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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삼두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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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삼두정치는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카이사르가 맺은 정치적 동맹을 지칭하는 용어이나, 현대 학계에서는 오용되었다고 보아 사용을 지양하는 추세이다. 기원전 60년에 맺어진 이 동맹은 각자의 정치적 목표 달성을 위해 결성되었으며, 카이사르의 집정관 시기에 토지법 통과 등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동맹 내의 갈등과 외부의 반발로 인해 균열이 발생했고, 크라수스의 사망과 폼페이우스의 단독 집정관 선출을 거치며 결국 붕괴, 카이사르의 내전으로 이어졌다. 이 동맹은 로마 공화정의 붕괴를 가속화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로마 정치의 오랜 관행의 연장선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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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삼두정치
지도
제1차 삼두정치
연도기원전 60년 ~ 기원전 53년
유형비공식 정치 동맹
목적로마 공화정의 권력 장악
주요 인물
구성원율리우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배경
당시 로마 상황로마 공화정 말기, 귀족과 평민 간의 갈등 심화
각 인물의 야망카이사르: 군사적 성공과 정치적 영향력 확대
폼페이우스: 동방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영향력 유지
크라수스: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정치적 영향력 강화
동맹 형성
계기세 사람의 정치적 이해관계 일치
특징비공식적 합의, 상호 협력과 지원 약속
주요 활동
카이사르 집정관 선출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지원으로 기원전 59년에 집정관 당선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삼두정치의 힘을 바탕으로 갈리아 원정 성공
삼두정치 연장 시도루카 회담 (기원전 56년),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권력 재확인
몰락 과정
크라수스 사망기원전 53년 파르티아 전투에서 사망, 삼두정치 균형 파괴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대립크라수스 사망 후 권력 다툼 심화
내전 발발기원전 49년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내전 시작
결과
로마 공화정의 붕괴내전 이후 카이사르의 독재 체제 강화, 공화정 붕괴 가속화
제정 로마의 시작카이사르 암살 후 옥타비아누스가 제정 로마 초대 황제 등극

2. 명칭

"제1차 삼두정치"라는 용어는 널리 알려져 있지만, 후기 공화정 시대를 연구하는 현대 학자들은 오용이라고 여겨 사용을 피하고 있다. 십인위원회와 같은 특정 인원으로 구성된 위원회는 로마 행정의 특징이었지만, 이 동맹은 그러한 위원회로 간주되지 않았다. 이 용어는 어떤 고대 자료에도 등장하지 않으며, 공식 직책을 지칭하지 않고, "완전히 그리고 명백하게 잘못된" 용어이다.[1] 고대 세계에서 이 삼자 동맹은 다양한 용어로 불렸다. 키케로는 당시 "세 사람 (''tris homines'')"[1]이 왕권 (''regnum'')을 행사하고 있다고 언급했고,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의 풍자시에서는 "세 머리 괴물"로 불렸다. 수에토니우스티투스 리비우스와 같은 후대의 역사가들은 이 세 사람을 ''societas'' 또는 ''conspiratio''라고 언급했으며, 동맹 관계에 있던 당사자들은 아마도 단순히 ''amicitia''(우정)라고 불렀을 것이다.

"삼두정치(triumvirate)"라는 용어를 이 정치 동맹을 설명하는 데 사용한 것은 르네상스 시대에는 찾아볼 수 없다. 1681년에 처음으로 기록되었고, 18세기에 이르러서야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한동안 이 용어가 현대에 만들어진 용어라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다가 1807년에야 "밝혀졌다". 19세기에는 영어와 프랑스어 자료에서는 주로 사용되었지만, 독일어 자료에서는 사용되지 않았고, 일반적으로 이 용어가 어떤 공식 직책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설명이 덧붙여졌다.

최근에는 학자들이 출판물에서 이 용어를 아예 사용하지 않기 시작했다. 해리엇 플라워는 "로마 공화정(Roman Republics)"에서 "제1차 삼두정치"는 "50년대의 상황을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옥타비아누스의 공식적인 삼두정치와 동일시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고 쓰며, "동맹(alliance)"과 "빅3(Big Three)"를 선호했다. 앤드류 리노트와 리처드 빌로우스의 저서에서도 "제1차 삼두정치"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다른 학자들은 추가적인 이유를 들어 사용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로버트 모어스타인-막스는 2021년 저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로마 사람들(Julius Caesar and the Roman People)"에서 "'제1차 삼두정치'라는 구절을 사용하는 것은 공화정에 대한 일종의 음모였다는 견해를 어떤 형태로든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명명법은 중요하다... 나는 전통적인 '제1차 삼두정치'라는 용어를 완전히 피한다"고 썼다. 일반 독자를 위한 글을 쓰는 고전학자들도 "제1차 삼두정치"라는 용어의 사용을 꺼리고 있다. 예를 들어, 메리 비어드는 2015년 저서 "SPQR"에서 "삼인조(Gang of Three)"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에이드리언 골드스워시와 같이 전통적인 명명법을 유지하면서 그 용어가 부정확하다는 점을 설명하는 학자들도 있다.[2]

예를 들어, "옥스퍼드 고전 사전" 제4판에서는 "기원전 60년에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사이에 형성된 연합은 전적으로 비공식적인 것이었으며, 당시 삼두정치로 불린 적이 없다... '제1차'와 '제2차 삼두정치'는 현대적인 용어이며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3. 역사

기원전 60년 이전 몇 년 동안, 로마 정치의 교착 상태는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카이사르 사이의 동맹이 형성되는 배경이 되었다. 세 사람 모두 각자의 목표를 추구했지만, 원로원민회 내 반대파들에 의해 좌절되었다.[1]

폼페이우스는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승리하고 2년 전에 돌아온 후, 동방 지역에서의 평화협정 비준과 퇴역병들에게 토지를 분배하고자 했다.[2][1] 그러나, 소 카토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켈레르는 폼페이우스가 이전에 루쿨루스를 미트리다테스에 대한 지휘권에서 몰아낸 것, 카토와의 결혼 동맹 실패, 켈레르의 이복 누이와의 이혼, 그리고 폼페이우스의 권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반대 연합을 주도했다.[6][1]

크라수스는 술라의 몰수령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여 로마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9] 그는 로마의 기사 계급 사업가들의 후원자였으며, 폼페이우스와 함께 기원전 70년 집정관을 역임했다.[10] 크라수스는 공공 사업 계약자들이 아시아 속주(오늘날 터키 서부 일부)의 세금 계약에 과도하게 입찰하여 발생한 세금 감면을 요구했으나, 원로원은 이를 좌절시켰다.[11]

카이사르는 기원전 60년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 총독직에서 돌아와 집정관직에 출마했다.[3] 그는 개선식 자격을 포기하고 출마를 선언했는데, 유력한 집정관 후보였던 그를 카토와 그 동맹들이 방해하려 했기 때문이다. 카토 측은 기원전 59년에 선출될 집정관들에게 이탈리아 방어 임무를 맡기고, 카이사르와 협조하지 않는 집정관 동료를 선출하려 했다. 이 두 가지 모두 성공하여, 카이사르는 기원전 59년 집정관으로 선출되었지만, 그의 동료 집정관은 카토의 사위이자 카이사르의 개인적인 적이었던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였다.

카이사르의 집정관 시절, 그의 강압적인 정책과 방식은 여론의 반발을 샀다.[10] 카토비불루스는 카이사르를 폭군으로 몰아세우며 동맹의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데 성공했다.[3] 폼페이우스는 클로디우스의 공격을 받으며 정치적 입지가 약화되었다.[18] 갈리아 전쟁에서 카이사르는 큰 성공을 거두며 인기를 얻었다.[19]

기원전 59년~55년 집정관
연도집정관
전임후임
기원전 59년카이사르
삼두정치 지지
비불루스
삼두정치 반대
기원전 58년피소
카이사르 지지 (온건), 폼페이우스 반대
가비니우스
폼페이우스 지지
기원전 57년스핀테르
폼페이우스 지지 (변절)
메텔루스 네포스
폼페이우스 반대
기원전 56년마르켈리누스
카이사르 반대, 폼페이우스 반대
필리푸스
카이사르 반대, 폼페이우스 반대
기원전 55년폼페이우스
삼두정치 지지
크라수스
삼두정치 지지



기원전 56년, 루카 회담에서 카이사르, 크라수스, 폼페이우스는 동맹을 갱신했다. 이들은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의 공동 집정관직, 카이사르의 군 지휘권 연장 등을 합의했다. 그러나, 마르켈리누스가 이들의 입후보를 거부하면서 정치적 위기가 발생했고, 결국 기원전 56년 선거를 무산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8]

기원전 55년,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폭력을 동원하고 선거를 연기하는 등 강압적인 방법을 통해 공동 집정관에 당선되었다.[8] 이들은 트레보니우스 법을 통해 각각 시리아와 히스파니아 속주를 5년간 할당받았고, 카이사르의 갈리아 임기를 5년 더 연장했다.[20]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에게 할당된 로마 속주


그러나, 동맹에 대한 반대 세력은 법정을 통해 동맹 지지자들을 공격했다.[19] 아울루스 가비니우스는 유죄 판결을 받고 추방되었으며,[19] 율리아의 죽음으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사이의 연결 고리가 약해졌다.[19]

기원전 53년, 카르라이 전투에서 크라수스가 사망하면서 삼두정치는 사실상 붕괴되었다.[10] 로마는 정치적 혼란에 빠졌고, 폼페이우스는 질서 회복을 위해 단독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10]

율리아가 죽었어도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카이사르 사이의 동맹은 바로 무너지지는 않았다.[24] 그러나, 크라수스가 죽으면서, 3인의 동맹은 2인 간의 경쟁으로 바뀌는 전환점이 되었다. 폼페이우스는 다른 정치 집단과의 동맹을 모색했고,[25] 카토는 카이사르의 소환을 주장했다.

기원전 50년, 카이사르의 동맹인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가 호민관으로 선출되었고, 카이사르의 지휘권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지만, 쿠리오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는 서로를 신뢰할 수 없었고, 결국 기원전 49년, 내전이 발발했다.[26]

3. 1. 형성 배경

기원전 60년 이전 몇 년 동안 로마 정치의 교착 상태는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카이사르 사이의 동맹이 형성되는 배경이 되었다. 세 사람 모두 각자의 목표를 추구했지만, 원로원민회 내 반대파들에 의해 좌절되었다.[1]

폼페이우스는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승리하고 2년 전에 돌아온 후, 동방 지역에서의 평화협정 비준을 원했다. 또한 퇴역병들에게 토지를 분배하고자 했다.[2][1]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71년 세르토리우스 전쟁에서 히스파니아로부터 귀환한 후, 퇴역병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법안을 통과시킨 경험이 있었다. 그는 부하들을 로마로 보내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게 하고 관련 법안을 발의하려 했지만, 당시 집정관이었던 키케로가 반대했다.[3] 기원전 62년의 추가적인 시도는 그의 동맹 집정관을 도시에서 탈출하게 만들었다. 기원전 61년 마르쿠스 푸피우스 피소 프루기 칼푸르니아누스를 집정관으로 선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종교적 스캔들 때문에 적절한 토지 재정착 법안을 추진할 수 없었다.[4]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60년에도 그의 부하들을 여러 직책에 선출시켰지만, 이들 역시 좌절을 겪었다.[5] 소 카토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켈레르는 폼페이우스가 이전에 루쿨루스를 미트리다테스에 대한 지휘권에서 몰아낸 것, 카토와의 결혼 동맹 실패, 켈레르의 이복 누이와의 이혼, 그리고 폼페이우스의 권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반대 연합을 주도했다.[6][1] 루쿨루스는 은퇴에서 돌아와 폼페이우스의 동방 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검토를 요구했는데, 이는 법안 통과를 장기간 막는 조치였다.[7] 피소와 아프라니우스 모두 효과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폼페이우스는 다른 곳에서 동맹을 찾아야 했다.[8]

크라수스는 술라의 몰수령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여 로마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9] 그는 로마의 기사 계급 사업가들의 후원자였으며, 폼페이우스와 함께 기원전 70년 집정관을 역임했다.[10] 이들 공공 사업 계약자들은 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의 피해를 고려하지 않고 아시아 속주(오늘날 터키 서부 일부)의 세금 계약에 과도하게 입찰했다.[11] 그의 고객들은 재무부에 납부해야 하는 세금 감면을 요구했고, 이는 기원전 61년 12월 카토와 켈레르에 의해 좌절되었다.[12][1] 키케로와 같은 원로원 의원들은 세금징수인들이 잠재적 이익을 과대평가했기 때문에 계약 재협상이나 취소를 요구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생각했지만, 원로원은 켈레르의 개입 이전에 법안 승인 직전이었다.[13] 폼페이우스의 개인적인 적인 크라수스는 기원전 60년 폼페이우스의 토지법안과 합의안에도 반대하여 하급 원로원 의원들의 지지를 결집하여 폼페이우스의 제안을 무산시켰다.[14] 폼페이우스에 대한 그의 반대는 자신의 목표를 가로막는 원로원 의원들을 설득하려는 시도였을 수 있지만, 성공적이지 못했다.[15] 이러한 세금 계약의 재협상 통과는 크라수스에게 매우 중요했는데, 그의 명성과 영향력은 강력한 기사 계급의 옹호자로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16]

3. 2. 동맹의 형성

기원전 60년 이전 몇 년 동안,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카이사르는 로마 정치의 교착 상태에 직면했다. 이들은 각자 추진하려는 핵심 정책이 있었으나, 원로원민회 내 반대파에 의해 좌절되었다.[1]

폼페이우스는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후, 동방에서의 평화협정 비준과 자신의 노병들에게 지급할 토지를 확보하고자 했다.[2] 그는 기원전 71년 세르토리우스 전쟁 이후 노병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법안을 통과시킨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카토와 메텔루스 켈레르는 폼페이우스가 루쿨루스를 미트리다테스와의 전쟁 지휘권에서 몰아낸 것, 카토와의 결혼 동맹 실패, 그리고 폼페이우스의 권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반대 연합을 주도했다.[3] 이에 루쿨루스는 폼페이우스의 동방 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검토를 요구하며 법안 통과를 지연시켰다.[4]

한편, 크라수스는 술라의 몰수령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로마의 유력자이자, 기사 계급 사업가들의 후원자였다.[5] 그는 아시아 속주의 세금 징수 계약에 과다 입찰한 기사 계급을 위해 세금 감면을 요구했으나, 이 역시 카토와 켈레르에 의해 좌절되었다.[6] 크라수스는 폼페이우스의 토지 법안과 합의안에도 반대하며 폼페이우스의 제안을 무산시켰다.[7] 이러한 세금 계약 재협상은 크라수스의 명성과 영향력에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8]

3. 3. 카이사르의 집정관 시기 (기원전 59년)

카이사르는 기원전 60년 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 총독직에서 돌아와 집정관직에 출마했다.[3] 그는 개선식 자격을 포기하고 출마를 선언했는데, 유력한 집정관 후보였던 그를 카토와 그 동맹들이 방해하려 했기 때문이다. 카토 측은 기원전 59년에 선출될 집정관들에게 이탈리아 방어 임무를 맡기고, 카이사르와 협조하지 않는 집정관 동료를 선출하려 했다. 이 두 가지 모두 성공하여, 카이사르는 기원전 59년 집정관으로 선출되었지만, 그의 동료 집정관은 카토의 사위이자 카이사르의 개인적인 적이었던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였다. 카이사르는 선거에서 쉽게 승리했지만, 속주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비불루스의 방해를 극복하려면 동맹이 필요했다.[3]

3. 4. 동맹의 균열 (기원전 59년 ~ 55년)

카이사르의 집정관 시절, 그의 강압적인 정책과 방식은 여론의 반발을 샀다.[10] 카토와 비불루스는 카이사르를 폭군으로 몰아세우며 동맹의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데 성공했다.[3] 비불루스는 집에 머물면서 카이사르가 견제 없이 도시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고, 이는 대중의 반발을 불러왔다.[10]

폼페이우스는 클로디우스의 공격을 받으며 정치적 입지가 약화되었다.[18] 클로디우스는 폼페이우스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자택에 칩거하게 만들었으며, 종교적인 이유로 카이사르의 법률을 공격했다.[18] 폼페이우스는 키케로의 추방을 막지 못하고, 클로디우스의 공격을 받으며 정치적 입지가 약화되었다.[19]

갈리아 전쟁에서 카이사르는 큰 성공을 거두며 인기를 얻었다.[19] 기원전 57년, 카이사르는 벨가이족 정복을 기념하는 15일간의 감사제를 받았다.[19] 그의 군사적 업적은 로마 내 그의 정치적 동맹이 약화되는 상황 속에서도 그의 인기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기원전 59년~55년 집정관
연도집정관
전임후임
기원전 59년카이사르
삼두정치 지지
비불루스
삼두정치 반대
기원전 58년피소
카이사르 지지 (온건), 폼페이우스 반대
가비니우스
폼페이우스 지지
기원전 57년스핀테르
폼페이우스 지지 (변절)
메텔루스 네포스
폼페이우스 반대
기원전 56년마르켈리누스
카이사르 반대, 폼페이우스 반대
필리푸스
카이사르 반대, 폼페이우스 반대
기원전 55년폼페이우스
삼두정치 지지
크라수스
삼두정치 지지


3. 5. 동맹의 갱신 (기원전 56년)

기원전 56년 여름, 카이사르갈리아 키살피나 전역의 여러 당파 지도자들과 만났다. 그는 라벤나에서 크라수스를 만났고,[4] 갈리아 키살피나 최남단 도시인 루카(이탈리아어)에서 폼페이우스를 만났다.[5] 이 합의는 세 가지 비교적 상호 호환적인 목표에서 비롯되었다.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는 공동 집정관직을 원했고, 좋은 속주 자리를 원했다. 카이사르는 아헤노바르부스의 잠재적인 찬탈을 막기 위해 자신의 군 지휘권 연장이 필요했다.[6]

대부분 하급 관리였던 약 200명의 원로원 의원들이 세 사람에게 접근하여 환심을 사려고 했다.[7] 이 회담은 또한 더 넓은 귀족 사회 전반의 동맹 재평가를 강요했다. 클라우디우스 가문 – 아피우스와 푸블리우스 – 그리고 가이우스 카토는 다시 권력자들 쪽으로 돌아섰다. 폼페이우스 덕분에 망명에서 돌아온 데 대한 의존과 빚을 지고 있던 키케로 역시 수사적 지지를 제공하도록 참여했다.[8] 동맹은 갱신되었고 클라우디우스 풀크리 가문을 포함하도록 확장되어 클로디우스를 반대자에서 지지자로 만들었다.[9] 그들의 도움에 대한 대가로, 동맹국들은 아피우스 – 그들의 지지 없이는 집정관 선거 가능성이 희박했던 –가 기원전 54년 집정관으로 선출되는 목표를 지지할 것이었다.[10] 남은 반대 세력 또한 더욱 활력을 되찾았다. 카토는 기원전 56년 말 키프로스 속주 임무에서 돌아와 도미티우스의 집정관 선거 운동을 지지했다. 기원전 55년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폭력을 통해 공동 집정관직을 맡은 후, 삼두정치 동맹의 정치적 행운은 빠르게 악화되었다.[11]

갱신된 합의의 구체적인 조건을 마련하는 데는 시간이 걸렸을 수 있다. 카이사르는 도미티우스의 집정관직 위협에 대응하여 크라수스에게 출마하여 자신의 군 지휘권을 박탈하려는 어떤 조치도 거부권을 행사하도록 요청했다.[12] 폼페이우스는 아마도 일방적으로 집정관직에 출마하기로 선택했고, 동맹국들의 (전적으로 기꺼운 것은 아니더라도) 지지를 얻었다.[13] 그러나 이러한 합의가 결정될 무렵, 현 집정관인 마르켈리누스는 그들이 마감일을 넘겼다는 이유로 그들의 입후보를 거부했다. 정치적 재앙에 직면하여, 그들은 기원전 56년 "선거 과정 전체를 무산시키기로" 결정했다.[14]

3. 6.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공동 집정관 시기 (기원전 55년)

기원전 56년, 루카 회담에서 합의된 대로, 크라수스폼페이우스기원전 55년의 공동 집정관직을 추구했다.[7] 그러나 현직 집정관인 마르켈리누스가 마감 기한이 지났다는 이유로 이들의 입후보를 거부하면서 정치적 위기가 발생했다.[8] 이에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기원전 56년 선거를 무산시키기로 결정했다.[8]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당선은 불확실했다.[7] 이들은 폭도의 폭력을 조장하고, 가이우스 카토의 도움을 받아 영구적인 민중 트리부누스의 거부권을 행사하여 다음 해까지 선거를 연기했다.[8] 집정관 임기가 만료된 후, 임시 관리가 선거를 주관했고, 카이사르의 군인들이 겨울 휴가를 위해 도착하면서 선거가 치러졌다.[8]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다른 후보들을 몰아내고 뇌물을 뿌려 집정관에 당선되었다.[8] 이들은 선거를 조작하여 동맹 세력을 법무관으로 선출하고 반대파를 배제했다.[7]

이러한 강압적인 전술은 이례적인 것이었지만, 동맹이 집정관직을 확보하지 못하면 정치적으로 몰락할 것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8] 이러한 전술은 일시적인 승리를 가져다주었지만, 장기적으로는 로마 유권자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8]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검열관을 선출하고 배심원 규제 및 뇌물 처벌 법률을 통과시켰다.[20] 가이우스 트레보니우스가 제출한 주요 법률은 5년 동안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에게 각각 시리아와 히스파니아 속주를 할당하는 것이었다.[20] 크라수스는 이집트나 파르티아와의 전쟁을, 폼페이우스는 스페인 내륙 전쟁을 계획했다.[20] 두 명의 트리부누스 동료의 거부권을 우려하여 트레보니우스는 그들 중 한 명을 감금하고 다른 한 명은 포룸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다.[20] 법안 통과 후, 이들은 카이사르의 갈리아 임기를 5년 더 연장하는 법안을 제출했다.[20]

폼페이우스는 폼페이우스 극장 봉헌을 기념하여 호화로운 경기를 개최했다. 카이사르의 브리타니아 원정 소식에 상원은 20일간의 감사제를 승인했다. 반대파 트리부누스들은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의 군대 모집을 방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1월, 폼페이우스의 호위를 받으며 크라수스가 도시를 떠날 때, 이들은 불길한 징조를 알리고 그를 체포하려 했으며 도시 성문에서 저주를 퍼부었다.[20]

그러나 그 해 선거는 동맹에게 매우 불리하게 진행되었다.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의뢰인을 위해 선거 운동을 했지만 실패했다. 유권자들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압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를 당선시켰고, 카토가 법무관으로 당선되어 다음 해 착취 재판을 주재하게 되었다.[20]

3. 7. 반동

동맹에 반대하는 세력은 법정을 통해 동맹 지지자들을 공격했다. 가이우스 포르키우스 카토, 마르쿠스 노니우스 수페나스, 그리고 기원전 57년 폼페이우스파 트리부누스 등 삼두정치 지지자들이 기소되었으나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19] 마르쿠스 아밀리우스 스카우루스 역시 착취 혐의로 재판을 받았으나, 키케로 등 유력 인사들의 변호로 무죄를 선고받았다.[20] 푸블리우스 바티니우스는 뇌물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키케로의 변호로 무죄를 선고받았다.[19]

폼페이우스의 동맹자였던 아울루스 가비니우스는 이집트 공격 관련 뇌물 수수 혐의로 재판을 받았는데, 처음에는 반역죄로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착취죄에 대한 두 번째 재판에서는 유죄 판결을 받고 추방되었다.[19] 이는 그해 유일한 주요 유죄 판결이었다. 가비니우스가 유배된 후, 그의 재정 대리인도 기소되었으나 키케로의 도움으로 무죄를 선고받았다.[19]

이러한 사법적 공격은 대부분 실패했는데, 이는 "상원의원들 사이의 복잡한 관계망 때문에 피고들을 두 정당이나 이데올로기 사이의 극명한 선택으로 줄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19]

한편, 율리아가 출산 중 사망하면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두 사람 사이의 연결 고리가 약해졌다.[19] 카이사르는 자신의 조카딸 옥타비아를 폼페이우스에게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의 거절이 두 동맹자 사이의 결별을 의미하지는 않았다.[19]

3. 8. 폼페이우스의 단독 집정관 시기 (기원전 52년)

기원전 53년, 카르라이 전투에서 크라수스가 사망하면서 삼두정치는 사실상 붕괴되었다.[10] 로마는 정치적 혼란에 빠졌고, 폭동과 무질서가 만연했다. 기원전 52년 초, 집정관들은 후임자를 선출하지 못하고 사임했고, 호민관들은 임시 통치자 선출을 계속 방해했다.[10] 이러한 상황에서 폼페이우스는 질서 회복을 위해 단독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클로디우스가 밀로의 부하들에게 살해당한 후, 폭도들은 원로원 의사당을 불태우는 등 극심한 혼란을 야기했다.[10] 원로원은 ''최후의 원로원 결의''를 통해 폼페이우스에게 군대를 동원하여 질서를 회복할 것을 명령했다.[10] 비불루스와 카토의 지지로 폼페이우스는 단독 집정관에 출마하여 선출되었다.[10]

폼페이우스는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 스키피오의 딸과 결혼하여 메텔루스 가문과의 동맹을 모색했다. 이는 카토와의 관계는 소원하게 만들었지만, 사망한 크라수스의 지지자들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폼페이우스는 군대를 도시로 진입시켜 질서를 확립하고, 밀로를 공공 폭력 혐의로 기소하여 추방했다. 또한, 폼페이우스는 관직과 주지사 파견 사이에 5년의 기간을 두는 법안을 통과시켰지만, 자신은 예외를 두어 스페인에서 5년간의 지휘권을 즉시 확보했다.

3. 9. 붕괴 (기원전 52년 ~ 49년)

율리아가 죽었어도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카이사르 사이의 동맹은 바로 무너지지는 않았다.[24] 그러나 기원전 53년 초, 크라수스가 죽으면서 균형 잡힌 3인 동맹은 2인 간의 경쟁으로 바뀌는 전환점이 되었다. 기원전 52년 폼페이우스는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 스키피오의 딸인 코르넬리아 메텔라와 결혼했는데, 이는 카이사르와의 결별을 의미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정치 집단과 동맹을 맺으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25]

카토는 기원전 51년 집정관에 출마했지만, 뇌물이나 약속 없이 정직한 선거 운동을 벌이고 갈리아에서 카이사르를 소환하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에게 거부당했다. 대신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가 선출되었는데, 마르켈루스는 카이사르의 군 지휘권 박탈을 주장했지만 거부되었다. 폼페이우스 역시 기원전 50년 여름 이전에 카이사르를 제거하는 것은 그의 품위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반대했다.

기원전 50년, 카이사르의 동맹인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가 호민관으로 선출되었고,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가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파울루스는 카이사르에게 뇌물을 받았지만 중립을 지켰다.

기원전 50년 3월,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는 다시 카이사르의 지휘권 문제를 제기했지만, 쿠리오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지휘권을 포기하면 적대적인 집정관들에 의해 출마와 개선식이 거부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폼페이우스를 신뢰할 수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지휘권을 내려놓자는 쿠리오의 제안도 거부되었는데, 폼페이우스는 이를 모욕으로 여겼다. 상원은 이 제안을 압도적으로 승인했지만, 폼페이우스의 거부와 카이사르가 스페인 지휘권을 유지하려는 행동은 신뢰를 갉아먹었다.

폼페이우스의 병 때문에 카이사르와 그의 추종자들은 카이사르가 먼저 지휘권을 포기하면 폼페이우스도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신뢰할 수 없었다. 파르티아에 대항한다는 구실로 카이사르의 갈리아 군대에서 두 개의 군단이 이탈리아로 이동했을 때, 카이사르의 폼페이우스에 대한 신뢰는 다시 흔들렸다.

결국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나 그의 동맹이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신뢰할 수 없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어느 쪽도 상대방이 보복하지 않을까 봐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26] 각 진영은 자신이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확신했고, 상대방이 먼저 양보할 것으로 예상했다. 기원전 49년 1월, 이는 내전으로 급변했다.

4. 평가

amicitiala(우정)으로 불린 이 동맹은 기원전 59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집정관 시절, 동맹 구성원들에게 단기적인 이점을 가져다주었다.[2] 그러나, "협력은 불안정했고, 이전 지지자들의 환멸은… 약화 요인이 되었다."[27] 동맹의 성공은 "반대파 귀족 집단의 결집"을 불러왔다.[27] 이 동맹은 "결코 완전히 안정적이지 않았으며", 갱신과 세 구성원 간의 경쟁이 반복되었다. 이들의 목표는 대체로 기회주의적이고 이기적이었다.[2]

고대부터 이 동맹의 형성은 "공화정 제도의 파괴에 있어 중대한 이정표"였다.[27]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는 그의 내전사를 이 동맹의 형성으로 시작했고, 로널드 사이미의 『로마 혁명』(1939)을 포함한 다른 역사가들도 이를 "자유 국가의 종말"로 보았다.[27] 위르겐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2014년에 "세 사람이 그들의 사적 합의가 로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규정해야 한다는 개념을 생각해낸 적은 없었다. 그 전에는 국가에 대한 그들의 비전을 부과할 필요한 자원과 권력을 가진 세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썼다.[27]

반면, 에리히 그룬은 "59년 정치 파벌의 연합은 정보적인 amicitiala였으며… 로마 정치에서 새로운 것이 아니었고, 이전 수십 년 동안 특징적이었던 집단의 이동성을 강조했을 뿐이다"라고 썼다.[27] 이 동맹은 기원전 100년 사투르니누스와 글라우키아가 조직했던 "정치적 거래"와 유사했다.[27] 에이미 러셀은 동맹이 선거를 지배하지 못한 방식에 초점을 맞추고, 키케로의 regnūmla(왕권) 비난과 폭정에 대한 한탄을 "그들의 반대자들의 수사학에서 유래한 것… 동시에… 그들 [동맹국들]을 분열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고 보았다.[2] 메리 비어드는 이 동맹이 "[호라티우스와 키케로로부터 나온] 그러한 논평이 암시하는 것처럼 완전한 장악이 아니었으며, 세 사람 사이에는 여러 가지 긴장, 불일치 및 경쟁이 있었다"고 말한다.[27]

크라수스 사후, 동맹의 붕괴는 그의 죽음이 남은 두 사람, 즉 폼페이우스와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경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갈리아에서의 카이사르의 군사적 성공과 함께, 그는 더 이상 하급 파트너가 아니었다. 카이사르에 맞설 새로운 동맹을 찾던 폼페이우스는 갈등에 휘말렸다.[2]

참조

[1] 논문 Att. 2.9.2 http://data.perseus.[...] 2015
[2] 논문 2006
[3] 논문 1978
[4] 논문 1995
[5] 논문 2019
[6] 논문 2021
[7] 논문 2021
[8] 논문 2021
[9] 논문 1966
[10] 논문 2021
[11] 논문 1995
[12] 논문 1995
[13] 논문 2017
[14] 논문 1995
[15] 논문 1995
[16] 논문 1995
[17] 논문 1995
[18] 논문 1995
[19] 논문 2017
[20] 논문 2019
[21] 논문 2019
[22] 논문 2019
[23] 논문 1995
[24] 논문 1995
[25] 논문 1995, 2019, 2015
[26] 논문 1992
[27] 서적 Roman Revolution https://books.google[...] Clarendon Press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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