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욱 (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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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욱은 조위의 무장으로, 초빙 요청을 거절하다가 조조를 섬기며 참모로 활약했다. 연주 방어전에서 큰 공을 세우고, 관도 대전에서 700명의 군사로 견성을 지키는 등 뛰어난 지략과 담력을 보여주었다. 유비의 위험성을 간파하고 제거를 건의했으나 조조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유비가 세력을 키우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조조 사후, 조비에게 위위로 임명되었으며, 숙후의 시호를 받았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서서를 조조에게 귀순시키는 계략을 제안하는 등 참모로서의 면모가 부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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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년 출생 - 황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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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후돈은 후한 말기부터 삼국시대 위나라의 장군으로, 조조의 사촌이자 그의 거병 때부터 종군하여 많은 공을 세웠으며, 연주 전투에서 왼쪽 눈을 잃어 "애꾸눈 하후"라는 별명을 얻었고, 군사적 능력과 청렴한 성품으로 조조의 신임을 받아 사후 조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 조위의 정치인 - 정무
정무는 중국 삼국시대 인물로, 정사 삼국지에는 정욱의 아들로 조비를 섬겼다는 기록만 있고, 삼국지연의에서는 하후무의 참군으로 촉한의 제1차 북벌 때 조운을 상대로 계책을 내는 비중 있는 조연으로 묘사되지만, 관흥과 장포의 지원으로 실패하고 남안으로 퇴각한 후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 조위의 정치인 - 하후무
하후무는 위나라의 무장으로 하후돈의 아들이며 조조의 사위였고, 조비의 총애를 받아 안서장군에 임명되어 관중을 방어했으나 군사적 재능은 부족하다는 평을 받았으며, 제갈량의 북벌 당시 탄핵을 받았지만 복귀하여 진동장군에 이르렀다.
정욱 (조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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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정욱 |
원 이름 | 정립 |
자 | 중덕 |
작위 | 안향후 |
시호 | 숙후 |
출생 | 141년 |
출생지 | 산둥성 둥아현 |
사망 | 220년 12월 (향년 79세) |
소속 | 조위 |
주요 직책 | 수장령 동평상 제음태수 진위장군 분무장군 위위 |
관직 경력 | |
수장령 | 192년 ~ 194년 |
동평상 | 194년 ~ 196년 |
제음태수 | 196년 ~ 200년 |
진위장군 | 200년 ~ 203년 |
분무장군 | 203년 ~ 213년 |
위위 | 213년 ~ 220년 |
가족 관계 | |
아들 | 정무 정연 |
기타 정보 | |
섬긴 군주 | 조조 → 조비 |
2. 생애
정욱(程昱|정욱중국어)은 젊어서부터 용맹함으로 명성을 떨쳤다. 184년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동아현 현승 왕도가 황건적에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켰다.[7] 정욱은 현지 호족 설방과 협력하여 백성들을 설득하고, 계략을 써서 성을 지켜냈다.[7]
192년, 연주 자사 유대는 정욱에게 행정에 참여하도록 초청했지만, 정욱은 이를 거절했다. 유대는 원소와 공손찬 사이에서 누구에게 협력할지 고민하며 정욱에게 조언을 구했고, 정욱은 원소에게 협력할 것을 권했다. 공손찬이 원소에게 패배하자, 유대는 다시 정욱을 초청하여 기도위에 임명하려 했지만, 정욱은 병을 핑계로 거절했다.[8]
190년~193년 초평 연간, 유대는 정욱을 초빙했으나, 정욱은 계책만 알려주고 응하지 않았다. 유대가 죽은 후, 조조가 연주를 다스리게 되면서 정욱을 초빙하자, 정욱은 조조를 섬기게 된다. 조조가 서주를 공격할 때, 정욱은 순욱과 함께 견성을 지켰고, 여포가 보낸 진궁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성공하여 조조의 큰 신임을 얻게 된다.
정욱은 순욱에게 자신이 산에 올라 해를 받드는 꿈을 자주 꾼다고 이야기했다. 순욱이 이 이야기를 조조에게 전하자, 조조는 정욱의 이름 '立'에 '日'을 더하여 '昱'으로 개명하도록 했다.
이후 조조는 원소에게 가족을 볼모로 바치며 밑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정욱이 이를 꾸짖어 거절시키고 조조를 분발하게 만들었다. 관도 대전에서 정욱은 700명의 병사로 견성을 지켰는데, 조조는 2,000명의 군사를 증원하려 했으나, 정욱은 이를 거절했다. 정욱은 원소가 견성의 병력이 적은 것을 알면 공격하지 않겠지만, 수천 명의 병력이 있다면 후방 공격의 위험 때문에 반드시 공격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원소를 이길 수 없다고 주장했다. 과연 원소는 견성의 병력이 적다는 것을 알면서도 공격하지 않았다. 조조는 "정욱의 배포는, 맹분·하육을 능가하는 것이 있다"고 말했다.
적벽 대전에서는 손권이 유비와 연합하여 조조에게 대항할 것을 예측했다. 세력이 어느 정도 자리 잡은 후, 정욱은 '만족할 줄 알고, 욕되지 않았으니 물러나길 원한다'면서 병권을 내놓고 칩거에 들었다.
조조가 마초를 공격할 때 조비가 남아 지키면서 정욱을 군에 참여토록 했다. 하간군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정욱은 항복한 천여 명을 처형하자는 의견에 반대하였고, 조비는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는데, 조조의 의향도 이와 같았다.
세설신어에는 조조가 식량이 부족했던 시기에 정욱이 자기 출신 현을 약탈하여 3일 분의 식량을 제공했는데 여기에 인육 말린 것을 섞었다고 해 조정에서 신망을 잃어 공의 지위에 오를 수 없었다고 한다.
조조 사후, 조비가 위나라를 건국하자 정욱은 위위(衛尉)[18]에 임명되고 안향후(安鄕侯)에 봉해졌다. 삼공 중 한 명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후 숙후(肅侯)라는 시호를 받았다.[17]
2. 1. 초기 활동 및 황건적의 난 진압 (184년 ~ 192년)
정욱(程昱중국어)은 젊어서부터 용맹함으로 명성을 떨쳤다. 184년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동아현 현승 왕도(王度)가 황건적에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켰다.[7] 현령은 성 밖으로 도망쳤고, 백성들은 가족을 이끌고 동쪽 산으로 피난했다. 정욱은 왕도가 성을 지킬 능력이 없음을 간파하고, 현지 호족 설방(薛方)과 협력하여 백성들을 설득했다. 그는 "어리석은 백성은 일을 헤아릴 수 없다"며 계략을 써서 백성들을 성으로 돌아오게 하고, 도망친 현령을 찾아내 함께 성을 지켰다. 왕도가 공격해 왔지만, 정욱은 백성들을 이끌고 출격하여 격퇴함으로써 동아현을 지켜냈다.[7]192년, 연주 자사 유대가 정욱에게 행정에 참여하도록 초청했지만, 정욱은 이를 거절했다. 유대는 원소와 공손찬 사이에서 누구에게 협력할지 고민하며 정욱에게 조언을 구했다. 정욱은 상황을 분석하여 원소에게 협력할 것을 권했다. 공손찬이 원소에게 패배하자, 유대는 다시 정욱을 초청하여 기도위에 임명하려 했지만, 정욱은 병을 핑계로 거절했다.[8]
2. 2. 조조의 참모로 활약 (192년 ~ 220년)
190년부터 193년까지 이어진 초평 연간, 유대는 정욱을 초빙했으나, 정욱은 계책만 알려주고 응하지 않았다. 유대가 죽은 후, 조조가 연주를 다스리게 되면서 정욱을 초빙하자, 정욱은 조조를 섬기게 된다.조조가 서주를 공격할 때, 정욱은 순욱과 함께 견성을 지켰다. 연주에 모반의 기운이 퍼지면서 견성, 동아, 범 세 곳을 지키는 역할을 맡게 된 정욱은 여포가 보낸 진궁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성공하여 조조의 큰 신임을 얻게 된다.
정욱은 순욱에게 자신이 산에 올라 해를 받드는 꿈을 자주 꾼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순욱이 이 이야기를 조조에게 전하자, 조조는 정욱의 이름 '立'에 '日'을 더하여 '昱'으로 개명하도록 했다.
이후 연주의 기반이 흔들려 심약해진 조조는 원소에게 가족을 볼모로 바치며 밑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정욱이 이를 꾸짖어 거절시키고 조조를 분발하게 만들었다. 조조에게 귀순한 유비를 미리 처치해 두라고 조언하기도 했고, 나중에 조조가 유비에게 서주의 원술을 공격하게 하면서 병사를 빌려준 데 대해 배반할 것이라고 곽가와 함께 진언했고 이 또한 맞아떨어졌다.
관도 대전에서 정욱은 700명의 병사로 견성을 지켰는데, 조조는 2,000명의 군사를 증원하려 했으나, 정욱은 이를 거절했다. 정욱은 원소가 견성의 병력이 적은 것을 알면 공격하지 않겠지만, 수천 명의 병력이 있다면 후방 공격의 위험 때문에 반드시 공격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원소를 이길 수 없다고 주장했다. 과연 원소는 견성의 병력이 적다는 것을 알면서도 공격하지 않았다. 조조는 "정욱의 배포는, 맹분·하육을 능가하는 것이 있다"고 말했다. 관도 대전에서 승리한 조조는 여양에서 원담, 원상과 싸웠는데 이때 정욱은 도적들을 거두어 수천의 군사를 모았다. 이 공으로 정욱은 분무장군의 지위를 얻는 동시에 안국정후로 봉해졌다.[20]
적벽 대전에서는 손권이 유비와 연합하여 조조에게 대항할 것을 예측했다. 세력이 어느 정도 자리 잡은 후, 조조는 정욱이 연주의 세 성을 지킨 일을 칭찬했다. 정욱은 '만족할 줄 알고, 욕되지 않았으니 물러나길 원한다'면서 병권을 내놓고 칩거에 들었다.
그 후 조조가 마초를 공격할 때 조비가 남아 지키면서 정욱을 군에 참여토록 했다. 하간군에서 반란이 일어나 이를 토벌하는 도중 천 여명이 항복하였는데, 이를 처형하자는 자들이 많았다. 정욱은 이에 반대하였고, 조비는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는데, 조조의 의향도 이와 같았다.
세설신어에는 조조가 식량이 부족했던 시기에 정욱이 자기 출신 현을 약탈하여 3일 분의 식량을 제공했는데 여기에 인육 말린 것을 섞었다고 해 조정에서 신망을 잃어 공의 지위에 오를 수 없었다고 한다. 정욱의 성격이 강직해서 다른 이들과의 교제가 많이 어긋났고 주변에서 그가 모반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는 등, 그의 출세를 못마땅한 이들에 의해 과거의 저 행적이 그의 공을 깎아내리는 데 쓰였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조조는 그를 무척 신임했고 그도 조조를 위해 계책을 아끼지 않았기에 위나라의 뛰어난 참모로 평가되고 있다.
2. 2. 1. 연주 방어전 (194년)
190년부터 193년까지 이어진 초평 연간, 연주자사 유대는 정욱을 초빙했으나, 정욱은 유대에게 계책만 알려주고 초빙에는 응하지 않았다. 유대가 죽은 후, 조조가 연주를 다스리게 되면서 정욱을 초빙하자, 정욱은 조조를 섬기게 된다.[9]조조가 서주를 공격할 때, 정욱은 순욱과 함께 견성을 지켰다. 연주에 모반의 기운이 퍼지면서 견성, 동아, 범 세 곳을 지키는 역할을 맡게 된 정욱은 여포가 보낸 진궁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성공하여 조조의 큰 신임을 얻게 된다.[9]
정욱은 순욱에게 자신이 산에 올라 해를 받드는 꿈을 자주 꾼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순욱이 이 이야기를 조조에게 전하자, 조조는 정욱의 이름 '立'에 '日'을 더하여 '昱'으로 개명하도록 했다.[9]
여포가 연주를 장악하려 하자 많은 사람들이 저항을 포기하고 여포에게 합류했다. 그러나 거성현, 동아현, 번현은 항복하지 않았다. 당시 조조의 수석 책사 순욱과 함께 거성현을 지키고 있던 정욱은 세 현의 수비가 성공하려면 세 현의 관리들이 협력해야 한다고 보았다. 순욱은 정욱에게 동아현의 방어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는데, 고향 사람들이 그와 함께 싸우도록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9]
정욱은 가는 길에 번현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여포의 부하 관리인 사의(氾嶷)가 번현의 현령을 설득하여 그의 주군에게 충성을 바치도록 하려 하고 있었다. 정욱은 현령과 만나 그를 설득하여 사의를 거부하고 죽이도록 했다. 동아현에 도착했을 때, 설제와 조지는 이미 주변에 방어선을 구축해 놓았고, 정욱은 기병 부대를 나누어 창정(倉亭) 나루터를 장악하여 여포의 책사 진궁의 진격을 막았다. 설제는 정욱과 함께 전략을 수립하여 조조가 서주에서 돌아올 때까지 세 현의 방어를 가능하게 했다.[9]
194년은 조조에게 힘든 시기였다. 여포에게 부양(濮陽) 주변에서 여러 전투에서 패했을 뿐만 아니라, 연주에 광범위한 기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조조는 잠시 연주에서의 지위를 포기하고 원소에게 항복할 것을 생각했다. 그러나 정욱은 조조가 원소의 신하가 되는 것 이상의 자질을 가지고 있으며, 과대평가된 명성을 즐기는 자에게 천재가 굴복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꾸짖었다. 정욱은 조조에게 "전횡과 같은 일개 무사조차 부끄러움을 알았는데, 어찌 그렇게 부끄럽게 원소에게 항복하려 하십니까?"라고 말했다.[4]
2. 2. 2. 관도 대전 (200년)
원소가 대군을 이끌고 남하할 때, 정욱은 700명의 병사로 견성을 지키고 있었다. 조조는 이를 우려하여 2,000명의 군사를 증원하려 했으나, 정욱은 이를 거절했다. 정욱은 원소가 견성의 병력이 적은 것을 알면 공격하지 않겠지만, 수천 명의 병력이 있다면 후방 공격의 위험 때문에 반드시 공격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원소를 이길 수 없다고 주장했다. 과연 원소는 견성의 병력이 적다는 것을 알면서도 공격하지 않았다.[12] 조조는 "정욱의 배포는, 맹분·하육(전국 시대 진의 무왕을 섬긴 용사)을 능가하는 것이 있다"고 말했다.관도 대전 이후, 정욱은 연주 주변의 수천 명의 도적과 산간 주민들을 모집하여 조조가 원담과 원상에 맞서 전선 군사 작전 기지를 설치한 려양에서 조조와 합류했다. 이전과 함께 정욱은 배로 조조에게 군량을 수송했는데, 한번은 위군 태수 고번이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보급선을 차단했다. 조조는 정욱에게 수로를 포기하고 다른 경로로 수송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전은 정욱에게 고번이 소수의 병력으로 가볍게 방어하고 있기 때문에 격파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그들은 조조의 명령을 어기고 북쪽 강둑에 상륙하여 고번을 격파했으며, 그 결과 군사적 필수품을 원활하게 전달할 수 있었다.
2. 2. 3. 기타 주요 전투 및 사건
정욱은 조조에게 유비를 경계할 것을 여러 차례 진언했으나, 조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10] 조조가 유비에게 병사를 빌려주자 곽가와 함께 유비가 배반할 것이라고 진언했고, 이 또한 맞아떨어졌다.[11]208년 적벽 대전에서는 손권이 유비와 연합하여 조조에게 대항할 것을 예측했다.[14] 그러나 조조는 군사력과 경제력 면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욱의 충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조가 마초를 토벌할 때 조비를 보좌하며, 하간군에서 일어난 반란 진압에 대한 조언을 통해 조비의 신임을 얻었다.[15] 조조는 정욱이 전술에 뛰어날 뿐만 아니라 부자 관계를 관리하는 방법도 안다는 것을 주장하며 그에게 특별히 감사를 표했다.[16]
2. 2. 4. 위나라 건국 이후 (220년)
조조 사후, 조비가 위나라를 건국하자 정욱은 위위(衛尉)[18]에 임명되고 안향후(安鄕侯)에 봉해졌다. 800호의 과세 가구로 구성된 정후의 세수를 얻게 되었는데, 이는 이전의 500호에서 300호가 추가된 것이다. 삼공 중 한 명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결정이 내려지기 전에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후 굳건한 존경심을 기려 숙후(肅侯)라는 시호를 받았다.[17] 그의 어린 아들 정언과 손자 정효는 모두 후작이 되었고, 정욱 사후 장남 정무(程武|정무중국어)가 계승했다. 그의 손자 정효는 나중에 유명한 학자가 되었다.3. 성격 및 평가
정욱은 강직하고 냉철한 성격으로, 때로는 가혹한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뛰어난 지략과 통찰력을 지녔으며, 상황 판단 능력이 뛰어났다.[19]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충돌이 잦았고, 모반 혐의를 받기도 했으나 조조의 신임은 변함없었다.[17]
정욱은 완고한 성격 탓에 다른 사람들과 자주 다퉜다. 조조가 헌제로부터 처음 제후로 봉해졌을 때, 정욱은 제후국의 위위(衛尉|위위중국어)로, 형진은 중위(中尉|중위중국어)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정욱은 자신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버릇이 있었고, 의도적으로 형진 앞에서 뽐냈으며, 형진은 그의 행동을 조조에게 보고했다. 이로 인해 정욱은 처벌로 지위를 박탈당했다.[17]
정욱은 역설로 유명했지만, 연설에서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는 경향이 있었다. 조조가 원소에게 항복하려 할 때, 조조를 전횡(田橫|전횡중국어)보다 못한 자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고향 사람들을 "어리석은 백성"이라고 부르곤 했다.
일부 기록에는 조조 군의 식량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인육을 사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논란이 되기도 한다.[4]
4. 가족 관계
이름 | 설명 |
---|---|
정무 | 정욱의 아들. 정욱의 뒤를 이었다. |
정연 | 정욱의 막내 아들. 조카 (혹은 아들) 정효와 함께 아버지의 유산을 분배받아 제후로 등용되었다. |
정극 | 정무의 아들. |
정효 | 아버지는 불명. 여남군 태수. 『삼국지』 정욱전에 부전된다. |
정량 | 정극의 아들. |
5.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정욱은 참모로서의 면모가 더욱 부각되어 묘사된다. 원소와의 싸움에서 십면매복의 계략을 제안하여 조조군이 승리하는 데 큰 공을 세운 것으로 그려진다.[20]
유비 휘하에 있던 서서를 빼내기 위해 그의 어머니를 인질로 잡고, 가짜 편지를 써서 서서를 조조에게 귀순시키는 계책을 낸다. 적벽 대전에서 패주할 때에는 의리가 두터운 관우가 조조를 벨 수 없다는 것을 간파하고 목숨을 구걸할 것을 제안하기도 한다.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14
[2]
서적
Wei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14
[3]
서적
Sanguozhi vol. 14
[4]
서적
Wei Jin Shiy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14
[5]
문서
[6]
서적
Yi Zhou Shu|Lost Book of Zhou
[7]
서적
Sanguozhi vol. 14
[8]
서적
Sanguozhi vol. 14
[9]
서적
Sanguozhi vol. 14
[10]
서적
Sanguozhi vol. 1
[11]
서적
Sanguozhi vol. 14
[12]
서적
Sanguozhi vol. 14
[13]
서적
Sanguozhi, vol.14
[14]
서적
Sanguozhi vol. 14
[15]
서적
Sanguozhi vol. 14
[16]
서적
Weilue annotation in Sanguozhi vol. 14
[17]
서적
Sanguozhi vol. 14
[18]
문서
[19]
서적
Sanguozhi vol. 14
[20]
문서
정곽동유장유전(程郭董劉蒋劉傳) 중 정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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