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경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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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경궁은 광해군 시기에 창건된 궁궐로,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경복궁을 대신하여 새로운 궁궐로 건설되었다. 인왕산 아래 사직단 북쪽에 위치했으며, 경덕궁(경희궁)과 함께 건설되었다. 인경궁 건설에는 막대한 재원이 소요되었으며, 이충의 주도하에 목재와 석재, 기와 등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었다. 인조반정 이후 인경궁은 훼철되었고, 전각들은 창덕궁과 창경궁으로 이건되었다. 현재 인경궁의 터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 후 왜구가 부산으로 쳐들어와 서울로 진격하자, 선조와 왕실 가족들은 의주까지 피난을 갔다. 이 과정에서 신분이 낮은 백성들이 봉기하여 왕실의 사유 곳간을 털고 장례원(掌隷院)과 형조(刑曹)에 보관중인 노비문서를 태웠으며,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을 포함한 왕실 가족들의 저택과 병조판서 홍여순의 집도 불태웠다.[9]
2. 임진왜란과 궁궐 소실
2. 1. 경복궁의 전소와 덕수궁의 등장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왜구가 부산으로 쳐들어와 서울을 향해 진격하자, 선조와 왕실 가족들은 도성을 빠져나가 의주까지 피난을 갔다. 이 과정에서 신분이 낮은 백성들이 봉기하여 왕실의 재물을 약탈하고 궁궐에 불을 질렀는데,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세 궁궐이 모두 불타는 피해를 입었다.[9]
선조는 명나라의 도움으로 왜적이 물러간 후 돌아왔으나, 세 궁궐이 모두 불타 머물 곳이 없었다. 경복궁 자리에 초막을 짓고 거처하려 했으나 대신들의 만류로, 월산대군의 집을 임시 거처(행궁, 시어소)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 집은 당시 서울에서 가장 큰 2층 구조의 사가(私家)였으며, 현재 덕수궁 석어당이다.[11]
전후 수습이 안정된 후, 광해군은 창덕궁을 복구하고 1611년 그동안 머물렀던 별궁(서궐)에 경운궁(덕수궁)이라는 궁호를 지어주고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경복궁 중건은 끝내 외면하여, 경복궁 중건 계획은 취소되었다.
2. 1. 1. 법궁 논란과 창덕궁
조선 초기부터 법궁은 경복궁이었다. 그러나 규모는 컸지만 왕이 편안하게 거처하기에는 불편한 점이 있었다. 그래서 역대 왕들은 중요한 행사만 경복궁에서 치르고 평상시에는 주로 창덕궁에 머물렀다.[16]
광해군은 즉위 후 창덕궁을 복구하고 경운궁(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단종과 연산군이 폐위된 곳이라 하여 다시 경운궁으로 돌아갔다. 광해군은 경복궁 중건 계획을 취소했고, 이로 인해 창덕궁이 경복궁을 대신하여 270여 년 동안 정궁 역할을 하게 되었다.
광해군은 인왕산 아래에 검소하게 새 궁궐을 지으라고 명했는데, 이것이 인경궁 역사의 시작이었다.[16]
3. 인경궁 창건

광해군은 인왕산 아래 사직단 북쪽에 인경궁을 짓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궁 정도의 크기로 지을 예정이었으나, 선수도감 이충(李沖)이 경복궁 중건에 사용될 목재를 벌채하면서 규모가 커졌다.[17]
원래는 관동 지방의 금강송을 사용할 계획이었다. 목재는 태백산 줄기에서 자라는 금강송인데, 고성, 울진, 삼척 등에서 자라는 소나무를 가져올 계획이었다. 그런데 왕이 명령한 비망기(備忘記)[18]가 도감에 전달되고, 이 전교를 받은 정부의 감역관(監役官)이 내려가서 재목을 베게 되는 절차를 어기고, 선수도감 이충이 먼저 공문을 보내어 재목을 베는 과정에서 경복궁 중건에 사용 할 대목(大木)을 벌채한 것이 인경궁 공사를 크게 일으킨 원인이 되었다.
궁성의 담장은 양쪽의 담을 같이 하였으나, 그 크고 화려한 집(殿宇)은 서로 달라서 실로 두 개의 대궐이었다. 새(新) 대궐의 남쪽 담장이 사직의 담장과 붙게 되었고, 순라길이 막히게 되어 사직의 담장을 헐어 안으로 옮겨 쌓거나 예전대로 두고, 신궐의 남쪽 담장을 조금 안쪽으로 들여 쌓자는 논의가 있었다. 태조가 세운 사직은 중하게 받들어 허물면 안되고, 그 안으로 담을 쌓게 되면 새로 지을 정전(正殿)의 뒷편이 몹시 좁아서 제대로 모양을 이루지 못할 만큼 사직 담장 가까이 있었다.[5]
또 하나의 대궐은 인왕동에 있었는데, 바로 소세양(蘇世讓)의 청심당[6][7]터이다.
3. 1. 영건도감 이충의 역할
이충은 경복궁 중건용으로 지정된 완도의 대목(大木) 216조와 변산반도 재목 3,220여 개를 인경궁 건설에 사용하여 공사 규모를 키웠다.[17][20] 원래는 관동 지방의 금강송을 사용할 계획이었으나, 왕명보다 먼저 이충이 공문을 보내 경복궁 중건용 목재를 벌채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광해군은 이 일로 경복궁 중건이 어려워졌다고 판단했다.[19]
이충은 공홍도와 안면도 등지의 재목 9천여 그루를 추가로 베어오는 등 영건도감 제조로서 토목공사 감독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그는 환관들에게 아첨하며 토목공사를 화려하게 추진하여 민폐를 일으키고 대신들의 미움을 샀다. 창덕궁과 경회루를 지은 박자청과 비교되기도 하지만, 이충은 추진력과 자질은 미흡했으나 원망을 받으면서도 궁궐 공사에 힘썼다. 광해군은 이충의 노력으로 경복궁 중건 대신 인경궁 규모를 확대하기로 결심했다.
이충은 흠경각(欽敬閣) 제작에도 참여했다.[25] 흠경각은 세종 때 장영실이 만든 자동 물시계인 옥루기륜을 설치한 곳으로, 시각, 방위, 계절을 측정하는 중요한 시설이었다. 광해군은 흠경각 교정을 마친 이충을 총애하여 영건도감으로 임명하고 여러 궁궐을 짓게 했다.[25]
3. 2. 경덕궁(경희궁) 건설
광해군은 새문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정원군의 옛집터에 경덕궁(慶德宮, 훗날 영조가 경희궁으로 개칭)을 건설했다.[26] 1617년(광해군 9년)부터 3년에 걸쳐 흥화문, 숭정전, 융복전, 집경당, 흥정당, 회상전 등 1,500여 칸 규모로 지어졌으며, '셋째 대궐'이라고도 불렸다.[27][6]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경덕궁에 거처하지 못했고, 정원군의 아들 인조가 왕위에 올라 경덕궁에서 정사를 보았다. 이괄의 난(1624년, 인조 2년)으로 창덕궁과 창경궁이 불타자, 인조는 경덕궁으로 돌아와 머물렀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당시에도 피난 후 경덕궁으로 환궁했다.
이후 현종, 숙종, 경종, 영조, 정조, 순조, 헌종 등이 경덕궁(경희궁)을 사용하였다.
4. 인경궁 공사와 재정
광해군은 인경궁과 경덕궁(현 경희궁), 경운궁(현 덕수궁) 확장 공사를 동시에 진행하면서 재정난에 직면했다.
인경궁은 광해군 9년(1617) 인왕산 아래 사직단 북쪽에 터를 잡아 짓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궁 정도의 크기로 계획되었으나, 선수도감 이충이 경복궁 중건에 사용할 완도의 대목(大木) 216조와 변산반도 재목 3,220여 개를 함부로 벤 것이 발단이 되어 규모가 커졌다. 광해군은 금강송을 베어오도록 지시했으나, 이충은 왕명을 어기고 대목을 벌채하여 인경궁 공사를 크게 일으켰다.[20]
이충 등은 임금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각 도(道)의 금산(禁山)의 대목을 함부로 베고, 충청도 안면도 등지의 재목 9천여 그루를 더 베어 공사에 사용했다. 이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토목공사에 몰두했으며, 환관들에게 아첨하여 공사를 화려하게 추진했다. 이로 인해 민폐가 발생하고 대신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광해군은 결국 경복궁 중건을 포기하고 인경궁 규모를 키우기로 결정했다.
광해군은 1617년(광해군 9) 경운궁 확장 공사를 시작했으나, 인경궁, 경덕궁 공사와 겹쳐 재정 조달이 어려워지자 1618년 경운궁 공사를 포기하고 석어당과 즉조당만 남긴 채 다시 헐어 그 자재를 인경궁과 경덕궁 축조에 사용했다.
4. 1. 부차 전투와 인경궁 공사 지연
광해군은 명나라의 요청으로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아 13,000명의 군사를 파병했다. 광해군 10년(1618) 10월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은 명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후금을 공격했으나, 이듬해 2월 부차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 군인 8,000~9,000명이 사망했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인경궁 공사에 동원되었던 승군(僧軍)[28]이었다. 이로 인해 인경궁 공사는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광해군은 강홍립에게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는 밀지를 보냈고, 강홍립은 패전 후 후금에 투항하며 조선군의 출병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밝혔다. 후금은 이를 받아들여 조선군 포로를 석방했다. 광해군은 명나라가 쇠퇴하고 후금이 강성해지는 국제 정세를 파악하고 중립 외교 정책을 펼쳤다.
광해군 11년(1619) 3월, 경덕궁 공사는 끝났지만 인경궁 공사는 착공한 지 9년째 이어지고 있었다. 전당(殿堂)은 완성되었으나, 궁녀들의 거처와 각 아문(衙門)은 아직 지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미포(米布)를 담당하며 공사를 추진해 온 제조(提調) 이충(李沖)이 사망하면서 공사는 더욱 어려워졌다.[29]
이충은 경복궁 중건에 사용될 목재를 함부로 베어 인경궁 공사 규모를 키운 장본인이었으나, 원망을 받으면서도 나랏일에 힘썼다. 그는 두 대궐 공사를 주도하고 왕의 뜻에 영합하며 온 힘을 다했다. 그러나 당시 정파 싸움에서 학식과 덕망이 부족하고 토목건축에만 재능이 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고, 공사 규모가 지나치게 크다는 비판도 받았다. 이충의 죽음으로 인경궁 공사는 마무리가 더욱 어려워졌다.
4. 2. 인경궁 재원 조달
광해군은 쌀과 포목을 각 도에 부과하여 거두고, 우선 군자창(軍資倉)의 세미(稅米) 3천 섬을 가져다 썼다. 조도사(調度使)·조도장(調度將)등의 관원 1백여 명을 팔도에 보내어 자금을 마련했는데, 면포(綿布) 3,240여 동(同)과 미곡 34,400백여 섬을 거두어 사용했다.[33] 승군(僧軍, 승려로 조직된 군대)을 6백명에서 1천 5백 명으로 늘렸으나 부족하여, 승려들에게 직급(摠攝)을 주어 공사에 동원하고, 군장(軍匠, 군에 입대한 장인)을 추가로 배정하여 도합 5천 8백여 명으로 늘었다. 앞으로 동원될 승군도 많아 식량이 한없이 들어가게 되었고, 이 공사가 끝나면 경복궁을 영건할 계획까지 세워, 미곡 10만 섬과 면포 수천 동을 더 마련해야 했다.[33]청기와 30눌(訥)을 구울 때 사용할 염초(焰硝) 200근은 내수사에서 내려주고, 부족한 염료는 회회청(回回靑, 아라비아 산)으로 수입했다.[33] 청기와를 굽는 장인 22명에게는 서울 부근의 말(馬)을 특별히 하사하고, 일반 기와장이들도 상품을 주어 독려했다.[33] 청기와 2백 눌(訥)을 만들 때 염초(焰硝) 3만 근(斤)과 흙, 숯도 필요했다. 청기와를 쓸 전각(殿閣)을 따로 정했다.[33] 대아련(大牙鍊) 기와가 70여 눌, 중아련(中牙鍊)도 그 정도, 상와(常瓦)도 60여 눌로, 모두 2백여 눌이었다. 각종 기와 및 잡상까지 포함하여 짐바리(馬駄)로 9천 5백여 바리, 수레로 1천 9백여 부(部)가 되는데, 운송비는 쌀 4백여 석, 목면 25동(同, 1동은 쌀 16석)쯤 되었다.[33] 쌀과 포목으로 운송비를 지급하고 수성동(壽城洞) 빈집에 보관하며 공사를 진행했다.[33] 장인(匠人)을 중국에 보내 황기와 굽는 법을 배워오게 하고, 석자황(石雌黃)을 약물(藥物)에 첨가해 색깔을 맞췄다.[34][35] 황기와는 천자가 정전(正殿) 지붕에 쓰는 기와로, 왕·후 이하는 사용하지 못한다.[36] 결국 황기와를 포기하고 청기와(靑瓦)로 화려하게 짓기로 했다.
정경신은 정철(正鐵) 200근을, 김순(金純)은 수레 끄는 소(車牛) 7마리, 소금 1백 섬, 신철(薪鐵) 47부리(夫里), 정철(正鐵) 3천 4백 근, 인가내(刃加乃) 1백 36개, 광과이(廣鍋伊) 1백 25개, 삽 1백 13개, 큰 솥 10좌(坐), 대가리(大加里) 26좌를 바쳤다.[33]
선착장에 배가 없어 숯 1천 5백 섬, 기와 굽는 토목(吐木) 12만 근, 송판 1백 개, 소금 1백 섬을 싣지 못했다. 숯과 토목은 공사장에서 급히 쓸 물건이라, 관찰사에게 배를 정해 3개월 안에 올려 보내도록 했다.[33]
단확(丹艧, 고운 빨간 빛깔의 흙 물감)을 중국에서 수입하려면 은냥(銀兩)이 천(千) 이상이며, 농도를 조절하여 박채(薄彩)와 진채(眞彩)로 구분해 칠한다. 진채로만 칠하면 차이가 크다.[33] 창경궁 채색이 창덕궁보다 나은 것은 진채로 했기 때문이다. 새로 짓는 전당(殿堂) 채색은 창경궁보다 화려하게 칠해야 해서, 물감 값이 매우 비쌌다.[33]
5. 인경궁 주요 전각
인경궁에는 정문인 명화문, 정전인 홍정전, 편전인 광정전, 침전인 경수전 외에도 다양한 전각들이 있었다.
- 명화문(明化門): 인경궁의 정문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건물이었다. 창덕궁 돈화문과 비슷한 모습이었다고 한다.[38] 1622년 벼락을 맞아 개수 공사가 필요했으나, 인조반정으로 인해 완공되지 못했다.[39]
- 흠명전(欽明殿): 인목왕후가 인조반정 이후 거처했던 곳으로, 1632년 인목왕후가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47] 인목왕후 사후 유품을 정리하던 중 발견된 비단에 적힌 글귀 때문에 정명공주가 핍박받는 계기가 되었다.[48][49]
- 함인당(涵仁堂): 침전의 부속 건물로 추정되며, 1633년 창경궁으로 이건되어 함인정(涵仁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창경궁 함인정은 임금이 신하들을 만나 연회를 하거나 국사를 논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 중휘당(重暉堂): 소현세자가 사망한 후 혼궁(魂宮)으로 사용된 곳이다.[50] 이후 인경궁의 동궁은 헐려 창경궁의 저승전(儲承殿)과 평선당(平善堂)을 짓는 데 사용되었다.[51]
- 금천교(禁川橋): 궐내에 금천교를 설치하는 문제로 민가 철거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다른 궁궐의 예에 따라 궐내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누정(樓亭): 광해군이 임진왜란 때 피난했던 곳의 누대(강선루)를 모방하여 경회루와 같은 구조로 연못을 파고 누정을 지으려 했다.[52] 주변에 별당과 정자를 세워 연회, 조정 신하 접견, 무술 시험 장소로 활용할 계획이었으나, 공사가 지연되어 완성되지 못했다.

인경궁 누정(樓亭): 강선루(降仙樓)와 동일하게 조성하려 했고, 광해군이 세자 시절 왜적을 피해 그곳에 관사를 정하여 지낸 적이 있는데, 그 누대를 모방하여 지으려고 재목을 모두 준비하였으나, 공사가 지연되어 미처 이루지 못했다.
5. 1. 헐린 전각과 이건

인조는 인목왕후가 승하하고, 금나라(후금) 사신이 조문 왔을 때 인경궁 홍정전(弘政殿)을 사용하였다.[32] 인조 22년(1644) 홍정전은 헐려 창덕궁 경훈각(景薰閣)으로 이건되었다.[32]

인경궁의 광정전(光政殿)은 창덕궁 선정전(宣政殿)으로 이건되어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며 청기와를 올렸다. 인경궁 경수전(慶壽殿)은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으로 이건되었으나 이괄의 난 때 불탔다.[46] 이후 다시 지어졌으나 1917년에 다시 소실되었고, 1919년에 경복궁에 있던 교태전(交泰殿)을 이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45]
인경궁 함인당(涵仁堂)은 창경궁 함인정(涵仁亭)으로 이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인경궁 경수전 목재의 크기는 다음과 같다.[46]
| 종류 | 길이 |
|---|---|
| 고주(高柱) | 19척 |
| 중고주(中高柱) | 16척 |
| 평주(平柱) | 10척 |
| 상복(上栿) | 21척 |
| 중복(中栿) | 15척 |
| 도리창방(道里昌防) 정간(正間) | 12척 |
| 도리창방(道里昌防) 변간(邊間) | 11척 |
| 별당(別堂) 고주 | 13척 |
| 별당(別堂) 평주 | 10척 |
| 별당(別堂) 도리창방 | 11척 |
6. 인경궁 훼철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인경궁은 훼철되기 시작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이후 악화된 사회 기강과 경제를 수습하고, 명나라와 금(靑)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펼쳐 외교 관계를 안정시켰다. 그러나 이귀 등 서인들은 광해군과 대북파를 몰아내고 인조를 왕으로 옹립하는 정변을 일으켰다.[53]
1623년(광해 15) 3월 12일, 광해군은 창덕궁 후원 어수당에서 연회를 즐기던 중 인조반정 소식을 들었다. 그는 후원 담을 넘어[53]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었으나, 왕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인조는 반정의 명분을 "친명배금의 외교정책과 폐모살제"로 내세웠고, 광해군을 폐륜과 혼군으로 몰아가기 위해 인경궁을 헐어 없애는 등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
6. 1. 인조반정의 명분과 인경궁
인조반정은 광해군과 대북파를 몰아내고, 인조를 왕으로 옹립한 정변이다. 인조는 스스로 왕이 되려고 정변을 철저히 준비하여 반정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반정의 명분을 '''"친명배금의 외교정책과 패륜적 행위인 폐모살제"'''로 삼아 광해를 축출하였다.[54]인조는 명나라의 은혜를 저버리고 오랑캐를 가까이 하며,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을 죽이고 대군을 강화에 유폐하여 죽게 하였으며, 대비 김씨의 존호(尊號)를 폐하여 서궁이라 칭하게 했다. 이는 연산군의 폭정과 비유되며, 반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광해군 시기 신료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면서 철저히 패륜과 혼군으로 몰아갔다.
이러한 명분을 강화하기 위해 폐조(廢朝)의 실정(失政)을 부각시켜야 했기에, 인경궁을 헐어 없애면서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 또한 복위된 인목왕후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김제남의 관작을 복구하였고, 그녀의 소생 정명공주를 깍듯이 대우했다.[54]
6. 2. 이괄의 난과 궁궐 피해
이괄의 난은 인조반정 후 논공행상 과정에서 서인 공신들의 배척으로 이괄이 불만을 품고 일으킨 반란이다. 이괄은 아들을 압송하러 온 금부도사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켜 1624년 2월 8일 예성강을 건넜다. 이날 밤 인조는 숭례문을 통해 한강에 도착했고, 인목대비는 강화로 향했다. 인조는 도성을 돌아보니 창덕궁과 창경궁이 난민에게 불타는 모습을 보았다.[55]이괄의 난으로 궁궐을 떠나 공주시로 피신했던 인조는, 이괄이 패하고 부하에게 죽임을 당한 후, 이괄의 수급(首級)을 확인하고 2월 22일 도성에 들어와 경덕궁(경희궁)에 머물렀다.
6. 2. 1. 세종과 동별궁 터
안국역 바로 옆 풍문여고 자리가 세종이 승하한 동별궁 터이며, 현재는 ‘안동별궁’이란 표지석이 있다. 인조는 정명공주에게 인경궁의 전각 200칸을 하사하여 이 자리에 큰 저택을 짓고 살게 했다.[62]6. 3. 홍제원과 인경궁 재목
인경궁의 재목과 기와를 철거해다가 홍제원(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곳)을 짓는 데 사용하였다.[63]7. 흔적 없는 인경궁
현재 인경궁은 터만 남아있고, 그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효종의 딸들이 인경궁 터에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64]
| 공주 | 내용 |
|---|---|
| 숙안공주 | 익평군(益平君) 홍득기(洪得箕)와 함께 살았다. |
| 숙명공주 | 청평위(靑平尉) 심익현(沈益賢)의 저택에서 1656년 7월 21일 인조의 비 인렬왕후와 며느리 인선왕후, 손자 명종의 비(당시 세자빈) 명성왕후가 초정(椒井)에서 목욕했고, 인렬왕후는 며칠 머물렀다. |
| 숙휘공주 | 인평위 정제현(鄭齊賢)의 옛집을 숙종이 사서 넷째 아들인 연잉군(영조)에게 주었다. 영조 30년(1754)에 창의궁(彰義宮)을 지어, 이 궁 안에 효장묘(사도세자)와, 정조의 형인 의소세손(3세에 요절)을 추모하기 위한 사당을 세웠다. |
| 숙정공주 |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이 인경궁 터에 살았다. |
| 숙경공주 | 흥평위 원몽린(元夢鱗)은 인경궁 터에 집을 지었으나, 송시열 때문에 감히 그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장의동 살던 집에서 죽었다. |
송시열은 옛 터에 공주의 집을 짓는 것은 안 된다고 하며 "경복궁(景福宮)의 옛터에다가도 모두 여러 궁가의 집을 짓게 하시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효종은 인경궁 터에 딸들에게 집을 지어 주면서 정침(正寢)의 터만은 비워두게 하였다. 효종이 승하한 후 아들 현종은 1661년 윤 7월에 눈꺼풀에 다래끼가 생겨 치료를 핑계로 초정에서 목욕했는데, 5일 동안 네 차례나 거둥하였다.
영조는 왕실 족보인 《선원보략(璿源譜略)》에서 인목왕후가 인경궁에서 승하하였다는 글을 보고 옛터를 찾아보도록 명했으나, 승지는 "신이 노인에게 물어 보았더니, 인왕산 아래 사직단(社稷壇)의 왼쪽에 있었던 듯한데, 상세히 알 수 없다고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영조는 138년 전 인경궁 흠명전(欽明殿)에서 승하한 날을 기려 '''‘[追憶壬申六月二十八日 立石于門內]’''' 15자를 쓰고, 그 터를 찾지 못해 도승지 채제공(蔡濟恭)에게 명하여 경희궁 무덕문 안에다 비석을 세우도록 하였다.[64]
지금은 인경궁이 있었던 자리에 어떤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
참조
[1]
문서
궁궐 건축에 대한 기록
[2]
문서
세종대왕의 거처
[3]
문서
椒井 위치에 대한 기록
[4]
실록
문종실록 - 자수궁 건축
http://sillok.histor[...]
국사편찬위원회
null
[5]
문서
궁궐 건축 관련 기록 (한자)
[6]
실록
광해군일기[정초본] - 새문동 궁궐 건립 논의
http://sillok.histor[...]
국사편찬위원회
null
[7]
문서
청운효자동 자치회관 부근 추정 위치
[8]
문서
궁궐 위치에 대한 기록 (한자)
[9]
실록
선조수정실록 - 도성 궁성 화재
http://sillok.histor[...]
국사편찬위원회
null
[10]
문서
정릉동(덕수궁) 위치
[11]
실록
인조실록 - 경운궁 가옥 반환
http://sillok.histor[...]
국사편찬위원회
null
[12]
실록
광해군일기[중초본] - 교하 지역 조사
http://sillok.histor[...]
국사편찬위원회
null
[13]
실록
광해군일기[중초본] - 이의신 처벌 및 교하 명령 철회 청원
http://sillok.histor[...]
국사편찬위원회
null
[14]
문서
명나라에서 교화한 군인
[15]
문서
경운궁
[16]
실록
광해군일기[중초본] - 법궁 이전 장소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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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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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문서
경복궁 지칭
[18]
문서
전교 내용
[19]
문서
법궁(경복궁)
[20]
실록
광해군일기[중초본] - 이궁 건축 재목 사용 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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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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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문서
시간 표현 (한자)
[22]
문서
문 이름 (한자)
[23]
문서
흠경각 위치 및 소음 문제
[24]
실록
효종실록 - 흠경각 철거 및 대비전 건립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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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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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실록
광해군일기[중초본] - 흠경각 건설 부지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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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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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서적
궁궐·유교건축
솔
2004
[27]
문서
세 궁궐에 대한 기록 (한자)
[28]
문서
중으로 조직된 군인
[29]
실록
광해군일기[중초본] - 이충 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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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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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문서
경복궁과 인경궁 연결 계획 (한자)
[31]
실록
광해군일기[중초본] - 궐내 건축 공사 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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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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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실록
광해군일기[중초본] - 창의문 밖 돌 사용 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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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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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실록
광해군일기[중초본] - 남은 목재와 기와 저장 계획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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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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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문서
석자황 무역 어려움 (한자)
[35]
실록
광해군일기[중초본] - 황와 제작 석자황 무역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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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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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실록
광해군일기[중초본] 122권, 광해 9년 12월 24일, 청기와를 싼 값에 구워 준 한사성 등을 가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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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37]
실록
광해군일기[중초본] 138권, 광해 11년 3월 5일, 이충의 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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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38]
실록
광해군일기[중초본] 126권, 광해 10년 4월 9일, 인경궁·경덕궁의 정문을 조성하는 일과 봉상시 이치의 일에 대해 전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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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39]
문서
아마도 건축 자재물을 반입하기 위해 일부러 터를 둔 듯하다.
[40]
실록
광해군일기[중초본] 117권, 광해 9년 7월 29일, 서별궁의 이름을 경덕궁으로 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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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41]
실록
광해군일기[정초본] 122권, 광해 9년 12월 24일, 청기와를 싼 값에 구워 준 한사성 등을 가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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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42]
실록
광해군일기[중초본] 126권, 광해 10년 4월 4일, 인경궁 각 전의 단청에 쓰는 채색에 대한 일로 전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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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43]
실록
광해군일기[중초본] 116권, 광해 9년 6월 21일, 양 침전은 대조전의 제도에 의거하여 조성하도록 전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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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44]
문서
소형세자의 빈 강씨를 폐출한 1년 후
[45]
실록
인조실록 48권, 인조 25년 6월 15일, 계해년 반정 때 거의 불탄 창덕궁을 수리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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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46]
실록
광해군일기[중초본] 126권, 광해 10년 4월 24일, 영건 도감에서 두 궁궐의 당실에 쓰이는 재목의 척수에 대해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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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47]
실록
인조실록 26권, 인조 10년 6월 28일, 대왕 대비 김씨의 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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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48]
문서
[初, 仁穆王后之喪, 得帛書三幅於宮中, 有若頒告,奏聞, 爲廢立之擧者]
[49]
실록
인조실록 27권, 인조 10년 10월 23일, 대신과 2품 이상이 궁중의 저주 사건을 조사하도록 청하니 국청을 설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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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50]
실록
인조실록 46권, 인조 23년 5월 3일, 혼궁을 인경궁의 중휘당에 설치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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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51]
문서
소현세자 빈 강씨를 말함
[52]
실록
광해군일기[정초본] 184권, 광해 14년 12월 3일, 인경궁 못을 판 곳에 누대를 지어 신하 접견과 무사들의 시험 장소로 사용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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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53]
실록
광해군일기[중초본] 187권, 광해 15년 3월 12일, 반정이 일어나자 도망하여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다.
http://sillok.histor[...]
국사편찬위원회
[54]
실록
인조실록 1권, 인조 1년 3월 13일, 의병을 일으켜 즉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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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55]
실록
인조실록 4권, 인조 2년 2월 8일, 상과 자전·중전 등이 피난길에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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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56]
실록
세종실록 122권, 세종 30년 12월 14일, 영응 대군의 집을 영건하는 것에 대해 의논하다.
http://sillok.histor[...]
국사편찬위원회
[57]
실록
세종실록 127권, 세종 32년 2월 17일, 임금이 영응 대군 집 동별궁에서 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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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58]
문서
지금의 규모로 크게
[59]
실록
세종실록 117권, 세종 29년 8월 30일, 좌참찬 정분 등에게 숭례문의 신축을 감독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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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60]
문서
신하를 대하는 문종의 품성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61]
실록
문종실록 1권, 문종 즉위년 2월 18일, 영의정 하연 등이 수강궁으로 빈전의 이전을 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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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62]
실록
인조실록 6권, 인조 2년 6월 6일, 인경궁의 재목과 기와를 정명 공주에게 하사하라고 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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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63]
실록
인조실록 49권, 인조 26년 3월 10일, 인경궁의 재목과 기와를 철거해다가 홍제원을 짓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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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64]
실록
영조실록 113권, 영조 45년 11월 19일, 무덕문에 나가 악좌를 설치하게 하고 선전관에게 인경궁 옛터를 살피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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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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