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롱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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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관롱집단은 북위 말 육진의 난 이후 서위의 우문태가 무천진 출신들을 중심으로 관중 지역을 기반으로 결집한 세력을 지칭한다. 이들은 북주, 수나라를 거쳐 당나라 초기에 걸쳐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문무를 겸비한 특징을 보였다. 수나라의 건국과 당나라의 성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나, 측천무후 시기 과거제의 시행과 안사의 난 이후 세력 약화를 겪으며 당나라 후기에 이르러 쇠퇴했다. 관롱집단의 개념에 대한 반론도 존재하며, 황융녠은 당나라 초기에는 이미 해체되었다고 주장한다. 주요 인물로는 우문태, 이호, 독고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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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롱집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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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유형 | 군벌 |
활동 시기 | 6세기 |
활동 지역 | 중국 북부 |
주요 인물 | 우문태 고환 이병 양견 독고신 후막진열 우경칙 왕웅 위효관 양충 우익 한웅 사손무기 조흠 요성 달해무 양소 |
역사적 배경 | |
기원 | 북위 무천진 |
성격 | 북위 말기에서 수나라 초기에 걸쳐 중국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친 군사 집단 |
특징 | 호한 융합 관롱 집단 형성 수당 제국 건립의 기반 |
주요 세력 | |
서위/북주 | 우문태 독고신 이병 후막진열 우경칙 왕웅 위효관 양충 우익 한웅 사손무기 조흠 |
북제 | 고환 달해무 요성 |
영향 | |
정치적 영향 | 수당 제국의 건립 관롱집단 형성 당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에 지대한 영향 |
사회적 영향 | 호한 융합 촉진 북방 문화의 발전 |
관련 용어 | |
관롱집단 | 무천진군벌의 후예들이 형성한 정치 집단 |
팔주국 | 우문태가 설치한 군사 행정 구역 |
2. 역사
북위 육진 중 하나인 무천진 출신들은 북위 말기의 혼란을 틈타 세력을 키웠다. 육진의 난 이후 고환과 우문태가 각각 황제를 옹립하여 북위는 동위와 서위로 분열되었다. 우문태는 무천진 출신들을 모아 군단을 만들고 서위의 지배 집단을 무천진 출신으로 굳혔는데, 이들을 '''관롱집단'''(관롱 귀족 집단)이라고 부른다.
우문태는 부병제를 창시하고 십이대장군·팔주국을 지휘관으로 삼아 무천진 출신자를 임명했으며, 이는 서위와 북주의 지배자 집단이 되었다.
무제는 화북을 통일했지만 남북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병사했다. 뒤를 이은 선제의 기행으로 양견이 정제에게 선양받아 수나라를 건국하고 진을 멸망시켜 중국을 통일했다.[4] 수나라의 지배 집단은 여전히 관롱계였으며, 양견의 황후 독고가라는 팔주국 독고신의 딸이었다.[4] 그러나 문제(文帝)가 북주 황족인 우문씨를 근절시킨 것은 무천진 군벌 내에서 수나라에 대한 불신을 낳았고, 이는 수나라 멸망의 요인이 된다.[4]
수나라 말, 양현감의 반란을 계기로 전국에서 대반란이 일어났고, 팔주국의 후손인 이밀, 이연도 반란에 참여한다. 이연은 관롱계 중에서도 최상급의 혈통을 가지고 있어 관롱 귀족 집단의 강력한 후원을 받아 대흥성(장안)을 함락하고 당나라를 건국했다.[4] 당나라 건국 후에도 지배 집단은 여전히 관롱계였고, 초당의 주요 지위에 오른 사람들 중 관롱계가 다수를 차지했다.
남북조 시대부터 이어져 온 가격에 따른 인간의 상하 사상이 강하게 남아 있었고, 당시 가장 격식이 높다고 여겨지던 것은 산동의 최씨, 노씨, 이씨, 정씨의 4성이었다.[5] 태종은 귀족의 격식을 9등급으로 나누는 『씨족지』 편찬을 명하고, 1등에 당나라 황족인 이씨, 2등에 외척을 두어 관롱계가 최고의 격식임을 "공인"했다.[6]
관롱 귀족 집단의 지배 체제가 무너지는 계기가 된 것은 측천무후에 의한 과거제 출신자 등용이었다. 고종을 옹립하여 전권을 휘두르던 장손무기를 몰아낸 측천무후는 관롱계가 정권을 잡고 있는 것에 불만을 품는 층을 아군으로 만들었다. 측천무후는 과거 출신자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여 자신의 정권을 굳혀갔다.
무주는 측천무후의 노쇠로 좌절되었고, 현종 즉위로 관롱 체제가 부활하는 듯 했다. 현종은 치세 초반에는 측천무후가 등용한 과거 출신자를 사용했지만, 중기 이후에는 명문가 출신인 이임보 등을 등용했다.
그러나 안사의 난·우이의 당쟁 등으로 귀족의 우위가 무너지고, 과거 관료의 진출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황소의 난으로 당나라는 국력을 크게 소모하고, 관롱 집단도 자취를 감추게 된다.
2. 1. 발흥 (북위에서 북주까지)
북위 태무제 연화 연간(432년 ~ 435년)에 유연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수도인 평성(平城, 현재의 산시성 다퉁시) 이북의 장성연선(長城沿線, 현재의 내몽골 자치구 남쪽에서 허베이성 북부 일대)에 여러 개의 진(鎭)을 설치하였다. 그중 비교적 중요한 진은 회삭진(懷朔鎭), 무천진(武川鎭), 무명진(撫冥鎭), 유현진(柔玄鎭), 옥야진(沃野鎭), 회망진(懷荒鎭)의 육진(六鎭), 또는 북진(北鎭)이었다. 북위 조정은 일부 선비 귀족들을 육진으로 옮겨 그들로 하여금 진민(鎭民) 및 무사(武士)가 되도록 하였고, 진민 위에는 진장(鎭將)을 두어 해당 지역의 군사 및 정치를 관할하게 하였다. 당시 육진의 지위는 높아 육진의 진민인 자는 상당한 영예를 누렸으며, 또한 사환(仕宦), 복제(復除, 부역을 면제함) 등의 특권을 누렸다.그러나 북위 효문제 때 수도를 낙양으로 옮기자 육진의 중요성은 예전만 못하게 되었다. 멀리 변경에 있는 육진의 진민들의 한화는 지체되었고, 경제나 문화 부분에서도 점차적으로 약세를 보였다. 또한 효문제의 개혁 정책에 따라 육진이 누리는 특권은 취소되었고, 사회에서 차지하는 계급 또한 대폭 하락하니 도리어 남쪽으로 옮겨가 한화된 선비인들에 비해 차별 대우를 받게 되었다. 조정은 심지어 범죄자를 육진의 병사로 배치시켜 육진을 유배지와 같이 취급하였고, 해당 지역에서 개혁에 반감을 가진 자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북위 선무제 때 육진에 기근이 들자 마침내 육진의 난이 일어났으며, 북위 전국이 심각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육진의 난에서 이득을 취한 회삭진 출신의 한화된 선비인 고환과 무천진 출신 선비인 우문태 두 사람은 각자 황제를 옹립하여 북위를 서위와 동위로 분할하였다. 우문태는 같은 무천진 출신을 금군(禁軍)으로 편성하고 부병제를 실시하였으며, 무천진 출신 인물에게 팔위주국대장군(位柱國大將軍, 약칭 팔주국)과 막하의 십이대장군통령(十二大將軍統領)의 직위를 부여하니 서위의 정권은 완전히 무천진 사람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서위는 관중과 농서 지역을 주요 근거지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우문태는 관중을 위주로 한 정책을 실시하였고, 이에 서쪽으로 옮긴 선비 귀족과 원래 산동(山東, 현재의 산시성, 허베이성, 허난성)에 본적을 둔 일부 사족들로 하여금 관롱으로 본적을 고치도록 하였고, 또한 해당 지역에 원래 있었던 사족들을 중용하여 점차적으로 하나의 새로운 관중사족(關中士族)을 형성하였다. 관중사족은 경조(京兆) 위씨(韋氏), 하동(河東) 배씨(裴氏), 하동 류씨(柳氏), 하동 설씨(薛氏), 홍농(弘農) 양씨(楊氏), 경조 두씨(杜氏)를 대성(大姓)으로 하였다. 팔주국과 관중사족이 바로 관롱집단의 시초이다. 팔주국 가문은 우문씨 일족을 따라 동위에 대항하였으며, 마침내 북주를 건국하여 북제를 멸망시키고 북방을 통일하는 큰 전공을 세웠다. 당나라 대에 이르러서도 사람들 사이에서는 팔주국 가문의 영예가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가 되어, "현재 문벌이라 칭하는 자들은 모두 팔주국 가문을 받드는구나. 당시의 영광이여, 이와 비교할 수 없으리!"라는 말이 있기도 했다.
2. 2. 발전과 전성기 (수나라에서 당나라 전기)
북주 무제는 북제를 멸망시키고 화북을 통일하였으나 남조를 병탄하지는 못하고 병사하였다. 뒤를 이은 선제는 도리에 어긋난 행위를 많이 하였고, 오래지 않아 7살 밖에 안된 아들 정제에게 양위하고 태상황이 되어 향락을 탐닉하였다. 이에 정사는 완전히 천원황후(天元皇后) 양려화(楊麗華)의 부친인 외척 양견에게 넘어가게 되었다.[4] 북주 말기에는 이미 많은 한인(漢人)들이 군사와 장수의 직위를 점하고 있었고, 양견은 손쉽게 정권을 찬탈하여 수나라를 건국하였다. 양견의 부친 양충은 북주의 28대장군(大將軍) 중 하나였고, 양견의 처 독고가라는 팔주국 중 하나인 독고신(獨孤信)의 일곱째 딸이었다. 이를 보아 관롱집단의 각 가문은 혼인을 통해 상호 연계를 강화하였고, 정치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제고한 것이니 결국 수나라가 북주를 대신한 일은 관롱집단 내부의 일차적인 권력 전이에 불과하였다.수나라 말기에 사방에서 병란이 일어났는데, 그중 두 명의 팔주국의 후예, 즉 이호(李虎)의 손자 이연, 이필(李弼)의 증손자 이밀이 병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연의 모친은 독고신의 넷째 딸이었고, 이연 또한 수 문제의 처조카이자 수 양제의 이종사촌형이었으므로 당나라 황실과 관롱집단, 수나라 황실은 실제로 꽤 밀접한 혈연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이연은 이러한 까닭으로 충분히 쉽게 수나라의 수도 대흥을 함락할 수 있었고, 마침내 중국을 재통일하게 된다. 이는 관롱집단의 지지를 쟁취하는 일이 중요한 요소였음을 보여준다.[4] 천인커는 이 사건을 "이씨 당나라 황실은 당나라 300년 통치의 중심이다. 고조, 태종이 창업한 때부터 고종이 다스리는 때까지의 전기(前期)는 그 장상(將相) 및 문무대신들이 대저 서위, 북주, 수나라 이래의 세업(世業)을 계승한 자들로 곧 우문태가 '관중 위주 정책' 하에 결집한 집단의 후예들이다."라고 평가하였다.[4] 관롱집단이 핵심이 되어 기본적으로 수나라에서 당나라 초기까지의 정치 국면과 방향을 주도하였으므로, 이 시기는 문벌정치의 특징이 확연히 드러나며 국가와 정권을 교체하는 사건은 관롱집단의 정치적 지위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다. 수나라 때 이미 과거제가 실시되어 한문(寒門)과 서족사인(庶族士人)들이 점점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했다고는 하나 그 위치를 많이는 드러내지 못했고, 크게 성공하기도 어려웠다.
남북조 시대 이래 사회에서는 문벌(門閥)을 가지고 개인의 지위의 높고 낮음을 평가하고 결정하는 일이 유행하였다. 당나라 초기의 세족인 주요 4대 문벌들은 저마다 중시하는 것이 있었는데, 산동사족(山東士族)들은 혼인을 중시하였고, 강좌사족(江左士族)들은 인물을 중시하였고, 관중사족(關中士族)들은 관면(冠冕)을 중시하였고, 대북사족(代北士族)들은 귀척(貴戚)을 중시하였다.[5] 수많은 세족 가문들 중 산동의 칠성십가(七姓十家), 즉 태원(太原) 왕씨(王氏), 범양(范陽) 노씨(盧氏), 청하(淸河) 최씨(崔氏), 박릉(博陵) 최씨(崔氏), 농서(隴西) 이씨(李氏), 조군(趙郡) 이씨(李氏), 영양(滎陽) 정씨(鄭氏)를 가장 현귀하다고 여겼으며, 심지어 당나라 초기의 명신인 방현령, 위징, 이방(李昉) 등 사람들도 다투어 산동사족들과 혼인할 정도였다. 또한 이들 사족들은 당나라 황실을 대표적인 관롱집단으로 올림으로써 지위를 공고히 하고 세족 가문의 이름 순서를 개편하고자 하는 데 마음을 두었다. 당 태종은 즉위한 뒤 《씨족지(氏族志)》를 열람하고 편성할 때 "나는 최(崔), 노(盧), 이(李), 정(鄭)씨에 대해서는 꺼리는 게 없지만 그들 세족의 쇠퇴함을 돌아보면 면관(冠冕)을 되돌릴 수는 없다. 오히려 옛 땅을 믿고 재물을 취하니, 불초자들이 거만스럽게 스스로 높은 체하는 것이다. 죽과 송가(松槚)를 팔면 되지, 왜 사람들은 그것을 귀하게 여기는 지 이해할 수 없다."라고 불만스럽게 말하기도 했다.[6] 이에 고사렴(高士廉)에게 《씨족지》의 편집을 명하여 천하의 씨족들을 9등(等)으로 나누어 1등은 이씨 당나라 황족, 2등은 외척으로 함으로써 황족은 최고 등급임을 표시하여 사족들을 폄척하고 구 문벌 세력들을 억압하였다.
2. 3. 쇠약과 종결 (무주에서 당나라 후기)
태종이 죽은 뒤 관롱집단의 수장 격인 장손무기는 스스로 당 고종을 옹립한 공을 믿고서 전횡하며 정적을 배척하였다. 그런데 측천무후가 고종의 총애를 얻었고, 고종은 황권 강화를 위해 원래의 황후 왕씨를 폐하고 측천무후를 세우는 등 사건을 연달아 일으켜 이를 이용해 장손무기를 타도하여 정권의 핵심에서 물러나게 만들었다.측천무후는 비록 관롱집단 출신과 관계가 있었지만 선조의 본적이 병주(幷州) 문수현(文水縣, 현재의 산시성 원수이현)에 있어 관롱집단의 전통적인 지리 범위에서 벗어났으므로 가계 상으로 소원하였다. 측천무후의 모친 양씨(楊氏)는 수나라 종실 출신이지만 측천무후의 부친 무사확(武士彠)은 원래 상인으로 고조가 당나라를 세우는 데 공이 있어 봉작을 받았지 관롱집단의 세족 배경이 없었다. 따라서 측천무후는 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당시 당나라의 핵심이었던 관롱집단을 와해시키는 데 착수하여, 그 일환으로 혹리를 채용하였고, 진사(進士), 문사(文詞), 시부(詩賦)의 과(科)를 숭상하였고, 문무(文武)를 분류(分流)하였고, 관롱집단이 정권을 장악한 데 불만을 품은 사인(士人)들을 등용하였다.
당시 과거제는 시행되고 있었지만 향시에 급제한 자로서 고위직에 오른 자가 적었고, 주요 권직은 여전히 관롱집단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에 측천무후는 적극적으로 향시 및 진사에 급제한 자를 임용함으로써 그러한 국면을 곧 타파하였다. 이후 측천무후가 중병에 걸리자 장간지(張柬之) 등은 당 중종을 복위시켜 무주를 폐지하였고, 당나라 황실이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다.
개원 연간(713년 ~ 741년)에 당 현종은 무주 때 승진한 향시 합격자를 계속 임용하였지만 천보 연간(742년 ~ 756년) 이후로는 점차적으로 이림보(李林甫) 등의 세족들을 고위직에 발탁하여 어느 정도 관롱집단의 통치가 회복되었다. 안사의 난, 우이당쟁(牛李黨爭)을 거치면서 관롱집단의 우월적 지위는 급속히 하락하였고, 과거 출신자가 조정의 요직을 차지하는 상황이 갈수록 보편적으로 변했다. 이에 더하여 당나라 후기의 환관들이 정치에 간섭하였고, 심지어 병권을 장악하고 황제를 폐립하는 등의 일은 모두 관롱집단의 영향력을 더욱 쇠약해지게 했다. 황소의 난 이후 수백년을 이어온 사회계급이 당나라의 멸망과 함께 무너지자 전통적인 사족들은 거의 붕괴하였고, 지방의 번진 세력들이 굴기하니 문벌정치는 더 이상 지속되지 않았고, 관롱집단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3. 관롱집단의 특징
한나라 때부터 유학이 중시되고 경학을 통해 관리를 선발하면서, 경학자들이 관료가 되어 자제들에게 학문을 전수하고 대대로 관직을 이어가는 명문 귀족 가문, 즉 사족(士族) 또는 세족(世族)이 나타났다.[4] 조위와 진나라 시대에 구품중정제가 시행되면서 가문의 배경이 중요해졌고, 사족들의 관직 독점과 세습이 강화되었다. 남북조 시대에는 왕조들이 문벌들의 지지에 의존해야 했기에 가문 중시 풍조가 더욱 심해졌고, 이는 관롱집단이 성장하는 기반이 되었다.
우문태는 관롱 지역을 중심으로 서위 정권을 강화하고 동위에 대항하기 위해 관롱 위주의 정책을 펼쳤다.[4] 주나라 이래로 문화의 정통성을 가졌다고 선전하고 효문제의 한화 정책을 계승하여 관중사족을 중용했다. 호한융합의 결과, 우문태를 따라 서쪽으로 들어간 선비인과 선비화된 한인이 한화되었고, 용맹하고 상무적인 풍조가 관중사족에게 스며들어 문무합류(文武合流)와 문무겸비의 기풍이 관롱집단의 큰 특징이 되었다. 이는 관롱집단이 남북조 시대 세족정치에서 빠르게 성장하여 북주, 수나라, 당나라로 이어지는 강력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는 기반이 되었다. 이 시기는 무인정치의 특징을 보였으며, 이후 송나라의 문인정치와는 뚜렷하게 달랐다. 문무겸비 기풍은 무주 시기 과거제가 대두하면서 점차 쇠퇴했다.
4. 관롱집단에 대한 반론
천중몐(岑仲勉)은 관롱집단 개념에 대해 "우문태를 따라 입관한 북족(北族)들이 비록 점점 하남군망(河南郡望)을 경조(京兆)로 고쳤다 하나 당나라 때 이미 그 하남군망을 대부분 회복하였고, 당나라 황실은 실제로는 조군(趙郡)에서 나왔으니 또한 농서에서 어떻게 거리낄 것이 있으며 고치지 않는 것을 견지하였겠는가? 천씨의 설명은 의심스러워 아직 믿을 수 없다.[7]"라고 반대했다. 또 "천씨가 반드시 승유(僧孺), 영호초(令狐楚)를 서위 이래 관롱집단의 밖에서 배출된 것이라고 하겠다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여 자신의 억견을 취하겠다는 것이다.[8]"라고 하였다. 왕롱쭈(汪榮祖)는 천중몐이 천인커가 말한 조주(趙州), 소경(昭慶) 이릉(二陵)과 《광업사비(光業寺碑)》에 대해 반증을 제출하지 못했으니 천인커의 설을 흔들 수는 없다고 하였다.[9]
황융녠(黃永年)은 관롱집단이 서위, 북주, 수나라 초기에만 존재했고, 수 양제 때 정치적 중심지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원래 남조의 관료들이 들어와 북방의 관료들과 견제 및 균형을 이루었으므로 점차 쇠락, 해체되어 당나라 초기에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고 하였다. 당 고조 시기의 공신, 재상 중 관롱 출신인 자는 반수에도 미치지 못하므로 하나의 집단이라고 일컫기에는 부족하다고 하였다.[10]
5. 주요 인물
주요 인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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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위의 종실 | 원흠, 원찬, 원육, 원곽 |
우문태 관련 인물 | 우문태, 우문도(우문태의 조카) |
당나라 관련 인물 | 이호(당 고조 이연의 조부), 이필(이밀의 증조부), 이원 |
수나라 관련 인물 | 독고신(수 문제의 황후 독고씨의 부친, 당 고조 이연의 외조부), 양충(수 문제 양견의 아버지) |
기타 인물 | 조귀, 우근, 후막진숭, 후모진순, 달해무, 두로녕, 우문귀, 하란상, 왕웅 |
6. 같이 보기
참조
[1]
서적
Tangdai Zhengzhishi Shulungao (Expositional Draft of Tang Political History)
1943
[2]
문서
《입이사차기(廿二史箚記)‧권(卷)15》
[3]
문서
《금명관총고2편(金明馆丛稿二编)》
[4]
문서
천인커, 《당대정치사론술고(唐代政治史论述稿)》
[5]
문서
'[唐]柳芳:《姓系論》:山東之人質,故尚婚婭,其信可與也;江左之人文,故尚人物,其智可與也;關中之人雄,故尚冠冕,其達可與也;代北之人武,故尚貴戚,其泰可與也。'
[6]
문서
《舊唐書·卷六十五·列傳第十五》
[7]
서적
隋唐史
https://books.google[...]
文昌書局
[8]
서적
隋唐史
https://books.google[...]
文昌書局
[9]
문서
《천인커평전(陳寅恪評傳)》
[10]
문서
黄永年:《关陇集团到唐初是否继续存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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