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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SS의용기갑척탄병사단 노르트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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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1SS의용기갑척탄병사단 노르트란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무장친위대에 소속된 외국인 의용병 부대로, 1943년 3월 22일 설립되었다.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벨기에 출신의 의용병들을 기반으로 창설되었으며, 동부 전선, 특히 레닌그라드, 나르바, 탄넨베르크 선, 포메라니아 등지에서 격전을 치렀다. 1945년 베를린 전투에도 투입되었으며, 여러 지휘관을 거쳐 구스타프 크루켄베르크의 지휘 하에 베를린 함락 시까지 저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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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SS의용기갑척탄병사단 노르트란트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제11SS의용장갑척탄병사단 노르틀란트의 사단장
사단 표식
명칭제11 SS 의용 기갑척탄병 사단 "노르틀란트"
원어 명칭11. SS-Freiwilligen Panzergrenadier-Division "Nordland" (독일어)
별칭노르틀란트
창설1943년 7월
해체1945년 5월 8일
국가나치 독일
소속무장친위대
병과기갑척탄병
규모사단
지휘관
주요 지휘관프란츠 아우구스베르거
전투 및 작전
주요 전투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전투나르바 전투
탄넨베르크 선 전투
타르투 공세
베를린 공방전
기타
11th WSS Division collar tabs
襟章

2. 설립

1941년 6월 22일, 독일소련 침공 작전 '바르바로사'가 시작된 후, 독일은 점령 하 및 동맹 중인 유럽 국가들에게 공산주의와 싸우는 의용병 부대의 창설을 허가했다. 이에 호응한 유럽 각국의 친독적 파시스트 정당과 우익 정당은 각국에서의 의용병 모집 운동의 중심이 되었고, 이윽고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벨기에(플라망) 각국의 의용병으로 4개의 국별 부대가 창설되었다.


  • 덴마크 의용군(Freikorps Danmark)
  • SS 의용부대 노르베겐(SS-Freiwilligen-Legion Norwegen)
  • 의용부대 니더란데 (SS-Freiwilligen-Legion Niederlande)
  • 의용부대 플란데른(SS-Freiwilligen-Legion Flandern)


이들 의용 부대에 소속된 유럽 각국 출신의 외국인 의용병은 게르만 민족으로 간주되어 무장친위대의 관할 하에 놓였으며, 1943년까지 휴식과 재편성을 거치면서 동부 전선에서 싸웠다. 같은 시기에 벨기에(왈롱), 프랑스, 크로아티아, 그리고 중립국스페인에서도 의용병 부대가 편성되었으나, 그들은 게르만 민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독일 국방군의 관할 하에 놓였다.

대소전이 시작될 무렵에는 의용병이 쇄도했지만, 그 이후의 모집은 원활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각 국별 부대의 병력 유지가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따라서, 무장친위대에서는 친위대 전국지도자 하인리히 힘러친위대 본부장 고틀로프 베르거(SS 외국인 의용병 모집 운동의 책임자)가 중심이 되어, 이들 국별 부대를 통합하여 1개 SS 사단을 창설하고, 신설된 '게르만 기갑군단' (제III 게르만 SS 기갑군단)의 한 축을 SS 기갑사단 '비킹'(SS-Panzerdivision Wiking)과 쌍을 이루도록 구성하는 계획이 추진되었다.

1943년 2월, 아돌프 히틀러는 외국인 지원병으로 장교를 임명하는 SS 사단을 창설하라고 명령했다.[1] 하인리히 히믈러는 1941년 이래로 줄곧 동부 전선에 있었으며 다수의 외국인 의용병을 포함하는 SS 기갑사단 "비킹"의 SS 기갑척탄병 연대 "노르트란트"를 새로운 무장친위대 사단의 기간 부대로 선정하여 독일 국내의 그라펜뵈어 훈련장으로 이동시켰다. 1943년 3월, 새로운 사단의 핵심으로 사용하기 위해 ''SS 기갑척탄병 연대 노르트란트''가 SS 사단 비킹에서 분리되었다.[1]

"노르트란트"의 두 기갑척탄병 연대에는 각 연대의 징집병 출신 국가를 나타내는 명칭이 부여되었는데, ''SS 기갑척탄병 연대 23 노르게''(노르웨이)와 ''SS 기갑척탄병 연대 24 단마르크''(덴마크)였다.[1] 하지만, 1943년 가을에 사단이 동부 전선에 도착했을 때, 병력의 거의 80%[2]가 독일 출신의 라이히스도이체 또는 폭스도이체였다.

1943년 3월 22일, 히틀러는 새로운 SS 사단의 편성을 명령했다. 당초, 동 사단에는 "바랴그"라는 명칭이 부여될 예정이었으나, 히틀러가 이를 거부했기 때문에 기간 연대의 명칭 "노르트란트"를 그대로 사용했다. 또한, 당초 "노르트란트" 사단은 네덜란드인 부대인 "의용부대 니더란데"를 기반으로 한 제3의 기갑척탄병 연대를 포함한 편성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후에 이 부대는 SS 기갑척탄병 여단 "네덜란드" 편성을 위해 분리되었다. 사단장 자리에는 과거 "노르트란트" 연대의 지휘관을 역임한 프리츠 폰 숄츠 SS 소장이 취임했다.

독일에서 창설된 후, 이 사단은 펠릭스 슈타이너 상급집단지도자의 지휘를 받는 제3(게르만) SS 기갑군단에 배속되어 크로아티아 독립국으로 이동했다. 사단은 1943년 9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에 대항하는 전투 작전을 시작했다.[3] 1943년 10월 중순, 사단은 크로아티아의 바니야 지역에서 여러 세르비아 마을을 불태우고 약탈했으며, 현지 협력주의 체트니크 민병대를 조직하는 것을 도왔다.[4]

2. 1. 사단의 전신

1941년 6월 22일, 독일소련 침공 작전 '바르바로사'가 시작된 후, 독일은 점령 하 및 동맹 중인 유럽 국가들에게 공산주의와 싸우는 의용병 부대의 창설을 허가했다. 이에 호응한 유럽 각국의 친독적 파시스트 정당과 우익 정당은 각국에서의 의용병 모집 운동의 중심이 되었고, 이윽고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벨기에(플라망) 각국의 의용병으로 4개의 국별 부대가 창설되었다.

  • 덴마크 의용군(Freikorps Danmark)
  • SS 의용부대 노르베겐(SS-Freiwilligen-Legion Norwegen)
  • 의용부대 니더란데 (SS-Freiwilligen-Legion Niederlande)
  • 의용부대 플란데른(SS-Freiwilligen-Legion Flandern)


이들 의용 부대에 소속된 유럽 각국 출신의 외국인 의용병은 게르만 민족으로 간주되어 무장친위대의 관할 하에 놓였으며, 1943년까지 휴식과 재편성을 거치면서 동부 전선에서 싸웠다. 같은 시기에 벨기에(왈롱), 프랑스, 크로아티아, 그리고 중립국스페인에서도 의용병 부대가 편성되었으나, 그들은 게르만 민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독일 국방군의 관할 하에 놓였다.

대소전이 시작될 무렵에는 의용병이 쇄도했지만, 그 이후의 모집 상황은 좋지 않아, 결과적으로 각 국별 부대의 병력 유지가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따라서, 무장친위대에서는 친위대 전국지도자 하인리히 힘러친위대 본부장 고틀로프 베르거(SS 외국인 의용병 모집 운동의 책임자)가 중심이 되어, 이들 국별 부대를 통합하여 1개 SS 사단을 창설하고, 신설된 '게르만 기갑군단' (제III 게르만 SS 기갑군단)의 한 축을 SS 기갑사단 '비킹'(SS-Panzerdivision Wiking)과 쌍을 이루도록 구성하는 계획이 추진되었다.

2. 2. "노르트란트" 사단의 탄생

1943년 2월, 아돌프 히틀러는 외국인 지원병으로 장교를 임명하는 SS 사단을 창설하라고 명령했다.[1] 1943년 3월, 새로운 사단의 핵심으로 사용하기 위해 ''SS 기갑척탄병 연대 노르트란트''가 SS 사단 비킹에서 분리되었다.[1] 하인리히 히믈러는 1941년 이래로 줄곧 동부 전선에 있었으며 다수의 외국인 의용병을 포함하는 SS 기갑사단 "비킹" SS 기갑척탄병 연대 "노르트란트"를 새로운 무장친위대 사단의 기간 부대로 선정하여 독일 국내의 그라펜뵈어 훈련장으로 이동시켰다.

"노르트란트"의 두 기갑척탄병 연대에는 각 연대의 징집병 출신 국가를 언급하기 위한 명칭이 부여되었는데, ''SS 기갑척탄병 연대 23 노르게''(노르웨이)와 ''SS 기갑척탄병 연대 24 단마르크''(덴마크)였다.[1] 하지만 1943년 가을에 사단이 동부 전선에 도착했을 때, 병력의 거의 80%[2]가 독일 출신의 라이히스도이체 또는 폭스도이체였다.

1943년 3월 22일, 히틀러는 새로운 SS 사단의 편성을 명령했다. 당초, 동 사단에는 "바랴그"라는 명칭이 부여될 예정이었으나, 히틀러가 이를 거부했기 때문에 기간 연대의 명칭 "노르트란트"를 그대로 계승했다. 또한, 당초 "노르트란트" 사단은 네덜란드인 부대인 "의용부대 니더란데"를 기반으로 한 제3의 기갑척탄병 연대를 포함한 편성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후에 이 부대는 SS 기갑척탄병 여단 "네덜란드" 편성을 위해 분리되었다. 사단장 자리에는 과거 "노르트란트" 연대의 지휘관을 역임한 프리츠 폰 숄츠 SS 소장이 취임했다.

독일에서 창설된 후, 이 사단은 펠릭스 슈타이너 상급집단지도자의 지휘를 받는 제3(게르만) SS 기갑군단에 배속되어 크로아티아 독립국으로 이동했다. 사단은 1943년 9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에 대항하는 전투 작전을 시작했다.[3] 1943년 10월 중순, 사단은 크로아티아의 바니야 지역에서 여러 세르비아 마을을 불태우고 약탈했으며, 현지 협력주의 체트니크 민병대를 조직하는 것을 도왔다.[4]

3. 크로아티아에서의 활동

1943년 8월 말, "노르트란트" 사단은 훈련과 편성을 완료하기 위해 크로아티아로 이동하여, 펠릭스 슈타이너 SS 대장의 제3 게르만 SS 장갑군단 소속 SS 장갑척탄병 여단 "네데를란트"와 현지에서 합류했다. 훈련 동안, "노르트란트" 사단은 연합국과 평화에 합의한 이탈리아군 부대의 무장 해제를 실시하는 한편,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끄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의 위협에 시달렸다.

이 무렵, "노르트란트" 사단의 "담마르크" 연대는 정치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1943년 봄, 점령 독일군에 대한 덴마크인의 사보타주 행위와 그에 대한 독일군의 반응은 독일과 덴마크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그 결과 독일은 1940년 4월 9일 덴마크 점령 이후에도 존재를 인정했던 덴마크군을 해산시켰는데, 이는 "노르트란트" 사단의 덴마크인 의용병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제3 게르만 SS 장갑군단 사령관 슈타이너는 "노르트란트" 사단의 덴마크인 의용병을 배려하는 문서를 통달했지만, 처우에 불만을 가진 덴마크인 의용병 중에는 귀국하는 자나 핀란드군으로 이적하는 자도 나타났다.

1943년 10월, 무장 친위대의 각 연대에 정식으로 번호가 부여되면서, "노르트란트" 사단의 장갑척탄병 연대 "노르예"는 '''제23SS장갑척탄병연대 "노르예"(노르웨이 제1)'''로, 장갑척탄병 연대 "담마르크"는 '''제24SS장갑척탄병연대 "담마르크"(덴마크 제1)'''로 개칭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노르트란트" 사단은 '''제11SS 의용 장갑척탄병 사단 "노르트란트"'''로 개칭했다.

11월 하순, "담마르크" 연대는 글리나 인근에서 5,000명의 파르티잔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이 때, "노르트란트" 사단에 소속된 제11SS 전차 대대는 헤르만 폰 잘차의 명예 칭호를 받았다.

1944년 1월, "노르트란트" 사단은 레닌그라드 전선의 독일 북방군집단에 소속되어, 오라니엔바움 전선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4. 동부 전선에서의 전투 (1944-1945)

1944년 1월, "노르트란트" 사단은 레닌그라드 전선의 독일 북방군집단(사령관 발터 모델 상급 대장)에 소속되어 오라니엔바움 전선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레닌그라드 근교의 전선에 도착한 후 소비에트 붉은 군대와의 전투에 투입되었다.

사단은 III SS 기갑 군단과 함께 레닌그라드 인근 전선에 도착하여 독일군의 도시 포위망을 돌파하려는 소련 붉은 군대의 공격에 맞서 싸웠다.[3] 붉은 군대는 노르트란트를 오라니엔바움으로 후퇴시켰다. 1944년 1월 14일, 소련의 크라스노예 셀로-로프샤 공세는 독일 전선을 붕괴시키는 데 성공했다. 후속 킨기세프-고도프 공세는 독일군을 에스토니아 북동부의 도시 나르바로 밀어내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했다.[3]

1944년 1월 14일, 소비에트 붉은 군대의 공격으로 레닌그라드 포위망이 붕괴되자, "노르트란트" 사단은 오라니엔바움에서 에스토니아의 나르바까지 60km를 전투하며 철수했다.

철수 작전 중이던 1944년 1월 26일, 제11SS기갑정찰대대 제5중대는 구바니치에서 61대의 소비에트 적군 전차와 교전하여 48대를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공적으로 루돌프 자알바흐 SS대위와 게오르크 랑겐도르프 SS소위는 1944년 3월 12일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또한, 네덜란드인 의용병 카스페르 스포르크 SS병장은 11대의 적 전차를 격파하여 2급 철십자 훈장과 1급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1944년 2월 초, "노르트란트" 사단의 각 부대는 에스토니아나르바 시 안팎에 포진했다. 나르바에 새롭게 형성된 독일군의 방어선에 대해, 소비에트 붉은 군대는 레닌그라드 전선의 장병 약 20만 명을 투입하여 공격을 시작, 이로 인해 나르바 전투가 시작되었다. 소비에트 붉은 군대는 2월 13일에 전선 정면 공격과 동시에 육해공 공동으로 나르바 서쪽 메레튈라(Mereküla) 근교에서 상륙 작전을 시작했다. 다음 날 독일군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나르바 서쪽에 배치되어 있던 제11SS 장갑 정찰 대대도 공격에 참가했다.[3]

1944년 3월, 소비에트 붉은 군대는 나르바 교량을 붕괴시켜 독일군 부대를 고립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노르트란트" 사단의 공병 대대는 격렬한 포화 속에서 빠르게 가교를 건설했다. 다시 독일군의 방어선은 유지되었고, 소비에트 붉은 군대의 맹공도 약간의 쇠퇴가 시작되었다.

1944년 4월 9일, 제24SS 기갑척탄병 연대 지휘관 헤르메네기르트 폰 베스트팔렌 SS 중령(''SS-Ostubaf.'' Hermenegild Graf von Westphalen)이 나르바 강에 걸쳐 있는 크레인홀름(Kreenholm) 다리 위에서 유산탄에 부상을 입었다. 그는 5월 28일 야전 병원에서 사망했다. 다음 날, 후임 연대장으로 알브레히트 크뤼겔SS 소령 (''SS-Stubaf.'' Albrecht Krügel)이 연대의 지휘를 맡았다.

6월 7일, 소비에트 붉은 군대는 「단마르크」 연대의 전초 기지 「존넨샤인」(Sonnenschein)에 대한 첫 번째 소탕 작전을 시작했지만, 덴마크인 의용병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공격은 실패했다. 이 때, 「단마르크」 연대 제7중대 덴마크인 중대장 모겐스 카를 베르텔센 SS 소위(''SS-Ustuf.'' Mogens Karl Berthelsen)이 전사했기 때문에, 덴마크 의용군 이래의 고참병 레오 마센 SS 소위(''SS-Ustuf.'' Leo Madsen)가 제7중대의 지휘를 맡았다.

6월 12일, 소비에트 붉은 군대의 포격이 크레인홀름 다리 주변의 「단마르크」 연대에 쏟아졌다. 「단마르크」 연대 제7중대의 진지에 적의 공격이 집중될 것으로 예측한 마센 SS 소위는, 연대장 크뤼겔 SS 소령으로부터 지시받은 대로 비상 신호탄을 발사했다. 보급 물자를 다 소모한 제7중대의 진지 앞에 소비에트 붉은 군대가 나타났고, 격전이 벌어졌다. 제7중대의 2명의 소대장은 백병전 중에 전사했다. 에곤 크리스토퍼센SS 상사(''SS-Uscha.'' Egon Christophersen)의 분대는 진지 북부를 담당하며 진지를 유지했다.

레오 마센 SS 소위(「단마르크」 연대 제7중대)가 발사한 신호탄을 확인한 제11SS 포병 연대는 마지막 저지 포화를 돌가야-니바(Dolgaja-Niwa)를 향해 발사했다. 돌가야-니바의 삼림선에서 800미터 지점을 진군하던 붉은 군대 1개 연대는 저지 포화에 노출되어, 소수의 장병들만이 독일군 전선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독일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단마르크」 연대 제9중대, 연대 부속 대전차 소대, 연대 부속 전투 공병과 함께 「단마르크」 연대 제7중대는 출격했다. 크리스토퍼센 SS 상사와 그의 분대는 가장 먼저 반격에 나섰고, 붉은 군대에 점령된 독일군 참호 탈환이라는 목표의 절반을 완료했다. 에곤 크리스토퍼센 SS 상사는 1944년 7월 11일자로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고, 덴마크인으로서는 최초의 기사 철십자 훈장 수훈자가 되었다.

1944년 7월 27일부터 노르트란트는 제20 무장 친위대 척탄병 사단 (제1 에스토니아) 및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의 병력과 함께 탄넨베르크 선 전투에서 싸웠다. 1944년 6월 22일, 소비에트 적군은 독일군 중앙군집단을 상대로 동부 전선의 남북 전역에 걸쳐 대공세를 시작했다([바그라티온 작전]). "노르트란트" 사단이 담당하는 발트 전선 북부는 이제 완전한 분단의 위기에 놓였고, 7월 말에는 나르바 전선의 모든 독일군 부대가 나르바 교두보에서 탄넨베르크선(Tannenbergstellung)까지 후퇴했다.

나르바시 서쪽에 위치한 탄넨베르크선은 세 개의 중요한 언덕을 지지대로 삼고 있었으며, 그 언덕들은 서쪽부터 순서대로 '''"고지 69.9"(69.9 Höhe)''', '''"척탄병 언덕"(Grenadierhöhe)''', '''"고아원 언덕"(Kinderheimhöhe)'''이라고 불렸다. 그중에서도 "고아원 언덕"은 나르바시 후방 지역을 방어할 수 있는 중요한 거점이었다.[5] 7월 27일 이후 "노르트란트" 사단은 "고아원 언덕"을 유지하기 위해 육군 정예 전차 사단인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의 슈트라흐비츠 예비역 소장(''Generalmajor der Reserve'' Hyazinth Graf Strachwitz)이 지휘하는 "슈트라흐비츠" 전투단이나, 제6SS 의용 돌격 여단 "랑에마르크"에서 파견된 "레만" 전투단과 연합하여 소비에트 적군과 싸웠다.

탄넨베르크선 전투 기간 동안 "고아원 언덕" 부근에서 소비에트 적군의 대규모 진격은 저지되었고, 7월 29일 시점에서 "노르트란트" 사단이 격파한 적군 전차는 113대에 달했다.[5] 그러나 그 대가로 "노르트란트" 사단은 사단장 프리츠 폰 숄츠SS 중장의 전사를 비롯하여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이 전투 중에 두 연대 지휘관이 사망했다. 최전선을 방문하던 중 사단장 ''그루펜퓌러'' 프리츠 폰 숄츠는 포격에 맞아 머리에 부상을 입었고, 1944년 7월 28일에 사망했다.[5] 폰 숄츠 SS 중장의 전사 후, 새로운 사단장으로 독일 국방군 출신의 요아힘 치글러SS 소장(''SS-Brigf.'' Joachim Ziegler)가 취임했다.[5]

1944년 9월 6일, 제2SS 기갑군단은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 방어를 위해 후퇴할 때까지 전력을 다해 "탄네베르크 선"을 사수했다. 그러나,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리가는 10월 12일에 함락되었고, 10월 말까지 북방 집단군에 소속된 모든 SS 부대가 쿠를란트 반도에 갇혔다. 이후 이 사단은 쿠르란트 포켓으로 알려진 곳으로 후퇴했다. 1944년 10월 말부터 12월까지 ''노르트란트''는 포켓에 남아 있었고, 12월 초 사단 병력은 9,000명으로 줄었다. 1945년 1월, 사단은 발트해 항구 리바우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곳에서 해상으로 대피했다.[3]

1945년 2월 초, 재편성된 제11SS전차대대 "헤르만 폰 잘차"가 복귀했고, 영국 자유 군단을 포함한 증원 병력이 도착했다.

1945년 2월 16일, "노르트란트" 사단은 포메라니아 전선에서 존넨벤데 작전에 참가했다. 초기 공격은 성공적이었고, 이나 강(Ihna) 주변으로 진출했다. 그러나 소련군의 반격으로 진격이 둔화되었고, 2월 17일 포위된 독일군 일부를 구출한 후 방어전을 펼쳤다. 펠릭스 슈타이너 SS 대장은 2월 21일까지 이나 강 북쪽 제방의 부대에 퇴각 명령을 내렸고, "노르트란트" 사단도 퇴각했다. 오데르 강 북부 슈트르가우, 슈테틴에서 제IIISS 기갑군단은 2월 23일부터 2월 28일까지 지연 전술을 펼치며 철수했다.

1945년 3월 1일, 소련군의 공세로 제IIISS 기갑군단의 전력은 더욱 약화되었다. 3월 4일까지 오데르강 근교 알트담(Altdamm, 현 돔비에Dąbie) 교두보로 후퇴하며 소련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노르트란트" 사단은 3월 19일까지 알트담을 유지했으나, 주력 부대인 "단마르크" 연대와 "노르게" 연대가 큰 피해를 입어 오데르강에서 퇴각했다. 이후 재편성을 위해 슈베트-바트 프라인발데 서쪽으로 이동했다.

1945년 4월 16일, 제11SS의용기갑척탄병사단 노르트란트는 제3제국의 수도 베를린 방어 임무를 부여받았다.[6] 최근 보충에도 불구하고, 사단은 여전히 병력이 부족했다.[6] 4월 17일부터 20일까지, 사단은 전선 전체에서 전투를 벌였고, 이후 도시로 후퇴했다.[6]

4월 24일, 소련군의 주 공격은 트레프토 공원 지역으로 향했고, 이곳은 나머지 공병 대대와 기갑 대대의 남은 티거 전차가 방어하고 있었다.[6] 친위대 상급 돌격 지도자 카우쉬는 소수의 전차와 장갑차를 이끌고 반격을 가해 일시적으로 적의 진격을 막는 데 성공했다.[6] 그러나 정오 무렵, 제5충격군은 다시 진격할 수 있었다.[6] 이후 세 대의 돌격포가 가한 반격은 세 개의 노획한 독일군 판처파우스트를 가진 한 명의 소련 병사에 의해 저지되었다.[7]

4월 25일, 여단 지도자 구스타프 크루켄베르크는 노르트란트를 포함하는 (베를린) 방어 구역 C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16] 4월 26일까지, 노이쾰른이 소련 전투 그룹에 의해 심하게 돌파되자, 크루켄베르크는 헤르만 광장 주변의 방어 구역 C 병력을 위한 후퇴 위치를 준비했다. 그는 사령부를 오페라 하우스로 옮겼다. 노르트란트가 헤르만 광장으로 후퇴하면서, 노르트란트와 그 그룹에 배속된 100명의 히틀러 유겐트는 판처파우스트로 14대의 소련 전차를 파괴했다.[8] 할렌제 다리 옆의 기관총 진지 하나가 그 지역에서 소련군의 진격을 48시간 동안 막아냈다.[8]

제11SS의용기갑척탄병사단 노르트란트의 제1/SS PzAA 11의 Sdkfz 223 PanzeSpahwagen 전술 번호 124. 노르트란트가 돌파를 시작한 곳 근처. 베를린, 프랑조시셰 슈트라세, 1945년 7월 3일


소련군의 베를린 진격은 대규모 포격 후, 각각 약 80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전차 호위와 근접 포병 지원을 받는, 건물 정리를 위한 전투 그룹의 공격으로 이어지는 패턴을 따랐다. 4월 27일, 노르트란트 잔존 병력은 방어 구역 Z의 중앙 정부 지구(지타델 부문)로 밀려났다.[10] 크루켄베르크의 사령부는 슈타트미테 U-Bahn역의 차량이었다.[10] 그 후, 정부 지구의 병력은 국회의사당과 총리 관저로 밀려났다.[11][12]

4월 30일, 히틀러의 자살 소식을 들은 후, 탈출할 수 있는 자들은 탈출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 전에 여단 지도자 빌헬름 모른케는 지타델 부문 내에서 연락이 가능한 모든 지휘관에게 히틀러의 죽음과 계획된 탈출에 대한 사건에 대해 설명했다.[13] 총리 관저와 총통 벙커에서의 탈출은 5월 1일 2300시에 시작되었다.[14] 격렬한 전투는 특히 바이덴담 다리 지역에서 계속되었다. 그 지역에서, 사단의 남은 병력은 소련 포병과 대전차포에 의해 파괴되었다. 노르트란트의 마지막 티거 전차는 바이덴담 다리를 건너려다 파괴되었다.[15]

몇몇 소규모 그룹은 엘베 강 서쪽 강변에서 미국인에게 도달했지만, 대부분은 성공하지 못했다. 대부분은 전투에서 사망하거나 소련군에 항복한 후 포로로 잡혔다.[13] 5월 2일, 베를린 방어 지역 사령관 헬무트 바이들링 장군의 명령에 따라 적대 행위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17]

4. 1. 레닌그라드 전선

"노르트란트" 사단은 펠릭스 슈타이너 SS 대장의 제3 게르만 SS 장갑군단에 배속되어 1943년 8월 말 훈련을 위해 크로아티아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끄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의 위협에 시달렸다.

1943년 10월, 무장 친위대의 각 연대에 정식 번호가 부여되면서 "노르트란트" 사단의 장갑척탄병 연대 "노르예"는 제23SS장갑척탄병연대 "노르예"로, "담마르크" 연대는 제24SS장갑척탄병연대 "담마르크"로 개칭되었다. 또한, "노르트란트" 사단은 제11SS 의용 장갑척탄병 사단 "노르트란트"로 개칭했다.

1944년 1월, "노르트란트" 사단은 레닌그라드 전선의 독일 북방군집단(사령관 발터 모델 상급 대장)에 소속되어 오라니엔바움 전선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레닌그라드 근교의 전선에 도착한 후 소비에트 붉은 군대와의 전투에 투입되었다. 1944년 1월 14일, 소비에트 붉은 군대의 공격으로 레닌그라드 포위망이 붕괴되자, "노르트란트" 사단은 오라니엔바움에서 에스토니아의 나르바까지 60km를 전투하며 철수했다.

철수 작전 중이던 1944년 1월 26일, 제11SS기갑정찰대대 제5중대는 구바니치에서 61대의 소비에트 적군 전차와 교전하여 48대를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공적으로 루돌프 자알바흐 SS대위와 게오르크 랑겐도르프 SS소위는 1944년 3월 12일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또한, 네덜란드인 의용병 카스페르 스포르크 SS병장은 11대의 적 전차를 격파하여 2급 철십자 훈장과 1급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4. 2. 나르바 전투

사단은 III SS 기갑 군단과 함께 레닌그라드 인근 전선에 도착하여 독일군의 도시 포위망을 돌파하려는 소련 붉은 군대의 공격에 맞서 싸웠다.[3] 붉은 군대는 노르트란트를 오라니엔바움으로 후퇴시켰다. 1944년 1월 14일, 소련의 크라스노예 셀로-로프샤 공세는 독일 전선을 붕괴시키는 데 성공했다. 후속 킨기세프-고도프 공세는 독일군을 에스토니아 북동부의 도시 나르바로 밀어내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했다.[3]

1944년 2월 초, "노르트란트" 사단의 각 부대는 에스토니아나르바 시 안팎에 포진했다. 나르바에 새롭게 형성된 독일군의 방어선에 대해, 소비에트 붉은 군대는 레닌그라드 전선의 장병 약 20만 명을 투입하여 공격을 시작, 이로 인해 나르바 전투가 시작되었다. 소비에트 붉은 군대는 2월 13일에 전선 정면 공격과 동시에 육해공 공동으로 나르바 서쪽 메레튈라(Mereküla) 근교에서 상륙 작전을 시작했다. 다음 날 독일군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나르바 서쪽에 배치되어 있던 제11SS 장갑 정찰 대대도 공격에 참가했다.[3]

1944년 3월, 소비에트 붉은 군대는 나르바 교량을 붕괴시켜 독일군 부대를 고립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노르트란트" 사단의 공병 대대는 격렬한 포화 속에서 빠르게 가교를 건설했다. 다시 독일군의 방어선은 유지되었고, 소비에트 붉은 군대의 맹공도 약간의 쇠퇴가 시작되었다.

1944년 4월 9일, 제24SS 기갑척탄병 연대 지휘관 헤르메네기르트 폰 베스트팔렌 SS 중령(''SS-Ostubaf.'' Hermenegild Graf von Westphalen)이 나르바 강에 걸쳐 있는 크레인홀름(Kreenholm) 다리 위에서 유산탄에 부상을 입었다. 그는 5월 28일 야전 병원에서 사망했다. 다음 날, 후임 연대장으로 알브레히트 크뤼겔SS 소령 (''SS-Stubaf.'' Albrecht Krügel)이 연대의 지휘를 맡았다.

6월 7일, 소비에트 붉은 군대는 「단마르크」 연대의 전초 기지 「존넨샤인」(Sonnenschein)에 대한 첫 번째 소탕 작전을 시작했지만, 덴마크인 의용병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공격은 실패했다. 이 때, 「단마르크」 연대 제7중대 덴마크인 중대장 모겐스 카를 베르텔센 SS 소위(''SS-Ustuf.'' Mogens Karl Berthelsen)이 전사했기 때문에, 덴마크 의용군 이래의 고참병 레오 마센 SS 소위(''SS-Ustuf.'' Leo Madsen)가 제7중대의 지휘를 맡았다.

6월 12일, 소비에트 붉은 군대의 포격이 크레인홀름 다리 주변의 「단마르크」 연대에 쏟아졌다. 「단마르크」 연대 제7중대의 진지에 적의 공격이 집중될 것으로 예측한 마센 SS 소위는, 연대장 크뤼겔 SS 소령으로부터 지시받은 대로 비상 신호탄을 발사했다. 보급 물자를 다 소모한 제7중대의 진지 앞에 소비에트 붉은 군대가 나타났고, 격전이 벌어졌다. 제7중대의 2명의 소대장은 백병전 중에 전사했다. 에곤 크리스토퍼센SS 상사(''SS-Uscha.'' Egon Christophersen)의 분대는 진지 북부를 담당하며 진지를 유지했다.

레오 마센 SS 소위(「단마르크」 연대 제7중대)가 발사한 신호탄을 확인한 제11SS 포병 연대는 마지막 저지 포화를 돌가야-니바(Dolgaja-Niwa)를 향해 발사했다. 돌가야-니바의 삼림선에서 800미터 지점을 진군하던 붉은 군대 1개 연대는 저지 포화에 노출되어, 소수의 장병들만이 독일군 전선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독일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단마르크」 연대 제9중대, 연대 부속 대전차 소대, 연대 부속 전투 공병과 함께 「단마르크」 연대 제7중대는 출격했다. 크리스토퍼센 SS 상사와 그의 분대는 가장 먼저 반격에 나섰고, 붉은 군대에 점령된 독일군 참호 탈환이라는 목표의 절반을 완료했다. 에곤 크리스토퍼센 SS 상사는 1944년 7월 11일자로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고, 덴마크인으로서는 최초의 기사 철십자 훈장 수훈자가 되었다.

1944년 7월 27일부터 노르트란트는 제20 무장 친위대 척탄병 사단 (제1 에스토니아) 및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의 병력과 함께 탄넨베르크 선 전투에서 싸웠다. 이 전투 중에 두 연대 지휘관이 사망했다. 최전선을 방문하던 중 사단장 ''그루펜퓌러'' 프리츠 폰 숄츠는 포격에 맞아 머리에 부상을 입었다. 숄츠는 1944년 7월 28일에 사망했다. 이후 ''브리게데퓌러'' 요아힘 지글러가 사단 지휘를 맡았다.[5] 이 사단은 쿠르란트 포켓으로 후퇴했다. 1944년 10월 말부터 12월까지 ''노르트란트''는 포켓에 남아 있었고, 12월 초 사단 병력은 9,000명으로 줄었다. 1945년 1월, 사단은 발트해 항구 리바우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곳에서 해상으로 대피했다.[3]

4. 3. 탄넨베르크 선 전투

사단은 III SS 기갑 군단과 함께 레닌그라드 인근 전선에 도착하여 독일군의 도시 포위망을 돌파하려는 소련 붉은 군대의 공격에 맞서 싸웠다.[3] 붉은 군대는 노르트란트를 오라니엔바움으로 후퇴시켰다. 1944년 1월 14일, 소련의 크라스노예 셀로-로프샤 공세는 독일 전선을 붕괴시키는 데 성공했다. 후속 킨기세프-고도프 공세는 독일군을 에스토니아 북동부의 도시 나르바로 밀어내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했다.[3]

1944년 7월 27일부터 노르트란트는 제20 무장 친위대 척탄병 사단 (제1 에스토니아) 및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의 병력과 함께 탄넨베르크 선 전투에서 싸웠다. 1944년 6월 22일, 소비에트 적군은 독일군 중앙군집단을 상대로 동부 전선의 남북 전역에 걸쳐 대공세를 시작했다([바그라티온 작전]). "노르트란트" 사단이 담당하는 발트 전선 북부는 이제 완전한 분단의 위기에 놓였고, 7월 말에는 나르바 전선의 모든 독일군 부대가 나르바 교두보에서 탄넨베르크선(Tannenbergstellung)까지 후퇴했다.

나르바시 서쪽에 위치한 탄넨베르크선은 세 개의 중요한 언덕을 지지대로 삼고 있었으며, 그 언덕들은 서쪽부터 순서대로 '''"고지 69.9"(69.9 Höhe)''', '''"척탄병 언덕"(Grenadierhöhe)''', '''"고아원 언덕"(Kinderheimhöhe)'''이라고 불렸다. 그중에서도 "고아원 언덕"은 나르바시 후방 지역을 방어할 수 있는 중요한 거점이었다.[5] 7월 27일 이후 "노르트란트" 사단은 "고아원 언덕"을 유지하기 위해 육군 정예 전차 사단인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의 슈트라흐비츠 예비역 소장(''Generalmajor der Reserve'' Hyazinth Graf Strachwitz)이 지휘하는 "슈트라흐비츠" 전투단이나, 제6SS 의용 돌격 여단 "랑에마르크"에서 파견된 "레만" 전투단과 연합하여 소비에트 적군과 싸웠다.

탄넨베르크선 전투 기간 동안 "고아원 언덕" 부근에서 소비에트 적군의 대규모 진격은 저지되었고, 7월 29일 시점에서 "노르트란트" 사단이 격파한 적군 전차는 113대에 달했다.[5] 그러나 그 대가로 "노르트란트" 사단은 사단장 프리츠 폰 숄츠SS 중장의 전사를 비롯하여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이 전투 중에 두 연대 지휘관이 사망했다. 최전선을 방문하던 중 사단장 ''그루펜퓌러'' 프리츠 폰 숄츠는 포격에 맞아 머리에 부상을 입었다. 숄츠는 1944년 7월 28일에 사망했다.[5] 폰 숄츠 SS 중장의 전사 후, 새로운 사단장으로 독일 국방군 출신의 요아힘 치글러SS 소장(''SS-Brigf.'' Joachim Ziegler)가 취임했다.[5]

이 사단은 쿠르란트 포켓으로 알려진 곳으로 후퇴했다. 1944년 10월 말부터 12월까지 ''노르트란트''는 포켓에 남아 있었고, 12월 초 사단 병력은 9,000명으로 줄었다. 1945년 1월, 사단은 발트해 항구 리바우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곳에서 해상으로 대피했다.[3]

4. 4. 쿠를란트 포위전

사단은 III SS 기갑 군단과 함께 레닌그라드 인근 전선에 도착하여 독일군의 도시 포위망을 돌파하려는 소련 붉은 군대의 공격에 맞서 싸웠다.[3] 붉은 군대는 노르트란트를 오라니엔바움으로 후퇴시켰다. 1944년 1월 14일, 소련의 크라스노예 셀로-로프샤 공세는 독일 전선을 붕괴시키는 데 성공했다. 후속 킨기세프-고도프 공세는 독일군을 에스토니아 북동부의 도시 나르바로 밀어내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했다.[3]

1944년 7월 27일부터 노르트란트는 제20 무장 친위대 척탄병 사단 (제1 에스토니아) 및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의 병력과 함께 탄넨베르크 선 전투에서 싸웠다. 이 전투 중에 두 연대 지휘관이 사망했다. 최전선을 방문하던 중 사단장 ''그루펜퓌러'' 프리츠 폰 숄츠는 포격에 맞아 머리에 부상을 입었고, 1944년 7월 28일에 사망했다. 이후 ''브리게데퓌러'' 요아힘 지글러가 사단 지휘를 맡았다.[5]

1944년 9월 6일, 제2SS 기갑군단은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 방어를 위해 후퇴할 때까지 전력을 다해 "탄네베르크 선"을 사수했다. 그러나,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리가는 10월 12일에 함락되었고, 10월 말까지 북방 집단군에 소속된 모든 SS 부대가 쿠를란트 반도에 갇혔다. 이후 이 사단은 쿠르란트 포켓으로 알려진 곳으로 후퇴했다. 1944년 10월 말부터 12월까지 ''노르트란트''는 포켓에 남아 있었고, 12월 초 사단 병력은 9,000명으로 줄었다. 1945년 1월, 사단은 발트해 항구 리바우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곳에서 해상으로 대피했다.[3]

4. 5. 포메라니아 전선

1944년 1월 14일, 소련군의 크라스노예 셀로-로프샤 공세로 독일군 전선이 붕괴되었다.[3] 후속 킨기세프-고도프 공세로 독일군은 에스토니아 북동부 나르바로 밀려나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했다.[3] 1944년 7월 27일부터 탄넨베르크 선 전투에서 제20 무장 친위대 척탄병 사단 (제1 에스토니아),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과 함께 싸웠다.[5] 이 전투 중 두 연대 지휘관이 사망했고, 사단장 ''그루펜퓌러'' 프리츠 폰 숄츠도 7월 28일에 사망했다. 요아힘 지글러 ''브리게데퓌러''가 사단 지휘를 맡았다.[5]

이후 쿠르란트 포켓으로 후퇴했고, 1944년 10월 말부터 12월까지 포켓에 남아 있었다. 12월 초 사단 병력은 9,000명으로 줄었고, 1945년 1월, 리바우로 이동하여 해상으로 대피했다.[3] 1945년 2월 초, 재편성된 제11SS전차대대 "헤르만 폰 잘차"가 복귀했고, 영국 자유 군단을 포함한 증원 병력이 도착했다.

1945년 2월 16일, "노르트란트" 사단은 포메라니아 전선에서 존넨벤데 작전에 참가했다. 초기 공격은 성공적이었고, 이나 강(Ihna) 주변으로 진출했다. 그러나 소련군의 반격으로 진격이 둔화되었고, 2월 17일 포위된 독일군 일부를 구출한 후 방어전을 펼쳤다. 펠릭스 슈타이너 SS 대장은 2월 21일까지 이나 강 북쪽 제방의 부대에 퇴각 명령을 내렸고, "노르트란트" 사단도 퇴각했다. 오데르 강 북부 슈트르가우, 슈테틴에서 제IIISS 기갑군단은 2월 23일부터 2월 28일까지 지연 전술을 펼치며 철수했다.

1945년 3월 1일, 소련군의 공세로 제IIISS 기갑군단의 전력은 더욱 약화되었다. 3월 4일까지 오데르강 근교 알트담(Altdamm, 현 돔비에Dąbie) 교두보로 후퇴하며 소련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노르트란트" 사단은 3월 19일까지 알트담을 유지했으나, 주력 부대인 "단마르크" 연대와 "노르게" 연대가 큰 피해를 입어 오데르강에서 퇴각했다. 이후 재편성을 위해 슈베트-바트 프라인발데 서쪽으로 이동했다.

4. 6. 베를린 공방전

1945년 4월 16일, 제11SS의용기갑척탄병사단 노르트란트는 제3제국의 수도 베를린 방어 임무를 부여받았다.[6] 최근 보충에도 불구하고, 사단은 여전히 병력이 부족했다.[6] 4월 17일부터 20일까지, 사단은 전선 전체에서 전투를 벌였고, 이후 도시로 후퇴했다.[6]

4월 24일, 소련군의 주 공격은 트레프토 공원 지역으로 향했고, 이곳은 나머지 공병 대대와 기갑 대대의 남은 티거 전차가 방어하고 있었다.[6] 친위대 상급 돌격 지도자 카우쉬는 소수의 전차와 장갑차를 이끌고 반격을 가해 일시적으로 적의 진격을 막는 데 성공했다.[6] 그러나 정오 무렵, 제5충격군은 다시 진격할 수 있었다.[6] 이후 세 대의 돌격포가 가한 반격은 세 개의 노획한 독일군 판처파우스트를 가진 한 명의 소련 병사에 의해 저지되었다.[7]

4월 25일, 여단 지도자 구스타프 크루켄베르크는 노르트란트를 포함하는 (베를린) 방어 구역 C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16] 4월 26일까지, 노이쾰른이 소련 전투 그룹에 의해 심하게 돌파되자, 크루켄베르크는 헤르만 광장 주변의 방어 구역 C 병력을 위한 후퇴 위치를 준비했다. 그는 사령부를 오페라 하우스로 옮겼다. 노르트란트가 헤르만 광장으로 후퇴하면서, 노르트란트와 그 그룹에 배속된 100명의 히틀러 유겐트는 판처파우스트로 14대의 소련 전차를 파괴했다.[8] 할렌제 다리 옆의 기관총 진지 하나가 그 지역에서 소련군의 진격을 48시간 동안 막아냈다.[8]

소련군의 베를린 진격은 대규모 포격 후, 각각 약 80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전차 호위와 근접 포병 지원을 받는, 건물 정리를 위한 전투 그룹의 공격으로 이어지는 패턴을 따랐다. 4월 27일, 노르트란트 잔존 병력은 방어 구역 Z의 중앙 정부 지구(지타델 부문)로 밀려났다.[10] 크루켄베르크의 사령부는 슈타트미테 U-Bahn역의 차량이었다.[10] 그 후, 정부 지구의 병력은 국회의사당과 총리 관저로 밀려났다.[11][12]

4월 30일, 히틀러의 자살 소식을 들은 후, 탈출할 수 있는 자들은 탈출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 전에 여단 지도자 빌헬름 모른케는 지타델 부문 내에서 연락이 가능한 모든 지휘관에게 히틀러의 죽음과 계획된 탈출에 대한 사건에 대해 설명했다.[13] 총리 관저와 총통 벙커에서의 탈출은 5월 1일 2300시에 시작되었다.[14] 격렬한 전투는 특히 바이덴담 다리 지역에서 계속되었다. 그 지역에서, 사단의 남은 병력은 소련 포병과 대전차포에 의해 파괴되었다. 노르트란트의 마지막 티거 전차는 바이덴담 다리를 건너려다 파괴되었다.[15]

몇몇 소규모 그룹은 엘베 강 서쪽 강변에서 미국인에게 도달했지만, 대부분은 성공하지 못했다. 대부분은 전투에서 사망하거나 소련군에 항복한 후 포로로 잡혔다.[13] 5월 2일, 베를린 방어 지역 사령관 헬무트 바이들링 장군의 명령에 따라 적대 행위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17]

5. 지휘관


  • SS-여단지도자 프란츠 아우크스베르거 (1943년 3월 22일 – 1943년 5월 1일)
  • SS-집단지도자 프리츠 폰 숄츠/Fritz von Scholzde (1943년 5월 1일 – 1944년 7월 27일)
  • SS-여단지도자 요아힘 지글러/Joachim Zieglerde (1944년 7월 27일 – 1945년 4월 25일)
  • SS-여단지도자 구스타프 크루켄베르크/Gustav Krukenbergde (1945년 4월 25일 – 1945년 5월 8일)

취임퇴임계급(당시)성명
1943년 3월 22일1943년 5월 1일SS 소장
SS-여단지도자
프란츠 아우크스부르거
Franz Augsburger
1943년 5월 1일1944년 7월 27일SS 중장
SS-집단지도자
프리츠 폰 숄츠
프리츠 폰 숄츠/Fritz von Scholzde
1944년 7월 27일1945년 4월 25일SS 소장
SS-여단지도자
요아힘 치글러
요아힘 지글러/Joachim Zieglerde
1945년 4월 25일1945년 5월 8일SS 소장
SS-여단지도자
구스타프 크루켄베르크
구스타프 크루켄베르크/Gustav Krukenbergde


6. 전투 서열

제23SS장갑척탄병연대 "노르게" (SS-Panzergrenadier-Regiment 23 "Norge")와 제24SS장갑척탄병연대 "단마르크" (SS-Panzergrenadier-Regiment 24 "Danmark")가 주축이 되었다. 그 외에 제11SS장갑척탄병사단 부속 오토바이연대, 제11SS장갑연대 (SS-Panzer-Regiment 11), 제11SS대전차 사냥꾼대대 (SS-Panzerjäger-Abteilung 11), 제11SS포병연대 (SS-Artillerie-Regiment 11), 제11SS돌격포대대 (SS-Sturmgeschütz-Abteilung 11), 제11SS대공포대대 (SS-Flak-Abteilung 11), 제11SS공병대대 (SS-Pionier-Bataillon 11), 제11SS통신대대 (SS-Nachrichten-Abteilung 11), 제11SS야전보충대대 (SS-Feldersatz-Bataillon 11)가 있었다.

또한 제11SS 사단 수송 소대 사령부 (Kommandeur der SS-Divisions-Nachschubtruppen 11), 제11SS정비대대 (SS-Instandsetzungs-Abteilung 11), 제11SS의무대대 (SS-Sanitäts-Abteilung 11), 제11SS운영대대 (SS-Wirtschafts-Bataillon 11)도 편제에 포함되었다.

나치 독일은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군을 무장친위대 사단으로 개편하면서, 이탈리아 제1연대로 명명하고, 제29무장척탄병사단 SS (이탈리아 제1)로 변경했다.

참조

[1] 서적 Littlejohn (1987)
[2] 기록물 III. (germ.) SS-Panzerkorps, IIa, TB, 31.03.1944, National Archives Microfilm Publication T354, roll 120, frames 3754145 - 3754147
[3] 서적 Littlejohn (1987)
[4] 서적 Radanović (2020)
[5] 서적 Ailsby (1997)
[6] 서적 Beevor (2002)
[7] 서적 Beevor (2002)
[8] 서적 Beevor (2002)
[9] 서적 Beevor (2002)
[10] 서적 Beevor (2002)
[11] 서적 Forbes (2010)
[12] 서적 Beevor (2002)
[13] 서적 Fischer (2008)
[14] 서적 Beevor (2002)
[15] 서적 Beevor (2002)
[16] 서적 Beevor (2002)
[17] 서적 Fischer (2008)
[18] 서적 【歴史群像】W.W.II 欧州戦史シリーズVol.17 武装SS全史I[萌芽・台頭編] 学習研究社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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