보병은 108개 연대로 구성되었으며, 그 중 42개는 선형 보병이었다. 나머지는 근위대, 척탄병, 예거와 같은 전문 부대 또는 정예 부대였다.[14] 러시아 경보병의 일부만이 M1854 소총을 장비했고, 나머지는 평탄한 강선식의 타격 머스킷총을 유지했다.[15]

6. 쇠퇴

미니에 탄환을 사용하는 소총과 후장식 소총의 등장은 전열보병의 쇠퇴를 가속화했다. 미국 남북 전쟁에서 정렬된 대형으로 걷는 병사들은 미니에 탄환을 사용하는 소총의 쉬운 표적이 되었다.[16]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는 후장식 소총이 전장식 소총보다 우월함을 보여주었다. 1860년대에 대부분의 독일 국가와 러시아는 전열보병 대신 소총과 산병 전술을 사용하는 '통합' 보병으로 전환했고,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후 독일 제국과 프랑스 제3 공화국도 같은 조치를 취했다.

소총의 정확성과 사거리, 발사 속도 증가는 물론 1883년 맥심 기관총의 발명은 전열보병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또한, 향상된 무기로 인해 공격적인 기병이 전장에서 효과적으로 제거되면서 기병에 대한 전열보병의 방어적 이점도 무의미해졌다. 20세기 초, 보병은 훈련을 위해 전열보병 훈련을 유지하면서도 전투에서는 경보병 전술을 채택하게 되었다.

6. 1. 원인

전열 보병은 고대부터 존재했던 밀집 진형을 갖춘 중장보병의 계보를 잇는 병과로, 야전군의 핵심이었다. 야전에서 전열 보병은 산병으로 운용되는 경보병, 엽병, 기병, 포병 등의 다른 병과 지원을 받으며, 적 주력인 전열 보병을 격파하는 것이 주요 역할이었다. 18세기까지 척탄병이라 불리는 수류탄 투척 선발 보병이 유럽 각국 군대에 존재했지만, 시대가 흐르면서 척탄병은 전열 보병과 거의 같아졌다. 다만 근대 이후에도 "척탄병"은 엘리트 부대로서 명칭만 남았다.

전열 보병은 총병대로, 창 대신 머스킷총검이 보병 주 장비가 되면서 직업 군인의 우위가 사라진 30년 전쟁 무렵부터 각국 군대에 편성되기 시작했다. 스위스 용병이나 헤센 병사[22] 같은 용병, 징병된 일반인을 소수 전문가에 의한 비교적 짧은 기간 훈련을 통해 대량으로 전력화할 수 있다는 이점 때문에 널리 채용되었다.

19세기 중반, 미니에 소총과 근대적인 후장식 포 출현으로 총포가 비약적으로 발달하자, 전열 보병의 밀집 진형과 흑색 화약 연기 속에서 적과 아군 식별을 위해 화려한 원색을 사용한 군복[23]은 장거리 사격의 좋은 표적이 되었다. 이로 인해 사상자가 크게 늘면서 보병 운용은 산병에 의한 침투 전술 중심으로 바뀌었고, 전열 보병은 급속히 쇠퇴했다.

전열 보병 소멸 이후에도 화포 연사 속도 향상, 유탄 위력 향상, 무연 화약 보급에 따른 화기 사정, 위력, 명중 정확도 향상 및 시계 개선, 기관총과 철조망 등장으로 야전에서 보병 사상률은 더욱 증가했다. 이에 따라 병사가 착용하는 군복은 눈에 잘 띄지 않는 암색 계통이나 보호색으로 변화했으며, 최종적으로 현재와 같은 위장복에 이르게 되었다.

6. 2. 결과

나폴레옹 전쟁 이후 수년 동안, 전열보병은 주력 전투 부대로 계속 배치되었고, 경보병은 화력 지원을 제공하고 부대의 이동을 엄호했다. 러시아,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및 일부 다른 국가에서는 19세기 후반까지 선형 전술과 대형 훈련이 유지되었다.

새로운 무기의 발명으로 인해 전열보병의 개념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향상된 소총 탄약인 미니에 탄환은 개별 보병이 더욱 정확하고 훨씬 더 먼 거리에서 사격할 수 있게 하여, 정렬된 대형으로 걷는 병사들은 쉬운 표적이 되었다. 이는 미국 남북 전쟁에서 증명되었다.[16] 1866년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은 개별 사수에게 엎드린 자세에서도 재장전할 수 있는 능력과 함께 획기적으로 향상된 발사 속도를 제공하는 후장식 소총이 전장식 소총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860년대에 대부분의 독일 국가와 러시아는 전열보병과 사수를 소총과 산병 전술을 사용하는 '통합' 보병으로 전환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후 독일 제국과 프랑스 제3 공화국도 같은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영국은 1853년부터 강선 머스킷을 사용하고 1867년부터 후장식 소총을 사용했으며, 보어 전쟁 동안 폐쇄 대형에서 산개 대형으로 전환했음에도 "전열보병"이라는 이름을 유지했다.

소총의 정확성, 사거리 및 발사 속도의 증가와 1883년 맥심 기관총의 발명은 밀집 대형의 전열보병이 적과 근접하기 전에 막대한 손실을 입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했으며, 기병에 대항한 전열보병에게 주어진 방어적 이점은 향상된 무기로 인해 공격적인 기병이 전장에서 효과적으로 제거되면서 무의미해졌다. 20세기 초에 접어들면서 이는 보병이 훈련을 위해 전열보병 훈련을 유지하면서 전투에서 산병 스타일의 경보병 전술을 점점 더 채택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19세기 중반, 미니에 소총과 근대적인 후장식 포와 같이 총포가 비약적으로 발달하자, 전열 보병의 밀집 진형과 흑색 화약의 짙은 연기 속에서 적과 아군 식별 및 위협을 위해 화려한 원색을 많이 사용한 기존의 군복[23]은 장거리 사격의 좋은 표적이 되어 사상자가 격증했다. 따라서 보병의 운용은 위험을 분산하기 위해 밀집을 피하고 주변 환경에 숨어 행동할 수 있는 산병에 의한 침투 전술이 중심이 되었고, 전열 보병은 급속도로 쇠퇴해 갔다.

7. 현대의 전열보병

19세기 후반, 여러 유럽 군대는 선형 전투 전술이 시대에 뒤떨어졌음에도 "전열 보병"(또는 기병) 명칭을 유지했다. 이 명칭은 특수 부대나 정예 부대와는 달리, 군대의 정규 또는 번호가 매겨진 연대를 의미했다. 예를 들어, 1914년 벨기에군 전투 서열은 14개 연대의 ''Infanterie de Ligne''(전열 보병) 등으로 구성되었다.[17][18]

이 용어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 부대에서도 사용되었다. 1945년 4월 말 782 전차 대대의 보고서에 따르면, 대대는 독일 오버코츠아우에서 분지델로 이동하여 97 사단의 연대 전투 팀에 배속되었다. A 중대는 독일 레하우에서 303 연대에, B 중대는 독일 아르츠부르크에서 386 연대에, C 중대는 독일 발트사센에서 387 연대에 합류했다.[19]

영국 육군은 역사적 이유로 의례 행사에서 "근위대", "전열 보병", "소총병" 간의 구분을 유지한다. 이는 영국 육군 내 서열 및 연대적 자긍심과 연결되어 있다.[20] 캐나다 육군 또한 이러한 구분을 유지하며, 보병 연대는 근위 보병, 사총병 등으로 편성되었다.[21]

대부분의 21세기 군대 보병은 여전히 대열 기동과 훈련을 받으며, 이는 규율과 부대 결속력을 심어주는 방법이다. 미국 육군과 해병대는 전통적인 보병 역할을 수행하는 중대를 지원 중대와 구별하기 위해 "전열 중대"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참조

[1] 서적 The Later Thirty Years War: From the Battle of Wittstock to the Treaty of Westphalia (Contributions in Military Studies) Praeger 2003
[2] 서적 'The Concise Oxford Dictionary' 1984
[3] 서적 Napoleonic infantry Cassell 2002
[4] 서적 Firepower : Weapons Effectiveness on the Battlefield, 1630-1850 Da Capo Press 1997
[5] 서적 Waterloo 1815 C.H.Beck 2015
[6] 서적 With musket, cannon, and sword : battle tactics of Napoleon and his enemies Constable 1997
[7] 서적 Imperial Bayonets : Tactics of the Napoleonic Battery, Battalion and Brigade as Found in Contemporary Regulations Greenhill Books 1996
[8] 서적 British Light Infantry & Rifle Tactics of the Napoleonic Wars Bloomsbury Publishing
[9] 웹사이트 Napoleon, His Army and Enemies. http://napoleonistyk[...] Zbynio Olszewski (webmaster) 2015-02-17
[10] 웹사이트 «По званию легкой пехоты…». Повседневная жизнь Русской армии во времена суворовских войн https://history.wiki[...]
[11] 웹사이트 А! - Примечания о пехотной службе вообще и о егерской особенно. Основной текст http://adjudant.ru/r[...]
[12] 문서 ru:Егерские полки Российской империи
[13] 문서 Правила рассыпного строя или наставление о рассыпном действии пехоты. 1818г. http://www.reenactor[...]
[14] 서적 The Russian Army of the Crimean War 1854-56 https://archive.org/[...] Bloomsbury USA
[15] 서적 The Russian Army of the Crimean War 1854-56 https://archive.org/[...] Bloomsbury USA
[16] 서적 'The American Pageant' 1987
[17] 서적 Les Soldats de Leopold Ier et Leopold II D 1986/0197/03
[18] 서적 The Belgian Army in World War I
[19] 간행물 782nd Tank Battalion (1945). World War Regimental Histories
[20] 서적 A Brief History of The Princess of Wales's Royal Regiment http://www.army.mod.[...] army.mod.uk 2017-08-22
[21] 웹사이트 Dress instructions ! Annex B Royal military colleges and infantry regiments https://www.canada.c[...] Government of Canada 2024-06-09
[22] 문서 ヘシアン(Hessian)とは、ヘッセン大公国出身のドイツ人傭兵を指し、アメリカ独立戦争に際してイギリス軍が鎮圧のために送った兵力のうち3万人にも上る大勢力だった。彼らは新大陸に移民していたドイツ系アメリカ人|ドイツ系入植者達とも戦火を交える事になったが、うち5,500人ほどは独立後も新大陸に留まりアメリカ人となった。ちなみにアメリカの怪奇伝説として知られる「スリーピー・ホロウ」は、この時期のヘシアンの話が元になっている。
[23] 문서 スタンダールの『赤と黒』のタイトルは、当時の軍服の色である赤と僧衣の色である黒を、その一方あるいは両者を栄達の手段として捉える青年の行動を通じて、当時の世相を描いたことに由来する。
[24] 문서 19世紀初頭までイギリス軍で使用され、戦列歩兵の標準装備だった“Brown Bessマスケット銃”(銃身長:106cm・滑腔式)の有効射程は100ヤード(91m)に過ぎなかった。
[25] 문서 18世紀のマスケット銃に使われたフリントロック式|燧石式発火装置は、不発の発生率が高く、素早い装填時間を加味しても充分な弾幕を形成するためには3列横隊の順次発砲が必要だった。これが銃用雷管|雷管式に替わると不発率は低下し、再装填の速度が更に向上したため、2列の横隊が主流となった。
[26] 문서 当時の日本では足軽の大集団が既に消滅していたため、帯刀する事がステータスである武士達が戦列歩兵として訓練に参加していた。
[27] 문서 徳川慶喜は将軍就任以前の1863年から京都・大阪で政務に当たっており、江戸の将軍家よりも積極的な軍事行動を取っていた。フランスとの密接な関係を利用して軍制改革に取り組んでいた事がうかがえる(この時期新撰組までがフランス式調練を導入している)。
[28] 문서 公開演習の成功で幕府から重用されるようになった高島秋帆だったが、これを妬んだ鳥居耀蔵(洋学者を嫌い蛮社の獄も引き起こし『妖怪』と呼ばれた)が“謀反を企んでいる”と讒訴した事で1842年に投獄され、1853年のペリー来航によって赦され、再度幕府の講武所に登用された。
[29] 문서 ミニエー銃を装備した軍隊とマスケット(当時の日本ではゲベール銃と呼んだ)を装備した軍隊が交戦した場合、マスケット側は有効射程の100ヤード(しかも命中率は50%)まで接近するために最大で900ヤードに渡る死のロードを、友軍の屍を乗り越えつつひたすら進まねばならなかった。
[30] 문서 プロイセン軍よりも装備や戦術で勝っていたフランス軍の敗因は、周到な戦争準備を進めていたプロイセンへの警戒を怠り、オットー・フォン・ビスマルク|ビスマルクの罠にはまったナポレオン3世の戦略眼の無さと、大陸軍を擁する自国の軍事力への過信にあった。
[31] 웹사이트 Glory Glory - Internet Movie Firearms Database - Guns in Movies, TV and Video Games http://www.imfdb.org[...]
[32] 웹사이트 1864 - Internet Movie Firearms Database - Guns in Movies, TV and Video Games http://www.imf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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