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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창 (청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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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여창은 청나라 말기의 군인으로, 태평천국 운동에 참여했다가 청나라에 투항하여 회군과 념군 진압에 공을 세웠다. 이후 서양식 해군 창설에 참여하여 북양 함대 제독을 역임했으며, 임오군란 진압, 조선과 미국 간 통상 정상화 협상 참여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청일 전쟁에서 황해 해전 패배 후 웨이하이웨이 방어전을 지휘하다가 자결했으며, 사후 명예가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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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창 (청나라)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정여창 제독
이름정여창
로마자 표기Ding Ruchang
출생일1836년 11월 18일
출생지청나라 안후이성 루장현
사망일1895년 2월 12일 (58세)
사망지청나라 산둥성 웨이하이 류공도
별명제독
경력
소속태평천국군 (1854–1861)
청나라 (1875–1895)
군 종류북양함대
복무 기간1854–1895
최종 계급[[파일:Flag of Fleet Commander of the Beiyang Fleet.svg|22px]] 제독
참여 전투태평천국의 난
염군의 난
임오군란
청불 전쟁
청일 전쟁
압록강 해전
웨이하이 전투

2. 생애

1836년 도광 16년 안휘성 여강(현 여강현)에서 태어나, 가난으로 인해 어린 시절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 1854년 태평천국군에 합류했으나, 1861년 안칭 전투에서 청나라에 투항하여 이홍장회군에서 기병으로 복무하며 태평천국 운동 진압에 참여했다. 이후 념군 진압에도 공을 세워 대령에 해당하는 지위를 받았으나, 1874년 청나라 정부의 군대 감축 결정에 반대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2]

2. 1. 초기 생애와 태평천국 운동

1836년(도광 16년), 안휘성 여강(현 여강현)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하여 3년 정도 서당에 다녔을 뿐, 10살 무렵에는 학문의 기회를 잃었다.[2]

1854년(함풍 4년) 태평천국군여강을 점령하자 정여창도 엽운래(葉芸來)의 태평천국군에 합류했다. 1861년 청나라 증국번이 이끄는 상군안경이 포위되자 투항했고, 안경 공략에 공을 세워 천총(千総)이 되었다.[2] 1862년(동치 원년) 이홍장회군에 편입되어 태평천국군과 싸웠으며, 유명전의 부대에 초빙되었다.

2. 2. 청나라 군 복무와 념군 진압

1854년 함풍 4년에 태평천국군이 여강을 점령하자 정여창도 엽운래(葉芸來)의 태평천국군에 합류했지만, 1861년증국번이 이끄는 상군에게 안경이 포위되자 투항했고, 반대로 안경 공략에 공을 세워 천총(千総)[2]이 되었다. 1862년 동치 원년에는 이홍장회군에 편입되어 태평천국군과 싸웠고, 그 용맹을 인정받아 유명전의 부대에 초빙되었다.

1864년, 태평천국이 멸망하면서 정여창은 유명전을 따라 북상하여 념군과 싸웠다. 1868년 동념군을 격퇴하면서 정여창은 제독총병관[3]의 벼슬과 ‘협용파도로’(協勇巴圖魯)[4]라는 용사의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1874년 청나라 조정에서 군축을 결정하자 정여창은 유명전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부대를 축소한 것에 대해 격렬하게 항의했다. 이에 분노한 유명전은 정여창을 죽이려고 했지만, 암살 계획을 우연히 들은 정여창은 빨리 보직을 그만두고 귀향해 화를 면했다.

3. 북양함대 창설과 활동

1875년 이홍장이 서양식 해군을 창설하면서 정여창은 이홍장의 휘하로 들어가 새로운 해군 창설에 참여했다. 1880년에는 영국에서 건조된 순양함 '초용'과 '양위'를 인수하기 위해 임태증, 등세창 등과 함께 영국으로 건너갔다.[5]

1882년,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정여창은 북양 함대를 이끌고 조선으로 가서 흥선대원군을 체포하여 청나라로 압송했다. 이를 통해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과시하고 일본의 진출을 견제할 수 있었다.[5]

1888년 북양 함대가 정식으로 창설되자 정여창은 제독에 임명되었다.[5] 1891년에는 함대를 이끌고 일본을 방문하여 청나라 해군의 위용을 과시하기도 했다.[6] 그러나 1891년 이후 청나라의 해군 예산이 대폭 삭감되면서, 정여창은 어려운 재정 상황 속에서 함대를 운영해야 했다.[8]

3. 1. 북양함대 제독 임명과 서구식 해군 도입

1875년(광서 원년), 북양통상대신직례총독이었던 이홍장이 서양식 해군을 창설한다는 소식을 듣고 정여창은 이홍장에게 의탁했다. 이홍장은 정여창과 유명전이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을 고려하여 정여창을 상군에 배속시키지 않고, 새로운 해군을 창설하는 데 참여시켰다.[5]

1880년(광서 6년), 정여창은 신해군 최초의 순양함으로 영국암스트롱 사에 발주한 ‘초용’(超勇), ‘양위’(揚威)를 인수하기 위해 임태증, 등세창 등의 승조원을 데리고 영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또한 독일프랑스를 방문하여 그들의 조선 기술을 익혔다. 정여창은 양무운동 지지자였으며, 이홍장에게 외국 수입에 의존하기보다는 현대적인 장갑 순양함을 건조할 수 있는 조선소를 중국에 설립할 것을 촉구했다. 정여창은 웨이하이웨이와 뤼순커우에 해군 기지를 건설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1888년, 북양 함대가 정식으로 출범하면서 정여창은 제독에 임명되었다.[5]

3. 2. 임오군란 진압과 조선에서의 활동

1882년 임오군란조선에서 일어나자, 정여창은 청나라 함장 오장경의 명령을 받아 북양 함대 소속 군함 5척을 이끌고 조선으로 파견되었다. 정여창은 임오군란을 진압하고, 오장경과 함께 흥선대원군을 납치하여 청나라로 돌아왔다.[5] 이 사건으로 조선에는 친청 정권이 다시 들어섰으며, 청나라는 전통적인 종주국으로서의 영향력을 과시하고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진출을 막을 수 있었다.

3. 3. 나가사키 사건과 일본과의 관계

1886년, 정여창은 무력 시위를 위해 북양 함대를 이끌고 홍콩, 일본 나가사키, 한국 부산과 원산, 러시아 해군 기지 블라디보스토크를 순항했다. 1886년 8월 13일 나가사키에서 진원함의 술에 취한 선원들이 현지 사창가에서 싸움에 휘말렸고, 이 과정에서 일본 경찰관 한 명이 치명상을 입었다. 2일 뒤 현지인, 경찰, 정여창의 선원들 간의 폭동으로 이어진 이 사건은 나가사키 사건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선원 6명이 사망하고 45명이 부상당했으며, 일본 경찰관 5명이 사망하고 16명이 부상당했다.[6]

1891년 7월부터 8월까지 정여창은 함대를 이끌고 일본을 방문했다. 이 일본 방문은 최첨단의 거대 함대를 이끌고 일본에게 경고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6] 이 폭동은 외교적 문제로 이어졌지만, 정여창은 1891년 북양 함대를 이끌고 일본을 다시 방문했다.

4. 청일 전쟁과 몰락

1894년 청일 전쟁이 발발하자, 이홍장은 함대 보존을 우선하며 육상전 중심으로 일본을 격파하려 했다. 그러나 일본이 연합함대를 조직하고 육군 수송 지원 등에 참여하면서 청나라 내부에서는 "북양함대는 왜 출동하지 않느냐?"는 여론이 높아졌다. 광서제이홍장에게 "정여창은 일본 해군을 무서워하느냐?"고 질타했고, 이홍장은 북양함대에 출동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황해 해전 이후, 정여창은 이홍장의 명령에 따라 남은 북양 함대의 본거지를 웨이하이웨이로 옮겼다. 좌승함을 ‘진원’으로 바꾸고 방어에 전념했다. 정여창은 웨이하이웨이를 방어하는 육군 전력에 불안을 느꼈지만, 육상 포대는 북양 함대의 관할이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 이 불안은 개선되지 않았다.

1895년 1월 20일, 일본군은 산둥반도영성에 상륙했다. 일본 연합 함대 사령장관이토 스케유키는 정여창에게 항복하라고 요구했지만, 정여창은 이를 거부했다. 일본군은 육로에서 웨이하이웨이의 육상 포대를 공략해 들어가 바다와 육지에서 북양 함대를 포위했다. 며칠 동안의 전투를 치른 뒤에 정여창은 병력의 구명을 조건으로 항복했다. 그러나 자신은 ‘진원’ 함내에서 그대로 독을 마시고 자결했다. 향년 58세였다.

정여창의 사후, 북양 함대는 공식적으로 항복했다. 병사들은 귀환이 허용되었지만, 남은 함정은 일본군에게 노획되었다. 이토 스케유키는 독단적인 주선으로 화물선(강제호 康済号) 한 척을 노획 처분을 풀어 정여창의 시신을 운구할 수 있게 하였다. 시신을 태운 배는 일본 해군의 사열을 받으며, 목숨을 건진 병력과 함께 본국으로 귀환했다.

그러나 ‘북양 함대의 소멸’ 소식을 들은 광서제는 대노하여 정여창의 재산을 몰수하고 장례를 치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명예 회복이 이루어진 것은 1910년 당시 해군대신인 애신각라 재순(광서제의 동생)과 남북양수사 겸 광동수사 제독이었던 살진빙 등의 탄원 결과였다.

4. 1. 황해 해전과 북양함대의 패배

1894년 청일 전쟁 발발 당시, 북양함대는 세계 8위로 평가받았다. 이홍장은 함대 보존과 함께 육상전 중심으로 일본 격파를 시도했으나, 일본이 연합함대를 조직하고 육군 수송 지원에 참여하자 청나라 조정은 북양함대의 불출전에 대해 비판했다. 광서제는 정여창이 일본 해군을 두려워하냐며 질타했고, 이홍장은 북양함대에 출동 명령을 내렸다.[9]

9월 17일, 압록강 하구에서 일본 연합함대와 황해 해전이 벌어졌다. 정여창은 함대 사령관으로 주력함 ‘정원’ 함교에서 지휘했으나, 주포 발사 사고로 함교가 파괴되어 부상당했다. 이로 인해 북양함대는 지휘 체계에 문제가 발생, 기함 지휘 불능 시 권한 위임 절차가 없어 각 함선은 개별 전투를 시작했다. 약 5시간 후, 북양함대는 주력함 12척 중 5척을 잃고 웨이하이로 후퇴했다.[1]

정여창은 일본 제국 해군과 정면 대결을 추진했으나, 청 조정은 군함 손상 및 파괴를 우려, 압록강 하구 동쪽 작전을 금지했다. 그러나 1894년 9월 17일 황해 해전에서 정여창은 함대 10척 중 5척을 잃고, ''딩위안''의 첫 발포로 함교 장교들이 피해를 입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1]

4. 2. 웨이하이웨이 전투와 정여창의 자결

1894년 청일 전쟁 발발 이후, 이홍장은 함대 보존을 우선했으나 청나라 조정과 여론의 압박으로 북양 함대는 출동하게 되었다. 1895년 1월 20일, 일본군은 산둥반도영성에 상륙했고, 연합함대사령장관 이토 스케유키는 정여창에게 항복을 권고했으나 거절당했다.[10] 일본군은 육로로 웨이하이웨이의 육상 포대를 공략하여 북양 함대를 바다와 육지에서 포위했다.

미즈노 도시카타가 그린 정여창 제독의 자결도에 따르면,[11] 며칠 동안의 전투를 치른 뒤인 2월 12일, 정여창은 병사들의 목숨을 구하는 조건으로 항복에 동의했다. 그러나 정여창 자신은 '진원' 함내에서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으며, 향년 58세였다. 미기타 도시히데는 정여창이 항복하는 그림을 그렸으나, 이는 상상화이다.[9]

정여창 사후 북양 함대는 공식적으로 항복했고, 병사들은 귀환이 허용되었지만 남은 함정은 일본군에 노획되었다. 이토 스케유키는 정여창의 시신 송환을 위해 화물선 강제호(康済号) 한 척을 노획 처분에서 풀어주는 배려를 했다. 정여창의 시신을 실은 배는 일본 해군의 사열을 받으며 본국으로 귀환했다.

하지만 '북양 함대의 소멸' 소식을 들은 광서제는 분노하여 정여창의 재산을 몰수하고 장례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1910년 당시 해군대신 애신각라 재순과 광동수사 제독 살진빙 등의 탄원으로 명예 회복이 이루어졌다.

4. 3. 사후 평가와 명예 회복

정여창 제독의 자결 (미즈노 토시카타의 판화)


정여창은 사망 후 청 정부로부터 패전의 책임을 추궁당해 모든 직위와 지위를 박탈당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일본인뿐만 아니라 많은 중국 군인들의 존경을 받았다.[1] 1911년, 생존 장군들의 요청에 따라 모든 직위가 회복되었으며,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한 후인 1912년에 가족들이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1]

참조

[1] 서적 The Sino-Japanese War of 1894-1895: Perception, Power, and Primac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2] 문서 千総:[[緑営]]の下士官で正六品官
[3] 문서 提督総兵官:その省の緑営軍官を束ねる長官で従一品官。清代の「提督」は特に海軍に限定したものではない。
[4] 문서 「協勇巴図魯(協勇バトゥル)」:[[バトゥル]]とは満州語で「勇者」の意。その人にちなんだ称号(この場合は「協勇」)を添えて満州族では特に武功があった者に対して勇者称号として与えた。
[5] 문서 提督:正式名称は「水師提督」。前述の提督と同位官で、この場合の提督は「艦隊司令長官」の意味である。
[6] 서적 小説三井物産
[7] 웹사이트 大橋須磨子 https://www.aozora.g[...]
[8] 문서 これ以降北洋艦隊は軍艦の追加購入を行っていない。
[9] 문서 艦隊温存策:予算不足の北洋艦隊は既に広東艦隊から巡洋艦を借り受けて編入しており、北洋艦隊が万一壊滅した場合には清の制海権を守る艦が残っていなかったために温存したといわれる。
[10] 문서 栄成:現[[山東省]][[威海|威海地級市]][[栄成市]]。山東半島の先端。
[11] 뉴스 韓国船沈没で見えた日中韓「水兵」の差 http://sankei.jp.msn[...] 2014-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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